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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성 상인과 건망증 도깨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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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킹멘트
"딱 천 냥만 빌려주시오! 내년 보름달이 뜰 때 반드시, 이자까지 쳐서 갚겠소!" 야반도주하던 개성상인 박 서방이 산속 도깨비에게 던진 목숨 건 승부수! 그런데 이 도깨비, 돈을 갚으러 갔더니 자기가 빚을 진 줄 안다? "어제는 미안했네, 내 빚을 갚으러 왔네!" 매일 밤 마당에 금덩이를 던지고 가는 심각한 건망증 도깨비와, 빚 갚으려다 조선 최고의 거부가 된 사내의 기막히고 유쾌한 야담이 지금 시작됩니다!
※ 1: 화마에 휩싸인 전 재산, 그리고 서글픈 야반도주
조선 상업의 중심지이자 물산이 가장 풍부하게 모여들던 번화한 도시 개성, 그곳에서도 가장 크고 으리으리한 규모를 자랑하던 박 서방의 상단에 붉은 재앙이 닥친 것은 뼈가 시리도록 차가운 겨울바람이 몹시도 불어오던 어느 늦은 밤이었습니다. 천하의 개성상인들 중에서도 셈이 가장 빠르고 신용이 두터워 약관의 나이에 거상의 반열에 올랐던 박 서방이었습니다. 그의 거대한 창고 세 동에는 내일 아침 동이 트자마자 청나라 상인들에게 막대한 이문을 남기고 넘길 최고급 산삼과 녹용, 그리고 햇빛을 받으면 눈이 부시도록 윤기가 흐르는 명주 비단들이 천장까지 빈틈없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습니다. 그 엄청난 물화들은 박 서방이 지난 수년 동안 밤잠을 설쳐가며 전국 팔도를 직접 발로 뛰고, 때로는 험한 산적들을 피해가며 피땀 흘려 모아 온 그의 분신이자 목숨과도 같은 재산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늘은 이 젊고 유능한 상인의 눈부신 성공을 시기라도 한 것일까요. 어디서 어떻게 시작되었는지 모를 작은 불씨 하나가 매서운 겨울의 똥바람을 타고 순식간에 창고 지붕으로 옮겨붙더니, 이내 걷잡을 수 없는 거대한 화마로 변해 하늘을 붉게 물들이며 상단 전체를 집어삼키기 시작했습니다.
"불이야! 창고에 불이 났다! 어서 물을 가져와라, 어서!"
수십 명의 일꾼들이 혼비백산하여 우물가로 달려가 양동이에 물을 퍼 나르며 발을 동동 굴렀지만, 이미 기름을 먹인 마룻바닥과 건조한 약재들에 옮겨붙은 불길은 사람의 힘으로는 도저히 어찌할 수 없는 거대한 괴물처럼 맹렬하게 타올랐습니다. 타닥타닥, 쩍쩍! 육중한 소나무 기둥이 불길에 휩싸여 숯덩이로 변해가며 비명처럼 끔찍한 소리를 내며 갈라졌고, 수만 냥어치의 최고급 비단들이 시커먼 연기를 내뿜으며 한 줌의 허무한 재로 바스라져 허공으로 흩어졌습니다. 박 서방은 겉옷조차 제대로 걸치지 못한 채 뛰쳐나와 그 참혹한 광경을 두 눈으로 똑똑히 목도해야만 했습니다. 시뻘건 불기둥이 자신의 모든 과거와 현재, 그리고 눈부시게 빛날 줄 알았던 미래까지 모조리 태워버리는 모습을 보면서도 그는 차마 불길 속으로 뛰어들지 못하고 그저 넋을 잃고 털썩 주저앉아 버렸습니다. 눈앞에서 수만 냥의 재산이 타들어 가는 냄새는 맵고도 지독했습니다.
'아아, 하늘도 무심하시지... 어찌하여, 어찌하여 내게 이런 가혹한 시련을 내리신단 말인가. 내일이면 청국으로 떠나야 할 귀한 물건들인데, 이리 허무하게 한 줌의 재가 되어버리다니... 내 이제 무슨 낯으로 세상을 살아가며, 빚을 끌어다 쓴 객주들에게는 또 무어라 변명을 한단 말인가!'
날이 채 밝기도 전에, 개성 바닥에는 박 서방의 상단이 잿더미가 되었다는 소문이 흉흉하게 퍼져나갔습니다. 평소 박 서방의 인품과 신용을 칭송하며 앞다투어 물건을 대주고 돈을 빌려주던 객주와 전주들은, 하루아침에 전 재산을 잃고 알거지가 된 그를 더 이상 믿어주지 않았습니다. 동이 트기가 무섭게 그의 집 대문 앞에는 수십 명의 빚쟁이들과 그들이 고용한 험악한 왈패들이 몰려들어 장사진을 이루었습니다. 굳게 닫힌 대문을 부술 듯이 두들겨대는 소리와 입에 담기조차 힘든 험악한 욕설들이 담장을 넘어와 박 서방 부부의 목을 잔인하게 조여왔습니다.
"어이, 박 서방! 안에 숨어있는 거 다 아니까 썩 나오지 못해? 우리가 뉘 집 개 이름인 줄 아느냐! 오늘 당장 빌려 간 돈을 이자까지 쳐서 내놓지 않으면, 네놈의 목숨을 거두어 가고 네 아내를 청나라에 노비로 팔아서라도 빚을 받아내고야 말 테다!"
개성 바닥에서 오직 신용 하나로 지금의 자리에 올랐던 그였기에, 돈 앞에서 한순간에 표변하여 자신을 죽이려 드는 사람들의 냉혹함은 불에 탄 창고보다 더 끔찍한 절망으로 다가왔습니다. 두려움에 사시나무 떨듯 떠는 아내의 창백한 얼굴을 바라보던 박 서방은 결단을 내려야만 했습니다. 이대로 있다가는 정말로 뼈도 추리지 못할 것이 분명했습니다. 결국 박 서방은 피눈물을 삼키며 아내의 손을 굳게 잡고, 사람들의 눈길이 미치지 않는 담장 뒷구멍을 통해 비참한 야반도주를 감행했습니다. 뼛속까지 시린 차가운 겨울밤, 평생을 바쳐 일군 개성을 등지고 쫓기듯 도망치는 부부의 손에 들린 것이라곤 비상금으로 챙겨둔 엽전 몇 닢과 다 해진 옷가지가 전부였습니다. 뒤를 돌아볼 여유조차 없었습니다. 행여나 왈패들이 횃불을 들고 쫓아올까 두려워, 부부는 인적이 드물고 산짐승이 출몰한다는 소문이 자자한 가장 험하고 가파른 산길로 접어들며 어둠 속으로 몸을 숨겼습니다.
※ 2: 깊은 산속 버려진 사당, 어둠 속의 거대한 그림자
빚쟁이들의 서슬 퍼런 추격을 피해 정신없이 산길을 오르다 보니 어느덧 자정을 훌쩍 넘긴 깊은 밤이 되었습니다. 나뭇가지에 걸린 둥근 달만이 이정표가 되어주는 칠흑 같은 험산이었습니다. 평생 장부만 만지며 살아온 상인 부부에게 겨울산의 야밤은 상상조차 해본 적 없는 공포 그 자체였습니다. 날카로운 나뭇가지가 옷을 찢고 얼굴과 팔다리를 할퀴어 붉은 피가 배어 나왔고, 급하게 신고 나온 짚신은 진작에 다 해져 꽁꽁 언 흙바닥에 부딪힐 때마다 살점이 떨어져 나가는 듯한 고통이 밀려왔습니다. 멀리서 들려오는 이름 모를 산짐승들의 스산한 울음소리가 귓가를 때릴 때마다 두 사람의 심장은 덜컥 내려앉았습니다. 끝없이 이어질 것만 같던 가파른 산등성이를 넘자, 기진맥진하여 숨을 헐떡이던 아내의 눈앞에 희미한 달빛을 받아 스산하게 모습을 드러낸 낡은 기와지붕 하나가 들어왔습니다.
"여, 여보... 저기 저곳에... 사람의 흔적이 있는 것 같아요..."
아내의 떨리는 손끝을 따라 시선을 옮긴 박 서방의 눈에 들어온 것은, 아주 오래전 이 근방을 지나는 나그네들이나 산신에게 제를 올리기 위해 지어졌다가 지금은 아무도 찾지 않아 버려진 듯한 허름한 사당이었습니다. 기와지붕은 반쯤 무너져 내려 구멍이 숭숭 뚫려 있었고, 처마 밑의 단청은 색이 다 바래어 귀기가 서려 있는 듯했습니다. 출입문을 막아주어야 할 문짝은 오랜 비바람에 삭아 한쪽으로 위태롭게 기울어져 있었고, 그 틈 사이로 산바람이 들이닥치며 마치 귀신이 우는 듯한 기괴한 소리를 내고 있었습니다. 평소 같았으면 털끝이 쭈뼛 서서 근처에도 가지 않았을 폐가였지만, 당장 추위와 피로에 지쳐 쓰러지기 일보 직전인 부부에게는 찬 이슬이라도 피할 수 있는 유일한 안식처였습니다. 박 서방은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으려는 아내를 부축하여 사당 안으로 조심스럽게 발걸음을 옮겼습니다.
사당 안은 밖보다 더 차갑고 음습한 기운이 감돌았습니다. 바닥에는 켜켜이 쌓인 먼지와 마른 나뭇잎들이 뒹굴고 있었고, 퀴퀴한 곰팡내와 짐승들의 배설물 냄새가 코를 찔렀습니다. 박 서방은 서둘러 사당 안쪽 가장 구석진 곳, 바람이 덜 닿는 벽면 쪽으로 마른 나뭇잎들을 긁어모아 푹신하게 자리를 만들고는 아내를 눕혔습니다. 자신이 입고 있던 겉옷마저 벗어 아내에게 덮어준 그는, 기울어진 문짝을 힘껏 끌어당겨 억지로 세워두며 매섭게 파고드는 겨울바람을 조금이라도 막아보려 안간힘을 썼습니다. 추위와 공포, 그리고 전 재산을 잃었다는 상실감에 지칠 대로 지친 아내는 눈물을 훔칠 새도 없이 금세 까무러치듯 얕은 잠에 빠져들었습니다. 박 서방은 홀로 깨어 뚫린 지붕 사이로 스며드는 처량한 달빛을 하염없이 바라보았습니다.
'내 어쩌다 이 지경이 되었는가... 조선 팔도를 호령하며 개성 제일의 거상이 되겠다던 호기로운 꿈과 포부는 다 어디로 가고, 이 인적 없는 깊은 산속 폐가에 숨어 쥐새끼처럼 밤이슬을 피하는 처량한 신세가 되었단 말인가. 저 가엾은 사람을 호강시켜 주지는 못할망정 이 차가운 바닥에 눕혀두다니, 나는 참으로 무능하고 몹쓸 지아비로구나.'
뼈아픈 자책과 후회가 밀려와 소리 죽여 오열하던 바로 그 순간이었습니다. 적막으로 가득 차 있던 깊은 산속의 공기가 일순간 무겁게 가라앉더니, 사당 밖에서 기이하고 육중한 발걸음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습니다. 쿵, 쿵, 쿵. 그것은 결코 사람의 발소리가 아니었습니다. 짐승이라고 하기에도 믿기 힘들 만큼 거대한 무게감이 땅을 진동시켰고, 발걸음이 사당을 향해 한 발짝씩 다가올 때마다 낡은 기둥과 서까래가 미세하게 떨리며 흙먼지가 우수수 떨어져 내렸습니다. 숨을 헐떡이던 박 서방의 온몸에 소름이 돋고 핏기가 싹 가셨습니다.
"어흐흥... 이게 무슨 냄새냐. 퀴퀴한 짐승 똥 냄새 사이로 아주 달짝지근하고 구수한 사람의 체취가 섞여 있구나. 한동안 인간 놈들 고기를 맛보지 못해 입이 심심하던 차였는데, 오늘 밤엔 아주 부드러운 안주거리가 제 발로 내 구역에 굴러들어 왔어."
동굴 전체를 긁어대는 듯한 거칠고 기괴한 쇳소리가 사방을 쩌렁쩌렁 울렸습니다. 박 서방이 공포에 질려 덜덜 떨리는 손으로 기울어진 문짝의 틈새를 엿보는 순간, 짙은 구름에 가려져 있던 달빛이 서서히 드러나며 사당 앞마당을 환하게 비추었습니다. 그리고 그곳에는 인간의 상상을 초월하는 거대한 괴물이 우뚝 서 있었습니다. 키는 마을 어귀에 서 있는 커다란 장승보다 컸고, 머리 위로는 짐승의 뼈처럼 단단하고 뭉툭한 뿔이 무시무시하게 솟아 있었습니다. 상반신은 헐벗은 채 짐승의 가죽만을 아무렇게나 두르고 있었는데, 그 굵은 팔뚝과 가슴에는 흉측한 털이 수북하게 덮여 있었습니다. 무엇보다 박 서방을 공포에 떨게 만든 것은, 어둠 속에서도 누렇게 빛을 발하며 탐욕스럽게 사당 안을 번득이는 두 눈동자와 그 손에 꽉 쥐어져 있는, 가시가 돋친 집채만 한 육중한 쇠방망이였습니다. 산속의 왕이라는 호랑이조차 한 손으로 때려잡을 법한, 전설 속에서나 듣던 무시무시한 산도깨비가 바로 눈앞에 나타난 것입니다.
※ 3: 상인의 배포, 도깨비와의 기막힌 천 냥 거래
사당 앞마당을 쿵쿵 울리며 맴돌던 거대한 도깨비가 마침내 참을성이 다한 듯 성큼성큼 다가와 바람을 막고 있던 낡은 문짝을 단숨에 발로 걷어찼습니다. 우당탕탕, 콰직! 하는 엄청난 파열음과 함께 썩은 나무 문짝이 산산조각이 나며 날아갔고, 사당 안의 초라한 모습이 달빛 아래 훤히 드러났습니다. 도깨비의 누렇고 번뜩이는 커다란 눈동자가 잔뜩 몸을 웅크린 채 덜덜 떨고 있는 박 서방 부부를 정확히 훑어내렸습니다. 도깨비는 입맛을 쩝쩝 다시며 가시 돋친 방망이를 어깨에 툭툭 쳤습니다.
"흐흐흐, 삐쩍 마른 사내놈과 계집이로구나. 기름기가 없어 잡아먹기엔 살이 턱없이 부족해 보이지만, 뼈째로 씹어 넘기는 오독오독한 맛은 제법 있겠어. 어디, 사내놈부터 먼저 내 입속으로 들어와 보거라!"
도깨비가 쩍 갈라진 입을 벌리며 흉흉한 기운을 뿜어내는 순간, 박 서방의 머릿속은 하얗게 백지장처럼 변해버렸습니다. 그러나 인간의 본능이란 참으로 기이한 것이어서, 절대적인 죽음의 공포가 극에 달하자 오히려 역설적으로 밑바닥에 숨겨져 있던 지독한 오기가 치솟아 올랐습니다. 어차피 이대로 산을 내려가 봐야 빚쟁이들의 몽둥이에 맞아 비참하게 죽을 목숨이었고, 여기서 도깨비의 입속에 들어가 씹혀 죽으나 죽는 것은 매한가지라는 절망감은 그를 미치게 만들었습니다. 그 순간, 평생을 상장부와 이문 속에서 치열하게 살아온 개성상인의 피가 절체절명의 위기 속에서 끓어올랐습니다. 박 서방은 사시나무 떨듯 떨리는 두 다리에 젖 먹던 힘까지 꽉 쥐어짜 내어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습니다. 그리고는 도깨비의 누런 눈을 정면으로 부릅뜨고 마주 보며 목에 핏대를 세우고 고함을 질렀습니다.
"자, 잡아먹으려거든 당장 잡아먹어 보시오! 하지만, 그 전에 내 말부터 똑똑히 들어보시오! 당신, 전설로만 듣던 도깨비라면 방망이를 두드려 번쩍이는 금은보화를 산더미처럼 뚝딱 만들어낼 수 있는 비상한 재주가 있지 않소?"
금방이라도 자신을 물어뜯을 줄 알았던 나약한 인간이 갑자기 눈에 쌍심지를 켜고 호통을 치자, 도깨비는 짐짓 당황한 듯 방망이를 든 채 눈을 끔벅거렸습니다. 인간들의 비굴한 살려달라는 애원만 들어왔던 도깨비에게, 겁에 질려 바지에 오줌을 지릴망정 꼿꼿하게 서서 삿대질을 해대는 박 서방의 모습은 무척이나 흥미롭고 신선하게 다가왔습니다.
"오호라? 이 조그만 놈 보게나. 감히 도깨비 앞에서 배짱을 부려? 호랑이 앞의 하룻강아지도 너보다는 덜 짖겠다. 그래, 네놈 말대로 내가 맘만 먹으면 천하의 금은보화를 이 사당 지붕이 뚫어지도록 쌓아둘 수 있는 재주가 있긴 하지. 근데 그건 갑자기 왜 묻느냐? 황천길 가는 노잣돈이라도 두둑하게 챙겨달라는 것이냐?"
"나... 나는 본래 저 아래 개성 바닥에서 제일가는 거상이었던 사람이오! 억울하고 원통한 화재로 하루아침에 재산을 모두 잃고 이리 짐승처럼 쫓기는 신세가 되었지만, 내게 다시 장사할 밑천만 주어진다면 당장 내일이라도 다시 조선 제일의 부자가 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상인이란 말이오! 나같이 비쩍 곯은 놈을 잡아먹어 봐야 당신 그 큰 배에 기별도 안 갈 텐데, 헛수고하지 말고 나와 내기 같은 거래를 한 번 해보는 것이 어떻소!"
박 서방의 당돌한 제안에 도깨비는 어이가 없다는 듯 껄껄껄 웃음을 터뜨렸습니다. 그 굉음에 겨울 산의 마른 나뭇가지들이 부러지고 잠자던 산새들이 놀라 후드득 날아올랐습니다.
"거래? 하하하! 한낱 미물 같은 인간 놈이 도깨비와 감히 거래를 하겠다고? 그래, 백 년 만에 참으로 재밌는 놈을 만났구나. 어디 한번 들어나 보자. 봇짐 하나 없는 빈털터리 주제에 어찌하자는 것이냐?"
"내게 딱 천 냥! 딱 천 냥만 빌려주시오! 내가 그 돈을 밑천 삼아 한양으로 올라가 장사를 아주 크게 벌일 것이오. 내 개성상인의 자존심과 목숨을 걸고 장담하건대, 정확히 일 년 뒤 내년 이맘때 둥근 보름달이 환하게 뜰 때 이곳 사당으로 다시 돌아와 당신에게 빌린 원금 천 냥은 물론이고, 목숨을 살려준 두둑한 이자까지 합쳐서 한 치의 오차도 없이 갚아내겠소. 내 목숨을 걸고 하늘에 하는 맹세니, 부디 나라는 상인의 가치를 한번 믿고 투자해 보시오!"
식은땀을 비 오듯 뻘뻘 흘리며 핏대를 세우는 박 서방의 두 눈동자에는 벼랑 끝에 선 자의 처절한 절박함과 동시에, 장사에 대한 기묘한 확신이 서려 있었습니다. 도깨비는 턱의 거친 털을 쓰다듬으며 박 서방을 위아래로 흥미롭게 훑어보았습니다. 그동안 수많은 인간들의 간사한 거짓말과 변명을 보아온 도깨비였지만, 이 맹랑한 사내의 흔들림 없는 눈빛만큼은 결코 얄팍한 거짓이 아니라고 직감했습니다.
"좋다! 내 평생 너같이 배포가 크고 미친 인간은 처음 본다. 네놈의 그 건방진 눈깔이 마음에 들었으니 내 특별히 천 냥을 빌려주마. 허나 명심하거라! 내년 보름달이 뜰 때 네놈이 약속을 어기고 나타나지 않거나 돈을 갚지 않는다면, 네놈뿐만 아니라 네 놈의 아내와 식솔들까지 지옥 끝까지 쫓아가서 모두 내 쇠방망이 맛을 보게 될 것이다! 뼈도 추리지 못할 줄 알아라!"
도깨비가 허공에 대고 육중한 방망이를 크게 한 번 휘두르며 "금 나와라, 은 나와라, 뚝딱!" 하고 호통을 치자, 믿을 수 없는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텅 비어있던 사당 바닥 한가운데로 눈이 부시게 번쩍이는 금괴와 엽전 꾸러미들이 마치 소나기처럼 수북하게 쏟아져 내리기 시작한 것입니다. 챙그랑, 챙그랑 부딪히는 맑은 금속음이 사당 안을 가득 채웠습니다. 박 서방은 눈앞에 펼쳐진 엄청난 기적에 숨을 헐떡이면서도, 재빠르게 차가운 흙바닥에 납작 엎드려 도깨비를 향해 연거푸 큰절을 올렸습니다.
"가, 감사합니다!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이 은혜는 뼈에 새기겠습니다. 내년 보름달이 뜰 때 반드시, 기필코 이자를 쳐서 갚으러 오겠소!"
소란스러운 소리에 잠에서 깬 아내가 어리둥절하고도 경악스러운 표정으로 바닥에 쏟아진 금은보화를 멍하니 바라보는 사이, 도깨비는 "잊지 마라, 일 년 뒤다!"라는 호탕한 웃음소리만을 남긴 채 짙은 산안개 속으로 유유히 모습을 감추었습니다. 박 서방은 피가 나는 것도 모른 채 떨리는 두 손으로 차가운 금괴들을 쓸어 안으며 마음속 깊이 다짐하고 또 다짐했습니다. 반드시 한양에서 크게 성공하여 살아남아, 이 은혜와 빚을 완벽하게 갚아내고야 말겠다고 말입니다. 그것이 바로 전설적인 개성상인과 건망증 도깨비 사이의 길고도 유쾌한 '뫼비우스의 빚'이 시작되는 역사적인 순간이었습니다.
※ 4: 한양을 뒤흔든 인삼 장수, 신용으로 일궈낸 대성공
도깨비가 허공에서 뚝딱 만들어내어 사당 바닥에 쏟아부어 준 천 냥이라는 거금은, 벼랑 끝에 내몰려 목숨을 포기하려 했던 박 서방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꿔놓을 기적의 씨앗이자 구원의 동아줄이었습니다. 박 서방 부부는 매서운 산바람을 맞으면서도 품속 깊숙한 곳에 금괴와 엽전 꾸러미를 단단히 숨긴 채, 빚쟁이들의 끈질긴 눈을 피해 밤낮없이 걷고 또 걸어 조선 상업의 최대 중심지인 한양으로 향했습니다. 얼어붙은 땅을 밟느라 발바닥이 참혹하게 부르트고 짚신이 몇 번이나 피투성이로 해어지는 고된 여정이었지만, 부부의 눈동자에는 더 이상 어제의 끔찍했던 절망과 공포가 아닌 내일을 향한 뜨거운 희망의 불꽃이 이글거리며 타오르고 있었습니다. 며칠 밤낮을 걸어 마침내 한양 도성에 도착한 박 서방은, 장안에서 가장 화려하고 번화한 운종가의 번듯한 상점 대신 변두리의 낡고 허름한 창고 하나를 빌려 아주 조촐하게 상단을 꾸렸습니다. 도깨비에게 목숨을 담보로 빌린 피 같은 돈은 단 한 푼도 허투루 사치에 쓸 수 없다는 개성상인 특유의 철저한 계산과 굳은 결의 때문이었습니다.
'이 돈은 내 목숨과 바꾼 돈이다. 도깨비와의 무서운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그리고 나를 믿고 기다려주는 아내를 위해서라도 반드시 이 천 냥을 만 냥, 십만 냥으로 불려내어 완벽하게 재기해야만 한다.'
박 서방이 단 한 번의 기회로 승부수를 띄운 품목은 바로 조선의 영약이라 불리는 '인삼'이었습니다. 당시 한양에는 국경을 넘어 명나라와 청나라로 넘어가는 대규모 밀무역과 사신단을 통한 공무역이 성행하고 있었고, 그중에서도 약효가 뛰어난 최상급 조선 인삼은 그야말로 부르는 게 값인 황금보다 귀한 작물이었습니다. 박 서방은 과거 개성에서 거상으로 활동하며 쌓아두었던 전국적인 인맥과, 질 좋은 약재를 단번에 감별해 내는 타고난 탁월한 안목을 총동원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한양에 가만히 앉아 물건을 받는 대신, 직접 험한 산세를 타고 전국의 이름난 심마니들을 찾아다니며 남들보다 두 배의 웃돈을 얹어주고서라도 가장 뇌두가 굵고 잔뿌리가 실한 최상급 인삼만을 싹쓸이하듯 매입했습니다. 다른 상인들이 조금이라도 더 많은 이윤을 남기기 위해 하급 인삼을 교묘하게 섞어 팔거나 무게를 속일 때, 박 서방은 오직 최상급 인삼만을 고집하며 투명하고 정직하게 장사했습니다. 처음에는 저렇게 퍼주다가는 금방 망할 거라며 바보 같은 짓이라고 손가락질하던 한양의 주변 상인들도, 한 달 두 달 시간이 흐르자 그의 진정한 가치를 알아보기 시작했습니다.
"이보게들, 박 서방네 상단에서 나온 인삼은 밤중에 눈을 감고 사도 절대 속는 법이 없어! 까다롭기로 소문난 청나라 상인들조차 박 서방의 물건이라면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값을 두 배로 쳐준단 말이지. 그 집 물건을 못 구해서 안달이야!"
신용과 정직이라는 이름의 소문은 발 없는 말이 되어 한양 바닥을 넘어 의주 국경까지 빠르게 휩쓸었습니다. 이문을 남기기 전에 사람을 남기고, 물건을 팔기 전에 신용을 판다는 그의 굳건한 철학이 빛을 발한 것입니다. 콧대 높기로 소문난 역관들과 내로라하는 거상들이 앞다투어 박 서방의 허름한 창고 앞을 가득 메웠습니다. 물건이 창고에 들어오기가 무섭게 팔려나가 없어서 못 파는 지경에 이르자, 박 서방의 재산은 그야말로 눈덩이처럼 거대하게 불어나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개성상인 특유의 정교한 복식부기인 '사개송도치부법'을 활용해 수만 냥이 오가는 장부를 단 한 치의 오차도 없이 꼼꼼하게 관리했고, 벌어들인 막대한 돈은 개인의 호의호식에 쓰지 않고 다시 질 좋은 인삼밭을 매입하고 전국적인 유통망을 뚫는 데 아낌없이 재투자했습니다.
어느덧 매서웠던 겨울이 지나고 꽃 피는 봄과 찌는 듯한 여름, 그리고 풍성한 가을을 거쳐 다시 찬 바람이 부는 겨울이 다가왔습니다. 도깨비와 약속했던 일 년이라는 시간이 훌쩍 다가온 것입니다. 박 서방의 창고는 이제 변두리의 허름한 곳이 아니라, 한양의 심장부인 운종가 한복판에 당당히 자리 잡은 조선에서 제일가는 거대한 상단으로 변모해 있었습니다. 수십 명의 건장한 일꾼들이 바쁘게 오가며 비단과 인삼을 나르는 활기찬 모습을 보며 박 서방은 깊은 감회에 젖었습니다. 그는 이제 최고급 비단옷을 입고 수십 명의 식솔을 거느린 거상이 되었지만, 그의 마음가짐만큼은 일 년 전 짐승의 똥 냄새가 진동하던 허름한 사당에서 공포에 떨고 있던 그 절박했던 사내의 모습 그대로였습니다.
"여보, 내일이면 산속의 그 도깨비님과 철석같이 약속한 둥근 보름달이 뜨는 날이오. 약속한 원금 천 냥에, 우리 부부의 목숨을 굽어살펴주신 은혜의 이자로 오백 냥을 더 얹어 최고급 은정으로 단단히 준비해 두었소."
"벌써 시간이 그리되었군요. 지난 일 년이 어찌 지나갔는지 꿈만 같습니다. 험한 산길에 밤짐승이 많을 터이니 부디 몸조심해서 다녀오셔요. 우리의 목숨을 살려주신 그 은인... 아니, 도깨비님께도 제 몫까지 꼭 깊은 감사의 인사를 전해주시고요."
박 서방은 천오백 냥어치의 은정과 엽전이 가득 든 무거운 봇짐을 어깨에 둘러메고 굵은 끈으로 단단히 동여맸습니다. 주변의 사람들은 아무런 빚 문서도 없고, 증인도 없는 도깨비와의 헛된 약속을 지키기 위해 그 어마어마한 거금을 들고 다시 호랑이가 출몰하는 깊은 산속으로 제 발로 걸어 들어간다니 미친 짓이라며 혀를 내둘렀습니다. 하지만 박 서방에게 상인의 신용이란 자신의 목숨보다 귀한 것이자, 짐승과 다를 바 없는 요물과의 약속이라 할지라도 인간으로서 지켜야 할 최후의 도리였습니다. 그는 흔들림 없이 올곧은 눈빛으로 봇짐의 무게를 견디며, 달이 차오르기 시작하는 밤이 깊어지는 산길을 향해 묵직하고도 힘찬 발걸음을 내디뎠습니다.
※ 5: 약속의 보름달, 이자를 짊어지고 찾아간 은혜의 땅
정확히 일 년 만에 다시 찾은 험준한 산길은 여전히 음산하고 가파르기 그지없었습니다. 앙상한 나뭇가지들이 바람에 흔들리며 귀신처럼 기괴한 소리를 내었고, 멀리서 들려오는 이름 모를 밤짐승들의 날카로운 울음소리가 등골을 오싹하게 만들었지만, 박 서방의 발걸음에는 그 어떤 망설임이나 두려움도 없었습니다. 등에 짊어진 천오백 냥이라는 막대한 재물의 봇짐이 어깨의 살을 파고들 듯 묵직하게 짓눌렀지만, 오히려 그 엄청난 무게감이 도깨비와의 약속을 지킬 수 있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것 같아 그의 마음을 한없이 든든하게 만들어 주었습니다. 이윽고 울창하고 빽빽한 나무들 사이로 희미한 은빛이 스며들기 시작했습니다.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보니, 일 년 전 그의 절망을 비추었던 그날 밤처럼 크고 둥근 보름달이 세상을 대낮처럼 환하게 비추며 밤길을 안내하고 있었습니다.
숨이 턱 끝까지 차오르며 가파른 산마루에 오르자, 박 서방의 뇌리 속에 너무도 선명하게 각인되어 있던 그 낡고 허름한 사당이 다시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일 년이라는 덧없는 세월 동안 거친 비바람과 눈보라를 맞아 지붕은 더욱 무너져 내리고 한층 더 흉물스럽게 변해있었지만, 박 서방에게 이곳은 그 어떤 으리으리한 대궐보다 성스럽고 은혜로운 장소였습니다. 박 서방은 사당 앞마당의 마른 풀들을 조심스럽게 치운 뒤 봇짐을 내려놓고는 거친 숨을 고르며 옷매무새를 단정히 가다듬었습니다. 그리고 밝게 빛나는 보름달을 향해 두 손을 공손히 모으고 간절하고도 벅찬 마음으로 도깨비가 나타나기만을 기다렸습니다.
'도깨비님, 당신이 베풀어주신 은혜 덕분에 제가 다시 일어섰습니다. 약속대로 제가 이곳에 왔으니, 제발 오늘 밤 나타나 주십시오.'
얼마나 오랜 시간 달을 보며 서 있었을까, 갑자기 잠잠하던 산바람이 맹렬하게 휘몰아치며 마른 나뭇잎들이 소용돌이치기 시작했습니다. 쿵, 쿵, 쿵! 일 년 전 박 서방의 심장을 멎게 할 뻔했던, 땅 전체를 뒤흔드는 익숙하고도 거대한 발걸음 소리가 짙은 어둠 속에서 다시 들려오기 시작했습니다. 심장이 터질 듯이 거세게 뛰었지만, 박 서방은 결코 뒤로 물러서거나 도망치지 않고 그 자리에 바위처럼 꼿꼿이 서 있었습니다. 곧이어 달빛을 거대하게 가리며 나타난 실루엣, 짐승의 털을 허술하게 두르고 머리엔 뭉툭한 뿔이 난 집채만 한 도깨비였습니다. 한쪽 어깨에 가시가 돋친 육중한 쇠방망이를 걸친 도깨비는 사당 앞마당에 달빛을 받으며 서 있는 박 서방을 발견하고는 당황한 듯 누런 눈동자를 끔벅거렸습니다.
"어흐흥, 이게 뉘신가? 인적이 끊긴 지 오래된 이 깊은 산골짜기 한밤중에 웬 겁도 없는 인간 놈이 남의 집 앞마당을 떡하니 차지하고 서 있는 게냐? 고기 맛을 잊어버릴 뻔했는데 잘되었구나!"
"도깨비님! 저를 정녕 기억하지 못하시겠습니까? 일 년 전 바로 이맘때, 빚쟁이들에게 쫓겨 이곳으로 도망쳐 와 당신께 천 냥을 빌려 갔던 개성상인 박 서방입니다! 제가 약속드린 대로 보름달이 둥글게 뜬 오늘, 당신께 빚을 갚기 위해 한양에서 여기까지 달려왔습니다!"
박 서방은 터져 나오는 감격을 주체하지 못한 채 벅찬 목소리로 외치며 차가운 바닥에 넙죽 엎드려 정중한 큰절을 올렸습니다. 그리고는 서둘러 가져온 무거운 봇짐을 풀어헤쳐 달빛 아래 눈부시게 번쩍이는 은정과 금괴, 엽전 무더기를 도깨비의 눈앞에 보여주었습니다.
"이것을 한번 보십시오! 당신이 그날 빌려주신 기적 같은 천 냥을 밑천 삼아 한양으로 올라가 인삼 장사를 아주 크게 성공시켰습니다. 원금 천 냥에, 저와 제 가엾은 아내의 목숨을 구해주신 은혜에 대한 이자로 오백 냥을 더 얹어 총 천오백 냥을 가져왔습니다. 당신의 그 믿음 덕분에 제가 다시 살았습니다. 정말, 정말 뼈에 사무치도록 감사드립니다!"
그런데, 땅에 엎드려 눈물을 글썽이는 박 서방의 정수리 위로 떨어지는 도깨비의 반응이 어딘가 몹시 심상치 않았습니다. 호탕하게 웃으며 약속을 지켰다고 칭찬해 줄 것이라는 굳은 예상과는 달리, 도깨비는 거대한 미간을 잔뜩 찌푸린 채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뭉툭한 뿔 주변을 북북 긁적거리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엉? 천 냥? 빚을 갚으러 왔다고? 지금 네놈 입에서 무슨 자다가 봉창 두드리는 뚱딴지같은 소리가 나오는 것이냐. 내가... 천하의 도깨비인 내가 꾀바른 인간 놈인 너한테 돈을 빌려줬다고?"
"예? 아, 아니... 일 년 전에 분명 저를 잡아먹으려 하시다가, 제가 제발 장사 밑천으로 천 냥만 빌려주면 정확히 일 년 뒤 보름달이 뜰 때 이곳으로 돌아와 갚겠다고 목숨을 걸고 호언장담을 하지 않았습니까. 그래서 도깨비님께서 기꺼이 방망이를 두드려 저에게 금괴를 주셨고..."
도깨비는 팔짱을 낀 채 하늘을 올려다보며 끙끙거리며 곰곰이 생각에 잠겼습니다. 사실, 둔갑술을 부리고 금은보화를 뚝딱 만들어내는 한국의 도깨비들은 재주가 많고 힘이 장사지만 아주 치명적인 단점이 하나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금붕어보다도 못한 심각한 '건망증'이었습니다. 당장 어제 먹은 밥 반찬조차 제대로 기억하지 못하는 멍청한 도깨비에게, 일 년 전 스쳐 지나가듯 일어났던 인간과의 일화는 까마득한 전생의 일이나 다름없었습니다. 도깨비는 한참을 미간을 찌푸리며 끙끙거리더니, 갑자기 무언가 깨달은 듯 누런 눈을 번쩍 뜨며 무릎을 탁 쳤습니다.
"아하! 그래, 기억났다! 생각났어! 그래, 넌 분명 돈을 갚아야 한다고 악을 쓰며 호통을 치던 그 맹랑하고 시끄러운 사내놈이구나!"
"그, 그렇습니다! 다행입니다, 드디어 기억이 나셨군요!"
"그럼, 그럼! 내가 어찌 그토록 뼈에 새긴 중요한 돈 약속을 잊겠느냐. 그런데 이놈아, 네가 늙어서 노망이 났는지 단단히 착각을 한 모양이구나. 그때 돈을 빌린 건 꾀죄죄한 네놈이 아니라, 바로 나다!"
"예엑?! 그게 대체 무슨 청천벽력 같은 말씀이십니까? 분명히 제가 빌려 갔다니까요! 그래서 이렇게 갚으러 오지 않았습니까!"
박 서방은 너무 기가 막히고 어이가 없어 펄쩍펄쩍 뛰며 손사래를 쳤지만, 도깨비는 오히려 자기를 못 믿는 거냐며 억울하다는 듯 털북숭이 가슴을 팡팡 치며 씩씩거렸습니다.
"이놈이 감히 어디서 신성한 도깨비를 속이려 들어! 내 머릿속에 분명히 '천 냥', '빚', '반드시 갚는다' 이 세 단어가 아주 또렷하게 못 박히듯 남아있다! 이것은 곧 위대한 내가 네놈에게 천 냥을 빚졌으니 오늘 밤 갚아야 한다는 뜻이 아니더냐! 내 아무리 짐승 가죽을 두르고 산속을 헤매는 짐승 같은 몰골이라지만, 남에게 빚을 지고 안 갚고 입을 싹 닫는 파렴치한 양아치 도깨비는 절대 아니다!"
심각한 건망증에 걸린 도깨비의 머릿속에는 '돈거래가 분명히 있었다'는 파편적인 조각들만 남아버렸고, 그 거래의 주체가 뒤바뀌는 참으로 기막힌 논리적 오류가 발생해 버린 것입니다. 아무리 박 서방이 봇짐을 들이밀며 자기가 빌린 돈이라고, 제발 받아달라고 핏대를 세워 설명해도 도깨비는 "건방진 인간 주제에 감히 이 도깨비를 동정하여 돈을 쥐여주려 하느냐!"라며 쇠방망이를 휘두르고 불같이 화를 냈습니다. 결국 빚을 갚으려던 박 서방은 돈을 주기는커녕, 씩씩거리며 잡아먹기 전에 당장 꺼지라고 호통을 치는 도깨비에게 쫓겨 천오백 냥이 든 봇짐을 고스란히 짊어진 채 헐레벌떡 산을 도망치듯 내려와야만 했습니다.
※ 6: 건망증 도깨비의 무한 빚 갚기, 뫼비우스의 축복
"아이고, 세상에 참으로 기가 막히고 코가 막힐 노릇이군. 빚을 이자까지 쳐서 갚겠다며 두 발로 찾아왔는데 돈을 절대 안 받겠다니... 화를 내는 도깨비한테 쫓겨서 내 돈을 다시 고스란히 짊어지고 한양까지 내려올 줄은 내 평생 상상조차 하지 못했소."
한양 운종가에 위치한 으리으리한 번듯한 자택으로 돌아온 박 서방은 화려한 마루청에 털썩 걸터앉아 허탈한 헛웃음을 지었습니다. 방 한가운데 봇짐 속에 그대로 들어있는 천오백 냥의 은정과 금괴를 보며, 이 황당하고 기묘한 상황을 어찌 해결해야 할지 답답한 마음에 머리를 쥐어뜯었습니다. 그날 밤, 피로에 지쳐 아내 곁에서 곤한 잠에 빠져있던 박 서방은 앞마당에서 들려오는 육중한 '쿵' 소리에 화들짝 놀라 잠에서 깼습니다. 장안의 도둑 떼라도 담을 넘었나 싶어 서둘러 외투를 걸치고 조심스럽게 문틈으로 밖을 내다본 그는, 너무 놀라 그만 턱이 빠질 뻔하며 제 두 눈을 거칠게 비벼 의심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구름 사이로 밝은 달빛이 비치는 넓은 마당 한가운데, 어젯밤 그 깊은 험산 속에 있던 덩치 큰 털북숭이 도깨비가 언제 한양 도성까지 내려왔는지 떡하니 서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도깨비는 짐짓 멋쩍은 표정을 지으며 커다란 손으로 수박만 한 금괴 두어 개를 마당 한가운데에 무심하게 툭 던져놓더니, 안방을 향해 헛기침을 큼큼 하며 우렁차게 소리쳤습니다.
"어이, 개성상인 사내놈! 자고 있느냐! 곰곰이 생각해 보니 어제는 빚을 안 갚고 역정을 내어 내가 참으로 미안했네. 내 약속대로 빚을 갚으러 왔으니 이자까지 듬뿍 쳐서 마당에 두고 가네, 어서 받아두게나! 천하의 도깨비 체면에 인간에게 빚지고는 단 하루도 발 뻗고 못 살지, 암 그렇고말고!"
그러고는 대답을 들을 새도 없이 휙 하니 거대한 담장을 사뿐히 넘어 밤안개처럼 홀연히 사라져 버렸습니다. 잠에서 깨어난 박 서방 부부는 입을 떡 벌린 채 마당에 덩그러니 나뒹구는 영롱한 호박만 한 금괴들을 그저 넋을 잃고 바라볼 뿐이었습니다.
"여, 여보... 저게 대체 무슨 기괴한 조화랍니까? 산속 도깨비가 어찌 한양 땅까지 쫓아와서 저런 것을..."
"나도 도무지 모르겠소. 도깨비가 어찌 내 집을 정확히 알고 찾아와서 저 큰 금덩이를 빚이랍시고 던져놓고 간다는 말이오..."
진짜 기막히고 환장할 일은 바로 그다음 날 밤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되었습니다. 다음 날 밤, 야경꾼이 통금을 알리는 딱따기 소리가 멀리서 울릴 무렵 어김없이 마당에서 '쿵' 하는 땅이 꺼지는 소리가 났습니다. 박 서방이 후다닥 문을 열어보니 어제 그 도깨비가 또 뻔뻔하게 서 있었습니다.
"어흐흥! 자네 집 마당이 참으로 넓고 좋구먼. 내가 오늘 낮에 산속에서 곰곰이 생각해 보니, 예전에 자네한테 아주 큰 빚을 진 것 같단 말이지. 그래서 여기 내 빚을 확실히 갚으러 왔네! 받아두게!"
도깨비는 바로 전날 밤 자신이 금덩이를 던져놓고 간 사실조차 하룻밤 새 새하얗게 잊어버린 채, 또다시 자신이 빚을 졌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금덩이를 툭 던져놓고는 뿌듯한 미소를 지으며 사라졌습니다. 그다음 날 밤에도, 또 그다음 날 밤에도 밤 12시만 되면 정확하게 똑같은 상황이 마치 기계처럼 반복되었습니다. 건망증이 극에 달한 도깨비의 머릿속에는 매일 밤 잠에서 깰 때마다 '아뿔싸, 내가 이 개성상인 사내에게 빚을 졌다'는 최초의 왜곡된 기억만이 완전히 초기화된 상태로 새롭게 떠오르는 모양이었습니다.
"어제는 미안했네, 내 빚을 갚으러 왔네!"
"아이고, 도깨비님! 제발, 제발 그만 좀 하십시오! 벌써 백 번도 천 번도 넘게 갚으셨습니다! 제가 졌습니다, 제발 그만 오십시오!"
"이놈이 무슨 해괴망측한 헛소리냐! 난 오늘 밤 처음 빚을 갚으러 온 것인데! 감히 선량한 도깨비를 사기꾼으로 몰지 마라!"
매일 밤 잊지 않고 찾아와 마당에 금은보화를 무자비하게 던져대고 가는 건망증 도깨비 덕분에, 박 서방네 집에는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일꾼들을 동원해 마당에 널브러진 금괴를 쓸어 담아 치우는 것이 가장 중요한 일과가 되어버렸습니다. 상단의 거대한 창고에는 전국 팔도에서 사들인 질 좋은 인삼보다, 도깨비가 매일 밤 던져놓고 간 어마어마한 금덩이가 천장까지 닿을 정도로 더 높이 쌓일 지경이었습니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남에게 빌린 돈은 반드시 갚아야만 직성이 풀린다는 개성상인의 철저하고 고집스러운 신용과, 자기가 진 빚(이라고 착각한 것)은 죽어도 갚아야 잠이 온다는 도깨비의 심각한 건망증이 만나 끝없이 금은보화가 불어나는 '뫼비우스의 빚 갚기' 굴레가 영원토록 완성된 것입니다.
결국 박 서방은 도저히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불어난 그 어마어마한 재물을 자신의 배를 불리는 데에만 껴안고 있지 않았습니다. 그는 도깨비가 매일 밤 던져주는 그 무한한 금덩이를 팔아 가난으로 고통받는 백성들의 빚을 조건 없이 탕감해 주고, 나라에 흉년이 들어 굶어 죽는 자가 속출하면 전국에 수천 가마니의 쌀을 풀어 사람들을 구휼하는 데 앞장섰습니다. 빚쟁이에게 쫓겨 눈물을 훔치며 야반도주를 감행해야 했던 가련한 개성상인은, 절망 속에서도 목숨을 걸고 신의를 지키려던 올곧은 마음씨 덕분에 하늘이 내린... 아니, 엉뚱하고도 고마운 건망증 도깨비가 내린 엄청난 축복을 받아 조선 역사상 가장 인심 좋고 백성들에게 존경받는 유례없는 제일의 거부로 역사에 아름다운 이름을 남기게 되었습니다. 물론, 그의 머리가 하얗게 세어 눈을 감는 그날까지도 매일 밤 어김없이 마당 담장 너머로 들려오는 "어이, 내 빚 갚으러 왔네!"라는 쩌렁쩌렁한 도깨비의 우렁찬 외침을 세상에서 가장 유쾌한 자장가 삼아 들어야 했지만 말입니다.
유튜브 엔딩멘트
야반도주하던 개성상인과 건망증 심한 도깨비의 기막힌 동업(?) 이야기, 어떠셨나요? 빚을 갚으려는 사람의 정직함이 오히려 엄청난 부메랑이 되어 돌아오는 유쾌한 결말이 통쾌함을 선사합니다. 어쩌면 도깨비는 그의 신용과 배포를 높이 사서, 일부러 건망증인 척 매일 밤 금덩이를 던져준 것은 아닐까요? 오늘 이야기가 재미있으셨다면 구독과 좋아요, 알림 설정 부탁드리며, 다음 시간에도 더욱 흥미진진한 옛날이야기로 찾아오겠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