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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과부를 살린 밤손님의 정체, 도깨비가 끝내 숨기려 했던 단 하나의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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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 숙종 연간, 경상도 깊은 산골에 홀로 사는 과부가 있었습니다. 남편은 혼례 석 달 만에 세상을 떠났고, 시댁에서는 팔자가 사나운 년이라며 쫓아냈습니다. 자식도 없고, 친정도 없고, 기댈 곳 하나 없는 여인에게 남은 것이라곤 산기슭의 허물어져 가는 초가 한 채뿐이었지요. 그런데 어느 날부터 기이한 일이 벌어지기 시작합니다. 밤마다 누군가 이 집에 찾아와 장작을 패고, 마당을 쓸고, 부뚜막에 불을 지피고, 심지어 쌀독에 쌀까지 채워놓고는 새벽녘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겁니다. 처음엔 마을 사내의 짓인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이웃집 노파의 말을 들은 뒤, 여인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립니다. "그 집에는 사람이 올 수가 없어. 그건 틀림없이 도깨비야." 파란 피부에 울퉁불퉁한 근육, 머리에 뿔이 솟은 도깨비가 과연 무엇을 바라고 이 외로운 과부의 집을 찾아오는 것일까요? 욕심인지, 장난인지, 아니면 차마 입에 담지 못할 그 무엇인지. 그 도깨비의 진짜 속내를 알게 되었을 때, 여인은, 그리고 여러분도 가슴 한구석이 뜨거워지실 겁니다.

    ※ 1: 쫓겨난 여자, 산기슭의 초가

    조선 숙종 연간, 경상도 깊은 산골에 봉양이라는 작은 마을이 있었다. 첩첩산중 골짜기에 고작 서른여 호가 옹기종기 모여 사는 외진 곳이었는데, 이 마을에서 한 이십 리쯤 더 산길을 타고 올라가면 사람의 발길이 끊어진 산기슭에 초가 한 채가 덩그러니 서 있었다. 지붕의 이엉은 반쯤 썩어 내려앉았고, 흙벽에는 주먹만 한 구멍이 숭숭 뚫려 찬바람이 제 집 드나들 듯 들락거렸다. 이 허물어져 가는 집에 혼자 사는 여인이 있었으니, 이름은 분이, 나이 스물한 살의 과부였다.

    분이의 팔자는 기구했다. 열여덟에 이웃 마을 선비 집안의 막내아들에게 시집을 갔는데, 남편 될 사람이 혼례 전부터 가슴앓이를 했다. 그래도 혼인은 치러졌다. 시댁에서는 며느리가 들어오면 병이 나을 거라 믿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세상일이란 게 사람의 바람대로 되는 법이 없었다. 혼례 석 달 만에 남편은 피를 한 사발 토하고 세상을 떠났다. 자식은커녕 아이를 가질 겨를조차 없었다.

    시어머니가 분이의 머리채를 움켜쥐고 대문 밖으로 내던지며 소리쳤다. "이 팔자 사나운 년아! 네년이 들어온 뒤로 내 아들이 죽었어! 꼴도 보기 싫으니 당장 꺼져!" 분이는 차마 입을 열지 못했다. 남편의 죽음이 자신의 탓이라는 것을 믿지는 않았지만, 시댁 식구들의 눈에 타오르는 원망의 불길 앞에서는 어떤 변명도 의미가 없었다. 쫓겨나는 며느리를 시아버지도, 시누이도, 아무도 막지 않았다.

    친정으로 돌아갈 수도 없었다. 분이의 친정아버지는 분이가 열다섯 되던 해에 나라의 부역에 끌려갔다가 돌아오지 못했고, 홀로 남은 어머니는 그 충격에 앓아눕더니 이듬해 봄에 눈을 감았다. 오라비 하나가 있었으나 먹고살 길이 막막하여 함경도 쪽으로 떠난 뒤 소식이 끊어진 지 오래였다. 세상에 기댈 곳이라곤 단 한 군데도 없었다.

    봉양 마을의 이장이 딱한 사정을 들어 내어준 것이 바로 이 산기슭의 빈 초가였다. 주인이 병으로 죽은 뒤 십 년 넘게 비어 있던 집이라 사람이 살 형편이 못 되었지만, 분이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등짐 하나 달랑 메고 산길을 올라와 처음 집 안에 들어섰을 때, 분이는 울지 않았다. 울 기력조차 없었다. 방바닥은 냉골이었고, 부뚜막에는 재만 수북이 쌓여 있었다. 처마 밑에 거미줄이 촘촘하게 쳐져 있었고, 뒤란의 장독대는 텅 비어 찬바람만 쓸고 지나갔다.

    그렇게 가을이 지나고 겨울이 왔다. 분이는 산에서 나물을 뜯고, 도토리를 주워 끼니를 이었다. 가끔 마을에 내려가 남의 집 빨래를 해주거나 방아를 찧어주고 좁쌀 한 되를 얻어 왔다. 하지만 마을 사람들의 시선은 차가웠다. "저 과부가 또 왔네." "젊은 것이 혼자 산골에 산다니, 무슨 꿍꿍이가 있는 게지." 등 뒤에서 쑥덕거리는 소리가 귓전을 파고들 때마다 분이는 고개를 더 깊이 숙이고 발걸음을 재촉했다.

    겨울이 깊어지자 목숨이 위태로워졌다. 장작을 팰 도끼가 없었고, 설령 있다 한들 여인의 힘으로는 참나무를 쪼개기 어려웠다. 솜이 빠져나간 이불 한 채로 밤을 버텨야 했고, 쌀독은 바닥을 드러낸 지 오래였다. 늦가을의 마지막 밤, 벽 틈새로 파고드는 칼바람에 이가 딱딱 부딪쳤다. 분이는 차가운 부뚜막에 등을 기대고 무릎을 끌어안았다. 그리고 아주 작은 목소리로, 죽은 남편의 이름을 불렀다.

    "서방님, 나 이러다 죽겠지요?"

    대답은 없었다. 바람 소리만 처마 끝에서 울었다. 분이의 눈에서 눈물 한 줄기가 흘러내렸다. 세상에서 가장 외로운 사람의 가장 긴 밤이었다. 그리고 바로 그 밤, 분이가 알지 못하는 사이에, 산기슭 어둠 속에서 커다란 두 눈이 그 초가를 말없이 내려다보고 있었다.

    ※ 2: 밤마다 벌어지는 기이한 일

    그 일은 초겨울 첫눈이 내린 다음 날 아침에 시작되었다.

    분이는 새벽녘의 한기에 몸을 웅크린 채 가까스로 눈을 떴다. 간밤에 잠이 들었다는 것 자체가 신기했다. 어제까지만 해도 추위에 이가 부딪혀 도무지 잠을 이룰 수 없었는데, 오늘은 어째서인지 방 안에 온기가 남아 있었다. '꿈인가.' 분이는 눈을 비비며 일어났다. 그리고 방문을 여는 순간, 제자리에 얼어붙고 말았다.

    부뚜막에 불이 지펴져 있었다. 붉은 숯이 따뜻하게 달아올라 방 안까지 훈기를 밀어 보내고 있었고, 가마솥 안에서는 물이 보글보글 끓고 있었다. 아궁이 옆에는 잘게 쪼개진 장작이 가지런히 쌓여 있었다. 분이의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누, 누가 들어온 거야?' 떨리는 손으로 부지깽이를 쥐고 마당으로 나간 분이는 두 번째 경악을 했다. 어지럽게 널려 있던 마당이 빗자루로 싹싹 쓴 듯 깨끗해져 있었고, 헛간 앞에는 어른 팔뚝만 한 참나무 장작이 사람 키보다 높게 쌓여 있었다. 하룻밤 사이에 이 많은 장작을 누가 패놓은 것인가. 장정 대여섯이 달라붙어도 하루 만에 끝내기 어려운 양이었다.

    분이는 눈 위에 찍힌 발자국을 보았다. 심장이 두근거렸다. 발자국은 분명 사람의 형태였으나, 크기가 보통 사내의 두 배는 되었다. 보폭이 어찌나 넓은지, 장정이 두 걸음 뛸 거리를 한 걸음에 옮긴 모양이었다. 발자국은 뒷산 쪽에서 내려와 마당을 한 바퀴 돈 뒤 다시 산으로 사라져 있었다.

    '혹시 마을 사내가 밤에 몰래 온 건가?' 분이는 고개를 흔들었다. 마을에서 이 산기슭까지 밤길을 걸어 올라올 배짱이 있는 사내는 없었다. 더구나 그 크기의 발자국을 가진 사람이라면 키가 일곱 자는 넘어야 할 터인데, 봉양 마을에 그런 거인은 없었다. 분이는 오싹한 공포와 기묘한 감사 사이에서 마음이 뒤숭숭했지만, 일단 끓는 물에 어제 캐온 마른 나물을 넣어 끼니를 때웠다. 따뜻한 물이 뱃속으로 흘러들자, 며칠 만에 처음으로 몸에 힘이 도는 것 같았다.

    다음 날도 똑같은 일이 벌어졌다. 밤새 아무런 기척도 느끼지 못했는데, 아침에 일어나 보니 헛간의 부러진 기둥이 새 나무로 교체되어 있었고, 갈라진 흙벽에 새 진흙이 발려져 찬바람이 더 이상 들어오지 않았다. 사흘째 되는 날에는 텅 비어 있던 쌀독에 백미가 가득 차 있었다. 곱게 도정된 쌀이 독의 아가리까지 수북하게 담겨 있는 것을 본 분이는 두 다리에 힘이 풀려 그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나흘째, 된장독에 새 된장이 가득 차 있었다. 닷새째, 처마 밑에 말린 무가 줄줄이 걸려 있었다. 엿새째, 부엌 한쪽에 새 가마솥이 놓여 있었다. 분이가 잠든 밤마다 누군가가 이 산기슭의 초가를 찾아와, 허물어져 가는 집을 고치고, 없는 것을 채우고, 부족한 것을 메우고는 새벽이 오기 전에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있었다.

    열흘째 되는 날, 분이는 더 이상 혼자 끙끙 앓을 수 없어 산 아래 마을로 내려갔다. 마을 어귀에 사는 노파 막덕의 집을 찾았다. 막덕은 봉양 마을에서 가장 나이가 많은 할멈으로, 오래 살아 별의별 것을 다 보았다고 자부하는 이였다. 분이가 지난 열흘간의 일을 더듬더듬 이야기하자, 막덕의 눈이 점점 커졌다. 주름진 입이 한참 벌어져 있다가 천천히 닫히면서 한마디를 내뱉었다.

    "분이야, 그건 사람이 아녀."

    분이의 등줄기에 소름이 돋았다. 막덕이 지팡이를 탁 내려치며 말을 이었다.

    "사람 발자국이 그리 클 리가 없고, 장정 여섯이 할 일을 하룻밤에 해치우는 놈이 사람일 리가 없어. 그건 도깨비여. 도깨비가 네 집에 들었어."

    "도, 도깨비요?"

    "그래, 도깨비. 이 산에 옛날부터 도깨비가 산다는 말이 있었어. 우리 큰어멈 살아 계실 때 저 뒷산 너머 폐가에서 밤마다 방아 찧는 소리가 들린다고 했는데, 사람이 안 사는 집에서 무슨 방아 소리여. 도깨비 짓이었지."

    분이는 겁이 나면서도 한편으로는 이상한 감정이 올라왔다. 도깨비가 무서운 존재라면 왜 자신을 해치지 않고 집안일을 해주고 간 것일까. 막덕이 분이의 표정을 읽은 듯 나지막이 덧붙였다.

    "도깨비란 게 원래 그래. 사람을 홀리기도 하고, 도와주기도 해. 근데 공짜로 베푸는 법은 없다더라. 뭔가 원하는 게 있을 거여. 분이야, 조심해."

    분이는 무거운 발걸음으로 산길을 올랐다. 초가의 문을 열자 따뜻한 온기가 얼굴을 감쌌다. 누군가가 아궁이에 불을 넣어둔 것이다. 분이는 부뚜막 앞에 쪼그리고 앉아 타오르는 불꽃을 한참 바라보았다. '도깨비라.' 무서웠다. 하지만 이 따뜻함을 거부할 용기는 더더욱 없었다.

    ※ 3: 숨죽여 엿보다, 파란 피부의 사내

    열이틀째 밤이었다. 분이는 결심했다. 이대로 밤마다 정체 모를 존재의 도움을 받고만 있을 수는 없었다. 눈으로 직접 봐야 했다. 도깨비이든 귀신이든, 혹은 마을 장정의 장난이든 두 눈으로 확인해야 이 가슴 졸이는 나날이 끝날 터였다.

    해가 지자 분이는 평소보다 일찍 방에 누웠다. 이불을 턱까지 끌어올리고 눈을 감았다. 하지만 잠을 자는 것이 아니었다. 눈꺼풀을 완전히 감지 않고 실눈을 떴다. 속눈썹 사이로 어둑한 방 안이 보였다. 호롱불은 일부러 끄지 않고 심지를 바짝 낮추어 놓았다. 희미한 불빛이 방 안에 어스름한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었다.

    한 시진이 지나고, 두 시진이 지났다. 밤이 깊어지자 산골의 정적은 더욱 짙어졌다. 올빼미 울음소리와 바람이 소나무 가지를 스치는 소리만이 간간이 적막을 깨뜨렸다. 분이의 심장은 가슴 밖으로 튀어나올 듯 쿵쿵 뛰었지만, 이를 악물고 숨소리를 고르게 유지했다. '잠든 척해야 해. 잠든 척.'

    자정이 넘었을 무렵이었다. 삐걱. 미세한 소리가 들렸다. 대문이 열리는 소리도 아니고, 방문이 열리는 소리도 아니었다. 마치 커다란 무언가가 처마 밑 공기를 가르며 스며드는 듯한, 바람도 아니고 소리도 아닌 기묘한 기척이었다. 그리고 쿵. 마당 흙바닥을 밟는 묵직한 발소리. 한 발, 두 발, 세 발. 느리지만 무겁고, 조심스럽지만 거대한 발걸음이 마당을 가로질렀다.

    분이는 실눈을 뜬 채 방 안에서 미동도 하지 않았다. 발소리가 부엌 쪽으로 향하더니 아궁이에 뭔가를 넣는 소리가 들렸다. 부싯돌을 부딪치는 딱딱 소리 뒤에 불이 피어오르는 훠 하는 소리가 이어졌다. 이윽고 뒤란으로 나가는 발소리, 장독대 뚜껑을 여닫는 소리, 빗자루가 바닥을 쓰는 사각사각 소리. 모든 것이 조심스럽고 정성스러웠다. 분이는 심장을 움켜쥐며 생각했다. '저 소리의 주인이 도깨비라면, 도깨비가 빗자루질을 한단 말인가.'

    얼마나 지났을까. 발소리가 다시 부엌 쪽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방문 앞에서 멈추었다. 분이의 온몸이 굳었다. 방문이 열리는 건가. 이 안으로 들어오는 건가. 하지만 문은 열리지 않았다. 대신 문 밖에서 아주 희미한 숨소리가 들렸다. 크고 깊은 숨소리. 마치 방 안의 사람이 살아 있는지 확인하듯, 한참을 문 앞에 서서 귀를 기울이는 것 같았다. 그 순간 분이는 묘한 느낌을 받았다. 저 숨소리에서 적의가 느껴지지 않았다. 살기도, 장난기도 아닌, 어딘지 모르게 조심스럽고 안타까운 기운이 문 너머에서 전해져 왔다.

    발소리가 다시 멀어졌다. 처마 밑을 지나 마당을 가로지르더니 뒷산 쪽으로 향했다. 분이는 벌떡 일어나 방문을 열었다. 달빛이 마당을 환하게 비추고 있었고, 뒷산으로 향하는 좁은 오솔길 위에 거대한 뒷모습이 보였다. 분이의 두 눈이 크게 열렸다.

    키가 일곱 자는 족히 넘었다. 아니, 여덟 자에 가까웠을지도 모른다. 어깨가 광짝만큼 넓었고, 등짝에는 울퉁불퉁한 근육이 삼베옷 사이로 떡지게 솟아 있었다. 그리고 달빛 아래 드러난 뒷목과 팔뚝의 피부가 어둑한 파란빛을 띠고 있었다. 분이는 비명을 삼켰다. 입을 두 손으로 틀어막고 그 자리에 쭈그려 앉았다. '도깨비다. 진짜 도깨비야.'

    다음 날 밤, 분이는 다시 잠든 척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이불 속에서 벌벌 떤 것이 아니라, 좀 더 대담하게 실눈을 뜨고 부엌 쪽을 노려보았다. 자정 무렵, 어김없이 그 기척이 찾아왔다. 이번에는 부엌 안쪽까지 호롱불의 희미한 빛이 닿았다. 분이는 숨을 멈추었다.

    아궁이에 불을 넣고 몸을 일으키는 거대한 형상이 호롱불 빛에 드러났다. 이마 한가운데에 굵은 뿔이 하나 솟아 있었다. 소뿔처럼 휘어진 것이 아니라, 곧게 하늘을 향해 솟은 짧고 굵은 뿔. 얼굴은 사람과 비슷하되 광대뼈가 유난히 높았고, 눈이 크고 깊었다. 그리고 그 커다란 두 손에 들려 있는 것은, 빗자루였다. 도깨비가 빗자루를 들고 아궁이 앞 먼지를 쓸고 있었다. 어찌나 조심스럽게 쓸어내는지, 그 거대한 몸집과 빗자루질의 섬세함 사이의 괴리가 우습다 못해 측은했다.

    도깨비가 부엌일을 마치고 뒤란으로 나가려는 순간이었다. 분이가 이불을 걷어차고 벌떡 일어섰다. 입에서 소리가 튀어나왔다. "거기 서!"

    도깨비가 화들짝 놀라 몸을 돌렸다. 빗자루를 떨어뜨리며 한 발 물러섰다. 그 거대한 몸집이 움찔하는 모습이 마치 생쥐를 본 장정 같았다. 달빛과 호롱불 사이에서 사람과 도깨비의 눈이 마주쳤다. 분이는 두려움에 온몸이 떨렸지만, 눈을 피하지 않았다. 도깨비도 달아나지 않았다. 두 존재가 어둠 속에서 서로를 응시하는 긴 침묵이 흘렀다. 그리고 그 침묵 안에서 분이는 깨달았다. 도깨비의 크고 깊은 눈 속에 서린 감정이 무엇인지를. 그것은 자신이 매일 밤 부뚜막에 기대어 보이는 것과 똑같은 빛이었다. 세상에서 가장 외로운 자의 눈빛이었다.

    ※ 4: 도깨비의 고백, 외로운 존재의 진심

    한참의 침묵 끝에 먼저 입을 연 것은 분이였다.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지만 기어코 소리를 냈다. "너, 도깨비 맞지?" 도깨비는 움찔하더니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큰 덩치와 달리 그 고갯짓은 겁먹은 아이처럼 조심스러웠다. "매일 밤 우리 집에 온 것도 너지? 장작을 패고, 마당을 쓸고, 쌀독에 쌀을 채운 것도?" 도깨비가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에는 고개를 숙이며 눈길을 피했다. 마치 들키면 안 되는 일을 저지르다 잡힌 사람처럼.

    분이는 떨리는 다리를 억지로 움직여 마루에 걸터앉았다. 도깨비와의 거리는 대여섯 걸음. 달아나려면 달아날 수 있는 거리였지만, 분이는 달아나지 않았다. 대신 물었다. "왜?"

    단 한 글자의 질문이 차가운 밤공기 속에 던져졌다. 도깨비는 한참을 아무 말 없이 서 있었다. 큰 손으로 삼베옷 자락을 만지작거리는 모습이 어찌나 쭈뼛거리는지, 분이는 이것이 산 사람의 간을 빼먹는다는 무시무시한 도깨비가 맞는지 의심이 들 지경이었다. 그리고 마침내 도깨비가 입을 열었다. 목소리는 깊고 낮았으나, 그 안에 담긴 감정은 투명했다.

    "이름이 없다."

    뜬금없는 말에 분이가 고개를 갸웃했다. 도깨비가 천천히 말을 이어갔다. "나는 이름이 없다. 누가 지어준 적도 없고, 불러준 적도 없다. 수백 년을 이 산골 묘지와 폐가를 떠돌았다. 한 번도 누구의 곁에 머문 적이 없다." 도깨비의 눈에 묘한 빛이 스쳤다. 파란 피부 위로 달빛이 흘렀다.

    "밤길 잃은 나그네에게 도깨비불로 길을 밝혀준 적이 있다. 나그네는 불빛을 보자마자 혼비백산하여 도망쳤다. 산에서 소를 잃은 농부의 소를 찾아 외양간까지 몰아다 준 적이 있다. 농부는 고맙다는 말 대신 무당을 불러 굿을 했다. 부적을 붙이고 소금을 뿌리고, 다시는 오지 말라고 소리쳤다." 도깨비의 커다란 손이 허공을 쥐었다가 펴졌다. "수백 년 동안 어디를 가든 사람들은 나를 보면 비명을 질렀다. 한 번도, 단 한 번도 누군가 나를 보고 도망치지 않은 적이 없다."

    분이는 조용히 듣고 있었다. 가슴 한구석이 이상하게 저릿해지고 있었다. 도깨비가 분이를 바라보았다. 크고 깊은 두 눈에 푸른빛 눈물이 맺혀 있었다.

    "처음 너를 본 것은, 네가 시댁에서 쫓겨나 이 산길을 올라오던 날이었다." 분이의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그날이라면, 세상에서 가장 비참하고 초라했던 그 날. "등짐 하나 달랑 메고 울지도 못하며 걸어오는 뒷모습을 보았다. 그때 알았다. 이 여인에게서 나와 똑같은 냄새가 난다는 것을." 분이가 물었다. "무슨 냄새?" 도깨비가 대답했다. "세상에 발 디딜 곳이 없는 자의 냄새. 존재 자체를 거부당한 자의 냄새."

    분이의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도깨비가 말을 이었다. "그 뒤로 매일 밤 이 집을 찾아왔다. 처음에는 먼발치에서 지켜보기만 했다. 벽 틈새로 바람이 들어오는 걸 보면 가슴이 아팠고, 쌀독이 비어 있는 걸 보면 발이 움직여졌다."

    분이가 조용히 물었다. "그래서 매일 밤 집안일을 해준 거야? 내가 불쌍해서?"

    도깨비가 고개를 저었다. 천천히, 단호하게.

    "불쌍해서가 아니다. 네가 살아 있는 걸 보고 싶어서." 분이의 눈에서 눈물이 한 방울 떨어졌다. "네가 아침에 따뜻한 부뚜막 앞에서 밥을 먹는 걸, 나는 저 산 위에서 지켜보았다. 네가 따뜻한 아궁이 불 앞에 앉아 손을 녹이는 걸 보면, 나도 따뜻해지는 것 같았다. 네가 숨 쉬는 걸 보면, 나도 살아 있는 것 같았다."

    분이는 소리 없이 울었다. 가슴속에서 무언가 뜨거운 것이 차올랐다. 도깨비라는 존재가 무섭지 않았다. 아니, 무섭다는 감정이 다른 감정에 완전히 짓눌려 버렸다. 그것은 측은함이기도 했고, 동질감이기도 했으며, 이름을 붙일 수 없는 또 다른 무엇이기도 했다.

    "이름이 없다고 했지?" 분이가 눈물을 닦으며 물었다. 도깨비가 고개를 끄덕였다. 분이는 한참을 생각하다 입을 열었다. "그럼 내가 하나 지어줘도 돼?" 도깨비의 큰 눈이 동그래졌다. 수백 년을 살면서 누구에게도 받지 못한 것. 이름. "바우. 바위처럼 듬직하니까. 바우라고 부를게." 도깨비가, 아니 바우가, 파란 피부 위로 눈물을 흘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 밤, 세상에서 가장 외로웠던 두 존재 사이에 이름 하나가 놓였다. 그리고 그 이름 하나가, 수백 년의 외로움에 처음으로 금을 내기 시작했다.

    ※ 5: 마을의 소문, 탐욕의 그림자

    그 뒤로 분이의 살림은 눈에 띄게 나아졌다. 무너질 듯하던 초가는 새 기둥과 서까래로 단단해졌고, 지붕의 이엉은 빈틈없이 새로 올려져 비가 새지 않았다. 뒤란의 텃밭에는 무와 배추가 싱싱하게 자라났고, 장독대에는 된장, 간장, 고추장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분이의 볼에 혈색이 돌아왔다. 여위었던 몸에 살이 붙었다. 무엇보다 그 눈에서 죽은 듯한 빛이 사라지고, 살아 있는 사람의 온기가 돌아왔다.

    소문이란 것은 산골 마을에서 바람보다 빨리 퍼지는 법이었다. 봉양 마을 사람들의 입에 수군거림이 오르내리기 시작했다. "저 과부 분이가 요새 살림이 제법이더라." "쌀이 어디서 나는지, 나무가 어디서 오는지, 과부 혼자서 저리 될 리가 있나." "틀림없이 어디서 사내를 끌어들인 게야." 남정네들은 은근한 호기심으로, 여인네들은 시기 섞인 의심으로 분이를 바라보았다.

    소문은 점점 부풀어 올랐다. 그냥 사내가 아니라 도깨비라는 말이 나돌기 시작했다. 이웃 마을 노파 막덕이 술자리에서 흘린 한마디가 불씨가 되었다. "그 집에 도깨비가 들었다니까. 내가 눈 위에 찍힌 발자국을 봤어. 사람 발이 아니여." 이 한마디에 마을이 발칵 뒤집혔다. 호기심이 공포로, 공포가 탐욕으로 변하는 데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양반 좌수 한치근의 귀에 이 소문이 닿은 것은 어느 장날이었다. 한치근은 봉양 마을에서 가장 큰 기와집에 사는 양반이었으나, 그 속은 양반의 체통과는 거리가 먼 탐욕으로 가득 차 있었다. 소작인들의 곡식을 수탈하고, 과부의 논을 헐값에 빼앗고, 고리대금으로 배를 불리는 것이 그의 재주였다. 장터에서 돌아온 한치근은 아랫방에 무당 봉술이를 불러 앉혔다. "도깨비가 과부 집에 들었다는 소문을 들었느냐?" 봉술이가 눈을 번뜩이며 대답했다. "들었지라. 좌수 어른, 도깨비는 금은보화가 있는 곳을 안다고 합디다. 도깨비를 잡아서 부리면 노다지를 캘 수 있지라." 한치근의 눈에 불이 켜졌다. 탐욕의 불이었다.

    며칠 뒤, 한밤중. 한치근은 마을 장정 다섯을 이끌고 분이의 초가로 들이닥쳤다. 횃불이 산기슭을 환하게 밝혔다. 분이가 놀라 방문을 열자 한치근이 대뜸 소리쳤다. "이년아, 도깨비를 숨기고 있지? 당장 내놔라!" 분이가 길을 막아섰다. "여기 도깨비는 없어요. 제발 돌아가세요!" 한치근이 코웃음을 쳤다. "없다고? 그럼 빈 쌀독에 쌀이 저절로 차더냐? 허물어진 집이 저절로 고쳐지더냐? 닥치고 비켜라!" 장정 하나가 분이의 팔을 잡아 옆으로 내던졌다. 분이가 마당 흙바닥에 나동그라졌다.

    한치근이 비열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과부 주제에 밤마다 도깨비랑 무슨 짓을 했는지는 묻지 않겠다. 대신 그놈을 순순히 넘겨라. 그러면 너도 한몫 챙겨주마." 분이가 이를 악물며 소리쳤다. "바우는 당신들이 생각하는 그런 존재가 아니에요! 금은보화 같은 건 없어요! 그냥 돌아가세요!" 하지만 한치근은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무당 봉술이가 준비해 온 철제 그물을 마당에 펼치고, 부적을 사방에 붙이고, 소금을 뿌리며 주문을 외웠다. 덫이 놓인 것이다.

    분이는 흙바닥에 엎드린 채 뒷산을 올려다보았다. '바우야, 오지 마. 오늘 밤은 제발 오지 마.' 하지만 분이의 간절한 기도와는 달리, 이 산의 밤은 이미 돌이킬 수 없는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 6: 도깨비의 복수, 그리고 진짜 마법

    한치근의 덫이 놓인 마당에 긴장이 감돌았다. 장정 다섯이 횃불을 들고 사방을 경계하고, 무당 봉술이는 구석에 쭈그리고 앉아 부적을 태우며 주문을 읊조렸다. 분이는 마당 한쪽에 내팽개쳐진 채 뒷산 어둠을 노려보고 있었다. '제발, 오지 마.'

    하지만 바우는 왔다. 자정이 넘자 뒷산 어둠 속에서 묵직한 발소리가 내려왔다. 쿵, 쿵, 쿵. 장정들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횃불을 든 손이 와들와들 떨렸다. 소나무 그림자 사이로 거대한 형체가 모습을 드러냈다. 달빛 아래 파란 피부가 번뜩였고, 이마의 뿔이 어둠을 가르며 솟아 있었다. 장정 하나가 비명을 질렀다. "도, 도깨비다!"

    바우는 마당으로 성큼성큼 걸어 들어왔다. 분이가 흙바닥에 쓰러져 있는 것을 보자 거대한 몸이 우뚝 멈추었다. 파란 눈동자가 분이의 찢어진 저고리 소매와 흙투성이 얼굴을 훑었다. 그리고 천천히 한치근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 순간, 마당의 온도가 한겨울처럼 뚝 떨어졌다. 바우의 눈에서 뿜어져 나오는 빛이 달빛과는 전혀 다른, 차갑고 서슬 퍼런 것이었기 때문이다.

    한치근이 목소리를 끌어올려 소리쳤다. "그물을 쳐라!" 장정들이 양쪽에서 철제 그물을 던졌다. 무거운 쇠사슬 그물이 바우의 몸을 감쌌다. 무당 봉술이가 부적을 허공에 날리며 주문을 외쳤다. "옴마니반메훔! 도깨비를 묶어라!" 그물에 걸린 바우가 한쪽 무릎을 꿇었다. 한치근의 얼굴에 회심의 미소가 번졌다. "잡았다! 이놈, 금은보화가 어디 묻혀 있는지 대라! 순순히 불면 놓아줄 수도 있다!"

    바우가 고개를 들어 한치근을 올려다보았다. 그리고 낮고 깊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내게 금은보화는 없다. 나는 빗자루와 도끼밖에 쓸 줄 모른다." 한치근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거짓말! 도깨비가 보화를 숨기고 있다는 건 삼척동자도 아는 사실이다!" 한치근이 장정에게 눈짓했다. "매질을 해서라도 실토하게 만들어라!"

    장정 하나가 몽둥이를 치켜들었다. 바로 그 순간, 분이가 몸을 날려 바우 앞에 두 팔을 벌리고 섰다. "때리려면 나를 먼저 때려!" 목소리가 갈라졌지만 눈빛은 단단했다. 한치근이 비웃었다. "미친년, 도깨비를 감싸다니." "이 사람은 나를 해친 적 없어요. 오히려 죽어가던 나를 살린 은인이에요. 당신들이야말로 남의 집에 밤중에 쳐들어와 행패를 부리는 강도잖아요!"

    바우가 분이의 등 뒤에서 천천히 일어섰다. 철제 그물이 팽팽하게 당겨졌다. 바우가 분이를 지그시 내려다보며 나지막이 말했다. "비켜라, 분이." 그 목소리에는 따뜻함과 결연함이 공존했다. 분이가 고개를 돌려 바우를 올려다보았다. 바우의 두 눈이 조용히 빛나고 있었다. 분이가 천천히 옆으로 물러섰다.

    바우의 두 어깨가 솟구쳤다. 그리고 양손으로 철제 그물을 움켜쥐었다. 사슬이 삐걱거리며 비명을 질렀다. 바우가 팔에 힘을 주자 쇠사슬 그물이, 장정 다섯이 달라붙어도 끄떡없을 그 그물이, 마른 삼베를 찢듯 두 쪽으로 갈라졌다. 한치근의 얼굴에서 피가 싹 빠졌다. "저, 저놈이 일부러 잡힌 거였어!"

    그렇다. 바우는 분이가 다칠까 봐 일부러 그물에 걸린 것이었다. 분이의 안전을 확인한 지금, 더 이상 참을 이유가 없었다. 바우가 한 발짝 내딛자 땅이 울렸다. 장정들이 몽둥이를 내던지고 뒤로 나자빠졌다. 무당 봉술이가 부적을 흔들며 소리쳤지만, 바우가 훅 불자 부적이 재가 되어 흩어졌다. 한치근이 비명을 지르며 도망치려 했으나, 바우의 거대한 손이 한치근의 도포 깃을 움켜쥐어 번쩍 들어 올렸다. 바우가 한치근의 코앞에서 말했다. "금은보화를 원했느냐? 좋다. 보여주마. 욕심쟁이에게 돌아가는 보화가 어떤 것인지."

    그 밤 이후, 기이한 일이 벌어졌다. 한치근의 기와집 대들보가 하룻밤 새 좀이 슬어 주저앉았다. 곳간에 가득하던 쌀에는 벌레가 들끓었고, 된장독은 갈라져 장이 땅에 쏟아졌다. 우물물은 탁해져 마실 수 없게 되었고, 외양간의 소는 이유 없이 울타리를 부수고 도망쳤다. 한치근이 반평생 탐욕으로 끌어모은 재산이 눈 녹듯 사라져 갔다. 마을 사람들은 수군거렸다. "도깨비를 건드린 벌이다." 한치근은 결국 꼴이 말이 아닌 행색으로 마을을 떠났고, 분이를 과부라고 손가락질하며 뒷담화를 일삼던 마을 사람들도 입을 꾹 다물었다. 욕심으로 가득 찬 자에게는 재앙이, 마음을 나눈 자에게는 축복이 돌아온 것이다. 그리고 분이의 초가에는 다시 평화로운 밤이 찾아왔다.

    ※ 7: 수명을 나눈 도깨비, 함께 늙어가는 봄

    한치근이 쫓겨나고 봄이 왔다. 산기슭의 초가 주변으로 산벚꽃이 피어올랐다. 분이의 삶은 이전과 달라져 있었다. 더 이상 굶지 않았고, 춥지 않았으며, 무엇보다 외롭지 않았다. 바우는 여전히 밤에 찾아왔다. 하지만 이제 몰래 찾아와 일만 하고 사라지는 것이 아니었다. 마루에 나란히 앉아 달을 보았다. 분이가 끓여준 막걸리를 나눠 마시며, 도깨비는 수백 년 동안 본 산과 강과 별의 이야기를 들려주었고, 분이는 비록 짧지만 치열했던 스물한 해의 인생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어느 봄밤이었다. 산벚꽃 향기가 바람을 타고 마루까지 번져왔다. 분이가 막걸리 잔을 내려놓고 조용히 말했다. "바우야, 나는 네 곁에 계속 있고 싶어." 바우의 큰 눈이 분이를 바라보았다. 기쁨이 스쳤다. 하지만 그 기쁨은 오래가지 못했다. 바우의 표정에 짙은 그늘이 내려앉았다.

    "분이야, 나는 천 년을 산다. 너는 아무리 오래 살아도 백 년을 못 산다. 네가 늙어가는 것을, 네 머리카락이 하얗게 세는 것을, 네 걸음이 느려지는 것을, 그리고 결국 네가 눈을 감는 것을 나는 지켜봐야 한다." 바우의 목소리가 떨렸다. "네가 세상을 떠난 뒤에도 나는 수백 년을 더 살아야 해. 너 없는 수백 년을. 그 외로움을 견딜 자신이 없다. 차라리 지금 이대로, 밤에만 찾아와 네 곁에 잠시 머무는 것이 나을지도 모른다."

    분이의 눈에 눈물이 맺혔다. 서로를 원하면서도 시간이라는 절벽 앞에서 한 발짝도 나아가지 못하는 두 존재. 분이가 바우의 커다란 손을 잡았다. 파란 피부 위로 분이의 작은 손이 올려졌다. "방법은 정녕 없는 거야?" 바우는 대답하지 못했다.

    며칠 뒤, 바우는 마을 뒷산 너머 깊은 골짜기에 있는 산신령의 바위를 찾아갔다. 천 년 묵은 바위 틈에서 흰 수염의 산신령이 모습을 드러냈다. 산신령은 바우의 사연을 듣고 긴 침묵 끝에 입을 열었다.

    "방법이 있기는 하다. 네 수명 천 년을 덜어내어 그 여인에게 나누어 줄 수 있다. 네가 오백 년을 덜면 여인은 오백 년을 더 살 수 있고, 네가 칠백 년을 덜면 여인은 칠백 년을 더 산다. 다만."

    산신령의 눈이 매섭게 빛났다.

    "나눈 수명은 되돌릴 수 없다. 그리고 수명을 나누는 순간 너는 도깨비의 힘을 잃는다. 인간처럼 늙고, 병들고, 아프게 된다. 상처가 나면 피가 나고, 뼈가 부러지면 달포를 앓아야 한다. 도깨비로서의 영원한 생을 버리고 유한한 존재가 되는 것이다. 그래도 하겠느냐?"

    바우는 단 한순간도 망설이지 않았다.

    "하겠습니다."

    산신령이 긴 한숨을 내쉬었다. "어리석은 놈. 영원을 버리고 유한을 택하다니." 바우가 고개를 들어 산신령을 똑바로 바라보며 대답했다. "수백 년을 혼자 살았습니다. 영원이 무엇인지 압니다. 영원은 끝없는 외로움의 다른 이름이었습니다. 분이 곁에서 함께 늙어가는 오십 년이, 혼자 버티는 천 년보다 깁니다."

    의식은 달이 가장 높이 뜬 밤에 치러졌다. 산신령의 바위 앞에서 바우가 무릎을 꿇자, 바우의 몸에서 파란 빛줄기가 피어올랐다. 천 년의 수명이 하나의 빛이 되어 공중에 떠올랐다. 산신령이 그 빛을 갈라 반은 바우에게, 반은 멀리 초가에서 잠든 분이에게 보냈다. 빛줄기가 분이의 가슴 위에 내려앉는 순간, 분이가 잠결에 따뜻한 미소를 지었다.

    바우의 몸에 변화가 시작되었다. 파란 피부가 서서히 옅어져 갔다. 짙은 남빛이 하늘빛으로, 하늘빛이 연한 보랏빛으로, 그리고 마침내 사람의 살빛에 가까운 색으로 바뀌어 갔다. 이마의 뿔이 조금씩 작아졌다.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았지만, 상투를 올리면 감출 수 있을 정도가 되었다. 거대했던 덩치도 한 뼘쯤 줄었다. 여전히 장대한 체구였지만, 사람들 사이에 서도 크게 눈에 띄지 않을 만큼. 완전한 인간은 되지 못했다. 하지만 이제 분이와 같은 속도로 세월을 살아갈 수 있게 되었다.

    새벽녘, 바우가 초가로 돌아왔다. 마루에서 기다리고 있던 분이가 바우의 달라진 모습을 보고 두 손으로 입을 막았다. 바우의 눈에, 처음으로 도깨비의 눈물이 아닌 인간의 눈물이 맺혀 있었다. "분이야, 이제 나도 늙는다. 너와 같이." 분이의 눈에서 눈물이 쏟아졌다.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바우의 넓은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산벚꽃이 바람에 흩날렸다. 꽃잎이 마루 위에 하나둘 내려앉았다. 분이가 눈물을 닦고 물었다. "후회하지 않을 거지?" 바우가 분이의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며 대답했다. "후회는 혼자인 자가 하는 것이다. 우리는 둘이 아니냐."

    분이가 피식 웃었다. "그 말, 내가 하려고 했는데." 바우도 웃었다. 수백 년 만에 처음으로, 외로움이 섞이지 않은 웃음이었다. 세상에서 가장 외로웠던 두 존재가 나란히 앉아 맞이하는 봄날 아침이었다. 영원 대신 유한을 택한 도깨비와, 세상 어디에도 기댈 곳 없던 여인이, 서로의 수명을 반씩 나누어 가진 채, 같은 속도로 늙어가기로 약속한 아침이었다. 초가 지붕 위로 해가 떠오르고 있었고, 산기슭 전체가 벚꽃과 햇살로 물들어 가고 있었다. 이 기이하고도 따뜻한 이야기가 우리에게 일깨워주는 것은 결국 하나이다. 진정한 인연이란 화려한 조건에서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서로의 빈자리를 알아보는 마음에서 피어난다는 오래된 진실이다.

    유튜브 엔딩멘트

    수백 년의 영원보다 사랑하는 사람 곁에서 함께 늙어가는 유한한 시간을 택한 도깨비 바우. 여러분은 어떠신가요? 영원히 외로운 삶과, 유한하지만 따뜻한 삶. 둘 중 하나를 고르라면 무엇을 택하시겠습니까? 오늘 이야기가 마음에 드셨다면 구독과 좋아요, 그리고 댓글로 여러분의 생각을 들려주세요. 고전야담모음, 다음 이야기에서 또 만나 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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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 photorealistic cinematic still set in a moonlit traditional Korean thatched-roof cottage (choga) courtyard during the Joseon dynasty era. On the left side, a young Korean widow woman in her early twenties wearing a worn white jeogori and gray chima sits on the wooden maru (porch), looking up with tear-filled but hopeful eyes. On the right side, a towering muscular dokkaebi (Korean goblin) with pale blue-tinted skin, a single short horn on his forehead, and a gentle melancholic expression stands holding a straw broom, wearing a rough hemp garment. Cherry blossom petals drift through the silver moonlight between them. The background shows a dark mountain silhouette and a large full moon casting ethereal blue-white light across the scene. The mood is hauntingly beautiful, lonely yet tender. Shot with shallow depth of field, warm and cool tones contrasting, ultra-detailed skin textures, cinematic lighting reminiscent of a Korean historical drama. 16:9 aspect ratio, no tex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