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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부와 도깨비의 은밀한 인연 《청구야담(靑丘野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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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고 어두운 산골짜기, 바람만 불어도 서까래가 흔들리는 쓰러져가는 초가집에 젊은 과부 연화가 홀로 살고 있었습니다. 끼니를 잇기조차 버거운 가난 속에서도 고운 심성을 잃지 않았던 그녀에게 어느 비바람 치는 밤, 산채만 한 덩치의 정체불명 불청객이 찾아옵니다. 무시무시한 뿔을 가진 도깨비와의 기묘한 첫 만남은 두려움도 잠시, 따뜻한 조밥 한 그릇을 매개로 세상에 둘도 없는 은밀하고도 유쾌한 우정으로 변해갑니다. 하지만 갑자기 불어난 재물은 탐욕스러운 악당의 눈을 멀게 하고, 연화는 절체절명의 위기에 빠지게 됩니다. 과연 도깨비의 신묘한 방망이는 연화의 재물과 행복을 모두 지켜낼 수 있을까요? 웃음과 감동, 그리고 통쾌한 반전이 있는 조선시대 야담 속으로 여러분을 초대합니다.
※ 1: 비바람 치는 밤, 솥뚜껑을 들고 찾아온 뿔 달린 손님
강원도 깊은 산골, 해가 지면 호랑이 울음소리가 문풍지를 흔드는 외진 마을 끝에 금방이라도 주저앉을 듯한 초가집 한 채가 위태롭게 서 있었습니다. 억수 같은 비가 양동이로 퍼붓듯 쏟아지는 칠흑 같은 밤이었습니다. 천둥소리가 우르르 쾅쾅 하늘을 가르고, 번개가 번쩍일 때마다 앙상한 나뭇가지들이 기괴한 그림자를 드리웠습니다. 초가집 안 작은 부엌에서는 스물다섯에 남편을 여읜 젊은 과부 연화가 희미한 호롱불 아래에서 한숨을 내쉬며 빈 쌀독을 들여다보고 있었습니다.
'이 일을 어쩐담. 그제 긁어모은 조가 마지막이었는데, 이제 정말 바닥이 드러났구나. 내일부터는 뒷산에 올라가 소나무 껍질이라도 벗겨다 삶아 먹어야 할까 보다.'
연화는 나무 주걱으로 쌀독 바닥을 박박 긁어 겨우 한 줌도 안 되는 좁쌀을 바가지에 담아냈습니다. 시집온 지 일 년 만에 역병으로 남편을 떠나보내고, 시부모마저 잇달아 세상을 떠나자 남은 것은 빚과 이 쓰러져가는 초가집뿐이었습니다. 동네 사람들은 젊고 고운 과부가 혼자 살면 험한 꼴을 당한다며 수군거렸지만, 연화는 특유의 씩씩하고 고운 심성으로 남의 집 밭매기며 바느질 품을 팔아 하루하루를 견뎌내고 있었습니다.
그녀는 부뚜막에 걸린 작은 무쇠솥에 물을 붓고 좁쌀과 말린 시래기를 한 움큼 넣어 불을 지폈습니다. 장작이 축축하게 젖어 매운 연기가 자욱하게 피어올랐습니다. 콜록거리며 눈물을 훔치던 그때였습니다.
쿵! 쿵! 쿵!
마치 거대한 바위가 굴러오는 듯한 발소리가 마당에서부터 울려 퍼졌습니다. 단순한 바람 소리나 짐승의 발소리가 아니었습니다. 땅이 흔들리고 부엌의 시렁 위에 놓인 사기그릇들이 달그락거리며 춤을 추었습니다.
'이 깊은 밤에 웬 발소리일까? 설마 산에서 내려온 화적패인가, 아니면 길 잃은 호랑이인가?'
연화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아 부지깽이를 두 손으로 꽉 쥐었습니다. 문밖에서 거친 숨소리가 들리더니, 방문 창호지에 집채만 한 그림자가 어른거렸습니다. 그림자의 머리 위에는 뾰족한 뿔이 두 개나 솟아 있었고, 어깨는 문짝보다 넓어 보였습니다.
"아이고, 배고파라! 비는 왜 이리 내리는 것이야, 내 도포 자락 다 젖었네! 이 집에 사람 있소? 아, 냄새 좋다! 구수한 시래기 삶는 냄새가 십 리 밖까지 진동을 하는구나!"
우렁찬 목소리에 문짝이 덜컹거리더니, 바람과 함께 부엌문이 벌컥 열렸습니다. 연화는 비명을 지를 뻔했으나 간신히 입을 틀어막았습니다. 문 앞에 서 있는 존재는 키가 구 척은 되어 보이는 거대한 사내였습니다. 덥수룩한 수염에 부리부리한 눈, 이마 양쪽에 솟아난 뭉툭한 뿔, 그리고 허리에는 낡은 호랑이 가죽을 두르고 손에는 큼직한 방망이 대신 무쇠 솥뚜껑을 우산처럼 들고 있는 기괴한 몰골이었습니다. 누가 보아도 옛이야기에나 나오는 도깨비였습니다.
도깨비는 부엌 안으로 고개를 쑥 들이밀더니 연화와 눈이 마주치자 흠칫 놀라며 뒷걸음질을 쳤습니다. 그러고는 들고 있던 솥뚜껑으로 제 얼굴을 반쯤 가리며 의외로 수줍은 목소리를 내었습니다.
"어이쿠, 놀라게 해드려 송구하오! 내 덩치가 좀 커서 그렇지, 해치려는 마음은 손톱만큼도 없소이다. 산 너머 도깨비 장터에 갔다가 내기 씨름을 열 판이나 했더니 배가 등가죽에 붙어서 도저히 한 발자국도 못 가겠더란 말이오. 마침 이 집에서 기가 막힌 밥 냄새가 나길래 홀린 듯이 찾아왔는데, 부디 찬밥 한 술만 적선해 주실 수 있겠소?"
꼬르륵, 꾸르륵! 도깨비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그의 배에서 천둥소리 못지않은 요란한 소리가 울려 퍼졌습니다. 그 소리가 어찌나 크고 우스꽝스러웠던지, 잔뜩 겁에 질려 부지깽이를 들고 떨던 연화의 입가에서 저도 모르게 푸스스 웃음이 새어 나왔습니다.
'세상에, 사람 잡아먹는 무서운 도깨비인 줄 알았더니 배가 고파서 체면이고 뭐고 다 잊은 불쌍한 길손이구나. 저 큰 덩치에 얼마나 굶었으면 배에서 저런 소리가 날까.'
두려움이 눈 녹듯 사라진 자리에 연화 특유의 따뜻한 연민이 자리 잡았습니다. 그녀는 손에 쥐고 있던 부지깽이를 조용히 내려놓고, 치마에 손을 닦으며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습니다.
"그런 사정이 있으셨군요. 누추한 곳이지만 비를 맞고 서 계시지 말고 어서 안으로 들어오십시오. 마침 저녁을 짓던 참이니, 변변치 않은 음식이라도 괜찮으시다면 따뜻하게 한 그릇 대접하겠습니다."
도깨비는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연화를 바라보았습니다. 보통 사람들은 자신의 모습만 보아도 기절초풍을 하거나 팥죽을 뿌리며 쫓아내기 바빴는데, 이 연약한 여인은 도리어 자신을 손님으로 정중히 맞이하는 것이 아닙니까. 도깨비는 감격하여 코를 훌쩍이더니, 좁은 부엌문으로 몸을 우겨 넣어 구석에 쭈그리고 앉았습니다.
"크흐흑, 참으로 고마운 분이시오! 내 육백 년을 살면서 뿔 달린 내 모습을 보고도 기절하지 않고 밥을 주겠다는 고운 심성의 처자는 처음 보았소. 내 성씨가 김 씨라 산중에서는 김 서방이라 불리는데, 부인의 은혜는 내 평생 잊지 않겠소!"
연화는 웃음을 참으며 솥에서 김이 모락모락 나는 시래기 조밥을 가장 큰 사발에 수북하게 퍼 담았습니다. 자신이 먹을 몫까지 남김없이 긁어 담아 양푼에 가까운 그릇을 채우고, 구석 항아리에 아껴두었던 도토리묵과 메밀묵 몇 조각, 그리고 잘 익은 깍두기 한 접시를 소반에 정갈하게 차려 도깨비 앞에 놓아주었습니다.
"찬이 없어 부끄럽습니다. 장터에서 씨름을 열 판이나 하셨다니 기력이 많이 쇠하셨을 텐데, 어서 식기 전에 드시지요."
"아이고, 이 귀한 메밀묵까지! 내가 세상에서 제일 좋아하는 것이 이 메밀묵이라오! 잘 먹겠습니다요!"
김 서방이라 자처한 도깨비는 체면도 잊은 채 숟가락을 들고 밥을 퍼먹기 시작했습니다. 한 입에 밥이 반 공기씩 사라졌고, 메밀묵은 씹지도 않는지 꿀떡꿀떡 넘어갔습니다. 눈 깜짝할 사이에 빈 사발이 되자, 도깨비는 사발에 묻은 밥알 하나까지 혀로 싹싹 핥아먹은 뒤 바닥에 내려놓고는 배를 통통 두드렸습니다.
"꺼어억! 아, 이제야 살 것 같구먼! 임금님 수라상이 부럽지 않은 천하일미였소이다!"
시원하게 트림을 한 도깨비는 그제야 부엌 안을 찬찬히 둘러보았습니다. 텅 빈 쌀독과 바닥까지 긁어낸 무쇠솥, 그리고 연화 앞에는 물 한 대접조차 놓여 있지 않다는 사실을 깨달은 도깨비의 부리부리한 눈에 굵은 눈물이 그렁그렁 맺혔습니다.
'아뿔싸, 이 착한 부인이 자기 먹을 저녁밥을 내게 통째로 다 내어준 것이로구나! 세상에 이리도 어질고 고운 사람이 어찌 이리 가난하게 산단 말인가.'
도깨비는 훌쩍거리며 소매로 눈물을 닦더니,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연화에게 큰절을 올렸습니다. 좁은 부엌에서 거대한 도깨비가 절을 하느라 엉덩이가 부뚜막에 부딪혀 솥뚜껑이 요란하게 떨어졌지만, 그의 표정만큼은 세상 누구보다 진지했습니다.
"부인, 염치없는 이 김 서방이 부인의 마지막 끼니를 다 축내고 말았소. 하지만 걱정하지 마시오! 우리 도깨비 종족이 원래 은혜는 열 배로 갚고 원수는 백 배로 갚는 법이오. 오늘 받은 이 따뜻한 밥 한 그릇과 메밀묵의 은혜, 내 반드시 하늘이 깜짝 놀랄 만큼 크게 보답하겠소이다! 그럼 내일 밤에 또 봅시다요!"
도깨비는 말을 마치자마자 솥뚜껑을 머리에 이고 휙 하니 바람을 일으키며 부엌문을 박차고 나갔습니다. 비바람 속으로 푸른 도깨비불이 둥실 떠오르더니 순식간에 산 너머로 사라졌습니다. 홀로 남은 연화는 텅 빈 그릇을 보며 배시시 웃음을 지었습니다.
"보답은 무슨 보답이람. 그저 배고픈 길손 하나 배불리 먹여 보냈으니 그걸로 내 마음도 배가 부른걸."
그녀는 숭늉이라도 끓여 마실 요량으로 가마솥에 물을 부으며, 오늘 밤은 유난히 마음이 따뜻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자신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꿀 기적의 시작이라는 것을 꿈에도 모르고 있었습니다.
※ 2: 마당에 쏟아진 엽전 비와 고리대금업자 황 부자의 검은 그림자
다음 날 새벽, 밤새 몰아치던 비바람이 거짓말처럼 그치고 맑은 새소리가 처마 끝을 간질였습니다. 연화는 물 한 모금으로 주린 배를 달래고 산에 나물이라도 캐러 갈 채비를 하며 방문을 열었습니다. 그런데 방문을 여는 순간, 연화는 눈앞에 펼쳐진 광경에 입을 다물지 못하고 그 자리에 얼어붙고 말았습니다.
"어머나, 세상에! 이게 다 무슨 일이란 말인가!"
좁은 초가집 마당이 발 디딜 틈조차 없이 꽉 차 있었습니다. 마당 한쪽에는 하얀 이팝나무 꽃처럼 고운 햅쌀이 가득 담긴 쌀가마니가 스무 가마니나 산처럼 쌓여 있었고, 다른 한쪽에는 비단 필과 고운 무명천, 그리고 놋그릇 세트가 반짝거리고 있었습니다. 그뿐만이 아니었습니다. 마루 위에는 묵직한 엽전 꾸러미들이 수십 개나 쌓여 아침 햇살을 받아 황금빛으로 빛나고 있었습니다.
연화가 조심스럽게 마루로 다가가자, 엽전 더미 위에 칡넝쿨로 엮은 엉성한 편지 한 장이 놓여 있었습니다. 비뚤빼뚤 마치 어린아이가 나뭇가지로 쓴 듯한 글씨였습니다.
"어제 먹은 시래기 조밥과 메밀묵 값이라오. 훔친 물건 아니니 안심하고 쓰시오! 깊은 산속 바위 밑에 주인 없이 묻혀 있던 옛날 보물들과, 우리 도깨비들이 농사지은 쌀이니 마음껏 먹고 부자 되시오! 아참, 오늘 밤에는 메밀묵에 김치 좀 넉넉히 썰어 넣어주시면 고맙겠소. 김 서방 올림."
편지를 읽은 연화는 기가 막히기도 하고 고맙기도 하여 마당 한가운데 주저앉아 한참 동안 웃음을 터뜨렸습니다. 그날 밤부터 도깨비 김 서방과 연화의 은밀하고도 유쾌한 인연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습니다. 김 서방은 밤마다 찾아와 연화가 정성껏 쑤어놓은 메밀묵을 맛있게 얻어먹었고, 그 대가로 산삼이며 녹용, 금붙이와 곡식을 끊임없이 날라다 주었습니다.
연화는 갑작스럽게 굴러들어 온 이 막대한 재물을 허투루 쓰지 않았습니다. 먼저 마을에서 굶주리는 노인들과 고아들에게 쌀을 나누어 주었고, 헐벗은 이웃들에게 옷감을 베풀었습니다. 그러고도 재물이 산더미처럼 남자, 그녀는 쓰러져가던 초가집을 허물고 그 자리에 열두 대문이 달린 우람하고 기품 있는 기와집을 지었습니다.
하지만 그녀는 결코 교만해지지 않았습니다. 기와집에서 가장 깊숙하고 아늑한 별채를 비워두어 밤마다 찾아오는 김 서방의 전용 사랑방으로 만들어 주었고, 매일 직접 부엌에 나가 구수한 밥과 메밀묵을 챙기는 일을 게을리하지 않았습니다. 마을 사람들은 연화가 하늘이 내린 복을 받았다며 칭송이 자자했습니다.
그러나 빛이 밝으면 그림자도 짙어지는 법이었습니다. 이 소문은 아랫마을에서 악명 높은 고리대금업자 황 부자의 귀에까지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황 부자는 배가 남산만 하게 나오고 눈매가 교활한 자로, 가난한 백성들에게 쌀 한 말을 빌려주고 가을에 열 말을 뜯어내는 피도 눈물도 없는 수전노였습니다.
"뭐라? 찢어지게 가난하던 과부 연화가 하루아침에 만석꾼 부럽지 않은 부자가 되어 열두 대문 기와집을 지었다고? 허허, 거참 기가 막힐 노릇이군. 힘없는 과부가 그 많은 재물을 어찌 모았겠느냐. 필시 땅속에서 금광을 발견했거나 어딘가에 보물 지도를 숨겨둔 것이 틀림없어!"
탐욕으로 눈이 번들거린 황 부자는 자신의 심복인 애꾸눈 칠복이를 불러 은밀한 지시를 내렸습니다.
"칠복아, 당장 먹물 좀 먹은 서생을 시켜 가짜 빚문서를 하나 감쪽같이 만들어라. 죽은 연화의 남편이 살아생전 나에게 은자 오천 냥을 빌려 갔고, 제때 갚지 못하면 집과 전 재산은 물론이요 과부의 몸까지 노비로 넘긴다는 내용으로 말이야! 관아의 사또 영감에게는 내가 미리 기름칠을 해둘 터이니, 꼼짝없이 그 기와집과 재물은 다 내 차지다. 크하하하!"
며칠 뒤, 화창한 오후였습니다. 연화가 마당에서 동네 아낙들과 함께 구호미를 나누어 주고 있을 때, 대문이 부서져라 걷어차이며 황 부자와 험상궂은 깍두기 머리의 하인들이 들이닥쳤습니다.
"이 집 주인인 연화는 당장 나오너라! 남의 돈을 떼어먹고 이리 호화로운 기와집에서 신선놀음을 하고 있다니, 간이 배 밖으로 나왔구나!"
황 부자가 배를 내밀며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자, 마당에 있던 아낙들이 놀라 뒷걸음질을 쳤습니다. 연화는 당황하지 않고 침착하게 앞으로 나서며 물었습니다.
"황 어르신, 갑자기 남의 집 대문을 차고 들어오시어 무슨 해괴한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까? 저는 어르신께 돈 한 푼 빌린 적이 없사옵니다."
"어허, 이 뻔뻔한 여편네 보게! 네가 빌린 것이 아니라 네 죽은 남편이 빌려 간 돈이다! 자, 여기 네 남편의 손도장이 선명하게 찍힌 차용증이 보이지 않느냐? 원금에 삼 년 치 이자까지 합쳐 은자 오천 냥! 오늘 당장 갚지 못하면 이 집과 땅문서를 전부 내놓고 너는 우리 집 부엌데기 노비로 들어가야 할 것이다!"
황 부자가 코앞에 들이민 종이에는 분명 남편의 이름과 붉은 지장이 찍혀 있었지만, 먹물이 마른 지 얼마 되지 않은 듯 고약한 냄새가 풍기는 명백한 위조 문서였습니다.
'세상에, 죽은 지 삼 년이나 된 서방님의 이름을 팔아 이리도 흉측한 거짓말을 꾸며내다니! 저 종이는 올해 새로 만든 한지가 분명한데, 어찌 삼 년 전 문서란 말인가!'
연화가 문서의 거짓됨을 조목조목 따지려 했으나, 황 부자는 이미 사또와 입을 맞춘 뒤였습니다. 때마침 기다렸다는 듯이 포졸들이 들이닥쳐 다짜고짜 연화의 팔을 포박했습니다.
"관아에 고발장이 접수되었다! 빚도 갚지 않고 오히려 큰소리를 친다니, 게다가 과부 혼자 사는 집에 이 많은 재물이 어디서 났겠느냐! 관아의 창고를 털었거나 도적떼와 내통한 것이 분명하니 당장 오라를 받아라!"
포졸들은 황 부자의 눈짓에 따라 마루 밑을 뒤지는 척하더니, 자신들이 몰래 숨겨온 관아 직인이 찍힌 비단 한 필을 꺼내 들며 소리쳤습니다.
"여기 증거가 나왔다! 관아에서 잃어버린 비단이 왜 이 집에서 나오는가! 당장 이 여인을 옥에 가두고 가산을 전부 압수하라!"
아무리 억울함을 호소해도 소용없는 노릇이었습니다. 연화는 영문도 모른 채 포승줄에 묶여 관아의 차가운 감옥으로 끌려가는 신세가 되고 말았습니다. 그녀는 끌려가면서도 자신의 안위보다 밤에 찾아올 도깨비 김 서방을 걱정했습니다.
'오늘 밤 김 서방이 오면 내가 없는 것을 보고 얼마나 놀랄까. 부뚜막에 데워놓은 메밀묵이라도 잘 찾아 먹어야 할 텐데...'
자신이 절체절명의 위기에 처한 순간에도 도깨비의 저녁밥을 걱정하는 연화의 고운 마음씨는 밤하늘의 별빛처럼 빛나고 있었습니다.
※ 3: 감옥에 갇힌 연화와 도깨비 방망이의 기묘한 소동
그날 밤, 보름달이 구름 뒤로 숨어든 야심한 시각이었습니다. 아무것도 모르는 도깨비 김 서방은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거대한 멧돼지 한 마리를 어깨에 들쳐 메고 연화의 기와집 담장을 훌쩍 뛰어넘었습니다.
"부인! 김 서방 왔소이다! 오늘은 깊은 산속에서 아주 실한 멧돼지를 한 마리 잡았소! 구워 먹으면 메밀묵 못지않게 맛이 기가 막히다오... 어라? 왜 이리 집안이 시끌벅적하고 낯선 냄새가 나는 게야?"
김 서방이 코를 벌름거리며 안채를 들여다보자, 그곳에는 연화 대신 뚱뚱한 황 부자와 그의 하인들이 상다리가 부러지게 술상을 차려놓고 흥청망청 술판을 벌이고 있었습니다. 대문에는 관아의 봉인 딱지가 붙어 있었고, 황 부자는 연화의 금비녀와 비단옷을 어루만지며 기분 나쁜 웃음을 흘리고 있었습니다.
"크하하! 그 어리석은 과부 년, 지금쯤 차가운 감옥 바닥에서 눈물이나 짜고 있겠지! 내일 사또 영감이 판결만 내리면 이 집도, 저 창고에 가득 찬 쌀과 엽전도 전부 내 것이 된다 이 말씀이야! 칠복아, 술 한 상 더 가져오너라!"
담장 위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던 김 서방의 두 눈이 시뻘겋게 타올랐습니다. 머리 위의 두 뿔에서 파지직 하고 푸른 번개가 튀었고, 주변의 공기가 순식간에 얼어붙을 듯이 차가워졌습니다.
'뭐라? 저 돼지 같은 놈이 우리 착하고 어진 연화 부인에게 누명을 씌워 감옥에 가두고 이 집을 가로채려 한단 말이지? 감히 내 은인을 건드려? 오늘 도깨비 방망이 맛이 어떤 것인지 뼈저리게 느끼게 해주마!'
김 서방은 멧돼지를 마당 구석에 내려놓고, 허리춤에서 도깨비 방망이를 뽑아 들었습니다. 하지만 당장 방망이로 저놈들의 머리를 내려치면 연화 부인이 살인 누명까지 쓸까 염려되어, 도깨비 특유의 기묘하고도 통쾌한 환술로 혼쭐을 내주기로 마음먹었습니다.
"수리수리 마수리, 도깨비 장난 시작이다! 먹던 술은 구정물이 되고, 뜯던 고기는 개똥이 되어라, 뚝딱!"
김 서방이 방망이를 허공에 한 번 휘두르자, 황 부자와 하인들이 마시던 향긋한 청주가 순식간에 시궁창 냄새가 진동하는 시커먼 구정물로 변했고, 입에 물고 있던 닭다리는 말라비틀어진 짚신짝과 소똥으로 변했습니다.
"우웨에엑! 퉤퉤퉤! 이, 이게 무슨 맛이야! 칠복아, 네 이놈! 감히 주인 상에 소똥을 올려놓아?"
"나, 나리! 제 입안에도 짚신짝이 들어있사옵니다! 으아악! 상 위의 음식들이 전부 구더기와 지렁이로 변했사옵니다!"
안채는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었습니다. 김 서방은 낄낄거리며 웃더니 방망이를 한 번 더 휘둘렀습니다. 그러자 방 안의 병풍 속에 그려져 있던 호랑이와 독수리들이 그림에서 펄쩍 뛰어내려 살아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호랑이가 어흥 하고 포효하며 황 부자의 엉덩이를 덥석 물었고, 독수리들이 날아다니며 하인들의 상투를 쪼아댔습니다.
"으아아악! 귀신이다! 도깨비다! 사람 살려라!"
황 부자는 바지가 벗겨지는 줄도 모르고 맨발로 마당으로 뛰쳐나왔습니다. 그러나 마당에 쌓여 있던 빗자루와 절구공이들이 스스로 둥실 떠오르더니, 도망치는 황 부자와 하인들의 등짝과 궁둥이를 사정없이 두들겨 패기 시작했습니다. 퍽! 퍽! 찰싹! 밤하늘에 돼지 멱따는 소리가 울려 퍼졌고, 황 부자 일당은 코피를 쏟고 이가 부러진 채로 대문 밖으로 굴러떨어져 걸음아 나 살려라 도망을 쳤습니다.
통쾌하게 악당들을 쫓아낸 김 서방은 곧장 바람처럼 날아가 관아의 옥사로 향했습니다. 차갑고 습한 감옥 안에는 연화가 짚더미 위에 웅크리고 앉아 덜덜 떨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감옥 한구석, 옆방에는 행색은 초라하지만 눈빛만은 형형하게 빛나는 젊은 선비 한 명이 앉아 연화를 위로하고 있었습니다.
"부인, 너무 상심하지 마시오. 내가 보아하니 황 부자라는 자와 이 고을 사또의 행패가 도를 넘었소. 하늘이 무심치 않으니 내일 재판에서는 반드시 진실이 밝혀지고 부인의 억울함이 풀릴 것이오."
선비의 다정하고 기품 있는 목소리에 연화는 고개를 숙여 감사를 표했습니다.
"선비님의 따뜻한 말씀만으로도 큰 위로가 됩니다. 저는 죄를 지은 것이 없으니 두렵지 않으나, 다만 집에 두고 온 귀한 손님이 허탕을 치고 돌아갈까 그것이 마음에 걸릴 뿐입니다."
그 말을 옥사 창살 밖에서 듣고 있던 김 서방은 코끝이 찡해져 눈물을 훔쳤습니다.
'아이고, 저런 천사 같은 분을 보았나! 자기가 감옥에 갇혀 있으면서도 내 걱정을 하다니! 어허, 그런데 옆방에 있는 저 멀끔하게 생긴 총각은 누구신가? 관상을 보니 이마가 훤하고 눈빛이 바른 것이 장차 크게 될 인물이구먼. 우리 연화 부인을 저리 다정하게 챙기는 것을 보니 마음이 아주 곱구나!'
김 서방은 투명하게 모습을 감춘 채 감옥 안으로 쑥 들어갔습니다. 간수들은 이미 김 서방이 뿌린 잠가루에 취해 코를 골며 세상모르게 자고 있었습니다. 김 서방은 연화 앞에 따뜻한 여우 털 배자와 김이 모락모락 나는 꿀떡 한 바구니를 내려놓고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부인! 김 서방이 왔소이다! 얼마나 놀라셨소!"
갑자기 허공에서 거대한 도깨비가 나타나자 옆방에 있던 젊은 선비는 깜짝 놀라 뒤로 넘어질 뻔했으나, 연화는 오히려 반가운 얼굴로 미소를 지었습니다.
"김 서방님! 오셨군요. 집에서 저를 못 찾아 많이 놀라셨지요? 부뚜막에 메밀묵을 두었는데 잡수셨는지요?"
"그까짓 메밀묵이 문제요? 내가 지금 당장 이 쇠창살을 엿가락처럼 휘어서 부인을 업고 도망치겠소! 어서 내 등에 업히시오!"
김 서방이 쇠창살을 두 손으로 잡고 막 힘을 주려 하자, 연화가 다급히 고개를 저으며 그의 팔을 말렸습니다.
"아니 됩니다, 김 서방님! 지금 이리 도망치면 저는 영원히 도적이라는 누명을 쓰고 평생 숨어 살아야 합니다. 저는 부끄러운 짓을 하지 않았으니, 내일 동헌 마당에서 당당하게 누명을 벗고 제 집으로 걸어 들어가고 싶습니다."
그때, 놀란 가슴을 진정한 옆방의 선비 이도윤이 창살 사이로 다가와 김 서방에게 정중히 포권을 취하며 말했습니다.
"놀랍소이다. 전설로만 듣던 의로운 도깨비 공을 직접 뵙게 될 줄이야. 소생은 팔도를 유랑하는 선비 이도윤이라 하오. 부인의 말씀이 백번 옳소이다. 지금 탈옥을 하면 사또와 황 부자에게 더 큰 빌미를 주게 됩니다. 대신 도깨비 공께서 신통력이 있으시다니, 내일 아침 재판에서 저 사악한 자들이 두 번 다시 거짓말을 하지 못하도록 작은 도움을 주실 수 있겠소?"
이도윤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김 서방에게 귀띔을 하자, 김 서방은 무릎을 탁 치며 껄껄 웃었습니다.
"크하하! 과연 글을 읽은 선비님이라 머리가 비상하시구먼! 좋소, 내 오늘 밤 사또의 안방과 황 부자의 금고를 샅샅이 뒤져서 내일 아침 세상에서 가장 재미난 구경거리를 만들어 놓겠소! 부인, 이 떡 드시고 이 털배자 덮고 푹 주무시오! 내일 아침이면 모든 것이 제자리로 돌아올 것이오!"
김 서방은 든든하게 큰소리를 치고는 다시 푸른 연기가 되어 밤하늘로 솟구쳐 올랐습니다. 연화는 도깨비가 두고 간 따뜻한 떡을 옆방의 이도윤에게도 나누어 주며, 두 사람은 차가운 감옥 안에서도 다가올 내일의 통쾌한 반전을 기다리며 미소를 지었습니다.
※ 4: 동헌 마당에서 벌어진 진실 게임과 통쾌한 반전
이튿날 아침, 관아의 동헌 마당에는 구름 같은 인파가 몰려들었습니다. 마음씨 착한 과부 연화가 도둑 누명을 쓰고 재판을 받는다는 소식에 마을 백성들이 모두 걱정스러운 마음으로 모여든 것이었습니다.
관아 높은 단상 위에는 탐관오리 사또가 위엄 있는 척 수염을 쓰다듬으며 앉아 있었고, 그 옆에는 어젯밤 도깨비에게 혼쭐이 나 얼굴이 퉁퉁 붓고 이가 두 개나 빠진 황 부자가 붕대를 칭칭 감은 채로 독기 어린 눈빛을 번뜩이고 있었습니다.
"죄인 연화를 대령하라!"
사또의 호령에 포승줄에 묶인 연화가 동헌 마당 가운데로 끌려 나왔습니다. 비록 옥에서 하룻밤을 보냈으나, 김 서방이 가져다준 음식을 먹고 푹 쉰 덕에 그녀의 얼굴은 오히려 평온하고 당당했습니다.
사또는 재판을 빨리 끝내고 황 부자에게 뒷돈을 챙길 생각으로 다짜고짜 호통을 쳤습니다.
"네 이년! 가난뱅이 과부가 하루아침에 큰 기와집을 짓고 재물을 모은 것도 수상하거늘, 황 부자의 돈 오천 냥을 떼어먹고도 모자라 관아의 비단까지 훔치다니! 죄상이 명백하니 변명의 여지가 없다. 황 부자, 그 증거가 되는 차용증을 백성들 앞에서 똑똑히 읽어 보아라!"
"예, 사또 나리! 에헴, 자 다들 똑똑히 들어라! 내가 바로 이 차용증의 주인이다!"
황 부자는 의기양양하게 품에서 어제 준비한 가짜 차용증을 꺼내 활짝 펼쳤습니다. 그런데 그때, 동헌 지붕 위 기와 끝에 투명하게 앉아 있던 도깨비 김 서방이 방망이를 가볍게 톡 두드렸습니다.
"진실의 주둥이가 열려라, 뚝딱!"
김 서방의 주문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기이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황 부자가 문서를 보며 입을 열었는데,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입이 저절로 나불대기 시작한 것입니다.
"나 황 부자는 천하에 둘도 없는 사기꾼이자 도둑놈입니다! 이 문서는 어제 애꾸눈 칠복이를 시켜 오십 냥을 주고 위조한 가짜 문서이며, 연화의 재산이 탐나서 사또 영감에게 은자 천 냥을 뇌물로 주고 꾸며낸 모략입니다요! 헉! 이, 내 입이 왜 이래! 읍읍!"
황 부자는 사색이 되어 두 손으로 제 입을 틀어막았지만, 손을 떼는 순간 입은 다시 춤을 추듯 나불거렸습니다.
"게다가 어제 연화의 집에서 나온 관아의 비단은 사또 영감이 직접 빼돌려 내게 준 것을 포졸들을 시켜 몰래 숨겨둔 것입니다! 아아악! 내가 미쳤나 봐!"
동헌 마당에 모인 백성들 사이에서 거대한 술렁임과 함께 폭소가 터져 나왔습니다. 단상 위의 사또는 얼굴이 홍당무처럼 붉어져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습니다.
"저, 저놈이 갑자기 실성을 했구나! 어젯밤에 머리를 다치더니 헛소리를 지껄이는 것이다! 여봐라, 저 황 부자의 입을 막고 문서만 이리 가져오너라!"
이방이 황급히 달려가 황 부자의 손에서 차용증을 뺏어 사또에게 바쳤습니다. 사또가 문서를 받아 들고 백성들에게 보여주려 펼치는 순간, 종이 위에 적혀 있던 먹물 글씨들이 마치 살아있는 개미 떼처럼 스멀스멀 움직이더니 전혀 다른 글자로 재조합되었습니다. 그리고 종이에서 우렁찬 도깨비의 목소리가 동헌 전체가 떠나가라 울려 퍼졌습니다.
"사또와 황 부자는 백성들의 피를 빨아먹는 거머리 같은 놈들이다! 사또의 침상 밑을 파보면 그동안 백성들에게 수탈한 황금과 관아 창고에서 훔친 은자 삼천 냥이 든 궤짝이 나올 것이니라!"
"히이익! 요, 요망한 종이로다! 당장 저 종이를 찢어버려라!"
사또가 기겁을 하며 종이를 바닥에 내던지자, 이번에는 하늘에서 갑자기 거대한 회오리바람이 불어왔습니다. 지붕 위에 있던 김 서방이 어젯밤 사또의 침상 밑과 황 부자의 비밀 금고에서 통째로 뽑아온 묵직한 무쇠 궤짝 다섯 개를 허공에서 동헌 마당 한가운데로 우르르 쏟아부은 것입니다.
콰당탕! 쨍그랑!
궤짝들이 떨어지며 자물쇠가 부서졌고, 그 안에서 관아의 직인이 선명하게 찍힌 관아 은자들과 백성들에게 억지로 빼앗은 땅문서, 그리고 황 부자와 사또가 뇌물을 주고받으며 기록한 비밀 장부가 마당 가득 쏟아져 나왔습니다.
"와아! 저기 우리 집 땅문서가 있다!"
"관아 창고에 있어야 할 구휼미 장부가 왜 사또 궤짝에서 나오는 것이냐!"
성난 백성들이 고함을 지르며 앞으로 몰려나오자, 사또는 다리가 풀려 단상 아래로 데구루루 굴러떨어졌습니다. 사또는 부들부들 떨며 포졸들에게 소리쳤습니다.
"포, 포졸들은 무엇 하느냐! 저 과부 년이 요술을 부려 관아를 어지럽히고 있다! 당장 저 여인과 여기 모인 무리를 모두 잡아들여라!"
그러나 포졸들이 창을 들고 나서려는 순간, 김 서방이 방망이를 휘두르자 포졸들의 손에 들린 창이 전부 흐물흐물한 대파와 무청으로 변해버렸습니다. 또한 사또가 입고 있던 화려한 관복은 순식간에 누더기 거지 옷으로 변했고, 머리 위의 사모는 깨진 요강으로 바뀌어 사또의 머리에 푹 씌워졌습니다.
"푸하하하! 사또 머리에 요강이 씌워졌다!"
"대파를 들고 누구를 찌르겠다는 것이냐!"
백성들의 웃음소리가 하늘을 찌르는 가운데, 동헌 대문 쪽에서威嚴(위엄) 있고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모든 소음을 잠재우며 울려 퍼졌습니다.
"죄 없는 백성을 핍박하고 관아의 재물을 도둑질한 탐관오리는 그 자리에 꿇어앉거라!"
군중이 좌우로 갈라지며 걸어 들어온 사람은 다름 아닌 어젯밤 감옥에서 연화를 위로하던 젊은 선비, 이도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초라하던 행색은 온데간데없고, 손에는 서슬 퍼런 황금빛 마패가 찬란한 아침 햇살을 받아 번쩍이고 있었습니다.
※ 5: 어사출두의 비밀과 도깨비가 맺어준 붉은 실
"암행어사 출두요!"
이도윤의 뒤를 따라 잠복해 있던 역졸 수십 명이 우렁찬 함성과 함께 동헌 마당으로 일제히 쏟아져 들어왔습니다. 마패를 높이 치켜든 어사 이도윤의 기개에 동헌 마당에 모인 백성들은 일제히 환호성을 지르며 땅에 엎드렸습니다.
"어사 나리 만세! 백성들의 원한을 풀어주십시오!"
머리에 깨진 요강을 뒤집어쓰고 있던 사또와 붕대를 감은 황 부자는 '암행어사'라는 네 글자에 혼비백산하여 그 자리에 거품을 물고 나동그라졌습니다. 이도윤은 단상 위로 성큼성큼 걸어 올라가 연화의 포승줄을 직접 칼로 끊어주며 온화한 미소를 지었습니다.
"연화 부인, 고생이 많으셨소. 소생은 한양에서 왕명을 받고 이 지역의 탐관오리와 토호들의 횡포를 조사하러 내려온 암행어사 이도윤이라 합니다. 일부러 죄인을 가장하여 옥에 들어갔다가 부인의 억울한 사연과 고운 성품을 직접 목격하게 되었소."
연화는 포승줄이 풀린 손목을 매만지며 감격에 겨워 고개를 숙였습니다.
"선비님께서... 아니, 어사 나리께서 그리 높으신 분인 줄 꿈에도 몰랐사옵니다. 저 같은 미천한 백성을 구해주시니 이 은혜를 어찌 갚아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이도윤은 연화를 일으켜 세운 뒤, 바닥에 기어 다니며 살려달라고 비는 사또와 황 부자를 매서운 눈빛으로 내려다보았습니다.
"이 고을 사또는 봉고파직하고 모든 재산을 몰수하여 국고로 환수한다! 또한 고리대금업자 황 부자는 위조 문서로 양민을 협박하고 관아와 결탁하여 부정을 저질렀으니, 그 전 재산을 털어 피해 입은 백성들에게 골고루 나누어 주고 본인은 삼천 리 밖 외딴섬으로 유배를 보낼 것이다! 여봐라, 이 자들을 당장 포박하여 압송하라!"
역졸들이 달려들어 사또와 황 부자, 그리고 애꾸눈 칠복이까지 모두 오라로 묶어 끌어내자, 백성들은 덩실덩실 춤을 추며 어사 이도윤과 연화를 향해 박수를 보냈습니다.
재판이 통쾌하게 끝나고, 연화는 자신의 무죄를 도와준 어사 이도윤을 대접하기 위해 집으로 정중히 초대했습니다. 저녁 무렵, 연화의 기와집 사랑채에서는 조촐하지만 정성 가득한 밥상이 차려졌습니다. 어젯밤 도깨비가 어지럽혀 놓았던 흔적은 김 서방이 미리 방망이를 휘둘러 티끌 하나 없이 말끔하게 치워둔 상태였습니다.
이도윤은 연화가 차려준 구수한 시래기국과 메밀묵을 맛보며 감탄을 금치 못했습니다.
"한양의 내로라하는 대갓집 음식도 수없이 먹어보았으나, 부인이 차려주신 이 소박한 밥상만큼 마음을 따뜻하게 해주는 음식은 처음이오. 도깨비 공께서 왜 그리도 부인의 밥상에 반했는지 이제야 알 것 같소이다."
"과찬이십니다, 나리. 그저 시골 아낙의 거친 솜씨일 뿐인데 맛있게 드셔주시니 송구할 따름입니다."
연화가 수줍게 볼을 붉히며 고개를 숙이자, 이도윤은 숟가락을 내려놓고 진지한 눈빛으로 연화를 바라보았습니다. 비록 과부의 몸이었으나, 고난 속에서도 기품을 잃지 않고 남을 먼저 배려하는 연화의 모습에 이도윤의 마음속에는 이미 깊은 연정이 싹트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리도 어질고 지혜로운 여인을 어찌 홀로 외롭게 둘 수 있단 말인가. 내 어사 소임을 마치고 한양으로 돌아갈 때, 신분의 벽을 넘어서라도 이 여인과 평생을 함께하고 싶구나.'
하지만 양반 사대부이자 현직 어사인 자신이 선뜻 과부에게 청혼을 했다가 행여 연화가 부담을 느끼거나 곤란해할까 봐 이도윤은 쉽게 입을 떼지 못하고 망설이고 있었습니다.
그 모습을 지붕 위에서 메밀묵 한 접시를 들고 훔쳐보고 있던 도깨비 김 서방은 답답하다는 듯이 가슴을 쳤습니다.
'어이구, 저 답답한 양반네를 보았나! 눈에서는 꿀이 뚝뚝 떨어지면서 왜 말을 못 하는 것이야! 우리 연화 부인도 저 총각을 싫어하는 눈치가 아닌데 말이지. 에라 모르겠다, 은혜를 갚으려면 끝까지 확실하게 갚아야지! 이 김 서방이 오늘 밤 중매쟁이로 나서야겠구먼!'
김 서방은 장난기 가득한 미소를 지으며 방망이를 살짝 흔들었습니다. 그러자 사랑채 마당에 있던 감나무에서 잘 익은 홍시 두 개가 톡 떨어지더니, 바람을 타고 날아와 이도윤과 연화의 소반 위에 나란히 굴러왔습니다. 동시에 방 안의 호롱불이 은은한 분홍빛으로 바뀌고, 어디선가 향긋한 매화 꽃잎이 방 안으로 흩날려 들어와 두 사람의 어깨 위에 내려앉았습니다.
그뿐만이 아니었습니다. 김 서방이 목소리를 가다듬고 마치 하늘에서 내려오는 신선의 목소리처럼 위엄 있게 외쳤습니다.
"이보시오, 어사 양반! 우리 연화 부인처럼 하늘이 내린 복덩이를 눈앞에 두고 무엇을 그리 망설이시오! 이 김 서방이 보증하건대, 이 부인을 맞이하면 삼대가 평안하고 자손이 번창할 천생연분이오! 놓치고 땅을 치며 후회하지 말고 어서 마음을 고백하시오!"
우렁찬 도깨비의 훈수에 이도윤과 연화는 동시에 얼굴이 홍시처럼 붉어졌습니다. 어색하던 침묵이 깨지고, 두 사람은 서로의 붉어진 얼굴을 마주 보더니 이내 참지 못하고 환한 웃음을 터뜨렸습니다.
이도윤은 용기를 내어 자리에서 일어나 연화 앞에 정중히 무릎을 꿇고 앉았습니다.
"도깨비 공의 말씀이 꼭 내 마음과 같소이다, 연화 부인. 소생 비록 부족한 사람이나, 부인의 고운 마음씨와 지혜를 평생 곁에서 모시며 아껴주고 싶소. 과부라는 세상의 편견 따위는 내게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소. 부디 소생의 반려가 되어 함께 길을 걸어주실 수 있겠소?"
진심이 가득 담긴 이도윤의 고백에 연화의 눈가에서 맑은 눈물 한 방울이 흘러내렸습니다. 평생 혼자 외롭게 살아갈 줄 알았던 삶에 찾아온 봄날 같은 인연이었습니다. 연화는 고운 치맛자락을 여미며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나리... 저같이 부족한 사람을 그리 귀하게 여겨주시니, 제 남은 생을 다해 나리를 섬기겠나이다."
두 사람의 손이 조심스럽게 맞닿는 순간, 지붕 위에서 지켜보던 김 서방은 너무나 기쁜 나머지 덩실덩실 도깨비 춤을 추다가 기와장 두 개를 깨뜨리고 말았습니다. 우당탕하는 소리에 밤하늘로 푸른 불꽃이 폭죽처럼 터져 올랐고, 그것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유쾌한 축복의 불빛이었습니다.
※ 6: 수호신이 남긴 마지막 선물과 영원한 인연
계절이 바뀌어 따스한 봄바람이 불어오는 길일, 연화의 열두 대문 기와집에서는 마을 역사상 가장 성대하고 축복 넘치는 혼례식이 열렸습니다. 암행어사의 임무를 훌륭히 마치고 돌아온 이도윤과 마음씨 착한 연화가 마침내 백년가약을 맺는 날이었습니다.
마을 백성들은 모두 모여 자신의 일처럼 기뻐하며 잔치 음식을 나누어 먹었습니다. 가난할 때나 부자가 되었을 때나 한결같이 이웃을 돌보았던 연화였기에, 사람들은 진심으로 그녀의 새로운 출발을 축복해 주었습니다. 연지곤지를 찍고 화려한 활옷을 입은 연화는 세상 누구보다 아름다웠고, 사모관대를 차려입은 이도윤의 입가에는 떠나지 않는 미소가 걸려 있었습니다.
잔치가 무르익고 어스름한 달빛이 마당을 비출 무렵, 신방에 단둘이 앉아 있던 이도윤과 연화의 방 창문이 스르륵 열렸습니다. 시원한 밤바람과 함께 구수한 흙냄새가 풍기더니, 별채에서 메밀묵을 잔뜩 먹고 배가 볼록해진 도깨비 김 서방이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오늘따라 김 서방은 어디서 구했는지 삐뚤어진 갓을 머리에 얹고, 낡은 호랑이 가죽 대신 나름대로 멋을 부린 푸른색 도포를 걸치고 있었습니다.
"크흐흑, 우리 부인... 아니, 이제는 어사 마님이시구먼! 오늘 참으로 선녀님처럼 곱소이다! 이 김 서방이 장가가는 것도 아닌데 왜 이리 코끝이 찡하고 눈물이 나는지 모르겠소!"
김 서방이 주먹만 한 눈물을 뚝뚝 흘리며 훌쩍거리자, 연화는 자리에서 일어나 도깨비의 커다란 손을 따뜻하게 잡아주었습니다.
"김 서방님, 이 모든 것이 다 서방님께서 저를 도와주시고 지켜주신 덕분입니다. 비 오던 그날 밤, 제 부엌에 찾아와 주시지 않았다면 오늘의 이 행복도 없었을 것입니다."
이도윤 또한 자리에서 일어나 김 서방에게 정중하게 큰절을 올렸습니다.
"도깨비 공, 공께서 베풀어주신 은혜와 우리 부부를 맺어주신 큰 뜻을 내 가문의 이름으로 대대손손 잊지 않겠소. 한양으로 올라가더라도 이곳 기와집은 그대로 두어 언제든 우리가 내려와 머물 것이니, 공께서도 언제나 우리와 함께해 주시오."
김 서방은 쑥스러운 듯 머리의 뿔을 긁적이더니, 품 안에서 황금빛 보자기에 싸인 묵직한 물건 하나를 꺼내 두 사람 앞에 내려놓았습니다. 보자기를 풀자 그 안에는 영롱한 빛을 내뿜는 옥으로 만든 작은 도깨비 방망이 한 쌍과, 아무리 퍼내도 쌀이 줄어들지 않는다는 전설의 작은 놋쇠 주걱이 들어 있었습니다.
"자, 이것은 이 김 서방이 주는 혼례 선물이오! 이제 부인 곁에 이리도 든든하고 훌륭한 서방님이 생겼으니, 나 같은 뿔 달린 도깨비가 밤마다 불쑥불쑥 찾아오면 두 분 정 나누시는 데 방해만 될 것이오."
연화가 아쉬운 마음에 눈시울을 붉히며 말했습니다.
"김 서방님,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설마 이제 다시는 오지 않으시려는 것입니까? 저는 서방님과 나누던 밤참 시간이 얼마나 즐거웠는데요."
"에이, 부인도 참! 내가 어디 멀리 간답니까? 다만 이제부터는 눈에 보이지 않는 이 집안의 터줏대감이자 수호신으로 남겠다는 말씀이지요! 이 옥방망이를 안방 시렁 위에 올려두시면, 잡귀나 도적 떼는 얼씬도 못 할 것이고 태어날 아기들도 병치레 없이 무럭무럭 자랄 것이오. 대신 보름날 밤마다 장독대 위에 내가 좋아하는 메밀묵 한 접시랑 막걸리 한 사발만 올려주시오. 그러면 내가 몰래 와서 맛있게 먹고 집안을 든든히 지켜드리리다!"
김 서방은 환하게 웃으며 두 사람을 향해 손을 흔들었습니다.
"어사 나리, 우리 연화 부인 눈에 눈물 나게 하면 그날로 내 방망이가 나리 엉덩이를 찾아갈 줄 아시오! 두 분, 백년해로하시고 아들딸 낳고 오래오래 행복하시오!"
그 말을 끝으로 도깨비 김 서방의 모습은 수만 개의 황금빛 반딧불이로 변하더니, 기와집의 처마 끝과 기둥, 그리고 마당의 나무들로 스며들듯 흩어져 사라졌습니다. 그 순간 집안 전체에 따뜻하고 평화로운 기운이 감돌며, 마치 거대한 품이 집을 포근하게 감싸 안는 듯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그 후로 이도윤과 연화는 금슬 좋게 지내며 총명하고 건강한 삼 남매를 낳아 길렀습니다. 이도윤은 조정에 나아가 백성을 위하는 훌륭한 재상이 되었고, 연화는 변함없이 가난한 이들을 돌보며 만인의 존경을 받는 정경부인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매달 보름날 밤이면, 정경부인 연화는 어김없이 직접 메밀묵을 쑤어 장독대 위에 정성껏 올려두었습니다. 다음 날 아침에 가보면 메밀묵 접시는 언제나 혀로 핥은 듯 깨끗하게 비워져 있었고, 그 옆에는 아이들이 가지고 놀 예쁜 산열매나 반짝이는 조약돌들이 가지런히 놓여 있곤 했습니다.
비바람 치던 밤, 가난한 과부가 베푼 따뜻한 조밥 한 그릇에서 시작된 도깨비와의 은밀하고도 아름다운 인연은 그렇게 세월이 흘러도 변치 않는 전설이 되어, 사람들의 입에서 입으로 유쾌하고도 따뜻한 이야기로 오래도록 전해 내려왔습니다.
유튜브 엔딩멘트
오늘 준비한 《청구야담》 속 과부와 도깨비의 은밀하고도 유쾌한 인연 이야기, 재미있게 들으셨나요? 자신이 가진 마지막 밥 한 그릇까지 기꺼이 내어준 연화의 따뜻한 마음씨가 결국 도깨비의 마음도 움직이고, 나쁜 악당들을 물리치며 평생의 좋은 배필까지 만나는 큰 복으로 돌아왔습니다. 우리 삶에서도 작은 친절과 선한 마음이 언제 어떤 기적 같은 행운으로 돌아올지 모르는 일입니다. 오늘 이야기가 여러분의 마음에 따뜻한 미소를 드렸다면, 구독과 좋아요, 그리고 알림 설정까지 부탁드립니다. 여러분의 따뜻한 댓글은 다음 이야기를 만드는 데 큰 힘이 됩니다. 오늘도 평안하고 복된 밤 되시기를 바랍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