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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광대 출신 며느리 지킨 도깨비

    광대의 딸이라는 이유로 시댁에서 멸시받던 며느리의 서러움을, 도깨비가 곁에서 함께합니다. 도깨비의 도움으로 며느리는 위기에 처한 시댁을 구해내고, 신분이 아니라 사람됨으로 마침내 온 집안의 사랑과 인정을 받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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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후킹멘트

    양반가에 시집왔지만 천한 광대의 딸이라며 짐승만도 못한 취급을 받는 며느리. 매일 밤 남몰래 뒷산에서 피눈물을 흘리던 그녀 앞에, 낡은 빗자루에서 깨어난 도깨비가 나타납니다! "네 눈물에서 짠내가 나서 못 살겠다!" 며느리의 서러움을 달래주던 도깨비. 그러던 어느 날, 콧대 높던 시댁 집안에 가문이 망할 크나큰 위기가 닥치는데... 과연 천덕꾸러기 며느리는 도깨비와 함께 가문을 구하고 진정한 가족으로 인정받을 수 있을까요?

    ※ 1: 광대의 딸이라는 신분 때문에 지독한 시집살이를 당하며 뒷산에서 홀로 눈물짓는 연희.

    조선 팔도에서 제일간다는 뼈대 깊은 양반가. 구름에 닿을 듯 높이 솟은 으리으리한 솟을대문과 끝없이 이어진 기와지붕들은 이 집안이 누리고 있는 막강한 권세와 부귀영화를 고스란히 보여주고 있었다. 담장 너머로는 언제나 고기 굽는 냄새와 비단옷 스치는 소리가 끊이지 않았지만, 그 화려하고 눈부신 풍경의 이면에는 짐승만도 못한 참혹한 취급을 받으며 하루하루 숨죽여 살아가는 가여운 여인이 한 명 있었다. 그녀의 이름은 연희. 잣눈같이 희고 고운 얼굴에 비단결보다 더 고운 마음씨를 지녔지만, 그녀에게는 평생을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며 괴롭히는 지독한 꼬리표가 하나 있었다. 바로 한평생 전국 방방곡곡의 장터를 떠돌며 줄을 타고 춤을 추며 재주를 부리던, 천하디천한 남사당패 광대의 딸이라는 신분이었다. 이 오만한 양반가에서 연희를 며느리로 들인 이유는 단 하나뿐이었다. 원인 모를 깊은 병에 걸려 오늘내일하며 피를 토하는 외아들의 목숨을 건져보겠다고, 용하다는 무당의 말에 따라 액받이 제물로 삼기 위해 헐값에 데려온 것이었다. 그러니 시어머니를 비롯한 시댁 식구들 그 누구도 연희를 사람으로 대접하지 않았다. 꼭두새벽 닭이 울기도 전부터 일어나 캄캄한 밤이 될 때까지 온 집안의 궂은일을 도맡아 하면서도, 그녀에게 돌아오는 것은 시어머니의 매서운 호통과 싸늘한 멸시, 그리고 매질뿐이었다.

    "어딜 감히 천한 광대 핏줄이 이 신성하고 뼈대 있는 양반가의 대청마루에 함부로 더러운 발을 들이려 하느냐! 네 아비라는 작자가 장터 바닥에서 치마를 두르고 엉덩이를 흔들며 천박하게 동냥질을 하더니, 네년도 그 더러운 버릇을 버리지 못하고 밤낮없이 부엌과 안방을 들락거리는구나. 네년의 그 천한 숨결이 닿을까 두려우니 당장 내 눈앞에서 썩 물러가라!"

    "어머니, 용서하십시오. 아버님과 서방님 진지가 식을까 염려되어 잰걸음으로 서두르다 그만 발소리를 내고 말았습니다. 다음부터는 각별히 조심하겠습니다."

    "시끄럽다, 입을 다물지 못할까! 네년이 올린 밥상에서는 장터 바닥의 퀴퀴한 시궁창 냄새가 진동을 하여 밥을 넘길 수가 없다. 뼛속까지 천하고 상스러운 것은 아무리 값비싼 비단옷을 입혀 놓아도 역겨운 티가 나는 법이지. 당장 뒤뜰 우물가에 가서 산더미처럼 쌓인 이불 빨래나 다듬어라. 오늘 해가 서산으로 넘어가기 전까지 그 많은 빨래를 새하얗게 다 끝내지 못하면, 오늘 저녁밥은커녕 물 한 모금도 마실 생각 하지 말아라!"

    시어머니의 표독스럽고 날 선 호통에 연희는 고개를 푹 숙인 채 도둑고양이처럼 뒷걸음질을 쳤다. 얇고 다 해진 하얀 무명치마 자락을 꽉 쥔 두 손이 두려움과 추위에 파르르 떨렸지만, 연희는 꾹 다문 입술 새로 새어 나오는 깊은 서러움을 억지로 삼키며 소리 없이 뒤뜰 우물가로 향했다. 한겨울, 살을 에듯 차가운 칼바람이 몰아치는 우물물은 살얼음이 둥둥 떠 있었다. 연희는 언 물에 붉게 튼 손을 담그고, 산처럼 쌓인 두꺼운 무명천을 방망이로 내리치기 시작했다. 젖은 이불의 무게에 허리는 당장이라도 끊어질 듯 아파왔고, 찬물에 얼어붙은 손등은 곳곳에 동상으로 쩍쩍 갈라져 붉은 피가 배어 나왔다. 따뜻한 안방에서는 병든 남편의 기침 소리와 시어머니의 호사스러운 웃음소리가 들려왔지만, 액받이로 쓰이다 언젠가 버려질 자신의 기구하고 처량한 운명이 한없이 서글프기만 했다. 해가 뉘엿뉘엿 지고 온 집안에 구수한 저녁 짓는 냄새가 진동할 무렵, 꽁꽁 언 손을 입김으로 호호 불며 간신히 빨래를 마친 연희에게 주어진 것은, 부엌데기 하녀들조차 먹다 남겨 버린 차갑고 딱딱한 식은 누룽지 한 덩어리뿐이었다. 그것마저도 감지덕지하며 주린 배를 채워야 하는 자신의 처지가 너무도 가엾었다.

    아무도 자신을 찾지 않는, 칠흑같이 어둡고 차가운 깊은 밤이 되어서야, 연희는 살그머니 뒷문으로 빠져나와 앙상한 겨울나무들만 유령처럼 서 있는 뒷산 기슭으로 홀로 올라갔다. 사람들의 차가운 눈길이 닿지 않는 거대한 바위 뒤에 웅크리고 몸을 숨긴 연희는, 그제야 하루 종일 꾹꾹 눌러 참았던 피눈물을 왈칵 쏟아냈다. 행여나 우는 소리가 새어 나가 시어머니의 귀에 들어갈세라, 두 손으로 입을 틀어막은 채 짐승처럼 꺽꺽대며 흐느끼는 그녀의 얇은 어깨가 처절하게 흔들렸다.

    '어머니, 아버지... 광대의 딸로 태어난 것이 도대체 이리도 천벌을 받을 만큼 큰 죄란 말입니까. 저도 남들처럼 따뜻한 아랫목에서 사랑하는 가족들과 마주 앉아 웃으며 밥 한술 뜨고 싶습니다. 뼈가 으스러져라 일하고 온갖 구박을 견뎌내도 제게 돌아오는 것은 끔찍한 매질과 저주의 욕설뿐이니, 차라리 장터에서 줄을 타다 헛디뎌 돌아가신 우리 아버지 곁으로 저승길을 따라가고 싶은 심정입니다. 이 차갑고 끔찍한 지옥 같은 곳에서, 숨도 쉬지 못하는 이 양반가에서 저는 대체 어찌 살아야 한단 말입니까...'

    원망과 슬픔이 뒤섞인 뜨거운 눈물이 하얀 뺨을 타고 쉴 새 없이 흘러내려 꽁꽁 얼어붙은 흙바닥을 적셨다. 그런데 그 서러운 눈물방울들이 바위 틈새에 버려져 있던 아주 낡고 시커먼 빗자루 하나를 촉촉하게 적시고 있다는 사실을, 슬픔에 빠진 연희는 전혀 알지 못했다. 매일 밤 연희가 쏟아낸 짠 피눈물을 고스란히 머금은 그 낡은 빗자루 틈새에서, 아주 희미하지만 기이하고 신비로운 푸른빛이 조금씩, 조금씩 새어 나오며 산속의 정적을 깨우기 시작했다.

    ※ 2: 연희의 눈물방울에 깨어난 장난꾸러기 도깨비

    "아이고, 짜다 짜! 퉤퉤! 눈물에 소금을 대체 얼마나 때려 부은 게야? 매일 밤 머리맡에서 이리 짭짤하고 뜨거운 물이 폭포수처럼 뚝뚝 떨어지니 내 도무지 잠을 잘 수가 있어야지! 아주 소금 간이 제대로 배어버렸어!"

    적막한 산속의 고요함을 산산조각 내는, 엉뚱하고도 천둥처럼 쩌렁쩌렁한 목소리에 연희는 화들짝 놀라며 쏟아내던 눈물을 거칠게 훔치고 고개를 번쩍 들었다. 어두운 바위 뒤편, 아무도 없어야 할 그 음산한 곳에, 허리춤에는 커다란 호랑이 가죽을 두르고 헝클어진 머리에는 작은 뿔이 하나 불쑥 솟아 있는 거대한 체구의 사내 하나가 떡하니 서서 새끼손가락으로 귀를 후비고 있었다. 산만한 덩치와 우락부락한 얼굴을 가졌지만, 끔찍하게 무섭다기보다는 오히려 두 눈에 장난기가 한가득 담긴 커다랗고 동그란 눈망울이 어딘가 모르게 우스꽝스러워 보이는 기이한 모습이었다.

    "누, 누구십니까? 뉘신데 이 야심한 한밤중에 뼈대 있는 양반집 뒷산에 함부로 들어오시다니요... 행여 도적이십니까?"

    "누구긴 누구야! 네년이 하도 밤마다 바위 뒤에 숨어서 질질 짜대는 바람에, 백 년 만에 꿀 같은 단잠에서 강제로 깨어난 산도깨비지! 내가 바로 이 거대한 산을 다스리는 주인이자, 저기 바위 틈새에 처박혀 썩어가는 낡은 빗자루에 깃들어 있던 영험하고 위대한 도깨비 님 아니더냐. 쯧쯧, 달덩이처럼 얼굴은 반반하고 곱게 생겨가지고 날마다 사연 많은 귀신처럼 피눈물을 쏟아내니, 내 바위 밑에 가만히 누워 있다가 가슴이 답답하고 궁금해서 못 참고 나와봤다. 대체 무슨 그리 억울하고 끔찍한 사연이 있길래 달밤마다 이리 서럽게 통곡을 하는 게냐?"

    전설 속에서나 듣던 도깨비라는 말에 연희는 눈을 화등잔만 하게 동그랗게 떴다. 어릴 적 장터를 떠돌 때 아버지가 밤마다 무릎에 눕혀놓고 들려주던 옛이야기 속에서는 사람을 잡아먹는 무시무시한 요물인 줄로만 알았건만, 지금 눈앞에 서서 툴툴거리는 도깨비는 오히려 투박하고 정 많은 동네 아저씨처럼 친근하고 따뜻해 보였다. 시집온 이후로 단 한 번도 누군가 자신의 울음소리를 귀 기울여 들어주고 그 까닭을 다정하게 물어봐 준 적이 없었기에, 연희의 가슴 가장 깊은 곳에서 형용할 수 없는 깊은 위안과 안도감이 밀려왔다.

    "저는... 저 산 아래 높게 솟은 솟을대문 양반집의 며느리입니다. 천한 남사당패 광대의 핏줄이라는 이유만으로 사람 취급도 받지 못하고, 매일 소나 돼지 같은 짐승처럼 일만 하며 끔찍한 구박을 받고 있지요. 오늘 하루 종일 살얼음이 언 차가운 우물물에 손을 담그고 산더미 같은 이불 빨래를 다 해냈지만, 제게 돌아온 것은 부엌데기들도 안 먹는 딱딱하게 식은 누룽지 한 조각뿐이었습니다. 너무도 춥고 서러워도 이 넓은 세상에 하소연할 곳 하나 없어, 이리 밤마다 아무도 모르게 숨어서 우는 것뿐입니다. 위대하신 도깨비님의 귀한 잠을 깨웠다면 제발 용서하십시오..."

    연희가 고개를 숙이며 다 해진 얇은 무명옷 자락 사이로 드러난, 동상으로 쩍쩍 갈라져 붉은 피가 말라붙은 처참한 손등을 보여주자, 도깨비의 우락부락한 얼굴이 순식간에 험악하게 일그러지며 콧김을 씩씩 뿜어냈다.

    "뭐라? 솟을대문 집 그 늙은 여우 같은 시어미 짓이렷다! 알량한 양반이라는 작자들이 겉만 번지르르하지 속은 시커멓게 썩어 문드러져서는, 힘없고 가여운 며느리의 고혈을 빨아먹으려 드는구나. 에잉, 쯧쯧! 네 아비가 광대면 어떠냐. 고된 삶에 지친 백성들 앞에서 재주를 부려 웃기고 즐겁게 해주는 광대가, 방구석에 앉아 백성들 피나 빨아먹으며 기생집에서 노닥거리는 그 위선자 양반놈들보다 백 번 천 번은 더 고귀하고 훌륭한 법이다! 이제 그만 울어라. 내가 꼴에 명색이 도깨비인데, 가여운 여인네의 슬픈 눈물은 딱 질색이니 말이다."

    도깨비는 투박하고 퉁명스럽게 말하며 커다란 손을 허공에 대고 휙 휘저었다. 그러자 펑 하는 소리와 함께 허공에서 따뜻하고 구수한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윤기가 자르르 흐르는 쌀밥과 고기가 잔뜩 들어간 진한 고깃국, 그리고 형형색색의 진귀하고 맛깔스러운 반찬들이 산더미처럼 담긴 화려한 잔칫상 소반 하나가 떡하니 나타났다.

    "자, 어서 먹어라! 우리 산도깨비들이 인근 부잣집 제사상에서 몰래 슬쩍 빼온 가장 귀하고 맛있는 음식들이니 맛이 아주 기가 막힐 게다. 딱딱한 누룽지 따위로 배를 채우고 어찌 그 끔찍하고 모진 시집살이를 버텨내겠느냐. 눈치 보지 말고 팍팍 퍼먹고 힘을 든든하게 내야지!"

    연희는 눈앞에 펼쳐진 믿을 수 없는 마법 같은 광경에 입을 다물지 못했다.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흰쌀밥의 구수한 냄새가 코끝을 스치자 텅 빈 뱃속에서 요란한 소리가 울렸다. 머뭇거리던 연희가 조심스레 숟가락을 들어 뜨거운 고기 국물을 한입 떠먹자, 얼어붙었던 몸과 마음의 상처가 눈 녹듯 사르르 녹아내리는 듯했다. 도깨비는 허겁지겁 눈물을 흘리며 밥을 먹는 연희의 곁에 털썩 주저앉아, 커다란 손으로 턱을 괸 채 아주 다정하고 빙그레 미소를 지으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급하게 먹지 말고 천천히 꼭꼭 씹어 먹어라, 체할라. 앞으로 밤마다 배가 고프고 시어미의 구박에 서러움이 북받치면 주저하지 말고 이 뒷산 바위로 올라오너라. 이 잘생기고 능력 있는 도깨비 님이 언제든 네 말동무가 되어주고 세상에서 제일 맛있는 밥도 챙겨줄 터이니. 속이 시커먼 양반놈들은 몰라도, 우리 도깨비들은 인간의 신분 따위는 개나 줘버리고 너처럼 마음 착하고 맑은 사람만 특별히 챙기고 아끼거든. 내 말이 무슨 뜻인지 알겠느냐?"

    그날 밤, 칠흑같이 어둡고 차가웠던 뒷산의 바위 뒤편에서는, 양반가에 시집온 이후 단 한 번도 웃어본 적 없던 연희의 맑고 고운 웃음소리가 밤하늘의 별빛처럼 아름답게 흩어졌다. 무섭고 기괴하게만 여겨지던 도깨비는 세상 그 누구보다 든든하고 다정한 비밀 친구가 되어주었고, 연희는 도깨비의 조건 없는 따뜻한 위로와 응원 덕분에 가혹한 시집살이 속에서도 내일을 살아갈 작은 희망의 불씨를 가슴속에 단단히 품게 되었다.

    ※ 3: 시어머니의 억지스러운 무리한 심부름

    그로부터 며칠 뒤, 조용하던 시댁 집안에 커다란 소란이 일며 성대한 잔치 준비가 시작되었다. 바로 시어머니의 환갑을 축하하기 위해 한양 도성에서 내로라하는 높은 벼슬아치 양반들과 먼 친척들이 무려 수십 명이나 이 집으로 몰려오기로 한 것이다. 가문의 위세를 과시하고픈 시어머니는 잔치 준비를 핑계로, 평소 눈엣가시처럼 여기던 연희를 더욱 가혹하고 끔찍하게 부려먹기 시작했다.

    "잔치가 당장 내일모레 코앞인데 며느리라는 것이 어찌 이리 굼뜨고 미련하단 말이냐! 당장 헛간 광에 들어가서 무거운 쌀 세 가마니를 네 손으로 직접 다 빻아 고운 가루를 내어 떡을 찌고, 그게 끝나면 한밤중에 저 깊은 산에 올라가 오늘 밤 안으로 가장 굵고 귀한 잣과 향긋한 송이버섯을 산더미처럼 따 오너라. 한양에서 오시는 귀하신 양반 어르신들 입맛이 얼마나 까다롭고 무서운데, 행여나 음식이 조금이라도 모자라거나 맛이 형편없으면 근본 없는 광대 딸년을 며느리로 들여 집안을 다 망쳤다는 끔찍한 소리를 들을 터! 내일 아침 동이 트기 전까지 이 수많은 일들을 네 혼자 힘으로 완벽하게 다 해놓지 못하면, 그 길로 당장 네년의 머리채를 잡아 친정으로 쫓아낼 줄 알아라!"

    혼자서는 일주일을 밤낮없이 꼬박 일해도 족히 걸릴 엄청난 양의 잔치 준비를 단 하룻밤 만에, 그것도 칠흑같이 어둡고 맹수가 우글거리는 산속에서 귀한 식재료를 구해와 다 해내라는 것은 상식적으로 말도 안 되는 지독한 억지였다. 핑계거리를 만들어 기어이 연희를 집안에서 내쫓으려는 시어머니의 악독하고 교묘한 수작이 분명했다. 연희는 부엌 구석에 주저앉아 앞치마에 얼굴을 묻고 절망감에 휩싸여 흐느꼈다. 한밤중에 굶주린 호랑이가 득실거리는 깊은 산에 오르는 것도 두려웠지만, 그 산더미 같은 쌀을 빻아 수십 시루의 떡을 어찌 가녀린 여인의 몸으로 혼자 다 찐단 말인가.

    눈물이 범벅이 된 얼굴로 어깨가 축 처진 채 사람 몸통만 한 커다란 바구니를 들고 비척비척 뒷산으로 향하던 연희. 그녀의 서글프게 훌쩍이는 소리를 멀리서 듣고 어김없이 바위 뒤에서 우락부락한 도깨비가 불쑥 튀어나왔다.

    "또 우냐, 또 울어! 내가 그토록 고깃국에 흰쌀밥을 든든히 먹여놨더니 왜 또 지지리 궁상맞게 눈물바람이야. 이번엔 또 그 늙은 여우 같은 시어미가 무슨 말도 안 되는 억지를 부리며 널 괴롭힌 게야? 아주 이번엔 내가 그 집 기둥뿌리를 뽑아버릴 테다!"

    연희가 바닥에 주저앉아 훌쩍이며 환갑잔치에 얽힌 자초지종을 털어놓자, 도깨비의 머리에 난 뿔이 화산처럼 시뻘겋게 달아오르며 씩씩거리는 콧김과 함께 불길을 뿜어냈다.

    "이런 피도 눈물도 없는 악독한 노인네를 보았나! 연약한 며느리를 아주 소나 말 같은 노비보다도 못하게 부려 먹고 기어이 내쫓으려 작정을 했구나. 하룻밤 만에 쌀 세 가마니를 빻아 떡을 찌고, 엄동설한 한밤중에 송이와 잣을 따 오라고? 흥, 걱정 마라 연희야. 우리 영험한 산도깨비들이 누군지, 그 양반집 늙은이에게 아주 똑똑히 보여주마. 넌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말고, 그냥 내 옆에서 이 따뜻한 도깨비불 가에 앉아 구운 밤이나 까먹으며 구경이나 하고 있거라!"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도깨비가 허리춤에서 커다란 쇠방망이를 꺼내어 번쩍 들더니, 허공에 대고 빙그르르 돌리며 기운찬 목소리로 우렁차게 주문을 외우기 시작했다.

    "수리수리 마수리! 이 산에 잠든 수백 명의 꼬마 산도깨비들아, 당장 잠에서 깨어 모두 이리로 모여라! 이 억울하고 불쌍한 우리 연희를 위해 내일 아침 양반들이 기절할 만큼 떡 벌어지는 진수성찬 잔칫상을 차려보자꾸나! 금 나와라 뚝딱, 은 나와라 뚝딱, 고소한 잣이랑 향긋한 송이랑 오색찬란한 떡 나와라 뚝딱!"

    방망이가 땅을 내리치는 순간, 온 산이 지진이 난 듯 쿵쿵 들썩거리더니 사방의 나무와 바위틈에서 뿔이 달린 귀여운 꼬마 도깨비 수십 마리가 우당탕탕 튀어나왔다. 꼬마 도깨비들은 눈 깜짝할 사이에 높은 소나무 위로 날아올라 고소한 잣을 후드득 털어내고, 꽁꽁 언 땅을 맨손으로 슥슥 파서 봄날의 흙내음을 품은 향긋한 송이버섯을 산더미처럼 순식간에 캐냈다. 한쪽에서는 어디서 가져왔는지 모를 집채만 한 커다란 돌절구를 가져와 수십 명이 달라붙어 쿵덕쿵덕 장단에 맞춰 쌀을 빻았고, 시뻘건 도깨비불을 피워 가마솥을 달구더니 순식간에 수십 시루의 쫀득한 찰떡과 무지개떡을 환상적으로 쪄내기 시작했다. 보통 사람이라면 열흘이 걸려도 못 할 기적 같은 광경이었다. 연희는 따뜻한 바위 옆에 앉아 도깨비가 까주는 군밤을 오물거리며, 이 신기하고 통쾌한 광경을 바라보며 연신 까르르 맑은 웃음을 터뜨렸다.

    다음 날 동이 틀 무렵. 억지 심부름을 핑계로 며느리를 당장 친정으로 쫓아낼 생각에 속으로 쾌재를 부르며 입가에 미소를 지은 채 부엌으로 나온 시어머니는, 부엌문을 여는 순간 그만 헉 소리를 내며 뒤로 넘어질 뻔했다. 넓은 부엌 한가운데에는 산더미 같은 귀한 송이와 잣이 수북이 쌓여 있었고, 떡시루마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왕실에서나 볼 법한 최고급 오색 떡들이 천장까지 산처럼 쌓여 있었다. 심지어 궁중 수라상에서나 볼 법한 화려한 다과와 진귀한 산나물 무침까지, 수십 명의 손님을 먹이고도 남을 만큼 완벽하게 상이 차려져 있는 것이 아닌가. 그 어마어마한 잔칫상 한가운데서, 연희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평온한 얼굴로 다소곳이 앉아 놋그릇을 닦고 있었다.

    "어... 어, 어머니. 일찍 일어나셨습니까. 어젯밤 분부하신 환갑잔치 준비는 동이 트기 전에 모두 완벽하게 마쳐두었습니다. 더 필요하신 것이 있으신지요?"

    "이, 이게 정녕 다 네년이 하룻밤 새에 혼자 한 것이란 말이냐...? 그 캄캄한 산속에서 밤, 밤새 호랑이에게 물려가지도 않고... 이 많은 걸 어찌...?"

    시어머니는 도무지 현실이라고 믿을 수 없다는 듯, 덜덜 떨리는 손으로 향긋한 송이버섯을 만지작거렸다. 며느리가 원망스럽고 소름 끼치도록 미웠지만, 눈앞에 차려진 완벽하고 호화로운 잔칫상은 그 어떤 트집도 잡을 수 없을 만큼 흠잡을 데가 없었다. 그날 잔치에 온 수많은 양반 손님들은 입을 모아 음식 맛을 칭찬했고, 이토록 훌륭하고 솜씨 좋은 며느리를 잘 들였다며 시어머니를 추켜세웠다. 겉으로는 체면을 세워 기분이 좋았지만, 시어머니의 뱃속은 어딘가 모르게 뒤틀리고 찜찜하여 두려움마저 느꼈다. 광대의 딸 주제에 어찌 이런 신묘하고 무서운 재주를 부린단 말인가. 연희의 뒤에서 팔짱을 낀 채 투명한 모습으로 낄낄거리며 오만한 시어머니를 비웃고 있는 도깨비의 존재를, 양반집 사람들은 꿈에도 알지 못한 채 연희의 눈치만 슬금슬금 살피고 있었다.

    ※ 4: 콧대 높은 가문에 닥친 절체절명의 위기

    시어머니의 성대한 환갑잔치가 끝난 후, 한양 도성 바닥에는 연희가 차려낸 신묘하고도 으리으리한 잔칫상에 대한 소문이 쫙 퍼져나갔다. 뼈대 깊은 양반가로서의 위상은 하늘을 찌를 듯이 높아졌고, 매일같이 집안으로 칭송의 서찰과 선물이 날아들었다. 하지만 솟을대문 안쪽의 상황은 바깥의 화려한 소문과는 정반대로 흘러가고 있었다. 며느리 덕에 콧대는 한껏 높아졌건만, 시어머니의 연희를 향한 구박과 학대는 오히려 이전보다 훨씬 더 지독하고 교묘해졌다. 자신도 모르는 기이한 재주를 하룻밤 새에 부려낸 천한 며느리를 향한 비뚤어진 질투심, 그리고 혹여나 저 천박한 광대의 핏줄이 이 집안의 안방마님 자리를 꿰차고 앉아 자신을 깔보지 않을까 하는 알 수 없는 두려움이 시어머니의 속을 새카맣게 태우고 있었기 때문이다. 시어머니는 사사건건 연희의 작은 실수조차 침소봉대하여 트투집을 잡았고, 한겨울 꽁꽁 얼어붙은 냇가에 보내 굳이 두꺼운 이불빨래를 밟게 하는 등 더욱 가혹하고 고통스러운 일들을 끊임없이 떠맡겼다. 남편이라는 작자는 날이 갈수록 병세가 짙어져 매일같이 피를 토하며 의원을 불러들였고, 겉보기엔 번지르르한 이 양반집은 실상 천문학적인 약값과 시어머니의 끝없는 사치스러운 씀씀이 탓에 속으로는 새카맣게 곪아 터져 빚더미에 앉기 직전의 참담한 상황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이 콧대 높고 허세 가득한 뼈대 있는 가문에 그야말로 청천벽력 같은, 가문을 뿌리째 흔들어놓을 절체절명의 위기가 닥치고 말았다. 집안 대대로 목숨처럼 물려오던, 선대왕 임금께서 가문의 공을 치하하며 친히 하사하셨던 가문의 상징이자 어마어마한 금전적 가치를 지닌 '백자 옥로 호리병'이 감쪽같이 연기처럼 사라져 버린 것이다. 이 호리병은 가문의 영광 그 자체이기도 했지만, 당장 오늘내일 들이닥칠 시아버지의 막대한 노름빚과 약값을 막기 위해 한양 제일의 악덕 전당포 객주에게 막대한 돈을 빌리는 담보로 내어주기로 이미 굳은 약조가 되어 있던 터였다. 약조한 내일 아침까지 그 백자 옥로 호리병을 객주에게 내놓지 못하면, 양반의 체면이 진흙탕에 처박히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당장 관아에 고발을 당해 집안의 전 재산을 압류당하고 온 식구가 짚신 하나 건지지 못한 채 엄동설한 길거리에 나앉아야 할 끔찍한 처지였다.

    "아이고, 내 팔자야! 하늘도 무심하시지! 안방 깊숙한 곳에 꽁꽁 숨겨둔 그 귀한 호리병이 제 발로 걸어 나갔을 리는 만무하고, 필시 집안 사정을 잘 아는 도둑놈이 든 게 분명해! 대체 어떤 벼락 맞을 놈이 우리 가문을 통째로 망하게 하려고 이런 끔찍한 짓을 벌인단 말이냐!"

    시어머니는 가슴을 치고 머리칼을 쥐어뜯으며 안방 마루를 뒹굴며 대성통곡을 했고, 평소 헛기침만 해대며 체면을 차리던 시아버지는 얼굴이 잿빛으로 질린 채 숨을 헐떡이며 마루에 혼절하듯 드러누워 버렸다. 집안의 모든 하인과 머슴들을 몽둥이로 때려가며 동원하여 광부터 헛간, 우물 속까지 쥐 잡듯 샅샅이 뒤집어엎었으나 그 귀한 호리병의 흔적은 집안 그 어디에도 남아있지 않았다. 집안 전체가 절망의 늪에 빠져 허우적거릴 그때, 독기가 바짝 오를 대로 오른 시어머니의 핏발 선 날카로운 시선이 부엌 구석에서 두려움에 사시나무 떨듯 떨고 있는 연희를 향해 섬뜩하게 번뜩였다. 시어머니는 미친 사람처럼 달려가 연희의 머리채를 거칠게 휘어잡고 마당 한가운데로 질질 끌고 나왔다.

    "그래! 내가 왜 진작 그 생각을 못 했을꼬! 이 집안에 뼈대 있는 양반의 피가 흐르지 않는 짐승만도 못한 천한 핏줄을 가진 도둑년이 버젓이 들어와 있었지! 네년 짓이렷다! 잔치 때 요상한 재주를 부리며 사람들을 홀리더니, 이제는 기어이 가문의 목숨줄인 보물을 훔쳐다 네 친정 광대 놈들에게 팔아먹어 팔자를 고치려 한 것이지? 바른대로 말하지 못할까! 당장 그 호리병을 내놓아라!"

    "어머니! 아닙니다! 맹세코 아닙니다! 저는 그 귀한 호리병이 어찌 생겼는지, 안방 어디에 보관되어 있었는지조차 알지 못합니다. 제발 저에게 이리 억울하고 무서운 누명을 씌우지 말아 주십시오! 하늘이 알고 땅이 압니다!"

    "시끄럽다, 이 요망한 것아! 어디서 감히 하늘을 들먹여! 네년이 아니면 우리 집안의 빚 사정을 뻔히 아는 누가 그 깊은 곳까지 들어와 물건을 훔친단 말이냐! 당장 내일 아침 해가 뜨기 전까지 그 호리병을 내 눈앞에 대령하지 못하면, 널 당장 관아로 끌고 가 도둑년으로 고발할 것이다! 형틀에 묶어 살이 찢어지고 뼈가 부러지도록 곤장을 쳐서라도 기어이 실토하게 만들고, 네년 얼굴에 화인을 찍어 길거리에 내쫓아 버릴 테니 그리 알아라!"

    억울한 누명을 쓰고 변명할 틈조차 없이 시어머니의 매운 손아귀에 뺨까지 여러 대 얻어맞은 연희는, 입술이 터져 붉은 피를 흘리며 쫓기듯 솟을대문 밖으로 무참히 밀려났다. 쾅 하고 대문이 닫히는 소리와 함께 연희는 차가운 눈밭에 나뒹굴었다. 하필이면 매서운 칼바람이 몰아치고 굵은 눈보라가 휘몰아치는 지독한 겨울밤이었다. 짚신조차 제대로 신지 못해 버선발로 산길을 오르며 연희의 창백한 두 뺨에는 그 어느 때보다 뜨겁고 처절한 피눈물이 폭포수처럼 쏟아져 내렸다. 자신이 훔치지도 않은 가문의 보물을, 그것도 칠흑같이 어두운 이 겨울밤에 대체 어디서 무얼 어떻게 찾는단 말인가. 호강은커녕 사람 대접이라도 받고 싶어 참고 견뎠던 양반가의 며느리라는 자리가 이토록 끔찍하고 사람의 피를 말리는 잔인한 독사 굴일 줄은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다. 날이 밝아 관아에 끌려가 도둑년이라는 끔찍한 오명을 쓰고 멍석말이를 당해 매를 맞고 비참하게 죽을 바에야, 차라리 아무도 모르는 이 깊은 산속에서 꽁꽁 얼어 죽어버리는 것이 백번 낫겠다는 깊은 절망감에 연희는 깎아지른 비탈길 눈밭에 털썩 주저앉아 버렸다.

    '어머니, 아버지... 광대의 딸은 아무리 발버둥을 쳐도 결국 도둑년 소리를 들으며 비참하게 죽어가야 하는 것이 제 정해진 운명인가 봅니다. 이제는 억울하다고 소리칠 기력조차 남아있지 않습니다. 너무도 춥고 무섭습니다...'

    "도깨비님... 제발 저 좀 살려주세요. 차라리 저 좀 이 지옥 같은 세상에서 데려가 주세요..."

    연희의 처절하고도 애달픈 울음소리가 눈보라를 뚫고 산기슭을 울리자, 어김없이 언제나처럼 커다란 바위 뒤에서 우락부락한 도깨비가 방망이를 번쩍 들고 불쑥 튀어나왔다. 평소의 장난기 가득하던 얼굴은 온데간데없고, 눈밭에 쓰러져 피를 흘리며 펑펑 우는 연희의 참담한 몰골을 본 도깨비의 얼굴은 분노로 시뻘겋게 달아올라 있었다. 연희가 흐느끼며 억울한 자초지종을 털어놓자, 도깨비는 머리끝까지 화가 뻗쳐 길길이 날뛰며 들고 있던 커다란 쇠방망이를 꽝쾅 소리가 나도록 언 땅에 무자비하게 내리쳤다.

    "이런 썩어 문드러질, 천벌을 받아 마땅할 양반놈들 같으니라고! 지들 씀씀이를 주체 못 해 집안이 쫄딱 망하게 생기니까, 이제는 힘없고 만만한 며느리에게 도둑 누명까지 뒤집어씌워? 피가 거꾸로 솟아 못 참겠구나! 도둑년? 하! 내가 그 짐승만도 못한 진짜 도둑놈이 누군지 아주 똑똑히 알고 있지! 연희야, 더 이상 억울해하며 울지 마라. 네 눈에서 흐르는 피눈물을 보니 내 오장육부가 다 찢어지는 것 같구나. 그깟 양반네들 호리병, 이 도깨비 님이 단숨에 찾아다 네 손에 쥐여줄 테니 눈물을 그치고 당장 일어나거라!"

    ※ 5: 집안을 구하기 위해 기지를 발휘하는 연희의 헌신

    "도, 도깨비님이 도둑이 누군지 아신다고요? 진짜 가보를 훔쳐 간 사람이 누군지 보셨단 말씀이십니까?"

    연희가 꽁꽁 언 손으로 눈물을 아무렇게나 닦아내며 믿을 수 없다는 듯 되묻자, 도깨비는 콧김을 씩씩 뿜어내며 코웃음을 치고는 커다란 가슴을 팡팡 두드렸다.

    "당연하지! 내가 누구냐, 이 거대한 산을 수백 년간 지켜온 산도깨비들의 수장이 아니더냐! 우리 산도깨비들의 시퍼런 눈을 피해서 이 험한 산을 넘어갈 도둑놈은 조선 팔도에 단 한 명도 없다. 바로 어젯밤이었지. 산기슭에서 낮잠을 자고 있는데, 너희 콧대 높은 시댁에서 십 년 넘게 굽신거리며 머슴살이하던 그 탐욕스럽게 생긴 하인 놈 하나가 야심한 밤에 커다란 보따리를 메고 산을 넘는 걸 내가 두 눈으로 아주 똑똑히 보았지. 걸음걸이가 어찌나 쥐새끼처럼 옹색하고 다급하던지, 척 봐도 주인의 귀한 물건을 훔쳐 달아나는 모양새였다. 놈이 눈보라를 피해 산속 어디에다 그 장물들을 꽁꽁 숨겨두었는지 내 환히 꿰뚫고 있으니 아무 걱정 말거라. 당장 날 따라오너라!"

    도깨비는 쓰러져 있던 연희의 손을 커다랗고 따뜻한 손으로 덥석 잡아끌고는, 칠흑같이 어둡고 음산한 산속 가장 깊은 곳을 향해 성큼성큼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앙상한 나뭇가지들이 유령의 손길처럼 연희의 치맛자락을 부여잡고 날카로운 가시덤불이 살갗을 긁어댔지만, 도깨비가 앞장서서 방망이를 휘두를 때마다 가시덤불은 스르르 길을 비켜주었고 몰아치던 눈보라도 거짓말처럼 잦아들었다. 가파른 비탈을 수없이 지나 도착한 곳은, 사람의 발길이 끊긴 지 오래되어 음산한 기운마저 감도는 낡고 버려진 성황당 앞이었다. 도깨비가 성황당 밑을 받치고 있는 집채만 한 커다란 바위를 방망이로 가볍게 툭 치자, 놀랍게도 그 거대한 바위가 짐승이 입을 벌리듯 스르르 밀려나며 어두컴컴하고 깊은 굴이 그 모습을 드러냈다. 도깨비가 손가락 끝에서 푸른 도깨비불을 피워 올려 굴 안을 환하게 비추자, 그 안에는 시댁에서 달아난 하인이 숨겨둔 커다란 보따리가 놓여 있었다. 보따리 안에는 시어머니가 아끼던 값비싼 금비녀와 은가락지 등 온갖 금은보화가 가득했고, 그 한가운데에는 달빛을 받아 영롱하고도 푸르스름한 빛을 뿜어내는 문제의 '백자 옥로 호리병'이 흠집 하나 없이 고스란히 놓여 있었다.

    "자, 똑똑히 보아라! 저 은혜를 모르는 썩을 놈이 한양 장물아비에게 비싼 값에 넘기려고 눈을 피해 꽁꽁 숨겨둔 것이 분명하다. 자, 어서 네 품에 챙겨 안거라. 그리고 날이 밝는 대로 당장 산을 내려가서 그 악독한 시어미 코앞에 이 호리병을 보란 듯이 던져주며 떵떵거리란 말이다!"

    연희는 추위도 잊은 채 덜덜 떨리는 손을 뻗어 그토록 찾던 호리병을 조심스레 품에 안았다. 이 차갑고 매끄러운 흙덩어리 도자기가 도대체 뭐라고, 자신의 가여운 목숨을 앗아갈 뻔하고 짐승만도 못한 수모를 겪게 했단 말인가. 하지만 가슴 한구석에는 여전히 지워지지 않는 짙은 두려움의 먹구름이 남아있었다. 이 귀한 호리병을 무사히 돌려준다고 한들, 뼛속까지 자신을 광대의 딸이라 멸시하는 시댁 식구들이 과연 자신을 진정한 가족으로 인정해 줄까? 그저 고발당할 위기를 넘긴 것에만 안도하며, 내일부터는 또다시 자신을 소나 말처럼 부려 먹으며 잔인한 시집살이를 이어가지 않을까? 연희의 어두워진 얼굴과 깊은 한숨 소리를 눈치챈 도깨비가, 연희의 속마음을 다 읽었다는 듯 입꼬리를 말아 올리며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연희야, 이번엔 그저 눈물 찔찔 짜며 호리병만 띡 던져주고 굽신거리는 착하고 미련한 며느리 노릇은 제발 그만두거라. 짐승도 자기 목숨을 위협하면 이빨을 드러내고 무는 법이다. 내일 시댁에 돌아가거든, 이 산도깨비 님이 일러주는 대로만 똑똑히 행동해라. 그 콧대만 높고 속은 텅 빈 양반들 버르장머리를 아주 단단히, 평생 잊지 못하게 고쳐놓을 테니까! 이제 더 이상 넌 천한 광대의 딸이 아니라, 그 집안의 목숨줄을 쥔 주인이 되는 거다!"

    다음 날 아침, 솟을대문 집은 그야말로 피비린내 나는 전쟁터가 따로 없었다. 약조한 날이 밝자마자 눈에 불을 켠 악덕 전당포 객주와 험악한 사내들이 우르르 들이닥쳐 대문을 쾅쾅 부술 듯이 두드리고 있었고, 시어머니는 이제 정말 끝이라며 넋을 완전히 놓은 채 마루에 주저앉아 하늘을 원망하며 미친 듯이 통곡하고 있었다. 시아버지는 방구석에 숨어 벌벌 떨었고, 집안의 눈치 빠른 하인들은 주인이 망했다는 걸 알고 이미 돈이 될만한 것들을 챙겨 뿔뿔이 도망칠 준비를 하느라 집안은 아수라장 그 자체였다. 바로 그때, 헝클어진 머리에 낡은 치맛자락에는 밤새 묻은 눈이 소복이 쌓인 연희가 삐걱거리는 사립문을 활짝 열어젖히며, 전에 없던 당당하고 꼿꼿한 걸음걸이로 마당 한가운데로 들어섰다. 그녀의 품에는 무명 수건으로 소중하고 단단하게 감싼 무언가가 들려 있었다.

    "어머니, 아버님. 밤새 산을 뒤져 제가 잃어버린 호리병을 찾아왔습니다."

    연희가 차분하지만 단호한 목소리로 말하며 감싸고 있던 수건을 천천히 풀어내자, 아침 햇살을 받아 티 없이 영롱한 빛을 내뿜는 백자 옥로 호리병이 그 고고한 자태를 마침내 드러냈다. 절망에 빠져 울부짖던 시어머니와 마루에 숨어있던 식구들의 두 눈이 일제히 화등잔만 해지며 경악으로 물들었다.

    "아, 아니! 네, 네년이 어떻게 그걸! 그래, 역시 내 짐작이 맞았어! 네년이 훔쳐서 산속 깊은 곳에 꿍쳐둔 것이었구나! 관아에 고발한다 하니 이제야 겁을 집어먹고 가져온 것이지! 이 천하의 몹쓸 도둑년 같으니!"

    시어머니는 반가움보다 며느리를 향한 끔찍한 증오가 먼저 앞서, 독을 품은 뱀처럼 달려들어 연희의 뺨을 다시 한번 거칠게 때리려 손을 높이 치켜들었다. 하지만 시어머니의 매운 손이 연희의 뺨에 닿기도 전, 갑자기 맑던 하늘에서 어디선가 불어온 매서운 회오리바람이 시어머니의 몸을 벼락처럼 거칠게 밀쳐내어 꽁꽁 언 마당 흙바닥에 볼품없이 벌렁 나자빠지게 만들었다. 넘어진 시어머니를 내려다보는 연희의 눈빛은 한 치의 흔들림도 없는, 서슬 퍼런 칼날 같은 단호함으로 빛나고 있었다. 연희의 곁에서 투명한 모습으로 팔짱을 낀 채 지켜보던 도깨비가, 연희가 더 이상 주눅 들지 않도록 보이지 않는 강력한 힘을 불어넣어 주고 있었기 때문이다.

    "어머니, 함부로 손을 올리지 마십시오. 그리고 말씀 조심하십시오. 가문의 보물을 훔친 도둑은 제가 아니라, 밤에 몰래 보따리를 싸서 달아난 아버님의 심복인 머슴 놈이었습니다! 그 놈이 장물로 넘기려는 것을 제가 얇은 홑적삼 하나로 밤새 눈보라 치는 산을 짐승처럼 뒤져 성황당 바위 밑에서 겨우 목숨 걸고 찾아온 것입니다. 만약 제가 그 도둑년이라면, 어찌 훔친 물건을 객주에게 팔아넘겨 도망쳐 편히 살지 않고, 얼어 죽을 뻔한 이 매서운 눈보라를 뚫고 호리병을 안은 채 핍박받는 이 지옥 같은 집구석으로 굳이 다시 돌아왔겠습니까!"

    ※ 6: 마침내 밝혀진 진실

    한평생 쥐죽은 듯 숨죽여 지내며 단 한 번도 큰소리 낸 적 없던 며느리의 벼락같고 당당한 외침에, 왁자지껄하던 마당은 순식간에 찬물을 끼얹은 듯 쥐 죽은 듯 고요해졌다. 연희의 꼿꼿한 자세와 서슬 퍼런 기세에 완전히 기가 눌려버린 시어머니는 엉덩방아를 찧은 채 벌벌 떨며 아무런 반박조차 하지 못하고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그때, 밖에서 험악하게 쾅쾅거리며 소란을 피우던 전당포 객주와 왈패들이 마침내 굳게 닫힌 대문을 박살 내듯 부수고 험악한 기세로 마당으로 들이닥쳤다.

    "약조한 시간이 한참 지났소! 어서 담보물로 걸었던 그 귀한 호리병을 내놓던지, 아니면 당장 이 집문서와 노비 문서를 모두 내놓고 온 식구는 맨몸으로 길바닥에 나가시오! 빚을 갚지 못하면 관아에 쳐넣어 평생 옥살이를 시킬 것이오!"

    객주의 고함 소리에 얼굴이 하얗게 질린 시아버지는 양반의 알량한 체면도 모조리 내팽개친 채, 사시나무 떨듯 바들바들 떨며 마당 한가운데 버티고 선 며느리 연희에게 다가가 애처롭게 두 손을 비비며 애원하기 시작했다.

    "며, 며느리야... 제발 부탁이다. 네가 품고 있는 그 호리병을 어서 이리 다오. 우리 가문이, 우리 온 식구가 길바닥에 나앉지 않고 살려면 지금 당장 그것을 저 험악한 객주에게 내주어야 한단 말이다. 내 늙은 시애비가 이리 싹싹 빌 터이니 제발..."

    하지만 연희는 시아버지의 비참한 애원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목숨처럼 구출해 낸 호리병을 가슴에 꽉 안은 채 뒤로 차갑게 한 걸음 물러섰다. 그녀의 두 눈에는 그동안 겪었던 뼈저린 설움과 양반들의 위선에 대한 환멸이 뚜렷하게 서려 있었다.

    "아버님, 어머니. 똑똑히 들으십시오. 저는 장터에서 줄을 타던 천한 광대의 딸이라는 이유만으로, 이 으리으리한 집안에 들어와 수년을 짐승만도 못한 끔찍한 취급을 받으며 온갖 궂은일과 매질을 견뎌왔습니다. 여러분이 자랑하시던 그 대단하고 고귀한 양반의 핏줄과 뼈대 있는 가문의 체면이, 정작 가문이 몰락해가는 이 절체절명의 위기 앞에서 여러분의 목숨을 조금이라도 구해주었습니까? 제가 밤새 얼어 죽을 고비를 넘기며 눈 덮인 산을 내려올 때, 이 차가운 호리병을 품에 안고 수백 번 수천 번 고민했습니다. 나를 그토록 벌레처럼 핍박하고 버렸던 이 지옥 같은 집구석을, 내 목숨을 걸고 찾아온 이 물건으로 굳이 구해야만 하는가 하고 말입니다."

    연희의 피 맺힌 절규에 시아버지와 시어머니, 그리고 병석에서 간신히 걸어 나온 남편까지 모두 고개를 푹 숙이고 말았다. 평생을 오만하게 살아왔던 그들의 알량한 허세와 끔찍한 무능함이 한낱 광대의 딸 앞에서 뼈저리게 폭로되는, 돌이킬 수 없이 부끄러운 순간이었다. 연희는 훌쩍거리는 시댁 식구들을 뒤로 한 채, 험악하게 인상을 펄떡이는 전당포 객주 앞으로 한 치의 망설임 없이 당당히 걸어갔다.

    "객주 어른, 똑똑히 보십시오. 이 백자 옥로 호리병은 선대 임금께서 친히 이 가문에 하사하신 숭고한 영광이자 가문의 목숨입니다. 고작 돈 몇 푼의 노름빚에 이리 쉽게 남의 손에 넘어갈 하찮은 물건이 결코 아닙니다. 이 귀한 호리병은 제가 지킬 것이니, 대신 제가 빚을 갚기 위해 가져온 여기 이 묵직한 보따리를 담보 대신 가져가십시오."

    연희가 도깨비가 성황당 굴속에서 훔친 머슴의 장물들과 함께 챙겨주었던, 금은보화가 가득 든 커다란 보따리를 바닥에 촤르륵 쏟아내자, 아침 햇살을 받아 눈이 부실 정도로 찬란하게 빛나는 엄청난 양의 금괴와 은가락지, 옥비녀들이 마당 가득 우르르 쏟아져 내렸다. 객주는 평생 본 적 없는 엄청난 재물의 양에 떡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하며 두 눈을 비볐고, 빚을 수십 번 갚고도 남을 재물을 바리바리 챙겨 들고는 연희에게 허리가 부러져라 굽신거리며 왈패들을 데리고 허둥지둥 대문 밖으로 물러갔다.

    빚쟁이들이 완전히 물러가고 집안에 다시 평온이 찾아오자, 뻣뻣했던 시아버지는 연희의 버선발 밑에 털썩 무릎을 꿇고 눈물을 뚝뚝 흘렸다.

    "며느리야... 우리가 참으로 짐승보다 못하고 어리석었다. 뼈대 있는 양반 가문이라 하늘 무서운 줄 모르고 자만했지만, 막상 집안이 무너질 위기 앞에서 우리는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나약한 오합지졸에 불과했구나. 천한 신분이라며 사람 취급도 하지 않고 핍박했던 네가 우리 가문의 마지막 영광을 지켜내고 늙은 식구들의 목숨을 살려주었으니, 사람의 신분이 귀한 것이 아니라 남을 품어주는 사람의 마음됨이 진정으로 고귀한 것임을 이 늙은이가 이제야 뼈저리게 깨달았다. 제발 모자란 우리를 용서해 다오."

    독기로 가득 찼던 시어머니 역시 바닥을 기어와 눈물을 펑펑 쏟아내며 동상으로 얼룩진 연희의 붉은 두 손을 자신의 품에 꼭 부여잡았다.

    "아가... 내가 정말 악귀에 씌어 단단히 미쳤었나 보다. 그저 남의 시선과 체면이 두려워, 내 곁에서 가장 고생하는 널 그리도 모질고 잔인하게 대했다. 널 죽음으로 내몰 뻔한 이 못나고 몹쓸 시어미를 부디 용서해 줄 수 있겠느냐... 내가 죽어 평생 네 종노릇을 하마."

    연희는 자신의 치맛자락을 붙잡고 어린아이처럼 오열하는 시부모님의 진심 어린 사과에, 그동안 억눌러왔던 끔찍한 설움이 한꺼번에 가슴 벅차게 밀려와 참았던 눈물을 왈칵 쏟아냈다. 이번에 흘리는 눈물은 차디찬 서러움의 피눈물이 아니라, 오랫동안 맺혀있던 응어리가 봄눈 녹듯 풀리는 따뜻하고도 평온한 구원의 눈물이었다. 지붕 위에서 투명한 모습으로 앉아 이 모든 감동적인 광경을 흐뭇하게 지켜보던 도깨비는, 허리춤의 방망이를 툭툭 치며 호탕하게 껄껄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하! 이제야 사람 사는 집구석 냄새가 좀 나는구먼! 겉만 번지르르하던 저 못난 양반들 버르장머리를 아주 톡톡히, 평생 잊지 못하게 고쳐놨으니 내 속이 다 시원하다! 연희야, 이제 네 눈물에서 짠내는 안 날 것 같으니, 이 늠름한 산도깨비 님은 두 다리 쭉 뻗고 다시 백 년 동안 달콤한 낮잠이나 푹 자러 가야겠다! 행복하게 잘 살아라!"

    도깨비는 푸른 연기가 되어 밤하늘의 흩어지는 구름처럼 스르르 평화롭게 사라졌다. 그날 이후, 연희는 집안에서 더 이상 천한 광대의 딸이라는 꼬리표로 불리지 않았다. 그녀는 몰락할 뻔한 가문을 지혜와 용기로 구경해 낸 자애로운 며느리로서, 온 집안 식구들과 하인들의 사랑과 존경을 한 몸에 받으며 진짜 안방마님으로 자리 잡았다. 병석에 오래 누워만 있던 남편 역시 연희의 지극한 사랑과 보살핌 덕분에 훌훌 털고 일어나 건강을 되찾았다. 으리으리한 양반가의 솟을대문 안에는 이제 싸늘한 멸시와 매서운 호통 대신, 며느리 연희의 맑고 고운 웃음소리와 진정한 가족의 따뜻하고 끈끈한 정만이 담장 너머로 가득 흘러넘쳤다.

    유튜브 엔딩멘트

    오늘 이야기 어떠셨나요? 겉모습만 화려한 양반가보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눈물 흘리며 집안을 묵묵히 구한 며느리의 진심이 더욱 빛나는 이야기였습니다. 무서운 도깨비조차 며느리의 착한 심성에 감동해 든든한 내 편이 되어준 걸 보면, 진정한 귀함은 신분이 아니라 따뜻한 마음씨에 있다는 걸 다시금 깨닫게 됩니다. 우리 주변에도 이런 고마운 도깨비 같은 존재가 하나쯤 있었으면 좋겠네요. 오늘 이야기가 즐거우셨다면 구독과 좋아요 부탁드리며, 다음에도 가슴 따뜻해지는 감동 스토리로 찾아오겠습니다. 편안한 시간 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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