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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한 기생이 도깨비와 춤을 추고 받은 선물, 그 선물 덕분에 양반 부인이 된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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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킹멘트
여러분, 조선시대 기생 중에 도깨비와 춤을 추고 양반 부인이 된 여인이 있었다는 이야기를 아십니까. 전라도 남원에 월향이라는 기생이 있었습니다. 열여섯에 기적에 올라 스물넷까지 온갖 풍파를 겪은 여인이었지요. 그런 월향이 어느 비 오는 밤, 홀로 돌아오는 길에 숲속에서 도깨비불을 만납니다. 보통 사람이라면 혼비백산 도망쳤을 텐데, 월향은 달랐습니다. 도깨비가 춤을 추자고 하자, 이 여인이 덩실덩실 따라 춘 것입니다. 도깨비는 월향의 춤에 반해 선물 하나를 건넵니다. 낡은 부채 한 자루. 이게 무슨 선물이냐 싶었지만, 이 부채에 숨겨진 비밀이 월향의 운명을 완전히 뒤집어 놓습니다. 천한 기생이 어떻게 양반 부인이 되었는지, 그 기막힌 이야기를 끝까지 들어보시면 무릎을 치시게 될 겁니다.
디스크립션
전라도 남원의 기생 월향이 비 오는 밤 숲속에서 도깨비를 만나 함께 춤을 춥니다. 도깨비가 건넨 낡은 부채 하나가 월향의 운명을 바꾸어 놓는데, 그 부채에 숨겨진 놀라운 비밀과 월향이 양반 부인이 되기까지의 파란만장한 이야기를 만나보세요. 조선시대 야담을 바탕으로 재구성한 도깨비 이야기입니다.
1: 남원 기생 월향
제 이름은 월향입니다. 달 월 자에 향기 향 자를 쓰지요. 이름은 참 곱게 지어주었습니다만, 제 삶은 이름만큼 곱지 못했습니다. 전라도 남원, 광한루 아래 기방에서 살고 있는 기생입니다. 올해 스물넷이니, 기적에 이름을 올린 지도 벌써 팔 년이 되었군요.
어머니도 기생이었습니다. 아버지가 누구인지는 모릅니다. 어머니는 저를 낳고 삼 년 뒤에 세상을 떠났는데, 기방의 행수기생 막월이 어멈이 저를 거두어 키워주었습니다. 막월이 어멈은 무뚝뚝하고 매서운 분이었으나, 마음 한구석은 따뜻한 분이었습니다. 기생은 재주가 있어야 산다며 저에게 가야금과 거문고를 가르쳤고, 춤과 노래도 가르쳤습니다. 저는 그중에서도 춤에 재주가 있었나 봅니다. 열두 살 때 처음 살풀이춤을 배웠는데, 막월이 어멈이 보고는 이년아, 너는 춤을 출 때 다른 사람이 된다 하며 고개를 끄덕이셨지요.
열여섯에 기적에 오르던 날을 저는 잊지 못합니다. 곱게 머리를 올리고, 연지곤지를 찍고, 비단 저고리를 입고 관아 앞에 섰습니다. 겉으로는 화려했으나, 속으로는 울고 싶었습니다. 기적에 이름이 올라가는 순간, 저는 평생 기생으로 살아야 하는 것이니까요. 양반집 규수처럼 시집을 가는 것도, 자유롭게 살아가는 것도, 이제 더는 바랄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래도 살아야 했습니다. 슬퍼한다고 팔자가 바뀌는 것이 아니니까요. 저는 기방에서 열심히 재주를 닦았습니다. 가야금을 뜯으면 손님들이 눈을 감고 고개를 끄덕였고, 살풀이춤을 추면 좌중이 숨을 죽이고 바라보았습니다. 남원 고을에서 월향의 춤을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가 되었지요. 기생치고는 제법 이름값을 했습니다.
그러나 이름이 알려질수록 괴로운 일도 많았습니다. 술자리에 불려 가면 양반 나리들이 제 손목을 잡아끌었고, 술잔을 억지로 따르게 하고, 취하면 아무 말이나 내뱉었습니다. 어떤 자는 저를 자기 첩으로 삼겠다며 기방 마당에서 행패를 부렸고, 어떤 자는 돈 몇 푼을 던지며 기생이 무슨 자존심이 있느냐고 비웃었습니다. 그럴 때마다 저는 웃어야 했습니다. 기생이니까요. 얼굴에 웃음을 달고, 속으로는 피눈물을 삼키며 버텼습니다.
밤에 기방으로 돌아와 혼자 방에 누우면, 천장을 바라보며 생각했습니다. 나는 언제까지 이렇게 살아야 하는가. 이 삶에서 벗어날 길은 정녕 없는 것인가. 가끔 광한루 연못가에 앉아 달을 바라보면, 달빛에 비치는 제 얼굴이 낯설게 느껴지곤 했습니다. 화장을 지우면 스물넷 평범한 여인의 얼굴인데, 세상은 저를 평범한 여인으로 보아주지 않았습니다. 기생이라는 딱지가 제 이마에 붙어 있는 한, 저는 영원히 월향이라는 이름의 장식품이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밤이었습니다. 제 인생이 통째로 뒤집어지는 밤이. 비가 내리는 밤이었습니다.
2: 비 오는 밤, 도깨비를 만나다
그날은 남원 부사의 생일잔치가 있었습니다. 관아에서 큰 연회가 벌어졌고, 기방의 기생들이 총출동하였지요. 저도 불려가서 춤을 추고, 가야금을 타고, 술시중을 들었습니다. 부사 어른은 그나마 점잖은 분이었으나, 함께 온 양반 나리들 중에 행패를 부리는 자가 있어서 진이 빠지는 밤이었습니다. 한 자가 제 치마폭을 잡아당기며 오늘 밤 나와 함께 가자고 했을 때는, 정말이지 그 손을 뿌리치고 도망치고 싶었습니다. 간신히 빠져나왔으나, 마음이 쓰라렸습니다.
연회가 끝난 것은 자정 무렵이었습니다. 다른 기생들은 가마를 타고 갔으나, 저는 걷고 싶었습니다. 머리가 복잡했거든요. 술 냄새가 밴 옷이 역겨웠고, 밤바람이라도 쐬며 머리를 식히고 싶었습니다. 기방까지는 이십 리쯤 되는 길이었는데, 절반은 마을길이고 절반은 숲길이었습니다. 초롱 하나를 들고 걷기 시작했습니다.
비가 내리기 시작한 것은 숲길에 접어들었을 때였습니다. 처음에는 이슬비였으나, 금세 굵어져 빗줄기가 세차게 쏟아졌습니다. 초롱이 꺼져버렸습니다. 사방이 칠흑 같은 어둠에 잠겼지요. 나무 사이로 바람이 으스스하게 불었고, 빗소리가 숲을 가득 채웠습니다. 겁이 났습니다. 그러나 돌아가자니 이미 너무 많이 왔고, 앞으로 가자니 길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저는 큰 나무 밑에서 비를 피하며 비가 그치기를 기다렸습니다.
그때였습니다. 숲 저쪽에서 빛이 보였습니다. 처음에는 반딧불인가 싶었습니다. 그런데 그 빛이 점점 커졌습니다. 주먹만 하던 빛이 수박만 해지더니, 파란빛과 붉은빛이 섞여 이리저리 떠다니기 시작했습니다. 도깨비불이었습니다.
심장이 쿵 내려앉았습니다. 어릴 적 막월이 어멈에게 들었던 이야기가 머릿속을 스쳤습니다. 도깨비불을 만나면 절대 도망치지 마라. 도깨비는 도망치는 자를 쫓아가지만, 맞서는 자에게는 흥미를 느낀다. 그리고 절대 무서운 티를 내지 마라. 도깨비는 겁먹은 냄새를 맡는다.
저는 떨리는 다리를 억지로 붙잡고 나무에 기대선 채 빛을 바라보았습니다. 빛이 점점 가까이 왔습니다. 그리고 빛 속에서 형체가 드러나기 시작했습니다. 키가 보통 사내보다 한 뼘은 더 컸고, 머리에는 뿔 하나가 솟아 있었습니다. 얼굴은 사람과 비슷하되, 코가 유난히 크고 눈이 등잔만 했습니다. 온몸이 푸르스름한 빛을 내고 있었고, 한 손에는 커다란 방망이를 들고 있었습니다. 도깨비였습니다.
도깨비가 저를 보고 히죽 웃었습니다. 그 웃음이 무섭기도 했으나, 어딘지 장난기가 가득한 웃음이었습니다. 오호, 비 오는 밤에 웬 처자가 홀로 있느냐. 너, 겁이 나지 않느냐.
저는 속으로는 무릎이 후들거렸으나, 있는 힘을 다해 목소리를 가다듬었습니다. 겁이 나긴 뭐가 겁이 나요. 당신이 도깨비면 어떻고 귀신이면 어떻소. 나는 남원 기생 월향이오. 온갖 양반 나리 앞에서 춤추고 노래한 년인데, 도깨비 하나쯤 무섭겠소.
도깨비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가 껄걸 웃었습니다. 하하, 이 처자 재미있구나. 겁도 없이 나한테 큰소리를 치다니. 기생이라 했느냐. 그럼 춤도 출 줄 아느냐.
저는 대답했습니다. 춤이라면 이 남원 고을에서 저를 따를 자가 없소.
도깨비가 방망이를 땅에 쿵 찍으며 말했습니다. 좋다. 그럼 나와 한번 춤을 춰 보아라. 내가 마음에 들면 선물을 하나 주마. 마음에 들지 않으면, 글쎄, 어떻게 될지는 나도 모르겠다.
3: 도깨비와 춤을 추다
도깨비의 말에 등골이 서늘해졌습니다. 마음에 들지 않으면 어떻게 될지 모른다니, 그것이 협박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그러나 이 상황에서 거절할 수 있는 처지가 아니었습니다. 도망치면 잡힐 것이 뻔했고, 거절하면 화를 낼 것이 분명했습니다. 그렇다면 춤을 추는 수밖에요. 다행히 춤만큼은 자신이 있었습니다.
저는 비에 젖은 치마를 추슬러 올리고, 한 손을 들어 올렸습니다. 음악이 없었습니다. 장단을 맞춰줄 북도, 가야금도, 피리도 없었습니다. 오직 빗소리와 바람 소리뿐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제가 첫 발을 내딛는 순간, 빗소리가 장단이 되었습니다. 후두둑 떨어지는 빗방울이 북소리처럼 울렸고, 바람이 나뭇잎을 스치는 소리가 피리 가락처럼 들렸습니다. 숲 전체가 저를 위한 악사가 된 것이었습니다.
저는 살풀이춤을 추기 시작했습니다. 한 팔을 뻗고, 한 발을 내딛고, 천천히 몸을 돌렸습니다. 비에 젖은 저고리가 몸에 달라붙었고, 풀어진 머리카락이 얼굴을 때렸으나, 멈추지 않았습니다. 살풀이춤이란 슬픔을 푸는 춤이 아닙니까. 열여섯에 기적에 오르던 날의 서러움, 양반 나리들에게 멸시당하던 치욕, 어머니의 얼굴도 모르고 자란 외로움, 천한 기생이라는 굴레에 갇힌 삶의 답답함. 그 모든 한이 팔 끝에 실렸고, 발끝에 담겼습니다.
도깨비가 보고 있었습니다. 처음에는 팔짱을 끼고 비스듬히 서서 구경하던 도깨비가, 제가 춤에 빠져들수록 표정이 변하기 시작했습니다. 장난기 가득했던 눈이 진지해졌고, 히죽거리던 입이 꾹 다물어졌습니다. 그리고 어느 순간, 도깨비도 춤을 추기 시작했습니다.
도깨비의 춤은 제 춤과는 전혀 달랐습니다. 거칠고, 투박하고, 쿵쿵거렸습니다. 방망이를 땅에 찍으며 발을 구르고, 팔을 휘두르며 빙글빙글 돌았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이상하게도 제 춤과 어울렸습니다. 제가 천천히 팔을 뻗으면 도깨비가 쿵 하고 발을 굴렀고, 제가 몸을 돌리면 도깨비가 따라 돌았습니다. 살풀이의 섬세함과 도깨비춤의 호방함이 빗속에서 하나로 엮이는 기이한 광경이었습니다.
얼마나 추었을까요. 시간 감각이 사라졌습니다. 비가 그친 것도, 달이 구름 사이로 얼굴을 내민 것도 모르고 추었습니다. 숨이 차고, 다리가 후들거리고, 온몸에 땀과 빗물이 뒤범벅이 되었으나, 멈출 수가 없었습니다. 이상한 힘에 이끌리듯 몸이 저절로 움직였습니다. 어쩌면 이 밤의 춤이 제 생에 가장 훌륭한 춤이었을지도 모릅니다. 기방의 술자리가 아닌, 숲속에서, 도깨비와 함께, 오로지 춤 자체를 위해 춘 춤이었으니까요.
마침내 제가 마지막 동작을 하고 한쪽 무릎을 꿇자, 도깨비가 멈추었습니다. 한참을 말없이 저를 내려다보더니, 느닷없이 박수를 쳤습니다. 짝, 짝, 짝. 커다란 손바닥에서 나는 소리가 숲을 울렸습니다.
좋다. 아주 좋다. 내가 수백 년을 살았어도 이런 춤은 처음이다. 네 춤에는 한이 있고, 한에는 힘이 있고, 힘에는 아름다움이 있구나. 마음에 들었다. 약속대로 선물을 하나 주마.
도깨비가 허리춤에서 무언가를 꺼냈습니다. 낡은 부채 한 자루였습니다. 대나무 살이 두어 개 부러져 있었고, 종이가 누렇게 바랬으며, 가장자리가 해져 있었습니다. 솔직히 말하면, 쓰레기에 가까운 물건이었습니다.
저는 속으로 이게 뭐야 싶었으나, 내색하지 않았습니다. 도깨비 앞에서 선물을 깔보는 것은 목숨을 거는 일이라는 것쯤은 알고 있었으니까요. 고맙습니다 하고 공손히 받았습니다.
도깨비가 씩 웃으며 말했습니다. 그 부채, 함부로 버리지 마라. 네가 진심으로 원하는 것이 있을 때, 부채를 펼쳐 한 번 부쳐 보아라. 바람이 너를 도울 것이다. 단, 욕심으로 부치면 바람이 되돌아올 것이니, 진심일 때만 쓰거라.
말을 마치자 도깨비의 몸에서 빛이 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발끝부터 투명해지더니, 이내 숲의 어둠 속으로 녹아들었습니다. 마지막으로 들린 것은 껄걸거리는 웃음소리였습니다. 그 웃음이 숲 전체에 메아리치다가 서서히 사라졌습니다.
저는 낡은 부채를 들고 숲속에 혼자 서 있었습니다. 꿈이었을까요. 그러나 손에 쥔 부채의 감촉은 분명했고, 숲바닥에는 도깨비의 커다란 발자국이 찍혀 있었습니다.
4: 부채의 비밀
기방으로 돌아온 저는 부채를 장롱 깊숙이 넣어두었습니다. 도깨비의 말이 사실인지 아닌지 믿기 어려웠고, 솔직히 미친 꿈을 꾼 것이 아닌가 싶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버릴 수는 없었습니다. 도깨비 선물을 버리면 화가 미친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었으니까요.
며칠이 지났습니다. 낮에는 여느 때와 다름없이 기방에서 손님을 맞고, 가야금을 타고, 춤을 추었습니다. 그러나 밤이면 부채가 자꾸 생각났습니다. 진심으로 원하는 것이 있을 때 부쳐보라는 도깨비의 말이 귓가에 맴돌았습니다.
부채의 비밀을 처음 알게 된 것은 엿새째 되는 날이었습니다. 그날 저는 기방에서 큰 모욕을 당했습니다. 인근 고을에서 온 양반 하나가 술에 취해 제게 난동을 부렸는데, 제가 술잔 따르기를 거부하자 가야금을 들어 마당에 내동댕이쳐 부숴버린 것입니다. 그 가야금은 막월이 어멈이 저에게 물려준, 세상에서 하나뿐인 가야금이었습니다. 저는 깨진 가야금 조각을 주워 안고 방으로 들어와 울었습니다.
왜 이렇게 살아야 합니까. 제가 무슨 죄를 지었기에 이런 삶을 살아야 합니까. 기생이라는 이유만으로 왜 이런 멸시를 받아야 합니까.
울다 울다 지쳐서, 무심코 장롱을 열었습니다. 낡은 부채가 보였습니다. 도깨비의 말이 떠올랐습니다. 진심으로 원하는 것이 있을 때 펼쳐 보라고 했지요. 저는 부채를 꺼내 들었습니다. 그리고 마음속으로 빌었습니다. 이 가야금이 다시 온전해지기를. 진심이었습니다. 이 세상 무엇보다 진심이었습니다. 그리고 부채를 펼쳐 한 번 부쳤습니다.
바람이 일었습니다. 방 안에서 바람이 일 리가 없는데, 부채에서 나온 바람이 깨진 가야금 조각 위로 불어갔습니다. 그러자 놀라운 일이 벌어졌습니다. 산산이 부서진 가야금 조각들이 스르르 움직이기 시작한 것입니다. 나무 조각이 나무 조각에 붙고, 줄이 다시 팽팽하게 걸리고, 금이 간 자리가 아물었습니다. 눈 깜짝할 사이에 가야금이 원래 모습을 되찾았습니다. 아니, 원래보다 더 고운 소리가 나는 것 같았습니다. 줄을 한 번 뜯어보니, 맑고 깊은 소리가 방 안을 가득 채웠습니다.
저는 부채를 들고 한참을 멍하니 앉아 있었습니다. 이것은 꿈이 아니었습니다. 도깨비의 선물은 진짜였습니다. 이 낡은 부채에는 진심으로 원하는 것을 이루어주는 힘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도깨비의 경고도 기억났습니다. 욕심으로 부치면 바람이 되돌아온다고 했지요. 저는 스스로에게 다짐했습니다. 이 부채를 욕심을 위해 쓰지는 않겠다고. 금은보화를 원하거나, 권세를 탐하는 데 쓰지는 않겠다고. 오직 정말로 간절하고 진심인 순간에만 쓰겠다고.
그 뒤로 저는 부채를 품에 지니고 다녔습니다. 그러나 쉽게 쓰지 않았습니다. 진심인지 욕심인지 구분하기가 쉽지 않았으니까요. 그렇게 한 달여가 지났습니다. 그리고 운명처럼, 부채를 써야 할 순간이 찾아왔습니다.
그날은 사월 초파일이 막 지난 뒤였습니다. 봄꽃이 만발하고, 남원 읍내가 축제 분위기에 휩싸여 있었습니다. 저는 기방에서 점심을 먹고 혼자 광한루 연못가를 산책하고 있었습니다. 기생에게도 쉬는 날이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버드나무 아래 앉아 연못의 잉어들을 바라보며 한숨을 돌리고 있는데, 연못 건너편에서 급한 발소리가 들려왔습니다. 그리고 풍덩 하는 소리와 함께 비명이 터졌습니다. 누군가 연못에 빠진 것이었습니다.
5: 양반 도령과의 인연
저는 벌떡 일어나 연못가로 달려갔습니다. 물속에서 허우적거리는 사람이 보였습니다. 갓을 쓴 것으로 보아 양반인 듯했으나, 헤엄을 치지 못하는지 물을 먹으며 가라앉고 있었습니다. 주위에 사람이 없었습니다. 축제 때라 다들 읍내 쪽으로 갔기 때문이었지요. 저 혼자뿐이었습니다.
연못이 깊었습니다. 어른 키보다 깊은 곳에 빠져 있으니, 제가 뛰어든다 해도 둘 다 위험할 수 있었습니다. 그때 품속의 부채가 생각났습니다. 저는 부채를 꺼내 들었습니다. 마음속으로 빌었습니다. 저 사람을 살려주십시오. 진심이었습니다. 모르는 사람이었으나, 눈앞에서 사람이 죽어가는 것을 보고 그냥 있을 수는 없었습니다. 부채를 펼쳐 연못 쪽으로 세게 부쳤습니다.
바람이 일었습니다. 보통 바람이 아니었습니다. 부채에서 나온 바람이 연못 위를 훑으며 물결을 일으켰고, 그 물결이 물에 빠진 사람을 밀어 올렸습니다. 마치 보이지 않는 손이 물속에서 떠받치는 것처럼, 사내의 몸이 수면 위로 떠오르더니 연못 가장자리로 밀려왔습니다. 저는 황급히 달려가 사내의 팔을 잡아 끌어 올렸습니다.
사내가 물을 토하며 기침을 했습니다. 한참을 헐떡이다가 겨우 숨을 고르더니, 제 얼굴을 올려다보았습니다. 그 순간, 저는 가슴이 뜨끔했습니다. 물에 젖어 흐트러진 상투 아래로 단정한 이목구비가 드러나 있었는데, 눈이 참 맑은 사내였습니다. 나이는 저와 비슷해 보였고, 비록 물에 빠져 엉망이 되었으나 어딘지 품이 있는 얼굴이었습니다.
사내가 헐떡이며 말했습니다. 목숨을 구해주시어 감사합니다. 은혜를 어찌 갚아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저는 손을 내저었습니다. 괜찮습니다. 사람이 빠지는데 그냥 보고 있을 수는 없지 않습니까. 어서 물 젖은 옷을 갈아입으십시오, 감기 드시겠습니다.
사내가 이름을 물었습니다. 저는 잠시 망설이다가 대답했습니다. 월향이라 합니다. 그리고 덧붙였습니다. 기생입니다. 일부러 먼저 말한 것이었습니다. 기생이라는 것을 숨기고 나중에 알려지면 더 곤란해질 테니까요.
그런데 사내의 반응이 의외였습니다. 기생이든 뭐든 제 목숨을 살려주신 은인이십니다. 신분이 무슨 상관이겠습니까. 사내는 자신을 이강이라 소개했습니다. 한양에서 왔고, 아버지가 예조에 계신다고 했습니다. 과거를 준비하며 남원에 내려와 있는 중이라 했지요.
그날 이후 이강은 저를 찾아왔습니다. 처음에는 은혜를 갚겠다며 비단 한 필을 보내왔고, 다음에는 서책 한 권을 보내왔습니다. 기생에게 서책을 보내다니, 보통 양반과는 다른 사내였습니다. 저는 처음에 경계했습니다. 양반이 기생에게 선물을 보내는 것은 대부분 한 가지 목적이었으니까요. 그러나 이강은 달랐습니다. 광한루 연못가에서 만나자고 하더니, 와서는 저에게 시를 읽어주고, 세상 이야기를 해주었습니다. 제 이야기도 들어주었습니다. 기생의 삶이 얼마나 고된지, 막월이 어멈이 얼마나 좋은 분이었는지, 가야금을 칠 때 어떤 기분이 드는지. 이강은 진심으로 귀를 기울였습니다.
저는 점점 마음이 흔들리기 시작했습니다. 양반 도령에게 마음을 주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머리로는 알면서도, 가슴이 말을 듣지 않았습니다. 이강의 눈빛이 다른 양반들과 달랐기 때문입니다. 저를 기생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월향이라는 한 사람으로 보고 있었습니다. 그것이 저에게는 세상에서 가장 귀한 선물이었습니다.
한 달이 지났을 때, 이강이 저에게 말했습니다. 월향, 나는 당신을 아내로 맞고 싶소. 저는 귀를 의심했습니다. 양반이 기생에게 아내가 되어 달라고 하다니요. 첩이 되라는 말은 귀에 딱지가 앉도록 들었으나, 아내가 되라는 말은 난생처음이었습니다.
6: 시련과 도깨비의 재등장
이강의 고백에 저는 기뻤으나, 현실은 차가웠습니다. 이강의 아버지는 예조 참의를 지낸 양반이었고, 어머니는 안동 김씨 명문가의 딸이었습니다. 그런 집안에서 기생 며느리를 받아들일 리가 없었습니다.
이강이 한양에 편지를 보내자, 예상대로 아버지의 답장은 불호령이었습니다. 당장 남원을 떠나 올라오너라. 기생에게 빠져 정신을 못 차리다니, 네가 이 집안의 자식이 맞느냐. 이강의 어머니는 울면서 편지를 보내왔습니다. 아가, 제발 철없는 소리 하지 말아라. 기생과 혼인하면 네 벼슬길은 물론이고, 이 집안이 웃음거리가 된다.
이강은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아버지께서 허락하시든 하지 않으시든, 월향과 혼인하겠습니다. 그러나 현실은 이강의 의지만으로 바꿀 수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강의 아버지가 남원 부사에게 연락하여, 월향을 이강과 만나지 못하게 하라고 압력을 넣은 것입니다. 부사는 기방에 명을 내려 월향의 외출을 금지시켰고, 이강에게는 남원을 떠나라는 최후통첩을 보냈습니다.
저는 기방 방 안에 갇힌 채 울었습니다. 역시 안 되는 것이었습니다. 기생이 양반과 혼인한다는 것은 하늘의 별을 따는 것보다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이강의 마음이 아무리 진심이라 해도, 이 세상의 벽은 너무 높고 단단했습니다.
그날 밤이었습니다. 울다 지쳐 잠이 든 저를 누군가 툭툭 건드렸습니다. 눈을 떠보니 방 안에 푸르스름한 빛이 가득했습니다. 도깨비였습니다. 비 오던 그날 밤의 그 도깨비가, 제 방 안에 쪼그리고 앉아 있었습니다. 커다란 몸을 웅크리고 천장에 뿔이 닿을까 말까 하는 모습이 다른 때 같으면 우습기도 했을 텐데, 그때는 울음이 터졌습니다.
도깨비가 머쓱한 표정으로 말했습니다. 야, 울지 마라. 내가 왜 왔는지 아느냐. 네가 부채를 쓴 것을 보았다. 빠진 사내를 살릴 때. 욕심이 아니라 진심으로 쓰더구나. 기특해서 왔다.
저는 눈물을 닦으며 물었습니다. 도깨비님, 저를 도와주실 수 있습니까. 저는 이강 도령과 혼인하고 싶습니다. 그러나 세상이 허락하지 않습니다. 부채를 부쳐볼까 했으나, 이것이 진심인지 욕심인지 분간이 되지 않아서 쓰지 못했습니다.
도깨비가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네가 스스로 그 구분을 했다는 것이 중요하다. 욕심이었다면 이미 부채를 부쳤을 것이다. 진심인지 의심하며 주저한 것 자체가, 네 마음이 진심이라는 증거다.
도깨비가 허리를 펴며 말했습니다. 내가 직접 도울 수는 없다. 도깨비는 사람의 인연에 끼어들면 안 되거든. 그러나 기회를 하나 만들어 줄 수는 있다. 이강 도령의 아비 되는 양반이 곧 남원에 내려온다. 아들을 데려가려고 말이다. 그 양반 앞에서 네가 진심을 보여라. 부채는 그때 쓰되, 욕심이 아닌 진심으로 부쳐라. 나머지는 바람이 알아서 할 것이다.
도깨비가 문을 열고 나가려다 멈춰 서서 뒤를 돌아보았습니다. 그리고 껄걸 웃으며 한마디 덧붙였습니다. 참, 그리고 그날 밤 춤 말이다. 아직도 생각나서 혼자 추고 있다. 고맙다, 월향아.
도깨비가 사라진 뒤, 저는 한참을 멍하니 앉아 있었습니다. 그리고 부채를 꺼내 가슴에 안았습니다. 기회가 온다면, 이번에는 도망치지 않겠다고 마음먹었습니다.
7: 월향의 새 삶
도깨비의 말대로, 닷새 뒤 이강의 아버지 이 참의가 남원에 내려왔습니다. 아들을 끌고 한양으로 돌아가기 위함이었지요. 이 참의는 남원 부사의 관아에 머물며 이강을 불렀습니다. 이강은 가지 않으려 했으나, 아버지의 명을 끝까지 거역할 수는 없었습니다. 아버지와 마주 앉은 이강에게 이 참의가 말했습니다.
기생을 아내로 삼겠다는 말을 당장 거두어라. 그렇지 않으면 네 이름을 족보에서 지우겠다.
이강이 대답했습니다. 족보에서 지우셔도 좋습니다. 월향과 혼인하지 못할 바에는 과거도, 벼슬도, 가문도 필요 없습니다.
이 참의의 얼굴이 시뻘게졌습니다. 부자간에 팽팽한 대치가 이어지는 그때, 뜻밖의 일이 벌어졌습니다. 관아 마당에서 갑자기 소란이 일었습니다. 불이야, 하는 외침과 함께 관아 뒤편 문서고에서 연기가 피어오르기 시작한 것입니다.
사람들이 우왕좌왕하는 사이, 문서고의 불길이 걷잡을 수 없이 번져갔습니다. 문서고에는 남원 고을의 호적과 세금 장부,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과거 시험 답안지가 보관되어 있었습니다. 이것이 타버리면 고을 행정이 마비될 판이었습니다. 부사가 발을 동동 구르며 불을 끄라 소리쳤으나, 불길이 너무 세서 아무도 가까이 가지 못했습니다.
저는 관아 밖에서 이 소란을 듣고 달려왔습니다. 도깨비가 말한 기회가 이것이었구나 하는 직감이 들었습니다. 저는 품에서 부채를 꺼내 들었습니다. 그리고 마음속으로 빌었습니다. 이 불을 꺼주십시오. 사람들이 다치지 않게 해주십시오. 진심이었습니다. 이강을 위해서가 아니라, 눈앞의 재앙을 막기 위한 진심이었습니다.
부채를 활짝 펼쳐 불길을 향해 힘껏 부쳤습니다. 그러자 부채에서 거센 바람이 일었는데, 보통 바람이 아니었습니다. 불을 키우는 바람이 아니라, 불을 삼키는 바람이었습니다. 바람이 불길 위를 지나가자, 화염이 눈 녹듯 사그라들었습니다. 한 번 부치니 불길이 줄었고, 두 번 부치니 연기가 멎었고, 세 번 부치니 불이 완전히 꺼졌습니다. 문서고 건물은 일부 그을렸으나, 안에 보관된 문서들은 무사했습니다.
마당에 있던 모든 사람이 입을 벌린 채 저를 바라보았습니다. 부사도, 관리들도, 이강도, 그리고 이 참의도. 이 참의가 저에게 다가왔습니다. 네가 어떻게 한 것이냐. 저는 부채를 보여드리며 대답했습니다. 이것은 도깨비에게 받은 부채입니다. 진심으로 원하면 바람이 돕습니다. 저는 사람들이 다치는 것을 원치 않았을 뿐입니다.
이 참의가 한참 동안 저를 뚫어지게 바라보았습니다. 그리고 물었습니다. 네가 월향이라는 기생이냐. 예, 그렇습니다. 이 참의가 다시 물었습니다. 불을 끈 것은 내 아들 때문이 아니라, 진정 사람들을 걱정해서 한 것이냐. 저는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솔직히 말씀드리면, 이강 도령을 만나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불이 났으니 끈 것뿐입니다. 설령 이 자리에 이강 도령이 없었더라도 같은 일을 했을 것입니다.
이 참의의 눈빛이 변했습니다. 오랜 관직 생활로 사람을 보는 눈이 있었던 이 참의는, 제 눈빛에서 거짓이 없음을 읽었습니다. 이 참의가 긴 한숨을 내쉬며 말했습니다. 도깨비가 선물을 주는 데는 이유가 있다고 들었다. 도깨비는 마음이 바른 사람에게만 복을 준다고. 네가 그런 사람이라면, 내 아들이 틀린 선택을 한 것은 아닌 듯하구나.
그 한마디가 이강의 눈에서 눈물이 쏟아지게 만들었습니다. 아버지. 이 참의가 손을 들어 아들의 말을 막으며 말했습니다. 다만 조건이 있다. 기적에서 이름을 빼야 한다. 그리고 이 일은 세상에 알려져서는 안 된다. 도깨비 이야기까지 퍼지면 집안이 떠들썩해질 게 아니냐.
저는 무릎을 꿇고 절을 올렸습니다. 감사합니다, 어른.
그 후의 일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었습니다. 남원 부사가 이 참의의 부탁을 받아 제 이름을 기적에서 빼주었고, 저는 양인의 신분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해 가을, 이강과 저는 조촐하게 혼례를 올렸습니다. 성대한 잔치는 없었으나, 이강이 제 면사포를 벗기며 웃던 그 얼굴은 평생 잊지 못할 것입니다.
혼례 뒤 한양으로 올라가는 날, 남원을 떠나기 전에 한 곳을 들렀습니다. 그날 밤 도깨비를 만났던 숲이었습니다. 저는 숲 한가운데에 서서 부채를 꺼내 들었습니다. 그리고 소리쳤습니다. 도깨비님, 감사합니다. 덕분에 새 삶을 얻었습니다.
숲이 고요했습니다. 대답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돌아서려는 순간, 바람이 한 줄기 불어왔습니다. 그 바람에 실려 익숙한 껄걸 웃음소리가 아스라이 들려왔습니다. 그리고 바람이 귓가를 스치며 속삭이듯 말했습니다. 부채는 이제 필요 없다. 네 마음이 곧 부채다. 진심으로 사는 한, 바람은 늘 네 편일 것이다.
저는 부채를 살구나무 가지에 걸어두고 숲을 나왔습니다. 돌아보니 부채가 바람에 살랑살랑 흔들리고 있었습니다. 마치 도깨비가 손을 흔드는 것처럼.
훗날, 이강은 과거에 급제하여 사간원 정언을 거쳐 벼슬길에 올랐고, 저는 양반 부인으로서 아들 하나 딸 하나를 낳고 평탄하게 살았습니다. 시어머니 안동 김씨는 처음에는 저를 못마땅해하셨으나, 제가 가야금을 타며 시어머니의 잠을 달래드리고, 손수 약을 달여 올리니 차츰 마음을 여셨습니다. 나중에는 우리 며느리가 비록 출신은 보잘것없으나 마음씨만큼은 명문가 규수보다 낫다며 자랑을 하셨다지요.
가끔 밤에 바람 소리가 들리면, 저는 창문을 열고 귀를 기울입니다. 그 바람 속에 도깨비의 웃음소리가 실려 오는 것 같거든요. 껄걸껄걸, 즐겁게 웃는 소리가. 그때마다 저는 혼자 웃으며 속으로 인사합니다. 도깨비님, 오늘도 잘 지내시지요. 덕분에 저는 오늘도 행복합니다.
이것이 제 이야기입니다. 천한 기생이 도깨비와 춤을 추고, 낡은 부채 하나를 받아, 양반 부인이 된 이야기. 도깨비의 장난은 때로 복이 되고, 진심은 때로 기적이 됩니다. 여러분도 혹시 비 오는 밤 숲길을 걸으시다가 도깨비불을 만나시거든, 도망치지 마십시오. 용기를 내어 마주 서십시오. 도깨비는 겁먹은 자에게는 장난을 치지만, 당당한 자에게는 복을 준다 하였으니까요.
유튜브 엔딩멘트
여러분, 오늘 월향의 이야기 어떠셨습니까. 도깨비와 춤을 추고 받은 낡은 부채 하나가 기생의 운명을 바꾸어 놓았습니다. 진심으로 사는 사람에게는 하늘도, 도깨비도 복을 내린다는 옛 어른들의 말씀이 참으로 맞는 것 같습니다. 이 이야기가 마음에 드셨다면 구독과 좋아요, 알림 설정까지 부탁드립니다. 다음 이야기에서는 또 다른 도깨비 이야기로 찾아뵙겠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