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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의 속마음이 들리는 귀걸이 『청음야담(聽音野談)』
손님들의 주머니를 털기 위해 도깨비에게 남의 속마음이 들리는 귀걸이를 얻은 기생. 하지만 사람들의 추악하고 기만적인 본심을 매일 듣다 정신병에 걸릴 위기에 처합니다. 결국 무지의 평온함을 깨닫고 귀걸이를 부수며, 진심은 귀가 아닌 마음으로 보는 것임을 깨우칩니다.
※ 본 이야기는 극적 각색을 위한 가상의 출처이며, 조선 야담의 정서와 형식을 빌려 창작한 오디오 드라마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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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킹멘트 (270자)
남의 속마음을 훤히 들여다볼 수 있다면, 그것은 과연 축복일까요, 저주일까요? 한양 제일의 기생 월향은 어느 밤 도깨비에게서 사람의 속마음이 들리는 귀걸이를 얻습니다. 손님들의 주머니를 마음껏 털며 부귀영화를 누리지만, 웃는 낯 뒤에 감춰진 추악하고 기만적인 본심을 매일같이 듣다 서서히 미쳐 가는데…. 과연 월향은 이 지옥 같은 소리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요? 진심은 귀로 듣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보는 것임을 깨닫게 되는, 가슴 먹먹한 조선 야담 한 편. 지금 바로 만나 보세요.
※ 1: 월향의 설움과 우물가의 도깨비
옛날 옛적, 한양 청계천 물길이 굽이굽이 돌아 나가는 남촌 어름에 이름난 기방이 하나 있었더랍니다. 처마 끝에 붉은 홍등이 대롱대롱 걸리고, 밤마다 거문고 소리와 웃음소리가 담장을 훌쩍 넘던 그 집에, 월향이라는 기생이 살았지요.
월향은 얼굴이 희기가 갓 구워 낸 백자 항아리 같고, 눈매가 물기를 촉촉이 머금은 듯 서글서글하여, 한 번 그 웃음을 본 사내는 열흘을 앓아눕는다는 소문이 자자했더랍니다. 거문고를 뜯으면 지나가던 새도 가지에 앉아 귀를 기울인다 하였고, 시 한 수를 읊으면 내로라하는 선비들도 붓을 놓고 감탄했다 하니, 그 재주와 자색이 남촌 바닥에서 단연 으뜸이었지요.
허나 어여쁜 얼굴이 밥을 먹여 주는 건 아니었더랍니다. 월향에게는 남모를 깊은 근심이 하나 있었으니 말입니다. 기생의 봄날이 대체 얼마나 짧습니까. 스물다섯만 넘어도 홍등 아래 불러 주는 이가 뚝 끊기고, 서른이 되면 방 한 칸 겨우 얻어 삯바느질로 하루하루 연명하는 게 늙은 기생의 서글픈 말로였지요. 월향은 그게 무서웠더랍니다. 젊고 고운 지금 한 푼이라도 더 모아 두어야, 늙어 병들었을 때 남의 집 문간에서 손 벌리지 않고 살 수 있을 테니 말입니다.
'곱다 곱다 하지만, 저이들이 진정 나를 어찌 여기는지 내 어찌 알겠누. 오늘 웃던 입이 내일은 흉을 보고, 어제 금붙이를 안기던 손이 오늘은 옆방 어린 기생에게로 훌쩍 넘어가니….'
그것이 월향의 가장 큰 설움이었더랍니다. 사내들의 속을 도무지 알 수가 없다는 것 말이지요. 겉으로는 죽고 못 살 듯 애간장을 태우다가도, 돌아서면 언제 그랬냐는 듯 발길을 뚝 끊는 이가 한둘이 아니었으니까요. 진심으로 정을 준 사내에게 배신당한 것도 여러 번, 재물을 풀 듯 굴다가 홀연 사라져 버린 자도 부지기수였더랍니다.
돌이켜 보면 월향의 지난 세월이 다 그러했더랍니다. 열두 살 어린 나이에 기적에 이름을 올린 뒤로, 웃음을 팔고 소리를 팔며 살아온 세월이 어언 십 년이 넘었지요. 그동안 곱다, 어여쁘다, 하늘이 내린 재주다, 하는 소리는 귀에 딱지가 앉도록 들었더랍니다. 허나 그 숱한 말들 가운데 진심이 몇이나 되었을까요. 어느 봄날엔 죽자 사자 매달리던 젊은 도령이 있었는데, 정을 다 주고 나니 어느 날 홀연 자취를 감추고는 저 잘사는 집 규수에게 장가를 들어 버렸지요. 또 어느 해엔 살림을 차려 주마 굳게 언약하던 벼슬아치가, 뒤로는 월향의 험담을 하고 다녀 하마터면 기방에서 쫓겨날 뻔한 일도 있었더랍니다. 그럴 때마다 월향은 이불을 뒤집어쓰고 밤새 소리 죽여 울었지요.
바로 그날 밤도 그랬지요. 김 진사라는 늙은 부자가 며칠을 눈독 들이며 온갖 달콤한 말을 늘어놓더니, 큰 재물을 안겨 줄 듯 잔뜩 바람을 넣고는 홀연 발길을 끊어 버린 겁니다. 알고 보니 강 건너 젊은 기생에게 마음이 슬그머니 옮겨 간 거였지요. 월향은 텅 빈 방에 홀로 앉아 식어 버린 술잔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한숨만 폭폭 내쉬었더랍니다.
"에구, 사람 속이 어찌 이리도 알 수가 없누. 남의 속을 훤히 들여다볼 수만 있다면, 내 이런 구차한 설움일랑 두 번 다시 겪지 않을 것을."
무심코 툭 뱉은 그 한마디가, 그예 앞날의 화근이 될 줄을 그때 누가 알았겠습니까.
밤이 이슥해지자 월향은 답답한 마음을 달래려 뒷마당으로 나섰더랍니다. 오래된 우물가에 늙은 회화나무 한 그루가 우두커니 서 있었는데, 그날따라 달빛이 어찌나 시퍼렇게 푸르던지, 나뭇가지 그림자가 마당 위에 얼기설기 그물처럼 스산하게 드리웠지요.
그때였습니다. 우물 쪽에서 무언가 도란도란, 소곤소곤 소리가 나는 게 아니겠습니까. 처음엔 밤바람 소린가 했더랍니다. 헌데 가만히 귀 기울여 들어 보니, 분명 사람의 말소리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한, 묘하게 걸걸한 웃음소리가 섞여 있었지요.
월향이 오싹한 마음을 억누르고 조심조심 다가가 보니, 세상에나. 우물 난간에 웬 우람한 사내 하나가 떡하니 걸터앉아 있는 게 아닙니까. 키는 장정 둘을 위아래로 합쳐 놓은 듯 껑충하고, 머리에는 뿔인지 상투인지 모를 것이 삐죽 솟았으며, 두툼한 손에는 울퉁불퉁한 방망이 하나를 척 들고 있었더랍니다.
월향은 그것이 사람이 아니라 도깨비임을 단박에 알아챘지요. 헌데 이상하게도 다리가 후들거리기는커녕, 그다지 무섭지가 않았더랍니다. 도깨비는 월향을 보더니 씨익 웃고는, 우렁우렁한 목소리로 말을 걸어왔지요.
"어허, 곱기도 하다. 헌데 그 고운 얼굴에 어찌 그리 짙은 그늘이 졌누?"
월향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으나, 워낙 담이 큰 여인이라 애써 태연한 척 대꾸했더랍니다.
"뉘신지는 모르나, 남의 집 뒷마당에서 대체 무얼 하고 계시오?"
"나야 이 우물에 오래오래 눌러앉아 사는 도깨비지. 헌데 방금 네가 하던 넋두리를 내 여기서 죄다 들었다. 남의 속을 훤히 들여다보고 싶다, 그리 말하지 않았느냐?"
월향은 흠칫 놀랐더랍니다. 혼잣말을 죄다 들켰으니 얼굴이 화끈화끈 달아올랐지요. 도깨비는 방망이로 우물 난간을 툭툭 두드리며 능글맞게 웃었더랍니다.
"내 오늘 네 그 서글픈 넋두리가 어쩐지 딱하여, 아주 귀한 것을 하나 주려 하는데 말이다. 어떠냐, 한번 받아 보겠느냐?"
월향은 잠시 도깨비의 얼굴을 빤히 올려다보았더랍니다. 무언가 홀린 듯한 기분이 들었지요. 어릴 적 할미에게서 도깨비란 심술궂고 짓궂어도, 사람을 어여삐 여기면 이따금 큰 복을 안겨 주기도 한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었더랍니다. 방망이를 한 번 뚝딱 치면 없던 금은보화가 우르르 쏟아진다는, 그런 이야기 말이지요.
"귀한 것이라니, 대체 어떤 것을 말씀하시오?"
월향이 저도 모르게 한 발짝 다가서며 묻자, 도깨비는 그저 빙그레 웃기만 할 뿐 얼른 대답을 하지 않았더랍니다. 애를 태우듯 뜸을 들이는 그 모습에, 월향의 마음은 더욱 안달이 났지요.
그 말에 월향의 두 눈이 반짝 빛났더랍니다. 앞날의 크나큰 화가 바로 그 반짝이던 눈빛에서 시작될 줄도 까맣게 모르고 말이지요.
※ 2: 속마음이 들리는 귀걸이
도깨비는 품속에서 무언가를 스윽 꺼내 달빛에 들어 보였더랍니다. 그것은 옥으로 곱게 깎은 귀걸이 한 쌍이었는데, 어찌나 맑고 푸른지 달빛을 은은히 머금어 스스로 빛을 뿜는 게, 도무지 이 세상 물건 같지가 않았지요.
"이것은 사람의 속마음이 들리는 귀걸이니라. 이걸 귀에 걸면, 앞에 앉은 자가 겉으로 무슨 번드르르한 말을 하든, 그 속에 꽁꽁 감춘 진짜 속내가 네 귀에 또렷이 들릴 것이야."
월향은 저도 모르게 침을 꼴깍 삼켰더랍니다. 남의 속을 훤히 들여다볼 수 있다니. 그것이야말로 월향이 그토록 애타게 바라 마지않던 것이 아니었습니까.
'저것만 있으면… 어느 손님이 정말로 재물을 풀 마음인지, 어느 사내가 진심으로 나를 원하는지 훤히 알 수 있으렷다. 다시는 김 진사 같은 자에게 헛물켜며 애간장 태울 일도 없겠지.'
허나 세상에 공짜가 어디 있겠습니까. 월향은 눈을 가늘게 뜨고 조심스레 물었더랍니다.
"그리 귀한 것을 어찌 거저 주시겠소. 대가로 대체 무얼 바라시오?"
도깨비는 껄껄 너털웃음을 터뜨렸더랍니다.
"허허, 제법 영리하구나. 대가랄 것도 없다. 다만 딱 하나만 일러 두마. 이 귀걸이는 한번 걸면 네 마음대로는 결코 뺄 수가 없느니라. 오직 네 스스로 이 물건을 산산이 부수어 버릴 때에야, 비로소 그 소리가 뚝 그치는 게야. 그때까지는 좋든 싫든 온 세상 속마음이 죄다 네 귀로 쏟아져 들어올 터인데… 그래도 정녕 받겠느냐?"
월향은 잠시 망설였지요. 허나 눈앞에 어른어른 떠오르는 부귀영화가, 그 망설임을 이내 꿀꺽 삼켜 버렸더랍니다.
"받겠소. 남의 속을 아는 것이 어찌 화가 되겠소. 도리어 큰 복이지요."
그 말에 도깨비의 두 눈이 묘하게 번뜩였으나, 월향은 미처 보지 못했더랍니다. 도깨비는 귀걸이를 월향의 손에 살포시 쥐여 주더니, 한바탕 걸걸한 너털웃음을 남기고는 안개처럼 스르르 사라져 버렸지요. 우물가엔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푸른 달빛만 고요히 내려앉았더랍니다.
월향은 방으로 돌아와, 떨리는 손으로 그 옥 귀걸이를 두 귀에 걸었더랍니다. 차가운 옥이 귓불에 닿는 순간, 온몸에 서늘한 기운이 쭉 훑고 지나갔지요. 허나 그뿐, 별다른 일은 일어나지 않았더랍니다. 월향은 조금 실망하여, 그날은 그저 잠자리에 들었지요.
허나 그것이 결코 허튼 거짓이 아님을 안 것은, 바로 이튿날이었더랍니다.
이튿날 낮, 옆방의 어린 기생 초옥이 살랑살랑 웃으며 방으로 들어왔더랍니다.
"언니, 오늘도 참말 고우시네요. 저는 대체 언제쯤 언니처럼 될 수 있을까요?"
입으로는 그리 상냥하게 조잘대는데, 바로 그 순간 월향의 귀에 전혀 다른 소리가 파고들어 오는 게 아니겠습니까.
'흥, 늙은 여우 같으니라고. 얼른 한물가서 물러나 줘야 내 자리가 생길 텐데. 저 곱던 얼굴도 이제 눈가에 잔주름이 슬슬 지기 시작했구먼.'
월향은 소스라치게 놀라 하마터면 소리를 지를 뻔했더랍니다. 초옥의 입술은 분명 방긋 웃고 있는데, 그 속에서 흘러나오는 소리는 시퍼렇게 날 선 칼날 같았으니까요. 등골이 오싹 곤두섰지요.
'세상에… 정말로 들리는구나. 저 어린것의 속이 저리도 시커멨을 줄이야.'
처음엔 소름이 쫙 끼쳤으나, 월향은 이내 정신을 다잡았더랍니다. 그래, 이게 바로 도깨비가 준 그 귀한 힘이 아니냐. 이제 누가 진심이고 누가 거짓인지 죄다 알 수 있으니, 세상에 두려울 게 무엇이랴, 하고 말이지요.
바로 그날 저녁, 월향은 처음으로 그 귀걸이의 덕을 톡톡히 보았더랍니다. 어느 비단 장수가 술자리에 척 앉았는데, 겉으로는 값을 깎으려 짐짓 인색하게 굴면서도, 속으로는 이런 딴생각을 하고 있었지요.
'저 여인에게라면 비단 열 필도 하나 아깝지 않지. 어떻게든 저 마음을 얻어 내야 할 텐데.'
월향은 그 속을 훤히 들여다보고는, 짐짓 새침하게 돌아앉는 척하며 애간장을 살살 태웠더랍니다. 그러자 아니나 다를까, 비단 장수는 안달이 바싹 나서는 값진 노리개며 고운 비단이며를 아낌없이 척척 안겨 주었지요.
월향은 속으로 남몰래 쾌재를 불렀더랍니다.
'이것 봐라. 속이 훤히 들여다보이니, 사내 다루기가 그야말로 손바닥 뒤집기로구나.'
이튿날에도, 또 그 이튿날에도 마찬가지였더랍니다. 어느 날엔 허풍만 잔뜩 떠는 한량 하나가 큰돈을 쓸 듯 거들먹거리며 들어왔는데, 그 속을 들여다보니 주머니는 텅 비어 빈털터리요, 그저 하룻밤 공짜로 놀아 볼 심산이었지요. 예전 같았으면 그 번드르르한 말에 넘어가 정성껏 상을 차려 냈을 테지만, 이제는 그 속셈을 훤히 아니 슬쩍 다른 손님에게로 자리를 옮겨 버렸더랍니다. 또 어느 날엔 겉으로는 무뚝뚝하기 짝이 없는 늙은 상인이 하나 있었는데, 그 속은 뜻밖에도 월향을 진심으로 아끼는 마음으로 가득 차 있었지요. 월향은 그를 각별히 대접했고, 그 상인은 감읍하여 두고두고 큰 재물을 안겨 주었더랍니다.
그날 이후, 월향의 재물은 나날이 눈덩이처럼 불어 갔더랍니다. 어느 손님이 정말로 돈을 쓸 마음인지, 어느 자가 허풍만 잔뜩 떠는지 단박에 알아채니, 애먼 데 헛수고할 일이 도통 없었지요. 남촌 바닥에 월향이 사람 속을 훤히 꿰뚫어 본다는 소문이 은근슬쩍 퍼지기 시작했더랍니다. 어떤 이는 월향을 두고 신통한 점쟁이가 따로 없다며 혀를 내둘렀고, 또 어떤 이는 그 눈빛만 마주쳐도 속이 발가벗겨지는 듯하다며 은근히 꺼리기도 했지요.
밤이면 밤마다 월향은 그 옥 귀걸이를 어루만지며 흐뭇하게 웃었더랍니다. 이만한 보물이 세상에 또 어디 있으랴, 이제 늙어 병들 걱정도, 남에게 배신당할 걱정도 없으렷다, 하고 말이지요. 도깨비가 남기고 간 그 서늘한 웃음의 뜻을, 그때는 조금도 헤아리지 못했더랍니다.
허나 월향은 그때까지도 알지 못했지요. 그 귀걸이가 실은 복이 아니라, 서서히 제 목을 옥죄어 오는 무서운 올가미라는 것을 말입니다.
※ 3: 쏟아지는 추악한 본심
달포가 지나자 월향은 남촌에서 제일가는 기생이 되었더랍니다. 곳간에는 비단이 그득그득 쌓이고, 패물함에는 금붙이가 넘쳐 났지요. 뭇 사내들이 월향의 방 앞에 줄을 길게 늘어섰으니, 겉으로 보기엔 더 바랄 것이 없는 팔자였더랍니다.
허나 사람의 속이 어디 곱기만 하겠습니까. 월향의 두 귀에는 온갖 사람의 시커먼 속내가 밤낮으로 쉼 없이 쏟아져 들어왔더랍니다.
하루는 고을의 별감이 찾아와, 입에 침이 마르도록 월향을 추어올렸지요.
"월향이 자네야말로 이 한양의 꽃이지. 자네 같은 이는 이 세상에 다시없을 게야."
허나 그 입에서 흘러나오는 속소리는, 소름이 확 끼치도록 딴판이었더랍니다.
'천한 기생 주제에 콧대만 하늘 높은 줄 모르고 높아서는. 언젠가 한번 크게 망신을 주어, 저 도도한 콧대를 확 꺾어 놓아야겠구나.'
월향은 겉으로는 방긋 웃으면서도 속이 서늘하게 식어 내렸더랍니다. 방금 전까지 꽃이라 추어올리던 자가, 속으로는 자기를 짓밟을 궁리를 하고 있었으니까요.
또 하루는, 평소 월향을 친딸처럼 아낀다던 행수 어미가 다정히 손을 꼭 잡았지요.
"아이고, 우리 월향이. 요새 몸이 자꾸 축나는 게 아니냐. 이 어미가 다 걱정이 되어 그런다."
말은 그리도 따뜻한데, 그 속은 영 딴판이었더랍니다.
'이년이 요새 벌이가 아주 쏠쏠하렷다. 어떻게든 잘 구슬려서 그 재물을 몽땅 내 손에 넣어야지. 늙어 빠진 기생년이 무슨 재물을 그리 쌓아 두려고.'
월향은 잡힌 손이 마치 뱀이라도 닿은 듯 소름이 쫙 돋았더랍니다. 어미라 부르며 그리도 따르던 이의 속이 저리도 시커멀 줄이야, 대체 어찌 알았겠습니까.
처음엔 그저 씁쓸한 정도였더랍니다. 헌데 이런 일이 하루 이틀도 아니고, 아침부터 밤까지 도무지 끊이질 않으니, 월향의 마음이 조금씩조금씩 병들어 가기 시작했지요.
생각해 보면 참으로 기가 막힐 노릇이었더랍니다. 세상에 믿을 만한 사람이 하나도 없다는 것, 그것을 두 귀로 똑똑히 확인하며 산다는 것이 얼마나 끔찍한 일입니까. 곱다 곱다 칭송하는 입술 뒤에는 시샘이 숨어 있고, 정답게 웃는 눈길 뒤에는 계산이 도사리고 있었지요. 심지어 어린 몸종 아이조차 속으로는 '언제 이 집을 도망쳐 나갈까' 궁리하고 있었으니, 월향은 그 누구와도 마음을 나눌 수가 없었더랍니다. 예전엔 몰라서 편안했던 것을, 이제는 훤히 알게 되어 도리어 외로움이 사무쳤지요.
거리에 나서기라도 하면, 지나가는 행인들의 속소리가 웅웅, 벌 떼처럼 사방에서 한꺼번에 몰려들었더랍니다.
'저 여인 참 곱기도 하다. 헌데 기생이라니 참으로 아깝군. 하룻밤 값이 대체 얼마나 할꼬.'
'옷차림을 보아하니 돈깨나 있겠구나. 뒤를 슬쩍 밟아 소매치기하기 딱 좋겠는걸.'
'남편 몰래 딴 살림을 차렸는데 이러다 들키면 어쩌나. 아이고, 골치야 골치.'
저마다 겉으로는 그럴싸하게 점잖은 얼굴을 하고 있으나, 그 속은 하나같이 욕심과 거짓과 음흉함으로 부글부글 들끓고 있었더랍니다. 월향은 두 귀를 틀어막고 싶었지만, 그 소리는 손바닥으로 막는다고 막아지는 게 결코 아니었지요.
'세상에 어찌 이리도 진심이 없누. 웃는 낯 뒤에 다들 시퍼런 칼을 감추고 있으니, 대체 이 세상 누구를 믿어야 한단 말인가.'
밤이 되어도 도무지 편치가 않았더랍니다. 지친 몸을 뉘어 잠자리에 들면, 낮에 들었던 그 시커먼 속소리들이 귓가에 웅웅 맴돌아, 도무지 두 눈을 붙일 수가 없었지요. 월향의 그 곱던 얼굴은 나날이 핼쑥하게 야위어 갔더랍니다.
한번은 오랜 단골이던 최 역관이 찾아왔지요. 월향은 그래도 이 사람만은 진심이려니, 하고 은근히 실낱같은 기대를 걸었더랍니다. 헌데 그 속을 가만 들여다보니, 기가 막힐 노릇이었지요.
'이 여인을 잘 구슬려 재물을 몽땅 뜯어낸 뒤, 뒷골목 장사치에게 소개하여 슬쩍 팔아넘기면 아주 큰돈이 되렷다.'
월향은 그만 손에 든 술잔을 툭 떨어뜨리고 말았더랍니다. 사람을 물건처럼 팔아넘길 흉악한 궁리를 하면서도, 겉으로는 그리도 다정히 웃고 있었으니, 그 간교함에 그만 온몸에 치가 부르르 떨렸지요.
"월향이, 어디 몸이라도 편찮은가? 오늘따라 안색이 영 안 좋구먼."
걱정하는 척 넌지시 묻는 그 말이, 이제는 온통 거짓으로만 들렸더랍니다. 월향은 억지로 입꼬리를 끌어 올려 웃어 보였으나, 속으로는 소리 없는 비명을 꺽꺽 지르고 있었지요.
'그만… 제발 그만 좀 들렸으면. 이 소리들이 기어이 나를 미치게 하는구나.'
그날 밤, 월향은 처음으로 그 귀걸이를 억지로 빼내려고 안간힘을 썼더랍니다. 허나 도깨비의 말 그대로, 그 옥 귀걸이는 귓불에 딱 들러붙어 아무리 잡아당겨도 꿈쩍도 하지 않았지요. 급기야 손톱이 부러지고 귓불에서 붉은 피가 배어 나도록 잡아당겨 보았으나, 도무지 아무 소용이 없었더랍니다.
월향은 그제야 비로소 뼈저리게 깨달았지요. 자기가 대체 얼마나 무서운 것을 겁도 없이 탐냈는지를 말입니다.
'복인 줄로만 알았더니, 이것이 바로 살아 있는 생지옥이었구나.'
그날부터 월향은 사람 만나기가 두려워지기 시작했더랍니다. 술자리에 나가 앉아 있어도, 웃고 떠드는 손님들의 낯빛 뒤에서 흘러나오는 그 시커먼 속소리에 진저리가 쳐졌지요. 거문고를 뜯으려 손을 올려도 손끝이 파르르 떨렸고, 노래를 부르려 입을 열어도 목이 콱 메어 소리가 나오지 않았더랍니다. 곱던 얼굴은 반쪽이 되고, 두 눈 밑에는 시커먼 그늘이 짙게 드리웠지요. 사람들은 저 잘나가던 월향이가 어쩐 일로 저리 하루가 다르게 폭삭 늙어 가느냐며 저마다 수군거렸지만, 그 애타는 속사정을 아는 이는 이 세상에 아무도 없었더랍니다.
허나 그 지옥이 이제 겨우 시작에 불과하다는 것을, 월향은 그때까지도 아직 알지 못했더랍니다.
※ 4: 깊어지는 광기, 그리고 한 사람
그 무렵 월향의 몰골은 차마 눈 뜨고 보기 어려울 지경이 되어 갔더랍니다. 밤에는 속소리에 시달려 잠을 못 자고, 낮에는 사람이 무서워 방문을 걸어 잠갔지요. 곱던 뺨은 홀쭉하게 패고, 물기를 머금어 서글서글하던 두 눈에는 핏발이 벌겋게 섰더랍니다. 보다 못한 행수 어미가 무당을 불러 굿을 하네, 용한 의원을 부르네 부산을 떨었지만, 그 어미의 속이 실은 시커멓다는 걸 아는 월향에게는 그마저도 다 헛것으로만 보였지요.
월향은 어떻게든 그 소리를 잊어 보려고 독한 술을 들이켜기도 했더랍니다. 허나 술기운에 정신이 몽롱해질수록, 그 시커먼 속소리는 도리어 더 또렷하고 크게 귓속을 후벼 파고들었지요. 술로도 막을 수 없고, 손으로도 막을 수 없으니, 월향은 그예 이런 생각까지 하기에 이르렀더랍니다.
'차라리 이 두 귀가 멀어 버렸으면. 아무것도 안 들리는 귀머거리가 되었으면.'
한번은 하도 답답하여 솜뭉치로 두 귀를 틀어막아 보기도 했더랍니다. 허나 그 속소리라는 것은 귓구멍으로 들어오는 것이 아니라, 머릿속에 곧바로 울리는 것이라 아무 소용이 없었지요. 또 한번은 절에 들어가 며칠을 지내 보기도 했더랍니다. 헌데 부처님 앞에 엎드려 절을 하는 신도들의 속조차, '이번엔 부디 아들놈이 과거에 붙게 해 주십사', '옆집 김 씨보다 내가 더 잘살게 해 주십사' 하는 욕심으로 그득하였으니, 그 거룩한 법당 안에서도 월향은 도무지 마음 둘 곳이 없었더랍니다.
그렇게 하루하루 벼랑 끝으로 내몰리던 어느 봄날이었지요. 오래되어 삭은 기방의 마루청과 기둥을 손보아야 한다며, 솜씨 좋은 목수 하나가 새로 불려 왔더랍니다. 이름은 인수라 하였지요. 나이는 서른 어름, 볕에 그을려 손등이 거칠고, 무명 바지저고리에 늘 톱밥을 묻히고 다니는 수수한 젊은이였더랍니다.
월향은 또 그 시커먼 속소리를 들을 생각에 지레 진저리를 쳤더랍니다. 사내란 사내는 죄다 자기를 보면 음흉한 속셈을 품기 마련이었으니까요. 그리하여 인수가 마루를 고치는 동안, 월향은 애써 그를 피해 방구석에 웅크리고 있었지요. 헌데 이상한 일이 벌어졌더랍니다.
인수가 대패질을 하며 마당을 오가는데, 그 속에서 흘러나오는 소리가 여느 사내들과는 영 딴판이었던 겁니다.
'이 기둥은 아랫도리가 삭았구나. 새것으로 갈아 대야 겨울에 무너지지 않으련만. 오래 쓸 물건이니 정성껏 다듬어야지.'
'어머니 약값은 이번 삯을 받으면 갚을 수 있으려나. 요새 기침이 부쩍 심하시던데, 오늘은 좀 나으셨으면.'
월향은 귀를 의심했더랍니다. 욕심도, 음흉함도, 계산도 없는 그 맑고 담백한 속소리라니. 이 지옥 같은 소음 속에서, 인수의 속만은 맑은 샘물처럼 고요하고 깨끗했던 겁니다. 월향은 저도 모르게 방문 틈으로 그 모습을 가만히 내다보았지요.
'저 사람은… 어찌 저리 속이 맑을꼬. 겉과 속이 저리 한결같은 사람이 세상에 다 있었구나.'
허나 그동안 하도 여러 번 배신을 당하고, 하도 많은 시커먼 속을 들여다본 터라, 월향은 도무지 그 맑음을 곧이곧대로 믿을 수가 없었더랍니다.
'아니야. 저것도 어쩌면 겉치레일 게야. 조금만 더 들어 보면 결국 저 속에서도 시커먼 것이 기어 나오겠지.'
그리하여 월향은 은근히 인수의 속을 더 엿듣기 시작했더랍니다. 언제쯤 저 사내가 본색을 드러내나, 언제쯤 재물을 탐내고 음흉한 속을 드러내나, 하고 말이지요. 헌데 아무리 며칠을 두고 들어 보아도, 인수의 속에서는 끝내 그 시커먼 것이 흘러나오지 않았더랍니다.
하루는 월향이 슬쩍 인수를 떠보았지요. 값진 은비녀 하나를 마당에 일부러 떨어뜨려 놓고, 인수가 어찌하나 멀찍이서 지켜본 겁니다. 사내들의 속이란 게 다 그러하니, 저 비싼 은비녀를 보면 필시 슬그머니 제 품에 챙길 것이라 여겼더랍니다. 헌데 인수는 그 은비녀를 주워 들고는 이리 생각하는 게 아니겠습니까.
'이런, 아씨가 아끼는 물건을 흘리셨나 보구나. 얼른 갖다 드려야지. 잃어버리고 얼마나 애를 태우실꼬.'
그러고는 한달음에 달려와 두 손으로 공손히 비녀를 건네주었더랍니다. 월향은 그만 말문이 막혔지요. 이 시커먼 세상에, 값진 물건을 보고도 제 것으로 탐내기는커녕 주인 걱정부터 하는 사람이 있을 줄이야, 꿈에도 몰랐으니까요.
하루는 월향이 마당을 지나다 그만 문지방에 발이 걸려 휘청, 넘어질 뻔했지요. 그러자 인수가 얼른 대패를 내려놓고 달려와 부축해 주었더랍니다.
"아이고, 조심하십시오. 다치실 뻔하셨습니다."
그 순간에도 인수의 속에서 들려오는 소리는 이러했지요.
'저 아씨가 요새 통 안색이 안 좋으시더니. 어디 편찮으신가. 딱하기도 하지.'
월향은 그만 눈시울이 뜨거워졌더랍니다. 이 무섭도록 시커먼 세상에서, 아무 대가도 바라지 않고 그저 남을 딱하게 여기는 마음이라니. 그것이 얼마 만에 들어 보는 사람다운 소리였는지 모릅니다.
그날 이후, 월향은 이상하게도 인수가 일하는 마당가에 자주 나와 앉게 되었더랍니다. 그 맑은 속소리를 듣고 있노라면, 사방에서 몰려들던 그 시커먼 소음이 잠시나마 잦아드는 듯했으니까요. 대패질 소리, 톱질 소리에 섞여 들려오는 인수의 정갈한 마음이, 월향에게는 마치 오랜 가뭄 끝에 내리는 단비 같았지요.
'이 사람 곁에 있으면… 숨을 쉴 것 같구나.'
가만 보고 있노라면, 인수는 참으로 우직하고 다정한 사람이었더랍니다. 마루를 고치다가도 개미 한 마리가 지나가면 밟지 않으려 발을 옮겨 딛고, 점심에 나온 밥이 조금 많으면 마당의 삽살개에게 슬쩍 덜어 주는, 그런 사람이었지요. 월향은 그 소소한 모습들을 지켜보며, 오래 잊고 지냈던 사람에 대한 믿음이 조금씩 되살아나는 것을 느꼈더랍니다.
허나 세상은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았더랍니다. 인수의 마루 손질이 끝나 갈 무렵, 월향의 곳간에 쌓인 재물을 노리는 자들의 시커먼 속셈이, 마침내 하나로 모여 무섭게 소용돌이치기 시작했으니 말입니다.
※ 5: 무너짐, 그리고 무지의 평온
그날 밤도 월향은 속소리에 시달려 뒤척이고 있었더랍니다. 그때 마당 건너 행수 어미의 방에서, 낮은 목소리가 두런두런 새어 나오는 게 아니겠습니까. 월향이 가만 귀를 기울여 보니, 행수 어미와 그 별감이 머리를 맞대고 무언가를 수군거리고 있었지요. 겉으로 오가는 말은 별것 아니었으나, 그 속에서 흘러나오는 두 사람의 진짜 속내는 소름 끼치도록 무서웠더랍니다.
'저 월향이 년이 요새 정신이 오락가락하니, 이때다 하고 재물을 몽땅 털어야지. 며칠 뒤 큰 잔칫날, 술에 몹쓸 것을 타서 정신을 잃게 한 뒤, 곳간을 통째로 비우고 저년은 먼 고을에 종으로 팔아넘기면 그만이야.'
'그래, 실성한 기생년 하나 없어진들 누가 찾겠나. 그동안 모은 재물이 얼만데. 이 기회를 놓칠 수야 없지.'
월향은 온몸의 피가 싸늘하게 얼어붙는 것만 같았더랍니다. 딸처럼 아낀다던 어미가, 꽃이라 추어올리던 별감이, 속으로는 자기를 술로 재워 재물을 털고 종으로 팔아넘길 흉계를 꾸미고 있었으니 말입니다.
가만 더 들어 보니, 그 흉계에 가담한 자가 한둘이 아니었더랍니다. 평소 언니 언니 하며 따르던 동무 기생도, 심부름을 하던 사내종도, 저마다 콩고물이라도 떨어지길 바라며 그 시커먼 모의에 슬그머니 발을 담그고 있었지요. 온 기방이 통째로 월향 하나를 잡아먹으려 이빨을 갈고 있었던 겁니다.
'세상에… 이 집에 내 편이라고는 단 하나도 없었구나. 그동안 내가 웃음을 나누고 정을 주던 이들이, 실은 죄다 나를 뜯어먹을 궁리만 하고 있었어.'
그날 밤, 월향은 방에 홀로 앉아 밤새도록 몸을 부들부들 떨었더랍니다. 이제는 그 누구도 믿을 수가 없었지요. 어미도, 자매도, 손님도, 하다못해 어린 몸종까지도, 온 세상이 죄다 자기를 노리는 이리 떼처럼만 여겨졌더랍니다. 사방에서 몰려드는 그 시커먼 속소리가 이제는 밤낮을 가리지 않고 머릿속을 웅웅 울려 대니, 월향은 그예 실성할 지경에 이르렀지요.
정신이 아뜩해지며, 벽에 걸린 제 그림자마저 자기를 비웃는 듯하고, 창밖의 나뭇가지 그림자마저 자기를 붙잡으러 오는 손길처럼만 보였더랍니다. 곱던 여인이 산발한 머리로 헛것을 보며 중얼거리니, 그 몰골이 실로 처참하였지요.
'그만… 제발 그만! 이러다 내가 정말 미쳐 죽고 말겠구나!'
월향은 두 손으로 머리를 쥐어뜯으며 방바닥을 데굴데굴 굴렀더랍니다. 눈에 뵈는 게 없어, 맨발로 마당으로 뛰쳐나가 그 옛날 도깨비를 만났던 우물가로 달려갔지요. 시퍼런 달빛이 그날처럼 우물 위에 차갑게 내려앉아 있었더랍니다.
"도깨비야! 이 무서운 귀걸이를 도로 가져가거라! 나는 이제 아무것도 듣기 싫다! 제발 이 소리를 멈추어 다오!"
월향이 목이 터져라 울부짖었으나, 우물가에는 그저 스산한 밤바람만 휘돌 뿐, 도깨비는 끝내 나타나지 않았더랍니다. 월향은 그제야 도깨비가 남긴 그 말을 뼈저리게 떠올렸지요. 이 귀걸이는 오직 스스로 부수어 버릴 때에야 그 소리가 그친다던, 바로 그 말을 말입니다.
바로 그때였습니다. 지쳐 쓰러진 월향의 곁으로, 인기척 하나가 조심조심 다가왔더랍니다. 다름 아닌 목수 인수였지요. 밤늦도록 마무리 일을 하다 월향의 울부짖음을 듣고 달려온 거였더랍니다.
"아씨, 대체 무슨 일이십니까. 이 밤중에 맨발로…. 어디 편찮으신 겝니까?"
인수가 제 겉옷을 벗어 월향의 어깨에 살며시 덮어 주었지요. 그 순간에도 인수의 속에서는, 그 한결같이 맑은 소리가 흘러나왔더랍니다.
'아이고, 이 여린 손 좀 봐. 얼음장처럼 차구나. 무슨 큰 근심이 있어 저리 우실꼬. 부디 마음 편히 가지셨으면.'
월향은 그 맑은 소리를 듣는 순간, 왈칵 눈물이 쏟아졌더랍니다. 그리고 문득, 오래도록 잊고 있던 한 가지를 깨달았지요.
'그래… 내가 저 사람의 속을 들여다볼 수 있어서 저 마음을 안 것이 아니로구나. 저 사람은 굳이 속을 열어 보이지 않아도, 그 눈빛과 손길만으로 이미 진심이 다 전해지지 않느냐.'
생각해 보면 그러했더랍니다. 남의 속을 훤히 알기 전, 월향은 도리어 마음이 편안했지요. 웃으면 웃는 대로 믿고, 정을 주면 주는 대로 받으며, 때로 속기도 하고 배신도 당했지만, 그래도 사람과 사람 사이에 오가는 따뜻한 정이란 게 있었더랍니다. 모른다는 것, 그것은 어리석음이 아니라 실은 하늘이 사람에게 내려 준 크나큰 자비였던 겁니다.
곰곰 헤아려 보면, 사람의 마음이란 게 어디 늘 시커멓기만 하겠습니까. 시샘을 내다가도 이내 뉘우치고, 욕심을 부리다가도 문득 부끄러워하고, 미워하다가도 어느새 가여워하는 것이 사람 마음이지요. 헌데 그 오락가락하는 속마음 가운데 가장 시커먼 한순간만 콕 집어 듣게 되니, 월향의 눈에는 온 세상이 죄다 악귀처럼만 보였던 겁니다. 사람을 통째로 보지 못하고, 그 그림자만 들여다본 셈이었지요.
'모르고 살던 그 시절이… 실은 얼마나 평온했던가. 사람의 속을 다 안다는 것은 복이 아니라, 사람을 사람으로 볼 수 없게 만드는 무서운 저주였구나.'
월향은 젖은 눈으로 자기 귓불의 그 푸른 옥 귀걸이를 매만졌더랍니다. 이것만 부수면, 이 지긋지긋한 소리가 다 그친다지 않던가. 다시 아무것도 모르는, 그 평온한 사람으로 돌아갈 수 있다지 않던가.
물론 두려움이 없지는 않았더랍니다. 이것을 부수고 나면, 앞으로는 누가 자기를 속이려 드는지, 누가 흉계를 꾸미는지 미리 알 도리가 없을 테니까요. 허나 월향은 이제 알았더랍니다. 그런 것을 다 알고 사느니, 차라리 조금 속더라도 사람을 사람으로 여기며 사는 편이 백번 낫다는 것을요. 인수 같은 맑은 사람 하나만 곁에 있어도, 이 험한 세상 능히 견디며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을 말입니다.
월향의 두 눈에, 오래도록 잃었던 또렷한 빛이 비로소 되돌아오기 시작했더랍니다.
※ 6: 마음으로 보다
이튿날 새벽, 첫닭이 채 울기도 전이었더랍니다. 월향은 자리에서 조용히 일어나 세수를 하고, 오래 묵혀 두었던 고운 한복을 정갈하게 차려입었지요. 그러고는 뒷마당 우물가로 나가, 마당 한켠에 놓인 인수의 연장 가운데 단단한 정 하나를 집어 들었더랍니다.
월향은 떨리는 손으로 귓불의 옥 귀걸이를 만지작거렸지요. 한 짝을 겨우 빼어 우물가 널찍한 댓돌 위에 올려놓으니, 그동안 귓불에 딱 붙어 꿈쩍도 않던 것이, 스스로 부수려 하자 신기하게도 스르르 떨어져 나왔더랍니다.
'이것만 깨뜨리면… 나는 다시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이 되겠지. 사람의 시커먼 속도, 그 무서운 소리도 다 사라지겠지. 허나 그와 함께, 그 누구의 진심도 이제 귀로는 들을 수 없게 되겠구나.'
월향은 잠시 눈을 감았더랍니다. 인수의 그 맑은 속소리를 다시는 들을 수 없다는 것이 조금 아쉬웠지요. 허나 이내 고개를 가로저었더랍니다.
'아니다. 진심이란 본디 귀로 훔쳐 듣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보고 마음으로 믿는 것이 아니더냐. 저 사람의 진심은, 굳이 속을 열어 보지 않아도 내 이미 다 알고 있지 않느냐.'
월향은 두 눈을 번쩍 뜨고, 정을 높이 치켜들었더랍니다. 그리고 온 힘을 다해 그 푸른 옥 귀걸이를 내리쳤지요.
쨍그랑!
맑은 소리와 함께 옥 귀걸이가 산산조각으로 부서졌더랍니다. 그 순간, 거짓말처럼 세상이 고요해졌지요. 사방에서 웅웅거리며 몰려들던 그 시커먼 속소리가, 씻은 듯이 뚝 그친 겁니다. 남은 것은 오직 이른 새벽의 새소리와, 우물물이 찰랑이는 맑은 소리와, 제 심장이 콩닥이는 소리뿐이었더랍니다.
부서진 옥 조각들은 새벽빛을 받아 잠시 반짝이는가 싶더니, 이내 스르르 물처럼 녹아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더랍니다. 마치 처음부터 그런 물건은 이 세상에 없었다는 듯이 말이지요. 저 멀리 어디선가, 걸걸한 웃음소리가 바람결에 실려 오는 듯도 하였지만, 월향은 미처 그것을 알아채지 못했더랍니다.
월향은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아, 두 손에 얼굴을 묻고 소리 내어 엉엉 울었더랍니다. 서러워서가 아니라, 너무도 오랜만에 되찾은 그 고요함이 사무치게 반가워서 말이지요. 세상이 이토록 조용했던가, 사람의 얼굴을 이토록 마음 편히 마주할 수 있었던가, 하고요. 그 오랜 지옥에서 마침내 풀려난 것만 같아, 온몸에서 힘이 쭉 빠지면서도 마음만은 깃털처럼 가벼웠더랍니다.
그때 마침, 아침 일을 하러 온 인수가 우물가에 주저앉아 우는 월향을 발견했더랍니다.
"아씨! 또 무슨 일이십니까. 어디 편찮으신 게 아니고요?"
깜짝 놀라 달려오는 인수를 보며, 월향은 이제 더는 그 속소리를 들을 수 없었지요. 인수가 속으로 무슨 생각을 하는지, 정말로 자기를 걱정하는 것인지 아닌지, 이제는 알 길이 없었더랍니다. 허나 이상하게도, 조금도 불안하지 않았지요. 저 걱정스러운 눈빛, 달려오는 저 다급한 발걸음, 벗어 주던 저 겉옷의 온기. 그것이면 충분했더랍니다.
"인수 아저씨." 월향이 눈물을 닦으며 처음으로 그를 이름으로 불렀지요. "나는 이제 아무것도 들을 수가 없어요. 헌데 참 이상도 하지요.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데, 도리어 마음이 이리 편안하니 말입니다."
인수는 영문을 몰라 그저 어리둥절할 뿐이었지만, 월향의 얼굴에 오랜만에 환한 화색이 도는 것을 보고는 저도 모르게 마주 빙그레 웃었더랍니다. 그 웃음이 어찌나 맑고 따뜻하던지, 월향은 굳이 속을 들여다보지 않고도 그 마음을 훤히 알 것만 같았지요.
그날로 월향은 큰 결심을 했더랍니다. 그동안 남의 속을 훔쳐 들어 부정하게 긁어모은 재물은, 굶주린 이웃과 병든 노인들에게 아낌없이 나누어 주었지요. 곳간의 비단이며 패물함의 금붙이를 죄다 풀어, 헐벗은 아이에게는 옷을 지어 입히고, 끼니를 거른 노인에게는 따뜻한 죽을 쑤어 돌렸더랍니다. 남의 것을 뜯어 모은 재물이니, 남을 위해 다 돌려주는 것이 마땅하다 여긴 겁니다. 그러고 나니 마음이 그렇게 홀가분할 수가 없었지요.
이어 월향은 그 시커먼 흉계를 꾸미던 행수 어미와 별감의 죄상을 관가에 낱낱이 고하였더랍니다. 사또가 그 일을 엄히 다스리니, 두 사람은 마땅한 벌을 받고 곤장을 맞은 뒤 멀리 쫓겨나고 말았지요. 그동안 월향을 뜯어먹으려 이빨을 갈던 무리도 죄다 뿔뿔이 흩어졌더랍니다. 그리하여 월향은 기적에서 스스로 이름을 빼어, 그 무겁던 기생의 삶을 훌훌 벗어던졌지요.
세월이 흘러, 월향은 인수와 부부의 연을 맺었더랍니다. 두 사람은 마을 어귀에 작은 초가 한 채를 얻어, 인수는 나무를 다듬어 세간을 짜고 월향은 길쌈을 하고 나물을 무치며 소박하게 살았지요. 인수의 속을 더는 들을 수 없었지만, 월향은 하루하루 그의 무뚝뚝한 손길과 다정한 눈빛 속에서 그 변함없는 진심을 마음으로 읽으며 살았더랍니다. 새벽이면 아내가 깰까 봐 살금살금 군불을 지피는 인수의 뒷모습에서, 월향은 백 마디 속삭임보다 더 깊은 정을 느꼈지요. 이따금 티격태격 다투는 날도 있었지만, 그마저도 정겹기 그지없었더랍니다.
훗날 월향은 이웃들에게 이런 말을 자주 하였다 합니다.
"사람의 진심이란, 귀로 엿듣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보는 것이랍니다. 아무리 속을 훤히 들여다본들, 마음이 병들면 그 무엇도 곱게 보이지 않는 법이지요. 도리어 조금 모르고 사는 것이, 조금 더 믿고 사는 것이, 그것이 바로 사람 사는 참된 복이 아니겠습니까."
그 말을 전해 들은 마을 사람들은 하나같이 고개를 끄덕이며, 저마다 제 곁의 사람을 다시금 따뜻한 눈으로 바라보았더랍니다. 그리고 그날 밤, 남촌의 그 오래된 우물가에서는, 걸걸한 도깨비의 흐뭇한 너털웃음소리가 달빛을 타고 은은히 울려 퍼졌다고, 그리 전해 내려온답니다.
유튜브 엔딩멘트 (275자)
오늘 이야기, 어떻게 들으셨는지요. 남의 속을 다 아는 것이 큰 복인 줄로만 알았던 월향은, 결국 조금 모르고 믿으며 사는 것이야말로 참된 평온임을 깨달았지요. 사람의 진심이란 귀로 엿듣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보고 마음으로 믿는 것이랍니다. 여러분 곁에도 겉은 무뚝뚝해도 속 깊은 인수 같은 이가 있지 않으신가요. 오늘 하루, 그 고마운 분께 따뜻한 말 한마디 건네 보시면 어떨까요. 이야기가 마음에 드셨다면 좋아요와 구독으로 응원해 주세요. 다음에도 더 정겨운 옛이야기로 찾아뵙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