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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잣돈 없는 선비의 한숨이 도깨비를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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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킹멘트 (200자 이상)
십 년을 글만 읽은 선비가 드디어 과거 시험에 응시할 기회를 얻었습니다. 그런데 한양까지 갈 노잣돈이 한 푼도 없었지요. 아내가 마지막 은비녀를 내밀어도 모자란 판에, 선비는 밤마다 서까래만 보며 한숨을 쉬었습니다. 그 한숨 소리가 얼마나 깊고 절절했던지, 도깨비 귀에까지 닿았다 합니다. 어느 날 밤, 빈 방에 불쑥 나타난 도깨비가 기막힌 방법으로 노잣돈을 마련해 주는데. 과연 어떤 방법이었을까요?
※ 1: 아내 매화와의 안타까운 대화
충청도 깊은 산골에, 학준이라는 선비가 살았습니다. 나이 서른여섯. 열다섯에 처음 붓을 잡은 뒤로 이십 년이 넘게 오직 글공부만 한 사내였지요. 머리는 좋았습니다. 한 번 읽은 글은 잊지 않았고, 시를 쓰면 훈장님도 감탄했으며, 경서를 논하면 동네 어른들도 고개를 끄덕였지요.
그런데 이 선비에게는 치명적인 문제가 하나 있었습니다. 가난이었지요.
아버지는 학준이 스물 때 돌아가셨고, 어머니마저 삼 년 전에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남은 것이라고는 기울어진 초가집 한 채와, 책 몇 권과, 아내 매화뿐이었지요. 논밭은 빚으로 다 넘어갔고, 밥상에 반찬이 오르는 날보다 맹물에 죽을 쑤는 날이 더 많았습니다.
매화는 삼베를 짜서 팔고, 남의 집 빨래를 해 주고, 나물을 캐어 겨우겨우 입에 풀칠을 했지요. 학준은 그런 아내가 미안하여 농사라도 짓겠다고 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랬더니 매화가 눈을 부릅뜨며 말했지요.
"당신은 글 읽는 사람이에요. 호미 잡을 손으로 붓을 잡아야지. 내가 이 고생을 하는 게, 당신 밭갈라고 하는 게 아니에요. 당신이 과거에 붙어서, 당당하게 벼슬길에 오르는 걸 보려고 하는 거란 말이에요."
매화의 눈에서 눈물이 주르르 흘렀지만, 목소리만은 단단했습니다. 학준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지요. 아내 앞에서 고개를 들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가을날이었습니다. 마을 이장이 학준의 집을 찾아왔지요.
"학준이, 좋은 소식이여. 이번 봄에 과거가 열린다고 방이 붙었어."
학준의 눈이 번쩍 뜨였습니다.
"과거가 열린다고요?"
"그래. 나라에서 인재를 뽑는다고 특별 과거를 연다더구먼. 이번에는 지방 선비들도 많이 뽑는다 하니, 자네 같은 사람이 딱이지."
학준의 가슴이 두근거렸습니다. 이십 년을 준비한 과거 시험. 드디어 기회가 온 것입니다. 그러나 그 두근거림은 오래가지 못했지요. 한 가지 문제가 가슴을 짓눌렀거든요.
'한양까지 갈 노잣돈이 없다.'
충청도 산골에서 한양까지는 걸어서 닷새 길이었습니다. 노잣돈이란 여행 경비, 즉 길 위에서 밥 먹고 잠자는 데 드는 돈을 말하지요. 닷새 동안의 숙박비, 식비, 그리고 한양에 도착해서 시험 칠 때까지의 체류비. 최소한 은자 서너 냥은 있어야 했습니다.
학준은 집 안을 둘러보았습니다. 은자 서너 냥은커녕, 엽전 한 닢도 없었지요. 쌀독은 바닥이 보였고, 장독에는 묵은 된장만 겨우 남아 있었습니다.
"이장 어른, 감사합니다. 생각해 보겠습니다."
이장이 돌아간 뒤, 학준은 방에 들어가 드러누웠습니다. 천장을 올려다보았지요. 그을린 서까래가 보였습니다. 매캐한 냄새가 코끝을 찔렀지만, 그보다 더 쓰라린 것은 가슴 속의 답답함이었습니다.
'이십 년을 공부했다. 이십 년을. 이제야 기회가 왔는데, 돈이 없어 가지 못한다. 이것이 팔자란 것인가.'
한숨이 나왔습니다. 가슴 깊은 곳에서부터 올라오는, 길고 깊은 한숨이었지요.
하아아.
그 한숨이 어찌나 깊었던지, 방 안의 촛불이 흔들렸습니다. 매화가 밖에서 빨래를 걷다가 멈출 만큼, 그 한숨 소리는 집 밖까지 흘러나왔지요.
매화가 방문을 열고 들어왔습니다. 남편이 천장만 바라보고 있는 모습을 보고, 옆에 나란히 앉았지요.
"여보, 과거 이야기 들었어요?"
"들었소."
"가야지요."
학준이 고개를 돌려 아내를 보았습니다. 매화의 눈은 빨래를 하느라 불어 있었고, 손은 물에 불어 터져 있었지요. 그런 아내가 가야 한다고 말하고 있었습니다.
"어떻게 가오. 노잣돈이 한 푼도 없는데."
매화가 잠시 머뭇거리더니, 머리에서 무언가를 빼 들었습니다. 은비녀였지요. 시집올 때 어머니가 준, 매화에게 남은 유일한 패물이었습니다.
"이걸 팔면 엽전 몇 닢은 될 거예요."
"안 되오. 그건 장모님이 주신 거 아니오. 그것까지 팔 수는 없소."
"은비녀가 뭐가 중요해요. 당신이 과거에 붙으면 금비녀도 사줄 수 있잖아요."
"그래도 안 되오. 은비녀를 판다 해도 엽전 몇 닢이지, 은자 서너 냥에는 턱없이 모자라오."
매화의 손이 무릎 위에서 떨렸습니다. 학준은 그 손을 잡아 주지도 못하고, 다시 천장을 올려다보았지요. 서까래가 눈앞에서 흐릿해졌습니다. 눈에 물기가 찼거든요.
그날 밤, 학준은 잠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매화가 곁에서 곤히 잠든 뒤에도, 학준은 서까래만 바라보며 한숨을 쉬었지요.
하아아.
한숨이 한 번 나올 때마다 가슴이 쥐어짜였습니다. 이십 년의 세월이, 못다 이룬 꿈이, 아내에 대한 미안함이, 전부 한숨 속에 녹아 있었지요.
하아아아.
그 한숨이 방을 채우고, 문틈으로 새어 나가고, 마당을 넘어, 울타리를 지나, 뒷산 자락까지 흘러갔습니다. 가을밤 바람에 실려, 어둠 속으로 흩어져 갔지요.
그런데 그 한숨 소리를, 듣고 있는 녀석이 있었습니다. 뒷산 바위 틈에 웅크리고 앉아, 귀를 쫑긋 세우고 있는 녀석이. 파란 불꽃이 이마 위에서 일렁이고, 방망이를 무릎에 올려놓은 채, 고개를 갸웃하고 있는 녀석이 말이지요.
※ 2: 도깨비는 한숨 소리가 하도 구슬퍼 잠을 못 잤다며 투덜거린다
학준의 한숨은 사흘 밤을 이어졌습니다. 첫째 밤에는 낮은 한숨이었고, 둘째 밤에는 좀 더 깊은 한숨이었으며, 셋째 밤에 이르러서는 뼈가 으스러지는 듯한 한숨이 되었지요.
셋째 밤이었습니다. 학준은 여느 때처럼 서까래를 올려다보며 한숨을 쉬고 있었지요. 매화는 부엌에서 내일 죽에 쓸 좁쌀을 고르고 있었습니다. 방 안에는 학준 혼자뿐이었지요.
하아아아아.
이날의 한숨은 유난히 길었습니다. 끝이 없는 것 같았지요. 숨을 들이쉰 것보다 내뱉는 것이 세 배는 긴, 그런 한숨이었습니다. 학준이 눈을 감고 한숨을 내쉬는데, 문득 방 안의 공기가 달라졌습니다.
서늘했습니다. 가을밤 찬기와는 다른, 묘한 서늘함이었지요. 그리고 냄새가 났습니다. 흙냄새도 아니고, 풀냄새도 아니고, 젖은 돌과 오래된 나무가 섞인 듯한 낯선 냄새였습니다.
학준이 눈을 떴습니다. 그리고 소스라치게 놀랐지요.
방 한가운데, 웬 놈이 떡 하니 앉아 있었거든요.
키가 사람보다 반쯤 컸습니다. 몸집은 장정 둘을 합친 것 같았고, 얼굴은 울퉁불퉁한 바위 같았지요. 이마에는 파란 불꽃이 도깨비불처럼 흔들리고 있었고, 손에는 쇠로 만든 방망이 하나가 들려 있었습니다. 그리고 가장 기이한 것은, 이 놈이 상당히 짜증난 표정을 짓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학준이 비명을 지르려 했습니다. 그런데 입이 열리지 않았지요. 너무 놀라면 사람이 소리를 못 지르는 법이거든요. 눈만 휘둥그레진 채 벌벌 떨고 있는 학준에게, 그 놈이 먼저 입을 열었습니다.
"야, 너 좀 그만 쉬어라. 한숨을."
학준이 벌린 입을 다물지 못한 채 떨었습니다.
"뭐, 뭐, 뭐요?"
"한숨 말이야, 한숨! 사흘 밤을 하아아 하아아 하고 있으니, 내가 잠을 못 잔단 말이야!"
그 놈이 방바닥을 탁 쳤습니다. 방이 울렸지요. 학준은 이불을 끌어당겨 턱까지 올렸습니다.
"당, 당신은 대체 누구시오?"
"누구긴 누구야. 도깨비지."
"도, 도깨비?"
"왜, 도깨비 처음 봐? 뒷산에 산 지가 삼백 년인데, 이 마을에서 나 모르는 놈이 있어?"
학준은 눈을 깜빡거렸습니다. 도깨비. 어릴 때 할머니에게 들었던 그 도깨비. 진짜로 있었단 말입니까. 학준은 이불 속에서 몸을 잔뜩 움츠린 채,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습니다.
"도, 도깨비가 왜 제 방에 있는 것이오?"
"왜 있냐고? 네 한숨 소리 때문에 왔지! 내가 뒷산 바위 밑에서 자는데, 사흘째 밤마다 네 한숨 소리가 들려와. 처음에는 참았어. 둘째 날도 참았고. 근데 오늘은 못 참겠어. 네 한숨이 어찌나 길고 깊은지, 바위가 울려!"
도깨비가 코를 킁킁거리며 말했습니다.
"대체 무슨 사연이길래 이렇게 한숨을 쉬는 거야? 사람이 이렇게 한숨을 쉬면 복이 달아난다고, 내가 삼백 년 살면서 하나 배운 게 그거야."
학준은 처음의 공포가 조금씩 가라앉았습니다. 이 도깨비, 무서운 줄 알았는데 말투가 영 투박하기만 하지 사납지는 않았거든요. 오히려 성가셔서 짜증이 난 이웃 같았지요.
학준이 조심스럽게 이불을 내리며 말했습니다.
"도깨비님, 사정이 있습니다."
"사정? 무슨 사정?"
"과거 시험을 보러 한양에 가야 하는데, 노잣돈이 한 푼도 없습니다."
도깨비가 눈을 깜빡였습니다.
"과거? 그 뭐냐, 글 쓰는 시험?"
"그렇습니다. 이십 년을 공부했는데, 돈이 없어 시험을 보러 가지 못합니다."
"이십 년? 이십 년을 공부했는데 돈이 없다고?"
"네."
도깨비가 한참 학준을 바라보더니, 배를 잡고 웃기 시작했습니다. 방이 쩌렁쩌렁 울릴 만큼 큰 웃음이었지요.
"하하하하! 이십 년을 공부한 놈이 엽전 한 닢이 없다니, 그 공부가 대체 뭔 소용이야?"
학준의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습니다. 도깨비한테까지 비웃음을 당하다니. 하지만 사실이니 할 말이 없었지요.
"그래서 매일 밤 서까래 보면서 한숨만 쉬는 거야?"
"그렇습니다."
"서까래가 돈을 내려 주디?"
"내려 줄 리가 있겠습니까."
도깨비가 웃음을 그치고, 방망이를 턱 아래에 괴며 학준을 뚫어지게 바라보았습니다. 파란 도깨비불이 일렁이며 학준의 얼굴을 비추었지요.
"야, 선비."
"예."
"네 한숨 소리가 하도 구슬프길래, 내가 삼백 년 만에 처음으로 잠을 설쳤다. 그게 좀 열받긴 하는데."
도깨비가 코를 벅벅 긁으며 말을 이었습니다.
"한번 도와줄까?"
"네?"
"노잣돈. 내가 마련해 줄까 하고."
학준의 눈이 커졌습니다. 도깨비가 노잣돈을 마련해 준다고?
"정, 정녕이오?"
도깨비가 씨익 웃었습니다. 그 웃음이 좀 수상쩍었지만, 벼랑 끝에 선 사람에게 수상한 것을 따질 여유는 없었지요.
"대신 조건이 있어."
학준의 등에 찬물이 끼얹어지는 기분이었습니다. 역시 공짜는 없는 법입니다.
"조건이라 하시면?"
도깨비가 방망이를 번쩍 들어 올렸습니다. 그 방망이가 천장의 서까래에 닿을 듯 말 듯한 높이에서 멈추었지요.
"그건 내일 알려줄게. 오늘은 일단 자. 그리고 제발 한숨 좀 그만 쉬어. 나도 좀 자게."
도깨비가 말을 마치자, 파란 불꽃이 퍽 하고 꺼졌습니다. 도깨비의 모습이 연기처럼 사라졌지요. 학준은 빈 방에 멍하니 앉아 있었습니다.
'방금 것이 꿈이었나? 생시였나?'
학준이 방바닥을 만져 보았습니다. 도깨비가 앉았던 자리가 아직 따뜻했지요. 아니, 따뜻한 정도가 아니라 뜨거웠습니다. 꿈이 아니었습니다.
매화가 부엌에서 나오며 물었습니다.
"여보, 방에서 무슨 소리 났어요? 누구랑 이야기한 거예요?"
학준은 차마 도깨비를 만났다고 말할 수가 없었지요.
"아, 아니오. 혼잣말이었소. 어서 자오."
그날 밤, 학준은 오랜만에 한숨을 쉬지 않았습니다. 한숨 대신 가슴이 두근거렸거든요. 두려움 반, 기대 반으로.
※ 3: 조건은 단 하나, 과거에 붙으면 도깨비와 씨름 한 판을 해야 한다는 것
다음 날 밤이었습니다. 학준은 매화가 잠든 것을 확인하고, 방에 홀로 앉아 기다렸지요. 도깨비가 올까, 안 올까. 어젯밤 일이 정말 꿈이 아니었다면, 오늘 다시 나타나겠지요.
자시 초경이 지나자, 어김없이 방 안의 공기가 달라졌습니다. 서늘하고, 묘한 냄새가 피어오르더니, 퍽 하는 소리와 함께 도깨비가 나타났습니다. 어젯밤과 같은 모습이었지요. 이마의 파란 불꽃, 손에 든 방망이, 그리고 짜증 섞인 얼굴.
"오, 오늘은 한숨을 안 쉬었네. 다행이야. 덕분에 낮잠이라도 잤다."
"도깨비님, 오셨습니까."
"왔지. 약속했잖아. 조건을 알려 준다고."
학준이 자세를 고쳐 앉았습니다. 도깨비가 코앞에 떡 하니 앉으니, 어젯밤보다는 덜 무섭지만 여전히 긴장이 되었지요.
"먼저 물어볼 게 있어."
"무엇이든 말씀하십시오."
"너, 글공부만 이십 년 했다며?"
"그렇습니다."
"다른 건 할 줄 아는 거 없어?"
학준이 잠시 생각했습니다. 글 외에 할 줄 아는 것이라. 농사도 제대로 못 짓고, 장사는 해 본 적도 없고, 무예는 칼날 보면 기절할 판이니.
"없습니다."
"진짜 없어? 아무것도?"
"글을 읽고, 글을 쓰고, 글을 외우는 것밖에 모릅니다."
도깨비가 허 하고 탄식했습니다.
"참, 쓸모없는 놈이구나."
학준의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지만, 반박할 수가 없었지요.
"하지만 말이야."
도깨비가 방망이로 방바닥을 톡톡 두드리며 말했습니다.
"글을 쓸 줄 안다는 건, 남의 마음을 움직일 줄 안다는 뜻이야. 내가 삼백 년을 살면서 본 건데, 사람이란 좋은 글 앞에서 지갑을 여는 요상한 습성이 있거든."
"그것이 무슨 뜻이오?"
도깨비가 씨익 웃더니, 품에서 무언가를 꺼냈습니다. 엿이었지요. 검은 빛깔의, 기름기가 자르르 흐르는, 크기가 팔뚝만 한 엿. 어디서 났는지 모를 엿 한 덩어리를 방바닥에 툭 놓았습니다.
"이게 뭡니까?"
"엿이지, 뭐긴."
"그건 알겠는데, 왜 엿을 꺼내시는 겁니까?"
도깨비가 양 무릎을 탁 치며 말했습니다.
"엿장사를 하는 거야!"
"네?"
"너는 글을 잘 쓴다고 했지? 그러면 내가 엿을 만들어 줄 테니, 네가 글을 써서 팔아라. 장에 가서 팔면 되잖아. 사흘이면 노잣돈 정도는 모을 수 있어."
학준은 어안이 벙벙했습니다. 선비가 엿장사라니. 이건 체면이고 뭐고 다 내려놓으라는 소리가 아닙니까.
"도깨비님, 저는 선비입니다. 선비가 장터에서 엿을 판다는 것은."
"뭐가 어때서? 돈이 없으면 벌어야지. 체면이 밥 먹여 줘? 서까래 보면서 한숨이나 쉬는 게 더 나아?"
학준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습니다. 도깨비의 말이 뼈를 때렸거든요. 서까래 보면서 한숨이나 쉬는 게 나은가, 체면을 내려놓고 노잣돈을 마련하는 게 나은가.
'이십 년 공부가 엿장수로 귀결될 줄이야.'
하지만 학준은 이를 악물었습니다. 과거 시험이 코앞이었으니까요.
"좋습니다. 하겠습니다."
"오, 뜻밖에 빠르네. 선비가 이렇게 결단이 빠른 건 처음 보는데."
"다만, 어떻게 하면 되는 겁니까? 저는 장사라는 걸 해 본 적이 없습니다."
도깨비가 방망이를 바닥에 탁 세우며 목소리를 낮추었습니다.
"내가 다 알려 줄 테니까 걱정 마. 일단 들어 봐."
도깨비의 계획은 이러했습니다. 도깨비가 밤마다 엿을 만들어 놓으면, 학준이 낮에 장터에 나가 그것을 파는 것이지요. 다만 그냥 팔면 재미가 없으니, 학준이 엿 하나하나에 글귀를 붙여서 파는 겁니다. 좋은 글귀가 적힌 엿을 사면 복이 온다고 소문을 내는 것이지요.
"엿에 글귀를 붙인다고요?"
"그래. 네가 잘하는 게 글이잖아. 엿 하나에 복을 부르는 글귀를 하나씩 써 붙이는 거야. 사람들이 엿을 사는 게 아니라, 글귀를 사는 거지. 엿은 덤이고."
학준은 무릎을 탁 쳤습니다.
"그것이라면 할 수 있습니다. 덕담이나 좋은 문구를 쓰는 것은 제가 가장 잘하는 일이니까요."
"좋아. 그러면 내가 오늘 밤부터 엿을 만들어 놓을 테니, 내일 아침에 외양간 뒤를 봐. 거기 놓아 두겠어."
학준이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그러다 문득 생각났지요.
"아까 조건이 있다고 하셨는데, 그게 뭡니까?"
도깨비가 눈을 번쩍 빛냈습니다.
"아, 맞다. 조건."
도깨비가 방망이를 한 바퀴 돌리며 말했습니다.
"네가 과거에 붙으면, 나한테 와서 씨름 한 판을 해야 해."
"씨름이요?"
"그래, 씨름. 도깨비한테 씨름 한 판. 이기든 지든 상관없어. 한 판만 하면 돼."
학준은 고개를 갸웃했습니다. 씨름 한 판이 조건이라니. 목숨을 내놓으라는 것도 아니고, 보물을 가져오라는 것도 아니고, 고작 씨름이라니.
"그, 그것이 조건의 전부입니까?"
"전부야. 왜, 불만이야?"
"아닙니다. 아닙니다. 그 정도야 당연히."
"좋아. 약속이다."
도깨비가 방망이로 방바닥을 쿵 찍었습니다. 그 순간 바닥에 동그란 문양이 새겨졌다가 사라졌지요. 도깨비식 계약서라고나 할까요.
"그러면 나는 엿 만들러 간다. 너는 글귀나 생각해 놓고."
파란 불꽃이 퍽 하고 꺼지며 도깨비가 사라졌습니다. 학준은 멍하니 앉아 있다가, 빙그레 웃었지요.
'세상에, 도깨비한테 엿장사를 배우게 될 줄이야.'
학준은 벼루에 먹을 갈고, 붓을 잡았습니다. 그리고 엿에 붙일 글귀를 짓기 시작했지요. 이십 년 동안 갈고닦은 글솜씨가 드디어 쓸모를 찾은 것이었습니다. 다만, 그 쓸모가 엿장사일 줄은 꿈에도 몰랐을 뿐이지요.
※ 4: 도깨비가 손님을 끌어모으는 기상천외한 방법이 펼쳐진다
다음 날 아침, 학준은 눈을 뜨자마자 외양간 뒤로 달려갔습니다. 도깨비가 엿을 놓아 두겠다고 한 곳이지요. 과연 그곳에 넓적한 나뭇잎을 깔고, 그 위에 엿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습니다.
학준은 눈을 의심했습니다. 엿이 보통 엿이 아니었거든요. 빛깔이 맑은 호박색이었고, 크기가 일정하게 잘려 있었으며, 표면에 윤기가 자르르 흘렀습니다. 한쪽 끝을 살짝 깨어 맛을 보니, 혀 위에서 녹는 단맛이 이 세상 것 같지 않았지요.
'이것이 도깨비가 만든 엿이란 말인가. 맛이 이 정도면 안 팔리는 게 더 이상하겠는걸.'
학준은 밤새 준비해 둔 글귀 종이를 꺼냈습니다. 작은 한지 조각에 붓글씨로 하나하나 정성 들여 쓴 것이지요. 무병장수, 가내태평, 소원성취, 만사형통. 덕담과 좋은 문구를 써서, 엿 하나하나에 실로 묶어 매달았습니다.
매화가 마당에서 학준을 보고 고개를 갸웃했습니다.
"여보, 그게 뭐예요? 엿이에요?"
"아, 이것은. 장에 나가 좀 팔아 보려고."
"엿을요? 어디서 났어요?"
학준이 잠시 말을 더듬었습니다. 도깨비가 만들어 줬다고 할 수는 없었지요.
"이, 이웃집 김 생원네에서 좀 얻어 왔소. 대신 팔아 주기로 한 거요."
매화가 의심스러운 눈으로 남편을 바라보았지만, 더 캐묻지는 않았습니다. 남편이 무엇이든 하겠다고 나서는 게 기특하기도 했거든요.
"선비가 엿장사를 한다니 좀 그렇지만, 노잣돈을 마련해야 하니 어쩌겠어요. 힘내요, 여보."
학준은 엿 보따리를 지고 장터로 향했습니다. 오일장이 서는 읍내까지는 한 시진 거리였지요. 장터에 도착하니 벌써 사람들이 북적거리고 있었습니다. 떡장수, 포목상, 쌀가게, 약방, 대장간. 온갖 장사꾼들이 자리를 잡고 목청을 높이고 있었지요.
학준은 장터 한구석에 자리를 폈습니다. 보따리를 풀어 엿을 늘어놓았지요. 그리고 옆에 붓과 먹과 벼루를 함께 펼쳤습니다.
"엿 사시오! 글귀 달린 엿 사시오!"
학준이 목청을 높였지만, 사람들은 거들떠보지도 않았습니다. 장터에서 엿장수야 흔하디흔한데, 선비 복색에 엿을 파는 놈은 처음이니 오히려 이상하게 본 것이지요.
한 시진이 지나도 손님이 없었습니다. 두 시진이 지나도 없었지요. 학준은 점점 목소리가 작아졌습니다.
'역시 안 되는 건가. 선비가 엿장사를 하다니, 사람들이 미친 놈으로 볼 만도 하지.'
해가 머리 위로 올라가고, 학준의 이마에 땀이 송글송글 맺혔습니다. 엿은 한 개도 팔리지 않았지요. 포기할까 하는 마음이 슬금슬금 올라올 때였습니다.
어디선가 바람이 불었습니다. 가을바람치고는 좀 이상한 바람이었지요. 따뜻하면서도 서늘하고, 묘하게 코를 간질이는 바람이었습니다. 그 바람이 학준의 엿 위를 스치자, 엿에서 향기가 피어올랐습니다.
보통 향기가 아니었습니다. 달콤한 꿀 냄새가 장터 전체를 뒤덮었지요. 바로 옆에서 장사하던 떡장수가 코를 킁킁거렸습니다.
"어? 이게 무슨 냄새야? 어디서 이렇게 좋은 냄새가 나지?"
포목상 아주머니도 고개를 돌렸습니다.
"세상에, 이 달콤한 냄새 좀 봐. 꿀인가? 엿인가?"
사람들의 발길이 하나둘 학준 쪽으로 향하기 시작했습니다. 도깨비가 뒤에서 바람을 일으킨 것인지, 아니면 엿 자체에 무슨 마법이 깃든 것인지, 향기가 장터 전체를 사로잡은 것이지요.
한 아주머니가 다가왔습니다.
"이거 엿이에요? 냄새가 끝내주는구먼. 하나 얼마예요?"
"한 개에 엽전 세 닢입니다."
"세 닢? 좀 비싸네. 저기 엿장수는 두 닢인데."
학준이 엿을 하나 집어 들었습니다. 엿에 매달린 글귀 종이를 보여 주며 말했지요.
"이 엿에는 복을 부르는 글귀가 달려 있습니다. 엿을 드시면서 이 글귀를 읽으면 복이 온다 하여, 글귀가 덤으로 붙는 것이지요."
아주머니가 글귀를 읽었습니다. 가내태평이라고 적혀 있었지요.
"어머, 글씨 참 예쁘네. 가내태평이라. 집안이 평안하라는 뜻이지?"
"그렇습니다. 이 글귀를 부엌 벽에 붙여 놓으시면, 일 년 내내 집안에 탈이 없을 것이옵니다."
학준이 선비답게 격식을 갖춰 말하니, 아주머니의 얼굴에 감탄이 피어올랐습니다.
"선비님이 직접 쓴 글씨에요? 아이고, 그러면 더 영험하겠네. 하나 주세요!"
"감사합니다!"
첫 손님이었습니다. 엽전 세 닢이 학준의 손에 쥐어졌지요. 학준은 그 차가운 쇳조각이 이 세상에서 가장 따뜻하게 느껴졌습니다.
첫 손님 뒤로, 사람들이 줄을 서기 시작했습니다. 향기에 끌려 온 사람들이 글귀를 보고는 너도나도 사겠다고 했지요.
"나는 소원성취 글귀로 주세요!"
"나는 무병장수! 우리 어머니 드리게!"
"아이고, 만사형통 있어요? 우리 남편한테 딱이야!"
학준은 눈코 뜰 새 없이 엿을 팔았습니다. 준비한 엿이 모자랄 지경이었지요. 학준이 주문에 맞춰 즉석에서 글귀를 써 주니, 사람들은 더 열광했습니다. 선비가 직접 써 주는 글귀라니, 이것이야말로 진짜 복이 아니겠느냐고 수군거렸지요.
해가 서쪽으로 기울 때쯤, 엿이 전부 팔렸습니다. 학준은 전대를 열어 엽전을 세어 보았지요. 가슴이 두근거렸습니다.
'하루 만에 이만큼이라니. 이 속도면 사흘이면 노잣돈이 모이겠구나.'
학준은 빈 보따리를 지고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매화가 눈을 동그랗게 떴지요.
"여보, 다 팔은 거예요?"
"다 팔았소."
학준이 전대를 풀어 엽전을 쏟아 놓으니, 매화가 손으로 입을 막았습니다.
"세상에, 이게 다 엿 판 돈이에요?"
"그렇소. 내일도, 모레도 나갈 거요."
매화의 눈에 눈물이 글썽거렸습니다. 그러나 이번에는 슬픈 눈물이 아니라, 기쁜 눈물이었지요.
그날 밤, 학준이 방에 홀로 앉아 있으니, 도깨비가 나타났습니다.
"어때, 잘 팔렸지?"
"덕분에 한 개도 남기지 않고 다 팔았습니다, 도깨비님."
"내가 바람 좀 불어 줬거든. 향기가 퍼지게. 하하."
도깨비가 코를 킁킁거리며 자랑스러워했지요.
"내일도 엿 만들어 놓을 테니까, 외양간 뒤 확인해."
"감사합니다, 도깨비님."
도깨비가 사라지기 전에, 학준을 돌아보며 한마디를 덧붙였습니다.
"야, 선비. 오늘 밤은 한숨 안 나오지?"
학준이 빙그레 웃었습니다.
"네, 오늘은 한숨 대신 웃음이 나옵니다."
"그래, 그게 낫지. 한숨은 복을 쫓고, 웃음은 복을 부르는 법이야."
파란 불꽃이 꺼지며, 도깨비가 사라졌습니다. 학준은 그 빈자리를 바라보며 나직이 중얼거렸지요.
'도깨비님, 고맙습니다. 정녕 고맙습니다.'
※ 5: 사흘 만에 한양 갈 노잣돈이 넉넉히 모이지만 예상치 못한 사건이 터진다
둘째 날, 학준은 아침 일찍 외양간 뒤를 확인했습니다. 어제보다 엿이 두 배나 놓여 있었지요. 빛깔도 더 곱고, 모양도 더 가지런했습니다. 도깨비가 밤새 공을 들인 것이 틀림없었습니다.
학준도 밤새 글귀를 준비했지요. 어젯밤에는 덕담뿐 아니라, 시 한 구절씩을 적은 글귀도 만들었습니다. 봄바람에 꽃이 피듯 그대의 앞길에 복이 피어나리, 같은 글귀를 적으니, 엿 한 개가 그냥 과자가 아니라 선물이 되는 것이었지요.
장터에 도착하니, 어제 엿을 사 간 아주머니 하나가 벌써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선비님, 왔어요? 어제 사 간 엿을 시어머니한테 드렸더니, 글귀를 보시고 얼마나 좋아하셨는지 몰라요. 오늘은 다섯 개 주세요. 이웃집 아주머니들한테도 나눠 줄 거예요."
학준의 얼굴에 웃음이 번졌습니다. 그 아주머니 뒤로 사람들이 하나둘 모여들었지요. 어제 소문이 마을을 타고 퍼진 것이었습니다.
"글귀 달린 엿이 있다며?"
"선비가 직접 글씨를 써 준대."
"엿도 맛있고, 글귀도 예쁘다더라."
학준은 어제보다 자신감이 붙어 있었습니다. 목소리도 커졌지요.
"엿 사시오! 복을 부르는 글귀 엿 사시오! 선비가 직접 쓴 글귀가 달린 엿이오!"
사람들이 몰려들었습니다. 어제와 달랐던 것은, 오늘은 사람들이 글귀를 직접 주문하기 시작했다는 것이지요.
"선비님, 우리 아들이 이번에 무과 시험을 보거든요. 합격 기원하는 글귀 좀 써 주세요."
학준이 즉석에서 붓을 들었습니다. 먹을 갈고, 한지 조각 위에 단정한 글씨로 적었지요. 용문에 오르는 잉어처럼 그대의 꿈이 높이 오르기를.
아주머니가 글귀를 읽고 눈시울을 붉혔습니다.
"아이고, 선비님. 글씨도 예쁘고, 뜻도 예쁘고. 이거 우리 아들한테 보여 줘야겠어요."
옆에 있던 할아버지 한 분이 다가왔습니다.
"나도 하나 써 줘. 우리 할멈이 요새 몸이 안 좋거든. 빨리 낫게 해 달라는 글귀 좀."
학준이 다시 붓을 들었습니다. 봄이 오면 꽃이 피듯, 그대의 몸에도 따뜻한 봄이 오기를.
할아버지가 글귀를 받아 들고 한참을 들여다보더니, 고개를 푹 숙였습니다.
"고맙네, 선비. 글이 이렇게 따뜻할 수도 있구먼."
학준의 가슴이 뭉클했습니다. 이십 년간 글을 읽고 쓰면서, 이렇게 누군가의 마음을 직접 어루만져 본 적은 처음이었거든요. 책 속의 글은 죽은 글이지만, 사람에게 건네는 글은 살아 있는 글이었습니다.
그날도 엿은 전부 팔렸습니다. 아니, 엿이 모자라서 글귀만 써 달라는 사람까지 있었지요. 학준은 글귀만 따로 엽전 한 닢에 써 주었습니다. 덕담 장사라고 해야 할까요. 엿장수가 어느새 글귀장수가 되어 있었습니다.
셋째 날이 되자, 장터에서 학준의 이름이 자자해졌습니다. 이웃 마을에서까지 소문을 듣고 찾아오는 사람들이 있었지요.
"복 글귀 엿이 어디 있소?"
"글 잘 쓰는 선비가 엿을 판다며?"
장터 한구석에 불과했던 학준의 자리가 어느새 장터의 명물이 되어 있었습니다. 떡장수 아주머니가 옆에서 혀를 내둘렀지요.
"아이고, 선비님 때문에 우리 떡이 안 팔려. 사람들이 전부 엿으로 가잖아."
"죄송합니다, 아주머니."
"죄송은. 나도 글귀 하나 써 줘요. 장사 잘 되게."
학준이 웃으며 글귀를 써 주었습니다. 장사만복래. 장사하면 만 가지 복이 온다. 아주머니가 그 글귀를 떡 좌판 위에 붙여 놓으니, 신기하게도 그날 떡도 잘 팔렸다 합니다.
셋째 날 저녁, 학준은 집에 돌아와 엽전을 모두 쏟아 놓고 세었습니다. 사흘 동안 번 돈을 합치니, 은자 다섯 냥이 넘었지요. 한양까지 갈 노잣돈은 넉넉했고, 한양에서 체류할 비용까지 남았습니다.
"됐다. 됐어!"
학준이 주먹을 불끈 쥐었습니다. 매화가 옆에서 손뼉을 쳤지요.
"여보, 대단해요! 사흘 만에 이렇게 모으다니!"
"나 혼자 힘이 아니오."
"네? 누가 도와줬어요?"
학준이 입을 다물었습니다. 도깨비 이야기는 아직 할 수 없었거든요.
그런데 바로 그때였습니다. 대문 밖에서 쿵쿵거리는 발소리가 들렸지요. 그리고 거친 목소리가 울려 퍼졌습니다.
"야, 이 집이 엿장수 선비 집이지?"
학준과 매화가 동시에 대문 쪽을 돌아보았습니다. 대문이 벌컥 열리더니, 덩치 큰 사내 셋이 들어왔지요. 얼굴이 험악했고, 눈빛이 사나웠습니다. 마을의 건달 삼 형제, 곰배, 쇠돌, 막쇠였습니다.
"요새 장터에서 엿장사로 재미 좀 봤다며? 우리한테도 좀 나눠야지, 응?"
학준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습니다. 건달들이 돈을 뜯으러 온 것이었지요.
"내놔. 번 돈 절반. 안 내놓으면, 내일부터 장터에서 장사 못 하게 해 줄 테니까."
곰배가 학준의 멱살을 잡았습니다. 매화가 비명을 질렀지요.
"이 사람들아, 남의 집에 와서 이게 무슨 짓이에요!"
"시끄러! 계집은 빠져!"
쇠돌이 매화를 밀쳤습니다. 매화가 마당에 나뒹굴었지요. 학준이 이를 악물었지만, 문약한 선비의 몸으로 장정 셋을 상대할 수는 없었습니다.
바로 그때였습니다.
마당 한쪽에서 바람이 일었습니다. 서늘하면서도 묘한 바람이었지요. 나뭇잎이 소용돌이치며 올라가더니, 어둠 속에서 낮고 굵은 목소리가 들렸습니다.
"야, 거기 셋."
건달 삼 형제가 동시에 고개를 돌렸습니다. 어둠 속에서 파란 불빛이 번쩍 하더니, 도깨비의 형체가 어렴풋이 드러났지요. 완전히 모습을 보인 것은 아니었습니다. 파란 불꽃만 일렁이고, 거대한 그림자만 담장 위에 드리워졌지요. 그것만으로도 충분했습니다.
"도, 도깨비다!"
곰배가 학준의 멱살을 놓고 뒤로 물러섰습니다. 쇠돌과 막쇠는 이미 덜덜 떨고 있었지요.
"그 선비 건드리면, 니들 삼 대가 재수 없을 줄 알아."
도깨비의 목소리가 마당을 울렸습니다. 건달 셋은 비명을 지르며 대문 밖으로 내빼었지요. 엎어지고, 자빠지고, 서로 밟으며 도망치는 꼴이 우습기 그지없었습니다.
도깨비의 파란 불꽃이 사라졌습니다. 마당에 정적이 내렸지요. 학준이 매화를 일으켜 세우며 안도의 숨을 내쉬었습니다.
"괜찮소, 매화야?"
"괜찮아요. 근데 여보, 지금 그게 뭐였어요? 도깨비라고 했어요?"
학준은 잠시 망설이다가, 결심했습니다. 이제는 아내에게 말해야 할 때였지요.
"매화야, 사실 내가 말 못 한 게 있소."
그 밤, 학준은 매화에게 도깨비 이야기를 전부 들려주었습니다. 한숨 소리에 찾아온 도깨비, 엿장사 제안, 그리고 과거에 붙으면 씨름 한 판을 하겠다는 약속까지. 매화는 처음에는 놀라고, 다음에는 웃고, 마지막에는 울었지요.
"세상에, 도깨비가 우리를 도와주고 있었다니."
"나도 아직 믿기지 않소. 하지만 사실이오."
매화가 남편의 손을 꼭 잡았습니다.
"여보, 꼭 과거에 붙어요. 도깨비님의 은혜에 보답하려면, 그래야지요."
"그러리다. 반드시."
※ 6: 도깨비가 몰래 뒤따르며 길 위의 위험을 막아 준다
노잣돈이 마련되자, 학준은 곧바로 한양으로 출발했습니다. 이른 새벽, 매화가 보따리를 싸 주었지요. 보따리 안에는 주먹밥과 된장, 그리고 갈아입을 옷 한 벌이 들어 있었습니다. 그리고 보따리 한쪽 구석에, 매화가 몰래 넣어 둔 것이 하나 있었습니다. 엿 한 개와 글귀 종이였지요.
글귀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습니다. 당신의 꿈이 이루어지기를 아내 매화가 빕니다. 매화의 글씨는 삐뚤빼뚤했지만, 그 마음만은 세상 어떤 명필보다 바르고 곧았습니다.
학준은 집을 나서며 뒤를 돌아보았습니다. 매화가 대문 앞에 서서 손을 흔들고 있었지요. 눈물을 참는 얼굴이 새벽 어스름에 희미하게 보였습니다.
"다녀오겠소."
"꼭 붙어서 돌아와요."
학준은 고개를 꼿꼿이 세우고 걸었습니다. 충청도 산골에서 한양까지, 닷새 길이 시작된 것이지요.
첫째 날은 무사했습니다. 고갯길을 넘고, 들판을 가로지르고, 개울을 건넜지요. 다리가 아프고 허리가 결렸지만, 가슴속에 불씨가 타고 있으니 힘이 났습니다.
둘째 날, 큰 고개를 넘는데 갑자기 비가 쏟아졌습니다. 가을비치고는 매서운 비였지요. 학준은 나무 아래에서 비를 피하며 몸을 웅크렸습니다. 옷이 젖고, 보따리가 젖고, 이가 딱딱 부딪쳤지요.
'이대로 가다가 감기라도 걸리면 큰일이다. 과거 시험 전에 몸이 상하면 모든 게 헛수고가 되는데.'
그때, 이상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학준이 웅크리고 있는 나무 위로 비가 떨어지지 않기 시작한 것이지요. 분명 주변에는 빗줄기가 쏟아지는데, 학준이 앉은 나무 아래만 빗방울이 피해 가는 것이었습니다. 마치 보이지 않는 우산이 있는 것처럼.
학준이 고개를 들어 나무 위를 올려다보았습니다. 나뭇가지 사이에서 파란 불빛이 어렴풋이 보였지요. 금방 사라졌지만, 학준은 알아보았습니다.
'도깨비님이 따라오고 계신 건가.'
학준의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습니다. 모습은 보이지 않지만, 뒤에서 지켜보고 있다는 것을 느꼈거든요.
셋째 날, 산길을 걷는데 앞에서 인기척이 났습니다. 나무 뒤에서 험상궂은 사내 둘이 튀어나왔지요. 산적이었습니다. 길목을 지키고 있다가 행인을 털어먹는 노상강도였지요.
"거기 서라! 가진 거 다 내놔!"
학준의 다리가 후들거렸습니다. 노잣돈이 든 전대를 움켜잡았지요. 이 돈을 빼앗기면 한양에 갈 수 없습니다. 과거 시험도 물거품이 되는 것이지요.
"내, 내놓을 것이 없소이다. 나는 가난한 선비요."
"거짓말 마! 전대가 불룩한 게 안 보여?"
산적 하나가 칼을 빼어 들었습니다. 학준이 눈을 질끈 감은 그 순간, 숲 속에서 괴성이 울렸습니다.
"꺄아아아아!"
사람 소리가 아니었습니다. 짐승 소리도 아니었지요. 이 세상의 어떤 생물도 내지 못할, 기이하고 섬뜩한 소리였습니다. 산적 둘이 화들짝 놀라 주변을 둘러보았지요.
나무들이 흔들리기 시작했습니다. 바람도 없는데 나뭇가지가 미친 듯이 흔들렸지요. 그리고 나무 사이사이에서 파란 불꽃이 하나, 둘, 셋, 넷. 수십 개의 도깨비불이 동시에 피어올랐습니다.
산적들의 얼굴이 백짓장이 되었습니다.
"도, 도깨비다! 도깨비불이야!"
"튀어! 빨리 튀어!"
산적 둘은 칼도 내팽개치고 산속으로 내빼었습니다. 도깨비불이 그 뒤를 쫓아갔지요. 멀어지는 비명 소리가 산을 울렸습니다.
학준은 주저앉아 가슴을 쓸어내렸습니다. 심장이 터질 듯 뛰고 있었지요.
"도깨비님, 감사합니다."
숲 속 어딘가에서 킁킁 하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코를 골며 웃는 소리 같기도 하고, 코를 푸는 소리 같기도 했지요. 모습은 보이지 않았지만, 학준은 도깨비가 거기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넷째 날과 닷새째 날은 별일 없이 지나갔습니다. 길이 험할 때면 어디선가 바람이 불어 돌을 치워 주고, 날이 추워지면 묘하게 따뜻한 기운이 감돌았지요. 학준은 그때마다 나직이 감사 인사를 올렸습니다.
닷새째 되는 날 오후, 드디어 한양 성문이 보였습니다. 숭례문의 거대한 문루가 저 멀리 솟아 있었지요. 학준은 걸음을 멈추고 그 모습을 올려다보았습니다. 가슴이 벅차올랐지요.
'한양이다. 드디어 한양에 왔다. 이십 년을 꿈꿨던 곳이다.'
학준의 눈에 눈물이 핑 돌았습니다. 서까래만 보며 한숨 쉬던 그 밤이 까마득하게 느껴졌지요. 도깨비가 없었다면, 이 성문 앞에 설 수 없었을 것입니다.
학준은 숭례문을 지나 한양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과거 시험은 이틀 뒤. 준비할 시간은 충분했지요. 학준은 값싼 주막에 방을 잡고, 이틀 동안 오직 공부에만 매달렸습니다.
그리고 시험 전날 밤, 학준은 매화가 보따리에 넣어 준 엿을 꺼내 먹었습니다. 달콤한 맛이 혀 위에서 녹았지요. 글귀를 다시 읽었습니다.
당신의 꿈이 이루어지기를 아내 매화가 빕니다.
학준은 그 글귀를 가슴에 품고 눈을 감았습니다. 내일이면, 이십 년의 결실을 맺을 시간이 옵니다.
※ 7: 시험 문제가 공교롭게도 도깨비와의 경험에서 답을 얻을 수 있는 주제이다
과거 시험 당일이 밝았습니다. 한양의 하늘은 맑고 높았지요. 학준은 새벽같이 일어나 세수를 하고, 도포를 반듯하게 여미고, 유건을 바로 썼습니다. 거울 같은 물동이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보았지요.
'이십 년이다. 이십 년을 이 하루를 위해 살았다. 오늘, 후회 없이 하자.'
시험장인 성균관 앞에는 이미 수백 명의 선비들이 모여 있었습니다. 전국 팔도에서 올라온 인재들이었지요. 한결같이 눈빛이 날카롭고, 자신감이 넘쳐 보였습니다. 학준은 그 틈에서 한없이 작아지는 기분이었지요.
'이 많은 사람들 중에 내가 붙을 수 있을까. 다들 나보다 젊고, 나보다 좋은 스승 밑에서 공부한 사람들일 텐데.'
불안이 가슴을 조였습니다. 그때, 품속에서 무언가가 만져졌지요. 매화가 써 준 글귀 종이였습니다. 당신의 꿈이 이루어지기를. 학준은 그 종이를 꼭 쥐었습니다. 손끝에 아내의 마음이 전해지는 것 같았지요.
시험장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자리를 배정받고, 벼루와 먹과 붓을 펼쳤지요. 시험관이 앞에 섰습니다.
"금일 과거 시제를 내리겠다."
시험장이 숨을 죽였습니다. 수백 명의 선비가 일제히 귀를 세웠지요. 시험관이 시제를 읽었습니다.
"시제는 이것이니라. '비록 미천한 것이라도 쓰임이 없는 것은 없다.' 이 뜻을 풀어, 나라를 다스리는 도리와 연결하여 논하라."
시험장에 술렁임이 일었습니다. 쉬운 듯하면서도 깊은 주제였거든요. 미천한 것에도 쓰임이 있다. 이것을 국정과 연결하라니.
학준은 붓을 들었다가, 잠시 멈추었습니다. 머릿속에서 무언가가 스쳐 갔거든요.
미천한 것이라도 쓰임이 없는 것은 없다.
'엿이다.'
학준의 눈이 번쩍 뜨였습니다. 엿. 세상에서 가장 하찮다고 여겨지는 것 중 하나인 엿. 그 엿에 글귀를 달았더니,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는 선물이 되었지요. 장터의 아주머니는 엿에 달린 글귀로 시어머니의 마음을 얻었고, 할아버지는 엿에 달린 글귀로 아내에게 위로를 전했습니다.
그리고 도깨비. 세상 사람들이 무섭다, 장난꾸러기다, 쓸데없는 존재라고 여기는 도깨비가, 한 선비의 인생을 바꾸어 놓았지요.
'그래, 이것이다. 미천한 엿에도 쓰임이 있고, 괴이하다 여기는 도깨비에게도 쓰임이 있다. 하물며 사람이야. 나라를 다스리는 자가 백성 하나하나의 쓰임을 알아보지 못한다면, 그것은 임금의 허물이지 백성의 허물이 아니다.'
학준의 붓이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한 글자, 한 글자, 또박또박. 이십 년의 공부가, 사흘간의 엿장사가, 닷새간의 한양 여정이, 전부 붓끝으로 흘러들었지요.
학준은 엿장수 경험을 직접 쓰지는 않았습니다. 대신, 그 경험에서 깨달은 바를 학문의 언어로 풀어냈지요. 하찮아 보이는 것 속에 숨은 가치를 발견하는 눈, 그것이 바로 위정자의 덕목이라는 논지였습니다.
장터에서 만난 아주머니, 할아버지, 떡장수, 그 모든 사람들이 각자의 자리에서 각자의 쓸모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미천하다 여기는 엿 하나에도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힘이 있었지요. 나라를 다스리는 자가 이것을 깨닫는다면, 인재를 알아보는 눈이 열릴 것이고,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이 깊어질 것이라는 내용이었습니다.
학준의 붓은 멈추지 않았습니다. 물 흐르듯, 바람 불듯, 글이 쏟아져 나왔지요. 이십 년의 공부와, 삶의 경험이 만나 빚어진 글이었습니다. 책에서만 배운 것이 아니라, 장터에서 배우고, 길 위에서 배우고, 도깨비에게서까지 배운 것이 글 속에 녹아 있었지요.
붓을 놓았을 때, 학준의 손이 떨렸습니다. 다 쓴 것이지요. 학준은 자신이 쓴 글을 처음부터 끝까지 읽어 보았습니다.
'잘 썼다. 이십 년 중에 가장 잘 쓴 글이다.'
그것은 자만이 아니라, 확신이었습니다. 이 글에는 학문만이 아니라, 삶이 들어 있었으니까요.
시험지를 제출하고 시험장을 나서는데, 다리가 풀려 주저앉을 뻔했습니다. 긴장이 한꺼번에 풀린 것이지요. 학준은 성균관 담장에 기대어 하늘을 올려다보았습니다. 파란 가을 하늘이 끝없이 높았지요.
'이제 됐다. 할 수 있는 건 다 했다. 결과는 하늘에 맡기자.'
바람이 불었습니다. 따뜻하면서도 서늘한, 익숙한 바람이었지요. 학준은 빙그레 웃었습니다.
"도깨비님, 여기까지 와 계신 거죠?"
대답은 없었지만, 바람이 학준의 볼을 살짝 스쳤습니다. 마치 잘했다고 토닥이는 것처럼.
사흘 뒤, 방이 붙었습니다. 합격자 명단이 성균관 앞에 내걸렸지요. 학준은 떨리는 다리로 방 앞에 섰습니다. 눈이 명단을 훑었지요. 한 줄, 두 줄, 세 줄.
있었습니다. 학준의 이름이 있었지요. 그것도 장원은 아니었지만, 당당히 상위권에 들어 있었습니다.
학준은 그 자리에 주저앉았습니다. 눈물이 비 오듯 쏟아졌지요. 이십 년이었습니다. 이십 년의 한숨이, 이십 년의 눈물이, 이 한 장의 방에 담겨 있었습니다.
"붙었다. 붙었어."
학준의 울음 섞인 목소리가 성균관 앞마당에 퍼졌습니다. 옆에 있던 다른 급제자가 등을 토닥여 주었지요.
"축하하오, 형."
학준은 울면서 웃었습니다. 그 눈물이 볼을 타고 흘러, 매화가 써 준 글귀 종이 위에 떨어졌지요. 당신의 꿈이 이루어지기를. 이루어졌습니다, 매화야.
※ 8: 급제 소식을 들고 돌아온 학준 앞에 도깨비가 나타나 약속한 씨름을 청한다
급제 소식을 품에 안고, 학준은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열흘 만의 귀향이었지요. 마을 어귀에 들어서자, 저 멀리 초가지붕이 보였습니다. 굴뚝에서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지요. 매화가 밥을 짓고 있다는 뜻이었습니다.
학준이 대문을 열었습니다. 매화가 마당에서 빨래를 걷다가 돌아보았지요. 남편의 얼굴을 보는 순간, 매화는 모든 것을 알았습니다. 학준이 웃고 있었거든요. 이십 년 동안 본 적 없는, 활짝 핀 웃음이었습니다.
"여보, 설마."
"붙었소, 매화야."
매화의 손에서 빨래가 떨어졌습니다. 두 손으로 입을 막고, 눈물이 왈칵 쏟아졌지요.
"정말이에요? 정말 붙은 거예요?"
"정말이오. 당당히."
매화가 달려와 학준의 품에 안겼습니다. 학준이 아내를 꼭 안았지요. 두 사람은 마당 한가운데서 한참을 울었습니다. 기쁨의 눈물, 고생의 눈물, 감사의 눈물. 온갖 눈물이 뒤섞인 울음이었지요.
"고마워요, 여보. 이십 년을 포기하지 않아 줘서."
"내가 고맙지. 이십 년을 기다려 줘서. 삼베 짜고, 빨래하고, 나물 캐면서 이 못난 남편을 기다려 줘서."
해가 서산에 걸린 저녁이었습니다. 학준은 매화에게 저녁상을 받고, 따뜻한 밥을 먹었지요. 세상에서 제일 맛있는 밥이었습니다.
저녁을 먹고 나서, 학준은 마당에 나왔습니다. 해야 할 일이 남아 있었거든요. 도깨비와의 약속. 과거에 붙으면 씨름 한 판을 하겠다는 그 약속.
학준이 마당 한가운데 서서, 뒷산을 향해 소리쳤습니다.
"도깨비님! 약속을 지키러 왔습니다!"
잠시 고요했습니다. 바람이 멈추고, 벌레 소리마저 잦아들었지요. 그러다 뒷산 쪽에서 파란 불빛이 하나 피어올랐습니다. 불빛이 점점 커지더니, 울타리를 넘어 마당으로 들어왔지요.
도깨비가 나타났습니다. 이마의 파란 불꽃, 손에 든 방망이, 그리고 이번에는 짜증난 표정이 아니라, 씨익 웃는 얼굴이었습니다.
"왔구나, 선비."
"왔습니다, 도깨비님."
"붙었다며?"
"붙었습니다."
도깨비가 방망이를 마당 한쪽에 툭 내려놓으며 말했습니다.
"좋아. 그러면 약속대로 씨름 한 판 하자."
매화가 부엌에서 나오다가, 도깨비를 보고 기겁했지요. 학준이 손짓으로 괜찮다고 알려 주었습니다.
"도, 도깨비가 진짜 있긴 있었네."
매화가 눈을 동그랗게 뜬 채 마당 구석에 섰습니다.
도깨비와 학준이 마당 한가운데서 마주 섰지요. 도깨비는 장정 셋을 합친 덩치였고, 학준은 바람 불면 날아갈 것 같은 선비 체구였습니다. 누가 봐도 승부가 뻔했지요.
"준비됐어?"
"됐습니다."
둘이 맞잡았습니다. 도깨비의 손이 학준의 허리춤을 잡고, 학준의 손이 도깨비의 팔뚝을 잡았지요. 아니, 잡으려 했지만 팔뚝이 너무 굵어서 손이 반도 안 돌아갔습니다.
"자, 간다!"
도깨비가 학준을 번쩍 들어 올렸습니다. 학준의 발이 땅에서 떨어졌지요. 이대로 내던져지면 마당 끝까지 날아갈 판이었습니다.
그런데 도깨비가 학준을 들어 올린 채로, 살며시 내려놓았습니다. 아주 살살, 깃털 내리듯이. 그리고 제 발로 뒤로 물러서더니, 엉덩이를 탁 바닥에 찍으며 넘어졌지요.
쿵.
도깨비가 넘어졌습니다. 스스로 넘어진 것이지요. 학준은 어안이 벙벙한 채 서 있었습니다.
"도, 도깨비님?"
도깨비가 바닥에 드러누운 채, 하하하 웃었습니다.
"졌다, 졌어! 내가 졌다!"
"지다니요, 제가 아무것도 안 했는데."
"씨름이란 건 이기는 맛에 하는 거야. 네가 이겼으니 된 거지, 뭘."
학준은 도깨비를 바라보았습니다. 바닥에 드러누워 하하하 웃는 도깨비의 모습이, 세상에서 가장 인간다운 모습이었지요. 이 도깨비는 처음부터 씨름에서 이길 생각이 없었던 것입니다. 그저 학준에게 이기는 기쁨을 주고 싶었던 것이지요.
학준의 눈에서 눈물이 흘렀습니다.
"도깨비님, 왜 저를 도와주신 겁니까? 엿도 만들어 주시고, 한양까지 따라와 주시고, 산적도 쫓아 주시고. 저 같은 한심한 선비를 왜."
도깨비가 벌떡 일어나 앉으며 코를 킁킁거렸습니다.
"야, 선비. 내가 삼백 년을 살았는데, 네처럼 깊은 한숨을 쉬는 놈은 처음이었어."
"한숨이요?"
"그래. 네 한숨에는 남을 원망하는 소리가 없었어. 세상 탓도 없고, 하늘 탓도 없었지. 그냥, 자기가 못났다고, 아내한테 미안하다고, 그런 한숨이었어. 그게 참 구슬프더라고."
도깨비가 하늘을 올려다보며 말을 이었습니다.
"도깨비라는 놈이 원래 장난을 좋아하잖아. 근데 가끔은 착한 장난도 치고 싶거든. 네 한숨을 듣고 생각했어. 이놈한테 좋은 장난 한번 쳐 볼까 하고."
학준이 웃으면서 울었습니다.
"그 장난 덕분에 제 인생이 바뀌었습니다."
"인생이 바뀐 건 네 실력이야. 나는 그냥 엿 만들고 바람 불어 준 거뿐이지. 글을 쓴 건 너고, 공부한 건 너고, 시험 본 건 너야."
도깨비가 방망이를 집어 들며 일어섰습니다.
"자, 약속도 지켰으니 나는 간다. 다시는 한숨 쉬지 마. 한숨 쉬면 또 찾아와서 잠 못 잔다고 따질 거야."
"도깨비님, 정녕 가시는 겁니까?"
"삼백 년 된 도깨비가 할 일이 어디 이것뿐이겠어. 뒷산에 바위 밑에서 잘 자고 있을 테니, 가끔 막걸리 한 사발 갖다 놓아. 그게 고마우면 되는 거야."
도깨비가 돌아섰습니다. 파란 불꽃이 일렁이며 울타리를 향해 걸어갔지요. 그런데 마당을 나서기 직전, 도깨비가 멈추더니 뒤를 돌아보았습니다.
"야, 선비."
"예."
"네 아내, 참 좋은 사람이야. 그 여자가 쓴 글귀, 나도 봤거든. 삐뚤빼뚤한 글씨가 네가 쓴 명필보다 낫더라."
그 한마디를 남기고, 도깨비가 사라졌습니다. 파란 불꽃이 꺼지고, 마당에 어둠이 내렸지요.
학준은 한참을 그 자리에 서 있었습니다. 매화가 다가와 남편의 팔을 잡았지요.
"여보, 도깨비가 뭐래요?"
"당신 글씨가 명필보다 낫다고 하더이다."
매화가 볼을 붉히며 남편의 팔을 꼬집었습니다.
"에이, 거짓말. 내 글씨가 얼마나 삐뚤빼뚤한데."
"삐뚤빼뚤해도 마음이 바르면, 그게 명필이지."
두 사람은 마당에 나란히 앉아 하늘을 올려다보았습니다. 별이 가득한 가을밤 하늘이었지요. 그 별 사이로, 파란 불빛이 아주 잠깐, 반짝였다가 사라졌습니다.
그 뒤로 학준은 벼슬길에 올라 청렴한 관리가 되었습니다. 백성의 작은 목소리에도 귀를 기울이고, 미천한 것에서도 가치를 찾는 관리로 이름을 날렸지요. 사람들은 학준의 그 넉넉한 마음이 어디서 온 것인지 몰랐습니다만, 학준은 알고 있었지요. 엿장수 시절에 배운 것이라는 걸.
그리고 매달 보름날이면, 학준은 뒷산 바위 앞에 막걸리 한 사발을 갖다 놓았습니다. 다음 날 아침 가 보면 사발이 비어 있었지요. 그 옆에 엿 한 개가 놓여 있었고요.
도깨비의 장난은 때로 복이 됩니다. 특히, 간절한 마음을 가진 사람에게는요. 한숨이 깊을수록 도깨비의 귀에 잘 들린다지요. 하지만 그 한숨에 남을 원망하는 소리가 없어야 한답니다. 그래야 도깨비가 착한 장난을 칠 마음이 생기거든요.
혹시 오늘 밤, 한숨이 나오시거든 한번 쉬어 보십시오. 어디선가 파란 불빛이 반짝일지도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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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한숨 소리에 찾아온 도깨비와 가난한 선비의 이야기를 함께해 주셨습니다. 간절한 마음은 때로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도움을 불러오지요. 여러분의 오늘 하루도 수고 많으셨습니다. 편안한 밤 보내시고요. 구독과 좋아요, 알림 설정까지 눌러 주시면 더 재미있는 도깨비 이야기로 찾아뵙겠습니다. 천방지축 도깨비, 다음에 또 만나요.
썸네일 이미지 프롬프트 (영어, 16:9, 실사, no text)
A photorealistic 16:9 cinematic photograph set in a traditional Korean rural village at night during the Joseon Dynasty era. In the foreground, a poor but dignified Korean scholar in worn white hanbok sits on the wooden maru porch of a small thatched-roof cottage, looking up at the ceiling rafters with a deeply melancholic expression, a single oil lamp casting warm golden light on his face. In the background, just outside the cottage fence, a mischievous Korean dokkaebi goblin creature peeks around the corner with glowing blue fire flickering above its head, holding a traditional iron bangmangi club, with a playful grin on its rugged face. The night sky is filled with stars, and a faint blue ethereal mist surrounds the dokkaebi. The scene has a warm nostalgic tone contrasted with mysterious cool blue supernatural lighting. Traditional Korean countryside setting with persimmon trees and stone walls. Shot on Sony A7IV, 35mm lens, shallow depth of field, cinematic color grading, no tex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