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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부의 인생을 바꾼 도깨비 『동패낙송』
땀방울의 진짜 의미를 깨닫게 된 어느 게으름뱅이의 기상천외한 하룻밤
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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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킹멘트:
숨쉬는 것조차 귀찮아하던 조선 팔도 제일의 게으름뱅이 농부! 어느 날 깊은 산속에서 황금빛 방망이를 든 도깨비와 마주치게 되는데... 과연 도깨비가 건넨 달콤하고도 기묘한 제안은 그의 인생을 어떻게 바꿔놓았을까요? 땀 흘리기 싫어하던 사내의 기상천외하고 오싹한 인생 역전 스토리, 지금 바로 시작합니다!
※ 1: 무너져가는 초가집, 천하태평 게으름뱅이
만물이 겨울잠에서 깨어나 기지개를 켜는 화창한 봄날이었다. 멀리서 들려오는 종달새의 지저귐과 마을 사람들이 풍년을 기원하며 부르는 흥겨운 농요 소리가 온 동네에 활기를 불어넣고 있었다. 밭에서는 누렁소의 워낭 소리가 딸랑거리며 울렸고, 부지런한 농부들은 이마에 맺힌 구슬땀을 수건으로 훔쳐내며 언 땅을 일구느라 여념이 없었다. 온 세상이 생명력으로 꿈틀거리는 이 눈부신 계절에, 오직 한 곳만이 시간이 멈춘 듯 기이한 정적에 휩싸여 있었다. 마을 어귀에서 가장 후미진 곳에 자리 잡은, 금방이라도 폭삭 주저앉을 듯 위태로워 보이는 낡은 초가집 한 채였다.
지붕의 이엉은 언제 갈았는지 짐작조차 할 수 없을 만큼 시커멓게 썩어 문드러져 있었고, 마당은 사람 허리춤까지 자란 잡초들로 무성하여 원래 어떤 모습이었는지 흔적조차 찾기 어려웠다. 그 흉물스러운 초가집 툇마루에는 낡은 이불을 머리끝까지 뒤집어쓴 거대한 덩어리 하나가 널브러져 있었다. 그 덩어리의 정체는 바로 이 마을, 아니 조선 팔도를 통틀어 가장 게으르다고 소문난 사내, 칠성이었다. 해가 중천에 떠올라 창호지 문을 뚫고 들어올 기세로 내리쬐고 있었지만, 칠성은 미동조차 하지 않은 채 집 안이 떠나가라 코를 골고 있었다. 들숨에 방 안의 먼지가 소용돌이치고, 날숨에 문풍지가 바르르 떨릴 정도로 요란한 코골이였다.
그때, 부엌에서 거친 숨을 몰아쉬며 아내가 뛰쳐나왔다. 그녀의 얼굴은 시꺼먼 솥단지 그을음이 잔뜩 묻어 있었고, 낡아 빠진 치마폭은 여기저기 기운 자국으로 가득했다. 아내의 손에는 불씨를 쑤적거리던 시커먼 부지깽이가 꽉 쥐어져 있었다. 밭에 나가 일할 생각은커녕, 아침 해가 훌쩍 넘어가도록 시체처럼 누워만 있는 남편의 꼴을 보니 아내는 억장이 무너져 내리는 듯했다.
"아이고, 내 팔자야! 하늘도 무심하시지, 전생에 무슨 대역 죄를 지었기에 저런 인간 화상과 연을 맺어 이 지독한 고생을 한단 말인가! 남들은 이른 아침부터 들에 나가 씨앗을 뿌리고 밭을 가느라 허리가 휘어지는데, 저 인간은 어찌 된 게 밥 처먹고 똥 싸고 잠자는 것 말고는 할 줄 아는 게 없어! 당장 일어나지 못해요! 이 웬수야!"
아내는 분통이 터지는 듯 부지깽이로 마루판을 쾅쾅 내리치며 소리를 질렀다. 그 요란한 소리에 칠성은 이불 속에서 애벌레처럼 꿈틀거리더니, 이불 밖으로 삐죽이 얼굴만 내밀었다. 눈곱이 잔뜩 낀 흐리멍덩한 눈으로 하늘을 한번 힐끗 쳐다본 그는 귀찮다는 듯 인상을 잔뜩 찌푸렸다.
"으으음... 아, 거 참 사람 시끄러워 죽겠네. 해가 아직 저렇게 중천에 걸려있는데 뭣 하러 아침부터 유난을 떨고 난리요. 농사라는 게 다 때가 있는 법인데, 그렇게 아등바등 서두른다고 하늘에서 금송아지라도 떨어진답디까? 나는 하늘의 이치에 순응하며 기운을 보충하고 있는 중이니, 제발 그 입 좀 다물고 저리 가소. 조금만, 딱 반 시진만 더 자고 일어날 테니 사람 피곤하게 달달 볶지 마소."
'내 어쩌다 저런 구제 불능 게으름뱅이와 부부의 연을 맺었을꼬. 뒷마당 밭에는 잡초가 무성해서 호미가 들어갈 틈도 없고, 쌀독에는 쥐새끼도 굶어 죽을 만큼 쌀 한 톨 남아있지 않은데. 저리 천하태평이니 올해도 굶어 죽기는 딱 알맞겠구나. 내가 삯바느질로 겨우겨우 입에 풀칠을 하고는 있다만, 이대로 가다가는 겨울이 오기도 전에 온 식구가 길바닥에 나앉고 말 것이야.'
아내의 속 타는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칠성은 엉덩이를 벅벅 긁적이며 반대쪽으로 홱 돌아누워버렸다. 칠성의 게으름은 마을 사람들도 혀를 내두를 정도였다. 어찌나 게으른지 밥을 먹다가도 숟가락 드는 것이 귀찮아 입을 쩍 벌리고 아내가 밥을 입안에 떠 넣어주기를 기다리는가 하면, 여름에 비가 오면 비가 와서 땅이 질척거려 일하기 싫다고 드러누웠고, 가을에 날이 맑으면 볕이 너무 뜨거워 살갗이 탄다며 그늘을 찾아 도망 다녔다. 결국 인내심의 한계에 다다른 아내는 꽉 쥐고 있던 부지깽이를 번쩍 치켜들더니, 이불 위로 솟아오른 칠성의 넓적한 등짝을 인정사정없이 내리쳤다.
"아아악! 아야! 아, 왜 때려! 사람 잡네, 사람 잡아! 아파 죽겠네!"
"아프라고 때렸지 시원하라고 안마해 준 줄 아수? 당장 일어나서 지게 지고 뒷산에 올라가 땔감이라도 해오란 말이오! 당장 부뚜막에 불 땔 나무 쪼가리 하나 없어서 오늘 저녁엔 생쌀을 오독오독 씹어 먹게 생겼으니! 해 지기 전까지 산에 가서 나뭇짐을 가득 해오지 않으면 오늘 밥은 한 톨도 없을 줄 아시오! 국물도 없소이다!"
밥을 굶기겠다는, 칠성에게는 그 어떤 협박보다도 무시무시한 아내의 으름장에 그는 그제야 마지못해 몸을 굼틀거리며 일으켰다. 까치집을 지은 부스스한 머리를 긁적이며 툇마루 아래로 내려서는 그의 몸짓은 마치 천근만근 바위를 짊어진 듯 무거웠다. 마당 한구석에 거미줄이 쳐진 채 팽개쳐져 있던 낡은 지게를 질질 끌고 사립문을 나서는 칠성의 입은 댓 발이나 나와 있었다. 뒷산으로 향하는 오르막길에 접어들자, 그의 입에서는 쉴 새 없이 불평불만이 터져 나왔다.
'아이고, 이놈의 마누라 여편네. 남편 알기를 아주 자기 집 머슴이나 노비 부리듯 부려 먹으니 내가 이래서 제 명에 못 살지. 가만히 방구석에 누워있으면 숨도 크게 안 쉬어져서 배도 덜 고프고 쌀도 아끼는 것인데, 왜 자꾸 밖으로 기어 나가서 뼈 빠지게 움직이라고 난리람. 저 험한 산꼭대기까지 올라가면 또 얼마나 다리가 아프고 땀이 날꼬. 지게는 또 왜 이리 무거워. 에라 모르겠다, 대충 중턱쯤 올라가서 적당히 그늘지고 푹신한 나무 밑을 찾아 눈이나 좀 붙여야겠다. 해가 떨어질 때쯤 빈 지게로 슬금슬금 내려가면 마누라도 지쳐서 밥은 주겠지.'
터벅터벅 산길을 오르던 칠성은 이마에 송글송글 땀이 맺히자마자 걸음을 멈추었다. 산 중턱에 다다르기도 전, 잎이 무성하게 우거져 거대한 그늘을 만들고 있는 아름드리 참나무 한 그루가 그의 시야에 들어왔다. 그곳은 마치 그를 위해 하늘이 마련해둔 완벽한 침대 같았다. 칠성은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어깨에 짊어지고 있던 지게를 풀숲으로 아무렇게나 내팽개치고, 푹신한 낙엽이 깔린 참나무 그늘 밑에 벌러덩 대자로 드러누웠다. 시원한 산바람이 뺨을 스치고, 나뭇가지 사이로 들려오는 산새들의 지저귐이 부드러운 자장가처럼 귓가를 간지럽혔다. 칠성은 기분 좋은 미소를 지으며 금세 달콤하고 깊은 수마 속으로 빠져들었다.
※ 2: 야심한 밤, 산군 고개에서의 오싹한 만남
산속의 시간은 마을의 그것과는 다르게 흘렀다. 칠성이 평온한 표정으로 콧노래 섞인 코를 골며 깊은 잠에 빠져있는 동안, 하늘을 온통 금빛으로 물들이던 태양은 어느새 서쪽 산등성이 너머로 자취를 감추었다. 붉게 타오르던 노을마저 잿빛으로 사그라들자, 거대한 어둠의 장막이 산 전체를 무겁게 짓눌렀다. 빽빽한 나무들 사이로 스며들던 한 줌의 빛조차 사라진 숲은 순식간에 칠흑 같은 암흑으로 변해버렸다. 낮 동안 숲을 채우던 산새들의 명랑한 지저귐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대신 정체를 알 수 없는 밤짐승들의 스산한 울음소리와 부엉이의 낮고 기괴한 울림만이 빈 공간을 메우기 시작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계곡을 타고 올라온 서늘한 밤공기가 칠성의 얇은 저고리를 파고들었다. 온몸을 부르르 떨며 힘겹게 눈꺼풀을 들어 올린 칠성은 순간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앞을 가늠할 수 없을 만큼 짙은 어둠이 사방을 가로막고 있었기 때문이다.
"허억! 이, 이게 무슨 일이람! 눈이 멀었나? 아니, 해가... 해가 완전히 다 져버렸잖아!"
머리끝까지 쭈뼛 서는 공포에 칠성은 허둥지둥 몸을 일으켰다. 낮에 보았던 푸르고 아름답던 나무들은 이제 거대한 괴물의 팔처럼 기괴한 그림자를 드리우며 바람에 흔들릴 때마다 기분 나쁜 소리를 냈다. 빈 지게를 메고 내려가면 아내에게 불호령을 듣고 저녁밥도 얻어먹지 못할 것이 뻔했지만, 지금 당장 그런 것을 걱정할 처지가 아니었다. 호랑이나 표범 같은 산짐승이라도 튀어나올 것 같은 이 음산한 밤 산중에서 벗어나는 것이 급선무였다.
칠성은 풀숲에 처박혀 있던 지게를 허겁지겁 둘러메고 도망치듯 산길을 내달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방향 감각을 완전히 잃어버린 탓에 그의 발걸음은 마을로 향하는 길이 아닌, 산의 더 깊고 험한 골짜기를 향해 나아가고 있었다.
"아이고, 이를 어째! 이쪽이 아닌가? 왜 자꾸 가시덤불만 나오는 거야!"
어둠 속에서 발에 채는 돌부리에 걸려 사정없이 넘어지고, 얼굴과 팔뚝은 날카로운 나뭇가지에 베여 상처투성이가 되었다. 숨은 턱 끝까지 차오르고 심장은 터질 듯이 요동쳤지만, 공포에 질린 그는 걸음을 멈출 수가 없었다. 그렇게 짐승처럼 산속을 헤매기를 한참, 문득 저 멀리 시야 끝자락에 이상한 불빛이 일렁이는 것이 보였다.
'불빛? 사람이 살고 있는 민가인가? 아니, 이런 깊고 험한 산속에, 그것도 이 야심한 밤에 민가가 있을 리가 없는데. 혹시 밤을 지새우며 산짐승을 쫓는 사냥꾼들이 모닥불을 피워놓은 것일까? 옳다구나, 사냥꾼들이라면 길을 물어볼 수 있겠지!'
칠성은 두려움과 한 가닥 희망을 품고 조심스럽게 그 불빛을 향해 다가갔다. 하지만 가까워질수록 불빛의 색깔이 묘하게 기형적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것은 모닥불의 따뜻한 붉은빛이 아니라, 무덤가에서나 피어오를 법한 푸르스름하고 소름 끼치는 인광이었다. 게다가 불빛 근처에서는 비릿한 짐승의 피 냄새와 코를 찌르는 누룩 냄새가 진동하고 있었다.
커다란 바위 뒤에 몸을 숨긴 칠성은 조심스럽게 고개를 빼꼼히 내밀어 공터 쪽을 엿보았다. 그리고 다음 순간, 칠성은 너무 놀라 숨을 들이켜지도 못한 채 입을 떡 벌리고 얼어붙고 말았다.
푸른 불꽃이 허공을 둥둥 떠다니는 넓은 공터 한가운데, 사람의 형상을 하고 있으나 덩치가 황소만큼 거대하고 머리통에는 날카로운 뿔이 솟아오른 기괴한 존재들이 수십 명이나 빙 둘러앉아 있었다. 눈은 개구리처럼 툭 튀어나와 붉은 핏발이 서 있었고, 입은 귀 밑까지 찢어져 날카로운 송곳니가 번뜩였다. 그들은 짐승의 뼈째로 고기를 뜯어 먹으며 시퍼런 술을 들이켜고 왁자지껄 떠들고 있었다. 전설 속에서나 듣던, 밤의 지배자 도깨비들이었다.
"우하하하! 오늘 저잣거리 아래에 사는 인간 마을에 내려가서 욕심쟁이 김 부자네 곳간을 아주 싹싹 비워버렸더니 속이 다 시원하구나!"
"그러게 말이야! 그 영감이 어찌나 구두쇠인지 곳간에 금은보화가 썩어 넘치는데도 일하는 머슴들에게는 꽁보리밥 한 그릇 제대로 주지 않더라지. 우리가 그 재물들을 몰래 훔쳐내어 가난하고 병든 자들의 문 앞에 다 던져두고 왔으니, 내일 아침 마을 꼴이 아주 볼만할 게야! 낄낄낄!"
"맞아, 맞아! 저번에는 부모를 버리고 도망간 불효자 놈의 집 지붕을 몽땅 뜯어버렸지! 인간놈들은 어리석고 탐욕스럽기 짝이 없어서 우리가 가끔 이렇게 혼쭐을 내줘야 정신을 차린다니까!"
도깨비들은 자신들의 무용담을 자랑하며 사람 몸통만 한 커다란 가시방망이를 허공에 붕붕 휘둘러댔다. 방망이가 바람을 가를 때마다 소름 끼치는 파공음이 울려 퍼졌다. 바위 뒤에 숨어 그 광경을 지켜보던 칠성은 다리에 힘이 완전히 풀려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이빨이 딱딱 부딪히고 온몸이 사시나무 떨듯 떨렸다. 당장이라도 쥐도 새도 모르게 도망치고 싶었지만, 발이 땅에 붙어버린 듯 도무지 움직이지 않았다.
바로 그때였다. 뒤로 물러서려던 칠성의 뒤꿈치에 메말라 있던 굵은 나뭇가지 하나가 밟히고 말았다.
빠지직!
고요한 밤공기를 찢는 그 날카롭고 선명한 소리는 마치 천둥소리처럼 공터 전체에 울려 퍼졌다. 왁자지껄 떠들며 술을 퍼마시던 도깨비들의 웃음소리가 일순간 뚝 끊겼다. 공터에는 숨 막히는, 쥐죽은 듯한 적막만이 흘렀다.
"누구냐! 어떤 겁 없는 놈이 감히 우리들의 신성한 연회를 엿보고 있는 것이냐!"
가장 덩치가 크고 얼굴이 숯검정처럼 붉은 우두머리 도깨비가 무시무시한 안광을 번뜩이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가 칠성이 숨어있는 바위 쪽으로 쿵, 쿵 무거운 발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땅바닥이 지진이 난 듯 울렸다. 칠성은 이제 죽었구나 싶어 두 눈을 질끈 감고 땅바닥에 납작 엎드려 바들바들 떨기 시작했다.
※ 3: 도깨비의 기묘한 내기와 은화 주머니
땅바닥에 바짝 엎드린 칠성의 등 위로 거대하고 짙은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짐승의 노린재와 짙은 흙냄새가 확 끼쳐오는가 싶더니, 우두머리 도깨비의 거친 숨결이 칠성의 정수리를 쓸어내렸다. 도깨비는 마치 땅에 떨어진 작은 벌레를 줍듯, 억센 두 손가락으로 칠성의 뒷덜미를 움켜쥐고 단숨에 허공으로 훌쩍 들어 올렸다.
"아이고! 사, 사람 살려! 도깨비님, 살려주십시오! 제발 목숨만은 살려주십시오!"
허공에 대롱대롱 매달린 채 버둥거리는 칠성의 입에서 비명 섞인 애원이 터져 나왔다. 도깨비의 툭 불거진 붉은 눈동자가 칠성의 얼굴을 이리저리 뜯어보았다. 마치 그의 영혼 밑바닥까지 꿰뚫어 보려는 듯한 섬뜩한 시선이었다. 우두머리 도깨비는 코를 킁킁거리며 칠성의 몸에서 나는 냄새를 맡더니 이내 기분 나쁜 조소를 흘렸다.
"호오, 이것 보게나. 깊은 산중에서 길을 잃고 헤매는 가련한 사냥꾼인가 했더니, 네놈의 몸에서는 땀 냄새는커녕 방구석에서 뒹군 먼지 냄새와 쉰내만 진동을 하는구나. 가만 보자... 이 비루한 몰골 하며 흐리멍덩한 눈동자... 네놈, 저 아랫마을에서 제일가는 밥벌레요 게으름뱅이인 칠성이 아니더냐? 밭농사는 나 몰라라 팽개치고 하루 종일 툇마루에 자빠져 잠만 퍼질러 자는 그 한심한 놈 맞지?"
자신의 이름과 낱낱이 파헤쳐진 게으른 행적에 칠성은 등줄기를 타고 식은땀이 폭포수처럼 흘러내렸다. 이 밤의 요괴들이 어찌 마을 구석에 박혀 사는 자신의 일거수일투족을 이리도 잘 알고 있단 말인가.
"네? 아, 아닙니다! 그, 그런 오해를...! 저는 사실 마을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울 정도로 아주 부지런하고 성실한 농사꾼입니다요! 오늘 밤도 땔감을 하러 이 깊은 산까지 올라왔다가 그만 길을 잃어..."
"입 닥쳐라! 어디서 감히 새빨간 거짓말을 늘어놓느냐!"
도깨비의 사자후 같은 호통에 산 전체가 쩌렁쩌렁 울렸다. 칠성은 귀가 멀 것 같은 고통에 양손으로 귀를 틀어막았다.
"우리 도깨비들은 인간들이 숨기고자 하는 가장 추악한 행실과 마음속 깊은 생각까지 모조리 다 꿰뚫어 보고 있다. 네놈 집 뒤꼍 밭에는 사람 키만 한 잡초가 산더미처럼 쌓여 썩어가고 있고, 불쌍한 네 마누라는 가난과 남편의 게으름에 속이 까맣게 타들어 가고 있는데 어딜 감히 우리 앞에서 발뺌이냐! 당장 이 가시방망이로 네놈의 머리통을 박살을 내어 짐승들의 먹이로 던져줄 것이다!"
도깨비가 시퍼런 안광을 뿜어내며 거대한 방망이를 높이 치켜들었다. 칠성은 눈물과 콧물을 범벅한 채 양손을 싹싹 비비며 처절하게 살려달라 울부짖었다.
"아이고, 제가 죽을 죄를 지었습니다! 다 제 잘못입니다! 사실은... 농사일이라는 게 워낙 허리가 끊어질 듯 고되고 뙤약볕 아래서 땀이 비 오듯 쏟아지는 일이다 보니... 제 허약한 체질에는 영 맞지가 않아서 그만... 한 번만 살려주십시오, 도깨비님! 은혜는 평생 잊지 않겠습니다!"
벌벌 떠는 칠성의 한심한 핑계를 듣던 우두머리 도깨비는 치켜들었던 방망이를 천천히 내리며 눈을 가늘게 떴다. 그의 입가에 음흉하고도 기묘한 미소가 번졌다.
"허허, 핑계 한번 기가 막히게 좋구나. 육신이 멀쩡한 사내놈이 체질 운운하며 일을 피하다니. 좋다! 네놈이 하도 게을러빠져서 농사짓기를 죽기보다 싫어하니, 내가 친히 널 도와주마. 뙤약볕에서 땀 한 방울 흘리지 않고도 쌀독에 쌀이 넘쳐나고 평생을 배불리 먹고살 수 있는 기막힌 방법을 알려주지. 어떠냐, 내 솔깃한 제안에 구미가 당기느냐?"
방금 전까지 죽음의 공포에 사시나무 떨듯 떨던 칠성의 귀가 '땀 한 방울 흘리지 않고 배불리 먹고산다'는 말에 번쩍 뜨였다. 인간의 얄팍한 탐욕은 때로 죽음에 대한 공포마저 마비시키는 법이었다. 칠성은 침을 꿀꺽 삼키며 홀린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그런 기적 같은 방법이... 정말로 있단 말씀이십니까?"
"물론이지. 하늘의 조화를 부리는 우리 도깨비들에게 불가능이란 없다. 자, 이것을 받아라."
우두머리 도깨비는 품속을 뒤적이더니 작고 낡은 명주 주머니 하나를 꺼내어 칠성의 가슴팍에 툭 던졌다. 얼떨결에 주머니를 받아 든 칠성이 떨리는 손으로 끈을 풀어 속을 들여다보았다. 주머니 안에는 어둠 속에서도 달빛을 머금은 듯 영롱하고 눈부시게 빛나는 은화 세 닢이 달그락거리고 있었다.
"이 은화 세 닢을 당장 집으로 가져가 너의 집 뒷마당 가장 구석지고 볕이 들지 않는 땅에 깊이 묻어라. 그리고 매일 밤 자정, 달빛이 정수리를 비출 때 정확히 그 땅에 맑은 우물물을 한 바가지씩 뿌려라. 물을 주며 반드시 '은화야, 은화야, 쑥쑥 자라라' 하고 세 번 외쳐야 한다. 그렇게 하루도 빠짐없이 정성을 다하면 백 일이 되는 날 자정, 그 땅에서 진짜 은화가 주렁주렁 열리는 커다란 은나무가 자라날 것이다. 그 은나무만 있으면 너는 평생 호미 한번 쥐지 않고도 떵떵거리며 부자로 살 수 있지."
은나무라는 말에 칠성의 입은 이미 귀밑까지 찢어져 있었다. 땅에 은화 세 닢을 묻고 매일 밤 물만 한 바가지 주면 평생 놀고먹을 수 있다니, 이 세상에 이보다 더 쉽고 완벽한 농사가 어디 있겠는가.
'이것은 하늘이 내린 기회다! 아니, 도깨비가 내린 기회다! 이것만 있으면 이제 뙤약볕에서 허리 굽혀 일할 필요도 없고, 삯바느질하는 마누라의 지긋지긋한 잔소리를 들을 일도 없다!'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도깨비님! 제가 백 일 동안 하루도, 아니 한시도 빠짐없이 정성을 다해 물을 주겠습니다요!"
칠성이 환희에 차 연신 허리를 굽혀 절을 하자, 우두머리 도깨비의 눈빛이 갑자기 서늘한 빙판처럼 차갑게 변했다. 그의 목소리는 이전보다 훨씬 낮고 묵직해져 칠성의 심장을 옥죄어왔다.
"단, 절대 잊지 말고 명심해야 할 규칙이 있다. 백 일 동안 단 하루라도 물을 주는 것을 깜빡하거나, 자정이라는 정확한 시간을 어기면 은나무는 절대 싹을 틔우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만약 네놈의 그 얄팍한 인내심이 바닥나 백 일이 채 되기도 전에 딴마음을 먹고 땅을 파헤치거나 의심을 품는다면, 이 은화들은 네가 상상할 수조차 없는 가장 끔찍한 재앙이 되어 너의 숨통을 무참히 조일 것이다. 똑똑히 알아들었느냐?"
살기가 뚝뚝 묻어나는 도깨비의 끔찍한 경고에 칠성은 다시 한번 등줄기가 얼어붙는 것을 느꼈다.
"며, 명심하겠습니다! 제 목숨을 걸고 절대 약속을 어기지 않겠습니다!"
"좋다. 거래는 성립되었다. 이제 그만 미련한 꿈에서 깨어나 돌아가거라. 내일 아침 해가 밝으면 네 손에 쥐어진 것이 허상이 아니란 걸 알게 될 테니."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우두머리 도깨비가 들고 있던 커다란 가시방망이를 땅에 쿵! 하고 거세게 내리쳤다. 그 순간, 눈을 뜰 수 없을 만큼 강렬하고 번쩍이는 푸른 섬광이 사방을 뒤덮었고, 칠성은 귓가를 때리는 굉음과 함께 까마득한 어둠 속으로 정신을 잃고 깊이 빠져들었다.
※ 4: 씨앗을 뿌리지 않는 밭, 그리고 탐욕의 밤
아침을 알리는 수탉의 우렁찬 울음소리가 고막을 때렸을 때, 칠성은 번쩍 눈을 떴다. 평소 같았으면 시끄럽다며 이불을 뒤집어쓰고 귀를 막았을 테지만, 오늘 아침은 달랐다. 그의 심장은 북을 치듯 요동치고 있었고, 온몸은 식은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다. 천천히 상체를 일으킨 칠성은 여기가 어딘지 가늠하려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사방이 꽉 막힌 벽, 퀴퀴한 홀아비 냄새, 여기저기 구멍 난 창호지 문. 틀림없는 자신의 방 안이었다. 어젯밤 산군 고개에서 겪었던 그 오싹하고 끔찍했던 도깨비들과의 만남이 그저 한낱 개꿈이었단 말인가? 허탈한 한숨을 내쉬며 이마의 땀을 훔치려던 찰나, 칠성은 자신의 오른손에 묵직하고 서늘한 무언가가 단단히 쥐어져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숨을 들이켜며 조심스럽게 꽉 쥔 주먹을 펴자, 손바닥 위에는 낡고 해진 명주 주머니 하나가 놓여 있었다. 그리고 그 안에서는, 창호지 틈새로 스며든 아침 햇살을 받아 영롱하고도 눈부시게 빛을 발하는 은화 세 닢이 달그락거리고 있었다. 등줄기를 타고 찌릿한 전율이 흘렀다. 꿈이 아니었다. 거대한 가시방망이를 휘두르던 도깨비도, 백 일 뒤에 은나무가 자라날 것이라는 기상천외한 약속도 모두 현실이었던 것이다.
"흐흐흐... 하하하하! 부자다! 이제 난 벼락부자다! 조선 팔도에서 제일가는 갑부가 되는 거야!"
칠성은 이불을 걷어차고 미친 사람처럼 방 안을 펄쩍펄쩍 뛰며 환호성을 질렀다. 부엌에서 아침상을 차리던 아내가 그 기괴한 소란에 놀라 부지깽이를 든 채 달려왔다. 머리는 산발을 하고 눈은 뒤집힌 채 춤을 추는 남편의 꼴을 본 아내는 기가 막힌다는 듯 혀를 끌쯧 찼다. 어제 땔감도 해오지 않고 밤늦게 빈손으로 기어들어 오더니, 산에서 귀신이라도 씌어 단단히 미쳐버린 것이 틀림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칠성의 귀에는 아내의 앙칼진 잔소리가 한 마디도 들어오지 않았다. 그는 소중한 은화 주머니를 행여나 누가 볼세라 품속 깊숙이 감추고는 곧장 뒷마당으로 뛰쳐나갔다.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아 사람 키만 한 잡초가 무성하게 우거진 뒷마당 구석, 가장 볕이 들지 않는 음습하고 서늘한 땅을 골라잡은 칠성은 맨손으로 미친 듯이 흙을 파내기 시작했다. 손톱 밑에 새까만 흙이 끼고 생채기가 났지만 아픈 줄도 몰랐다. 제법 깊숙한 구덩이가 만들어지자, 칠성은 심호흡을 한 번 하고는 도깨비가 준 은화 세 닢을 조심스럽게 그 안에 내려놓았다. 그리고 정성스럽게 흙을 덮고 토닥인 뒤, 그 자리에 자신만이 알아볼 수 있도록 작은 돌멩이 하나를 얹어두었다.
그날 밤부터 칠성의 기묘하고도 고통스러운 일과가 시작되었다. 평소의 칠성이라면 저녁 숟가락을 놓기가 무섭게 코를 골며 쓰러져 잤을 테지만, 도깨비와의 약속 시간인 '자정'을 맞추기 위해 그는 억지로 졸음을 쫓아야만 했다. 허벅지를 꼬집고, 찬물로 세수를 해가며 꾸벅꾸벅 졸다 깨기를 반복하는 것은 게으름뱅이 칠성에게 지옥 같은 고문이었다. 이윽고 사위가 쥐죽은 듯 고요해지고 차가운 달빛이 마당을 비출 때쯤, 칠성은 도둑고양이처럼 살금살금 우물가로 가 맑은 물을 한 바가지 퍼 올렸다.
"은화야, 은화야, 쑥쑥 자라라."
칠성은 은화를 묻은 흙 위에 정성스레 물을 뿌리며 도깨비가 일러준 주문을 세 번 외웠다. 첫날은 설렘으로 밤을 지새웠지만, 하루가 지나고 이틀이 지나 열흘이 넘어가자 상황은 급격히 달라졌다. 낮에는 수마에 취해 시체처럼 늘어져 있었고, 밤에는 자정이라는 시간에 얽매여 극도의 신경쇠약에 시달렸다. 비바람이 몰아치고 천둥 번개가 내리치는 밤에도 칠성은 우산을 받쳐 들고 나가 벌벌 떨며 물을 주었고, 칠흑같이 어두운 그믐밤에는 발을 헛디뎌 진흙탕에 구르면서도 주문을 외우는 것을 잊지 않았다.
시간은 지루하게 흘러 어느덧 구십 일이 지났다. 백 일이 가까워질수록 칠성의 몰골은 말이 아니었다. 두 눈은 퀭하게 들어가 시뻘건 핏발이 서 있었고, 뺨은 푹 패어 마치 살아 움직이는 해골 같았다. 아내는 밤마다 홀린 듯 뒷마당을 들락거리는 남편을 보며 당장 무당이라도 불러 굿을 해야 한다고 울고불고 난리를 쳤지만, 칠성은 오직 땅 밑에 묻힌 은나무에만 혈안이 되어 있었다. 이제 단 열흘, 고작 열흘만 버티면 끔찍한 고생도 끝이고 평생을 비단옷에 고기반찬을 먹으며 떵떵거릴 수 있었다.
하지만 인간의 마음속에 똬리를 튼 탐욕이란 끝이 없는 법. 구십구 일째 되는 날 밤이었다. 단 하루, 내일 밤 자정만 지나면 꿈에 그리던 은나무를 볼 수 있다는 생각에 칠성은 도무지 방바닥에 가만히 누워있을 수가 없었다. 천장을 바라보며 뒤척이는 그의 머릿속에는 온통 뒷마당 구석에 묻힌 은화 생각뿐이었다. 창호지 문틈으로 비쳐 드는 만월의 교교한 달빛이 유난히도 밝고 시리게 느껴졌다.
'하루... 이제 딱 하루 남았는데. 구십구 일이나 물을 줬으니, 땅 밑에서는 이미 은나무가 무성하게 자라나 있지 않을까? 어쩌면 흙 위로 벌써 새싹이 돋아났을지도 몰라. 아니, 벌써 은화가 주렁주렁 맺혀서 가지가 무거워져 있을 수도 있어. 도깨비가 백 일이라고 못을 박긴 했지만, 구십구 일이나 백 일이나 그게 그거지. 살짝, 아주 살짝 겉흙만 걷어내서 잘 자라고 있는지 확인만 해보는 건 괜찮지 않을까? 눈으로 확인만 하고 다시 덮어두면 하늘도 모르고 도깨비도 모를 거야.'
스스로를 교묘하게 합리화하며 칠성은 이불을 걷어찼다. 그의 이성은 이미 부풀어 오를 대로 부풀어 오른 탐욕과 조급함에 완전히 마비되어 있었다. 도깨비가 내뱉었던 섬뜩한 경고의 목소리가 귓가를 맴돌았지만, 은화가 뿜어내는 환영의 빛은 그 모든 두려움을 집어삼켰다. 칠성은 부엌 한구석에 녹슨 채 처박혀 있던 무거운 쇠호미를 집어 들었다. 밤공기는 얼음장처럼 차가웠지만, 욕망으로 달아오른 그의 숨결은 뜨겁기만 했다.
달빛을 받아 창백하게 빛나는 뒷마당은 숨이 막힐 듯 고요했다. 칠성은 은화를 묻어둔 구석진 땅 앞에 쪼그려 앉았다. 마른침이 꿀꺽 넘어갔다. 호미를 쥔 두 손이 주체할 수 없이 바들바들 떨렸다. 조심스럽게, 아주 조심스럽게 호미 끝을 땅에 박아 넣고 겉흙을 긁어내자 서늘하고 축축한 흙냄새가 확 풍겨왔다. 조금 더 깊이 흙을 파 내려가던 순간, 호미 끝에 뭉툭하고 부드러운 무언가가 툭 하고 걸렸다.
"어? 이, 이건... 나무뿌리가 아닌데?"
칠성은 황급히 호미를 내던지고 떨리는 맨손으로 흙을 마구 파헤쳤다. 손끝에 닿은 감촉은 나뭇가지도, 단단한 뿌리도, 은화의 금속성도 아니었다. 달빛 아래 드러난 것은 구십구 일 전 자신이 묻었던 그 모양 그대로, 싹 하나 트지 않은 채 흙투성이가 된 낡은 명주 주머니였다.
※ 5: 도깨비의 장난과 깨달음의 눈물
흙구덩이 속에서 모습을 드러낸 낡은 명주 주머니를 보는 순간, 칠성의 심장은 바닥으로 곤두박질쳤다. 구십구 일 밤낮을 비바람을 맞아가며 정성을 들였건만, 은나무는커녕 새싹의 흔적조차 보이지 않았다. 칠성의 머릿속이 하얗게 비워지며, 당혹감은 이내 걷잡을 수 없는 분노와 배신감으로 번져갔다.
'이럴 수가... 그 도깨비놈들이 날 감쪽같이 속인 거야! 매일 밤 물을 주면 은나무가 자란다더니, 애먼 사람을 백 날 동안 밤잠도 못 자게 고문해놓고 뒤에서 낄낄거리며 비웃고 있었던 게 틀림없어! 이 망할 도깨비놈들! 내가 이 은화 세 닢이라도 당장 주막에 가서 술로 다 바꿔 먹고 말 테다!'
배신감에 눈이 뒤집힌 칠성은 거칠게 주머니를 집어 들고는 꽉 묶여있던 매듭을 신경질적으로 풀어헤쳤다. 하지만 주머니의 입구가 벌어지는 순간, 칠성은 비명조차 지르지 못한 채 턱을 덜덜 떨며 뒤로 나자빠지고 말았다.
주머니 속에서 쏟아져 나온 것은 영롱하게 빛나야 할 은화 세 닢이 아니었다. 시뻘건 눈을 번뜩이며 수십 개의 다리를 징그럽게 구물거리는 어른 팔뚝만 한 지네들과, 시퍼런 맹독을 품고 쉭쉭 소리를 내는 독사들이 뭉텅이로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그것들은 마치 오랜 시간 굶주려 먹이를 기다렸다는 듯, 순식간에 칠성의 발목을 휘감고 종아리를 타고 오르며 그의 온몸을 옥죄기 시작했다. 차갑고 미끌거리는 비늘의 감촉과 살을 파고드는 수십 개의 날카로운 발톱에 칠성은 혼비백산했다.
"으아아악! 사, 살려주세요! 이게 뭐야! 떨어져, 떨어지라고!"
칠성이 발버둥 치며 자신의 몸을 기어오르는 벌레와 뱀들을 떼어내려 미친 듯이 손을 허우적거렸다. 하지만 떼어내면 떼어낼수록 그것들의 숫자는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 순식간에 그의 허리춤까지 차올랐다. 극도의 공포에 질려 숨이 턱턱 막혀오던 그때였다. 갑자기 뒷마당 전체가 거대한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쿠구궁 소리를 내며 요동치기 시작했다. 칠성의 눈앞 공간이 기괴하게 일그러지더니 짙고 축축한 안개가 피어올랐고, 그 뽀얀 안개 장막을 찢고 산군 고개에서 보았던 도깨비 무리가 섬뜩한 웃음소리와 함께 모습을 드러냈다.
"낄낄낄! 우하하하! 어리석고 탐욕스러운 인간놈! 결국 그 알량한 하루를 참지 못하고 기어이 약속을 어겼구나!"
우두머리 도깨비가 두 눈에서 시뻘건 불을 뿜어내며 칠성 앞으로 쿵쿵 다가왔다. 그의 목소리는 하늘이 무너지는 천둥소리처럼 밤공기를 갈가리 찢어놓았다.
"우리가 분명히 경고하지 않았더냐! 일하기 싫어 요행만 바라는 그 썩어빠진 게으른 심보에, 백 일의 약속 하나 끝까지 지켜내지 못하는 얄팍하고 천박한 인내심까지! 네놈의 그 끝없는 탐욕과 의심이 결국 이 끔찍한 재앙을 스스로 부른 것이다!"
"잘못했습니다! 제가 죽을 죄를 지었습니다, 도깨비님! 제가 미쳤었습니다! 제발 이 끔찍한 것들 좀 치워주십시오! 목숨만은, 제발 목숨만은 살려주십시오!"
독사가 목을 조르고 지네가 얼굴을 기어다니는 끔찍한 고통 속에서 칠성은 땅바닥에 머리를 찧으며 싹싹 빌었다. 숨이 막혀오는 극도의 공포와 고통 속에서, 그는 평생을 게으름 피우며 가족을 고생시키고 요행만 바랐던 자신의 쓰레기 같은 삶을 뼈저리게 후회했다. 우두머리 도깨비는 코웃음을 치며 하늘 높이 가시방망이를 치켜들었다.
"세상에 땀 흘리지 않고 얻을 수 있는 진짜 가치란 없는 법이다. 공짜로 얻은 것은 결코 네 것이 될 수 없거늘! 노동의 신성함을 모독하고 요행만을 탐한 죄, 오늘 밤 네놈의 육신과 영혼이 갈가리 찢기는 고통으로 톡톡히 치르게 해주마!"
도깨비의 방망이가 칠성의 머리를 향해 벼락처럼 내리꽂혔다. 번쩍! 하는 강렬한 섬광과 함께 두개골이 부서지는 듯한 엄청난 고통이 밀려왔고, 칠성은 끔찍한 비명을 지르며 끝없는 어둠의 구렁텅이로 곤두박질쳤다.
정신을 차렸을 때, 칠성은 더 이상 자신의 집 뒷마당이 아닌 전혀 다른 세상에 서 있었다. 하늘은 사람의 피를 흩뿌려놓은 듯 검붉게 타오르고 있었고, 사방을 둘러보아도 끝을 알 수 없을 만큼 거대하고 황량한 돌밭만이 끝없이 펼쳐져 있었다. 살을 에는 듯한 날카로운 칼바람이 불어올 때마다 모래 먼지가 회오리쳤다. 그리고 그의 두 손에는 피딱지가 말라붙은 무겁고 투박한 쇠호미가 꽉 쥐어져 있었다.
어디선가 사방을 울리는 도깨비의 음산하고 거대한 목소리가 쏟아져 내렸다.
"이 끝없는 저주의 돌밭을 동트기 전까지 모두 일구어 부드러운 흙으로 만들고 씨앗을 심어라! 만약 해가 떠오를 때까지 단 한 뼘의 땅이라도 남겨둔다면, 네놈은 영원히 이 지옥 같은 공간을 빠져나가지 못하고 차가운 돌덩이가 되어 영겁의 시간을 굴러다니게 될 것이다!"
칠성은 하늘을 우러러보며 절망적인 울부짖음을 토해냈다. 눈앞에 펼쳐진 땅은 도저히 인간 혼자서는 평생을 쉬지 않고 밭을 갈아도 끝내지 못할 만큼 광활하고 메말라 있었다. 호미가 들어갈 틈조차 없는 단단한 바위투성이 땅이었다. 하지만 가만히 주저앉아 있다가는 영원히 돌덩이가 되어버릴 거라는 지독한 공포가 그의 굳어버린 몸을 강제로 움직이게 했다.
"으아아악! 내가 미쳤지! 내가 미쳤어! 차라리 밭에 나가서 마누라랑 김이나 맬 것을,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겠다고 도깨비 장단에 놀아나서 이 끔찍한 지옥 불에 떨어졌단 말인가!"
칠성은 태어나서 처음으로 젖 먹던 힘, 아니 목숨을 쥐어짜 내어 쇠호미를 돌밭에 내리찍었다. 깡! 하는 날카로운 마찰음과 함께 불꽃이 튀었다. 단단하게 굳어버린 돌무더기를 파내고 굳은 흙을 뒤집는 일은 끔찍한 고문과도 같았다. 몇 번 호미질을 하지 않았는데도 연약했던 그의 손바닥은 금세 커다란 물집이 잡혀 터져버렸고, 찢어진 살점 사이로 검붉은 피가 배어 나와 호미 자루를 미끄럽게 물들였다. 허리는 끊어질 듯 욱신거렸고, 턱밑으로는 비 오듯 땀방울이 쏟아져 내렸다. 하지만 칠성은 살기 위해, 영원한 돌덩이가 되지 않기 위해 이빨을 꽉 깨물고 호미질을 멈추지 않았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조차 가늠할 수 없었다. 온몸의 근육이 갈가리 찢어지는 듯한 비명을 지르고, 눈앞이 노랗게 흐려지는 한계 상황 속에서도 칠성은 기계처럼 땅을 파고 또 팠다. 그런데 참으로 기이한 일이었다. 피와 땀으로 범벅이 된 고통의 한가운데서, 칠성의 마음 한구석에는 평생 단 한 번도 느껴보지 못했던 기묘한 감정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자신의 이마에서 뚝뚝 떨어지는 굵은 땀방울이 메마른 흙을 적시고, 피투성이가 된 두 손이 휘두르는 호미질에 척박하고 날카롭던 돌밭이 점차 부드럽고 생명력 넘치는 검은 흙으로 변해가는 모습을 보며, 그는 벅차오르는 경이로움을 느꼈다. 그것은 그 어떤 금은보화를 얻었을 때보다도 강렬한 희열이었다.
'이것이... 이것이 정직하게 땀 흘려 땅을 일구는 자의 고단함이자 떳떳함이란 말인가. 내가 흘린 땀이 땅을 숨 쉬게 하고, 이 흙이 다시 생명을 품어내는 것이구나. 은나무 따위가 아니라, 이 정직한 흙이야말로 인간을 살리는 진짜 보물이었어.'
거친 숨을 몰아쉬며 잠시 하늘을 올려다보던 칠성의 두 눈에서 뜨겁고 굵은 눈물이 뚝뚝 떨어져 내렸다. 그것은 더 이상 도깨비에 대한 두려움이나 돌덩이가 될지 모른다는 공포의 눈물이 아니었다. 평생을 게으름과 요행만 바라며 스스로의 가치를 갉아먹고, 묵묵히 땅을 지켜온 아내와 이웃들을 기만하며 살아온 자신의 초라하고 부끄러운 인생에 대한 뼈저린 참회와 반성의 눈물이었다. 칠성은 흙먼지와 핏자국으로 엉망이 된 얼굴을 거친 소매로 무심하게 닦아내며, 묵묵히 다시 무거운 호미를 치켜들었다.
저 멀리 핏빛으로 타오르던 지평선 너머로 어느덧 희스름한 새벽빛이 스며들기 시작했다. 해가 떠오르고 있었지만, 거대한 밭은 여전히 반도 채 일구지 못한 상태였다. 탈진해버린 칠성의 두 다리가 꺾이며 땅바닥에 주저앉고 말았다. 발끝에서부터 온몸이 차갑고 단단하게 굳어가는 듯한 끔찍한 감각이 서서히 밀려왔다. 하지만 칠성은 체념한 듯 평온한 미소를 지으며 지그시 눈을 감았다.
"그래, 내 어리석은 죄업이니 마땅히 달게 받으마. 영원히 굳어버린다 해도, 적어도 내 인생의 마지막 순간만큼은 내 손으로 떳떳하게 흙을 일구어 보았으니 더 이상 한은 없구나. 마누라, 미안하오..."
칠성이 마지막 남은 힘을 다해 호미를 땅에 꽂아 넣고 쓰러지는 순간, 세상을 밝히는 따뜻하고 눈부신 아침 햇살이 마치 구원의 손길처럼 그의 전신을 포근하게 감싸 안았다.
※ 6: 황금빛 들판, 진짜 부자가 된 농부
"이보시오! 칠성 아재! 아재요! 해가 중천에 떠서 엉덩이가 뜨거울 지경인데, 남들은 다 밭에 나가 일하는구먼 아직도 그늘에 누워 퍼질러 자는 거요? 참말로 대단한 팔자 납셨소이다!"
누군가의 거칠고 낯익은 목소리에 번쩍 눈을 뜬 칠성은 화들짝 놀라며 상체를 튕기듯 일으켰다. 숨을 헐떡이며 주변을 미친 듯이 둘러보았다. 검붉게 타오르던 지옥의 하늘도, 영원히 끝날 것 같지 않던 그 황량하고 끔찍한 돌밭도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있었다. 그는 코끝을 간지럽히는 따사로운 봄바람을 맞으며, 익숙한 자신의 집 마당 평상 위에 대자로 누워있었다. 마침 이웃집 박 서방이 커다란 지게에 거름을 가득 지고 담장 너머로 지나가며 그를 향해 혀를 끌쯧끌쯧 차고 있었다.
칠성은 허겁지겁 자신의 양손을 눈앞으로 가져와 뚫어져라 내려다보았다. 쇠호미를 쥐고 피투성이가 되어 짓물러 터졌던 손바닥은 언제 그랬냐는 듯 생채기 하나 없이 멀쩡했다. 하지만 묘하게도 손끝에는 흙먼지가 약간 묻어있었고, 등과 가슴은 마치 밤새 밭을 간 사람처럼 기분 좋은 땀방울로 흠뻑 젖어 있었다. 심지어 양팔과 허리의 근육은 기분 좋은 뻐근함을 간직하고 있었다.
무언가에 홀린 사람처럼 평상에서 뛰어내린 칠성은 신발도 신지 않은 채 맨발로 뒷마당 구석을 향해 쏜살같이 달려갔다. 어젯밤 미친 듯이 파헤쳐 은화 주머니를 꺼냈던 그 자리는,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평평하게 흙이 덮여 있었다. 징그러운 지네나 뱀의 허물 같은 것은 그 어떤 흔적조차 남아있지 않았다.
'이 모든 게 꿈이었단 말인가? 도깨비도, 은화도, 지옥의 돌밭도 모두 잠결에 꾼 허상이었을까? 아니야, 단순한 꿈이라기엔 내 몸을 짓누르던 호미의 무게와, 이마에서 떨어지던 뜨거운 땀방울의 감촉이 너무도 생생해. 그래, 그것은 어리석고 게으른 나를 깨우쳐 주기 위해 하늘, 아니 산군 고개의 도깨비들이 내린 따끔한 회초리이자 마지막 기회였던 것이 틀림없다.'
뒷마당 한구석에 멍하니 서 있던 칠성의 시선이 마당 한구석, 녹슨 채 나뒹굴고 있는 진짜 쇠호미에 머물렀다. 천천히 걸어가 호미의 자루를 거머쥔 칠성의 두 손에 단단한 힘이 들어갔다. 그것은 더 이상 무거운 고문의 도구가 아니라, 생명을 일구어내는 신성한 마법의 지팡이처럼 느껴졌다.
그는 잠이 덜 깬 퀭한 얼굴로 마른버짐이 핀 얼굴을 한 채 부엌에서 걸어 나오는 아내를 향해 돌아섰다. 평소 같으면 잔소리를 퍼붓기도 전에 도망칠 궁리부터 했겠지만, 칠성은 아내의 두 손을 덥석 잡으며 세상에서 가장 환하고 결연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임자! 오늘 아침엔 밥상 차릴 때 내 밥 한 그릇 아주 고봉으로, 산더미처럼 수북하게 퍼 주구려! 든든하게 배 속 꽉꽉 채워 먹고 당장 밭에 나가서 저 사람 키만 한 잡초들 싹 다 호미로 박살을 내버릴 테니까! 우리 뒷밭을 마을에서 제일가는 옥토로 만들어버릴 거요!"
"아이고, 하늘의 해가 오늘은 기어이 서쪽에서 뜨려나 보네. 우리 집 인간 화상이 어젯밤에 뒷마당에서 달밤에 체조를 하더니, 드디어 미쳐도 단단히 미쳐버렸구먼. 허풍 떨지 말고 툇마루에 가서 잠이나 더 주무시지 그러오?"
아내는 남편의 생경한 모습에 어안이 벙벙하여 헛웃음을 쳤지만, 칠성의 눈빛은 허풍을 떠는 자의 것이 아니었다. 그의 두 눈은 그 어느 때보다 진지했고, 삶에 대한 의지로 찬란하게 빛나고 있었다.
그날 아침 밥상을 물린 직후부터 칠성은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어버렸다. 마을 사람들이 눈을 비비며 일어나기도 전인 새벽안개 속에서 가장 먼저 일어나 호미를 들고 밭으로 나갔고, 해가 져서 사물이 분간되지 않을 때까지 가장 늦게 밭에 남아 흙을 만졌다. 비가 쏟아지는 날에는 도랑을 팠고, 뙤약볕이 내리쬐는 날에는 밀짚모자를 푹 눌러쓴 채 묵묵히 김을 맸다. 두툼했던 뱃살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구릿빛으로 그을린 탄탄한 근육이 그의 몸을 채웠다.
아내도 처음에는 남편의 갑작스러운 변화를 믿지 못해 며칠 하다 힘들다고 나가떨어지겠지 여겼다. 하지만 하루, 이틀, 그리고 한 달이 지나도 변함없이 흙투성이가 되어 돌아와 환하게 웃는 남편의 모습에 깊은 감동을 하였고, 이내 두 팔을 걷어붙이고 칠성의 옆에 서서 함께 밭을 가꾸기 시작했다. 마을 사람들도 천하의 게으름뱅이 칠성이 마을 제일의 일꾼으로 환골탈태한 모습을 보며 놀라움을 금치 못했고, 너도나도 앞다투어 농사일을 거들어주며 응원을 아끼지 않았다.
시간은 정직하게 흘러, 어느덧 뜨거웠던 여름이 지나고 천고마비의 계절, 가을이 찾아왔다. 사람 키만큼 잡초가 무성하여 뱀조차 살기 꺼려했던 칠성의 흉물스러운 밭은, 이제 온 마을에서 가장 풍성하고 탐스러운 곡식들이 무겁게 고개를 숙인 찬란한 황금빛 들판으로 변모해 있었다. 시원한 가을바람이 불어올 때마다 알알이 여문 벼 이삭들이 부딪치며 내는 사르락거리는 소리는, 칠성의 귀에는 그 옛날 도깨비가 주었던 수만 닢의 은화가 쏟아지는 소리보다 훨씬 더 맑고 경쾌하게 들렸다.
가을 햇살을 받으며 풍년의 기쁨을 나누던 칠성은 목에 두른 수건으로 이마에 맺힌 구슬땀을 시원하게 닦아내었다. 들판을 바라보는 그의 거칠어진 얼굴에 세상 그 누구보다 평온하고 행복한 미소가 번졌다.
'그래, 도깨비님 말이 틀린 게 하나도 없었어. 구석진 땅에 묻은 은화 세 닢은 나를 홀리기 위한 가짜 환상이었지만, 내가 이마에서 흘린 정직한 땀방울이야말로 이 땅을 비옥하게 만들고 진짜 은화를 맺게 하는 위대한 마법의 씨앗이었던 거야.'
조선 팔도 으뜸가는 게으름뱅이에서, 흙의 진실함을 아는 참된 농사꾼으로 다시 태어난 칠성. 그의 얄팍한 인생을 송두리째 뒤바꿔놓은 기상천외하고도 오싹했던 하룻밤의 도깨비 소동은, 땀 흘려 일하는 정직함이 곧 인간이 누릴 수 있는 가장 큰 축복이라는 변치 않는 교훈을 남긴 채, 은빛 가을바람을 타고 마을 너머로 잔잔히 전해져갔다.
유튜브 엔딩멘트
오늘 준비한 『동패낙송』 기묘한 도깨비 이야기, 재미있게 들으셨나요? 게으름뱅이 칠성이 흘린 땀방울이 만들어낸 황금빛 들판처럼, 여러분의 일상에도 정직한 노력의 결실이 가득하시길 바랍니다. 오늘 밤도 평안한 잠자리 되시고요, 이야기가 즐거우셨다면 구독과 좋아요, 알림 설정 잊지 마세요! 다음번엔 더 오싹하고 신비로운 옛날이야기로 찾아오겠습니다. 안녕히 주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