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목차
도깨비를 구한 가난한 선비 『청라야담 (靑羅野談)』
태그 (15개)
#도깨비, #야담, #전설, #옛날이야기, #선비, #메밀묵, #은혜갚은도깨비, #권선징악, #오디오드라마, #시니어, #잠자리동화, #기적, #지혜, #사필귀정, #전래동화
#도깨비 #야담 #전설 #옛날이야기 #선비 #메밀묵 #은혜갚은도깨비 #권선징악 #오디오드라마 #시니어 #잠자리동화 #기적 #지혜 #사필귀정 #전래동화
후킹멘트 (300자 이내)
십 년 묵은 체증이 싹 내려가는 통쾌한 이야기! 과거에 번번이 낙방하고 마을 사람들에게 손가락질받던 가난한 선비가 산길에서 흉측한 도깨비를 만났습니다. 도망치기는커녕 불쌍하다며 따뜻한 메밀묵을 쑤어준 선비에게 과연 어떤 엄청난 기적이 일어났을까요? 도깨비의 은혜 갚기와 선비의 통쾌한 사이다 기지가 지금 시작됩니다!
※ 1: 십 년의 낙방, 차가운 고향 땅
찬 바람이 매섭게 몰아치는 초겨울의 저녁 무렵. 앙상한 나뭇가지들이 바람에 부딪히며 스산한 소리를 내는 고갯마루에, 어깨가 축 처진 사내 하나가 터덜터덜 걸어 올라오고 있었다. 낡아 빠져 뒤축이 다 닳아버린 짚신을 질질 끌며 걷는 그의 모습은 마치 혼이 빠져나간 허수아비 같았다. 십 년이었다. 청운의 뜻을 품고 한양으로 과거를 보러 떠난 지 꼬박 십 년. 그 긴 세월 동안 단 한 번도 낙방의 쓴잔을 피하지 못한 가난한 선비는, 결국 빈손으로 고향 땅을 밟아야만 했다. 그의 등 뒤로 지는 붉은 노을마저 선비의 처지를 비웃듯 차갑게 식어가고 있었다.
마을 어귀에 들어서자, 우물가에 모여 있던 아낙네들과 농사일을 마치고 돌아가던 사내들의 시선이 일제히 그에게로 쏠렸다. 선비는 고개를 푹 숙인 채 애써 걸음을 재촉했지만, 사람들의 뾰족한 속닥거림은 바람을 타고 그의 귓가에 고스란히 날아들었다.
"쯧쯧, 저 꼬락서니 좀 보게나. 또 미끄러졌나 보구먼."
"그러게 진작에 주제 파악하고 농사나 지을 것이지. 십 년이나 책상물림만 하고 앉아있으니 집안 꼴이 저 모양 저 꼴 아니오. 돌아가신 부모님이 무덤에서 통곡을 하실 게야."
"허우대는 멀쩡해서 어찌 저리 앞가림을 못할꼬. 보나 마나 또 며칠 굶은 귀신 몰골로 동네나 어슬렁거리겠지. 쯧쯧쯧."
비수처럼 날아와 가슴에 꽂히는 조롱과 멸시의 말들. 선비는 입술을 꽉 깨물었다. 너무 세게 깨문 탓에 비릿한 피 맛이 입안에 감돌았지만, 그보다 더 아픈 것은 갈기갈기 찢어진 자존심이었다.
'하늘도 무심하시지. 밤낮으로 책을 파고들어 피를 토하듯 글을 읽었거늘, 어찌 나에게는 단 한 줌의 운도 허락하지 않으시는가. 이제는 부모님 제사상에 올릴 술 한 잔 살 돈조차 없는 비루한 신세가 되었구나. 차라리 이대로 산속에 들어가 굶어 죽는 것이 낫지 않겠는가.'
선비의 발걸음이 향한 곳은 마을에서도 가장 후미진 곳에 자리한, 다 쓰러져가는 초가집이었다. 오랜 시간 사람의 온기가 닿지 않은 집은 을씨년스럽기 짝이 없었다. 지붕의 볏짚은 썩어문드러져 구멍이 숭숭 뚫려 있었고, 문풍지는 갈기갈기 찢어져 찬 바람이 윙윙 소리를 내며 드나들고 있었다. 방바닥은 얼음장처럼 차가웠고, 부엌에는 쥐들조차 먹을 것이 없어 외면한 지 오래였다.
선비는 차가운 방구석에 털썩 주저앉았다. 극심한 허기가 밀려와 위장을 쥐어짜는 듯한 고통이 느껴졌다. 뱃속에서는 천둥이 치듯 꼬르륵 소리가 요동을 쳤고, 눈앞은 핑핑 돌며 아득해졌다. 십 년의 세월 동안 오직 글공부에만 매달리며 버텨온 정신력이 마침내 한계에 다다른 것이다.
'배가... 너무 고프다. 이러다 정말 얼어 죽거나 굶어 죽겠구나. 내 인생은 어찌 이리도 기구하단 말인가.'
스스로에 대한 한탄과 뼈저린 외로움이 밀려왔다. 아무도 반겨주지 않는 고향, 자신을 향해 쏟아지던 경멸 어린 시선들, 그리고 지독한 가난. 선비는 무릎에 얼굴을 파묻고 서러운 눈물을 툭툭 흘렸다. 사내 대장부가 흘리는 눈물치고는 너무나도 처량하고 뜨거웠다. 하지만 언제까지고 울고만 있을 수는 없었다. 당장 얼어 죽지 않으려면 땔감이라도 구해 불을 지펴야 했다. 선비는 무거운 몸을 이끌고 비틀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찬 바람이 뼛속까지 스며드는 깊은 밤, 그는 지게를 짊어지고 칠흑 같은 어둠이 깔린 뒷산으로 무거운 발걸음을 옮겼다.
※ 2: 어둠 속, 신음하는 기이한 형체
달빛조차 구름에 가려 스며들지 못하는 깊은 산속. 오직 앙상한 나뭇가지 사이로 불어오는 음산한 바람 소리만이 선비의 귓가를 맴돌고 있었다.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험한 산길을 더듬거리며 오르던 선비는 추위와 굶주림에 온몸이 사시나무 떨리듯 떨렸다. 마른 나뭇가지를 주워 모으는 손등은 이미 쩍쩍 갈라져 핏물이 배어 나오고 있었다.
'이대로 눈을 감으면 고통도 사라지려나. 어차피 나 하나 죽는다고 슬퍼할 이도 없는 세상. 차라리 이 깊은 산속에서 조용히 숨을 거두는 것이 더 나을지도 모르겠다.'
선비가 깊은 절망감에 빠져 지게를 내려놓고 커다란 바위에 기대어 숨을 고르던 그때였다.
"끄으응... 끄흐흑..."
어디선가 정체를 알 수 없는 기괴하고 둔탁한 신음이 들려왔다. 짐승의 소리라기엔 너무나 사람의 목소리에 가까웠고, 사람의 소리라기엔 짐승처럼 거칠고 무거웠다. 선비는 깜짝 놀라 굳어버렸다. 등줄기를 타고 식은땀이 쫙 흘러내렸다. 이 야심한 밤, 인적조차 드문 깊은 산속에서 들려오는 소리라니. 온몸의 솜털이 곤두서는 듯한 공포가 엄습했다.
"크으으... 살려... 살려주게..."
바람결에 실려 온 소리는 분명 누군가 도움을 청하는 목소리였다. 겁에 질려 당장이라도 도망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차마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자신이 그토록 고통받고 외로웠기에,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죽어가고 있을지도 모를 누군가를 그냥 지나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선비는 침을 꿀꺽 삼키며 떨리는 다리를 이끌고 소리가 나는 쪽으로 조심스럽게 다가갔다.
우거진 덤불을 헤치고 나아가자, 지독하게 코를 찌르는 누룩 냄새가 훅 끼쳐왔다. 마치 수십 통의 막걸리를 바닥에 쏟아부은 듯한 진동이었다.
"누구... 뉘시오? 거기 누구 계시오?"
구름 사이로 잠시 얼굴을 내민 달빛이 숲속을 어스름하게 비추었다. 그리고 선비의 눈앞에 믿을 수 없는 광경이 펼쳐졌다. 집채만 한 바위 옆에, 칡넝쿨과 가시덤불에 칭칭 감긴 채 쓰러져 있는 거대한 형체. 족히 여덟 척은 넘어 보이는 거구에, 피부는 붉고 푸른빛이 얼룩덜룩 섞여 있었으며, 머리에는 뭉툭한 뿔이 하나 솟아 있었다. 찢어진 입 사이로는 날카로운 송곳니가 삐져나와 있었고, 몸에는 짐승의 가죽 같은 것을 두르고 있었다. 그것은 전설 속에서나 듣던, 무시무시한 도깨비였다!
도깨비는 술에 단단히 취한 데다 넝쿨에 발목이 심하게 엉켜 옴짝달싹 못 하는 처지였다. 가시에 긁힌 붉은 피부에서는 검붉은 피가 배어 나오고 있었다. 선비는 너무 놀라 뒤로 엉덩방아를 찧고 말았다.
'도, 도깨비다! 산도깨비가 틀림없어! 당장 이곳을 벗어나지 않으면 내 뼈도 추리지 못할 것이다!'
본능이 그렇게 외치고 있었지만, 선비의 시선은 고통에 일그러진 도깨비의 얼굴에 머물렀다. 천하를 호령할 것처럼 무섭게 생긴 도깨비가, 술에 취해 길을 잃고 상처투성이가 되어 살려달라며 끙끙대는 꼴이라니. 그 우스꽝스러우면서도 처량한 모습이, 십 년간 과거에 낙방하고 사람들에게 손가락질받으며 굶주림에 허덕이는 자신의 모습과 묘하게 겹쳐 보였다.
'그래, 너도 세상 천지에 기댈 곳 하나 없이 외로운 목숨이구나. 흉측하게 생겼다는 이유로, 사람들이 무서워한다는 이유로 평생을 겉돌았겠지. 나라고 뭐 다를 게 있겠느냐. 사람들에게 버림받고 이 캄캄한 산속을 헤매는 건 너나 나나 매한가지인 것을.'
선비는 깊은숨을 내쉬며 공포심을 억눌렀다. 그리고 천천히, 도깨비에게 다가갔다. 도깨비는 인기척을 느끼고는 부리부리한 눈을 번쩍 떴다. 금방이라도 잡아먹을 듯한 기세였지만, 초점 잃은 눈동자와 헐떡이는 숨소리는 그가 얼마나 기력을 잃었는지 보여주고 있었다.
"가만히 계시게. 내 비록 힘없는 선비이나, 자네를 묶고 있는 이 넝쿨들을 풀어주겠네. 조금만 참으시게."
선비는 도깨비를 옭아매고 있는 억센 칡넝쿨을 거친 손으로 하나하나 풀어내기 시작했다. 가시에 손이 찔려 피가 났지만 아랑곳하지 않았다. 도깨비는 처음엔 경계하는 듯 거친 숨을 몰아쉬더니, 선비의 진심 어린 손길을 느꼈는지 이내 얌전해졌다. 넝쿨을 다 풀어내자, 도깨비는 앓는 소리를 내며 그 자리에 털썩 쓰러졌다. 발목의 상처가 깊은 데다 술기운이 가시지 않아 제 몸을 가누지 못하는 듯했다.
선비는 쓰러진 도깨비를 보며 잠시 고민했다. 여기서 이대로 두고 가면 밤새 얼어 죽고 말 것이 분명했다.
'내 비록 가난하여 배를 곯고 있으나, 눈앞에서 죽어가는 생명을 외면하는 것은 선비의 도리가 아니다. 도깨비면 어떠하고 귀신이면 어떠하냐. 다 같은 가여운 목숨인 것을.'
선비는 이를 꽉 깨물고 자신의 지게를 가져와 쓰러진 도깨비의 거대한 몸을 끙끙거리며 실었다. 뼈가 으스러질 듯한 무게가 어깨를 짓눌렀지만, 선비는 젖먹던 힘까지 쥐어짜며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산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 3: 아랫목과 찰진 메밀묵 한 그릇
"헉... 헉..."
단내가 나는 숨을 몰아쉬며 선비가 자신의 오두막에 도착했을 때, 그는 온몸이 땀으로 범벅이 되어 당장이라도 쓰러질 것만 같았다. 선비는 조심스럽게 지게를 내려놓고 의식을 잃은 도깨비를 안방으로 옮겼다. 차디찬 방구석보다 낫기를 바라며, 그는 얼른 부엌으로 달려가 주워 온 마른 나뭇가지들로 아궁이에 불을 지폈다.
타닥타닥. 매운 연기가 피어오르더니 이내 붉은 불길이 솟구치며 차가웠던 구들장을 데우기 시작했다. 선비는 방 안에서 가장 따뜻한 아랫목에 하나 남은 낡은 이불을 깔고, 그 위에 도깨비를 눕혔다.
'몸이 펄펄 끓는구나. 이러다 정말 큰일이 나겠어. 요기라도 시켜야 기운을 차릴 터인데...'
선비는 부엌 찬장을 뒤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쥐도 굶어 죽어 나갈 만큼 텅 빈 살림에 먹을 것이 있을 리 만무했다. 부서진 항아리들을 이리저리 뒤적이던 선비의 손에 아주 작고 낡은 베주머니 하나가 잡혔다. 조심스럽게 주머니를 열어보니, 지난가을 산에서 주워다 애지중지 말려두었던 메밀 한 줌이 들어있었다. 내일 아침 도저히 견딜 수 없을 때 죽이라도 끓여 먹으려고 아껴두었던 마지막 식량이었다.
선비는 잠시 메밀 주머니를 내려다보며 꿀꺽 침을 삼켰다. 자신의 뱃속에서도 천둥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이 메밀을 다 써버리면 자신은 정말 며칠을 생수로만 버텨야 할지도 몰랐다. 그러나 방 안에서 가쁘게 숨을 몰아쉬고 있는 도깨비의 신음이 들려오자, 선비는 더 이상 망설이지 않았다.
'그래, 옛말에 도깨비는 메밀묵을 가장 좋아한다고 하지 않았더냐. 병자에게 찬물 한 그릇 들이밀어 무엇하겠는가. 나야 어찌어찌 물로 배를 채우면 될 일이다. 이왕 살려준 목숨, 제대로 구해주자꾸나.'
선비는 맷돌을 가져와 남은 메밀을 탈탈 털어 넣었다. 어둠 속에서 맷돌 돌아가는 소리가 구슬프게, 그러나 경쾌하게 울려 퍼졌다. 맷돌을 돌리는 선비의 등줄기에는 땀이 비 오듯 흘렀고, 극심한 허기에 눈앞이 하얘졌지만 손놀림은 멈추지 않았다. 곱게 갈아낸 메밀가루를 물에 풀어 가마솥에 붓고, 장작불을 은은하게 조절하며 쉴 새 없이 주걱으로 저었다.
보글보글 끓어오르는 소리와 함께 구수하고 향긋한 메밀 냄새가 부엌에 가득 찼다.
'타지 않게, 바닥에 눌어붙지 않게 조심해야 해. 메밀묵은 정성이 반이라고 했어.'
선비는 땀을 훔치며 묵이 찰지게 엉길 때까지 정성스럽게 주걱을 저었다. 마침내 윤기가 자르르 흐르고 탄력이 도는, 투박하지만 먹음직스러운 메밀묵 한 솥이 완성되었다. 선비는 깨진 사기그릇에 김이 모락모락 나는 따뜻한 메밀묵을 듬뿍 담았다. 간장 한 방울 곁들일 수 없는 초라한 밥상이지만, 선비가 가진 모든 정성과 생명 줄이 담긴 한 그릇이었다.
선비가 방으로 들어가자, 아랫목의 온기 덕분에 도깨비의 안색이 한결 나아져 있었다. 구수한 냄새를 맡았는지 도깨비의 콧벌름이 실룩거리더니, 이내 커다란 눈을 번쩍 떴다.
"자, 정신이 좀 드는가? 내 가진 것이 없어 화려한 음식은 대접할 수 없으나, 도깨비님들이 메밀묵을 그리 좋아하신다 들었소. 아직 뜨거우니 조심해서 좀 드셔보시게."
도깨비는 선비가 내민 그릇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그리고 선비의 핼쑥한 얼굴과 흙투성이가 된 옷가지, 땀방울이 맺힌 이마를 번갈아 보았다. 도깨비는 말없이 그릇을 받아 들더니, 무서운 속도로 묵을 퍼먹기 시작했다.
"후루룩, 쩝쩝, 꿀꺽."
씹을 새도 없이 부드러운 묵이 도깨비의 목구멍을 타고 넘어갔다. 방금 쑤어낸 메밀묵의 온기와 구수함, 그리고 자신을 살리기 위해 온밤을 지새운 가난한 선비의 정성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단숨에 묵 한 그릇을 바닥까지 박박 긁어먹은 도깨비는 크게 트림을 하더니, 처음으로 입을 열어 사람의 말을 꺼냈다.
"크어어... 내 평생 천지를 떠돌며 수많은 음식을 먹어보았으나, 오늘 선비가 쑤어준 이 메밀묵만큼 맛있는 음식은 단연코 없었소. 참으로, 참으로 뼛속까지 따뜻해지는 맛이구려."
선비는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자신의 배는 비록 등가죽에 달라붙을 지경이었지만, 맛있게 먹어준 도깨비를 보니 십 년 묵은 체증이 다 내려가는 듯 마음이 벅차올랐다.
※ 4: 도깨비의 눈물과 기묘한 약속
어느덧 창호지 너머로 희뿌연 새벽동이 터오기 시작했다. 아랫목에서 기력을 완전히 회복한 도깨비는 우뚝 자리에서 일어났다. 천장에 머리가 닿을 듯한 거구는 다시금 무시무시한 위압감을 뿜어내고 있었지만, 선비를 바라보는 도깨비의 눈빛만큼은 더없이 다정하고 따뜻했다.
"선비는 참으로 바보 같은 사내요."
도깨비의 굵고 낮은 목소리가 방 안을 울렸다.
"십 년을 과거에 떨어져 온 동네 사람들의 조롱거리가 된 것도 모자라, 곳간에 쥐 새끼 한 마리 없는 찢어지게 가난한 살림에... 제 목숨 연명할 마지막 양식인 메밀을 털어 낯선 요괴를 먹여 살리다니. 세상천지에 이런 어리석고 미련한 양반이 어디 있단 말이오."
도깨비의 말에 선비는 멋쩍은 듯 머리를 긁적였다. 어떻게 자신의 사정을 그리 훤히 꿰뚫어 보고 있는지 놀랍기도 했으나, 도깨비의 영험함을 생각하면 이상할 것도 없었다.
"바보 같아도 어쩔 수 없지 않소. 나 하나 입에 풀칠하자고 눈앞에서 죽어가는 생명을 모른 척한다면, 어찌 글을 읽는 선비라 할 수 있겠소. 게다가 도깨비님 덕분에 나도 오랜만에 누군가와 함께 밥을 나누는 기쁨을 누렸으니, 그것으로 족하오."
선비의 맑고 욕심 없는 대답에, 도깨비의 부리부리한 커다란 눈에서 굵은 눈물방울이 툭 떨어졌다. 그동안 사람들은 도깨비인 자신을 무조건 두려워하며 돌을 던지거나, 제 욕심을 채우기 위해 재물을 내놓으라며 협박하기 일쑤였다. 아무 대가 없이 그저 불쌍하다는 이유로 자신을 업어 나르고, 가장 귀한 것을 내어주며 진심으로 보살펴준 인간은 이 가난하고 보잘것없는 선비가 처음이었다.
도깨비는 투박하고 억센 손등으로 쓱쓱 눈물을 훔치더니, 짐승 가죽으로 된 자신의 옷안섶을 뒤적거렸다. 그리고는 사람 머리통만 한 기이한 모양의 나무 방망이 하나를 꺼내어 선비의 무릎 앞에 툭 내려놓았다. 손잡이는 반들반들하게 손때가 묻어 있었고, 끄트머리에는 뾰족한 혹들이 잔뜩 박혀있는 도깨비 방망이였다.
"이 방망이는 내가 삼백 년 동안 분신처럼 지니고 다니던 보물이오. 선비가 나에게 베푼 은혜는 이깟 방망이 하나로 갚을 수 있는 것이 아니나, 당장의 굶주림은 면하게 해줄 것이오. 방망이를 세 번 바닥에 두드리며 원하는 것을 말하시오. 금은보화든, 따뜻한 쌀밥이든 무엇이든 내어줄 것이오."
선비는 화들짝 놀라 손사래를 쳤다.
"아, 아니오! 나는 그저 다친 이를 도왔을 뿐, 무언가 대가를 바라고 한 일이 절대 아니오. 이 귀한 것을 어찌 내가 감히 받는단 말이오. 당장 거두어 가시게!"
그러나 도깨비는 허허허 호탕하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도깨비는 한 번 내뱉은 말은 절대 거두지 않는 법이오. 선비, 내 선비의 그 맑고 곧은 심성에 깊이 감복했소이다. 하지만 세상 인심이 그리 호락호락하지만은 않은 법. 선비가 착하게만 산다고 해서 사람들이 알아주지는 않을 것이오. 이 방망이로 억눌렸던 팔자를 쫙 펴고, 배를 주리는 이웃이 있다면 선비처럼 그들에게도 따뜻한 메밀묵 한 그릇 내어주며 사시구려."
도깨비는 말을 마치자마자 마치 연기처럼 스르르 허공으로 흩어지기 시작했다.
"도, 도깨비님! 아직 내 인사도 제대로 못 하였거늘!"
선비가 다급하게 손을 뻗었지만, 방 안에는 이미 도깨비 특유의 짙은 누룩 냄새만 희미하게 남아있을 뿐, 흔적도 없이 사라진 뒤였다. 오직 방바닥에 놓인 기이한 나무 방망이만이 간밤의 일이 꿈이 아니었음을 증명하고 있었다. 선비는 멍하니 도깨비가 사라진 허공을 바라보다가, 조심스럽게 그 방망이를 손에 쥐었다. 나무로 된 방망이에서는 방금 쑤어낸 메밀묵처럼 따뜻한 온기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 5: 밤마다 쏟아지는 금은보화
손에 쥐어진 기이한 나무 방망이에서는 방금 전 아궁이에서 갓 꺼낸 구들장처럼 따스한 온기가 맥박 뛰듯 규칙적으로 흘러나오고 있었다. 선비는 홀린 듯 멍한 눈으로 그 방망이의 거친 표면을 쓰다듬으며 한참을 그 자리에 우두커니 앉아 있었다. 십 년이라는 길고 긴 세월 동안 반복된 과거 낙방, 그리고 뼈를 깎는 듯한 굶주림과 모진 설움이 마침내 자신의 가엾은 정신마저 완전히 무너뜨려 허깨비를 만들어낸 것은 아닐까 하는 의심도 들었다. 하지만 거칠고 투박한 손바닥을 타고 전해지는 단단한 나무의 질감과 뾰족하게 솟아오른 혹들의 생생한 감촉은, 이것이 결코 부서지기 쉬운 환상이나 꿈이 아님을 분명하게 말해주고 있었다.
바로 그때, 밤새도록 사경을 헤매는 도깨비를 간호하느라 잠시 잊고 있었던 지독한 허기가 다시금 선비의 비어버린 위장을 무자비하게 쥐어짜기 시작했다. 핑 돌며 눈앞이 샛노랗게 변하고, 극심한 현기증이 일어 당장이라도 차가운 방바닥에 풀썩 쓰러질 지경이 되자, 선비는 조심스럽게, 그러나 단호한 손길로 도깨비 방망이를 고쳐 쥐었다.
'그래, 어차피 더 잃을 것도 없는 밑바닥 인생 아니더냐. 밑져야 본전이지. 그토록 영험해 보이는 도깨비님이 나 같은 촌부 하나를 조롱하려고 이리 귀한 물건을 일부러 두고 가실 리가 만무하다. 나를 향해 흘리던 그 맑고 슬픈 눈물, 진심이 담긴 목소리를 나는 똑똑히 듣고 보았으니 말이다.'
선비는 크게 심호흡을 한 번 하여 요동치는 가슴을 진정시키고는, 미세하게 떨리는 두 손으로 방망이를 번쩍 들어 올려 흙먼지가 날리는 차가운 방바닥을 향해 천천히, 그리고 힘차게 세 번 내리쳤다.
쿵! 쿵! 쿵!
무겁고 둔탁한 나무 마찰음이 고요한 새벽의 방 안을 묵직하게 울렸다.
"이보게 방망이! 내 당장 숨이 넘어갈 듯 배가 고프니, 하얀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따뜻한 이팝나무 쌀밥에 진한 고깃국, 그리고 맛깔스러운 반찬들이 상다리가 부러지도록 차려진 진수성찬을 내어 주시게!"
간절한 주문이 입 밖으로 떨어지기가 무섭게, 방 안의 차가웠던 공기가 기이하게 일렁이기 시작했다. 어디선가 코끝을 강렬하게 자극하는 향긋하고 고소한 참기름 냄새와 구수한 밥 냄새가 훅 끼쳐오더니, 선비의 퀭한 눈앞 허공에서 태양보다 눈부신 황금빛 무리가 폭포수처럼 쏟아져 내렸다. 너무나 눈이 부셔 질끈 감았던 두 눈을 조심스레 다시 떴을 때, 빛이 스르르 걷히며 텅 비어있던 썰렁한 구들장 위에는 도저히 믿을 수 없는 환상적인 광경이 펼쳐져 있었다.
최고급 자개 밥상 위에는, 금방 가마솥에서 퍼내어 윤기가 자르르 흐르는 새하얀 쌀밥이 고봉으로 담겨 있었고, 굵직한 파가 듬뿍 들어가 뽀얗게 우러난 진한 사골 고깃국이 김을 뿜어내고 있었다. 겉은 바삭하고 속은 촉촉하게 구워진 어른 팔뚝만 한 굴비 두 마리, 입맛을 돋우는 매콤한 더덕구이, 참기름에 무쳐낸 각종 제철 나물들, 그리고 궁중에서나 맛볼 법한 갈비찜까지 열두 첩 반상이 떡하니 놓여 있는 것이 아닌가!
선비는 자신의 두 눈을 의심하며 눈을 비비고 또 비볐다. 그러나 아무리 비벼보아도 그것은 꿈이 아니었다. 코를 찌르는 진한 음식 냄새와 얼굴을 감싸는 따뜻한 온기는 분명 현실이었다. 덜덜 떨리는 손으로 묵직한 은수저를 들어 올린 선비는, 가장 먼저 뽀얀 고깃국물을 한 입 가득 떠서 입술로 가져갔다. 진하고 고소한 고기 육수가 마른 식도를 타고 뜨겁게 넘어가는 순간, 십 년 동안 꽁꽁 얼어붙어 있던 오장육부가 사르르 녹아내리는 기분이었다.
"흐흑... 으흐흐흑... 끄윽..."
목구멍으로 밥과 국을 정신없이 밀어 넣던 선비의 움푹 파인 두 눈에서, 마침내 참았던 뜨거운 눈물이 왈칵 쏟아져 내렸다. 십 년이라는 세월 동안 찬물 한 그릇으로 주린 배를 채우던 서러웠던 숱한 밤들, 부모님 제사상에 올릴 술 한 잔 살 돈조차 없어 무덤 앞에서 피눈물을 삼켰던 불효자의 끔찍한 죄책감, 동네 사람들의 멸시 섞인 시선들이 따뜻한 국물과 함께 씻겨 내려가는 듯했다. 밥알을 씹을 때마다 쏟아지는 뜨거운 눈물을 소맷자락으로 연신 훔쳐내며, 선비는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식사를 그릇 바닥이 뚫어질 기세로 싹싹 긁어 비워냈다.
배를 든든히 채우고 나자, 선비의 시선은 다시금 도깨비 방망이로 향했다.
'이 신묘한 조화의 물건만 있으면 나 혼자 평생 호의호식하며 살 수 있을 것이다. 기와집을 짓고 비단옷을 입으며 나를 비웃던 마을 자들에게 보란 듯이 콧대를 세울 수도 있겠지. 허나... 도깨비님은 분명히 당부하셨다. 배를 주리는 이웃이 있다면 그들에게도 온정을 내어주며 살라고. 그것이 바로 나에게 이 귀한 방망이를 맡긴 진짜 이유일 터이다.'
그날 밤부터, 조용하던 산골짜기 오두막에서는 선비의 기묘하고도 분주한 이중생활이 시작되었다. 야심한 밤이 되면, 선비는 방 안에서 문을 꼭꼭 걸어 잠그고 방망이를 바닥에 두드려 금은보화와 쌀가마니를 불러내었다. 쿵쿵쿵! 경쾌한 타격음과 함께 방 안을 채우며 쏟아지는 엄청난 재물들을 보며 선비는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그는 그 귀한 재물을 자신을 위해 단 한 푼도 쓰지 않았다.
그는 어두운 밤길을 나서, 낡고 삐걱거리는 지게 위에 무거운 쌀가마니와 엽전 꾸러미들을 잔뜩 싣고 조심스레 마을로 내려갔다. 그러고는 자신을 매섭게 비웃던 김 서방의 집 사립문 앞에 몰래 쌀 한 가마니를 툭 내려놓았다. 땔감조차 구하지 못해 굶주림에 떠는 이 과부의 마당에는 비단 두루마기와 엽전을 조용히 놓아두었다. 병든 노모를 모시며 약첩 하나 지어 먹일 돈이 없던 박 영감의 툇마루 위에도 귀한 산삼 한 뿌리와 은덩이를 올려두고는 마법처럼 사라졌다.
다음 날 아침, 산 아래 마을은 발칵 뒤집히고 말았다. 하늘에서 벼락처럼 재물이 뚝 떨어졌다며, 집집마다 감격에 겨워 오열하는 소리와 하늘이 떠나갈 듯한 웃음소리가 울려 퍼졌다.
"아이고, 천지신명님! 버림받은 백성을 굽어살피시어 이런 기적을 내려주셨단 말입니까!"
"도대체 어느 천사 같고 고마운 분이 이런 은혜를 베푸셨을꼬! 우리 아이가 이제 굶지 않게 되었네!"
마을 사람들은 골목에 뛰쳐나와 기쁨의 눈물을 펑펑 쏟아냈다. 비록 며칠 전까지만 하더라도 선비를 헐뜯고 비웃기 바빴던 매정한 그들이었지만, 선비의 마음속에는 분노보다는 '가난'이 만들어낸 사람들의 모난 마음을 이해하는 넉넉한 포용력이 자리 잡고 있었다. 마당에 모여 덩실덩실 춤을 추고 환하게 웃는 마을 사람들의 모습을 흐뭇하게 지켜보며, 선비는 진정한 행복과 부유함은 탐욕이 아닌 함께 나누는 따뜻한 온기 속에 존재한다는 것을 온 마음으로 깨닫고 있었다.
※ 6: 배 아픈 이웃들의 음흉한 계략
하지만 빛이 눈부시게 강렬할수록 이면에 드리워지는 그림자 또한 짙고 어두워지는 법. 절망에 허덕이던 가난한 산골 마을에 웃음꽃이 피어나자, 온 마을에서 단 한 사람만은 원인 모를 극심한 배앓이를 하며 밤잠을 설치고 있었다. 그는 마을에서 가장 비옥한 논밭을 독차지하고, 가난한 이웃들에게 고리로 곡식을 빌려주며 피땀 어린 땅문서까지 빼앗던 피도 눈물도 없는 최 부자였다.
최 부자는 며칠 전부터 마을 사람들의 분위기와 행색이 기묘하게 돌아가는 것을 뱀처럼 날카로운 눈초리로 눈치채고 있었다. 보릿고개가 코앞인데도 곡식을 빌리러 오는 자가 없었고, 오랫동안 밀려있던 빚을 갚겠다며 번쩍이는 은덩이와 엽전 꾸러미를 들고 찾아오는 사람들까지 줄을 이었다. 심지어 거지꼴을 면치 못하던 자들이 번듯한 비단옷을 지어 입고 거드름을 피우기 시작하니, 평생 남의 불행을 양분 삼아 살아온 최 부자로서는 도무지 용납할 수 없는 노릇이었다.
"이게 도대체 무슨 해괴망측한 조화란 말이냐! 다 죽어가며 흙이나 파먹던 거지 떼들이 금광이라도 무더기로 발견했단 말이냐? 당장 마을을 뒤져서 저것들이 어디서 재물을 구했는지 낱낱이 알아오너라!"
최 부자의 불호령에 하인들이 몽둥이를 들고 온 마을을 샅샅이 뒤지고 다녔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엄청난 재물들이 모두 산 밑 다 쓰러져가는 초가집에 사는 가난한 낙방 선비의 집에서 밤마다 쏟아져 나온다는 소문을 물어왔다. 최 부자는 어이가 없다는 듯 코웃음을 쳤다.
"뭐라? 십 년 동안 과거에 낙방한 그 샌님 반쪽이 놈이 재물을 나눠준다고? 지나가던 소가 웃을 헛소리다! 필시 무슨 요사스러운 수작을 부리는 것이 틀림없다. 내 이대로 두고 볼 수는 없지. 오늘 밤 내가 직접 그 꼬락서니를 확인해야겠다!"
그날 밤, 최 부자는 하인 두 명을 대동하고 고양이처럼 소리 없이 선비의 초가집 밖으로 숨어들었다. 숨을 죽이고 찢어진 문풍지 틈으로 방 안의 동태를 엿보던 최 부자의 두 눈은 튀어나올 듯이 부릅떠지며 입이 떡 벌어졌다.
비좁고 초라한 방 안에서는, 선비가 기이하게 생긴 나무 방망이를 바닥에 쿵쿵 소리 나게 내리치고 있었다. 그런데 방망이가 바닥에 닿을 때마다, 놀랍게도 허공에서 눈부시게 번쩍이는 은정자와 엽전 꾸러미, 쌀가마니가 폭포수처럼 쏟아져 내리는 것이 아닌가! 눈앞에서 벌어지는 마법에 최 부자는 숨쉬는 것조차 잊어버릴 지경이었다.
'도, 도깨비 방망이다! 무엇이든 뚝딱 만들어낸다는 전설의 도깨비 방망이가 분명하다! 저런 어마어마한 천하의 보물을 저따위 샌님 놈이 굴리고 있었다니. 저것만 내 손에 들어온다면, 나는 이 조선 팔도에서 제일가는 거부가 될 수 있어!'
최 부자의 검은 심장은 끝없는 탐욕으로 미친 듯이 요동쳤다. 그는 서둘러 집으로 돌아와서는 그 신비한 방망이를 훔쳐내기 위한 은밀하고도 음흉한 계략을 꾸미기 시작했다. 선비가 깊이 잠든 틈을 타 몰래 숨어들어가 방망이만 쏙 빼내어 훔쳐 오기로 모의를 한 것이다.
한편, 낡은 초가집에서 책을 읽고 있던 선비는 타고난 총명함으로 밖에서 바스락거리는 수상한 발소리와 거친 숨소리를 이미 눈치채고 있었다. 선비는 조용히 책장을 넘기는 척하며 슬쩍 창호지 밖을 살폈고, 탐욕으로 번뜩이는 시뻘건 눈동자들이 어둠 속에서 자신을 관찰하고 있는 것을 단번에 알아챘다.
'결국 재물의 달콤한 냄새를 맡고 시궁창 똥파리들이 꼬이기 시작했구나. 보나 마나 저들은 평생 마을의 고혈을 빨아먹고 사는 최 부자 일당일 터. 내가 저들을 힘으로 막아낼 수는 없겠으나, 그렇다고 호락호락하게 눈 뜨고 코 베일 어리석은 선비도 아니지.'
선비는 태연하게 일어나 부엌 옆 헛간으로 향했다. 땔감 중에서 가장 옹이가 굵고 단단한 참나무 장작 하나를 골라내어 낫과 단도를 들고 다듬기 시작했다. 선비는 기억력을 더듬어, 진짜 도깨비 방망이와 소름 끼치도록 똑같은 크기와 모양으로 단단한 참나무를 깎고 또 깎아내었다. 오돌토돌하게 솟아오른 기괴한 혹들까지 장인의 손길처럼 정교하게 조각한 뒤, 아궁이 속의 시꺼먼 숯덩이와 진흙을 발라 수백 년 동안 도깨비의 손때가 묻어 닳고 닳은 물건처럼 완벽하게 위장시켰다.
선비는 정교하게 만든 그 가짜 방망이를 방 안에서 가장 잘 보이는 반닫이 장롱 위에 보란 듯이 턱 하니 올려두었다. 그리고 목숨보다 귀한 진짜 도깨비 방망이는 천장 구석, 쥐들만이 들락거리는 시커먼 쥐구멍 깊숙한 곳에 밀어 넣었다.
'자, 어디 한번 훔쳐 가볼 테면 훔쳐 가보시지. 탐욕으로 두 눈이 멀어버린 자들에게는, 그 추악한 욕심에 걸맞은 아주 혹독한 대가가 주어지는 것이 세상의 이치니까 말이다.'
선비가 이부자리를 펴고 누워 깊은 잠에 빠진 척 코를 골며 연기를 시작한 지 한 시진쯤 지났을까. 쇳소리가 나며 문고리가 조심스럽게 돌아갔다. 검은 복면을 쓴 최 부자의 하인 두 명이 살쾡이처럼 방 안으로 숨어들었다. 그들의 야비한 눈동자는 순식간에 반닫이 위에 위풍당당하게 놓인 숯칠을 한 가짜 방망이를 발견했다. 그들은 횡재했다는 듯 환희에 찬 눈빛을 교환하며 방망이를 낚아채 품에 품고는 다시 칠흑 같은 어둠 속으로 쏜살같이 사라졌다. 방 한가운데 누워 실눈을 뜨고 지켜보던 선비의 입가에 통쾌하고도 싸늘한 미소가 번졌다. 탐욕스러운 자들을 향한 진짜 반격은 바로 지금부터가 시작이었다.
※ 7: 선비의 묘수, 도깨비 방망이의 심판
선비의 낡은 초가집에서 무사히 가짜 방망이를 훔쳐낸 하인들은 득의양양한 발걸음으로 허겁지겁 최 부자의 기와집으로 돌아왔다. 커다란 빈 창고에서 초조하게 기다리던 최 부자는 시커먼 방망이를 건네받자마자 이성을 잃고 미친 듯이 환호성을 내질렀다.
"하하하! 드디어! 이 전설의 보물이 천하의 최 부자 내 손에 들어왔구나! 이제 조선 팔도의 모든 재물은 다 내 발밑에 조아릴 것이다!"
최 부자는 가짜 방망이를 양손으로 꽉 움켜쥐고는, 창고가 터져나갈 듯한 목소리로 핏대를 세우며 소리쳤다.
"금나라 뚝딱! 은나라 뚝딱! 창고가 터져나갈 만큼 어마어마한 금은보화를 당장 내 눈앞에 쏟아내거라!"
그는 탐욕에 젖은 눈을 부릅뜨고 가짜 나무 방망이를 딱딱한 돌바닥에 미친 듯이 쾅! 쾅! 쾅! 내리쳤다. 하지만 기대했던 찬란한 빛이나 엽전 쏟아지는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그저 둔탁한 나무 부딪히는 소리와 함께 바닥의 흙먼지만 폴폴 날릴 뿐, 숨 막히는 정적만이 창고 안을 감돌았다.
"이, 이게 어찌 된 영문이냐? 내가 주문을 잘못 외운 것인가!"
당황한 최 부자는 호흡을 가다듬고 이마에 시퍼런 핏대를 세우며, 온몸의 체중을 실어 다시 한번 젖먹던 힘까지 쥐어짜 방망이를 내리쳤다.
"빠지직- 뚝!"
아뿔싸! 최 부자의 과도한 힘을 이기지 못한 탓인지 가짜 참나무 방망이가 그만 두 동강으로 보기 좋게 부러져 버리고 말았다. 쩍 하고 갈라진 단면 사이로는 도깨비의 손때는커녕 뽀얗고 촉촉한 생나무의 속살이 훤히 드러났다. 자신이 평소 무시하던 선비에게 완벽하게 속아 넘어갔다는 사실을 깨달은 최 부자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 달아올랐다.
"이... 발칙하고 요망한 놈! 감히 이 최 부자를 능멸해? 여봐라! 당장 마당에 있는 장정들을 몽조리 깨워 몽둥이와 횃불을 들려라! 저놈의 집구석을 쑥대밭으로 만들고 진짜 방망이를 찾아내어 숨통을 끊어 놓으리라!"
최 부자는 이십여 명의 건장한 장정들을 이끌고 횃불을 높이 든 채 선비의 초가집으로 살기등등하게 들이닥쳤다. "우당탕탕! 콰직!" 힘없는 낡은 사립문이 박살 났고, 수십 개의 횃불이 어두운 마당을 대낮처럼 환하게 밝혔다. 소란에 깬 마을 사람들도 겁에 질린 표정으로 웅성거리며 모여들었다.
"이놈! 간악한 선비 놈아! 당장 그 방에서 무릎 꿇고 기어 나오지 못할까!"
최 부자가 악을 쓰며 고함을 지르자 방문이 열렸다. 머리에 정갈하게 갓을 쓰고 단정한 도포 차림을 한 선비가 여유로운 걸음걸이로 걸어 나왔다. 선비의 오른손에는 그토록 최 부자가 갈망하던 진짜 도깨비 방망이가 흔들림 없이 쥐어져 있었다.
"야심한 새벽에 남의 집 대문을 거칠게 부수고 몰려 들어오다니, 양반으로서 참으로 부끄러운 짓을 하고 계시는구려. 어찌, 방망이가 부러져 다치기라도 하셨소?"
"닥쳐라! 네놈이 요사스러운 물건으로 마을 사람들을 홀리고 나를 속인 죄를 엄히 묻겠다! 네 목숨이 아깝거든 당장 그 손에 든 진짜 방망이를 내 발밑에 바쳐라!"
선비는 전혀 당황하는 기색 없이 호탕하게 웃으며 진짜 도깨비 방망이를 그의 눈앞으로 쑥 내밀었다.
"원하신다면 까짓것 기꺼이 내어 드리리다. 허나, 명심해야 할 것이 있소. 이 신묘한 물건은 도깨비님의 깊은 은혜가 깃든 성물이오. 주인이 아닌 자, 특히 타인의 고혈을 빠는 탐욕에 찌든 도둑이 두드리며 사리사욕을 탐하면 무시무시한 도깨비의 심판이 내려질 것이오. 그래도 감당하시겠소?"
최 부자는 콧방귀를 세게 뀌며 선비의 손에서 거칠게 방망이를 낚아챘다.
"하! 그런 얄팍한 거짓말에 두 번 속을 줄 아느냐! 내 당장 이 마당에서 금덩이를 산처럼 뽑아내어, 네놈의 콧대를 납작하게 꺾어주마!"
최 부자는 마을 사람들과 하인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승리감에 도취되어 진짜 도깨비 방망이를 하늘 높이 치켜들었다.
"금덩이야 쏟아져라! 은덩이야 쏟아져라! 천하의 재물은 다 최 부자의 품으로 들어오너라!"
쾅-! 방망이가 바닥에 닿는 순간이었다.
갑자기 밤하늘에 먹구름이 들이닥치며 거대한 회오리바람이 무섭게 휘몰아쳤다. 장정들이 들고 있던 횃불의 불길들이 일제히 유령 같은 푸른빛으로 변하며 매섭게 흔들렸고, 공기 중으로는 숨쉬기 힘들 정도로 지독한 누룩 냄새가 확 퍼져나갔다.
"크하하하! 이 썩은 내 나는 인간아! 감히 나의 은인의 물건을 도둑질하고 무사할 줄 알았더냐!"
허공에서 천둥처럼 쩌렁쩌렁한 도깨비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동시에 최 부자의 손에 쥐어져 있던 방망이가 살아있는 생명체처럼 허공으로 솟구쳐 오르더니, 펑! 하는 굉음과 함께 수백 개의 방망이 환영으로 쪼개지며 하늘을 새까맣게 뒤덮었다.
"퍽! 퍽! 퍼버벅!"
"아이고! 뼈 부러진다! 사람 살려!"
허공을 날아다니는 수백 개의 방망이들이 융단폭격을 하듯 최 부자와 하인들의 등짝과 엉덩이를 사정없이 후려치기 시작했다. 투명한 도깨비 수백 명에게 흠씬 두들겨 맞는 꼴이었다. 타격음은 경쾌하고도 살벌했다. 최 부자 일당은 혼비백산하여 비명을 지르며 흙먼지 날리는 마당을 짐승처럼 뒹굴었다. 아무리 도망치려 해도 방망이들은 집요하게 쫓아가며 타격음을 냈다. 마을 사람들은 악당들이 두들겨 맞는 통쾌한 광경에 십 년 묵은 체증이 내려가는 듯 환호했다.
"아이고! 선비님! 제가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제발 저 방망이 좀 멈춰 주십시오! 살려주십시오!"
머리통이 퉁퉁 붓고 비단옷이 걸레짝이 된 최 부자가 콧물과 눈물을 흘리며 선비의 발밑에 납작 엎드려 싹싹 빌기 시작했다. 선비는 차갑게 내려다보다가 천천히 오른손을 들어 올렸다. 그 순간 몽둥이찜질을 하던 수백 개의 방망이는 거짓말처럼 동작을 멈추고 하나의 본래 모습으로 합쳐져 선비의 손안에 얌전하게 안착했다.
"최 부자. 재물은 고이면 썩어 지독한 악취를 풍기며 주인의 영혼까지 병들게 하는 법이오. 당신의 끝없는 탐욕이 오늘 이 무서운 심판을 스스로 부른 것이오. 당장 집으로 돌아가 썩어가는 그 수많은 곡식들을 가난하고 굶주린 이웃들에게 남김없이 나누어 주시오. 그리하지 않는다면 내일 밤엔 도깨비님들이 직접 당신의 안방을 찾아갈 것이니 명심하시오."
최 부자는 사시나무 떨듯 덜덜 떨며 앓는 소리를 내는 하인들에게 업혀 부리나케 도망을 쳤다. 다음 날 아침, 최 부자의 집 앞 대문 밖에는 그가 평생 긁어모았던 쌀가마니와 옷감들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고, 빚을 졌던 사람들의 땅문서는 모두 불태워져 재가 되어 있었다.
그 후로 지혜롭고 따뜻한 선비는 마을 한가운데 크고 반듯한 서당을 지었다. 그리고 가난하여 글을 배우지 못하는 아이들을 거두어 무료로 천자문과 도리를 가르쳤다. 그는 평생 아이들의 낭랑한 글 읽는 소리를 들으며 존경받는 스승으로 남은 여생을 행복하게 보냈다. 물론,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캄캄한 밤이 오면 선비는 어김없이 구수하고 찰진 메밀묵을 가득 쑤어 아랫목에 놓아두었다. 자신을 가난에서 구해주고 진정한 나눔을 알려준 덩치 큰 오랜 벗을 다정하게 맞이할 준비를 잊지 않으면서 말이다.
유튜브 엔딩멘트
이야기 잘 들으셨나요? 십 년의 실패 앞에서도 따뜻한 마음을 잃지 않은 선비가 흉측한 도깨비에게 베푼 메밀묵 한 그릇이 이렇게 큰 기적을 불러왔습니다. 욕심을 부리던 최 부자가 혼쭐이 나는 통쾌한 장면에선 묵은 체증이 다 내려가셨지요? 재물보다 귀한 것은 나누는 마음이라는 걸 깨닫게 해주는 이야기였습니다. 오늘 이야기가 즐거우셨다면 '구독'과 '좋아요' 꾹 눌러주시고, 따뜻한 마음 나누는 평안한 밤 보내시길 바랍니다. 다음에도 재미있는 야담으로 찾아뵙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