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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깨비를 만나 행복해진 사람 『청월야승(淸月野乘)』
과부와 함께 살게된 도깨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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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킹멘트
"어느 깊고 추운 겨울밤, 홀로 남겨진 외로운 과부의 집 문을 두드리는 서러운 울음소리가 들려왔습니다. 문을 열어보니 그곳엔 덩치 큰 도깨비가 오들오들 떨고 있었지요. 사람과 도깨비의 기막힌 동거가 시작되고, 도깨비가 제일 좋아하는 '메밀묵' 한 사발에 금은보화가 쏟아지며 부자가 된 과부! 갈 곳 없는 고아들을 자식으로 품으며 진정한 가족의 온기를 만들어가는 가슴 뭉클한 이야기 속으로 함께 들어가 보시죠."
※ 1: 적막한 산골짜기, 외로움과 싸우는 과부의 기나긴 밤
해가 뉘엿뉘엿 헐벗은 산등성이를 넘어가고, 매서운 북풍이 얼어붙은 골짜기를 타고 미친 듯이 몰아쳐 내려오면, 이 깊고 깊은 산골 마을의 밤은 그 어느 곳보다도 일찍, 그리고 혹독하게 찾아옵니다. 사람들의 따뜻한 온기가 드문드문 이어지는 마을 중심부에서도 한참을 비껴나, 가장 후미지고 인적이 드문 외진 곳. 당장이라도 쓰러질 듯 산자락 끝에 위태롭게 매달려 있는 낡은 초가집 한 채가 있었습니다. 그곳에는 젊은 나이에 돌림병으로 다정했던 남편을 일찍 여의고,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피붙이 자식 하나 없이 십수 년의 세월을 철저히 홀로 살아온 여인이 있었습니다. 마을 사람들은 그녀를 박씨 부인이라 불렀습니다.
부인은 낮이면 남의 집 밭일이며 삯바느질, 거친 길쌈을 거들며 자신의 뼈가 으스러져라 일했습니다. 고된 노동으로 몸을 지치고 혹사시켜야만 밤에 찾아오는 끔찍한 고독을 조금이나마 잊을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해가 지고 칠흑 같은 어둠이 깔려 텅 빈 집으로 돌아오면, 뼛속까지 스며드는 서늘한 고독은 도무지 익숙해지지가 않았습니다. 찬 바람이 너덜너덜해진 문풍지를 예리한 칼날처럼 베고 지나가는 기나긴 겨울밤이면, 부인은 얼음장 같은 방바닥에 우두커니 앉아 희미하게 흔들리는 호롱불 아래서 해진 저고리를 깁고 또 기었습니다. 방 안의 자리끼가 꽁꽁 얼어붙을 정도로 지독하게 추운 밤이었습니다.
'오늘도 이렇게 허망하고 쓸쓸하게 하루가 저무는구나. 산 사람 목숨이니 아궁이에 불기 하나 없는 냉방에서도 억지로 밥술이야 넘기고 산다마는, 이리도 넓고 적막한 세상천지에 피붙이 하나 없이 내 마음 하나 온전히 기댈 곳이 없으니, 참으로 덧없고 서글픈 노릇이로다. 내일 당장 이 낡은 방구석에서 언 손을 쥐고 홀로 숨을 거둔다 한들, 며칠 동안은 아무도 내 죽음을 알지 못하겠지.'
바늘귀를 꿰던 거칠고 튼 손을 잠시 멈추고, 부인은 땅이 꺼질 듯 깊고 긴 한숨을 내쉬었습니다. 차가운 방바닥에서 뱀처럼 기어 올라오는 짙은 냉기가 얇디얇은 무명 버선을 뚫고 부인의 마른 온몸을 무자비하게 휘감았습니다. 남편이 살아있었더라면, 아니 내 배 아파 낳은 자식이라도 단 하나 곁에 있었더라면, 험한 산을 뒤져서라도 아궁이에 땔감을 넉넉히 때어 방을 절절 끓게 덥혔으련만. 홀로 된 여인의 가냘픈 힘으로 눈 덮인 험한 산을 타며 한겨울 장작을 구하는 것은 여간 고되고 위험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저 밤새 얼어 죽지 않을 만큼만 주워 온 솔가지로 찔끔찔끔 군불을 지피고, 오랜 세월 덮어 솜이 다 죽어 납작해진 무거운 이불 하나에 웅크린 채 의지하여 이 길고 잔인한 밤을 지새우는 것이 부인의 변함없는 형벌 같은 일상이었습니다. 창호지에 어리는 앙상한 감나무 가지의 그림자가 마치 저승사자의 야윈 손짓처럼 흔들렸습니다. 부인은 애써 두려운 시선을 거두고 다시 바느질에 집중하려 안간힘을 썼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때였습니다.
"스윽... 스으윽... 긁적..."
숨 막히는 적막을 깨고 마당 한구석에서 무언가 거친 바닥을 긁는 듯한 기이하고 소름 끼치는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한겨울 굶주림에 지친 멧돼지나 늑대 같은 산짐승이 먹이를 찾아 민가로 내려온 것일까 싶어, 부인은 일순간 숨을 죽이고 온 신경을 곤두세워 귀를 기울였습니다. 하지만 방문 앞 댓돌 위를 서성이는 여느 짐승들의 가볍고 날렵한 발소리와는 차원이 달랐습니다. 무언가 상상할 수 없을 만큼 아주 거대하고 육중한 덩어리가 바닥을 둔탁하게 기어 다니는 듯한 몹시 무거운 마찰음이었습니다. 부인의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습니다.
"흐으윽... 흑... 어흐흑... 끄윽..."
이번에는 낮고 탁한, 그러나 분명히 무언가가 서럽게 통곡하는 소리가 쩡쩡 얼어붙은 밤공기를 날카롭게 가르고 들려왔습니다. 간장을 도려내고 뼈를 깎아내는 듯한, 세상의 모든 슬픔을 다 짊어진 듯한 애절하고 비통한 울음소리였습니다. 부인은 순간 등줄기를 타고 식은땀이 주르륵 흐르며 온몸의 솜털이 쭈뼛 서는 것을 느꼈습니다. 깊은 산속, 이웃조차 먼 홀로 사는 여인에게 한밤중의 정체 모를 짐승도 사람도 아닌 울음소리만큼 두려운 것은 없었으니까요. 바늘을 방바닥에 내려놓고 덜덜 떨리는 손으로 문고리를 꽉 쥔 채 부인은 몸을 한껏 웅크렸습니다.
'산도적 떼일까? 아니면 사람을 잡아먹는다는 굶주린 늙은 호랑이? 그것도 아니면 혹여... 원한을 품고 억울하게 죽은 몽달귀신이나 원귀라도 구천을 헤매다 이 외딴집까지 찾아와 곡을 하는 것일까?'
심장이 터질 듯 쿵쾅거려 숨조차 제대로 쉴 수 없었지만, 문에 귀를 바짝 대고 가만히 들어보니 그 통곡 소리에는 사람의 목숨을 해치려는 흉악한 살기나 무서운 원귀의 기운은 전혀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 짐승 같은 거친 울음소리는, 부인 자신이 지난 십수 년간 수없이 지새웠던 지독히도 외로운 밤, 차가운 이불을 뒤집어쓰고 남몰래 소리 죽여 짐승처럼 삼켰던 그 참담한 눈물의 소리와 뼛속 깊이 너무나도 닮아 있었습니다. 세상천지에 철저히 버림받아 갈 곳조차 없는 자의 막막한 절망, 살을 에는 추위보다 더 무서운 뼈에 사무치는 지독한 고독이 그 거친 울음소리 마디마디에 고스란히 배어 흐르고 있었습니다. 나를 해치려는 적이 아니라는 직감이 들자, 공포와 두려움보다 먼저 동병상련의 깊은 측은지심이 부인의 가슴 깊은 곳에서 아련하고 뜨겁게 꿈틀거렸습니다. 부인은 조심스레, 아주 천천히 얼어붙은 자리에서 일어났습니다.
'짐승이든 귀신이든 흉측한 요물이든 간에, 이리도 살을 예리하게 도려내는 끔찍하게 추운 밤에 저리도 서럽게 목놓아 운다는 것은, 그만큼 가엾고 한 맺힌 불쌍한 존재라는 뜻이겠지. 내 비록 가진 것 하나 없는 늙고 미천한 몸에 여자 혼자 목숨을 부지하고 사는 집이라 하나, 내 집 문 밖에서 저토록 처절하게 떨고 있는 가여운 생명을 모른 체하고 나 홀로 이불속에 숨는 것은 사람의 도리가 아니다.'
마음을 굳게 다잡은 부인은 덜덜 떨리는 두 손으로 차가운 쇠 문고리를 꽉 잡고 조심스레 자기 쪽으로 당겼습니다. 녹슨 낡은 경첩이 날카롭게 삐걱거리는 마찰음을 내며 방문이 조금씩 열렸습니다. 문틈이 벌어지자마자 훅 하고 거칠게 밀려드는 매서운 한겨울 눈바람에 방 안의 가냘픈 호롱불이 파르르 떨리며 당장이라도 꺼질 듯 맹렬하게 요동쳤습니다. 부인은 방 안의 빛이 새어 나가는 문틈을 등지고 서서, 어두컴컴한 마당 쪽을 향해 조심스럽지만 꼿꼿하고 분명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습니다.
"거기 뉘시오...? 이 늦고 험한 밤, 인적조차 드문 이리도 춥고 외진 산골짜기까지 찾아와 그리 서럽게 땅을 치며 우는 이가 대체 뉘시란 말이오? 뉘신지 모르나 이리 얼굴을 내미시구려."
눈보라가 흩날리는 칠흑 같은 어둠이 짙게 깔린 마당, 그 앙상하고 비틀어진 감나무 아래에 커다란 집채만 한 검은 바위 같은 그림자 하나가 웅크리고 있었습니다. 부인의 다정한 목소리에 그 거대한 그림자가 흠칫 놀라 움찔하더니, 서서히 굽은 등과 고개를 들어 올렸습니다. 어둠 속에서 푸르스름하게 번쩍이는, 커다란 등불 같은 두 개의 눈동자가 방문 앞에 선 부인을 똑바로 향하고 있었습니다.
※ 2: 문 밖에서 들려오는 울음소리, 낯선 도깨비와의 만남
먹구름 사이를 힘겹게 뚫고 나온 차갑고 창백한 겨울 달빛이 희미하게 마당에 내려앉자, 부인은 앙상한 감나무 아래에 몸을 웅크리고 있던 거대한 그림자의 정체를 두 눈으로 똑똑히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그것은 단연코 이 세상의 평범한 사람이나 흔한 산짐승이 아니었습니다. 건장한 장정 서넛은 족히 합쳐놓은 듯 산처럼 거대하고 위압적인 체구에, 헝클어진 머리 한가운데에는 나무뿌리처럼 뭉툭하고 투박한 뿔이 하나 우뚝 솟아 있었습니다. 온몸에는 겨울 곰처럼 뻣뻣하고 덥수룩한 털이 빈틈없이 빽빽하게 덮여 있었고, 다 해진 넝마 조각을 간신히 허리에 두르고 있었습니다. 부리부리하게 찢어진 커다란 눈과 귀밑까지 쩍 벌어진 두꺼운 입술, 그리고 그 사이로 언뜻언뜻 비치는 날카로운 송곳니는 영락없이 사람을 잡아먹는다는 옛이야기 속 무시무시한 괴물의 흉측한 얼굴을 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토록 소름 끼치게 두려운 외모에도 불구하고, 한참을 조심스레 들여다보니 그 커다란 짐승 같은 눈망울에서는 닭똥보다 굵은 눈물이 쉴 새 없이 뚝뚝 떨어져 얼어붙은 땅바닥을 적시고 있었습니다. 그 거대한 바위 같은 덩치에 전혀 어울리지 않게, 살을 에는 북풍한설의 추위와 마음속 깊은 서러움에 와들와들, 사시나무처럼 처량하게 떨고 있는 그 낯선 모습은 전설 속에서나 듣던 바로 그 도깨비가 분명했습니다. 상상 속의 무서운 요물인 진짜 도깨비가, 사람을 골탕 먹이기는커녕 자신의 앞마당에 철퍼덕 주저앉아 길 잃은 어린아이처럼 엉엉 소리 내어 울고 있다니, 부인은 숨이 턱 막히고 그 자리에서 굳어버리는 듯했습니다.
"아이고, 깜짝이야...! 너, 네 정체가 대체 무엇이냐? 생김새를 보아하니 사람은 아닌 듯한데, 어찌하여 깊은 밤 사람 사는 민가에 불쑥 나타나 이리도 처량하고 서럽게 울고 있는 것이냐?"
부인은 밀려드는 본능적인 공포에 뒤로 한 걸음 주춤 물러서며 낡은 치맛자락을 생명줄처럼 꽉 틀어쥐었습니다. 당장이라도 방문을 쾅 닫고 이불속으로 숨어버리고 싶은 심정이었습니다. 하지만 눈앞의 거대한 도깨비는 날카로운 이빨을 흉악하게 드러내며 부인을 해치려 달려들기는커녕, 제 몸집만 한 가마솥 뚜껑 같은 거칠고 두꺼운 두 손으로 연신 더러워진 얼굴의 눈물을 북북 훔쳐내며 가여운 소리로 훌쩍거릴 뿐이었습니다.
"흐으윽... 흑... 놀라게 해 드려 참말로 죄송합니다요, 아주머니. 저는... 저는 이 마을 뒷산 깊은 골짜기에 숨어 사는 도깨비올시다. 결단코 사람을 해치거나 아주머니께 몹쓸 짓을 하려는 것이 아니니, 부디 저를 요물이라 두려워하지 마시고 내쫓지만 말아 주시어요. 흑흑..."
우락부락하고 험상궂기 짝이 없는 생김새와는 너무나도 딴판으로, 도깨비의 목소리는 어딘지 모르게 몹시 어리숙하고, 수줍음이 많으며, 한없이 순박하기 그지없었습니다. 사람을 해칠 악의라고는 털끝만큼도 찾아볼 수 없는 그 애처로운 목소리를 듣자, 빳빳하게 굳었던 부인의 몸이 조금씩 풀리며 이내 이성의 안정을 되찾았습니다. 부인은 문지방을 넘지 않은 채 그 자리에 서서, 마당의 차가운 눈밭에 무릎을 꿇고 있는 도깨비를 찬찬히 살피며 물었습니다.
"네 입으로 산속의 도깨비라 하였느냐? 천하를 호령하며 사람을 훌쩍 뛰어넘는 신통방통한 조화를 부린다는 도깨비가 어찌하여 이리도 슬피 목을 놓아 울고 있단 말이냐? 산이나 들을 제 집처럼 누비며 친구들과 장난도 치고, 흥겹게 춤추며 노는 것이 너희 도깨비들의 즐거운 일상 아니더냐?"
부인의 조심스러운 물음에 도깨비는 마음속 깊은 곳의 서러움이 다시금 화산처럼 왈칵 북받쳐 오르는지, 커다란 어깨를 들썩이며 땅이 푹 꺼져라 깊은 한숨을 내쉬더니 더듬더듬 대답을 이어갔습니다.
"말도 마시어요, 아주머니. 저는 다른 힘센 도깨비들처럼 길가는 사람을 짓궂게 골려먹는 못된 장난도 칠 줄 모르고, 장정들과 씨름을 하여 훌쩍 넘어뜨리는 재주도 쥐뿔이나 없습니다요. 그저 마음씨 착한 사람 곁에 숨어서 사람들이 웃고 떠드는 것을 가만히 구경하며 노는 것을 좋아할 뿐인데... 사람들은 제 이 험악하고 흉측한 겉모습만 보고는 제 마음은 알려고도 하지 않은 채, 지레 겁을 집어먹고 비명을 지르며 몽둥이와 시뻘건 횃불을 들고 저를 짐승 쫓듯 때리며 쫓아내기 일쑤지요. 그렇다고 저를 낳아준 산속의 도깨비 무리에 다시 끼자니, 덩치 큰 녀석들은 저보고 도깨비 체면을 다 구기는 겁쟁이에 멍청이라며 매일같이 발길질을 하고, 돌팔매질을 하며 지독하게 따돌립니다요. 사람들에게도 괴물이라며 돌을 맞고 쫓겨나고, 같은 동족인 도깨비들에게도 쓸모없는 바보라며 무리에서 쫓겨나니... 이 한없이 넓은 세상천지에 저같이 덩치만 큰 못난 놈 하나 마음 편히 두 다리 뻗고 몸 누일 곳이 단 뼘 한 치도 없습니다요. 날은 이리 뼈가 시리게 춥고, 배는 이미 며칠 밤낮을 곯아 등가죽에 붙었는데, 어디 가서 따뜻한 불씨 하나 쬘 곳 없는 내 기구한 신세가 하도 처량하고 서글퍼서... 나도 모르게 이 아주머니 댁 앞마당까지 굴러와 이리 서럽게 울고 있었던 것입니다요."
도깨비의 어눌하지만 진심이 뚝뚝 묻어나는 애통한 하소연을 조용히 듣고 있자니, 부인은 덜컥 자신의 가슴 한구석이 날카로운 바늘에 찔린 듯 시리게 내려앉는 것을 느꼈습니다. 이 산비탈 외딴집에서 밤마다 병으로 먼저 세상을 떠난 남편의 빈자리를 부여잡고 그리워하며, 누구 하나 말벗이 되어 찾아오지 않는 지독한 고독 속에서 눈물로 제 신세를 한탄하던 부인 자신의 처절한 모습이, 저 차가운 마당에 엎드린 도깨비의 모습과 너무나도 똑같이 겹쳐 보였기 때문입니다. 겉모습은 사람과 털이 숭숭 난 도깨비라는 껍데기로 완전히 다를지언정, 온 세상에 홀로 남겨진 고립감의 무게와 누구에게도 환영받지 못하고 거절당하는 그 찢어지는 아픔은 두 생명에게 완전히 똑같은 것이었습니다. 부인의 늙은 가슴 한편에 위태롭게 남아있던 일말의 두려움과 경계심은 어느새 따뜻한 봄눈 녹듯 흔적도 없이 자취를 감추고, 그 자리에는 같은 상처를 가진 생명을 향한 깊디깊은 연민과 모성애가 뭉게뭉게 피어올랐습니다.
'저토록 크고 무서운 짐승의 덩치를 하고서, 그 속의 마음은 어미 잃은 갓난아이처럼 한없이 여리고 순하기 짝이 없구나. 세상천지에 갈 곳 없는 끔찍한 외로움이 어떤 것인지 십수 년을 뼈저리게 겪은 내가 그 누구보다 잘 아는데, 어찌 저 가엾은 것을 이 살을 도려내는 추운 눈밭 마당에 홀로 버려둘 수 있으랴. 내쫓아 얼어 죽게 내버려 두는 것은 사람 된 도리가 결코 아니다.'
굳은 결심을 한 부인은 주저함 없이 방문을 마저 활짝 열어젖히고, 차가운 댓돌을 밟으며 한 걸음 밖으로 나섰습니다. 그리고는 세상에서 가장 부드럽고 따뜻한, 자식을 어르는 어머니의 자애로운 목소리로 웅크린 도깨비에게 손을 내밀었습니다.
"쯧쯧쯧... 참으로 딱하고 기구한 사정이로구나. 아무리 도깨비라 한들, 이리도 매서운 겨울 삭풍을 맨몸으로 맞고 밤새 눈밭에 엎드려 있다가는 아침 해를 보기도 전에 꽁꽁 얼어 죽기 십상이다. 내 비록 다 쓰러져가는 낡은 초가삼간에 쥐뿔도 변변한 살림살이 하나 없고, 장작이 없어 아랫목마저 미지근하게 식어버린 지 오래다만, 그래도 살을 에는 매서운 칼바람과 눈보라를 피할 지붕과 벽은 있으니, 망설이지 말고 어서 내 집 방 안으로 들어오려무나. 세상에 외로운 이들끼리 좁은 방에서 서로 등이라도 맞대고 체온을 의지하면 이 길고 지독하게 추운 밤이 훨씬 덜 춥지 않겠느냐? 우리 집에 함께 살아도 괜찮으니, 무서워 말고 어서 이리 온."
도깨비는 자신의 커다란 귀를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듯, 놀라움에 동그랗게 뜬 커다란 눈으로 부인을 올려다보았습니다. 두려움과 추위로 창백하게 질려있던 눈물범벅의 털투성이 얼굴에 난생처음 받아보는 온정에 희미한 화색이 돌며 입술이 파르르 떨렸습니다.
"저, 정말입니까요? 아주머니께서 정말 저를 내쫓지 않으시고... 저같이 흉측하고 더럽고 냄새나는 끔찍한 도깨비가, 아주머니께서 주무시는 저 깨끗하고 귀한 사람의 방에 함부로 발을 들여도 진정 괜찮단 말씀이십니까요?"
"얼굴이 조금 흉측하고 옷이 남루한 것이 대체 무슨 큰 대수더냐. 마음 씀씀이가 이리 비단결처럼 고웁고 착하면 그만인 것을. 밖이 이리 추운데 허튼소리 말고 어서 방으로 들어오너라. 내가 문을 열어두마."
※ 3: 메밀묵 한 사발에 마음을 연 도깨비, 시작된 기막힌 동거
부인의 거듭된 다정하고 굳은 권유에, 도깨비는 그제야 남은 눈물을 털복숭이 거친 손등으로 쓱쓱 훔쳐 닦아내며 커다란 몸을 일으켰습니다. 도깨비는 방바닥에 흙이라도 묻을까 조심스레 발을 털고는, 커다란 덩치를 한껏 웅크리며 쭈뼛쭈뼛 미안한 표정으로 비좁은 방 안으로 들어섰습니다. 장정 셋을 합친 듯한 거대한 덩치가 낡고 비좁은 초가집 방 안을 가득 채우자 당장이라도 천장에 뿔이 닿고 벽이 허물어질 지경이었습니다. 하지만 참으로 묘하게도, 언제나 차디찬 냉기만이 맴돌며 시리기만 하던 외로운 방 안 공기에 듬직한 온기와 사람 사는 듯한 훈훈한 기운이 돌기 시작했습니다. 부인은 꽁꽁 언 몸을 녹일 수 있도록 도깨비를 그나마 희미한 온기가 남아있는 아랫목 쪽으로 조심스레 이끌어 앉혀두고는,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섰습니다.
'저리도 거대한 덩치가 사흘 밤낮을 꼬박 굶었다 하니 텅 빈 뱃속이 오죽 쓰리고 아플까. 당장 쓰러질 듯 기운이 없어 보이는데, 무엇이든 속을 채우고 요기할 것을 당장 내어주어야 할 텐데, 내 집에 무엇이 남아있더라...'
부인은 궁리 끝에 부엌의 낡은 찬장 깊숙한 곳에 행여나 명절에라도 먹으려고 애지중지 아껴두었던 메밀가루로 쑨 메밀묵 한 모가 남아있다는 사실이 퍼뜩 생각났습니다. 부인은 지체 없이 서둘러 찬바람이 부는 부엌으로 나갔습니다. 언 손을 호호 불어가며 도마 위에 메밀묵을 얹고 칼로 숭덩숭덩, 씹는 맛이 좋게 아주 큼지막하게 썰어내어 이가 빠진 커다란 사발에 넘칠 듯 듬뿍 담았습니다. 거기에 귀하디귀한 고소한 참기름을 아낌없이 한 방울 톡 떨어뜨리고, 짭조름한 집간장을 살짝 얹어 방 안으로 조심스레 받쳐 들고 들어왔습니다.
"내가 가진 재물이 워낙 없고 가난하여 번듯한 고기반찬 하나 차려 내어온 것은 없다마는, 내 옛말에 듣자 하니 산에 사는 도깨비는 세상의 온갖 진수성찬보다 이 쫀득한 메밀묵을 가장 으뜸으로 친다 들었다. 배가 많이 고플 터이니 체하지 않게 꼭꼭 씹어서 어서 들어보아라."
방 안 가득 구수하고 짭조름한 메밀묵과 참기름 냄새가 코끝을 스치자, 잔뜩 주눅 들어 아랫목에 고개를 푹 숙이고 있던 도깨비의 두 눈이 밤하늘의 샛별처럼 반짝하고 빛났습니다. 도깨비는 차려진 묵 사발을 보고는 너무나 감격하여 커다란 두 손으로 사발을 공손히 받쳐 들었습니다.
"세상에... 저를 위해 이리 귀한 음식을...!"
도깨비는 벅차오르는 감격과 설움에 겨워 또다시 굵은 눈물을 뚝뚝 흘리면서도, 배고픔을 이기지 못하고 묵 사발에 얼굴을 파묻고 훌렁훌렁 단숨에 메밀묵을 집어삼키기 시작했습니다. 미처 입으로 다 씹을 새도 없이 그 부드럽고 쫀득한 묵 덩어리들이 꿀떡꿀떡 거친 목구멍으로 넘어가는 경쾌한 소리가 조용한 방 안을 가득 채웠습니다.
"세상에... 세상에나. 제가 깊은 산속에서 수백 년을 살며 이것저것 안 먹어본 것이 없지만, 이렇게 입에 착착 감기고 꿀맛 같은 훌륭한 메밀묵은 제 머리털 나고 처음 먹어보는 천하일미입니다요! 아주머니, 저를 거두어 주시고 이리 귀한 음식까지 내어주신 이 크나큰 은혜는, 제가 도깨비로 숨이 붙어 살아있는 한 죽어서도 평생토록 잊지 않고 갚겠습니다요. 참말로 고맙습니다, 아주머니."
방 안에는 도깨비가 허겁지겁 묵 사발을 말끔히 바닥까지 핥아 비우는 소리와, 화로 속에서 남은 장작개비가 타들어 가며 탁탁거리는 따뜻한 소리만이 몹시도 평화롭게 울려 퍼졌습니다. 사람과 괴물 도깨비, 결코 한 공간에서 어울릴 수 없을 것 같았던, 철저히 외로웠던 두 존재 사이를 겹겹이 가로막고 있던 보이지 않는 두터운 두려움과 편견의 벽이, 부인이 내어준 그 정성스럽고 찰진 메밀묵 한 사발에 눈 녹듯 서서히 허물어지고 있었습니다. 배를 채운 도깨비는 부인이 내어준 이불자락 한 켠에서 어린아이처럼 쌕쌕거리며 곤히 잠이 들었고, 부인 역시 십수 년 만에 누군가의 따뜻한 온기를 곁에 느끼며 모처럼 편안하고 깊은 단잠에 빠져들었습니다.
다음 날 아침, 눈부신 겨울 햇살이 창호지를 비추어 부인이 잠에서 깨어 눈을 떴을 때, 방 안은 텅 비어 있었고 도깨비의 흔적은 온데간데없었습니다. 지난밤의 믿기 힘든 일이 마치 아주 길고 생생한 한바탕의 환영이나 꿈만 같았습니다. 도깨비가 웅크리고 누워 잠들어 있던 아랫목 자리에는 커다란 사람, 아니 괴물이 누웠던 푹 꺼진 자국과 훈훈한 온기만이 희미하게 남아있을 뿐이었습니다. 부인은 왠지 모르게 가슴 한구석이 뻥 뚫린 듯한 아쉬움과 서운함, 그리고 깊은 허전함을 느끼며 옷매무새를 가다듬고 마당으로 나섰습니다. 그런데 덜컹하고 방문을 여는 순간, 방문 앞 댓돌 위에 무언가 몹시 묵직하고 불룩해 보이는 낯선 무명 자루 하나가 덩그러니 놓여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부인은 이상하게 여기며 조심스레 다가가 자루의 꽉 묶인 끈을 스르륵 풀어보았습니다. 그 속을 확인한 부인은 다리에 힘이 풀려 그만 그 차가운 댓돌 위에 풀썩 주저앉고 말 뻔했습니다. 그 자루 안에는 아침 햇살을 정통으로 받아 눈이 멀 지경으로 찬란하게 반짝이는 묵직한 은괴 수십 덩이와, 한 번도 본 적 없는 엄청난 양의 무거운 엽전 꾸러미가 터질 듯이 가득 채워져 있었기 때문입니다.
부인의 놀라운 예상은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맞아떨어졌습니다. 그날 밤, 자정이 가까워질 무렵, 칠흑같이 어두운 마당에서 또다시 쿵쾅쿵쾅 땅을 울리는 육중하고 익숙한 발소리가 들려왔습니다. 부인이 반갑고도 놀란 마음에 방문을 열어젖히자, 어제보다 한결 얼굴빛이 밝고 씩씩해진 표정의 도깨비가 하얀 이를 드러내며 빙그레 웃으며 마당에 서 있었습니다. 그의 어깨에는 윤기가 흐르는 최고급 햅쌀 가마니가 얹혀 있었고, 다른 손에는 오색찬란한 귀한 비단 두 필이 들려 있었습니다.
"도, 도깨비야! 네가 잊지 않고 다시 찾아왔구나! 대체 이 귀하고 값비싼 것들을 깊은 산속 어디서 구했기에 이리 산더미처럼 들고 온단 말이냐."
도깨비는 몹시 쑥스럽고 기분이 좋은 듯 뿔 주변을 긁적이며 무거운 짐을 마루 위에 내려놓았습니다.
"헤헤헤, 저는 남들처럼 금은보화를 뚝딱 만들어내는 요술 방망이는 없어도, 땅속에 꽁꽁 숨겨진 옛날 도적들의 숨겨진 재물이나 산삼을 귀신같이 찾아내는 특별한 재주가 있답니다. 어젯밤 갈 곳 없는 저에게 아주머니께서 내어주신 따뜻한 방 한 칸과, 쫀득하고 맛있었던 그 메밀묵 한 사발에 이 외로운 도깨비의 가슴이 얼마나 따뜻해졌는지 모릅니다. 저에게 평생 처음으로 쉴 수 있는 '집'의 온기를 내어주셨으니, 저는 아주머니가 편안히 지내실 수 있게 매일같이 밤마다 이런 것들을 물어다 드릴 것입니다요. 그나저나 아주머니... 염치없는 부탁인 줄은 아옵니다만, 혹시 오늘 밤에도 그 찰지고 고소한 메밀묵을 좀 먹어볼 수 있겠습니까요? 낮 동안 산에 있으면서도 내내 아주머니의 묵 생각이 간절하여 혼이 났습니다요, 헤헤헤."
부인은 재물에 놀라 굳어있던 것도 잊은 채 참았던 호탕한 웃음을 시원하게 터뜨렸습니다.
"오냐오냐, 알았다. 내 네 녀석이 필시 찾아올 줄 알고, 아예 낮에 장터에 나가 맷돌과 메밀을 한가득 사 왔단다. 가마솥 한가득 묵을 쑤어놓았으니 배가 터지도록 실컷 먹으렴!"
그날부터 부인과 도깨비의 기상천외하고 따뜻한 동거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습니다. 도깨비는 해가 지면 산에서 내려와 부인의 집으로 숨어들었고, 매일 밤 천 년 묵은 산삼, 황금 덩어리, 귀한 진주 목걸이 등 엄청난 물건들을 가져왔습니다. 부인은 낮 동안 최고급 햇메밀을 사들여 정성껏 묵을 쑤었고, 밤마다 도깨비에게 상다리가 휘어지게 진수성찬과 메밀묵 고봉을 차려주었습니다. 계절이 바뀌고 해가 두어 번 거듭 바뀌자, 부인의 비 새던 낡은 초가집은 헐리고 고래등 같은 아흔아홉 칸짜리 최고급 기와집이 들어섰습니다. 외롭고 가난했던 과부는 온 나라에서 제일가는 큰 부자가 되었고, 마을 사람들은 헛소문을 만들어냈지만 부인은 도깨비와의 소중한 비밀을 철저히 지키며 평온한 나날을 보냈습니다.
※ 4: 매일 밤 쌓이는 금은보화, 외로운 고아들을 입양해 북적이는 집
끝을 알 수 없는 부인의 거대하고 웅장한 아흔아홉 칸 기와집 안은, 그야말로 이 세상에 존재하는 지상 낙원이 따로 없었습니다. 겨울이면 최고급 명주솜이 잔뜩 들어간 비단 솜이불을 덮고 지난날의 매서운 추위를 완전히 잊었고, 한여름 찌는 듯한 더위에는 서늘한 빙고에서 꺼낸 투명한 얼음을 띄운 달콤한 오미자 화채를 시원하게 들이마시며 더위를 식혔습니다. 십여 개가 넘는 큼직한 곳간 문을 활짝 열면, 남해의 귀한 전복부터 북방의 산삼까지 천하의 진귀하다는 산해진미와 눈부신 재물들이 와르르 쏟아질 듯 곳간 바닥부터 천장까지 빈틈없이 가득 들어차 있었습니다. 깊은 산속의 도깨비는 변함없이 매일 밤 해가 지기가 무섭게 부인의 곁으로 한달음에 달려왔습니다. 그는 커다란 전용 사기그릇에 산더미처럼 담긴 부인의 특제 메밀묵 사발을 소중하게 끌어안고 부인의 곁을 든든하게 지켰습니다. 도깨비는 어눌한 입담으로 우스갯소리를 연신 던졌고, 부인이 입을 가리며 호호거리며 즐겁게 웃는 모습을 볼 때마다 마치 온 세상을 다 가진 듯 아이처럼 행복해했습니다.
하지만 부귀영화가 영원한 행복을 보장해 주지는 못하는 법. 어느 순간부터인가 부인의 주름진 얼굴에는 다시금 옅은 수심의 그림자가 서서히 짙게 서리기 시작했습니다. 금은보화가 방 안 가득 산더미처럼 흉측하게 쌓여갈수록, 부인의 가슴 한구석에서 새어 나오는 깊은 한숨 소리도 덩달아 길고 깊어졌습니다. 먹을 것이 썩어날 정도로 넘쳐나고 집은 궁궐처럼 턱없이 넓어졌지만, 도깨비가 돌아가고 난 낮 동안, 이 거대하고 화려한 집안에 무겁게 내려앉는 적막감과 정적은 부인에게 가난할 때보다 더 끔찍하고 견디기 힘든 또 다른 형태의 공허함을 안겨주었습니다. 부인이 매끄러운 툇마루에 멍하니 앉아 하루 종일 텅 빈 넓은 마당의 잡초만 응시하는 날이 점차 잦아지자, 눈치 빠른 도깨비는 허겁지겁 묵을 먹다 말고 덜컥 수저를 내려놓으며 몹시 불안하고 걱정스런 얼굴로 물었습니다.
"아주머니, 참으로 이상합니다요. 며칠 전부터 어찌하여 얼굴빛이 그리 창백하게 어둡고 이마에 수심이 가득하십니까요? 혹시 제가 며칠 전에 바위틈에서 힘들게 구해온 그 붉은빛 옥비녀의 색깔이 영 마음에 들지 않으신 겝니까? 세상 그 어떤 진귀한 보물이라도 원하시는 것이 있다면 제게 속 시원히 말씀만 하시지요. 제가 당장 백두산 꼭대기든 저 깊은 용궁 바닥이든 모조리 다 뒤져서라도 코앞에 찾아 대령하겠습니다요."
도깨비의 조급하고 안타까움이 뚝뚝 묻어나는 걱정스러운 물음에, 부인은 조용히 고개를 저으며 쓰디쓴 미소를 지어 보였습니다.
"아니다, 바보 같은 도깨비야. 네가 지난 몇 년간 밤잠을 꼬박 설쳐가며 비바람 맞아가며 고생해서 가져다준 이 엄청난 재물들은, 이미 내 남은 평생을 사치하며 물 쓰듯 펑펑 쓰고도 남을 만큼 차고 넘친다. 내게 죽어서 가져가지도 못할 이깟 재물과 은괴들은 이제 더 이상 한 푼도 필요치 않아."
"재물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면... 대체 어찌하여 그리 금방이라도 눈물을 쏟을 듯 슬프고 텅 빈 외로운 눈을 하고 계십니까요? 부족하지만 저 덩치 큰 놈이 매일 밤 곁에 착 붙어서 밤새도록 말동무를 해드리는데도, 여전히 이 넓은 집이 적적하고 무서우신 겁니까요?"
부인은 무거운 입을 떼어, 그동안 마음속 깊고 깊은 곳에 단단히 감춰두었던, 여자로서의 진짜 본심을 털어놓았습니다.
"이 넓고 으리으리하게 좋은 집과 곳간에 넘쳐나는 재물이 다 내게 무슨 소용이겠느냐. 이 늙은이 곁에 심성이 고운 네가 있어 참으로 든든하고 평생 고맙게 생각한다마는, 너는 닭이 울고 해가 뜨면 사람들의 눈을 피해 산으로 숨어 돌아가야만 하는 도깨비의 몸. 해가 쨍쨍한 대낮에는 이 거대한 아흔아홉 칸짜리 기와집이 무덤처럼 고요하고 적막하기 그지없구나. 너도 알다시피 내 평생 맺힌 가장 큰 한이, 내 배 아파 낳은 핏덩이 자식 하나 내 품에 온전히 안아보지 못한 것인데... 이렇게 늙어 주름진 얼굴로 엄청난 부귀영화를 떵떵거리며 누려본들, 이 넓은 앞마당에서 까르르 재잘거리며 뛰어놀 아이들의 맑은 웃음소리 하나 없으니, 이 엄청난 풍요와 사치도 결국 다 빈 껍데기요, 속 빈 강정처럼 덧없게 느껴지는구나. 밤마다 금비녀를 쓰다듬으면 무얼 하겠느냐. 내 자식의 머리를 쓰다듬는 것만 못하거늘..."
부인의 피를 토하듯 토해내는 뼈저린 깊은 탄식에, 도깨비는 뾰족한 뿔을 긁적이며 인간의 감정에 대해 깊은 생각에 잠겼습니다. 부인에게 진짜 필요한 것은 번쩍이는 황금이 아니라 사람의 체온, 가족의 온기라는 것을 어렴풋이 깨달았습니다.
며칠 뒤, 답답한 마음을 달래려 읍내 장터에 구경을 나갔던 부인은, 시끌벅적한 장터 구석 후미진 짚더미에 옹기종기 모여 앉아 겨울 추위와 굶주림에 바들바들 사시나무 떨듯 떨고 있는 어린 고아 남매 셋을 우연히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마을 사람들의 말을 들어보니, 얼마 전 부모를 몹쓸 전염병으로 잃고 거리를 떠도는 가엾기 그지없는 어린 핏덩이들이었습니다. 흙먼지로 뒤덮인 그 앙상한 얼굴들과 겁에 질린 눈망울을 본 순간, 부인의 텅 빈 가슴속 깊은 곳에서 활화산처럼 뜨거운 모성애가 강렬하게 솟구쳤습니다. 부인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치맛자락을 걷어 올리고 뛰어가, 그 아이들을 제 품에 꽉 끌어안고는 으리으리한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아가들아, 이제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말거라. 춥고 배고픈 길거리 생활은 오늘로 끝이다. 오늘부터 이 넓고 따뜻한 기와집이 바로 너희들의 집이며, 이 늙은 내가 너희들을 낳아준 친어머니가 될 것이다."
부인은 꽁꽁 언 아이들을 따뜻한 물로 깨끗이 씻기고, 최고급 비단으로 부드러운 옷을 정성껏 지어 입힌 뒤, 따뜻한 흰쌀밥과 고기반찬을 배가 터지도록 먹였습니다. 부인의 지극한 사랑으로 거두자, 말랐던 세 아이의 얼굴에 금세 복숭아처럼 뽀얀 생기가 돌기 시작했습니다. 무덤처럼 적막했던 기와집 앞마당에는 드디어 아이들이 술래잡기를 하며 까르르 숨넘어가게 웃는 소리가 매일같이 생기 넘치게 울려 퍼졌습니다. "어머니!" 하고 부르며 품에 안겨오는 아이들의 온기에 부인은 난생처음으로 뼛속까지 차오르는 진정한 행복의 뜨거운 눈물을 하염없이 흘렸습니다.
이 엄청난 변화를 밤에 몰래 지켜본 도깨비 역시, 부인이 기뻐하는 모습을 보고 제 일처럼 뛸 듯이 기뻐했습니다. 도깨비는 처음에는 자신의 무서운 겉모습에 아이들이 겁을 먹을까 봐 기둥 뒤에 숨어 까치발을 든 채 흐뭇하게 구경만 하곤 했습니다. 도깨비는 자신이 먹던 엄청난 양의 메밀묵을 반으로 줄이고, 그 묵을 아이들의 간식으로 양보하며 기뻐했습니다. 또한 부인을 위한 황금 대신, 아이들이 좋아할 만한 겨울산의 진귀한 빨간 산딸기, 예쁜 색깔의 조약돌, 그리고 직접 깎아 만든 튼튼한 나무 팽이 같은 장난감들을 매일 밤 마루에 조용히 올려두었습니다. 아침마다 쌓여 있는 신기한 선물에 아이들은 "착한 산신령님이 다녀가셨나 봐!" 하며 환호했고, 도깨비는 어느새 이 집안 아이들을 지키는 든든하고 다정한 '산신령 삼촌' 같은 소중한 존재가 되어갔습니다.
하지만 그 평화롭고 완벽한 행복도 잠시. 어느 추운 겨울날 오후, 툇마루에 앉아 마당에서 신나게 노는 아이들을 아주 흐뭇하게 바라보던 부인의 시선이, 굳게 닫힌 거대한 솟을대문 너머 저 멀리 아랫마을의 헐벗은 초가집들의 풍경에 우연히 머물렀습니다. 자신의 집 굴뚝에서는 매일 따뜻한 연기가 솟아오르건만, 마을 쪽에서는 냉기만이 감돌고 굶주린 이웃들의 앓는 소리가 들려오는 듯했습니다. 부인의 깊은 눈빛이, 그 모순된 풍경 속에서 다시금 한없이 무겁고 깊게 바닥으로 가라앉기 시작했습니다.
※ 5: 담장을 넘어간 풍요, 마을 사람들에게 논밭을 나누어주다
굳게 닫혀있던 육중하고 거대한 솟을대문 너머로 시선을 무심코 던진 부인의 눈앞에 펼쳐진 아랫마을의 광경은, 그야말로 이승에 펼쳐진 참혹한 생지옥이나 다름없었습니다. 담장 안 부인의 넓은 기와집 안은 사시사철 지지 않는 진귀한 꽃이 만발하고, 수십 개의 곳간마다 쌀과 고기가 썩어날 정도로 흘러넘치는 눈부신 지상 낙원이었지만, 그 높다란 담장 하나를 경계로 나뉜 바깥세상의 현실은 너무나도 처참하고 끔찍했습니다. 그해에는 하늘마저 무심하게도 수십 년 만에 처음 겪는 유독 지독하고 끔찍한 가뭄과 흉년이 온 나라를 휩쓸고 지나갔습니다. 한여름 내내 비 한 방울 내리지 않아 마을 사람들의 목숨줄과도 같은 논바닥과 밭은 마치 늙은 거북이의 등껍질처럼 쩍쩍 갈라져 허연 흙먼지만 펄펄 날렸고, 가을걷이는커녕 당장 오늘 저녁 입에 풀칠할 씁쓸한 나무뿌리조차 구하지 못해 마을 전체가 칠흑 같은 깊은 절망과 시름의 늪에 속절없이 잠겨 있었습니다.
뼈만 앙상하게 남은 마을의 늙은이들은 지팡이에 간신히 몸을 의지한 채 초점 없는 퀭한 눈으로 비탈길을 오르내리다 쓰러지기를 반복했고, 영양가 있는 것을 먹지 못해 말라붙은 빈 젖을 물고 칭얼거리는 갓난아기를 끌어안은 채, 발을 동동 구르며 무심한 하늘을 원망하는 아낙네들의 처절한 통곡 소리가 매서운 겨울바람을 타고 부인의 집 담장을 넘어와 비수처럼 가슴에 꽂히고 있었습니다. 그 끔찍한 울음소리와 참상을 두 눈으로 똑똑히 목도한 순간, 부인은 커다란 망치로 머리를 세게 얻어맞은 듯 그 자리에 우뚝 멈춰 서고 말았습니다. 방금 전까지 자신의 아이들이 고소한 메밀묵을 입가에 묻혀가며 배불리 먹고 웃던 모습과 너무나도 대비되는 잔인한 풍경이었습니다.
'아아... 내 어찌 이리도 어리석고 눈먼 짐승처럼 살았단 말인가. 불과 몇 해 전까지만 해도 나 역시 저 담장 밖의 가엾은 이웃들과 다를 바 없이, 당장 내일 먹을 끼니를 걱정하며 언 손을 불어가며 연명하던 비참한 처지가 아니었더냐. 내가 사무치는 고독과 지독한 가난에 허덕이며 숨죽여 울 때, 비록 자신들도 가진 것은 쥐뿔도 없었지만 가을에 거둔 보리개떡 하나, 찐 감자 한 알이라도 내밀며 따뜻한 위로의 말 한마디를 건네주던, 너무나도 선량하고 눈물 많은 내 소중한 이웃들이었다. 이제 하늘의 도움으로 내 배가 남산만 하게 부르고 품에 안을 내 자식들이 생겼다고 하여, 십수 년을 동고동락하며 서로의 눈물을 닦아주던 저 가엾은 이웃들의 끔찍한 고통을 철저히 모른 체하며, 나 혼자만 이 높은 담장 안에서 배를 두드리며 호사를 누릴 수 있단 말인가. 헐벗고 굶주린 내 오랜 이웃들의 피맺힌 탄식 소리가 이리도 생생하게 귓전을 때리고 가슴을 후벼 파는데, 이 펄펄 끓는 따뜻한 구들장과 도깨비가 물어다 준 황금 덩어리, 그리고 내가 그토록 맛있게 넘기던 기름진 식사가 다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자신만이 풍요를 누리고 있다는 사실이 뼈저리게 부끄러워지며 가슴을 무겁게 짓누르는 죄책감과 깊은 슬픔에 빠진 부인은, 그날부터 아예 자신의 방문을 굳게 걸어 잠그고 식음을 전폐하다시피 했습니다. 상에 올라온 고기반찬은 물론이요, 자신이 그토록 정성껏 쑤어 찰지게 썰어놓은 메밀묵조차 쳐다보지 않고 땅이 꺼져라 한숨만 내쉬었습니다. 밤이 깊어 어김없이 발소리를 죽이며 마당을 찾아온 산속의 도깨비는, 언제나 자신을 환한 미소로 반겨주던 부인의 안색이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 창백하게 질려 있는 것을 보고 몹시 놀라 육중한 몸을 이끌고 허둥지둥 마루로 뛰어왔습니다.
"아이고, 아주머니! 대체 무슨 큰일이 생기신 겁니까요? 어디 옥체에 중한 병이라도 나신 겝니까? 늘 이맘때면 마루에 한가득 고봉으로 차려놓으시던 제가 세상에서 제일 좋아하는 메밀묵도 상에 안 올려두시고... 눈가에는 어찌 그리 물기가 마를 날이 없으십니까요! 행여 속병이라도 단단히 나신 것이라면 제가 당장 저 험한 백두산 꼭대기에 단숨에 올라가 천 년 묵은 굵은 산삼 백 뿌리를 통째로 캐어다 밤새 푹 달여오겠습니다요!"
안절부절못하며 커다란 손으로 부인의 눈치를 살피는 도깨비를 향해, 부인은 조용히 고개를 가로저으며 물기 젖은 떨리는 목소리로 천천히 입을 열었습니다.
"아니다, 착한 도깨비야. 내 몸이 아파서 앓아누운 것이 결코 아니다. 내 양심이 찔리고 마음이 몹시도 큰 병에 걸려 도무지 숨을 쉴 수가 없는 것 같구나. 네가 밤낮으로 비바람을 맞아가며 헌신적으로 가져다준 수많은 재물 덕분에 나는 평생을 소원하던 예쁜 자식들도 품에 안았고, 더할 나위 없는 부귀영화를 원 없이 누리고 있다. 허나 저 높은 담장 너머 세상의 끔찍한 풍경을 한 번 보아라. 내 곁에서 함께 늙어가던 착한 이웃들은 짐승처럼 굶주림에 허덕이며 하루가 멀다 하고 차가운 땅바닥에서 굶어 죽어가고 있는데, 이 집의 십여 개가 넘는 곳간에는 우리 식구 평생 먹고도 남아 썩어 문드러질 만큼 곡식이 산처럼 쌓여 있으니... 이 지독한 부유함과 넘쳐나는 재물이 오히려 내 가슴을 찌르는 날카로운 독 가시가 되어 도저히 밥을 넘길 수도, 편히 잠을 이룰 수도 없구나."
도깨비는 짐승처럼 부리부리한 커다란 두 눈을 끔벅이며 부인의 슬픈 하소연을 가만히, 아주 진지하게 경청했습니다. 본디 도깨비나 산짐승들의 야생 세계에서는 힘이 강한 자가 모든 것을 독차지하고 약한 자는 가차 없이 도태되어 죽어가는 것이 너무나도 당연하고 변치 않는 자연의 이치였습니다. 그러나 남의 불행과 굶주림에 함께 가슴 아파하며 피눈물 흘리고, 자신이 넘치게 가진 것을 아무런 대가와 조건 없이 기꺼이 나누고자 하는 인간의 그 깊고 숭고한 연민의 감정은, 수백 년을 살아온 늙은 도깨비로서도 난생처음 겪어보는 몹시 낯설고 신비로우면서도 뭉클한 감정이었습니다. 부인의 파리해진 뺨을 타고 흘러내리는 맑은 눈물방울은 도깨비의 거칠고 투박한 가슴마저 찡하게 울리며 거대한 파문을 일으켰습니다.
"부인... 부인의 그 비단결 같은 고운 마음씨는, 제가 길을 잃고 쫓겨나 부인의 집 문을 처음 두드렸던 그 지독하게 춥고 외로웠던 겨울밤, 두려움을 무릅쓰고 제게 내어주셨던 그 쫀득하고 따뜻했던 고마운 메밀묵 한 사발만큼이나 여전히 눈부시게 곱고 다정하시군요. 사람의 마음이라는 것이 이리도 바다처럼 넓고 깊은 것인지 짐승 같은 저는 여태 몰랐습니다요. 아주머니께서 이 넓은 집에 아주머니 식구들끼리만 부유하게 사시는 것이 마음에 걸려 이리도 병이 날 만큼 괴로우시다면, 제가 지난 몇 년간 밤낮으로 뼈 빠지게 산을 뒤지며 모아 온 이 수많은 금은보화와 곡식들... 단 한 톨도 남김없이 전부 아주머니 마음대로, 원하시는 대로 하셔도 좋습니다요."
"정, 정말이냐? 네가 밤잠을 쫓아가며 험한 바위 절벽을 아슬아슬하게 오르내리고, 무서운 맹수들과 목숨을 걸고 싸우며 이 커다란 손에 굳은살이 박이도록 힘들게 구해온 피와 땀 같은 재물들이 아니더냐. 이것들을 우리 가족이 쓰지도 않고 몽땅 남들에게 조건 없이 나누어 주어도 진정으로 서운하고 아깝지 않겠느냐?"
도깨비는 솥뚜껑만 한 거친 손으로 자신의 넓고 털 난 가슴을 툭툭 치며 호탕하게 웃음을 터뜨렸습니다.
"하하하! 제가 이 재물들을 모아온 것은 제 배를 불리기 위함이 아니라, 오직 저를 거두어주신 아주머니의 주름진 얼굴에 환한 웃음꽃을 피워드리기 위함이었습니다. 아주머니가 슬퍼하시면 저 무거운 황금 덩어리 그 자체가 제게 대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요? 아주머니께서 이 재물들을 굶주린 가엾은 이웃들과 넉넉하게 나누어 그들의 목숨을 구하고 진정으로 마음이 평안해지실 수만 있다면, 저 역시 그것으로 백 번 천 번, 아니 만 번이라도 기쁩니다요. 자, 내일 아침 닭이 울고 해가 뜨자마자 당장 이 집의 커다란 곳간 문을 모조리 활짝 여시지요! 행여나 마을 사람들에게 나누어주다 모자라면, 제가 밤마다 주변의 험한 산들을 통째로 짊어지고 와서라도 다시 곳간을 꽉꽉 빈틈없이 채워놓겠습니다요!"
그제야 파리했던 부인의 늙은 얼굴에 짙은 먹구름이 걷히듯 환하고 눈부신 웃음꽃이 활짝 피어났습니다. 가슴속을 꽉 막고 숨통을 조이던 묵직한 체증이 단숨에 씻겨 내려가는 듯했습니다. 다음 날 아침, 동쪽 하늘에 붉은 해가 밝기가 무섭게 부인은 마을 사람들을 모두 기와집 앞마당으로 다급히 불러 모았습니다. 그리고는 오랫동안 굳게 닫혀 자물쇠가 채워져 있던 십여 개의 거대한 곳간 문을 하인들을 시켜 일제히 활짝 열어젖혔습니다.
"마을 여러분! 올 한 해 끔찍한 가뭄으로 얼마나 고생이 많으십니까. 이 곳간에 썩어날 듯 쌓인 쌀과 보리, 조와 수수, 그리고 고소한 메밀들은 모두 온전히 여러분의 것입니다. 굶주린 이웃을 모른 체한 어리석은 저를 부디 용서하시고, 각자 식구 수대로 필요한 만큼 원 없이 넉넉하게 가져가서 당장 굶주린 가족들의 배를 든든하게 채우십시오!"
마을 사람들은 처음엔 푹 꺼진 자신들의 눈을 의심했습니다. 평생 구경조차 해보지 못한 어마어마하고 엄청난 양의 쌀가마니가 산더미처럼 끝도 없이 쌓여 있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부인의 고운 옷자락을 붙잡고 차가운 땅에 엎드려 목놓아 통곡하며 생명의 은인이라 감사를 표했습니다. 하지만 부인의 기적 같은 나눔은 여기서 끝이 아니었습니다. 부인은 창고 안쪽에 산처럼 쌓여있던 은괴와 황금을 수레에 실어 꺼내어, 인근의 물이 잘 드는 기름진 논밭과 넓은 과수원을 지주들로부터 엄청난 웃돈을 주고 모조리 사들였습니다. 그리고는 땅 한 평 없이 평생을 가난한 소작을 부치며 혹독한 빚과 이자에 허덕이던 가엾은 마을 사람들에게 그 비싼 논밭의 문서들을 골고루 공평하게 나누어주었습니다.
"이 땅은 이제 온전히 여러분의 것입니다. 더 이상 매몰찬 남의 땅에서 굽신거리며 눈치 보며 피눈물 흘리며 일하지 말고, 여러분의 이름이 적힌 당당한 땅에서 마음 편히 즐겁게 농사를 지으십시오. 우리 다 같이 이 산골 마을에서 배곯고 얼어 죽는 사람 단 한 명 없이, 예전처럼 오순도순 정을 나누며 잘살아 봅시다!"
부인의 조건 없고 헌신적인 거대한 나눔 덕분에, 죽어가던 마을은 단숨에 마법처럼, 기적처럼 생기를 되찾고 되살아났습니다. 굶어 죽어가던 아이들의 볼에 발그레한 생기가 돌았고, 깊은 절망과 체념에 빠져있던 사람들의 굳은 입에서는 다시 흥겹고 기운찬 노동요가 울려 퍼졌습니다. 집의 높은 담장을 훌쩍 넘어 마을로 흘러간 부인과 도깨비의 엄청난 풍요는, 온 마을 사람들의 마음과 배를 따뜻하게 감싸 안으며 모두를 구원하고 진정한 행복의 길로 이끌고 있었습니다.
※ 6: 웃음꽃 핀 가족과 마을을 보며 떠날 채비를 하는 도깨비
부인의 그 엄청나고 경이로운 나눔의 기적이 있은 후로, 어느덧 계절이 돌고 돌아 또다시 한 해가 평화롭게 저물어갔습니다. 가을바람이 선선하게 불어오자, 부인에게 귀한 땅을 선물 받은 마을 사람들은 각자 자신의 땅에서 그 어느 해보다 땀 흘려 정성껏 가꾼 곡식들로 유례없는 어마어마한 대풍년을 맞이했습니다. 온 동네 집집마다 황금빛으로 누렇게 잘 익은 볏단과 탐스러운 열매들이 마당이 터질 듯 가득 쌓였고, 쉼 없이 타작하는 흥겨운 소리와 사람들의 배부른 웃음소리가 적막했던 골짜기를 가득 메우며 강렬한 생명력을 내뿜었습니다.
마을 사람들은 수확의 기쁨을 맞이하자마자, 가장 질 좋은 햅쌀과 햇빛을 듬뿍 받고 자란 통통한 햇메밀을 정성껏 찧어 가장 먼저 부인의 커다란 솟을대문 앞으로 우르르 몰려 달려왔습니다. 그들은 부인 앞에 떡과 과일, 귀한 고기를 산더미처럼 바치며 땅에 엎드려 진심 어린 큰절을 올렸습니다. "부인 마님 덕분에 짐승만도 못했던 저희가 비로소 사람답게, 배불리 살게 되었습니다. 이 은혜는 뼈에 새겨 자자손손 갚겠습니다!" 하며 뜨거운 눈물짓는 이웃들에게, 부인은 손수 고기를 삶고 그들이 가져온 햇메밀을 맷돌에 곱게 갈아 커다란 가마솥 가득 찰지고 고소한 메밀묵을 쑤어 동네 사람들에게 골고루 나누어 주며 화답했습니다. 부인의 앞마당에서는 부인이 거둔 세 아이가 때깔 좋은 새 옷을 입고 동네 친구들을 잔뜩 불러 모아, 왁자지껄 강강술래를 하며 흥겹게 뛰어놀고 있었습니다. 이 모든 활기차고 감동적인 광경을 툇마루에 앉아 지켜보는 부인의 주름진 얼굴에는, 지난 십수 년의 고독을 모두 온전히 보상받은 듯 그 어느 때보다도 깊고 평온한 자애로운 미소가 번져 있었습니다.
그날 밤, 구름 한 점 없는 밤하늘에 둥근 보름달이 교교하게 빛을 내리는 뒷산의 커다란 널찍한 바위 위. 도깨비는 무릎에 턱을 괸 채 산 아래 훤히 내려다보이는 부인의 아흔아홉 칸 기와집과 마을의 불빛들을 가만히 내려다보고 있었습니다. 낮 동안 동네 사람들과 아이들로 왁자지껄 잔치판 같았던 집안은 이제 고요해졌고, 방 안에서는 배불리 먹고 쌕쌕거리며 곤히 잠든 세 아이의 평온한 숨소리와, 그 아이들의 이불을 덮어주며 미소 짓는 부인의 편안한 실루엣만이 창호지 너머로 희미하게 어른거렸습니다. 마을 곳곳의 집집마다 피어오르는 구수한 저녁 짓는 연기와, 이웃들끼리 담장을 너머 두런두런 정겹게 나누는 대화 소리를 산바람을 통해 고스란히 전해 들으며, 도깨비는 가슴 한구석이 텅 빈 듯 시큰해지고 알 수 없는 깊은 고독감이 밀려드는 것을 느꼈습니다.
'아... 참으로 아름답고 완벽한 한 폭의 그림 같은 인간 세상의 풍경이로구나. 아주머니는 이제 진정으로, 털끝만 한 부족함도 없이 완벽하게 행복해지셨어. 끔찍했던 굶주림도, 살을 에던 외로움도 완전히 사라졌고, 무엇보다 아주머니의 빈자리를 든든히 지켜주는 저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예쁜 자식들과, 아주머니를 신처럼 떠받들고 친어머니처럼 따르는 선량하고 좋은 이웃들이 저리도 수백 명이나 넘쳐나니 말이야.'
도깨비는 처음 길을 잃고 헤매다 낡고 쓰러져가던 부인의 초가집 문을 조심스레 두드렸던, 그 춥고 시리고 눈보라가 치던 아득한 겨울밤을 회상했습니다. 세상의 모진 풍파에 철저히 버림받아 서로 의지할 곳 하나 없던 가장 비참하고 외로운 두 존재가 우연히 만나, 서로의 상처를 보듬고 메밀묵 한 사발로 체온을 나누며 이 거대하고 눈부신 기적을 함께 만들어냈습니다. 처음 자신이 목숨 걸고 물어다 준 황금빛 재물로 부인이 근심을 덜고 웃음을 되찾았을 때만 해도, 도깨비는 자신이 세상에서 가장 쓸모 있는 존재가 된 것 같아 세상을 다 가진 듯 뛸 듯이 기뻤습니다.
하지만 지금, 부인이 선량한 이웃들과 사랑스러운 아이들과 함께 당당하게 엮어낸 저 찬란하고 눈부신 진짜 '사람들의 행복' 앞에서는, 짐승 같은 뻣뻣한 털로 뒤덮인 자신의 흉측한 처지가 너무나도 초라하게 느껴졌습니다. 가슴 깊은 곳에 꽁꽁 숨겨두었던 이질감과 열등감이 스멀스멀 독버섯처럼 피어올랐습니다.
'나는 사람들과 결코 한데 섞여 햇빛 아래서 살 수 없는, 어두운 음지의 요물이자 뿔 달린 무서운 괴물 도깨비일 뿐이다. 내 이 흉측하고 무시무시한 외모와 이마에 난 뿔, 그리고 사람을 찢어 죽일 수도 있는 괴력을 마을 사람들이 행여나 길을 가다 우연히 알게 된다면, 필시 기겁을 하고 까무러치며 관아의 사또에게 고발할 것이다. 그리되면 아주머니마저 산속의 무서운 요물과 더러운 재물을 대가로 내통했다 하여 억울하게 손가락질을 받고 이 정든 마을에서 영영 쫓겨날 것이 불 보듯 뻔한 일. 지금까지야 밤의 어둠에 숨어 몰래 다녀가며 내가 그토록 좋아하는 쫀득한 메밀묵이나 염치없이 얻어먹었다마는, 이제 아주머니 집에 거둔 아이들이 하루가 다르게 점점 커가고, 낮이나 밤이나 아주머니 집에 은혜를 갚겠다며 드나드는 마을 사람들이 이리도 많아졌으니, 언제 내 거대한 꼬리가 밟혀 그들에게 돌이킬 수 없는 큰 화를 입힐지 도무지 모를 일이다.'
도깨비는 고통스럽게 두 눈을 질끈 감았습니다.
'내가 아주머니와 저 티 없이 맑은 아이들이 애써 일궈낸 저 아름답고 평온한 천국 같은 삶에, 한 점의 끔찍한 오점이나 씻을 수 없는 먹칠을 남겨서는 결단코 아니 되지. 내 역할과 쓰임새는 이미 오래전에 끝이 났다. 재물도 원 없이 나누었고, 아주머니가 진정으로 마음 깊이 웃게 되셨으니... 나같이 흉측한 괴물은 이제 그만 흔적도 없이, 아무런 미련 없이 내 원래의 어둡고 고독한 제자리로 돌아가 찌그러져 있어야 할 때인가 보구나.'
마침내 쓰라린 이별의 결심을 단단히 굳힌 도깨비는 무거운 몸을 이끌고 자리에서 툭툭 털고 일어났습니다. 언제나 산처럼 거대하고 듬직해 보이던 도깨비의 넓은 어깨가, 차가운 가을 달빛 아래 유난히도 더 초라하고 쓸쓸하게, 한없이 작아 보였습니다. 도깨비는 깊고 축축한 산속 자신의 낡은 은신처 동굴로 돌아가, 아주 단출한 짐을 꾸리기 시작했습니다. 동굴 구석에 쌓아둔 번쩍이는 금은보화나 남은 비단 따위는 거들떠보지도 않은 채, 그저 처음 만난 그 해 겨울, 부인이 자신의 거대한 몸집 치수에 맞추어 밤을 새워가며 한 땀 한 땀 정성껏 바느질해 지어주었던 낡고 커다란 무명옷 한 벌과, 마당에서 아이들이 놀다 떨어뜨리고 간 작은 나무 팽이 하나만을 거친 품속에 목숨처럼 소중히 챙겨 넣었습니다. 비록 값어치 없는 물건들이었지만, 그것만으로도 외로운 도깨비에게는 앞으로 남은 수백 년의 고독한 야생의 삶을 버티며 그 따뜻했던 나날들을 추억할 수 있는, 세상 그 어떤 보석과도 바꿀 수 없는 가장 훌륭하고 눈물겨운 보물이었습니다.
자정이 훌쩍 넘어 온 세상이 깊은 잠에 빠진 한밤중, 도깨비는 마지막 이별을 고하기 위해 부인의 기와집 앞마당에 소리 없이 내려섰습니다. 언제나 쿵쾅거리며 마당을 진동시키던 그 반가운 발걸음 소리조차 오늘따라 자신의 존재를 감추려는 듯 유난히도 깃털처럼 가볍고 조심스러웠습니다. 도깨비가 툇마루 끝 어둠 속에 서서 가만히 헛기침을 두어 번 하자, 잠귀가 몹시도 밝은 부인이 마치 기다렸다는 듯 단숨에 방문을 활짝 열고 기쁜 얼굴로 뛰어나왔습니다.
"도깨비야, 이제야 왔느냐? 오늘따라 어찌 이리 한참을 늦었어. 낮에 마을 사람들이 은혜를 갚는다며 올해 갓 수확한 햅쌀과 질 좋은 햇메밀을 잔뜩 가져왔기에, 네 녀석이 환장하게 좋아하는 메밀묵을 가마솥 두 개에 가득 차게 찰지게 쑤어서 온갖 양념을 다 해 아주 맛있게 무치고 너를 애타게 기다리고 있었다. 밤공기가 제법 차가우니 망설이지 말고 어서 뜨뜻한 방으로 들어오렴!"
여느 때와 다름없이, 아니 오히려 더 환하고 다정하게 자신을 핏줄처럼 반기는 부인의 눈부신 미소와 콧속을 파고드는 고소한 참기름 밴 메밀묵 냄새에, 도깨비는 그만 왈칵 뜨거운 눈물이 쏟아질 것만 같았습니다. 하지만 도깨비는 핏줄이 서는 두꺼운 입술을 꽉 깨물어 애써 솟구치는 슬픔을 꾹 참고, 아주 어색하고 억지스러운 웃음을 간신히 지어 보였습니다. 그리고는 언제나 묵 사발을 받아 들던 따뜻한 방으로 덥석 들어가지 않고, 차가운 마루 아래 흙바닥에 그대로 선 채로 공손히 허리를 깊게 숙여 엎드리며, 부인을 향해 아주 정중하고 무거운 큰절을 천천히 올렸습니다. 도무지 예상치 못한 도깨비의 이상 행동에 부인은 깜짝 놀라 맨발로 마루 위로 뛰어나왔습니다.
"아니, 이 밤중에 별안간 이 무거운 절은 다 왜 하는 것이냐? 방에 들어오지는 않고 마당 흙바닥에 엎드려 대체 무슨 일이 있는 게야? 어디 산에서 구르다 몸이라도 다쳤느냐?"
큰절을 올린 채 바닥에서 고개를 숙인 도깨비는 짐승의 목에서 나는 듯한 무겁고 탁한 목소리로 힘겹게, 아주 힘겹게 입을 뗐습니다.
"아주머니... 아니, 부인 마님. 그동안 갈 곳 없이 떠돌던 이 못나고 냄새나는 짐승 도깨비를 거두어 방 한 켠을 넉넉히 내어주시고, 매일같이 꿀맛 같은 귀한 메밀묵을 원 없이 먹여주시며, 제 평생 다 갚지도 못할 따뜻한 사람의 사랑을 베풀어 주셔서 참말로, 참말로 가슴 깊이 고마웠습니다요. 저는... 저는 오늘 밤 이 누추한 인사를 마지막 끝으로, 더 이상 아주머니의 귀한 댁에 발걸음하지 않고, 아주 깊고 험한,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는 먼 산속 제 고향으로 영영 돌아가려 합니다요."
너무나도 갑작스럽고 청천벽력 같은 일방적인 이별 통보에, 부인은 마치 한겨울에 날벼락이라도 정통으로 맞은 듯 온몸이 굳어버린 채 그 자리에 넋을 잃고 우뚝 멈춰 서고 말았습니다.
※ 7: "우린 이미 한 식구야", 진정한 가족의 완성
"떠, 떠나다니...? 지금 내 앞에서 그게 대체 무슨 해괴망측한 소리냐! 깊고 먼 산속이라니, 어제까지만 해도 방에서 나와 마주 앉아 묵을 먹으며 아이들 이야기를 하며 호탕하게 웃던 네가 갑자기 왜 거길 두 번 다시 못 올 곳처럼 영영 떠 간단 말이냐!"
부인은 파들파들 사시나무 떨리듯 떨리는 늙은 두 손을 뻗어, 엎드려 있는 도깨비의 거칠고 커다란 팔뚝을 생명줄이라도 되는 양 꽉 움켜쥐었습니다. 하지만 도깨비는 쏟아지는 눈물을 보이지 않으려 차마 부인의 충격받은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지 못한 채, 애써 시선을 외면하며 차가운 마당 바닥만 뚫어지게 응시하며 밤새 둥글게 깎고 준비했던 모진 말들을 쏟아냈습니다.
"아주머니, 현실을 똑바로, 그리고 냉정하게 보시지요. 과거 춥고 눈물겹게 외로웠던 아주머니의 곁에는 이제 아주머니를 진심으로 따르고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사랑스러운 자식들이 셋이나 떡하니 생겼고, 아주머니를 하늘이 내린 은인으로 모시며 목숨 걸고 지키려는 든든한 마을 사람들이 수백 명이나 문밖에 진을 치고 있습니다요. 아주머니는 더 이상 추운 밤마다 제가 물어다 주는 금은보화나, 제 어설픈 말동무 따위의 얄팍한 위로가 전혀 필요하지 않을 만큼, 너무나도 완벽하고 흠잡을 데 없이 눈부시게 행복해지셨습니다.
저는 그저 제가 얻어먹은 메밀묵 한 사발의 은혜를 갚기 위해, 밤마다 짐승처럼 재물을 물어다 나르던 도구이자 괴물 도깨비일 뿐입니다요. 이제 아주머니가 부유해지셨으니 저같이 흉측하고 무서운 야생의 괴물이 이런 번듯하고 훌륭한 사람 사는 집에, 그것도 귀한 아이들이 자라는 집에 계속 미련 없이 들락거렸다가는, 행여나 꼬리가 밟혀 흉흉한 소문이라도 나서 아주머니와 저 가엾은 아이들이 마을에서 끔찍한 요물 취급을 받으며 돌팔매질당할까 그게 제일 두렵고 무섭습니다요. 이 집안을 일으켜 세운 제 역할과 쓰임새는 이미 완벽하게 끝이 났으니, 부디 제가 아주머니의 훌륭한 삶에 거대한 오점으로 남기 전에, 그저 밤마다 찾아와 묵을 맛있게 먹어 치우던 착한 짐승으로, 그 좋은 기억만 안고 미련 없이 떠나게 허락해 주십시오."
비수를 꽂듯 담담하게 내뱉으려는 도깨비의 말 속에는, 자신이 진심으로 목숨 다해 사랑하게 된 이 인간 가족에게 혹여나 조금이라도 짐이 되거나 흉이 될지도 모른다는 뼈저린 두려움과, 결코 사람으로 섞일 수 없는 짐승의 지독한 열등감과 자격지심이 시퍼렇게 서려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 모진 말을 듣는 순간, 얼어붙어 있던 부인의 두 눈에서는 참을 수 없는 커다란 분노와 슬픔의 눈물이 폭포수처럼 뚝뚝 떨어짐과 동시에, 자식을 혼내는 어미의 불같은 호통이 고요한 밤공기를 찢으며 매섭게 터져 나왔습니다.
"이 천하의 미련하고 바보 천치 같은 도깨비야! 네가 진정 십수 년을 겪은 나를 그토록 얄팍하고 은혜를 모르는 가벼운 사람으로 보았더냐? 내가 그 추운 겨울밤 낯선 널 무서워하지 않고 기꺼이 내 방 아랫목에 들이고 내 피 같은 메밀묵을 쑤어 먹인 것이, 네가 번쩍이는 재물을 물어다 주는 쓸모 있는 요술 방망이여서, 내 배를 불려주어서 그런 줄로만 알았더냐! 네가 내일 당장 밤 험한 산길에서 황금이 아니라 아무 쓸모 없는 길가의 굴러다니는 돌멩이를 주워다 내 손에 쥐여준다 한들, 너는 그 살을 에듯 춥고 서러워 숨통이 조이던 지옥 같은 시절, 내 지독한 외로움을 달래주고 내 얼어붙은 눈물을 닦아준 천하에 둘도 없는 나의 유일한 벗이자 내 가장 소중한 첫 식구란 말이다!"
부인의 찢어질 듯 단호하고도 서러운 외침에, 바닥을 향하던 도깨비는 크게 흠칫 놀라 짐승 같은 커다란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고개를 들었습니다. 부인은 마루를 박차고 흙바닥으로 내려와, 도깨비의 거칠고 털투성이인 커다란 두 손을 자신의 주름지고 늙은 두 손으로 꼭, 아주 꽉 감싸 쥐며 가슴을 치며 오열했습니다.
"역할이라니! 쓰임새라니! 가족이라는 것이 대체 무엇인지 너는 정녕 그리도 모른단 말이냐! 가족이란 내 곁에 두어 쓸모가 있어서, 돈을 벌어다 주어서 이득이 되어 곁에 두는 것이 아니라, 그저 곁에 그 사람이 없으면 내가 도무지 숨을 쉴 수가 없고 세상이 무너지기에, 어떤 흉이나 결점도 다 끌어안고 함께 얼굴 맞대고 사는 것이 진정한 가족인 게다. 행여나 마을 사람들이 네 흉측한 겉모습을 보고 흉을 보고 돌을 던지면 이 어미인 내가 가장 먼저 두 팔 벌려 앞장서서 온몸으로 그 돌을 다 막아설 것이고, 손가락질을 하며 내쫓으려 들면 까짓것 우리가 먼저 이깟 아흔아홉 칸 으리으리한 집구석 다 버리고 훌훌 떠나, 깊은 산속에서 밭이나 일구며 오순도순 메밀묵이나 쑤어 먹으며 평생 살면 그만인 것을! 내가 배 아파 낳지 않은 저 불쌍한 고아 아이들을 품어 기르며 진짜 내 자식인 것처럼 내 목숨을 내놓을 수 있듯이, 비록 겉모습은 사람과 다를지언정 너 역시 아주 오래전 네가 눈밭에서 울던 그날부터 이미 내게는 목숨과도 떼어낼 수 없는 진짜 내 식구이자 맏아들이나 다름없단 말이다. 그런데 네가 이 애미를 버리고 깊은 산으로 훌쩍 숨어버리면 이 크고 화려한 집이 다 무슨 소용이며, 내 여생의 행복이 어찌 온전할 수 있겠느냐!"
부인이 오열하며 도깨비의 가슴을 퍽퍽 치고 있을 바로 그때였습니다. "드르륵-" 하고 굳게 닫혀있던 방문이 열리더니, 곤히 잠든 줄 알았던 세 아이가 두꺼운 솜이불을 뒤집어쓴 채 눈을 비비며 툇마루로 종종걸음으로 걸어 나왔습니다. 밖의 큰 소리에 잠이 깬 아이들은, 마당에 우뚝 선 도깨비의 산처럼 거대하고 뿔이 달린 험악한 겉모습과 번뜩이는 송곳니를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음에도 무서워하며 비명을 지르거나 뒷걸음질 치며 피하기는커녕, 마치 아주 오랫동안 알고 지낸 친근한 핏줄을 대하듯 환하게 웃으며 쪼르르 마당으로 맨발로 달려와 도깨비의 두꺼운 다리와 털북숭이 팔에 철썩 매달렸습니다.
"우와! 진짜 뿔도 있고 털도 엄청 많다! 우리 집에 맨날 맨날 예쁜 나무 팽이랑 산딸기 몰래 다 두고 가신 분이 털보 산신령 삼촌이었구나!"
"삼촌, 밤중에 어디 가시려고 짐을 쌌어요? 우리 내일 아침에 마당에서 삼촌이랑 같이 윷놀이도 하고 숨바꼭질도 하기로 했잖아요. 이렇게 덩치가 크시면 나무 뒤에 숨기 엄청 힘드실 텐데 헤헤! 우리 두고 혼자 얄밉게 어디 가지 마요, 네?"
"맞아요! 삼촌 덩치가 엄청 크시니까 묵도 엄청 많이 드시죠? 어머니가 며칠 전부터 삼촌 오시면 드린다고 진짜 진짜 맛있는 햇메밀로 고소한 메밀묵을 배가 터질 만큼 엄청 많이 쑤어놓으셨단 말이에요. 혼자 가지 말고 우리 어머니가 정성껏 쑨 메밀묵 다 같이 따뜻한 방에 앉아서 배불리 먹고 푹 자요, 삼촌!"
무서운 괴물을 보고도 한 점의 편견 없는 아이들의 맑고 티 없이 순수한 목소리에, 그리고 자신을 놓지 않으려 피가 통하지 않을 정도로 손을 꽉 쥔 채 오열하는 부인의 진심 어린 뜨거운 눈물에, 도깨비는 그동안 가슴속에 바위처럼 견고하게 쌓아두었던 지독한 열등감과 '요물은 사람과 섞일 수 없다'는 깊은 두려움의 빙벽이 와르르, 형체도 없이 산산조각이 나며 무너져 내리는 것을 강렬하게 느꼈습니다. 도깨비는 결국 그 거대한 덩치에 어울리지 않게 어린아이처럼 입을 크게 벌리고 "엉엉!" 소리 내어 목놓아 통곡을 터뜨렸고, 커다란 두 팔을 넓게 뻗어 자신보다 한참이나 작은 부인과 매달린 세 아이를 한꺼번에 품에 와락, 부서져라 안았습니다.
"으허허헝...! 흐흐흑...! 알, 알겠습니다요, 아주머니. 아니... 제 생에 유일한 진짜 저의 식구들이시여. 제가 참으로 미련하고 바보 같았습니다. 제가 늙어 죽어 흙이 될 평생토록 곁에 남아서, 아주머니가 쑤어주시는 쫀득한 메밀묵도 세상에서 제일 맛있게 매일매일 얻어먹고, 무슨 일이 있어도 목숨 바쳐 아주머니와 이 귀여운 녀석들을 세상의 모든 위험으로부터 가장 든든히 지켜내겠습니다요! 이제 죽어도 다시는 혼자 먼저 떠난다는 못난 소리, 절대로 하지 않겠습니다요!"
차가운 늦가을 밤바람이 부는 넓은 마당 한가운데서 도깨비와 늙은 부인, 그리고 어린 세 아이가 한 덩어리로 서로를 부둥켜안고 엉엉 우는 그 기쁨의 울음소리는, 밤하늘을 수놓은 은하수의 별빛보다도 훨씬 더 맑고 눈부시게 온 세상을 비추고 있었습니다.
서로 언어도, 종족도, 생김새도 달랐던 사람과 괴물 도깨비라는 견고한 경계를 훌쩍 넘어,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버려진 고아들과 가난한 과부가 만나 이루어낸 이 기적보다 더 기적 같은 운명적인 만남. 춥고 외로웠던 과부의 방에서 내어준 정성스러운 메밀묵 한 사발에서 시작된 그 작고 따뜻한 나눔은, 끔찍한 가뭄으로 죽어가던 온 마을 사람들의 생명을 풍요롭게 살려냈을 뿐만 아니라, 수백 년을 홀로 산속을 떠돌며 세상에서 가장 외롭고 비참했던 괴물 도깨비에게 영원히 마음 놓고 돌아가 쉴 수 있는 진짜 따뜻한 '가족'과 '집'을 마침내 만들어주었습니다.
그 잊지 못할 밤이 지난 후로도, 덩치 큰 도깨비는 낮에는 집안에 숨어 지내고 밤에는 마을 사람들의 농사를 돕는 든든한 수호신이자, 사랑스러운 네 아이를 업어 키우는 다정하고 유쾌한 털보 삼촌으로서 가족의 곁을 영원히 굳건하게 지켰습니다. 그들이 함께 사는 거대한 아흔아홉 칸 기와집 안팎에서는 고소한 참기름을 두른 메밀묵 냄새와, 세상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가장 따뜻하고 행복한 웃음소리가 자자손손, 수백 년이 지나도록 영원히 끊이지 않았다고 전해집니다.
유튜브 엔딩멘트
"쓸모가 있어서가 아니라, 곁에 없으면 안 되기에 가족이라는 부인의 외침이 가슴을 울립니다. 시원하고 고소한 메밀묵 한 사발이 도깨비의 마음을 녹였듯, 우리의 진심 어린 정성 하나가 기적을 만들기도 하지요. 오늘 밤은 우리 곁의 소중한 식구들과 함께 맛있는 음식 나누어 드시는 건 어떨까요? 이야기가 즐거우셨다면 구독과 좋아요 꾹 눌러주시고, 다음에도 마음이 훈훈해지는 야담으로 찾아오겠습니다. 편안한 밤 보내세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