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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깨비를 메치기로 꽂아버린 괴력 소녀
도깨비도 울고 간 처녀장사
■ 태그
#도깨비, #씨름, #처녀장사, #괴력소녀, #한국전래동화, #도깨비이야기, #오디오드라마, #전래동화드라마, #도깨비씨름, #메치기, #한국민담, #옛날이야기, #시니어드라마, #감동실화, #가슴뭉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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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썸네일
A cinematic 16:9 photorealistic scene set in a moonlit Korean rural village at night during the Joseon era. A muscular young woman in traditional white hanbok with her sleeves rolled up stands in a powerful wrestling stance on a dirt clearing, facing a towering supernatural dokkaebi (Korean goblin) with wild hair and glowing eyes who is stumbling backward in shock. Dust swirls around them under a massive full moon. Warm lantern light from a nearby thatched-roof farmhouse illuminates the scene. The young woman's expression is fierce and determined, while the dokkaebi looks bewildered and off-balance. No text.
■ 후킹
조선 어느 마을, 한밤중 달빛 아래서 도깨비가 등짝을 땅에 찍혔습니다. 그것도 열일곱 살 처녀한테. 도깨비가 벌떡 일어나 다시 덤볐지만, 결과는 똑같았습니다. 메치기 한 방에 나가떨어진 겁니다. 마을 사람들은 아무도 이 이야기를 믿지 않았습니다. 도깨비한테 씨름을 걸어 이긴 사람이 있다는 것도, 그게 날마다 절구질하던 마른 체구의 처녀라는 것도. 하지만 진짜 이야기는 씨름판에서 시작된 게 아니었습니다. 이 처녀는 왜 한밤중에 도깨비 앞에 서게 된 걸까요. 그리고 도깨비가 지고도 울지 않을 수 없었던 이유는 대체 무엇이었을까요.
※ 1:
보름달이 마을 뒷산 위로 떠오른 밤이었습니다.
논두렁 너머 빈터에서 먼지가 피어올랐습니다. 누군가 땅바닥에 내동댕이쳐진 소리가 마을 끝까지 울렸고, 그 소리에 놀라 뒷집 개가 짖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땅에 나자빠진 건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키가 여덟 자는 족히 되어 보이는 것이 시뻘건 상투를 틀고, 울퉁불퉁한 어깨 위로 달빛을 받아 그림자를 길게 드리우고 있었습니다. 도깨비였습니다. 등짝이 땅에 먼저 닿았으니, 씨름으로 치면 완벽한 한 판. 마을 장정 열 명이 달라붙어도 꿈쩍 않을 것 같은 덩치가 흙먼지를 뒤집어쓴 채 멍하니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습니다.
그 앞에 한 사람이 서 있었습니다.
열일곱. 처녀라고 부르기엔 아직 앳된 얼굴에, 장사라고 부르기엔 팔뚝이 볏짚처럼 가늘었습니다. 흰 저고리 소매를 팔꿈치 위로 걷어 올린 채, 거친 숨을 몰아쉬고 있었습니다. 이마에 흙이 묻어 있었고, 무릎에서는 피가 배어 나왔습니다. 하지만 물러서지 않았습니다.
"한 판 더 하자."
처녀가 말했습니다. 목소리가 떨리지 않았습니다.
도깨비가 천천히 몸을 일으켰습니다. 뼈마디가 우두둑 소리를 냈습니다. 보름달이 도깨비의 얼굴을 비추자, 의외의 표정이 드러났습니다. 분노도 아니고, 창피함도 아니었습니다. 그건 호기심이었습니다. 장터에서 드문 물건을 발견한 사람이 눈을 반짝이듯, 도깨비가 처녀를 위아래로 훑어보았습니다.
"좋다."
도깨비가 입꼬리를 올렸습니다. 이빨 사이로 바람이 새어 나오는 것 같은 웃음이었습니다.
"대신, 이번에 네가 지면 조건이 있다."
처녀의 눈이 가늘어졌습니다.
"뭔데."
도깨비가 손가락으로 마을 쪽을 가리켰습니다. 초가지붕 위로 연기 한 줄 피어오르지 않는, 쥐죽은 듯 고요한 마을이었습니다.
"저 마을, 통째로 가져간다."
처녀의 주먹이 꽉 쥐어졌습니다. 손톱이 손바닥에 박히는 것도 몰랐습니다. 그 뒤로 보이는 마을에는 앓아누운 아버지가 있었고, 눈이 먼 어머니가 있었고, 젖먹이 동생이 있었습니다. 한 판의 씨름이 장난이 아니게 된 순간이었습니다.
이 처녀는 왜 한밤중에 도깨비 앞에 홀로 서 있었던 걸까요. 그리고 마른 체구의 처녀가 어떻게 도깨비를 메쳤는지, 그 비밀은 씨름판이 아니라 전혀 다른 곳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아무도 몰랐습니다. 이 밤의 씨름이 끝난 뒤, 이 마을에 어떤 일이 벌어지게 될지.
※ 2:
석 달 전, 이 마을에는 웃음소리가 있었습니다.
처녀의 이름은 순이. 마을 사람들은 그냥 절구집 딸이라고 불렀습니다. 아버지가 마을에서 유일하게 떡방아를 찧는 집이었으니까요. 순이네 마당에는 늘 찹쌀 불리는 냄새가 났고, 아버지의 노랫소리가 담장 너머로 흘렀습니다. 어머니는 눈이 안 보이는 대신 귀가 밝아서, 아버지가 방아 찧는 박자가 조금만 어긋나도 부엌에서 소리쳤습니다.
"여보, 오른발 박자 밀렸어!"
아버지는 껄껄 웃으며 박자를 맞췄고, 순이는 그 옆에서 절구를 찧었습니다. 열일곱 처녀가 절구질을 한다고 하면 다들 고개를 갸웃하겠지만, 순이네 집에서는 자연스러운 풍경이었습니다. 아버지 허리가 안 좋은 날에는 순이가 대신 했고, 순이가 절구를 내리찧는 힘이 어찌나 좋은지, 찹쌀이 유독 찰지다며 이웃들이 먼 데서도 떡을 사러 왔습니다.
하지만 그해 여름, 장마가 유난히 길었습니다.
비가 열흘을 쏟았습니다. 개울이 넘쳤고, 논이 잠겼습니다. 마을 어귀의 오래된 느티나무가 벼락을 맞아 쓰러졌고, 사람들은 그것이 흉조라고 수군거렸습니다. 그리고 그 수군거림이 맞았다는 듯이, 장마가 끝난 자리에 역병이 찾아왔습니다.
처음에는 마을 끄트머리 외딴집 노인이 쓰러졌습니다. 그다음엔 장터 아낙이, 그다음엔 아이들이. 기침이 마을 전체를 덮었고, 순이네 집에도 어둠이 들이닥쳤습니다. 아버지가 방아를 찧다가 그대로 마당에 주저앉은 날, 순이는 생전 처음 아버지의 등이 그렇게 작다는 걸 알았습니다.
약을 구하러 읍내까지 이십 리를 달려갔지만, 약방 문은 닫혀 있었습니다. 약재가 떨어진 겁니다. 빈손으로 돌아오는 길, 순이는 걷다가 멈춰 서서 하늘을 올려다보았습니다. 입술을 꾹 깨물었습니다. 울지 않았습니다. 울 시간에 뭐라도 해야 했으니까요.
그날부터 순이가 마을을 먹여 살렸습니다. 아버지 대신 절구를 찧고, 어머니 대신 부엌을 돌보고, 이웃집 아이들 밥까지 지었습니다. 해가 뜨기 전에 일어나 해가 진 뒤에도 절구 앞을 떠나지 못했습니다. 팔에 힘이 풀려 절구공이를 놓칠 때면, 이를 악물고 다시 집어 들었습니다. 그렇게 석 달. 순이의 팔뚝은 가늘었지만, 그 안에 쌓인 힘은 남달랐습니다. 절구질이 만든 힘이었습니다. 땅을 향해 수천 번 내리찧는 동작, 그것은 씨름에서 상대를 땅에 꽂는 메치기와 놀랍도록 닮은 몸의 기억이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밤, 순이는 뒷산에서 이상한 소리를 들었습니다. 쿵, 쿵, 쿵. 일정한 박자로 땅을 울리는 소리. 마치 누군가 거대한 절구를 찧는 것 같았습니다. 순이는 문을 열고 밖을 내다보았습니다. 보름달이 떠 있었습니다. 그리고 달빛 아래, 마을 뒤편 빈터에 그것이 서 있었습니다. 시뻘건 상투. 울퉁불퉁한 어깨. 사람이 아닌 것이 분명한 그림자.
도깨비가 순이를 똑바로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이 마을에 힘 좀 쓴다는 놈이 누구냐."
순이의 심장이 쿵 내려앉았습니다. 하지만 발은 물러서지 않았습니다.
모두가 끝났다고 생각한 그 순간, 전혀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 3:
도깨비가 씨름을 걸어온 건, 장난이 아니었습니다.
마을 사람들 사이에는 오래된 이야기가 전해져 내려왔습니다. 장마가 지나고 역병이 돌 때, 도깨비가 내려온다. 도깨비는 마을에서 가장 힘이 센 자를 찾아 씨름을 건다. 이기면 역병을 거두어 가고, 지면 마을을 통째로 가져간다. 할머니들은 이 이야기를 아이들 잠자리에서 들려주었고, 아이들은 자라서 웃으며 잊어버렸습니다. 그저 겁 주려고 지어낸 옛이야기라고.
하지만 순이의 어머니만은 그 이야기를 웃어넘기지 않았습니다.
어머니가 눈을 잃은 것은 스물두 살 때였습니다. 순이를 낳기도 전의 일이었습니다. 어머니는 이 마을에서 태어나고 자랐고, 어렸을 적 한 번 도깨비를 보았다고 했습니다. 보름달이 뜬 밤, 마을 뒤편 빈터에서. 그때 마을에서 가장 힘이 센 청년이 도깨비와 씨름을 했고, 졌습니다. 그 뒤로 마을의 절반이 비었습니다. 사람들이 하나둘 떠났고, 남은 사람들은 그날 밤 이야기를 입 밖에 꺼내지 않았습니다. 어머니의 눈이 먼 것도 그 무렵이었습니다. 도깨비를 보았기 때문인지, 아니면 울다가 그리 된 것인지, 어머니 자신도 정확히는 모른다고 했습니다.
순이는 그 이야기를 열 살 때 처음 들었습니다. 어머니가 순이의 머리를 빗겨 주면서, 아무렇지 않은 목소리로 말했습니다.
"순아, 도깨비는 힘으로 이기는 게 아니여. 도깨비는 왼쪽으로 밀어야 해."
"왼쪽이요?"
"그래. 도깨비는 오른쪽이 세고 왼쪽이 약해. 그건 사람하고 반대여. 그러니까 왼쪽으로 밀면서 오른쪽 다리를 걸어. 그러면 넘어가."
순이는 그때 물었습니다. 엄마는 어떻게 그걸 아느냐고. 어머니는 빗질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다만 빗질하는 손이 아주 조금 느려졌습니다.
"그 청년이 졌을 때, 내가 바로 옆에서 봤으니까. 청년은 오른쪽으로 밀었어. 도깨비가 꿈쩍도 안 했지. 근데 마지막에 청년이 왼쪽으로 몸을 틀었을 때, 도깨비가 딱 한 번 흔들렸어. 딱 한 번. 그걸 내가 봤어."
어머니는 그날 이후로 그 이야기를 다시 꺼내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순이는 잊지 않았습니다. 왼쪽. 왼쪽으로 밀면서 오른쪽 다리를 건다. 그 말이 절구질을 할 때마다 몸속에서 메아리쳤습니다. 절구를 내리찧을 때 왼발을 축으로 삼고 오른발로 힘을 미는 동작. 순이는 의식하지 못했지만, 매일 수백 번씩 그 동작을 반복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밤, 도깨비 앞에 섰을 때 순이의 몸이 먼저 움직였습니다.
도깨비가 오른팔을 뻗어 순이의 허리를 잡았을 때, 순이는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절구질이 몸에 새겨놓은 대로, 왼쪽으로 무게를 틀면서 오른발을 도깨비 다리 뒤에 걸었습니다. 그리고 온 힘을 실어 내리꽂았습니다. 절구공이를 떡살 위로 내려찧는 바로 그 동작이었습니다.
도깨비의 눈이 휘둥그레졌습니다. 자기 몸이 왼쪽으로 기울어지는 것을 느끼면서도 막을 수가 없었습니다. 비틀. 쿵. 도깨비의 등짝이 땅에 먼저 닿았습니다.
※ 4:
두 번째 판이 시작되었습니다.
도깨비가 달라졌습니다. 첫 판에서 당한 게 어지간히 자존심이 상했는지, 입꼬리에 걸려 있던 여유가 사라졌습니다. 눈이 좁아졌고, 어깨가 낮아졌습니다. 장난치던 짐승이 진짜 사냥을 시작한 자세였습니다.
순이가 먼저 움직였습니다. 첫 판과 같은 동작이었습니다. 왼쪽으로 무게를 틀면서 오른발을 뻗어 도깨비 다리 뒤를 노렸습니다. 하지만 도깨비는 같은 수에 두 번 당할 만큼 어리석지 않았습니다. 순이의 오른발이 닿기도 전에 도깨비가 한 발 뒤로 빠지며 순이의 팔목을 낚아챘습니다. 그리고 그대로 잡아 돌렸습니다.
순이의 몸이 허공에 떴습니다.
등이 먼저 땅에 닿았습니다. 온몸에 충격이 전해졌고, 순간 숨이 끊어지는 것 같았습니다. 입 안에 흙이 들어왔고, 갈비뼈 어딘가에서 뭔가 우두둑 소리가 났습니다. 순이는 눈을 크게 떴지만 하늘의 달이 두 개로 보였습니다. 온몸이 뜨거웠습니다. 아픈 건지 열이 나는 건지 분간이 안 됐습니다.
도깨비가 내려다보고 있었습니다.
"한 판 씩. 다음이 마지막이다."
순이는 일어나려 했습니다. 팔에 힘을 주었지만, 몸이 말을 듣지 않았습니다. 한쪽 갈비가 부러진 게 틀림없었습니다. 숨을 들이쉴 때마다 옆구리에 못이 박히는 것 같았습니다. 겨우 상체를 일으켜 세웠을 때, 시야가 흐려졌습니다.
'일어나야 해.'
순이는 이를 악물었습니다. 하지만 몸은 솔직했습니다. 무릎이 풀렸고, 다시 흙바닥에 손을 짚었습니다. 손가락 사이로 흙이 비집고 들어왔습니다. 차가운 흙이었습니다.
그때 마을 쪽에서 기침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콜록, 콜록. 아버지의 기침이었습니다. 바람을 타고 오는 그 소리가 어찌나 선명한지, 마치 바로 옆에서 들리는 것 같았습니다. 순이의 눈에 아버지의 모습이 떠올랐습니다. 방아를 찧다가 쓰러지던 등. 기침을 하면서도 순이 보는 데서는 괜찮은 척 웃던 얼굴. 이불을 끌어올리는 순이의 손을 잡고 "우리 순이가 고생이 많다" 하던 거칠어진 손.
그리고 어머니. 보이지 않는 눈으로 순이의 얼굴을 더듬으며 "이년아, 밥은 먹고 다니냐" 하던 어머니. 순이가 대답 대신 웃으면 "웃음에 기운이 없다" 하며 손가락으로 순이 볼을 꼬집던 어머니. 그 어머니가 스물두 살에 잃어버린 눈으로 마지막에 본 것이 도깨비 앞에서 쓰러지는 청년이었다는 것을. 그래서 딸에게 왼쪽으로 밀라고 알려준 것을. 어머니는 그때부터 이 밤을 준비하고 있었던 건지도 모릅니다.
'엄마.'
순이의 눈에서 뜨거운 것이 흘렀습니다. 흙바닥에 방울이 떨어졌습니다. 한 방울. 두 방울. 순이는 울고 있었습니다. 태어나서 석 달 동안 단 한 번도 흘리지 않았던 눈물이 이 밤에 터진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순이의 손이 움직이고 있었습니다. 흙바닥을 움켜쥐고 있었습니다. 눈물을 흘리면서도, 주먹은 풀리지 않았습니다.
도깨비가 가만히 보고 있었습니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순이가 일어섰습니다. 한쪽 옆구리를 손으로 움켜잡은 채, 비틀거리면서도 두 발로 섰습니다. 얼굴에 흙이 묻어 있었고, 눈물 자국 위로 흙이 개어져 줄무늬가 졌습니다. 초라한 모습이었습니다. 누가 보아도 다음 판을 이길 몸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순이의 눈이 달랐습니다.
아까까지의 눈에는 두려움이 있었습니다. 이겨야 한다는 절박함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지금 순이의 눈에는 그런 것이 없었습니다. 텅 비어 있었습니다. 아니, 텅 비운 것이었습니다. 두려움도, 아픔도, 질 수 있다는 생각도 전부 내려놓은 눈이었습니다. 절구 앞에 서서 아무 생각 없이 떡살을 내리찧을 때의 그 눈. 몸이 알아서 움직이는, 오직 그 상태의 눈이었습니다.
순이가 입을 열었습니다.
"마지막이라며. 덤벼."
그날 밤, 보름달 아래서 열일곱 처녀가 울었습니다. 하지만 그 눈물이 어떤 의미였는지, 도깨비조차 알아차린 건 세 번째 판이 끝난 뒤의 일이었습니다.
※ 5:
세 번째 판. 마지막 판.
도깨비가 먼저 들어왔습니다. 첫 판의 여유도 없었고, 두 번째 판의 날카로움도 없었습니다. 온 힘을 실은 돌진이었습니다. 도깨비의 팔이 순이의 허리를 감아 쥐었고, 그 힘에 순이의 발이 땅에서 들릴 뻔했습니다. 보통 사람이라면 그 순간 승부가 끝났을 겁니다. 도깨비의 팔 힘은 수백 년 묵은 소나무를 뿌리째 뽑아낼 만큼 거대했으니까요.
하지만 순이는 들리지 않았습니다.
발가락에 힘을 주어 땅을 움켜쥐었습니다. 맨발이었습니다. 언제 신발이 벗겨졌는지도 몰랐습니다. 발가락 열 개가 흙 속으로 파고들었고, 순이의 몸이 뿌리를 내린 듯 버텼습니다. 갈비뼈에서 불이 났습니다. 숨을 쉴 때마다 칼로 옆구리를 찌르는 것 같았습니다. 하지만 느끼지 않기로 했습니다. 아픔은 나중에 느끼기로 했습니다.
도깨비가 힘을 더 주었습니다. 순이의 등뼈가 비명을 질렀습니다. 보름달이 흔들리는 것 같았습니다. 순이의 입술 사이로 신음이 새어 나왔지만, 발은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그 상태로 삼 초. 오 초. 십 초. 도깨비가 밀었고, 순이가 버텼습니다. 누가 먼저 무너지느냐의 싸움이었습니다.
그 순간 순이의 머릿속에 절구가 보였습니다.
매일 새벽, 마당에 놓인 절구. 절구공이를 두 손으로 쥐고 높이 들어올렸다가, 온 체중을 실어 내려찧는 동작. 그 동작에는 순서가 있었습니다. 먼저 버틴다. 공이의 무게를 온몸으로 느끼면서 잠깐 멈춘다. 그리고 떨어뜨리는 게 아니라 찧는다. 위에서 아래로, 하늘에서 땅으로, 온 힘을 한 점에 모아서 내리꽂는다.
'지금이다.'
순이가 버티던 힘을 순간적으로 풀었습니다. 도깨비가 앞으로 쏠렸습니다. 밀던 힘의 반작용이었습니다. 도깨비의 무게중심이 앞으로 기울어진 바로 그 찰나, 순이가 왼쪽으로 몸을 틀었습니다. 어머니가 알려준 그 방향. 절구질이 몸에 새긴 그 방향. 왼발이 축이 되었고, 오른발이 도깨비의 왼쪽 발목 뒤를 걸었습니다.
그리고 찧었습니다.
절구공이를 내려찧듯이, 온 체중과 온 힘과 석 달 치 눈물과 열일곱 해의 삶을 전부 실어서, 도깨비를 땅으로 내리꽂았습니다.
쿵.
땅이 울렸습니다. 마을 끝 개가 짖었고, 논두렁의 개구리가 일제히 울음을 멈추었습니다. 먼지가 피어올랐고, 그 먼지 사이로 보름달 빛이 비쳤습니다.
도깨비가 누워 있었습니다. 이번에는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아니, 일어날 수 없는 게 아니었습니다. 순이가 내려다보았을 때, 도깨비는 하늘을 올려다보며 가만히 있었습니다. 눈을 깜빡였습니다. 한 번. 두 번. 그리고 도깨비의 입에서 예상치 못한 소리가 나왔습니다.
웃음이었습니다.
"크하하하하."
땅이 울릴 만큼 큰 웃음이었습니다. 배를 잡고 구르는 것도 아니고, 비웃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진짜로 통쾌해서, 진짜로 즐거워서 나오는 웃음이었습니다. 도깨비가 웃으며 벌떡 일어났습니다. 흙을 툭툭 털고, 순이를 바라보았습니다.
순이는 그 자리에 주저앉아 있었습니다. 힘이 다 빠져서 서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갈비뼈가 쑤셨고, 온몸이 떨렸고, 손가락 하나 까딱할 기운도 남아 있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고개는 들고 있었습니다. 도깨비를 올려다보고 있었습니다.
도깨비가 순이 앞에 쪼그려 앉았습니다. 여덟 자 키의 도깨비가 쪼그려 앉으니 그래도 순이보다 머리 하나는 더 컸습니다. 도깨비의 눈이 순이의 눈과 마주쳤습니다. 시뻘건 눈동자 안에 보름달이 비쳐 있었습니다.
"네 이름이 뭐냐."
"순이."
"순이."
도깨비가 그 이름을 되뇌었습니다. 마치 입 안에서 굴려보듯이, 천천히.
"순이, 너한테 물어보마. 아까 두 번째 판 지고 나서, 왜 울었냐."
순이는 대답하지 않았습니다. 입술을 꾹 다물고 있었습니다.
"무서워서 운 거냐."
순이가 고개를 저었습니다.
"아파서 운 거냐."
순이가 다시 고개를 저었습니다.
도깨비가 고개를 갸웃했습니다.
"그럼 왜."
순이의 입이 천천히 열렸습니다.
"우리 엄마가."
목이 메었습니다. 한 번 삼켰습니다.
"우리 엄마가 눈 멀기 전에 마지막으로 본 게, 도깨비한테 지는 사람이었다고 했어요."
도깨비의 표정이 변했습니다.
"그래서 엄마가 나한테 왼쪽으로 밀라고 알려줬어요. 엄마는 그때부터 알고 있었던 거예요. 언젠가 도깨비가 또 올 거라는 걸. 그리고 그때 싸울 사람이 나밖에 없을 거라는 걸."
순이의 눈에서 다시 물기가 번졌습니다.
"울었던 건요, 엄마가 얼마나 무서웠을까 생각하니까. 스물두 살에 그걸 보고도, 딸한테는 무서운 이야기 대신 이기는 방법을 알려준 거잖아요."
도깨비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한참을 가만히 있었습니다. 보름달이 구름 사이로 들어갔다 나왔습니다. 바람이 한 줄기 불었습니다.
그리고 도깨비의 시뻘건 눈에서, 빛나는 것이 하나 흘렀습니다.
도깨비의 눈물이었습니다.
하지만 이야기는 여기서 끝나지 않았습니다.
※ 6:
도깨비가 일어났습니다.
눈물을 흘렸던 표정은 이미 사라지고, 평소의 시뻘건 얼굴로 돌아와 있었습니다. 하지만 눈빛은 아까와 달랐습니다. 순이를 내려다보는 그 눈에 장난기도, 승부욕도 남아 있지 않았습니다. 그 자리에 놓인 건, 순이가 태어나서 한 번도 본 적 없는 종류의 빛이었습니다. 굳이 사람의 말로 옮긴다면, 존중이라는 것에 가장 가까웠을 겁니다.
도깨비가 등 뒤에서 무언가를 꺼냈습니다. 허름한 보자기에 싸인 나무 절구공이 하나였습니다. 보통 절구공이보다 한 뼘은 짧았고, 나무 표면에 이상한 무늬가 새겨져 있었습니다. 달빛을 받으니 무늬가 은빛으로 반짝였습니다. 도깨비가 그것을 순이 앞에 내려놓았습니다.
"약속대로 역병을 거두어 가마. 내일 아침이면 네 아비 기침이 멈출 거다."
순이의 눈이 커졌습니다.
"이건 내가 따로 주는 거다."
도깨비가 절구공이를 가리켰습니다.
"이걸로 찧으면 뭐든 약이 된다. 쌀을 찧으면 기운이 나는 떡이 되고, 콩을 찧으면 열을 내리는 가루가 된다. 대신 조건이 있다."
"뭔데요."
"남한테 팔면 안 된다. 아픈 사람한테 그냥 나눠줘야 한다. 파는 순간 그냥 나무토막이 되어버린다."
순이가 절구공이를 집어 들었습니다. 손에 닿는 순간 따뜻한 기운이 올라왔습니다. 무거워야 할 나무가 깃털처럼 가벼웠고, 손에 딱 맞았습니다. 마치 원래 순이의 것이었던 것처럼.
도깨비가 돌아서며 마지막으로 말했습니다.
"순이, 내가 수백 년을 살면서 씨름을 졌을 때 처음 운 건 네가 세 번째다. 첫 번째는 내가 어릴 때 이야기고, 두 번째는 니 어미가 말한 그 밤이다."
순이가 눈을 깜빡였습니다.
"그 밤에도 우셨어요?"
도깨비가 멈추었습니다. 뒤돌아보지 않았습니다.
"그때는 내가 이겼는데 울었다. 이기고도 기분이 안 좋았어. 그 청년이 마지막에 왼쪽으로 몸을 틀었거든. 방법을 알고 있었는데 힘이 모자랐던 거다. 그게 불쌍했어."
바람이 불었습니다.
"근데 오늘은 지고도 기분이 좋으니까. 이상한 밤이다."
도깨비가 웃었습니다. 그리고 걸었습니다. 빈터를 지나 뒷산으로, 뒷산을 넘어 달빛 속으로. 시뻘건 상투가 점점 작아지다가, 보름달 속으로 스며들 듯 사라졌습니다.
순이는 그 자리에 한참을 앉아 있었습니다.
동이 트기 시작했습니다. 하늘 끝이 연분홍으로 물들었고, 새가 울기 시작했습니다. 순이는 절구공이를 가슴에 안고 일어섰습니다. 옆구리가 여전히 쑤셨고, 온몸에 흙이 묻어 있었고, 무릎의 피는 마르지도 않았습니다. 하지만 발걸음은 가벼웠습니다.
마을에 돌아오니, 아버지의 방에서 기침 소리가 멈추어 있었습니다. 이불 속에서 평온한 숨소리가 새어 나왔습니다. 순이는 아버지 방문 앞에 잠깐 섰다가, 소리 없이 부엌으로 갔습니다. 솥에 불을 지피고, 쌀을 씻었습니다. 그리고 도깨비가 준 절구공이로 쌀을 찧기 시작했습니다.
쿵, 쿵, 쿵.
그 소리에 어머니가 잠에서 깼습니다. 보이지 않는 눈으로 부엌 쪽을 향하더니, 가만히 미소를 지었습니다. 아무것도 묻지 않았습니다. 다만 이불 속에서 손을 모으고, 아무도 모르게 두 번 절했습니다.
그 뒤로 순이네 마당에는 매일 사람들이 줄을 섰습니다. 떡을 사러 온 게 아니었습니다. 아픈 아이를 안고 온 어미가 있었고, 허리가 굽은 노인이 지팡이를 짚고 왔습니다. 순이는 절구로 쌀을 찧어 떡을 만들고, 콩을 빻아 가루를 만들어 하나도 빠짐없이 나누어주었습니다. 한 번도 돈을 받지 않았습니다. 절구공이는 신기하게도 닳지 않았고, 찧을수록 무늬가 선명해졌습니다.
마을에 웃음소리가 돌아왔습니다. 아버지가 다시 방아를 찧기 시작했고, 어머니는 부엌에서 박자 타령을 했습니다. 개울가에 아이들이 뛰어놀았고, 장터에 사람이 모이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해마다 보름달이 뜨는 밤이면, 순이는 마당에 나와 달을 올려다보았습니다. 뒷산 너머로 아주 가끔, 쿵 쿵 쿵 하고 땅을 울리는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순이는 그 소리를 들을 때마다 입꼬리가 올라갔습니다.
그리고 절구공이를 한 번 꼭 쥐었다 놓으며, 혼자 중얼거렸습니다.
"아저씨도 잘 지내죠."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그날 밤은 유독 바람이 따뜻했고, 보름달이 유난히 환했습니다.
■ 엔딩
세상에서 제일 센 힘은 주먹에서 나오지 않습니다. 매일 새벽 묵묵히 절구를 찧던 손에서, 눈 먼 어머니가 딸에게 남긴 한마디에서, 아파도 울지 않겠다고 이를 악물던 열일곱 살의 마음에서 나옵니다. 도깨비는 수백 년을 살았지만, 그 밤에 처음 알았을 겁니다. 지고도 기분 좋은 씨름이 있다는 것을. 힘보다 단단한 것이 사람의 마음이라는 것을. 오늘 하루가 힘들었던 분들께 이 이야기를 바칩니다. 당신이 매일 묵묵히 견디고 있는 그 절구질이, 언젠가 도깨비도 울리는 한 판이 될 겁니다. 이 이야기가 마음에 남으셨다면, 구독과 알림 설정으로 함께해 주세요. 다음 이야기에서 또 뵙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