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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깨비와의 영혼결혼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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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킹멘트 (234자)
만석꾼 황부자의 외동딸이 열여덟 꽃다운 나이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아버지는 딸을 시집보내겠다며 다섯 고을을 돌았지만, 죽은 총각 사주 하나 내주는 집이 없었지요. 그때 늙은 무당이 말했습니다. "그 아씨 사윗감은 열한 해 전에 이미 정해졌소." 사윗감은 뒷산 도깨비였습니다. 마을 사람들은 저주받는다며 짐을 싸 도망쳤지요. 달도 없는 그믐밤, 신랑 신부가 맞절을 하던 바로 그 순간, 붉은 관 뚜껑이 스르르 열리며…
※ 1: 곳간이 일곱인 집
충청도 청안 고을에 황만중이라는 만석꾼이 살았더랍니다. 논이 어찌나 넓었던지 그 집 논두렁만 밟고 돌아도 하루해가 저문다 했지요. 곳간이 일곱 채요, 그 일곱 채마다 자물쇠가 세 개씩 걸려 있었더랍니다.
헌데 이 양반, 재물은 산더미처럼 쌓아두고도 인심은 좁쌀 한 톨만 했지요.
가을걷이 철만 되면 새벽부터 마당에 소작인들을 줄 세워놓고 되질을 시켰더랍니다. 됫박을 손으로 꾹꾹 눌러 담게 하고, 그러고도 모자라 마당에 흘린 낟알까지 비질을 해서 쓸어 담게 했지요.
"어르신, 올여름 물난리에 논이 반이나 잠겼습니다요. 반만 받아주시면…"
"물난리는 하늘이 낸 게지 내가 낸 게냐. 소작료는 소작료다."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마당에 엎드린 사람들 어깨가 들썩였더랍니다. 그래도 황만중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지요. 오히려 곰방대를 툭툭 털며 이러는 겁니다.
"울 힘이 있거든 그 힘으로 논이나 갈아라."
야박하죠. 진짜 야박하죠.
그 집 늙은 하인 돌쇠가 보다 못해 한마디 거들었더랍니다.
"어르신, 지가 봐도 올해는 좀 심한디유. 김첨지네는 애가 넷인디, 저러다 겨울을 못 나겄어유."
"돌쇠 네가 언제부터 내 곳간을 걱정했더냐."
"곳간이 아니라 사람을 걱정한 건디유…"
"시끄럽다."
돌쇠는 그만 입을 다물고 말았지요.
헌데 이 집에 딱 한 사람, 그 서슬 퍼런 성정을 녹이는 이가 있었더랍니다. 외동딸 단이였지요.
단이는 그해 열여덟이었습니다. 눈매가 순하고 목소리가 낮아서, 말을 하면 방 안의 공기가 조용해지는 그런 처녀였더랍니다. 아버지가 아무리 호통을 쳐도 단이가 옆에 와서 소매를 살며시 잡으면 그 호통이 반으로 줄었지요.
그런데 이 처녀, 아버지 몰래 하는 일이 하나 있었더랍니다.
밤이 이슥해지면 부엌 뒷문으로 살그머니 나가는 겁니다. 치마 속에 쌀자루를 감추고서 말이지요. 그러고는 마을 초입 김첨지네 사립문 앞에 두고 오고, 다음 날은 과부 삼월네 부엌 앞에 두고 오고, 그다음 날은 눈먼 노인네 툇마루에 두고 오고.
곳간 열쇠는 아버지 베개 밑에 있었지요. 단이는 아버지가 잠들기를 기다렸다가 그 열쇠를 빼내고, 새벽닭이 울기 전에 도로 넣어두었더랍니다. 그 조마조마한 걸음을 몇 해나 계속했지요.
돌쇠는 진작에 알고 있었습니다. 알면서도 모른 척, 오히려 마당에 개가 짖으면 얼른 나가서 개 목덜미를 붙잡아주었지요.
"아씨, 이러다 어르신께 들키면 지까정 쫓겨나유."
"돌쇠 아저씨."
"예."
"우리 곳간에 쌀이 몇 섬이나 있는지 아세요?"
"많쥬. 셀 수가 없쥬."
"그 쌀이 다 어디서 왔을까요."
돌쇠는 대답을 못 했더랍니다. 그저 등불을 들어 아씨 발밑을 비춰주었지요.
단이가 아버지 앞에서 딱 한 번 대든 적이 있었더랍니다. 김첨지네 소를 끌어가던 날이었지요.
"아버지, 그 소를 끌어가시면 김첨지네는 내년 농사를 어찌 짓습니까."
"소를 잡히고 빌려 갔으니 소로 갚는 게 이치다."
"이치는 이치인데요, 아버지."
"말해 보아라."
"그 이치대로라면, 우리 집 곳간의 쌀은 무엇으로 갚아야 합니까. 그 쌀은 누가 심고 누가 벴는지요."
황만중이 곰방대를 든 채로 한참을 딸을 쳐다보았더랍니다. 대꾸를 못 했지요. 그러고는 헛기침을 두어 번 하더니 방으로 들어가 버렸습니다.
그날 밤 김첨지네 외양간에 소가 도로 매여 있었더랍니다. 누가 끌고 갔는지는 온 마을이 다 알면서도 아무도 입 밖에 내지 않았지요.
이 단이한테는 어릴 적부터 남들이 모르는 사연이 하나 있었더랍니다.
일곱 살 되던 해 정월이었지요. 단이가 뒷산에서 그만 길을 잃었더랍니다. 눈이 무릎까지 쌓인 날이었고, 해는 벌써 산등성이로 넘어가고 있었지요. 온 집안이 발칵 뒤집혀 횃불을 들고 산을 뒤졌습니다.
그런데 밤이 깊어서, 단이가 제 발로 마을 어귀에 걸어 내려왔더랍니다.
얼굴에 상처 하나 없고, 손발도 얼지 않았고, 오히려 배가 부르다고 했지요.
"어디 있었느냐."
"바위 밑에요."
"혼자 있었느냐."
"아니요. 아저씨하고요."
"무슨 아저씨."
"키가 아주 크고, 눈썹이 새까맣고, 웃으면 이가 이만큼 큰 아저씨요."
어른들 낯빛이 하얗게 질렸더랍니다. 그 산에 사람이 살 리가 없으니까요.
"그 아저씨가 뭘 주더냐."
"메밀묵이요. 커다란 사발에 가득 주면서, 다 먹으면 집에 데려다준다고 했어요."
그 말에 마을 노인들이 서로 눈짓을 주고받았지요. 그 뒷산 바위굴에 예로부터 도깨비가 산다는 말이 있었거든요. 밤에 지나가면 파란 불이 따라온다, 씨름을 하자고 붙잡는다, 그런 얘기가 대대로 내려왔습니다.
황만중은 그 말을 듣고 펄쩍 뛰었더랍니다. 딸을 방에 가두다시피 하고, 뒷산 쪽으로는 얼씬도 못 하게 했지요.
허나 단이는 그 뒤로 해마다 정월 열나흘이면 몰래 산에 올라갔더랍니다. 손수 쑨 메밀묵 한 사발을 그 바위 앞에 놓고, 큰절을 한 번 하고 내려왔지요.
열여덟이 되도록 한 해도 거르지 않았습니다. 눈이 와도 가고, 비가 와도 가고, 몸살이 나도 갔더랍니다.
돌쇠가 물은 적이 있지요.
"아씨, 그 바위에 뭐가 있간디 그러신대유."
"밥 한 그릇 얻어먹은 값이에요."
"십 년이 넘었는디유."
"열 해가 지나도 얻어먹은 건 얻어먹은 거지요."
그 말에 돌쇠는 괜히 코끝이 시큰했더랍니다.
그해 여름이었습니다.
단이가 우물가에서 물을 긷다가 그대로 폭 쓰러졌더랍니다.
열이 불덩이 같았지요. 온 고을 의원이란 의원은 다 불러들였습니다. 황만중이 평생 처음으로 곳간 문을 활짝 열었더랍니다. 약값이라면 얼마든지 내겠다고, 산삼이든 녹용이든 다 가져오라고 소리를 질렀지요.
허나 단이는 눈을 뜨지 못했습니다.
읍내에서 제일 용하다는 늙은 의원이 사흘을 붙어 앉아 맥을 짚더니, 고개를 갸웃거렸더랍니다.
"이상합니다."
"무엇이 이상하단 말이냐."
"맥이 끊긴 것도 아니고 이어진 것도 아닙니다. 꼭 누가 이 아이 손목을 붙잡고 놓아주지 않는 것 같습니다."
"그게 무슨 소리야!"
"소인도 삼십 년 의원 노릇에 이런 맥은 처음입니다."
황만중은 그 의원을 마당으로 내쫓았지요. 그러고는 방으로 들어가 딸의 손을 두 손으로 감싸 쥐었습니다. 평생 셈만 하던 그 손이 사시나무처럼 떨렸더랍니다.
닷새째 되던 날 새벽, 단이의 숨이 아주 조용해졌더랍니다.
황만중은 딸의 손을 붙잡고 아이처럼 울었지요. 그 딱딱하던 만석꾼이 마당에 주저앉아 땅을 치며 울었더랍니다.
'내가 무슨 죄를 지었길래.'
돌쇠가 곁에서 같이 울다가, 문득 이상한 것을 보았습니다.
그 무더운 여름날 새벽인데, 뒷산 쪽에서 파란 불빛 하나가 스르르 내려오고 있었더랍니다.
※ 2: 사윗감을 구하러 다섯 고을
그렇게 황단이는 열여덟 꽃다운 나이에 세상을 떠났더랍니다.
만석꾼 집 초상인데 조문객이 스무 명을 넘지 못했지요. 그것도 대부분은 황만중에게 돈을 빌려 쓴 사람들이라 안 올 수가 없어 온 이들이었습니다. 마당에 차일을 치고 국밥을 백 그릇 끓여놨는데, 절반이 그대로 식었더랍니다.
돌쇠가 그 식은 국밥을 치우면서 혼자 중얼거렸지요.
'아씨는 저 사람들한테 쌀을 퍼줬는디, 정작 아씨 가는 길에는 아무도 안 오는구먼유. 아무도 몰랐응께 그런 거쥬. 아씨가 밤마다 뭔 짓을 하고 다녔는지 아무도 몰랐응께.'
황만중은 딸의 관을 붉은 비단으로 감쌌더랍니다. 도성에서 비단 장수를 불러다 제일 좋은 것으로 열 필을 사서, 관 전체를 신부 다홍치마 빛깔로 둘렀지요. 사람들이 그걸 보고 또 수군거렸습니다. 죽은 사람 관에 붉은 것을 두르면 안 된다고, 저건 초상 관이 아니라 혼례 가마라고요.
황만중은 그 소리를 듣고도 비단을 걷지 않았더랍니다.
발인을 하려는데, 황만중이 관을 못 내가게 했더랍니다.
"못 내간다."
"어르신, 날이 더워서 더는 못 미룹니다요."
"내 딸이 처녀 몸으로 간다. 시집 한 번 못 가보고 간다. 이대로 묻으면 저승에서 갈 데가 없어."
옛날에는 그런 말이 있었지요. 혼인 못 하고 죽은 처녀 총각은 저승에서도 문 안에 못 들고 문밖을 떠돈다고요. 부모 된 마음에 그것이 제일 사무쳤더랍니다.
황만중이 마당 한가운데 서서 소리를 질렀지요.
"영혼결혼식을 시킬 것이다!"
영혼결혼식이라는 게 무엇이냐 하면요. 죽은 처녀와 죽은 총각의 사주를 맞춰서, 산 사람 혼례처럼 초례청을 차리고 혼인을 시켜주는 것이지요. 그러고는 두 사람의 무덤을 나란히 써주는 겁니다.
말은 쉽지요. 그런데 죽은 총각을 어디서 구하겠습니까.
황만중이 그날부터 사방으로 사람을 놓았더랍니다. 인근 다섯 고을에 매파를 보내고, 죽은 총각이 있다는 집이면 밤낮없이 찾아갔지요. 논 열 마지기를 얹어주겠다, 스무 마지기를 주겠다, 나중에는 서른 마지기까지 불렀더랍니다.
그런데 이게 참 희한하지요. 한 집도, 단 한 집도 승낙을 하지 않는 겁니다.
건넛마을 이생원 댁은 대문을 아예 걸어 잠갔더랍니다.
"우리 아이 사주는 못 내줍니다."
"논 서른 마지기요. 서른 마지기면 그 댁 살림이 펴집니다."
"됐습니다."
"이유가 무엇이오!"
이생원이 대문 안쪽에서 딱 한마디를 했지요.
"황 부자 댁 사위는, 죽어서도 소작료를 물어야 할 것 같아서요."
황만중은 그 자리에 얼어붙었더랍니다.
또 다른 집에서는 이런 말도 들었지요.
"우리 아이가 살아서 그 댁 논을 부쳤소. 그 댁 마당에서 되질하다가 병을 얻었고, 약 한 첩 못 쓰고 죽었소. 죽어서까지 그 댁 마당에 세울 수는 없소."
세 번째 집은 더했습니다.
읍내 밖 주막거리에 아들을 잃은 홀어미가 살았는데, 그 집만은 가난해서 응할 줄 알았지요. 황만중이 아예 논문서를 품에 넣고 갔더랍니다.
"논 마흔 마지기요. 문서를 가져왔소."
홀어미가 마당에 앉아 짚신을 삼다가 고개도 안 들었지요.
"어르신, 우리 아들이 몇 살에 죽었는지 아십니까."
"내 어찌 알겠소."
"열아홉이오. 어르신 댁 물레방앗간에서 밤일을 하다가 팔이 끼었지요. 그때 제가 어르신 댁 대문을 두드렸습니다. 사흘 밤을 두드렸습니다."
황만중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더랍니다.
"그때 어르신은 나오지 않으셨어요. 하인을 시켜 이러셨지요. 방앗간 일은 제가 좋아서 한 것이니 우리 집과 상관이 없다고."
"…"
"이제 와서 그 아이더러 어르신 사위가 되라 하십니까."
홀어미가 짚신 삼던 손을 멈추고 처음으로 고개를 들었지요.
"논 마흔 마지기가 아니라 이 나라 논을 다 주셔도 안 됩니다. 돌아가세요."
황만중은 그 마당에서 한참을 서 있다가, 논문서를 품에 도로 넣고 돌아섰더랍니다.
문전박대라는 말이 있지요. 황만중은 그 말을 그해 여름에 처음으로 몸으로 배웠더랍니다. 평생 남의 집 대문을 두드려 본 적이 없는 사람이었거든요. 늘 사람들이 그의 대문을 두드렸지요.
빈손으로 돌아오던 밤, 황만중이 논두렁에 주저앉았더랍니다.
달빛에 자기 논이 끝도 없이 펼쳐져 있었지요. 만석꾼이라, 그 넓은 논이 다 제 것이라, 그런데 그 논을 다 주고도 딸의 짝 하나를 못 구하는 겁니다.
돌쇠가 뒤에서 등불을 들고 서 있다가 조심스레 입을 뗐지요.
"어르신."
"지가 이런 말씀 드리면 혼날 줄 아는디유. 그래도 한 번은 해야겄어유."
"말해라."
"사람들이 아씨를 미워해서 그러는 게 아니어유. 아씨는 다들 좋아했어유. 근디 어르신을…"
돌쇠가 말끝을 흐렸더랍니다. 황만중이 고개를 들었지요.
"내가 무어냐."
"어르신 곳간이 일곱이지유. 근디 그 일곱 중에 하나라도 열린 적이 있었남유."
황만중은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습니다.
"김첨지네 애가 작년에 죽었을 적에유, 어르신은 그날도 되질을 하셨어유. 상갓집 옆 마당에서 됫박을 눌러 담으셨지유. 사람들이 그걸 다 봤어유."
"…"
"지가 이런 말 할 처지는 아닌디유. 아씨가 밤마다 쌀자루를 이고 나가신 것도, 어르신이 지으신 빚을 아씨가 갚고 다니신 거였어유."
황만중이 두 손으로 얼굴을 감쌌더랍니다.
'내가 저 아이를 그렇게 부려먹었구나. 산 사람일 적에도, 그리고 지금도.'
그날 이후로 황만중은 사흘을 밥을 넘기지 못했지요. 딸의 관은 안방에 그대로 있고, 날은 자꾸 더워지고, 마을에서는 벌써 수군거리는 소리가 났더랍니다. 만석꾼 딸이 원귀가 되어 마을을 해코지할 거라고요.
나흘째 되던 날 저녁이었습니다.
대문 밖에서 방울 소리가 들렸더랍니다. 딸랑, 딸랑, 딸랑.
돌쇠가 나가 보니 웬 늙은 무당 하나가 서 있었지요. 등이 굽고, 눈이 한쪽은 희뿌옇고, 손에는 낡은 방울을 든 노파였습니다.
"이 댁에 시집 못 간 처녀가 누웠지."
"뉘신디유."
"뒷산 아랫말 사는 삼월네요. 스무 해 전에 그 아씨한테 쌀 한 되 얻어먹은 사람이오."
돌쇠 눈이 휘둥그레졌더랍니다.
"들어가서 전하시오. 사윗감을 구하러 다섯 고을을 도셨다 들었소. 헛걸음하셨소."
"그게 무슨…"
늙은 무당이 방울을 한 번 흔들었지요.
"그 아씨 사윗감은 진작에 정해져 있소. 열한 해 전부터."
※ 3: 신랑 자리는 빈 멍석
늙은 무당 삼월네가 안방으로 들어섰더랍니다.
붉은 비단으로 감싼 관 앞에 서더니, 한참을 말없이 내려다보았지요. 그러고는 방울을 딱 한 번 흔들었습니다.
딸랑.
"아직 안 갔소."
"무슨 소리요."
"이 아씨 혼이 아직 저승 문을 안 넘었소. 문턱에 붙들려 있소."
황만중이 벌떡 일어났더랍니다.
"붙들려 있다니, 누가 붙든단 말이오!"
"열한 해 전 정월 열나흘부터 뒷산 바위 앞에 메밀묵을 놓아온 이가 누구요."
방 안이 조용해졌지요. 돌쇠가 문지방 앞에서 숨을 삼켰더랍니다.
"우리 아씨가…"
"그렇소. 그 바위 밑에 사는 이가 있소. 사람은 아니오."
황만중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더랍니다. 열한 해 전, 눈 속에서 딸이 살아 내려오던 그 밤이 떠올랐거든요.
"도깨비란 말이오?"
"그이가 이 아씨 손목을 붙잡고 있소. 놓으면 저승으로 가니 못 놓는 게지."
"그럼 놓게 하시오! 무당이면 굿을 하든 부적을 쓰든 떼어놓으시오!"
삼월네가 고개를 저었더랍니다.
"떼면 아씨는 그길로 저승 문을 넘소. 영영 못 돌아오오."
황만중이 주저앉았지요.
"그럼 어쩌란 말이오."
"혼례를 올리시오."
"……무어라?"
"산 사람도 죽은 사람도 아닌 자리에 아씨가 걸려 있소. 그 자리에서 데려오려면 명분이 있어야 하오. 남남이 남의 혼을 붙들면 그건 붙잡는 것이지만, 지아비가 지어미의 혼을 붙들면 그건 지키는 것이오."
"도깨비와 내 딸을 혼인시키란 말이오!"
"사윗감을 다섯 고을에서 못 구하셨다면서요."
황만중은 대답을 못 했더랍니다.
"어르신이 못 구한 사윗감을, 아씨는 일곱 살에 이미 구해놓았소."
기가 막히죠. 정말 기가 막히죠.
이 소문이 마을에 퍼지는 데는 반나절도 안 걸렸더랍니다.
만석꾼 황부자가 딸을 도깨비한테 시집보낸다더라. 초례청을 차리고 도깨비를 신랑으로 앉힌다더라. 그 혼례를 본 사람은 삼 년 안에 화를 입는다더라.
마을이 발칵 뒤집혔지요.
"도깨비 혼사가 붙으면 그 집만 재앙을 받는 게 아니여! 온 마을이 받는 거여!"
"내 아들 장가도 못 보냈는디 이게 무슨 날벼락이여!"
그날 저녁부터 마을 사람들이 짐을 싸기 시작했더랍니다. 어떤 집은 아이들만 처가로 보냈고, 어떤 집은 소를 끌고 아예 재를 넘어갔지요. 사흘 만에 마을 서른 몇 가구 중 스무 가구가 텅 비었더랍니다.
떠나면서 황부자네 담장에 소금을 뿌리고 가는 이도 있었고, 대문에 팥을 던지고 가는 이도 있었습니다.
"황 부자! 당신 혼자 잘 살아 보시오! 살아서도 마을을 갉아먹더니 이젠 죽은 딸까지 앞세워서 마을을 잡네!"
그중에 김첨지도 있었더랍니다. 소를 끌고 나가다가, 황부자네 대문 앞에서 한참을 서성였지요.
같이 가던 아낙이 재촉했습니다.
"뭐 하우. 얼른 갑시다."
"…"
"저 집 딸이 죽어서 우리한테 좋을 게 뭐요. 저 영감 논 부치느라 우리 등골이 다 휘었는디."
김첨지가 소 고삐를 쥔 채로 이런 말을 했더랍니다.
"임자, 우리 애들이 재작년 보릿고개를 어찌 넘겼는지 아우?"
"쌀자루가 사립문에 놓여 있었지요. 누가 놨는지도 모르는."
"그게 누구였을 것 같소."
아낙이 입을 다물었더랍니다.
"나는 알고 있었소. 두 번째 밤에 봤소. 치마 밑에 자루를 감추고 뛰어가는 뒷모습을."
"그럼 왜 말을 안 했수."
"그 아씨가 아버지한테 혼날까 봐 그랬지."
김첨지가 소를 끌고 몇 걸음 가다가, 다시 멈춰 섰지요. 한참을 그렇게 서 있다가 결국 재를 넘어갔더랍니다. 소 고삐를 쥔 손등으로 자꾸 눈을 문지르면서요.
황만중은 그 소리를 대문 안에서 다 들었더랍니다. 한마디도 대꾸하지 않았지요.
'맞는 말이다. 하나도 틀린 말이 없다.'
돌쇠가 마당을 쓸면서 눈물을 훔쳤더랍니다.
"어르신, 지가 나가서 사람들 좀 붙잡아 볼까유."
"놔두어라."
"근디 어르신, 지도 솔직히 무섭구먼유. 도깨비가 어떤 것인지 지가 어려서부터 들은 얘기가 한 짐인디유."
"돌쇠야."
"예."
"너도 가거라. 논 열 마지기 떼어줄 테니 재 넘어가서 살아라."
돌쇠가 빗자루를 딱 놓았더랍니다.
"어르신."
"왜."
"지가 이 집에 몇 해나 있었는지 아신대유."
"…"
"서른두 해구먼유. 아씨 태어나는 것도 지가 봤구유, 아씨가 첫걸음마 하실 적에 그 손 붙잡아준 것도 지구먼유."
돌쇠가 다시 빗자루를 집어 들었지요.
"지가 안 가유. 아씨 혼례에 하객이 한 사람은 있어야 할 거 아니어유."
황만중이 그 자리에서 늙은 하인 앞에 고개를 숙였더랍니다. 만석꾼이 제 집 하인한테 머리를 숙인 겁니다.
혼례 날은 그달 그믐으로 잡혔더랍니다. 삼월네가 그날이라야 한다고 했지요. 달이 없는 밤이라야 그이가 내려온다고요.
준비랄 것도 없었습니다. 잔치를 벌일 손님이 없으니까요.
그래도 황만중은 초례청을 제대로 차렸더랍니다. 마당에 멍석을 깔고, 붉은 상보를 씌운 교배상을 놓고, 그 위에 밤과 대추를 괴고, 청실홍실을 늘어뜨렸지요. 촛대 두 개를 세우고, 닭 한 쌍 대신 목각 기러기 한 쌍을 올렸습니다.
신부 자리에는 붉은 비단을 감은 관을 그대로 모셨더랍니다. 관 위에 원삼을 펼쳐 덮고, 족두리를 얹었지요.
신랑 자리에는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그냥 빈 멍석 한 장이었지요.
삼월네가 그 빈 멍석 앞에 상 하나를 따로 놓으라 했더랍니다.
"무엇을 올리오."
"메밀묵이오. 큰 사발로 하나 가득."
황만중이 그날 밤 손수 부엌에 들어갔더랍니다. 평생 부엌 문턱을 넘어 본 적이 없는 사람이었지요. 메밀가루를 개는 법도 몰라서 돌쇠한테 물어가며 쒔습니다. 세 번을 태우고 네 번째에야 겨우 묵이 굳었더랍니다.
그 사발을 두 손으로 받쳐 들고 나오면서, 황만중이 이렇게 중얼거렸지요.
'우리 단이가 열한 해를 이걸 쑤었구나. 나는 한 번도 몰랐구나.'
황만중이 그 빈자리를 밤새 쳐다보았더랍니다.
'와 주시겠소. 정말 와 주시겠소.'
그믐날이 되었습니다.
해가 지자마자 바람이 이상하게 불었더랍니다. 여름인데 마당의 촛불이 얼어붙듯이 파랗게 떨렸지요.
돌쇠가 대문을 열어놓고 마당 끝에 섰습니다.
그때, 뒷산 쪽에서 불빛이 하나 떴더랍니다. 파란 불이었지요.
하나가 둘이 되고, 둘이 넷이 되고, 넷이 열이 되었습니다.
파란 불빛들이 산길을 타고 줄지어 내려오는데, 그 모양이 꼭 혼례 행렬 같았더랍니다.
돌쇠 다리가 후들거렸지요.
"어, 어르신… 오, 옵니다유. 신랑이 옵니다유."
※ 4: 그믐밤의 초례청
파란 불빛들이 마당으로 들어섰더랍니다.
그런데 이게 참 묘하지요. 가까이 오니 불빛이 아니라 등롱이었습니다. 푸른 종이를 바른 등롱을 하나씩 든 것들이 줄지어 대문을 넘어오는데, 키가 장정 두 사람만 하고, 걸음을 옮길 때마다 마당의 흙이 쿵쿵 울렸더랍니다.
돌쇠가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을 쳤지요.
세어보니 등롱을 든 것이 열둘이었더랍니다. 하나같이 패랭이를 눌러쓰고, 무명 바지저고리에 행전을 쳤는데, 그 차림이 영락없이 장가드는 집 사돈네 하인들 같았지요. 다만 걸음마다 흙이 파이고, 지나간 자리마다 풀이 파랗게 서리를 뒤집어썼더랍니다.
맨 앞의 것이 마당에 들어서더니 대뜸 이러는 겁니다.
"이 댁이 혼주 댁이오?"
돌쇠가 목소리도 안 나와서 고개만 끄덕였지요.
"신랑 행차요. 문을 크게 여시오."
돌쇠가 얼떨결에 대문을 활짝 밀어젖혔더랍니다. 그러고는 저도 모르게 이렇게 대답했지요.
"어, 어서 오세유… 오, 오시느라 욕보셨구먼유."
지금 생각하면 우습죠. 도깨비 행렬한테 인사를 한 겁니다. 헌데 돌쇠는 그때 진심이었더랍니다. 아씨 혼례에 온 손님이니까요.
그 행렬 한가운데, 사모관대를 갖춰 입은 이가 있었더랍니다.
키가 어찌나 큰지 대문 상방에 이마가 닿을 뻔했지요. 어깨는 문짝만 하고, 눈썹이 새까맣고, 머리는 상투를 틀었는데 그 상투가 보통 사람 주먹 두 개만 했더랍니다. 손에는 옹이가 툭툭 불거진 나무 방망이를 하나 들었지요.
그 얼굴을 본 순간, 황만중은 다리에 힘이 풀렸습니다.
'저 눈썹… 우리 단이가 말하던 그 눈썹이구나.'
삼월네가 마당 한가운데로 나가 방울을 세 번 흔들었더랍니다.
딸랑, 딸랑, 딸랑.
"신랑 드시오."
도깨비가 성큼성큼 걸어 들어와 빈 멍석 위에 섰지요.
멍석 앞 상에 놓인 메밀묵 사발을 한참 내려다보더랍니다. 그러고는 아주 낮은 목소리로 이랬지요.
"이건 그 아이가 쑨 게 아니로군."
황만중이 그 자리에 무릎을 꿇었습니다.
"내가 쒔소. 못 쒀서 세 번을 태웠소."
도깨비가 그 큰 얼굴을 돌려 황만중을 내려다보았더랍니다.
"열한 해 동안 자네는 부엌에 들어온 적이 없지."
"……없소."
"그 아이는 열한 해를 들어왔네."
황만중은 고개를 들지 못했지요.
삼월네가 다시 방울을 흔들었더랍니다.
"신부 드시오."
신부 자리에는 붉은 비단으로 감싼 관이 놓여 있었지요. 그 위에 원삼을 덮고 족두리를 얹어놓았습니다. 촛불이 파랗게 흔들리는데, 그 붉은 관이 꼭 다홍치마를 입고 앉은 새색시 같았더랍니다.
돌쇠가 눈물을 훔쳤지요.
'아씨… 이런 혼례가 세상에 어딨대유.'
초례가 시작되었습니다.
삼월네가 홀기를 부르는데, 목소리가 밤공기를 타고 멀리멀리 퍼졌더랍니다.
"관세위. 신랑 신부 손을 씻으시오."
도깨비가 대야에 손을 담갔지요. 그 손이 어찌나 큰지 대야 물이 절반이 넘쳐흘렀습니다. 관 앞에는 돌쇠가 대신 나가 물수건으로 관 뚜껑을 정성껏 닦았더랍니다.
"전안례. 기러기를 올리시오."
도깨비가 품에서 무언가를 꺼냈지요. 그런데 그게 목각 기러기가 아니었습니다.
살아 있는 기러기 한 쌍이었더랍니다.
한여름에 기러기가 어디 있겠습니까. 그런데 그 두 마리가 도깨비 손 위에서 얌전히 목을 맞대고 있었지요. 도깨비가 상 위에 내려놓자 기러기들이 날아가지도 않고 그대로 앉아 있었더랍니다.
돌쇠 입이 딱 벌어졌지요.
"합근례. 술잔을 나누시오."
표주박을 반으로 쪼갠 잔에 술을 부었더랍니다. 도깨비가 제 몫을 단숨에 비웠지요. 그러고는 나머지 반 잔을 관 앞에 조심스럽게 내려놓았습니다.
그런데 참 이상한 일이 벌어졌더랍니다.
관 앞에 놓인 그 술잔이, 아무도 손을 대지 않았는데 스르르 기울더니 저절로 비는 겁니다.
돌쇠가 헛바람을 들이켰지요.
"어, 어르신… 저것 좀 보세유."
황만중은 아무 말도 못 하고 그 잔만 쳐다보았더랍니다. 심장이 목구멍까지 올라왔지요.
"교배례. 신랑 신부 맞절하시오."
이 말이 떨어지자 마당이 아주 조용해졌습니다.
바람도 멎고, 촛불도 멎고, 등롱을 든 것들도 꼼짝을 안 했더랍니다.
도깨비가 관을 향해 천천히 몸을 굽혔지요. 그 큰 몸이 굽어지는데, 어찌나 정중한지 보는 사람 가슴이 다 서늘했더랍니다. 무릎을 꿇고, 두 손을 이마에 올리고, 아주 깊이 절을 했습니다.
한 번.
두 번.
세 번.
그리고 세 번째 절을 마치고 몸을 일으키는 그 순간이었습니다.
우지끈.
붉은 비단이 찢어지는 소리가 났더랍니다.
관 뚜껑이 안쪽에서부터 들썩였지요. 한 번, 두 번, 세 번. 그러더니 못이 튀어 오르고, 뚜껑이 스르르 밀려나면서 그대로 마당에 떨어졌더랍니다.
황만중이 비명을 질렀습니다.
"단아!"
관 안에서 하얀 손이 하나 올라왔더랍니다.
그 손이 관 모서리를 붙잡더니, 천천히, 아주 천천히 몸을 일으켰지요.
단이였습니다.
수의를 입은 채로, 머리는 곱게 쪽을 찐 채로, 얼굴이 백지장처럼 하얀 채로, 단이가 관 속에 앉아 있었더랍니다.
돌쇠가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지요.
"아, 아씨…"
황만중은 눈알이 튀어나올 지경이었습니다. 기쁨이 아니라 공포였지요. 죽은 딸이 도깨비 절을 받고 일어났으니, 이건 살아난 게 아니라 도깨비한테 넘어간 거라고 생각한 겁니다.
"안 된다! 이놈아, 내 딸 못 데려간다!"
황만중이 벌떡 일어나 도깨비한테 달려들었더랍니다.
만석꾼이라고는 하나 예순이 다 된 늙은이였지요. 그 늙은이가 산더미 같은 도깨비 앞을 가로막고 두 팔을 벌렸습니다.
"논이든 곳간이든 다 가져가라! 이 집을 통째로 가져가! 그 대신 내 딸만은!"
도깨비가 가만히 내려다보았더랍니다.
"자네, 지금 무엇을 내놓겠다고 했나."
"다 내놓는다 했다! 만석이면 만석 다!"
"만석을 내놓으면 딸을 살리겠다고?"
"그렇다!"
도깨비가 그 순간 아주 크게 웃었더랍니다. 웃는데 그 소리가 천둥 같아서 지붕의 기왓장이 다 덜그럭거렸지요.
"열한 해 전에도 그 소리를 했으면 좋았을 것을."
"……무슨 소리냐."
"자네 딸이 눈밭에서 얼어 죽게 되었을 적에, 자네 곳간은 잠겨 있었네. 그날 밤 그 산에서 굶어 죽은 아이가 셋이었지."
황만중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더랍니다.
"내가 자네 딸을 데려간 것이 아니라, 자네 딸이 나를 찾아온 것이네."
그때 관 속에서 목소리가 났습니다.
가늘고, 낮고, 열한 해 전 그 밤처럼 조용한 목소리였지요.
"아저씨."
도깨비가 고개를 돌렸더랍니다.
"오셨네요."
단이가, 관 속에 앉은 채로, 도깨비를 향해 살며시 웃었더랍니다.
※ 5: 열한 해의 메밀묵
황만중은 다리가 풀려 그 자리에 주저앉았더랍니다.
딸이 말을 하는 겁니다. 죽어서 나흘이나 관에 누워 있던 딸이, 눈을 뜨고, 웃고, 말을 하는 겁니다.
"단아… 단아, 아비다. 아비를 알아보겠느냐."
단이가 천천히 고개를 돌렸지요.
"아버지."
"오냐, 오냐!"
"제가 얼마나 누워 있었어요?"
"나흘이다! 나흘이나 되었다!"
단이가 눈을 껌뻑였더랍니다.
"저는 하룻밤인 줄 알았는데요."
도깨비가 그 옆에 털썩 주저앉았지요. 그 큰 몸이 앉으니 마당이 한 뼘은 좁아 보였습니다.
"이제 됐다. 이야기를 해도 되겠구나."
삼월네가 방울을 내려놓고 뒤로 물러섰더랍니다.
도깨비가 사모를 벗어 무릎에 놓고, 아주 천천히 입을 열었지요.
"내가 그 바위 밑에 산 지가 삼백 년일세."
황만중은 숨도 못 쉬고 들었습니다.
"삼백 년 동안 사람 구경을 안 한 건 아니야. 나무하러 오는 이도 있고, 산나물 뜯으러 오는 이도 있었지. 헌데 사람이란 게, 나를 보면 다 도망을 가더군."
"…"
"열한 해 전 그 겨울에, 눈밭에 아이 하나가 앉아 있더군. 손발이 파랗게 얼어서 이미 정신이 반쯤 나갔는데도, 나를 보고 도망을 안 가는 게야."
도깨비가 단이를 돌아보았지요.
"그래서 물었네. 무섭지 않으냐고."
단이가 조그맣게 웃었더랍니다.
"제가 뭐라 했지요?"
"배가 고파서 무서울 힘이 없다고 했지."
돌쇠가 그 대목에서 그만 소리 내어 울었습니다.
"그래서 묵을 쒀 먹였네. 삼백 년 만에 처음으로 남한테 밥을 차려준 게야. 그러고 업어다 마을 어귀에 내려주었지."
"…"
"그러고 나서 잊었네. 사람 아이란 게 금방 자라고 금방 잊으니까. 그런데 그해 정월 열나흘에, 그 바위 앞에 묵 한 사발이 놓여 있더군."
도깨비의 목소리가 조금 낮아졌더랍니다.
"이듬해에도 놓여 있었네. 그 이듬해에도. 열한 해를 하루도 안 틀리고 놓여 있었네."
황만중은 고개를 들 수가 없었지요.
"처음 몇 해는 그저 그런가 보다 했네. 헌데 다섯 해쯤 되니 이상하더군. 사람이란 게 이레만 지나도 잊는 것들인데, 이건 뭔가 싶었지."
"…"
"그래서 여섯 해째 되던 정월에 내가 바위 뒤에 숨어서 지켜봤네. 눈이 발목까지 쌓인 밤이었는데, 조그만 계집아이가 사발을 안고 비틀비틀 올라오더군. 넘어지면 사발부터 챙기고, 또 넘어지면 또 사발부터 챙기고."
돌쇠가 소맷자락으로 눈을 눌렀더랍니다.
"바위 앞에 사발을 놓고 절을 하는데, 뭐라 하는지 들어봤네."
황만중이 겨우 물었지요.
"뭐라 했소."
"올해도 잘 계셨느냐고 묻더군."
"…"
"삼백 년 동안 아무도 나한테 그런 걸 물은 적이 없었네."
도깨비가 잠깐 말을 멈췄다가 다시 이었습니다.
"눈이 허리까지 쌓인 해에도 왔더군. 발이 다 까져서 피가 났는데도 왔어. 내가 하도 기가 막혀서 딱 한 번 모습을 보이고 이랬네. 이제 그만 오라고. 밥값은 진작에 갚았다고."
"뭐라 하시던가요."
"밥값이 아니라 정을 갚는 거라 하더군."
도깨비가 손바닥으로 제 무릎을 탁 쳤더랍니다.
"삼백 년을 살면서 그런 말은 처음 들었네."
마당이 아주 조용해졌지요.
"그러다 올여름에, 정월도 아닌데 이 아이 기척이 산으로 오더군. 아니, 기척만 오고 몸은 안 오는 게야."
황만중이 겨우 입을 열었습니다.
"그게 무슨 말씀이오."
"혼이 온 게지. 몸은 저 집 방에 누워 있고, 혼이 저승 문턱까지 흘러가고 있더란 말일세."
도깨비가 제 손을 펴 보였더랍니다. 그 손바닥에 시커먼 자국이 나 있었지요.
"그래서 붙잡았네. 이 손으로."
"…"
"헌데 이게 참 난처한 노릇이야. 저승 문지기가 그러더군. 남남이 남의 혼을 붙들면 그건 훼방이라고. 이레 안에 놓지 않으면 이 아이 혼도 나도 같이 벌을 받는다고."
삼월네가 그제야 말을 보탰지요.
"그래서 제가 내려온 겁니다. 이레가 오늘 밤 자정이오."
황만중의 얼굴이 새하얘졌더랍니다.
"남남이면 훼방이지만, 지아비면 다르지. 혼인한 사이면 저승 문턱에서 지어미 손목을 붙드는 게 죄가 아니라 도리가 되네."
"그래서 혼례를…"
"그렇지. 명분이 필요했던 게야. 저 문서 좋아하는 저승 아전들한테 내밀 명분 말일세."
기가 막히죠. 도깨비가 저승 서류를 맞추느라 장가를 든 겁니다.
황만중이 마당에 이마를 대고 엎드렸더랍니다.
"내가 죽일 놈이오. 내 딸을 살린 게 내가 아니라 당신이오. 무엇이든 말씀만 하시오. 논이든 곳간이든 이 목숨이든."
그런데 도깨비가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이러는 겁니다.
"이 혼사는 오늘로 물리겠네."
황만중이 고개를 번쩍 들었지요.
"무, 무슨 소리요."
"보시게. 신부가 살아났지 않나."
도깨비가 관 속의 단이를 가리켰더랍니다.
"죽은 사람끼리 맺는 게 영혼결혼식이지. 산 사람하고 나하고는 부부가 못 되네. 그건 이치에 안 맞아."
"허나 은혜를…"
"은혜는 무슨. 나는 묵 한 사발을 열한 그릇으로 돌려받았네. 남는 장사를 했지."
도깨비가 껄껄 웃었더랍니다. 그러고는 사모를 벗어 마당 한쪽에 툭 내려놓았지요.
"이 아이는 시집을 가야 하네. 사람한테. 아이도 낳고, 늙기도 하고, 그래야지."
단이가 관 속에서 도깨비를 올려다보았습니다.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했더랍니다.
"아저씨."
"왜."
"그러면 이제 저 안 보실 거예요?"
도깨비가 잠깐 말이 없었지요. 그러더니 그 큰 손으로 단이의 머리를 아주 조심스럽게 한 번 쓸었더랍니다.
"정월 열나흘에 오게. 묵은 자네가 쑤고."
"네."
"자네 아비가 쑨 건 못 먹겠네. 너무 탔어."
돌쇠가 울다가 그만 픽 웃어버렸지요.
도깨비가 돌아서다가, 마지막으로 황만중 앞에 걸음을 멈췄더랍니다.
"만중이."
"예."
"자네 곳간이 일곱이라지."
"……그렇소."
"그중에 자네 것이 몇이나 되는지 세어보게."
그 말을 남기고, 도깨비가 마당을 걸어 나갔습니다.
등롱을 든 열둘이 뒤를 따랐지요. 대문을 나서는데, 맨 뒤의 것이 문득 돌아서더니 돌쇠한테 꾸벅 절을 하는 겁니다.
"잘 얻어먹고 가오."
돌쇠가 얼떨결에 마주 절을 했더랍니다.
"예에… 살펴 가세유."
푸른 등롱 열둘이 산길을 타고 다시 올라갔습니다. 하나가 사라지고, 둘이 사라지고, 마지막 하나가 산등성이에서 잠깐 멈췄다가 스르르 꺼졌더랍니다.
그 순간, 마당의 촛불이 노랗게 되살아났지요.
여름 바람이 다시 불고, 풀벌레가 다시 울고, 새벽닭이 울었습니다.
상 위에 얌전히 앉아 있던 기러기 두 마리가 푸드덕 날아올라 지붕 위를 한 바퀴 돌더니, 뒷산 쪽으로 사라졌더랍니다.
※ 6: 일곱 곳간이 열리던 날
그해 가을, 청안 고을에 희한한 소문이 돌았더랍니다.
황부자네 곳간 일곱 채가 활짝 열렸다는 겁니다. 그것도 하나가 아니라 일곱이 다 열렸다고요.
처음에는 아무도 안 믿었지요. 재 넘어 피난 갔던 사람들도 코웃음을 쳤습니다.
"그 영감이? 곳간을 열어? 해가 서쪽에서 뜨겄네."
그런데 사흘 뒤에 진짜로 사람이 왔더랍니다. 돌쇠가 지게에 쌀을 지고 재를 넘어온 겁니다.
"어르신이 보내셨어유. 이거 갖고 오라구유."
"이게 뭐요."
"쌀 두 섬이구먼유. 그라고 이것도 있구유."
돌쇠가 품에서 종이 한 장을 꺼냈지요. 김첨지가 받아 들고 보니, 자기가 삼 년 동안 밀린 소작료 문서였더랍니다. 그 문서 한가운데를 붓으로 쭉 그어놨고, 옆에 이렇게 적혀 있었지요.
없던 일로 함.
김첨지 손이 부들부들 떨렸습니다.
"이, 이게 진짜요?"
"진짜쥬. 지가 어르신 옆에서 다 봤는디유."
그날 황부자네 마당에서 무슨 일이 있었느냐 하면요.
혼례가 끝난 다음 날 아침, 황만중이 마당에 큰 화로를 내놓게 했더랍니다. 그러고는 안방 궤짝에서 문서 뭉치를 죄다 꺼내 왔지요. 소작 문서, 차용 문서, 저당 문서. 삼십 년을 모은 것들이었습니다.
돌쇠가 기겁을 했지요.
"어, 어르신! 이게 다 얼마짜린디유!"
"돌쇠야."
"예."
"어젯밤에 그 어른이 나한테 뭐라 하셨는지 기억하느냐."
"곳간이 일곱인디, 그중에 어르신 것이 몇이나 되냐고…"
"밤새 세어봤다."
"몇 채나 나왔대유."
황만중이 한참을 말없이 있다가 이랬더랍니다.
"한 채도 없더구나."
그러고는 문서를 한 장씩 불에 넣었지요. 손이 떨려서 몇 번이나 놓쳤는데, 그때마다 도로 주워서 불에 넣었더랍니다.
단이가 방문을 열고 그 광경을 내다보고 있었습니다. 아직 몸이 성치 않아 벽을 짚고 서 있었지만, 얼굴에 핏기가 돌아와 있었지요.
"아버지."
"오냐."
"아까우세요?"
황만중이 고개를 저었더랍니다.
"안 아깝다. 하나도 안 아깝다."
"거짓말."
"……조금 아깝다."
부녀가 마당에서 웃었지요. 그 집 마당에서 웃음소리가 난 게 몇 해 만이었는지 모릅니다.
문서를 다 태우고 나서 황만중이 이런 방을 내붙였더랍니다.
내년 가을까지 소작료를 받지 않는다. 지난 빚은 모두 없앤다. 곳간은 굶는 이가 있으면 언제든 연다.
사람들이 하나둘 돌아오기 시작했지요.
제일 먼저 돌아온 것이 김첨지네였더랍니다. 소를 끌고 재를 넘어 들어오는데, 마을 어귀에서 황만중과 딱 마주쳤지요.
두 사람이 한참을 말없이 서 있었습니다.
먼저 고개를 숙인 건 만석꾼 쪽이었더랍니다.
"미안하오."
김첨지가 소 고삐를 놓치고 말았지요.
"어, 어르신. 왜 이러신대유."
"작년 그 상갓집에서, 내가 되질을 했다지."
"…"
"내가 그날 뭘 하고 있었는지 나는 기억도 못 하오. 헌데 댁은 기억하고 있었소. 그게 죄요."
김첨지가 그 자리에서 엉엉 울었더랍니다. 사내 나이 마흔에 길바닥에서 울었지요.
처음에는 눈치를 보며 오다가, 나중에는 아예 짐수레를 끌고 돌아왔더랍니다. 도깨비 혼례 소문 때문에 도망쳤던 사람들이 이번에는 도깨비 혼례 이야기를 들으려고 몰려왔지요.
돌쇠가 신이 나서 마당에 사람들을 앉혀놓고 그날 밤 이야기를 했더랍니다. 할 때마다 도깨비 키가 한 자씩 커졌고, 나중에는 등롱이 열둘에서 서른이 되었지요.
"돌쇠 아저씨, 지난번엔 열둘이라 하셨잖아유."
"어허, 그날 밤이 워낙 어두워서 지가 잘못 셌구먼유."
가장 늦게 온 사람은 주막거리 홀어미였습니다.
그 노인네가 지팡이를 짚고 황부자네 대문 앞에 서서 한참을 망설이다가 들어왔더랍니다. 황만중이 버선발로 뛰어나가 마당에 무릎을 꿇었지요.
"내가 죽일 놈이오."
"어르신, 이러지 마시오."
"댁의 아들 이름이 무엇이었소."
홀어미가 눈물을 뚝뚝 흘리며 아들 이름을 말했더랍니다.
황만중은 그 이름을 받아 적어, 물레방앗간 앞에 비를 하나 세웠지요. 그리고 해마다 그 아들 제삿날이면 제 집 제사보다 먼저 제상을 차렸더랍니다.
단이는 그해 겨울에 완전히 자리를 털고 일어났습니다.
그런데 이 처녀, 몸이 낫자마자 아버지한테 이러는 겁니다.
"아버지, 곳간 열쇠 좀 주세요."
"어디 쓰려느냐."
"이제는 훔치지 않고 가져가려고요."
황만중이 껄껄 웃으며 열쇠 꾸러미를 통째로 넘겨줬더랍니다. 그날부터 청안 고을 곳간 살림은 단이가 맡았지요.
이태 뒤에 단이는 시집을 갔습니다.
신랑은 이웃 고을 가난한 훈장 집 아들이었더랍니다. 논 한 마지기도 없는 집이었지만, 황만중은 두말없이 승낙했지요. 사람들이 왜 그런 혼처를 골랐냐고 물으니 이랬답니다.
"그 어른이 그러셨소. 사람한테 시집보내라고. 논한테 시집보내란 말씀은 안 하셨소."
혼례를 올리던 날, 초례청 한쪽에 상 하나가 따로 놓여 있었더랍니다.
메밀묵 한 사발이 놓인 상이었지요.
손님들이 저게 무엇이냐 물으면, 돌쇠가 이렇게 대답했더랍니다.
"저건 우리 아씨 큰손님 자리구먼유. 우리 아씨 목숨 살려주신 어른이신디, 사정이 있어서 낮에는 못 오시구유."
그날 밤, 잔치가 파하고 사람들이 다 돌아간 뒤에요.
그 상 위의 메밀묵 사발이 텅 비어 있었더랍니다.
그 뒤로도 단이는 해마다 정월 열나흘이면 뒷산에 올라갔습니다.
시집간 뒤에도 갔고, 아이를 낳고 나서도 갔고, 머리가 희끗해진 뒤에도 갔더랍니다. 나중에는 아들 손을 잡고 같이 올라갔지요.
아들이 물었더랍니다.
"어머니, 이 바위에 누가 계세요?"
"어머니 목숨 살려주신 어른이 계신단다."
"어떻게 생기셨는데요?"
단이가 웃으며 이랬지요.
"키가 아주 크고, 눈썹이 새까맣고, 웃으면 이가 이만큼 큰 분이란다."
사람들은 그걸 도깨비 혼사라고 불렀지만요.
가만 들여다보면 그건 혼사가 아니었지요. 묵 한 사발에서 시작된 정이 열한 해를 흘러서, 끝내 사람 목숨 하나를 건져 올린 이야기였더랍니다.
베푼 정은 어디로 가지 않는다고들 하지요.
그 정이 어디로 갔는고 하니, 눈 오는 산길을 열한 번 올라가서, 죽은 딸의 관 뚜껑을 열고 나왔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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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이야기, 어떻게 들으셨습니까. 곳간 일곱 채를 가진 만석꾼도 딸의 목숨은 사지 못했는데, 눈밭에서 나눈 묵 한 사발이 열한 해를 건너와 끝내 관 뚜껑을 열었습니다. 베푼 정은 어디로도 사라지지 않는다는 옛말이 오늘따라 오래 남습니다. 여러분께서 언젠가 누군가에게 건네신 밥 한 그릇도, 지금 어딘가에서 조용히 돌아오는 중일지 모릅니다. 이야기가 좋으셨다면 구독과 좋아요 부탁드리고, 댓글로 여러분의 이야기도 들려주십시오. 다음 이야기로 또 찾아뵙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