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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깨비와 겁없는 선비의 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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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킹멘트
칠흑 같은 밤, 도깨비가 출몰한다는 버려진 정자에 홀로 앉아 글을 읽는 가난한 선비. "네 간을 빼먹으러 왔다!" 시퍼런 불꽃을 뿜는 요물의 위협에도 선비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불호령을 내립니다. 오히려 수백 년 묵은 도깨비에게 목숨을 건 지혜 내기를 제안하는데요. 과연 이 담 큰 선비는 기묘한 하룻밤에서 무사히 살아남아 하늘이 내린 천복을 거머쥘 수 있을까요?
※ 1: 가난을 이기려 도깨비 정자로 향하는 선비
조선 현종이 다스리던 시절, 경기도 광주 땅에는 쓰러져가는 초가집에서 간신히 연명하는 이명원이라는 가난한 선비가 살고 있었다. 뼈대 있는 양반가의 자손으로 태어났으나, 대대로 내려온 가난은 그의 어깨를 짓누르는 거대한 바위와도 같았다. 비가 오면 천장에서 빗물이 새고, 겨울이면 문풍지 사이로 칼바람이 들이치는 낡은 초가삼간. 그 좁고 냉기 가득한 방 안에서는 병든 노모의 마른기침 소리가 밤낮을 가리지 않고 울려 퍼졌고, 굶주림에 지친 어린 동생들은 서로의 체온에 의지한 채 새우잠을 자야만 했다. 이명원에게 이 참혹한 현실을 벗어날 유일한 동아줄은 오직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길에 오르는 것뿐이었다.
'어머님의 병환을 고치고, 어린 동생들에게 따뜻한 쌀밥 한 그릇을 마음껏 먹일 수만 있다면 내 뼈가 부서져도 좋으련만. 내 이토록 가난하여 책 한 권 편하게 읽을 수가 없으니, 참으로 원통하고 답답한 노릇이로구나.'
밤낮없이 글공부에 매진하고 싶었으나, 가난한 살림살이에 밤새 켜둘 등잔기름을 구하는 것은 사치에 가까웠다. 좁은 방 안에서 책장을 넘기는 소리조차 앓아누운 노모의 단잠을 깨울까 저어되었기에, 그는 매일 해가 지면 서책 하나를 품에 안고 밖으로 나설 수밖에 없었다. 이명원이 달빛을 길잡이 삼아 향하는 곳은 마을 어귀에서 한참 떨어진, 깊고 으슥한 산속에 자리한 낡은 정자였다.
그 정자는 본래 수십 년 전, 고을의 원님이 풍류를 즐기기 위해 경치 좋은 산기슭에 지어놓은 것이었다. 하지만 언제부턴가 흉흉한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해가 진 뒤 정자 근처를 지나던 마을 사람들이 홀연히 사라졌다가 다음 날 엉뚱한 산비탈에서 실성한 채 발견되는 일이 잦아진 것이다. 밤마다 정자에서 시퍼런 불꽃이 일렁이고 기괴한 노랫소리가 들려온다는 소문이 꼬리에 꼬리를 물자, 마을 사람들은 그곳을 '도깨비 정자'라 부르며 해가 떨어지면 근처에는 얼씬도 하지 않았다. 건장한 장정들조차 낮에 근처에서 땔감을 구하다가도 해거름이 되면 혼비백산하여 도망치는 무시무시한 곳이었다.
하지만 이명원에게는 귀신이나 도깨비에 대한 두려움보다 당장 한 글자라도 더 읽지 못하는 가난한 현실이 훨씬 더 끔찍하고 무서웠다.
'내 삶이 이미 생지옥이나 다름없거늘, 귀신이 나타난들 무엇이 두렵겠는가. 도깨비가 나타나 내 목숨을 앗아간다면 그것도 내 운명일 것이요, 그저 놀라게만 한다면 내 기구한 신세를 비웃으며 지나쳐 가겠지. 나는 그저 달빛 아래서 글을 읽을 수만 있다면 그만이다.'
초저녁의 스산한 바람이 옷깃을 파고드는 가을밤, 이명원은 낡아빠진 도포 자락을 여미며 깊은 숲속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숲은 칠흑처럼 어두웠고, 이름 모를 밤짐승들의 기괴한 울음소리가 음산하게 메아리쳤다. 나뭇가지들이 바람에 흔들리며 마치 귀신의 손아귀처럼 이명원을 향해 뻗어오는 듯했다. 이윽고 구름 사이로 창백한 달빛이 스며들자, 산비탈에 덩그러니 놓인 낡은 정자의 윤곽이 드러났다.
정자의 지붕은 반쯤 무너져 내려 있었고, 기둥은 썩어가는 냄새를 풍겼다. 마루 위에는 축축한 이끼와 말라비틀어진 낙엽이 수북하게 쌓여 있어 사람의 온기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다. 하지만 이명원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삐걱거리는 마루 위로 올라가 단정하게 가부좌를 틀고 앉았다. 그는 품속 깊이 간직해온 작은 초 한 자루를 조심스레 꺼내어 불을 붙였다. 그것은 그가 하루 종일 산에서 캔 나물을 팔아 간신히 구한,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불빛이었다.
작은 촛불이 일렁이며 어둠을 밀어내자, 이명원은 낡은 《맹자》 책을 무릎 위에 펼쳤다. 세상의 온갖 시름과 등줄기를 타고 오르는 한기를 모두 지워버리려는 듯, 그의 특유의 낭랑하고 맑은 목소리가 스산한 밤공기를 가르며 숲속으로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맹자왈, 인은 인지안택야요, 의는 인지정로야니라…."
어진 마음은 사람의 편안한 집이요, 의로운 길은 사람이 마땅히 걸어야 할 바른길이라는 성현의 가르침. 그 한 구절 한 구절을 곱씹으며 이명원은 오직 책 속의 진리와 하나가 되어가고 있었다. 숲속의 어둠도, 도깨비의 소문도 그 순간만큼은 이 가난한 선비의 학문을 향한 뜨거운 열정을 결코 막아설 수 없었다.
※ 2: 칠흑 같은 밤, 등 뒤로 내려앉은 기괴한 그림자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사방은 인적이 완전히 끊어지고 깊은 적막만이 감도는 자시(子時, 밤 11시~새벽 1시) 무렵이 되었다. 하늘을 가득 메운 먹구름 탓에 달빛조차 희미해졌고, 이명원의 앞을 밝혀주는 것은 바람에 위태롭게 흔들리는 작은 촛불 하나뿐이었다. 추위로 인해 손끝이 꽁꽁 얼어붙어 책장을 넘기기조차 힘겨웠으나, 그의 두 눈빛만큼은 밤하늘의 별처럼 초롱초롱하게 빛나고 있었다.
그가 한창 성현의 깊은 이치에 빠져들어 몰입해 있을 무렵이었다.
타닥, 타다닥.
적막을 깨고 정자의 낡은 지붕 위에서 마른 나뭇가지가 부러지는 듯한 소리가 들려왔다. 이명원은 글을 읽던 입술을 잠시 멈추고 고개를 들었다. 깊은 산중이니 덩치 큰 산짐승이 지붕 위를 지나가는 것이려니, 혹은 썩어가는 정자가 찬 바람에 뒤틀리며 우는 소리려니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그는 헛기침을 한 번 하고는 다시 책으로 시선을 돌렸다.
"의는 인지정로야니…."
다시 글을 읽어 내려가려는 찰나였다.
툭. 떼구르르.
이번에는 제법 묵직한 돌멩이 하나가 허공에서 떨어져 이명원이 펼쳐둔 책상머리 위로 굴러왔다. 단순한 자연의 소리나 산짐승의 짓이라기에는 너무나도 정확하게 그를 겨냥한 것이었다. 이명원은 미간을 가볍게 찌푸렸다. 그는 고개를 들어 어둠이 짙게 깔린 정자의 서까래 쪽을 응시했다. 촛불의 불빛이 닿지 않는 지붕 아래는 그저 칠흑같이 어두울 뿐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곳에 뉘신지 모르나, 밤늦도록 글을 읽는 선비에게 돌을 던지다니 장난이 과하십니다. 짐승이 아니라면 모습을 드러내시오."
그는 낮고 차분한 목소리로 경고하고는 다시 책으로 눈을 돌리려 했다. 바로 그 순간이었다.
쿵!
마치 거대한 집채만 한 바위가 하늘에서 떨어진 것처럼, 정자의 마루가 통째로 부서질 듯 엄청난 굉음과 진동이 이명원의 등 뒤를 강타했다. 나무 바닥이 기괴한 소리를 내며 뒤틀렸고, 흔들림에 의해 촛불이 거세게 춤을 추다 하마터면 꺼질 뻔했다. 방금 전까지 서늘하기만 했던 공기가 순식간에 북풍한설처럼 차갑게 얼어붙었고, 숨을 들이마시기조차 고통스러운 냉기가 등줄기를 타고 흘렀다.
동시에 코를 찌르는 역겨운 냄새가 사방에 진동했다. 짐승의 썩은 털 냄새와 수백 년 묵은 축축한 흙냄새, 그리고 피 냄새가 뒤섞인 듯한 끔찍한 악취였다. 이명원은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것을 느꼈다. 평범한 인간이 내뿜을 수 없는 기운. 그것은 말로만 듣던 이질적이고 두려운 존재의 압도적인 살기였다.
그는 아주 천천히, 숨죽인 채 고개를 돌려 등 뒤를 바라보았다.
어둠 속에서 서서히 모습을 드러낸 것은 사람의 형상을 하고 있었으나, 결코 사람이 아니었다. 키는 웬만한 장정보다 머리 하나가 더 컸고, 온몸은 거칠고 시커먼 털로 뒤덮여 짐승인지 사람인지 분간조차 어려웠다. 거대한 얼굴에는 시퍼런 도깨비불처럼 이글거리는 두 눈이 박혀 있었고, 떡 벌어진 입술 사이로는 멧돼지보다 뾰족하고 거대한 송곳니가 흉측하게 솟아나 있었다. 전설 속에 등장하는, 마을 사람들을 공포로 몰아넣었던 도깨비 그 자체였다.
도깨비는 자신의 발밑에 앉아 있는 왜소한 선비를 내려다보며, 깊은 동굴 속에서 울려 퍼지는 듯한 기괴한 목소리로 웃기 시작했다.
"크하하하! 네 이놈, 이명원! 네놈의 간이 아주 배 밖으로 튀어나왔구나!"
도깨비의 목소리는 고막을 찢을 듯 날카로우면서도 무거웠다. 이명원은 도깨비가 자신의 이름을 정확히 알고 있다는 사실에 내심 놀랐다.
"감히 내 영역인 이 도깨비 정자에서, 밤이 늦도록 시끄럽게 책을 주억거리며 떠들어대? 내가 그동안 숱한 인간들을 보아왔으나, 너처럼 겁 없이 내 안방까지 기어들어 온 놈은 처음이다. 네놈의 그 건방지고 싱싱한 간을, 오늘 밤 내 요깃거리로 삼아 아주 잘근잘근 씹어 먹어주마!"
도깨비는 솥뚜껑보다 더 거대한 손을 치켜들며 한 발짝 다가섰다. 도깨비의 생각대로라면, 눈앞의 이 나약한 인간 선비는 곧 사시나무 떨듯 온몸을 떨며 바닥에 엎드려 목숨을 구걸하거나, 짐승처럼 비명을 지르며 숲속으로 혼비백산하여 도망쳐야 마땅했다. 그것이 지난 십수 년간 이 정자를 우연히 찾았던 모든 인간들이 보여준 한결같고 지루한 반응이었으니까. 도깨비는 인간의 뼛속 깊은 공포를 맛볼 기대에 부풀어 시퍼런 눈을 더욱 매섭게 번뜩였다.
※ 3: 목숨을 건 불호령과 기상천외한 지혜 내기
등 뒤에 나타난 기괴한 괴물 앞에서 이명원 역시 분명 커다란 충격을 받았다. 심장은 뱃속으로 쿵 떨어져 내린 듯 거세게 뛰었고, 식은땀이 이마를 타고 흘러내렸다. 저 압도적인 공포 앞에서 평범한 인간이라면 그대로 정신을 잃고 쓰러졌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명원은 달랐다. 그는 평생을 사서삼경을 읽으며 이성과 도리, 그리고 선비로서의 의로움을 가슴에 새겨온 자였다.
'저것이 말로만 듣던 도깨비로구나. 헌데 내가 여기서 겁을 먹고 비명을 지르거나 도망친다면, 짐승과 다를 바 없는 저 미물에게 한낱 조롱거리로 전락할 뿐이다. 선비란 무릇 시퍼런 칼날이 목에 들어와도 의연해야 하거늘, 요사스러운 잡귀 따위에게 굴복하여 내 평생 지켜온 학문의 자존심을 버릴 수는 없다.'
이명원은 떨리는 다리에 힘을 꽉 주고, 단전으로부터 호흡을 깊게 끌어올렸다. 두려움을 완벽하게 통제한 그는 도깨비가 상상조차 하지 못한 기상천외한 행동을 보였다.
그는 무시무시한 도깨비의 시퍼런 눈동자를 피하지 않고 정면으로 꼿꼿하게 마주 보았다. 그러더니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책상 쪽으로 고개를 돌려, 바람에 흔들리는 촛불을 손으로 부드럽게 감싸 안았다. 그리고는 방금 전까지 읽고 있던 《맹자》의 다음 구절을 아까보다 더욱 우렁차고 낭랑한 목소리로 읽기 시작했다.
"광거이불유하니, 애재라! 넓고 편안한 집을 비워두고 살지 않으며, 바른길을 버려두고 가지 않으니, 참으로 슬프고 애통한 일이로다!"
글을 다 읽은 이명원은 책을 '탁!' 하고 요란한 소리를 내며 덮어버렸다. 그 단호한 소리가 텅 빈 정자 안을 쩡쩡 울렸다. 그러고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자신보다 두 배는 거대한 도깨비를 향해 손가락질을 하며 벼락같은 불호령을 내렸다.
"네 이놈! 지금 내 말이 들리지 않는 것이냐!"
이명원의 쩌렁쩌렁한 기세에 오히려 도깨비가 흠칫 놀라 한 발짝 뒤로 물러섰다.
"선비가 밤을 잊고 성현의 숭고한 말씀을 읽고 있거늘, 어찌하여 그리 미련하게 소란을 피우며 사람의 정신을 산란하게 하는 게냐! 네가 정녕 이 정자의 오랜 주인이라 한다면, 귀한 손님이 찾아와 공부를 할 때 조용히 자리를 비켜주거나 따뜻한 차라도 한 잔 내어오는 것이 마땅한 예의가 아니더냐! 헌데 몰래 숨어 돌이나 찌끄러기를 던지고, 이제는 등 뒤에 나타나 남의 간을 빼먹겠다고 위협을 해? 네놈은 도깨비이기 전에 손님맞이의 기본도, 부끄러움도 모르는 천박한 무뢰배로구나!"
수백 년을 살아오며 단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인간의 꾸짖음에 도깨비는 두 귀를 의심했다.
"뭐, 뭣이? 이 놈이 나보고 무, 무뢰배라 하였느냐?"
"그렇다! 네 이놈, 정녕 죽을 줄 모르고 혓바닥을 놀리는구나! 내 당장 네놈의 그 오만방자한 혓바닥부터 뽑아 버릴 것이다!"
도깨비가 치밀어 오르는 분노를 참지 못하고 솥뚜껑만 한 거대한 손을 번쩍 치켜들었다. 금방이라도 이명원의 머리통을 으스러뜨릴 기세였다. 하지만 선비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은 채 꼿꼿하게 서서 맞받아쳤다.
"치려거든 쳐라! 내 비록 가난에 찌들어 책 한 권 마음 편히 읽지 못하는 불쌍한 선비이나, 너 같은 불의하고 무례한 잡귀에게 목숨을 구걸하느니 차라리 네놈 손에 찢겨 죽어 억울한 귀신이 되는 길을 택하겠다! 허나 명심해라. 내가 오늘 밤 죽어 저승에 가거든, 내 이 원통한 사연과 네놈의 무도함을 염라대왕님께 똑똑히 고발할 것이다! 명부의 재판정에서 네놈이 얼마나 예의도 근본도 모르는 멍청한 미물인지 만천하의 귀신들 앞에서 낱낱이 밝혀 망신을 줄 것이야!"
자신을 죽이려는 요물에게 염라대왕의 재판을 들먹이며 저승에서의 소송으로 협박하는 인간이라니. 도깨비는 선비의 기가 막힌 논리와 꺾이지 않는 당당한 기세에 압도되어 공중에 든 손을 허무하게 멈추고 말았다.
잠시 멍하니 선비를 내려다보던 도깨비의 입술이 실룩거리더니, 이내 정자가 떠나가라 폭소를 터뜨리기 시작했다.
"푸하하하! 크하하하! 세상에 이런 간 큰 놈을 보았나! 나를 죽여 염라대왕에게 고소하겠다고? 하하하! 내 이 산비탈에서 수백 년을 뒹굴며 살았건만, 너처럼 담력 세고 배짱 두둑한 미친 인간은 난생처음이다."
도깨비는 인간을 해치는 것보다 재미와 자극을 쫓는 변덕스러운 영물이었다. 공포 대신 맹렬한 분노와 논리로 맞서는 이 선비가 참으로 흥미롭게 느껴진 것이다.
"좋다, 이명원! 네놈의 그 독기 품은 간은 먹어봐야 몹시 쓰고 맛이 없을 터이니, 오늘 밤은 특별히 살려주마."
"살려준다니, 언감생심 당치도 않다! 목숨을 걸고 나와 내기를 하세!"
선비는 도깨비의 말을 자르고 오히려 대화의 주도권을 앗아왔다.
"뭐? 또 무슨 수작이냐!"
"네놈이 나를 일방적으로 살려주고 말고 할 문제가 아니다. 공평하게 내기를 하여, 내가 이기면 내가 과거 급제하여 이곳을 떠날 때까지 내 공부를 방해하지 말고 영영 물러가거라. 만약 네가 이긴다면, 내 간이든 쓸개든 기꺼이 내어주겠다."
"크하하! 내기라, 좋다마다! 이 썩어가는 정자를 통째로 들어 올리는 힘자랑을 할까, 아니면 저 산 아래까지 단숨에 뛰어가는 달리기 시합을 할까!"
이명원은 으스대는 도깨비를 향해 한심하다는 듯 혀를 찼다.
"쯧쯧, 그런 무식한 짓거리는 짐승이나 하는 법이다. 무릇 선비는 머리로 승부하는 법. 우리는 지혜를 겨룰 것이다. 내가 세 가지 수수께끼를 낼 터이니, 네가 단 하나라도 맞히지 못하면 네놈의 완벽한 패배다. 어떠냐, 수백 년 묵은 머리로 내 젊은 지혜를 이길 자신이 있느냐?"
"지혜? 크하하하! 세상 이치를 꿰뚫는 이 몸을 고작 세 가지 말장난으로 이기겠다? 좋다, 어디 한 번 실컷 내어보아라!"
자만심에 가득 찬 도깨비가 마루에 털썩 주저앉았고, 가난한 선비와 수백 년 묵은 괴물 사이의 기상천외하고 기묘한 지혜 내기가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막을 올리고 있었다.
※ 4: 수백 년 묵은 요물을 굴복시킨 세 가지 수수께끼
칠흑 같은 어둠이 짙게 깔린 낡고 스산한 정자 안. 바람에 금방이라도 꺼질 듯 위태롭게 흔들리는 콩알만 한 촛불 하나를 사이에 두고, 가난하지만 강직한 인간 선비와 수백 년 묵은 기괴한 도깨비의 기묘하기 짝이 없는 지혜 내기가 마침내 시작되었다. 밖에서는 춥고 축축한 새벽바람이 불어와 썩은 기둥 틈새를 때리며 마치 귀신이 우는 듯한 기괴한 소리를 내었지만, 이명원은 추위도, 짐승 같은 요물에 대한 두려움도 모두 잊은 듯했다. 그는 침착하게 헛기침을 한 번 하고는 도깨비를 향해 첫 번째 질문을 던졌다. 그의 목소리는 조금의 떨림도 없이 낭랑하게 밤공기를 갈랐다.
"첫째 수수께끼다, 잘 들으시게. 이 세상에서 가장 빠르면서도 동시에 가장 느린 것. 이 세상에서 가장 크면서도 동시에 가장 작은 것. 그리고 세상 모든 사람들이 가장 헛되이 낭비하면서도 막상 영영 잃고 나면 가장 가슴 치며 아쉬워하는 것. 그것이 과연 무엇이겠느냐?"
도깨비는 시퍼런 불꽃이 일렁이는 눈을 굴리며 시커먼 털이 난 턱을 벅벅 긁적였다. 꽤나 복잡하고 인간의 관념이 섞인 철학적인 질문이었다. 그는 본디 인간의 깊은 감정이나 철학보다는 눈에 보이는 물질과 자연 현상에만 익숙한 존재였다. 거대한 머리를 굴리며 고민하던 도깨비가 이내 무릎을 탁 치며 자신만만하게 소리쳤다.
"흠, 가장 빠르면서 느린 것? 가장 크면서 작은 것? 크하하, 그야 당연히 하늘을 가르는 '번개'가 아니더냐! 번개는 눈 깜짝할 새에 번쩍 치고 지나가지만, 그 소리와 기운은 한참 뒤에야 더디게 오지 않느냐! 내 말이 맞지?"
이명원은 여유로운 미소를 띠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틀렸다. 번개는 그저 빠르고 강렬할 뿐, 느리다고 할 수는 없지 않느냐. 다시 생각해 보아라."
"음… 그렇다면 '바람'이렷다! 바람은 산들바람처럼 느리게 불다가도 태풍처럼 미친 듯이 빠르게 몰아치지 않느냐! 눈에 보이지 않으니 작다 할 수도 있고, 온 산천을 뒤흔드니 크다 할 수도 있지!"
"그것도 여지없이 틀렸다. 바람은 세상 사람들이 헛되이 낭비하는 물건이 아니거늘, 어찌 답이 될 수 있겠는가."
도깨비는 자신의 오답이 연이어 지적받자 콧김을 거칠게 뿜어내며 점점 조바심을 내기 시작했다.
"에잇! 이것도 저것도 아니면 도대체 무엇이란 말이냐! 모르겠다, 모르겠어! 시시하게 말장난이나 굴지 말고 어서 정답을 말해 보거라!"
이명원이 도깨비의 붉으락푸르락한 얼굴을 똑바로 응시하며 차분하게 답을 내놓았다.
"정답은 바로 '시간'일세. 시간은 즐겁고 행복할 땐 쏜 화살처럼 세상에서 가장 빠르게 흐르지만, 고통스럽고 괴로울 땐 굼벵이처럼 세상에서 가장 느리게 흘러가지. 또한 우주의 영원만큼이나 한없이 크지만, 지금 이 순간 스쳐 지나가는 찰나만큼 작기도 하다네. 무엇보다 자네처럼 지금 이 순간에도 무료함 속에 헛되이 낭비하고 있지 않느냐. 훗날 목숨이 다하여 저승사자를 마주했을 때, 천하의 모든 인간들이 그 낭비한 시간을 가장 아쉬워하며 눈물짓게 될 것이니, 이보다 더 명확한 답이 어디 있겠는가."
도깨비는 순간 말문이 막혔다. 인간들이 품고 사는 시간에 대한 그 깊은 통찰력에 압도당한 것이다.
"오호라… 그, 그럴싸한데? 제기랄! 그깟 눈에 보이지도 않는 시간 따위! 좋다, 첫 번째는 내가 방심한 탓에 졌다 치자. 어서 두 번째 질문을 내어보아라! 이번엔 네놈의 그 얄팍한 세치혀와 말장난에 절대 속지 않을 것이다!"
이명원은 여유를 잃지 않고 곧바로 두 번째 질문을 던졌다.
"둘째 수수께끼다. 이 세상 만물과 천하를 모두 덮어버릴 수 있을 만큼 거대하나, 단 한 가지 '이것'만은 절대로 덮을 수 없는 것이 있다. 그것은 무엇이냐?"
도깨비는 솥뚜껑 같은 손바닥을 부딪치며 파안대소했다. 이번에는 아까보다 훨씬 눈에 보이는 쉬운 질문이라 생각한 것이다.
"크하하하! 그건 어린아이도 알 만큼 너무 쉽구나! 정답은 바로 저 거대한 '하늘'이로구나! 하늘은 이 세상의 산과 바다, 모든 만물을 다 덮고 있지 않느냐!"
이명원이 다시 한번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틀렸다. 하늘 위에도 또 다른 하늘이 있고, 하늘이 덮지 못하는 땅속 깊은 어둠도 있으니 어찌 천하의 모든 것을 덮는다 할 수 있겠는가."
"그렇다면 '어둠'이다! 지금처럼 밤이 되면 짙은 어둠이 산천초목을 모두 덮어 삼켜버리지 않느냐!"
"그것도 틀렸다. 네가 말한 그 짙은 어둠조차 내 앞의 이 작은 촛불 하나를 완전히 이기지 못해 덮지 못하고 있지 않느냐."
도깨비는 슬슬 약이 오르기 시작했다. 제 딴에는 수백 년을 살아오며 세상의 이치를 다 안다고 자부했건만, 핏덩이 같은 젊은 선비의 질문 하나를 시원하게 풀지 못하니 자존심이 상할 대로 상한 것이었다.
"으으… 에잇! 하늘도 아니고 어둠도 아니면, 대체 이 세상을 덮을 수 있는 게 또 무어란 말이냐! 어서 말해 보아라!"
이명원이 자신의 눈을 지그시 감았다가 천천히 뜨며 나직하게 말했다.
"정답은 사람의 얇은 '눈꺼풀'일세."
"뭐, 뭣이? 그 보잘것없는 눈, 눈꺼풀?"
"그렇다. 이 얇고 가벼운 살점 하나를 스르르 내리면 천하를 덮어 온 세상을 칠흑 같은 어둠으로 만들 수 있고, 만 권의 훌륭한 서책도 단숨에 덮어버릴 수 있지. 허나, 제 눈 바로 밑 가슴속에서 끝없이 자라나는 더러운 '욕심' 그 한 가지만은 결코 덮지 못하여 늘 스스로 화를 부르고 세상을 어지럽히지 않느냐. 얇은 눈꺼풀로 하늘은 가릴지언정, 제 안의 탐욕은 가리지 못하는 것이 바로 아둔한 인간의 섭리인 것이다."
도깨비는 입을 떡 벌린 채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그저 말장난인 줄 알았던 수수께끼 속에 뼈를 때리는 철학이 숨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인간의 욕심이라는 밑 빠진 독을 눈꺼풀이라는 기발한 비유로 짚어낸 선비의 지혜에 도깨비는 내심 혀를 내둘렀다.
"으으… 내 수백 년을 살았건만 이리도 기막힌 궤변은 처음이다! 두 개나 졌다니! 네 이놈, 사람 약 올리는 데 아주 비상한 재주가 있구나! 좋다, 마지막 질문이다! 이 마지막 질문마저 맞히지 못한다면 나의 완전한 패배다! 어서 내어보아라!"
이명원은 이미 승리를 확신하고 있었다. 그는 마지막 쐐기를 박기 위해, 얄팍한 지식이 아니라 상대방의 본질을 꿰뚫는 날카로운 통찰을 담아 질문을 던졌다.
"셋째, 그렇다면 '너'. 이 산속에서 수백 년을 묵으며 인간을 공포로 몰아넣은 천하무적 도깨비 양반. 네가 이 세상에서 '가장 무서워하는 것'은 대체 무엇이냐?"
도깨비는 순간 숨을 멈추고 얼어붙었다. 자신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 짐승 같은 본능이 머릿속을 스치며 도깨비는 황급히 입을 열었다.
"그, 그것이야 당연히 우리 같은 영물들이 기를 펴지 못하게 만드는 붉은 '팥'이요, 잡귀의 기운을 물리치는 시뻘건 '닭의 피'요, 날카롭게 뻗은 '복숭아나무' 가지가 아니겠느냐! 천하의 모든 도깨비가 무서워하는 것이 바로 그것들이다!"
이명원은 탁 하고 무릎을 치며 호탕하게 웃었다.
"틀렸다! 참으로 어리석구나! 또 틀렸어! 네가 말한 그것들은 그저 네가 귀찮아하고 '싫어하는 것'일 뿐, 너의 존재 자체를 집어삼키는 '가장 무서워하는 것'은 아니지 않느냐!"
"뭐라고? 아니라고? 그럼 대체 내가 두려워하는 게 무어란 말이냐! 나보다 덩치가 크고 힘이 센 산신령이라도 된단 말이냐!"
이명원은 가만히 손을 뻗어, 심지 끝에서 위태롭게 타들어가던 마지막 촛불을 후 불어 꺼버렸다. 정자 안은 순식간에 완벽한 어둠에 휩싸이는 듯했다. 그러나 자세히 보니 칠흑 같았던 어둠이 걷히고, 저 멀리 동쪽 산등성이 너머에서부터 희미하고 푸르스름한 기운이 서서히 새어 들어오고 있었다. 이명원이 그 푸른빛을 응시하며 어둠 속에서 묵직하게 말했다.
"자네가 지금 이 순간, 뼛속 깊이 가장 무서워하고 두려워하는 것. 그것은 팥 쪼가리도, 짐승의 피도 아니네. 그것은 바로 저 산 너머에서 밝아오는 '새벽', 즉 '날이 새는 것'일세."
도깨비의 거대한 어깨가 눈에 띄게 움찔거렸다.
"자네는 이 내기에서 지는 것도 분하고, 나 같은 인간에게 두 번이나 농락당한 것도 치욕스럽겠지. 하지만 그것보다 지금 당장 네 숨통을 조여오는 가장 무서운 것은, 저 동쪽에서 붉은 해가 떠올라 더 이상 네가 이 어둠의 정자에 머물 수 없게 되어 흔적도 없이 쫓겨나야 한다는 사실. 바로 그것이 아니더냐?"
도깨비는 꿀 먹은 벙어리처럼 입을 다물었다. 선비의 예리한 통찰이 자신의 가장 취약한 본질, 즉 어둠에 속한 존재로서 태양을 마주해야 하는 근원적인 공포를 완벽하게 꿰뚫어 버렸기 때문이었다.
※ 5: 패배의 증표, 세 가지 소원을 품은 도깨비 방망이
어느덧 창호지 문풍지 밖이 희미한 은빛으로 밝아오기 시작했다. 숲을 무겁게 짓누르던 칠흑 같은 어둠은 어느새 옅은 남색으로 풀어져 있었고, 멀리 산 아래 인가에서 첫 닭이 "꼬끼오!" 하고 목청껏 새벽을 알리는 소리가 정자까지 선명하게 들려왔다. 만물을 깨우는 아침의 빛이 도래한 것이다.
도깨비는 멍하니 동터오는 하늘을 바라보더니, 자신이 완벽하게 패배했음을 깨끗하게 인정했다. 그는 분노하여 선비를 해치거나 억지를 부리는 대신, 오히려 가슴이 뻥 뚫린 듯 아주 유쾌하고 호탕하게 웃음을 터뜨렸다. 그 거대한 웃음소리에 썩은 정자 마루가 무너질 듯 덜컹거렸다.
"크하하하! 졌다! 이 천하의 도깨비가 완벽하게 졌어! 내 이 숲에서 수백 년을 살면서 수많은 인간들을 지켜보았으나, 고작 핏덩이 같은 가난한 젊은 선비에게 이 지혜 내기에서 단 한 문제도 맞히지 못하고 철저히 패배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이야, 너 정말 보통 내기가 아니로구나! 네놈의 그 깡마른 몸뚱이에 든 간은 쓸데없어도, 그 머릿속에 꽉 들어찬 지혜만큼은 천하의 으뜸가는 명약보다 낫구나!"
도깨비는 흉측하게 붉으락푸르락했던 분노의 살기를 완전히 거두고, 이명원을 진심으로 경외하는 눈빛으로 내려다보았다. 그는 본디 인간을 무자비하게 해치는 악귀라기보다는, 영겁의 무료함을 견디지 못해 짓궂은 장난을 치는 영물에 불과했다. 이 강직한 선비와의 하룻밤은 그에게 수백 년 만에 맛보는 짜릿한 유희였다.
"내기에서 졌으니 약조는 약조다. 내 약속하건대, 오늘 이후로 다시는 네가 이곳에서 글을 읽는 것을 방해하지 않을 것이며, 내 당장 이 숲을 떠나 다시는 나타나지 않으마. 아니지, 가만 보니 이제 날이 밝았으니 네놈도 더 이상 이 귀신 나오는 낡은 정자에 올 일도 없으려나? 크하하!"
도깨비는 웃음을 거두더니, 자신의 시커먼 등 뒤에 봇짐처럼 비스듬히 메고 있던 낡고 울퉁불퉁한 몽둥이 하나를 훌렁 풀어 이명원의 무릎 앞 빈바닥으로 툭 던져주었다. 그것은 언뜻 보면 썩어 문드러진 나무뿌리 같기도 하고, 혹은 오래전 생을 다한 거대한 짐승의 뼈 같기도 한 매우 기괴하고 볼품없는 모양새를 하고 있었다.
"이것이 무엇이냐?"
이명원이 의아한 표정으로 묻자, 도깨비가 씩 웃으며 답했다.
"이것은 내 깨끗한 패배의 증표이자, 너의 그 놀랍고 쓸 만한 지혜에 바치는 수백 년 묵은 '선물'이다. 잔말 말고 어서 집어 들어라."
이명원이 얼떨결에 두 손으로 그 몽둥이를 집어 들자, 겉보기와 다르게 엄청나게 묵직한 무게감과 함께, 말로 다 설명할 수 없는 기묘하고 따뜻한 기운이 손바닥을 타고 온몸으로 퍼져나가는 것이 느껴졌다.
"그것은 겉보기엔 그저 땔감으로 쓸 법한 낡은 나무 몽둥이 같아 보여도, 이 몸이 수백 년간 지니고 다니며 아끼던 '도깨비 방망이'다. 네놈들 인간들이 옛날이야기 속에서나 듣고 아주 환장하며 찾아 헤매는 바로 그 요물단지 물건이지."
"도, 도깨비 방망이라니? 정녕 치면 금은보화가 쏟아진다는 그 방망이란 말이냐?"
"그래, 맞다. 소원을 간절히 마음속으로 빌며 땅에 '툭' 하고 내리치면, 그것이 쌀이든 돈이든 집이든 무엇이든 네놈의 눈앞에 이루어질 게다. 인간의 얄팍한 상상으로는 가늠할 수 없는 조화가 깃들어 있지."
늘 가난에 허덕이며 책을 읽을 불빛조차 구하지 못했던 이명원에게, 이보다 더 엄청난 기적의 보물은 세상천지에 없을 터였다. 눈동자가 커지며 방망이를 바라보는 이명원을 향해, 도깨비의 목소리가 갑자기 낮고 엄숙하게 가라앉았다. 시퍼런 눈빛이 매섭게 선비를 직시했다.
"허나, 명심하고 또 명심해라. 그 방망이는 인간에게 엄청난 복이 될 수도 있지만, 까딱 잘못하면 목숨을 앗아가는 끔찍한 독이 될 수도 있다. 네놈의 그릇이 감당할 수 있도록, 이 방망이는 평생을 통틀어 '단 세 번'만 쓸 수 있도록 내 특별히 금제를 걸어 두었다. 그 세 번의 천금 같은 기회를 어찌 쓰느냐가, 바로 네놈의 지혜를 다시 한번 시험하는 험난한 길이 될 것이다."
도깨비는 자리에서 서서히 일어나며 선비에게 마지막 경고이자 비결을 일러주었다.
"내 특별히 방망이를 다루는 비결을 하나 알려주지. 첫 번째 소원은 '너 자신'의 안위와 발전을 위해 쓰고, 두 번째 소원은 핏줄을 나눈 '네 가문과 식솔들'을 위해 쓰거라. 허나 마지막 세 번째 소원만큼은, 반드시 너와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헐벗은 '천하의 백성'들을 구하는 데 써야만 한다. 그리하여야만 방망이의 복이 비로소 하늘이 내리는 '천복(天福)'이 되어 네 곁에 영원히 머무를 것이다."
도깨비의 목소리가 메아리처럼 정자를 울렸다.
"만약 그 약조를 어기고 세 번 모두 네놈 개인의 사사로운 탐욕을 채우거나 재물을 탐하는 데 쓴다면, 그 천복은 곧바로 무서운 재앙과 저주로 돌변하여 네가 가진 모든 것을 앗아가고 네 목숨마저 거두어 갈 것이다. 내 말을 똑똑히 새겨들었느냐?"
이명원은 묵직한 방망이를 가슴에 품고 결연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네 뜻이 정녕 그러하다면 뼈에 새기듯 명심하겠네, 도깨비 양반."
해가 산봉우리를 완전히 넘어오며 눈부신 황금빛 아침 햇살이 정자 안으로 쏟아져 들어오기 시작하자, 짐승 같았던 도깨비의 거대한 형체는 마치 아침 안개가 흩어지듯 발끝부터 희미해지더니 공기 중으로 스르르 녹아내리기 시작했다.
"허허… 내 살아생전 이토록 흥미롭고 재미있는 밤은 참으로 오랜만이었다, 이 선비. 부디 너의 그 훌륭한 지혜로 그 무서운 복을 잘 다스려 보거라…."
목소리의 여운만이 맴돌다 사라졌고, 어느새 정자 위에는 눈 부신 아침 햇살과 차가운 새벽이슬, 그리고 도깨비가 남기고 간 낡은 방망이를 꼭 쥔 가난한 선비 이명원만이 덩그러니 남아 있었다.
※ 6: 천하를 위해 부서진 방망이, 마침내 쏟아지는 천복
이명원은 지난밤 자신이 겪은 모든 일들이 마치 길고 기묘한 꿈을 꾼 것만 같았다. 수백 년 묵은 도깨비와 목숨을 건 내기를 하고, 방망이를 얻어 무사히 살아 돌아오다니. 하지만 그의 두 손에는 묵직하면서도 알 수 없는 기묘한 온기를 뿜어내는 낡은 나무 방망이가 너무도 선명하게 들려 있었다.
그는 몽롱한 정신을 다잡고 산을 내려와 자신의 비루한 초가집으로 돌아왔다. 방 안에서는 여전히 병든 노모가 차가운 방바닥에 얇은 이불 한 장을 덮고 누워 "콜록, 콜록" 피 섞인 마른기침을 힘겹게 뱉어내고 계셨다. 부엌에는 쌀 한 톨 끓일 것이 없어 어린 동생들이 굶주림에 지친 창백한 얼굴로 웅크리고 잠들어 있었다. 이 참혹한 가난을 끊어낼 기회가 마침내 그의 손에 쥐어진 것이다.
이명원은 마루 끝에 서서 도깨비가 마지막으로 남겼던 경고를 머릿속으로 되뇌었다.
'첫 번째 소원은 너 자신을 위해 쓰라 하였지.'
그는 방망이를 두 손으로 굳게 쥐고 깊은 상념에 잠겼다.
'나를 위해 쓴다… 당장 기와집을 짓고 천 석의 쌀을 달라고 빌까? 아니, 재물은 쓰면 언젠가 사라지는 허망한 것이다. 내 가장 큰 소원은 이 지긋지긋한 가난의 굴레를 영원히 벗어나는 것. 허나 그 근본적인 길은 요행이 아니라 내가 직접 벼슬길에 나아가는 단 한 가지 방법뿐이다.'
그는 낡은 마당 한가운데 서서 떠오르는 눈부신 아침 해를 바라보며 조용하지만 간절하게 중얼거렸다.
"비나이다. 내 꽉 막힌 머리가 환하게 트여 천하의 모든 이치를 깨닫게 하시고, 성현의 깊은 뜻을 온전히 통달하여 다가오는 대과에 장원급제할 수 있는 막힘없는 '지혜'를 내어주소서!"
단순한 부귀영화가 아닌 궁극적인 지혜를 구하는 소원이었다. 기도가 끝나자 이명원은 도깨비 방망이로 마당의 흙바닥을 '툭' 하고 가볍게 내리쳤다.
그 순간이었다. 방망이 끝에서 마치 벼락이 치듯 짜릿하고 뜨거운 기운이 솟아오르더니, 이명원의 두 손을 타고 거침없이 머릿속으로 밀려 들어왔다. 눈앞에 섬광이 번쩍이는 듯하더니, 지난 10년간 밤낮으로 읽어도 도무지 풀리지 않고 막막하기만 했던 《주역》의 복잡한 섭리와 《논어》의 깊은 이치들이 마치 따스한 봄날 햇살에 눈이 녹듯 머릿속에서 환하게 풀리기 시작했다. 세상 만물의 이치가 수정처럼 맑게 보였다. 그는 이제 더 이상 글에 목마른 가난한 선비가 아니었다.
그해 가을, 이명원은 한양에서 열린 대과에 당당히 응시했다. 수백 명의 쟁쟁한 유생들이 모인 자리에서, 그는 시험관들조차 무릎을 치며 감탄할 수밖에 없는 명문장과 압도적인 통찰력을 쏟아내어 모두의 예상을 뒤엎고 '장원급제'의 영광을 차지했다. 임금의 큰 총애를 받게 된 그는 곧바로 핵심 관직인 홍문관에 배수되어 조정에 입궐하게 되었다.
첫 녹봉을 받아 든 날, 이명원은 비단옷을 입고 고향 집으로 돌아왔다. 금의환향이었다. 하지만 그는 자만하지 않고, 궤짝 깊숙이 숨겨두었던 방망이를 다시 꺼내 들었다.
'두 번째 소원은 네 가문과 식솔을 위해 쓰라 하였지.'
여전히 낡고 초라한 초가삼간 마당에서, 그는 방망이를 들고 하늘을 향해 기원했다.
"부디 평생 고생만 하신 우리 노모께서 병환을 모두 훌훌 털고 일어나 만수무강하시게 굽어살피시고, 주린 배를 움켜쥐고 자란 내 어린 동생들이 훌륭한 배필을 만나 집안이 번성하게 복을 내려주소서!"
바닥을 '툭' 내리치자, 기적처럼 방 안에서 고통스럽게 기침하던 노모의 숨소리가 씻은 듯 편안해졌다. 수십 년 묵은 지병이 하루아침에 완치된 것이다. 뿐만 아니라, 장원급제하여 앞날이 창창한 이명원에게 명망 높은 사대부 가문들의 혼담이 줄을 이었고, 그는 지혜롭고 덕망 있는 아내를 맞이하였다. 덕분에 어린 동생들 역시 좋은 혼처를 만나 뿔뿔이 흩어졌던 가세가 크게 일어나며, 쇠락했던 가문은 다시금 튼튼한 뿌리를 내리고 번성하기 시작했다.
그로부터 10년의 세월이 흐르는 물처럼 지나갔다. 그사이 이명원은 특유의 비범한 지혜와 백성을 아끼는 공명정대한 성품으로 초고속 승진을 거듭하여, 마침내 일인지하 만인지상이라는 정승의 반열에 오르게 되었다. 그는 더 이상 도깨비 방망이의 힘을 빌리지 않아도 될 만큼 세상의 모든 명예와 안정을 이룩했다.
바로 그해였다. 조선 팔도에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끔찍한 대가뭄이 찾아왔다. 3년이 넘도록 하늘에서는 비 한 방울 내리지 않았고, 쩍쩍 갈라진 논밭에서는 먼지만 풀풀 날렸다. 굶주림에 지친 백성들이 초근목피로 연명하다 길가에 쓰러져 죽어나갔고, 나라의 곡간마저 텅텅 비어버리는 절체절명의 위기가 닥쳤다. 임금이 친히 기우제를 올리고 하늘에 통곡했으나, 야속한 하늘은 핏빛 태양만 내리쬘 뿐이었다.
참혹한 백성들의 고통을 보다 못한 이 정승(이명원)은, 10년 넘게 봉인해 두었던 마지막 세 번째 방망이를 챙겨 들었다.
'마지막 한 번은 반드시 천하를 위해 쓰라. 그리해야만 천복이 되리라.'
그는 뙤약볕이 내리쬐는 광화문 앞 너른 마당으로 나아갔다. 임금과 수백 명의 조정 관료들이 의아하게 지켜보는 가운데, 이명원은 비장한 얼굴로 낡은 방망이를 하늘 높이 치켜들었다.
"하늘이시여! 부족한 이 늙은 신하의 남은 수명을 절반 아니, 모두 거두어 가셔도 좋사오니, 제발 이 땅에서 죽어가는 불쌍한 백성들을 굽어살피시어 저 마른 대지를 적실 넉넉한 단비를 내려주시옵소서!"
간절한 피를 토하듯 외친 그가 마지막 온 힘을 실어 방망이로 땅을 쾅! 하고 내리쳤다. 그 순간, 수백 년을 버텨온 요물 도깨비 방망이는 스스로 그 임무를 다했다는 듯 쩌억! 하는 굉음과 함께 산산조각이 나버렸다. 그리고는 한 줌의 재가 되어 바람을 타고 허공으로 영영 흩어져 버렸다.
사람들이 허망하게 그 광경을 바라보던 바로 그때였다. 먹장구름 한 점 없던 새파란 하늘에 돌연 짙은 먹구름이 천군만마처럼 몰려들기 시작하더니, 우르릉 쾅쾅 하는 천둥소리와 함께 굵은 빗방울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3년 묵은 지독한 가뭄을 한 방에 씻어내는, 하늘이 내린 기적의 장대비였다. 빗물을 맞으며 춤을 추는 백성들의 환호성이 궁궐 담장을 넘어 도성을 가득 메웠다.
이명원은 도깨비가 일러준 약속을 끝까지 지켜내었다. 자신의 사리사욕을 버리고 백성을 살리기 위해 방망이를 기꺼이 부수어 버린 그의 지혜와 헌신 덕분에, 방망이의 복은 재앙이 되지 않고 진정한 하늘의 축복, 즉 '천복(天福)'으로 승화되었다. 그는 수명을 빼앗기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임금과 만백성의 절대적인 존경을 받으며 조선 최고의 어진 정승으로 칭송받다 아흔이 넘은 나이에 잠자듯 평안하게 생을 마감했다고 전해진다. 두려움을 굴복시킨 용기와, 욕심을 다스려 세상을 품은 지혜. 이명원의 기막힌 이야기는 수백 년이 지난 오늘날까지도 묵직한 감동을 남기며 우리의 귓가에 맴돌고 있다.
유튜브 엔딩멘트
오늘 <천사 야담>이 들려드린 겁 없는 선비와 도깨비의 기묘한 내기 이야기, 어떻게 들으셨나요? 공포 앞에서 이성을 잃지 않는 당당함과, 뜻밖의 큰 복을 얻었음에도 자신의 그릇을 알고 마지막 소원을 천하를 위해 기꺼이 내어놓은 이명원의 헌신이 오늘날 우리에게 큰 울림을 주는 것 같습니다. 진정한 기적은 요술 방망이가 아니라, 욕심을 비워낸 사람의 지혜로운 마음 씀씀이에서 시작되는 것이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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