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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도깨비와 내기를 벌인 농부, 힘이 아니라 꾀로 단번에 코를 납작하게 만들다 『청구야담』
부제
힘자랑하는 도깨비가 씨름이며 힘내기를 걸어오자, 꾀 많은 농부가 도저히 힘으로는 못 이길 내기에 슬쩍 머리를 써서 보기 좋게 이깁니다. 약이 오른 듯하면서도 사람의 재치에 탄복한 도깨비가 외려 농부와 둘도 없는 벗이 되었다는 유쾌한 이야기.
태그 15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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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킹멘트
깊은 산골에서 천하장사를 자처하는 도깨비와 마주친 가난한 농부! 도깨비는 돌에서 물을 짜내고 바위를 하늘 끝까지 던져 보자며 힘내기를 제안합니다. 하지만 농부는 힘 대신 번뜩이는 꾀로 도깨비를 연달아 쓰러뜨리는데요. 마지막 씨름판에서 벌어진 통쾌한 승부, 지금 시작합니다.
※ 1: 달밤의 보리밭에 나타난 천하장사
옛날 조선 어느 고을에 만복이라는 가난한 농부가 살았습니다. 이름은 만 가지 복을 타고난 사람처럼 들렸지만, 정작 그의 살림에는 복이라고 부를 만한 것이 좀처럼 보이지 않았습니다. 가진 논이라고는 비가 조금만 오지 않아도 거북이 등처럼 갈라지는 자갈밭 두 마지기뿐이었고, 소 한 마리는커녕 제대로 된 쟁기조차 없었습니다.
만복은 남들이 아직 꿈속에 있을 때 밭으로 나가 해가 산 너머로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호미를 놓지 않았습니다. 그래도 가을이 오면 거둔 곡식의 절반은 지주에게 소작료로 내야 했고, 남은 곡식은 봄을 넘기기도 전에 바닥났습니다. 아내 분이는 묽은 죽을 끓이면서도 아이들 그릇에는 건더기를 하나라도 더 건져주었고, 자신과 만복의 그릇에는 멀건 물만 담았습니다.
그날도 만복은 산비탈의 보리밭에서 늦도록 김을 매고 있었습니다. 며칠 전 내린 비로 잡초가 보리보다 더 빠르게 자라난 탓이었습니다. 허리를 펼 때마다 뼈마디가 우두둑 소리를 냈지만, 만복은 달빛을 등불 삼아 호미질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여보, 이제 그만 돌아가요. 그러다 산짐승이라도 만나면 어쩌려고 그래요."
저녁 무렵 새참을 가져왔던 분이의 걱정스러운 목소리가 떠올랐지만, 만복은 마지막 고랑까지 마치고서야 호미를 털었습니다.
"호랑이도 배가 불러야 사람을 잡아먹지. 나처럼 살도 없는 사람은 보고도 그냥 지나갈 게야."
혼잣말로 너스레를 떤 만복은 빈 지게를 등에 지고 산길을 내려오기 시작했습니다. 둥근 달은 높이 떠 있었고, 풀벌레 울음은 고요한 산골을 가득 채웠습니다. 그런데 오래된 느티나무 근처에 이르렀을 때였습니다.
쿵!
갑자기 땅이 울리더니 산길에 쌓여 있던 낙엽이 허공으로 들썩였습니다. 만복이 걸음을 멈추자 또다시 묵직한 소리가 들렸습니다.
쿵! 우지끈!
이번에는 아름드리 소나무 한 그루가 뿌리째 흔들렸습니다. 만복은 지게 작대기를 두 손으로 붙잡고 소리가 난 곳을 바라보았습니다. 달빛 아래에서 사람보다 두 배는 큰 검은 그림자가 느티나무 뒤로 불쑥 튀어나왔습니다.
그것은 덥수룩한 머리와 수염을 기르고, 낡은 삼베옷을 걸친 거대한 도깨비였습니다. 한 손에는 어린아이 몸통보다 굵은 나무 방망이를 들었고, 다른 손에는 사람 머리만 한 바위를 장난감처럼 올려놓고 있었습니다.
도깨비는 만복을 발견하자 기다렸다는 듯 바위를 번쩍 들어 올렸습니다.
"이 산길을 지나는 인간들은 모두 나를 보고 달아났는데, 넌 어찌하여 그 자리에 서 있느냐?"
만복의 무릎도 사실은 살짝 떨리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여기서 등을 보였다가는 도깨비가 더 신나게 쫓아올 것 같았습니다. 그는 지게 작대기를 땅에 짚고 아무렇지도 않은 척 하품을 했습니다.
"달아날 까닭이 없으니 서 있는 것이오. 덩치가 산만 한 것을 보니 힘은 좀 쓰게 생겼구려."
"힘을 좀 써? 이놈이 내 앞에서 힘을 논해?"
도깨비는 콧김을 뿜으며 손안의 바위를 힘껏 움켜쥐었습니다. 우두둑 소리와 함께 바위 표면에 금이 가더니, 이내 여러 조각으로 부서져 땅바닥에 떨어졌습니다. 도깨비는 자랑스럽게 가슴을 내밀었습니다.
"보았느냐? 나는 북쪽 산의 바위를 뽑아 남쪽 골짜기까지 던질 수 있고, 황소 두 마리를 양팔에 하나씩 끼고 달릴 수도 있다. 산속의 호랑이도 내 발소리만 들으면 꼬리를 말고 굴속으로 숨지."
만복은 놀란 마음을 감추며 부서진 돌조각 하나를 발끝으로 툭 건드렸습니다.
'저 팔뚝에 한 번만 붙잡혀도 내 허리는 마른 가지처럼 부러지겠구나. 힘으로 맞서서는 백 번을 다시 태어나도 이길 수 없다. 그렇다면 저 힘을 이길 다른 것을 찾아야지.'
만복은 일부러 심드렁한 표정을 지었습니다.
"겨우 돌 하나 부순 것을 가지고 천하장사라 자랑하는 것이오? 우리 마을에서는 열 살짜리 아이들도 심심하면 그 정도는 하오."
도깨비의 커다란 눈이 등잔만 하게 벌어졌습니다.
"뭐라고? 그렇다면 네놈은 나보다 힘이 세다는 말이냐?"
"내 입으로 세다 약하다 말해 무엇하겠소. 겨뤄보면 금방 드러날 일이지."
도깨비는 잠시 멍하니 만복을 바라보다가 산이 떠나갈 듯 크게 웃었습니다.
"크하하하! 뼈밖에 남지 않은 인간이 나와 힘을 겨루겠다고? 좋다! 마침 오늘 밤 심심하던 참인데 잘되었구나. 우리 세 번 겨뤄 두 번 먼저 이기는 쪽이 승자가 되는 것이다!"
"내기에는 대가가 있어야 재미있는 법이오. 내가 이기면 무엇을 내놓겠소?"
"네가 이기면 이 몸이 사흘 밤 동안 네 밭에서 일을 해주마. 산을 뽑는 내 힘이라면 네가 한 달 걸려 할 일을 하룻밤에 끝낼 수 있지."
만복의 눈이 반짝였지만 그는 애써 태연한 얼굴을 유지했습니다.
"그렇다면 내가 지면 어찌하면 되오?"
도깨비는 나무 방망이를 어깨에 걸치며 짓궂게 웃었습니다.
"네가 지면 앞으로 보름 동안 밤마다 이 산으로 올라와 내 술상을 차리고 말벗이 되어라. 달아나면 네 초가집 지붕을 통째로 뽑아 냇물에 던져버리겠다."
목숨을 빼앗겠다는 조건은 아니었지만, 가난한 만복에게 보름 동안 술상을 차리라는 말은 곳간을 통째로 내놓으라는 것과 같았습니다. 그러나 도깨비가 사흘만 밭일을 해준다면 돌밭을 갈아엎고 물길까지 낼 수 있었습니다.
만복은 잠시 눈을 감고 머릿속으로 셈을 마쳤습니다.
"좋소. 대신 내기는 날이 밝은 뒤 시작합시다. 캄캄한 밤에는 누가 속임수를 써도 알 수 없지 않겠소?"
"내가 인간 따위를 속일 것 같으냐?"
"그러니까 더더욱 날이 밝아도 상관없겠지요."
도깨비는 그 말에 발끈하여 방망이로 땅을 내리쳤습니다.
"좋다! 내일 해가 떠오르면 이 느티나무 아래로 와라. 첫 번째는 손아귀 힘, 두 번째는 던지는 힘, 마지막은 씨름이다. 네놈의 가느다란 허리가 내 손에 얼마나 버티는지 보자꾸나!"
"약속을 잊지 마시오. 내가 두 번 이기면 사흘 동안 내 밭을 갈아야 하오."
"도깨비는 내기에 목숨을 걸지, 약속을 가볍게 여기지 않는다!"
도깨비는 우렁찬 웃음을 남기고 산 위로 뛰어올랐습니다. 그가 한 번 뛸 때마다 나뭇가지가 흔들리고 돌멩이가 비탈 아래로 굴러떨어졌습니다.
혼자 남은 만복은 그제야 다리에 힘이 풀려 느티나무에 등을 기댔습니다. 이마에는 식은땀이 송골송골 맺혀 있었습니다.
"아이고, 입이 방정이지. 저런 괴물과 힘을 겨루겠다고 큰소리를 쳤으니 내일이면 뼈도 못 추리겠구나."
그러나 겁에 질려 있기만 할 만복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산길에 흩어진 돌과 풀, 자신이 멘 지게와 빈 새참 보자기를 차례로 살펴보았습니다. 그러다 보자기 한쪽에 남아 있는 물컹한 메밀묵 한 덩이를 발견했습니다. 분이가 저녁에 먹으라며 싸준 것이었습니다.
만복은 메밀묵을 손으로 살짝 눌러보았습니다. 손가락 사이로 물기가 배어 나오자 그의 입가에 천천히 미소가 번졌습니다.
'손아귀 힘을 겨루겠다고 했지? 힘이 센 쪽이 언제나 이기는 것은 아니야. 상대가 무엇을 쥐었는지 모른다면 말이지.'
만복은 보리밭 가장자리에서 검은 흙과 잿가루를 조금 주워 메밀묵의 겉면에 골고루 묻혔습니다. 물컹한 메밀묵은 어둠 속에서 영락없는 검은 돌덩이처럼 보였습니다.
그는 그것을 보자기 깊숙한 곳에 감추고 집으로 향했습니다. 발걸음은 올 때보다 훨씬 가벼웠습니다. 힘으로는 도저히 넘을 수 없는 거대한 산이 앞을 막고 있었지만, 만복의 머릿속에는 벌써 그 산을 돌아갈 좁고 재미있는 길 하나가 생겨나고 있었습니다.
※ 2: 돌에서 물을 짜내는 첫 번째 힘내기
다음 날 아침, 동쪽 산등성이 위로 붉은 해가 고개를 내밀기도 전에 만복은 자리에서 일어났습니다. 밤새 제대로 잠을 이루지 못했지만 그의 눈빛은 어느 때보다 또렷했습니다.
분이는 남편이 평소와 달리 메밀묵에 검은 흙과 잿가루를 묻히는 모습을 보고 고개를 갸웃거렸습니다.
"먹을 것이 없어 이제는 흙 묻은 묵까지 드시려는 거예요?"
"먹으려는 게 아니라 우리 밭을 갈아줄 일꾼을 구하는 중이오."
"어느 일꾼이 흙 묻은 묵을 품삯으로 받아요?"
"아주 힘이 세고, 머리는 조금 느린 일꾼이 하나 있소."
만복은 그 이상 설명하지 않았습니다. 도깨비와 내기를 한다고 사실대로 말했다가는 분이가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놓아주지 않을 것이 분명했습니다. 그는 잿가루를 묻힌 묵을 마른 나뭇잎으로 여러 겹 싸서 소매 안쪽에 단단히 감추었습니다.
느티나무 아래에 도착하자 도깨비는 벌써부터 커다란 바위에 앉아 만복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의 발치에는 주먹만 한 돌들이 수북하게 쌓여 있었습니다.
"호오, 달아나지 않고 정말 왔구나. 밤새 무서워 이불에 지도를 그렸을 줄 알았는데."
"내가 걱정한 것은 도깨비가 약속을 잊고 달아나지 않았을까 하는 것뿐이오."
"이놈이 아침부터 매를 벌어! 좋다. 첫 번째는 손아귀 힘을 겨룬다. 저 돌 가운데 하나를 골라 잡아라. 더 많이 부수는 쪽이 이기는 것이다."
도깨비는 가장 단단해 보이는 돌 하나를 집어 들었습니다. 손안에서 돌을 몇 차례 굴린 뒤 팔뚝에 힘을 주자 굵은 힘줄이 밧줄처럼 솟아올랐습니다.
"잘 보아라!"
도깨비가 괴성을 지르며 돌을 움켜쥐었습니다. 우두둑, 빠드득 하는 소리와 함께 돌에 금이 퍼졌습니다. 도깨비가 손바닥을 펼치자 잘게 부서진 돌조각과 가루가 우수수 떨어졌습니다.
"어떠냐? 이만하면 네가 지금이라도 무릎을 꿇을 만하지 않으냐?"
만복은 돌가루를 살펴본 뒤 혀를 차며 고개를 저었습니다.
"힘은 제법 쓰지만 아직 멀었구려."
"뭐가 멀었다는 것이냐? 돌을 가루로 만들었는데!"
"돌을 깨는 것은 망치도 할 수 있소. 손아귀 힘이 진정으로 세다면 돌 속에 든 물까지 짜내야 하지 않겠소?"
도깨비는 입을 벌린 채 만복을 바라보았습니다.
"돌 속에 무슨 물이 있다는 말이냐?"
"그러니 자네가 아직 힘을 제대로 쓸 줄 모른다는 것이오."
만복은 돌무더기 앞에 쪼그려 앉아 고르는 척 시간을 끌었습니다. 오른손으로는 돌멩이를 이리저리 뒤적이고, 왼손은 소매 속으로 넣어 미리 준비한 메밀묵을 꺼냈습니다. 잿가루와 검은 흙이 묻은 묵은 크기와 색깔이 주변 돌과 비슷했습니다.
그는 묵을 재빨리 손바닥 안에 감추고 자리에서 일어났습니다.
"자, 눈을 크게 뜨고 보시오. 나는 돌을 깨는 데서 그치지 않고, 그 속에 숨어 있는 물까지 남김없이 짜내겠소."
도깨비는 처음에는 코웃음을 쳤습니다. 하지만 만복이 양손으로 검은 덩어리를 감싸 쥐고 얼굴까지 붉혀가며 힘을 주자 그의 표정이 조금씩 달라졌습니다.
만복의 손가락 사이로 맑은 물방울이 하나둘 떨어졌습니다. 이내 메밀묵이 으깨지면서 물기가 주르륵 흘러내렸습니다. 만복은 물 한 방울까지 짜내겠다는 듯 이를 악물고 손을 비틀었습니다.
"보시오. 돌이 견디지 못하고 땀을 흘리지 않소?"
도깨비의 턱이 아래로 축 늘어졌습니다. 그는 만복의 손에서 떨어지는 물과 자신이 부순 돌가루를 번갈아 바라보았습니다.
"그, 그럴 리가 없다. 돌에서 정말 물이 나왔단 말이냐?"
"눈앞에서 보고도 믿지 못하겠소? 자네는 돌을 겨우 부쉈지만 나는 돌이 비명을 지르며 물을 토하게 만들었소. 어느 쪽 손아귀가 더 센지는 어린아이도 알겠구려."
도깨비는 다급히 발치에서 다른 돌을 집어 들었습니다. 그리고 두 손으로 있는 힘껏 쥐어짰습니다. 돌은 산산이 부서졌지만 물은 한 방울도 나오지 않았습니다. 그는 더 큰 돌을 골라 다시 힘을 주었습니다. 이번에도 돌가루만 날릴 뿐이었습니다.
"이 돌은 말라비틀어진 돌이로군!"
도깨비가 세 번째 돌을 집으려 하자 만복이 손을 내저었습니다.
"내기는 한 번씩이라고 했소. 설마 천하장사라는 도깨비가 인간과의 약속을 바꾸려는 것은 아니겠지요?"
그 말에 도깨비의 얼굴이 울긋불긋해졌습니다. 그는 억울한 듯 입술을 씰룩거렸지만 약속을 어길 수는 없었습니다.
"좋다. 첫판은 네가 이긴 것으로 하자. 하지만 돌이 이상했을 뿐이다. 다음 내기에서는 절대 그런 운이 따르지 않을 것이다."
"졌으면 졌다고 하면 될 것을, 돌 탓은 왜 하는 것이오?"
"내가 언제 돌 탓을 했느냐!"
"방금 이 돌은 말라비틀어졌다고 하지 않았소?"
도깨비는 말문이 막혀 커다란 입만 뻐끔거렸습니다. 만복은 웃음이 터져 나오려는 것을 참느라 입술을 단단히 깨물었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습니다. 만복의 손바닥에는 으깨진 메밀묵이 잔뜩 묻어 있었습니다. 도깨비가 가까이 다가와 자세히 들여다보면 돌이 아니라는 사실을 금방 알아차릴 터였습니다.
도깨비가 의심스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내밀었습니다.
"그런데 네 손에 묻은 그 물컹한 것은 무엇이냐?"
만복은 가슴이 철렁했지만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습니다.
"돌의 속살이오."
"돌에도 속살이 있느냐?"
"자네는 돌을 겉만 깨뜨렸으니 알 리가 없지. 힘이 깊숙이 들어가면 단단한 돌도 두부처럼 물러지는 법이오."
도깨비는 만복의 말을 믿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 몰라 눈을 끔벅였습니다. 만복은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손에 묻은 메밀묵을 땅바닥에 문질러 흙과 함께 감쪽같이 덮어버렸습니다.
도깨비는 첫 번째 내기에서 졌다는 것이 몹시 분한지 괜히 주변의 나무를 발로 걷어찼습니다. 아름드리나무가 크게 흔들리고 나뭇잎이 비처럼 쏟아졌습니다.
"손아귀 힘은 요령이 끼어들 여지가 있었다. 이번에는 그런 수작을 부릴 수 없는 것으로 하자."
"무엇을 하려는 것이오?"
도깨비는 바닥에서 둥글고 묵직한 돌 두 개를 골랐습니다. 크기와 무게가 비슷한 돌이었습니다.
"돌을 하늘로 던지는 것이다. 더 높이, 더 멀리 던지는 쪽이 이긴다. 이것이라면 네놈이 잔꾀를 부릴 수 없겠지."
만복은 하늘을 올려다보았습니다. 구름 한 점 없이 푸른 하늘이 끝없이 펼쳐져 있었습니다. 도깨비가 저 굵은 팔로 돌을 던진다면 산 너머까지 날아갈지도 몰랐습니다.
'돌은 아무리 꾀를 내도 스스로 날아가지는 않는다. 그렇다면 하늘 높이 날아가는 다른 것을 돌이라고 믿게 만들어야 하는데…….'
그때 만복의 귀에 풀숲에서 들려오는 작은 울음소리가 들어왔습니다. 삐익, 삐익. 고개를 돌려보니 어린 종달새 한 마리가 덤불에 걸린 가느다란 칡넝쿨에 발이 묶인 채 파닥거리고 있었습니다.
만복은 아무렇지 않은 척 그쪽으로 걸어가 종달새를 조심스럽게 꺼내주었습니다. 새는 놀랐는지 그의 손바닥 안에서 얌전히 웅크렸습니다. 만복은 종달새가 다치지 않았는지 살핀 뒤 넓은 소매 안에 살며시 품었습니다.
도깨비가 멀리서 소리쳤습니다.
"무얼 꾸물거리는 것이냐? 벌써 겁을 먹었느냐?"
만복은 소매 안에서 가볍게 움직이는 종달새를 느끼며 빙긋 웃었습니다.
"겁을 먹은 것이 아니라, 내가 던질 돌이 다시는 땅으로 돌아오지 않으면 어쩌나 걱정하고 있었소."
"크하하하! 돌이 땅으로 돌아오지 않는다고? 네 허풍도 이제 끝이구나. 이번에는 내가 먼저 던지겠다!"
도깨비는 돌을 든 팔을 크게 돌리기 시작했습니다. 바람이 거세게 일며 주변의 풀들이 한쪽으로 눕기 시작했습니다. 만복은 소매 속 종달새를 다치지 않게 감싸며 조용히 숨을 골랐습니다.
첫 번째 내기는 꾀로 넘겼지만, 두 번째 내기는 이제 막 시작되고 있었습니다.
※ 3: 하늘 끝까지 날아간 두 번째 돌
도깨비는 느티나무 아래에 두 다리를 넓게 벌리고 섰습니다. 오른손에는 사람 주먹보다 훨씬 큰 둥근 돌을 들고 있었습니다. 그는 어깨를 몇 번 돌리더니 돌을 쥔 팔을 뒤로 힘껏 젖혔습니다.
"잘 보아라! 내 돌은 저 산을 넘어 건너편 고을에 떨어질 것이다!"
도깨비가 땅을 박차는 순간, 발밑의 흙이 사방으로 터져 나갔습니다. 곧이어 돌이 굉음을 내며 하늘로 솟구쳤습니다. 돌은 눈 깜짝할 사이에 느티나무 꼭대기를 지나 구름 가까이 올라갔습니다.
만복은 손으로 햇빛을 가리며 돌을 쫓았습니다. 돌은 까마득한 점이 되어 산 너머로 날아가더니 한참 뒤 보이지 않는 곳에서 묵직한 소리를 냈습니다.
쿠웅!
멀리 산비탈에서 새 떼가 놀라 날아올랐습니다. 도깨비는 두 손을 허리에 얹고 의기양양하게 웃었습니다.
"어떠냐? 저 정도라면 돌이 어디에 떨어졌는지 찾는 데만 한나절이 걸릴 것이다. 이제 네 차례다. 설마 네 돌은 달나라까지 날아간다는 허풍을 늘어놓을 셈이냐?"
만복은 속으로 혀를 내둘렀습니다.
'과연 힘 하나는 대단하구나. 내가 정말로 돌을 던졌다면 바로 발등 앞에 떨어지고 말았겠지.'
하지만 그의 소매 안에는 조금 전 칡넝쿨에서 구해준 종달새가 얌전히 들어 있었습니다. 만복은 도깨비가 보지 못하도록 등을 돌리고 땅에서 작은 돌 하나를 집는 척했습니다. 그러고는 손바닥 안에 종달새를 감싼 채 하늘을 올려다보았습니다.
"자네 돌은 산 너머에 떨어졌으니 언젠가는 다시 찾을 수 있겠구려."
"당연하지. 아무리 높이 던져도 돌은 결국 땅으로 돌아오는 법이다."
"그렇다면 자네는 진 것이오."
도깨비의 눈썹이 꿈틀거렸습니다.
"던져보지도 않고 무슨 소리냐?"
"내 돌은 너무 높이 날아가 다시는 땅으로 돌아오지 않기 때문이오. 한 번 올라가면 구름 위에서 평생 떠다니지."
"말도 안 된다! 그런 돌이 세상 어디에 있단 말이냐?"
"의심스럽다면 직접 보시오. 다만 너무 빨리 날아가니 눈을 크게 뜨는 것이 좋을 게요."
만복은 종달새가 다치지 않도록 두 손으로 감싸 들고 몸을 몇 차례 빙글빙글 돌았습니다. 도깨비에게는 마치 온 힘을 끌어모으는 동작처럼 보였습니다. 만복은 마지막 순간 손을 높이 뻗으며 종달새를 하늘로 놓아주었습니다.
"가라!"
자유를 되찾은 종달새는 기다렸다는 듯 날개를 활짝 펼쳤습니다. 작은 몸이 햇빛을 받으며 빠르게 치솟았습니다. 처음에는 돌처럼 곧게 올라가던 검은 형체가 이내 날개를 퍼덕이며 구름을 향해 날아갔습니다.
도깨비는 종달새가 날개를 펼치기 전에 이미 고개를 뒤로 한껏 젖힌 상태였습니다. 눈이 부신 햇빛 때문에 그것이 돌인지 새인지 제대로 분간하지 못했습니다.
"어, 어어! 네 돌이 아직도 올라간다!"
"그러게 내가 뭐라고 했소? 내 손을 떠난 돌은 땅으로 돌아오는 법이 없다 하지 않았소."
종달새는 느티나무 꼭대기를 지나 푸른 하늘 속으로 점점 작아졌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작은 점마저 완전히 사라졌습니다.
도깨비는 입을 벌린 채 하늘만 바라보았습니다. 혹시 다시 떨어질까 싶어 한참을 기다렸지만 아무것도 내려오지 않았습니다. 목이 아픈지 뒷덜미를 주무르면서도 고개를 내리지 못했습니다.
"이상하다. 돌이 어째서 저리 오래 날아간단 말이냐?"
"자네는 힘이 겉으로만 세서 그렇소. 돌을 멀리 던지려면 팔 힘만 쓸 것이 아니라 돌의 마음부터 움직여야 하오."
"돌에도 마음이 있느냐?"
"마음이 없으면 어찌 땅속에서 수백 년을 묵묵히 버티겠소? 자네는 억지로 집어 던졌으니 돌이 땅으로 돌아왔고, 나는 정중히 하늘로 보내주었으니 돌이 구름 위에 머무는 것이오."
도깨비는 알 듯 말 듯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다가 갑자기 눈을 부릅떴습니다.
"잠깐! 방금 네 돌에서 날개 같은 것이 보인 듯했다!"
만복의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습니다. 하지만 그는 오히려 도깨비를 한심하다는 듯 바라보았습니다.
"그렇게 높고 빠르게 날아가면 돌의 양옆으로 바람이 갈라지지 않겠소? 자네가 본 것은 날개가 아니라 갈라진 바람이오."
"갈라진 바람?"
"힘을 제대로 쓰는 사람의 눈에만 보이는 것이지요. 설마 천하장사라는 분이 그것도 모르셨소?"
도깨비는 다시 말문이 막혔습니다. 모른다고 하면 힘을 제대로 쓰지 못하는 도깨비가 되고, 안다고 하면 만복의 설명을 인정해야 했습니다. 그는 한참을 끙끙거리다 애꿎은 머리만 긁었습니다.
"그래, 갈라진 바람이었을지도 모르지. 하지만 뭔가 이상하다."
"이상하긴 무엇이 이상하오? 자네 돌은 산 너머에 떨어졌고 내 돌은 아직도 날아가고 있소. 누가 이겼는지는 산새에게 물어도 알겠구려."
마침 하늘 어딘가에서 종달새의 맑은 울음소리가 들려왔습니다. 도깨비가 그 소리를 듣고 움찔했지만, 만복은 재빨리 손뼉을 쳤습니다.
"들었소? 내 돌이 구름 위에서 기뻐하며 노래까지 부르는구려."
"돌이 노래를 한다고?"
"마음도 있는 돌인데 노래라고 못 하겠소?"
도깨비는 이제 무엇이 옳고 그른지조차 알 수 없다는 듯 눈을 질끈 감았습니다. 만복은 웃음을 참으며 두 손을 소매 안에 넣었습니다.
"이것으로 두 판 모두 내가 이겼소. 약속대로 사흘 동안 내 밭을 갈아주면 되겠구려."
그 말에 도깨비의 얼굴이 갑자기 굳어졌습니다. 첫 번째 내기에서는 돌에서 물을 짜내는 모습을 보았고, 두 번째 내기에서는 하늘로 사라진 돌을 보았습니다. 눈앞에서 벌어진 일이니 패배를 부정하기도 어려웠습니다.
그러나 천하장사를 자처하던 도깨비가 비쩍 마른 농부에게 두 번이나 졌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에는 자존심이 너무 컸습니다. 도깨비의 얼굴은 붉어졌다가 푸르러졌고, 콧구멍에서는 뜨거운 김이 뿜어져 나왔습니다.
"안 된다!"
도깨비의 고함에 느티나무에 앉아 있던 새들이 일제히 날아올랐습니다.
"무엇이 안 된다는 것이오? 세 판 가운데 두 판을 먼저 이기는 쪽이 승자라 하지 않았소?"
"손아귀 내기에는 이상한 돌이 나왔고, 돌 던지기에는 갈라진 바람인지 뭔지가 끼어들었다. 순수하게 힘만 겨룬 것이 아니다!"
"이제 와 약속을 바꾸겠다는 것이오?"
"약속을 바꾸는 것이 아니다. 원래 세 번째 내기로 정했던 씨름까지 마쳐야 속이 시원하겠다는 말이다!"
도깨비는 나무 방망이를 땅에 내던지고 허리에 두른 굵은 띠를 단단히 조였습니다. 이어 두꺼운 팔뚝을 걷어붙이자 바위처럼 울퉁불퉁한 근육이 드러났습니다.
"이번에는 돌도, 바람도, 이상한 요령도 없다. 네 몸과 내 몸으로 정면에서 겨루는 것이다. 네가 나를 한 번이라도 땅에 넘어뜨린다면 군말 없이 네 밭을 갈아주겠다. 하지만 네 등이 먼저 땅에 닿는다면 앞선 두 번의 내기는 모두 무효다!"
만복은 도깨비의 몸을 아래에서부터 천천히 올려다보았습니다. 도깨비의 허벅지는 오래된 소나무 줄기만큼 굵었고, 어깨는 초가집 문짝보다 넓었습니다. 저런 상대와 허리를 맞잡고 씨름을 벌였다가는 넘어뜨리기는커녕 갈비뼈가 남아나지 않을 것 같았습니다.
'돌에서는 물을 짜낼 수 있었고, 새에게 돌의 흉내를 시킬 수도 있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내가 직접 저 괴물의 몸을 넘어뜨려야 한다. 어디에도 숨길 수 없고 대신 내보낼 것도 없구나.'
도깨비는 만복이 대답하지 못하자 승리를 확신한 듯 크게 웃었습니다.
"왜 그러느냐? 아까까지 잘 움직이던 그 세 치 혀가 갑자기 굳었느냐? 겁이 난다면 지금이라도 무릎을 꿇어라!"
만복은 마른침을 삼키며 주변을 천천히 살폈습니다. 느티나무 아래에는 밤이슬에 젖은 풀밭이 있었고, 그 옆에는 경사가 완만한 비탈과 얕은 진흙 웅덩이가 자리하고 있었습니다. 도깨비가 성을 내며 땅을 구를 때마다 상체는 앞으로 쏠렸고, 흥분하면 눈을 질끈 감는 버릇도 보였습니다.
그 순간 만복의 눈빛이 달라졌습니다.
힘으로 산을 밀어낼 수 없다면 산이 스스로 굴러가게 만들면 되었습니다. 강물을 거슬러 오를 수 없다면 흐르는 방향을 살짝 바꾸면 되는 일이었습니다.
만복은 허리띠를 풀어 다시 단단히 묶고 씨름판 한가운데로 걸어 나갔습니다.
"좋소. 여기까지 왔으니 마지막 씨름도 받아주지요."
"크하하하! 이제야 포기할 마음이 들었나 보구나!"
"다만 시작하기 전에 한 가지는 분명히 합시다. 힘이 센 것과 씨름을 잘하는 것은 서로 다른 일이오."
도깨비는 코웃음을 치며 두 팔을 벌렸습니다.
"약한 놈들이 언제나 그렇게 말하지. 자, 어서 덤벼라! 이번에는 네 잔꾀까지 한꺼번에 땅속에 처박아 주마!"
만복은 천천히 자세를 낮추었습니다. 눈앞에는 산처럼 거대한 도깨비가 서 있었지만, 그의 시선은 도깨비의 굵은 팔이 아니라 진흙이 묻은 발뒤꿈치와 앞으로 기울어진 어깨를 향하고 있었습니다.
두 판을 내리 진 도깨비와 힘이라고는 내세울 것 없는 농부의 마지막 씨름이 이제 막 시작되려 하고 있었습니다.
※ 4: 도깨비와 농부의 마지막 씨름판
만복과 도깨비는 느티나무 아래의 넓은 풀밭으로 자리를 옮겼습니다. 밤이슬이 채 마르지 않은 풀잎은 햇빛을 받아 반짝였고, 풀밭 한쪽에는 전날 내린 비로 만들어진 얕은 진흙 웅덩이가 있었습니다. 그 옆으로 굵은 느티나무 뿌리 하나가 땅 위에 길게 드러나 있었습니다.
도깨비는 풀밭 한가운데 서서 양팔을 벌리고 위풍당당하게 외쳤습니다.
"자, 어서 내 허리띠를 잡아라! 네놈의 몸뚱이를 저 산 너머로 던져주마!"
만복은 도깨비의 몸보다 먼저 발밑을 살폈습니다. 왼발은 단단한 땅을 딛고 있었지만 오른발 뒤꿈치는 젖은 풀 위에 놓여 있었습니다. 게다가 흥분하여 몸을 앞으로 기울일 때마다 오른발이 조금씩 미끄러졌습니다.
'힘이 아무리 세도 두 발로 땅을 딛는 것은 똑같다. 땅을 놓치면 천하장사도 서 있을 수 없지.'
만복은 도깨비의 오른쪽 발뒤꿈치와 진흙 웅덩이, 드러난 나무뿌리의 위치를 눈에 담았습니다. 그러고는 겁먹은 기색을 감추고 느긋하게 소매를 걷었습니다.
"씨름에도 법도가 있소. 서로 허리띠를 제대로 잡기도 전에 던지면 그것은 씨름이 아니라 행패지."
"좋다. 네가 원하는 만큼 단단히 잡아라. 두 손뿐 아니라 발가락으로 붙잡아도 상관없다!"
도깨비는 만복이 가까이 다가오자 벌써 승리한 듯 웃었습니다. 만복의 정수리가 겨우 도깨비의 가슴께에 닿았으니, 누가 보아도 승부는 뻔해 보였습니다.
만복은 자신의 기다란 허리띠를 풀어 도깨비의 굵은 허리에 둘렀습니다. 허리띠가 짧아 한 바퀴도 제대로 감기지 않았습니다. 도깨비는 그것을 보고 배를 잡으며 웃었습니다.
"크하하하! 네 허리띠가 내 허리의 절반도 돌지 못하는구나!"
"허리가 굵다고 씨름을 잘하는 것은 아니오. 빈 독도 몸집만 보면 크지 않소?"
도깨비는 웃음을 뚝 그치고 만복의 허리띠를 움켜쥐었습니다. 커다란 손 하나에 만복의 허리 절반이 들어갈 정도였습니다.
"네놈의 입이 언제까지 살아 있는지 보자!"
"잠깐. 시작 신호도 없이 덤비려는 것이오?"
"그럼 네가 신호를 해라!"
만복은 일부러 도깨비를 진흙 웅덩이 쪽으로 반걸음 옮겨 세웠습니다. 자신은 단단한 땅에 서고, 도깨비의 오른발 뒤에는 젖은 나무뿌리가 오도록 자리를 잡았습니다. 도깨비는 이겨야 한다는 생각에만 사로잡혀 발밑을 전혀 살피지 않았습니다.
"내가 셋을 세면 시작하는 것이오. 하나."
도깨비의 팔뚝에 힘줄이 솟았습니다.
"둘."
도깨비는 만복을 단숨에 들어 올리려고 상체를 낮췄습니다.
그 순간 만복이 다급한 얼굴로 도깨비의 뒤를 가리켰습니다.
"아니, 저건 무엇이오? 산신령께서 내기를 보러 오셨나?"
도깨비는 본능적으로 고개를 돌리려다가 멈췄습니다.
"또 무슨 잔꾀냐! 나는 절대 뒤를 보지 않는다!"
"과연 이번에는 속지 않는구려."
만복은 태연하게 웃었지만, 도깨비의 성정을 마지막으로 확인하기 위한 행동이었습니다. 도깨비는 남이 자신을 놀리거나 약하다고 말하면 앞뒤를 가리지 않고 달려드는 성질이 있었습니다.
만복은 도깨비의 띠를 단단히 붙잡고 목소리를 높였습니다.
"셋!"
도깨비는 고함을 지르며 만복의 허리띠를 위로 잡아당겼습니다. 만복의 두 발이 순식간에 땅에서 떨어졌습니다. 도깨비는 사람 하나쯤은 볏짚단처럼 들어 올릴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려는 듯 만복을 머리 위로 높이 치켜들었습니다.
"어떠냐! 이것이 천하장사의 힘이다!"
"들어 올리기만 하면 무엇하오? 넘어뜨려야 이기는 것이지!"
"좋다! 당장 땅바닥에 메다꽂아 주마!"
만복은 허공에 매달린 상태에서도 도깨비의 허리띠를 놓지 않았습니다. 도깨비가 자신을 앞으로 던지려고 힘을 주는 순간, 만복은 두 다리를 도깨비의 오른팔에 걸고 온몸을 한쪽으로 비틀었습니다.
만복의 몸무게는 도깨비에게 대단할 것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머리 위에 있던 무게가 갑자기 오른쪽으로 쏠리자, 도깨비의 상체도 따라서 기울었습니다.
도깨비는 급히 오른발을 뒤로 내디뎠습니다. 바로 그 자리에 만복이 눈여겨보았던 젖은 느티나무 뿌리가 있었습니다.
미끄덩!
도깨비의 발뒤꿈치가 젖은 뿌리를 밟고 크게 미끄러졌습니다. 하지만 그는 왼발로 버티며 가까스로 중심을 되찾았습니다.
"이 정도로 나를 넘어뜨릴 수 있을 것 같으냐?"
만복은 도깨비의 팔에 매달린 채 태연하게 대답했습니다.
"아직 시작도 하지 않았소."
만복은 갑자기 도깨비의 겨드랑이 아래로 몸을 미끄러뜨렸습니다. 이어 자신의 허리띠를 잡고 있던 도깨비의 손목을 양손으로 끌어당기며, 발로 도깨비의 오른쪽 무릎 뒤를 힘껏 밀었습니다.
도깨비가 본능적으로 몸을 뒤로 젖히며 버티자 만복은 곧바로 힘의 방향을 바꾸었습니다. 이번에는 도깨비가 버티는 방향 그대로 몸을 틀어 앞으로 잡아당겼습니다.
도깨비는 만복을 밀어내려고 힘을 주었다가 갑자기 당기는 힘이 사라지자 상체가 크게 앞으로 쏠렸습니다.
"이, 이놈이!"
도깨비는 균형을 잡으려고 허둥지둥 발을 움직였습니다. 그러나 오른발은 젖은 풀 위에서 미끄러졌고, 왼발은 땅 위로 솟은 나무뿌리에 걸렸습니다. 산처럼 거대한 몸이 기우뚱하더니 만복의 머리 위로 넘어오기 시작했습니다.
만복은 재빨리 몸을 낮춰 도깨비의 다리 사이로 빠져나왔습니다. 그러고는 마지막으로 도깨비의 허리띠를 있는 힘껏 잡아당겼습니다.
"힘이 세거든 어디 땅까지 들어 올려 보시오!"
"으아아악!"
도깨비의 두 팔이 허공을 휘저었습니다. 그 거대한 몸은 앞으로 한 바퀴 구르더니 진흙 웅덩이 한가운데에 등을 대고 철퍼덕 쓰러졌습니다.
진흙물이 사방으로 치솟아 느티나무 줄기와 풀밭을 뒤덮었습니다. 놀란 산새들이 일제히 날아올랐고, 가까운 산골짜기에서는 도깨비가 넘어지는 굉음이 메아리쳤습니다.
잠시 후 진흙 범벅이 된 도깨비의 얼굴이 웅덩이 위로 천천히 올라왔습니다. 덥수룩한 머리에는 나뭇잎이 붙었고, 코끝에는 작은 개구리 한 마리가 올라앉아 있었습니다.
만복은 진흙이 묻은 도포 자락을 털며 말했습니다.
"등이 먼저 땅에 닿았으니 이번 씨름도 내가 이긴 것이 맞겠지요?"
도깨비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습니다. 얼굴에는 분노와 당혹감,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 한데 뒤섞여 있었습니다. 개구리가 도깨비의 코 위에서 폴짝 뛰어내리자 만복은 끝내 웃음을 참지 못했습니다.
"천하장사의 코가 진흙 속에 제대로 박혔구려."
도깨비의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습니다. 그는 진흙 웅덩이를 주먹으로 내리치며 벌떡 일어났습니다.
"이건 씨름이 아니다! 나무뿌리와 진흙이 너를 도운 것이 아니냐!"
"진흙이 자네를 잡아당겼소? 나무뿌리가 허리띠를 잡았소? 자네가 눈앞의 나만 보느라 발밑을 살피지 못한 것이지."
"네가 정정당당하게 힘으로 나를 이긴 것이 아니란 말이다!"
만복은 도깨비를 똑바로 바라보았습니다.
"처음부터 힘이 센 쪽을 뽑는 내기라면 자네가 이긴 것이 맞소. 하지만 우리가 벌인 것은 상대를 넘어뜨리는 씨름이었소. 자네는 나를 들어 올리는 데만 정신이 팔렸고, 나는 자네가 어디로 넘어질지를 생각했지. 그러니 힘이 아니라 생각의 차이로 승부가 난 것이오."
도깨비는 주먹을 부들부들 떨었습니다. 그의 눈에서 푸른 불빛이 번지고 콧김이 거세게 뿜어져 나왔습니다. 곁에 놓아둔 나무 방망이도 스스로 들썩거리기 시작했습니다.
만복은 달아나지 않았습니다. 도깨비가 방망이를 들면 자신이 살아남기 어렵다는 것을 알면서도 꼿꼿하게 서 있었습니다.
"약속을 지키는 것이 도깨비의 자랑이라 하지 않았소? 설마 힘내기에서 졌다고 인간 하나를 방망이로 때려잡을 셈이오?"
도깨비의 커다란 손이 방망이 쪽으로 움직이다가 멈췄습니다.
진흙으로 엉망이 된 천하장사는 이내 고개를 푹 숙였습니다. 만복이 세 번이나 자신을 이겼다는 사실보다, 스스로 자랑했던 약속을 지키지 못하는 도깨비가 되는 것이 더 부끄러웠던 것입니다.
그런데도 도깨비의 분은 쉽게 가라앉지 않았습니다. 그는 이를 갈며 만복에게 마지막 질문을 던졌습니다.
"정직하게 대답해라. 너는 처음부터 내 힘이 무섭지 않았느냐?"
만복은 잠시 생각하다가 솔직하게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무서웠소. 지금도 자네가 방망이를 들까 봐 다리가 떨리는 중이오."
도깨비의 눈이 커졌습니다.
"그런데도 나와 세 번이나 겨루었단 말이냐?"
"무서움이 없어서 나선 것이 아니라, 지켜야 할 밭과 먹여 살릴 가족이 있었기에 머리를 굴린 것이오."
그 대답을 들은 도깨비의 얼굴에서 분노가 조금씩 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 5: 진짜 힘은 어디에서 나오는가
진흙투성이가 된 도깨비는 한동안 아무 말 없이 만복을 내려다보았습니다. 조금 전까지 푸른 불꽃처럼 타오르던 눈빛에는 분노 대신 알 수 없는 당혹감이 떠올라 있었습니다.
도깨비는 자신보다 힘센 존재를 만나본 적이 거의 없었습니다. 산속의 멧돼지는 그의 발소리만 들어도 달아났고, 호랑이도 방망이 한 번 휘두르면 바위 뒤로 숨었습니다. 도깨비들끼리 힘을 겨뤄도 언제나 그가 이겼습니다.
그런데 눈앞의 농부는 팔뚝도 가늘고 어깨도 좁았습니다. 도깨비가 손가락 하나로 밀어도 쓰러질 것 같은 인간이 세 번의 내기에서 모두 자신을 이겼습니다.
"네가 정말 두려웠다고?"
"당연하지요. 자네가 돌을 가루로 만들 때는 나도 모르게 오금이 저렸소. 돌을 산 너머로 던졌을 때는 괜한 내기를 했다고 후회했고, 방금 머리 위로 들렸을 때는 오늘이 제삿날이 되는 줄 알았소."
"그런데 어찌하여 도망치지 않았느냐?"
만복은 느티나무 아래 놓아둔 지게를 가리켰습니다. 지게의 나무는 오래되어 갈라졌고, 짚으로 만든 어깨끈은 여러 번 끊어진 것을 이어 붙인 상태였습니다.
"내가 도망치면 오늘 하루 목숨은 편할지 모르오. 하지만 내일도 돌밭은 그대로고, 아이들 밥그릇은 비어 있을 것이오. 힘이 없다고 평생 주저앉아 있을 수는 없지 않겠소?"
도깨비는 팔짱을 끼고 고개를 갸웃거렸습니다.
"그렇다면 네가 말하는 진짜 힘은 잔꾀냐?"
"잔꾀만으로 세상을 살아갈 수는 없소. 남을 속여 빼앗는 꾀는 오래가지 못하지. 하지만 힘없는 사람이 큰 힘에 깔리지 않도록 살길을 찾는 지혜는 필요하오."
"나를 세 번이나 속여놓고 남을 속이면 안 된다니, 말이 앞뒤가 맞지 않는구나."
"내가 자네 것을 빼앗았소? 먼저 내기를 걸어온 것도 자네요, 조건을 정한 것도 자네요. 나는 자네가 내민 승부를 내가 할 수 있는 방식으로 받아냈을 뿐이오."
도깨비는 반박하려고 입을 벌렸다가 다시 다물었습니다. 생각해보니 만복의 말이 틀리지 않았습니다. 세 번의 내기를 제안한 것은 모두 자신이었습니다. 만복에게 힘이 없다는 이유로 쉽게 이길 수 있다고 얕본 것도 자신이었습니다.
"첫 번째 돌은 정말 돌이 아니었지?"
만복은 잠시 침묵하다가 솔직하게 웃었습니다.
"분이가 싸준 메밀묵이었소."
"그럴 줄 알았다! 돌의 속살이 물컹하다니, 생각할수록 이상했어!"
도깨비는 분한 듯 무릎을 쳤지만, 조금 전과 달리 목소리에는 웃음기가 섞여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하늘로 날아간 돌은 무엇이었느냐?"
"칡넝쿨에 발이 묶인 종달새였소. 풀어주었더니 마침 하늘 높이 날아가 주더구려."
"돌이 구름 위에서 노래한다는 말도 거짓이었구나!"
"자네가 돌에도 마음이 있느냐고 물었을 때는 나도 대답을 꾸며내느라 꽤나 진땀을 흘렸소."
도깨비는 그제야 자신이 했던 질문과 만복의 천연덕스러운 대답을 떠올렸습니다. 화를 내야 할지 웃어야 할지 알 수 없어 얼굴을 잔뜩 찌푸리더니, 끝내 커다란 배를 잡고 웃음을 터뜨렸습니다.
"크하하하! 내가 메밀묵을 돌로 알고, 종달새를 날아가는 돌로 알았단 말이지? 수백 년을 산 도깨비가 농부의 소매 안도 살피지 못했구나!"
산이 떠나갈 듯한 웃음소리에 만복도 따라 웃었습니다. 조금 전까지 살벌했던 씨름판의 기운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습니다.
한참을 웃던 도깨비는 진흙 웅덩이 옆에 털썩 주저앉았습니다.
"하지만 씨름은 아직도 억울하다. 네 힘으로 나를 넘긴 것이 아니지 않으냐?"
"자네가 내 힘으로 넘어갔다면 그건 내가 도깨비이고 자네가 인간이라는 뜻이겠지요. 나는 자네가 쓰던 힘을 잠시 빌렸을 뿐이오."
"내 힘을 빌렸다고?"
"자네가 나를 들려고 위로 힘을 쓰면 나는 옆으로 빠지고, 자네가 뒤로 버티면 나는 앞으로 당겼소. 강한 힘과 정면으로 싸우지 않고, 그 힘이 가는 방향을 살짝 틀었을 뿐이오."
도깨비는 자신의 두 손을 내려다보았습니다. 바위를 부술 수 있는 손이었지만, 손이 어느 방향으로 움직여야 하는지를 정하는 것은 결국 머리였습니다.
"힘이란 많기만 하면 좋은 줄 알았다."
"물이 너무 세면 논둑을 무너뜨리지만, 물길을 제대로 내면 벼를 살리지요. 불도 함부로 놓으면 집을 태우지만 아궁이에 담으면 밥을 짓소. 힘도 어디에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 복이 되기도 하고 화가 되기도 하는 법이오."
도깨비는 만복의 말을 곰곰이 생각했습니다. 그는 힘자랑을 하느라 나무를 뽑고 바위를 깨뜨린 적은 많았지만, 자신의 힘으로 누군가를 편하게 해준 적은 거의 없었습니다.
"네 밭이 그렇게 형편없느냐?"
"직접 보면 알게 될 것이오. 돌이 곡식보다 많고, 물은 개미 눈물만큼도 흐르지 않소."
"그런 밭을 갈아 무엇을 거두겠다는 것이냐?"
"돌을 골라내고 물길을 내면 콩이라도 심을 수 있겠지요. 콩을 거두면 아이들이 겨울을 굶지 않을 것이고."
도깨비는 자리에서 일어나 몸에 묻은 진흙을 털었습니다. 그가 한 번 몸을 흔들자 진흙방울이 만복의 얼굴과 도포에 사방으로 튀었습니다.
만복은 얼굴에 묻은 진흙을 닦으며 인상을 썼습니다.
"약이 올랐다고 사람에게 진흙을 뿌리는 것이오?"
"일부러 그런 것이 아니다. 내 몸이 워낙 커서 그렇지."
도깨비는 헛기침을 한 뒤 나무 방망이를 어깨에 걸쳤습니다.
"좋다. 세 판 모두 네가 이겼음을 인정하마. 약속대로 사흘 동안 네 밭에서 일해주겠다."
"도깨비가 이제야 말다운 말을 하는구려."
"하지만 조건이 하나 있다."
만복은 경계하는 눈빛으로 도깨비를 바라보았습니다.
"또 무슨 내기를 하려는 것이오?"
"내가 일하는 동안 네가 곁에서 방법을 알려주어야 한다. 힘을 어떻게 써야 밭에 복이 되는지 내가 알 리가 없지 않으냐?"
만복은 잠시 놀랐다가 미소를 지었습니다.
"그 정도야 어렵지 않소. 다만 내가 멈추라 하면 반드시 멈춰야 하오. 자네 힘으로 밭을 갈다가 산 하나를 통째로 뒤집을까 걱정이니 말이오."
"내가 그 정도로 어리석은 줄 아느냐?"
도깨비는 큰소리를 쳤지만, 곧 자신이 메밀묵과 종달새에 속았다는 사실을 떠올리고 목소리를 낮췄습니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 네 말을 듣도록 하지."
두 존재는 나란히 산길을 내려가기 시작했습니다. 만복은 낡은 지게를 지고 걸었고, 도깨비는 만복의 지게와 호미를 한 손가락에 걸어 들었습니다.
산 아래에 이르자 도깨비는 자갈과 잡초뿐인 밭을 보고 눈을 크게 떴습니다.
"이것이 밭이냐, 돌무덤이냐?"
"그러니 천하장사의 힘이 필요한 것이오."
도깨비는 소매를 걷어붙이고 밭 한가운데 박힌 커다란 바위를 붙잡았습니다. 땅이 흔들리더니 소 한 마리보다 큰 바위가 무 뽑히듯 쑥 빠져나왔습니다.
도깨비가 그것을 산 아래로 던지려 하자 만복이 다급히 외쳤습니다.
"던지지 마시오! 아래에는 마을이 있소!"
도깨비는 황급히 바위를 붙잡았습니다. 바위는 이미 손을 떠나려던 참이었지만, 그는 허리를 뒤로 젖히며 가까스로 멈춰 세웠습니다.
"그럼 이 바위를 어디에 놓아야 하느냐?"
"밭 가장자리에 차곡차곡 쌓으시오. 돌담을 만들면 산짐승도 막고 비바람에도 흙이 쓸려가지 않소."
도깨비는 만복이 가리킨 자리에 바위를 조심스럽게 내려놓았습니다. 그는 처음으로 무언가를 부수거나 던지는 대신, 필요한 곳에 정확히 놓기 위해 힘을 조절했습니다.
"이렇게 하면 되는 것이냐?"
"그렇소. 힘은 세게 쓰는 것보다 알맞게 쓰는 것이 더 어려운 법이오."
도깨비는 그 말이 마음에 들었는지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그리고 두 번째 바위를 뽑을 때는 처음보다 훨씬 조심스럽게 움직였습니다.
해가 기울 무렵, 만복의 돌밭에는 반듯한 돌담이 세워지고 깊은 물길이 생겨났습니다. 도깨비는 땀 한 방울 흘리지 않았지만, 완전히 달라진 밭을 바라보며 씨름에서 이겼을 때보다 더 뿌듯한 표정을 지었습니다.
멀리서 남편을 찾으러 온 분이는 밭 한가운데 선 거대한 도깨비를 보고 그 자리에 얼어붙었습니다.
만복이 서둘러 손을 흔들었습니다.
"놀라지 마오! 오늘부터 우리 밭에서 일할 새 일꾼이오!"
도깨비는 분이에게 예의를 차리려고 고개를 숙였습니다. 그러나 워낙 힘차게 숙인 탓에 이마가 밭 가장자리의 감나무와 부딪쳤고, 잘 익은 감들이 우수수 머리 위로 떨어졌습니다.
분이는 겁먹은 것도 잊고 웃음을 터뜨렸습니다. 만복도 배를 잡고 웃었고, 도깨비는 머리 위에 올라앉은 감 하나를 내려다보며 어색하게 중얼거렸습니다.
"인간의 밭에서 일하는 것은 씨름보다 어렵구나."
※ 6: 농부와 도깨비가 둘도 없는 벗이 되다
도깨비는 약속한 사흘 동안 해가 지면 만복의 밭으로 찾아왔습니다. 낮에는 사람들의 눈에 띌 수 있어 산속에 숨어 있다가, 저녁노을이 사라지면 커다란 방망이를 어깨에 메고 슬그머니 내려왔습니다.
첫날 밤에는 밭의 돌을 골라냈습니다. 만복이 한 달 동안 옮겨도 다 치우지 못할 바위들이 도깨비의 손에서는 조약돌처럼 들렸습니다. 하지만 도깨비는 처음처럼 함부로 던지지 않았습니다.
"이 돌은 어디에 놓느냐?"
"동쪽 돌담에 쌓으시오."
"이 작은 돌은?"
"물길 바닥에 까시오."
"이건 아주 반듯한데?"
"그건 집 마당의 디딤돌로 쓰면 좋겠구려."
도깨비는 바위를 하나씩 들 때마다 만복에게 쓸 곳을 물었습니다. 산을 울리며 힘을 자랑하던 때와 달리, 이제는 작은 돌 하나도 아무 데나 던지지 않았습니다.
둘째 날 밤에는 산골짜기의 물을 밭으로 끌어오는 도랑을 팠습니다. 도깨비가 방망이로 땅을 한 번 내리치자 밭 전체가 갈라질 듯 흔들렸습니다.
만복은 화들짝 놀라 방망이를 붙잡았습니다.
"그렇게 세게 치면 물길이 아니라 절벽이 생기겠소!"
"힘을 약하게 쓰는 것이 이렇게 어려운 줄은 몰랐다."
"아기 다람쥐의 등을 긁어준다고 생각하고 살살 파보시오."
도깨비는 혀를 살짝 내밀고 방망이 끝을 조심스럽게 움직였습니다. 처음에는 도랑이 이리저리 굽었지만, 만복이 물의 흐름을 설명해주자 점차 반듯한 물길이 만들어졌습니다.
마침내 골짜기의 맑은 물이 졸졸 흘러 메마른 밭으로 들어왔습니다. 갈라졌던 흙이 물을 머금으며 검게 변하자 도깨비는 아이처럼 손뼉을 쳤습니다.
"물이 정말 내가 만든 길을 따라오는구나!"
"힘으로 물을 끌고 온 것이 아니라 물이 가고 싶은 길을 열어준 것이오."
"또 힘의 방향을 틀었다는 말이냐?"
"이제 제법 알아듣는구려."
셋째 날 밤에는 밭을 깊이 갈았습니다. 소가 없던 만복은 늘 괭이와 호미로 조금씩 흙을 뒤집어야 했지만, 도깨비가 굵은 나무를 쟁기처럼 잡아당기자 단단한 땅이 부드럽게 갈라졌습니다.
동이 틀 무렵에는 자갈밭이었던 곳이 기름진 검은 밭으로 변해 있었습니다. 가지런한 고랑 사이로 물이 흐르고, 가장자리에는 튼튼한 돌담이 둘러져 있었습니다.
분이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밭을 바라보았습니다.
"이게 정말 우리 밭이 맞아요?"
"어제까지는 우리 밭이었는데, 오늘부터는 도깨비도 지분을 조금 주장할 것 같구려."
도깨비가 귀를 쫑긋 세웠습니다.
"지분이라는 것이 무엇이냐?"
"수확한 곡식을 나누어 가져야 한다는 뜻이오."
도깨비는 잠시 고민하더니 고개를 저었습니다.
"나는 곡식을 먹지 않는다. 대신 가을에 막걸리 한 동이만 내놓아라."
"사흘 동안 일한 품삯이 막걸리 한 동이라면 내가 너무 이득을 보는 것 아니오?"
"그렇다면 안주로 부침개도 내놓아라."
분이가 웃으며 대답했습니다.
"도토리묵까지 넉넉히 준비해드리지요. 하지만 다시는 묵을 돌로 착각하지 마세요."
도깨비는 만복이 아내에게 모든 이야기를 했다는 것을 깨닫고 얼굴을 붉혔습니다.
"그 이야기는 하지 말라니까!"
세 사람의 웃음소리가 새벽 밭에 오래도록 퍼졌습니다.
도깨비의 약속은 사흘로 끝났지만, 그는 그 뒤로도 밤마다 만복의 집을 찾아왔습니다. 어떤 날은 산에서 주운 굵은 나무를 가져와 무너진 외양간을 고쳐주었고, 어떤 날은 멧돼지가 밭에 내려오지 못하도록 돌담을 더 높이 쌓았습니다.
만복도 도깨비에게 사람 사는 세상의 이치를 알려주었습니다. 힘이 세다고 약한 이를 함부로 겁주어서는 안 된다는 것, 내기에서 이기는 것보다 약속을 지키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것, 누군가를 도우려면 무엇이 필요한지 먼저 물어야 한다는 것을 하나씩 가르쳤습니다.
도깨비는 가끔 성질을 참지 못하고 실수하기도 했습니다. 비바람에 쓰러진 이웃집 담장을 고쳐주겠다고 나섰다가 담을 집보다 높게 쌓았고, 겨울 땔감을 마련해주겠다며 소나무를 통째로 뽑아 마당에 세워두기도 했습니다.
그럴 때마다 만복은 이마를 짚었습니다.
"이보시오. 장작은 집 안에 들어갈 만큼 잘라야 하지 않겠소?"
"인간의 집은 왜 이렇게 작고 불편한 것이냐?"
"집이 작은 것이 아니라 자네가 너무 큰 것이오."
도깨비는 투덜거리면서도 나무를 알맞은 크기로 잘랐습니다. 처음에는 힘을 줄이는 데 서툴렀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섬세하게 다루는 법을 익혀갔습니다.
가을이 되자 만복의 밭에는 황금빛 곡식이 가득했습니다. 콩은 꼬투리가 터질 만큼 여물었고, 조와 수수는 고개를 무겁게 숙였습니다. 메말랐던 밭에서 전에 없던 풍년이 든 것입니다.
만복은 약속대로 가장 좋은 쌀로 막걸리를 빚고, 분이는 커다란 솥뚜껑에 부침개를 부쳤습니다. 도토리묵도 큼지막하게 썰어 상에 올렸습니다.
보름달이 뜬 밤, 도깨비는 느티나무 아래에서 만복과 마주 앉았습니다. 처음 내기를 벌였던 바로 그 자리였습니다.
도깨비는 막걸리 사발을 단숨에 비운 뒤 곡식으로 가득 찬 밭을 바라보았습니다.
"저 밭은 내가 만든 것이냐, 네가 만든 것이냐?"
"자네 힘과 내 생각, 분이의 정성이 함께 만든 것이지요. 흙과 물과 햇빛도 제 몫을 했고."
"누구 하나의 힘만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는 말이구나."
"이제는 제법 현명한 말을 하는구려."
도깨비는 흐뭇하게 웃다가 문득 만복에게 물었습니다.
"그래도 셋 중 누가 가장 큰일을 했느냐?"
"또 힘자랑을 시작하려는 것이오?"
"아니다. 그냥 궁금해서 묻는 것이다."
만복은 잠시 생각한 뒤 막걸리 사발을 들어 올렸습니다.
"가장 큰일을 한 것은 자네와 나를 만나게 해준 그날의 달빛일지도 모르지요."
도깨비는 고개를 들어 둥근 달을 바라보았습니다. 그러고는 만복의 사발에 자신의 사발을 힘 조절하여 살짝 부딪쳤습니다.
"그렇다면 달빛에게도 한 잔 주어야겠구나."
도깨비가 막걸리를 하늘로 뿌리려 하자 만복이 황급히 그의 팔을 붙잡았습니다.
"잠깐! 자네가 뿌리면 한 동이가 통째로 날아가겠소. 달빛은 향기만 맡아도 충분할 것이오."
도깨비는 아쉬운 표정으로 사발을 내려놓았습니다.
그날 이후 마을 사람들은 만복의 밭에서 밤마다 쿵쿵거리는 소리가 들리는 것을 이상하게 여겼습니다. 하지만 아침이 되면 무너진 돌담이 바로 서고, 막힌 물길이 뚫려 있었으며, 가난한 집 마당에는 땔감이 가지런히 쌓여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산신령이 마을을 돌본다고 믿었습니다. 만복은 도깨비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그 비밀을 함부로 말하지 않았습니다.
세월이 흘러 만복의 살림은 넉넉해졌지만 그는 재물을 혼자 쌓아두지 않았습니다. 흉년이 들면 곳간을 열어 이웃과 곡식을 나누었고, 소가 없는 집의 밭은 자신의 소와 농기구로 갈아주었습니다.
도깨비도 만복을 따라 약한 이들을 돕는 일에 재미를 붙였습니다. 처음에는 칭찬받고 싶어 일을 했지만, 나중에는 아무도 보지 않는 밤에 조용히 도움을 주고 사라졌습니다.
어느 날 만복이 물었습니다.
"예전에는 힘을 자랑하는 것이 그렇게 좋더니, 이제는 왜 사람들 앞에 나서지 않는 것이오?"
도깨비는 어깨를 으쓱했습니다.
"힘이 있다는 것을 모두가 아는 것보다, 내 힘으로 누군가 편히 잠드는 것이 더 기분 좋다는 것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만복은 크게 웃으며 도깨비의 굵은 팔을 두드렸습니다.
"이제야 천하장사다운 말을 하는구려."
"하지만 다시 씨름한다면 이번에는 내가 이길 것이다."
"아직도 그 미련을 버리지 못했소?"
"이번에는 진흙도 없고 나무뿌리도 없는 마당에서 하자!"
만복은 잠시 도깨비를 바라보다가 능청스럽게 대답했습니다.
"좋소. 다만 시작하기 전에 내가 돌에서 물부터 조금 짜내고 오겠소."
도깨비는 메밀묵에 속았던 기억이 떠오른 듯 화들짝 놀라 손을 내저었습니다.
"아니다! 씨름은 다음으로 미루자. 오늘은 술이나 마시는 것이 좋겠다!"
만복과 도깨비는 서로를 바라보다 동시에 웃음을 터뜨렸습니다.
그렇게 힘밖에 모르던 도깨비와 힘이라고는 내세울 것 없던 농부는 둘도 없는 벗이 되었습니다. 한쪽은 자신의 힘을 올바르게 쓰는 법을 배웠고, 다른 한쪽은 자신보다 강한 존재를 두려움만으로 바라보지 않는 법을 배웠습니다.
힘은 바위를 부수지만 지혜는 그 바위로 돌담을 세우고, 힘은 땅을 흔들지만 따뜻한 마음은 메마른 땅에 곡식이 자라게 합니다. 만복과 도깨비의 웃음소리는 그 뒤로도 오랫동안 달 밝은 산골짜기에 정겹게 울려 퍼졌답니다.
유튜브 엔딩멘트
천하장사 도깨비를 힘이 아닌 지혜로 이긴 농부 만복의 이야기, 재미있게 들으셨나요? 강한 힘도 어디에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 화가 되기도 하고 복이 되기도 합니다. 서로의 다름을 인정하고 둘도 없는 벗이 된 두 존재처럼, 여러분의 지혜와 따뜻한 마음도 누군가에게 큰 힘이 되기를 바랍니다. 이야기가 즐거우셨다면 구독과 좋아요, 알림 설정 부탁드립니다. 평안한 밤 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