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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깨비 감투를 주워 쓴 사나이
투명해진 남자의 어처구니없는 하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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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킹
한양 장터 한복판. 대낮에 떡 한 판이 공중으로 떠올랐습니다. 사람들이 비명을 질렀고, 포졸이 칼을 뽑았지만, 벨 것이 없었습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으니까요. 떡은 허공에서 한 입씩 뜯기더니, 순식간에 사라졌습니다. 그날, 장터에는 귀신이 나타났다는 소문이 파다하게 퍼졌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귀신이 아니었습니다. 한 사내가 있었습니다. 전날 밤, 산길에서 주운 낡은 감투 하나를 머리에 쓴, 보잘것없는 사내 하나가. 그 감투는 도깨비의 것이었습니다. 대체 그 사내에게 무슨 일이 벌어진 걸까요? 그리고 도깨비는 왜, 자기 감투를 되찾으러 오지 않았을까요?
※ 1:
한양 서소문 밖 장터. 오시 무렵, 해가 머리 꼭대기에 올라앉아 그림자마저 발밑에 숨던 그 시각. 장터는 사람들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생선 파는 아낙의 목청이 골목을 가르고, 엿장수의 가위 소리가 아이들 발걸음을 붙잡던 평범한 오후였습니다.
그때, 김 노파의 떡 좌판 위에서 일이 벌어졌습니다.
쌓아놓은 송편 한 무더기가 갑자기 흔들렸습니다. 김 노파가 고개를 돌렸을 때, 송편 하나가 공중에 떠올라 있었습니다. 줄에 매단 것도 아닙니다. 바람에 날린 것도 아닙니다. 허공에, 분명히, 떡이 떠 있었습니다.
"헉!"
김 노파가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뒷걸음질 쳤습니다. 주변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그 송편을 향했습니다. 그리고 모두가 보는 앞에서, 송편이 한 입 베어 물렸습니다. 보이지 않는 이빨 자국이 반달 모양으로 선명하게 찍혔습니다.
"귀, 귀신이다!"
비명이 터졌습니다. 장터가 순식간에 뒤집어졌습니다. 아낙들은 치마를 걷어 올리고 달렸고, 아이들은 울음을 터뜨렸습니다. 엿장수는 엿판을 내동댕이치고 도망쳤습니다. 포졸 두 명이 칼을 빼 들고 달려왔지만, 허공만 허둥지둥 내리찍을 뿐이었습니다.
그 와중에, 떡은 계속 사라지고 있었습니다. 한 개, 두 개, 세 개. 허공에서 우적우적 씹히는 소리까지 들렸습니다. 포졸 하나가 소리 나는 쪽을 향해 칼을 휘둘렀지만, 칼날은 허공만 갈랐습니다.
그리고 누군가의 트림 소리가 들렸습니다.
꽤 큰 트림이었습니다. 분명 사람의 트림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자리에는 아무도 없었습니다. 포졸이 소리 나는 방향으로 손을 뻗었을 때, 손끝에 무언가 스쳤습니다. 분명 옷감의 감촉이었습니다. 하지만 그것을 잡으려는 순간, 이미 사라진 뒤였습니다. 바닥에는 누군가 황급히 달아난 듯한 맨발 자국만 남아 있었습니다.
장터는 반나절 동안 문을 닫았습니다. 소문은 삽시간에 한양 전체로 퍼졌습니다. 서소문 밖 장터에 귀신이 나왔다. 대낮에 떡을 훔쳐 먹는 귀신이. 하지만 그것은 귀신이 아니었습니다. 사람이었습니다. 이틀 전까지만 해도, 한 끼 밥도 제대로 못 먹던 보잘것없는 사내 하나가, 지금 이 소동의 한가운데 있었습니다.
그런데 아무도 몰랐습니다. 이 사내가 대체 어쩌다 보이지 않는 몸이 되었는지. 그리고 이 사내가 쓰고 있던 그 낡은 감투가, 어디서 온 물건인지.
※ 2:
이틀 전. 경기도 광주 변두리. 산 아래 오막살이 한 채가 비바람에 기울어져 서 있었습니다.
박덕수. 나이 서른여덟. 가진 것이라곤 무릎까지 기운 바지 한 벌과 깨진 옹기 세 개가 전부인 사내였습니다. 아버지는 덕수가 열다섯 되던 해에 돌아가셨고, 홀어머니마저 작년 겨울에 눈을 감으셨습니다. 품팔이를 나가려 해도, 가뭄이 삼 년째 이어지니 품을 사 줄 집이 없었습니다.
그날도 덕수는 빈속이었습니다. 아침부터 산에 올라 도토리를 주웠지만, 주머니에 담긴 것은 겨우 두 줌. 그것마저 곰팡이가 피어 절반은 버려야 했습니다.
'오늘도 이러다 끝이겠지.'
해가 지기 시작했습니다. 산길을 내려오는데, 어디선가 이상한 소리가 들렸습니다. 누군가 씨름을 하는 것 같은 소리였습니다. 쿵, 쿵. 땅이 울렸습니다. 나뭇가지가 부러지는 소리, 거친 숨소리, 그리고 웃음. 깔깔깔. 사람의 웃음이 아니었습니다. 너무 컸고, 너무 깊었고, 너무 즐거웠습니다.
덕수의 다리가 멈췄습니다. 온몸의 털이 곤두섰습니다. '가면 안 된다.' 머리는 그렇게 말했습니다. 하지만 발은 소리가 나는 쪽으로 향했습니다. 배고픔이 두려움보다 강했던 걸까요. 아니면 서른여덟 해 동안 한 번도 운이 좋았던 적 없는 사내의, 마지막 자존심이었을까요.
소나무 숲 사이로 빈터가 나타났습니다. 달빛 아래, 덕수는 보았습니다. 두 개의 그림자가 엉켜 있었습니다. 하나는 사람의 형상이었고, 다른 하나는 사람보다 한 뼘은 더 컸습니다. 달빛이 구름 사이를 비집고 쏟아졌을 때, 덕수는 자기 눈을 의심했습니다.
파란 피부. 곱슬거리는 갈기 같은 머리카락. 이마에 작은 뿔 하나. 도깨비였습니다. 진짜 도깨비가 사람과 씨름을 하고 있었습니다. 도깨비는 킬킬거리며 상대를 들었다 놨다 했고, 사람 쪽은 연신 내던져지면서도 기어이 다시 일어났습니다.
그러다 사람이 결국 뻗었습니다. 축 늘어진 그 사람 위로 도깨비가 허리를 펴며 크게 웃었습니다. 그러더니 머리에 쓰고 있던 감투를 벗어 나뭇가지에 걸었습니다. 그리고는 쓰러진 사람을 업고 어둠 속으로 사라졌습니다.
덕수는 한참 동안 움직이지 못했습니다. 심장이 목구멍까지 올라와 있었습니다. 도깨비가 사라진 방향을 한참 노려보다가, 시선이 나뭇가지로 향했습니다. 거기 감투가 달빛을 받아 희미하게 빛나고 있었습니다. 도깨비가 분명히 쓰고 있던 것. 도깨비가 벗어놓고 간 것.
'안 돼. 그건 도깨비 물건이야.'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돌아서려 했습니다. 하지만 바로 그때,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났습니다. 참혹할 만큼 크고, 참혹할 만큼 서러운 소리였습니다. 덕수의 손이 감투를 향해 뻗었습니다.
감투는 생각보다 가벼웠습니다. 말총으로 엮은 것 같은데, 어딘가 묘하게 따뜻했습니다.
모두가 끝났다고 생각한 그 순간, 전혀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 3:
덕수가 감투를 머리에 올려놓았을 때, 처음에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그저 머리에 맞지 않는 헌 감투 하나가 얹혀 있을 뿐이었습니다. 허탈하게 웃음이 났습니다. '그래, 도깨비 물건이라 해서 뭐 별수 있겠나. 나한테는 운이란 게 없으니까.'
집으로 돌아가려 몸을 틀었습니다. 그때, 발밑을 보았습니다. 달빛이 환하게 비추는 빈터. 바닥에 풀 그림자, 나무 그림자, 바위 그림자가 선명한데, 자기 그림자만 없었습니다.
덕수가 고개를 숙였습니다. 발이 보여야 할 자리에, 발이 없었습니다.
"허!"
소리를 지르려 했지만 목이 막혔습니다. 손을 들어 올렸습니다. 손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가슴을 더듬었습니다. 만져지는데, 보이지 않았습니다. 온몸이 사라져 있었습니다.
'내 몸이... 없어졌다?'
아닙니다. 없어진 게 아니었습니다. 투명해진 겁니다. 감투를 벗었습니다. 순간, 달빛 아래 자기 손이 다시 나타났습니다. 발이 보였습니다. 바닥에 그림자가 돌아왔습니다. 다시 감투를 썼습니다. 또 사라졌습니다.
감투를 쓰면 보이지 않고, 벗으면 보인다.
덕수의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습니다. 손이 덜덜 떨렸습니다. 이건 그냥 감투가 아니었습니다. 도깨비의 감투, 쓰면 투명해지는 물건. 어릴 적 할머니에게 들었던 이야기가 번개처럼 스쳤습니다. 도깨비 감투를 쓰면 아무도 널 볼 수 없다. 하지만 그건 옛날이야기, 허풍이라 생각했던 것이, 지금 자기 머리 위에 얹혀 있었습니다.
빈터에 한참을 서 있었습니다. 바람이 불었습니다. 감투가 날아갈까 봐 두 손으로 꾹 눌러 썼습니다. 머릿속이 빠르게 돌아갔습니다.
'이걸로... 먹을 것을 구할 수 있다.'
그 생각이 떠오른 순간, 덕수의 얼굴에 생전 처음 보는 표정이 떠올랐습니다. 그것은 기쁨이 아니었습니다. 안도도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굶주린 짐승이 먹이 냄새를 맡았을 때의 표정. 삼 년간의 가뭄, 텅 빈 옹기, 곰팡이 핀 도토리, 갈비뼈가 드러난 옆구리. 그 모든 것이 한꺼번에 이 감투 하나로 풀릴 수 있다는 생각이 사내를 지배했습니다.
다음 날 새벽, 덕수는 한양으로 향했습니다. 감투를 보자기에 싸서 품에 안고, 맨발로 삼십 리 길을 걸었습니다. 해가 뜰 무렵 한양 성문을 들어섰고, 장터 한 편 구석에서 감투를 꺼냈습니다.
'한 번만. 딱 한 번만 쓰자. 떡 하나만. 밥 한 끼만.'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진심이었습니다. 정말로 딱 한 번만 쓸 생각이었습니다. 감투를 머리에 올렸습니다. 세상에서 자기가 사라지는 것을 느꼈습니다. 그리고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이 김 노파의 좌판에 수북이 쌓인 송편이었습니다.
하얗고, 달콤한 냄새가 나는, 통통한 송편.
'딱 하나만.'
그렇게 시작되었습니다. 씬1에서 벌어진 그 소동이, 바로 이 순간에서 시작된 것입니다. 딱 하나만이라던 약속은 두 개가 되고, 세 개가 되고, 열 개가 되었습니다. 삼 년 동안 비어 있던 위장은 끝을 몰랐고, 멈출 수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포졸의 손끝이 자기 옷깃을 스쳤을 때, 덕수는 깨달았습니다. 이건 딱 한 번으로 끝나지 않을 거라는 것을.
하지만 진짜 문제는, 장터 소동이 아니었습니다. 진짜 문제는 그날 밤, 덕수의 오막살이를 찾아온 것이었습니다.
※ 4:
그날 밤이었습니다. 덕수는 장터에서 도망쳐 삼십 리를 쉬지 않고 달렸습니다. 맨발이 돌에 찢겨 피가 났지만 멈출 수 없었습니다. 포졸의 손끝이 옷깃을 스쳤던 그 감촉이 등골을 타고 계속 올라왔습니다. 오막살이에 도착했을 때는 다리가 풀려 문턱에 주저앉았습니다. 감투를 벗었습니다. 손이 보였습니다. 발이 보였습니다. 피투성이 맨발이. 그제야 한숨이 나왔습니다.
'미친 짓이었어. 다시는 안 해. 절대로.'
감투를 방 구석에 던져 놓았습니다. 이불도 없는 맨바닥에 누웠습니다. 배는 떡으로 가득 찼지만, 마음은 돌덩이를 삼킨 것처럼 무거웠습니다. 눈을 감았습니다. 잠이 올 리 없었습니다.
그때, 밖에서 소리가 들렸습니다.
쿵. 쿵. 쿵.
땅이 울렸습니다. 이틀 전 밤, 산 빈터에서 들었던 그 진동과 똑같았습니다. 덕수의 눈이 번쩍 떠졌습니다. 온몸이 얼음이 되었습니다. 발소리가 점점 가까워졌습니다. 오막살이의 허름한 나무 벽이 덜그럭거렸습니다. 그리고 문 앞에서 발소리가 멈췄습니다.
"이 안에 있지?"
목소리가 벽을 뚫고 들어왔습니다. 낮은데 크고, 느린데 무거운, 사람의 것이 아닌 목소리. 덕수는 숨을 멈췄습니다. 몸이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대답하지 않으면 그냥 갈지도 모른다. 그렇게 생각하며 입술을 깨물었습니다.
문이 열렸습니다. 아니, 문이 뜯겼습니다. 경첩째 떨어져 나간 문짝이 마당에 내동댕이쳐졌고, 달빛이 방 안으로 쏟아졌습니다. 그 달빛 속에, 도깨비가 서 있었습니다.
이틀 전 빈터에서 보았던 바로 그 도깨비였습니다. 파란 피부. 이마의 외뿔. 그런데 이틀 전에는 킬킬거리며 웃고 있던 그 얼굴이, 지금은 웃지 않았습니다. 눈이 숯덩이처럼 이글거렸고, 입꼬리가 일직선으로 굳어 있었습니다.
"내 감투."
두 글자였습니다. 그 두 글자에 방 안 공기가 얼었습니다. 덕수의 이가 딱딱 부딪쳤습니다. 살면서 이렇게 무서운 적은 없었습니다.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도, 어머니가 눈을 감으셨을 때도, 삼 년 가뭄에 마지막 보리가 말라죽었을 때도 이런 두려움은 아니었습니다.
"돌, 돌려드리겠습니다."
덕수가 기어서 방 구석에 던져 놓았던 감투를 집어 들었습니다. 두 손으로 받쳐 올렸습니다. 고개를 바닥에 처박았습니다. 도깨비가 감투를 받아 들었습니다. 한참 동안 감투를 이리저리 살피더니, 코를 가져다 대고 킁킁 냄새를 맡았습니다.
"사람 냄새가 배었군."
감투를 다시 덕수 앞에 떨어뜨렸습니다. 덕수가 고개를 들었습니다.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가져. 이미 사람 냄새가 배면 나한테는 쓸모없어."
도깨비가 몸을 돌렸습니다. 덕수는 멍하니 바닥에 떨어진 감투를 보았습니다. 가져도 된다는 건가. 이 보물을. 이 기적을. 공짜로.
"대신."
도깨비가 멈춰 섰습니다. 고개만 돌렸습니다. 이마의 뿔이 달빛에 번쩍였습니다.
"나하고 씨름 한판 하자."
"씨, 씨름이요?"
"이기면 감투는 네 거다. 지면..."
도깨비가 씩 웃었습니다. 이틀 전 빈터에서 보았던 그 웃음이었습니다. 즐거운데 소름이 끼치는, 신나는데 등골이 서늘해지는 웃음.
"지면, 네 이야기가 내 거다."
"이야기요?"
"네가 살아온 이야기. 기억, 추억, 슬픔, 기쁨. 전부 다. 넌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게 될 거야. 이름도. 어미 얼굴도."
덕수의 숨이 멎었습니다. 어머니 얼굴. 돌아가신 어머니. 마지막으로 잡았던 그 마르고 거친 손. 그걸 잊는다고. 아버지가 등에 업어 주며 불러 주던 노래. 그걸 잃는다고.
"싫으면 감투를 두고 가라. 선택은 네 거다."
도깨비가 마당에 털썩 앉았습니다. 다리를 쭉 뻗고, 하늘을 올려다보며 느긋하게 기다렸습니다. 덕수는 방바닥에 앉은 채 감투를 내려다보았습니다. 손이 떨렸습니다. 감투를 놓으면, 내일부터 다시 굶는 겁니다. 곰팡이 핀 도토리를 줍고, 빈 옹기를 안고 자는 겁니다. 그렇게 서른아홉, 마흔, 마흔하나. 끝이 없는 굶주림.
하지만 감투를 갖겠다고 하면, 도깨비와 씨름을 해야 합니다. 이틀 전 빈터에서 장정 하나를 허수아비처럼 내던지던 그 도깨비와. 지면 모든 기억을 잃습니다.
덕수의 눈에서 물기가 번졌습니다. 서른여덟 해를 살면서 처음이었습니다. 눈물이 아니었습니다. 눈물도 나오지 않을 만큼 억울했던 겁니다. 왜 나만 이런 선택을 해야 하느냐고. 왜 세상은 나한테 이런 것밖에 안 주느냐고.
그날 밤, 덕수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소리 없이 울었습니다. 그 눈물의 진짜 의미를 알게 된 건, 한참 뒤의 일이었습니다.
※ 5:
덕수가 마당으로 나왔습니다. 맨발에 피가 마르지 않은 채. 손등도 벗겨져 있었습니다. 감투를 보자기에 싸서 방 안에 두고 왔습니다.
"하겠습니다."
목소리가 갈라졌습니다. 하지만 눈은 갈라지지 않았습니다. 부어오른 눈두덩 아래로, 무언가를 결심한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고요한 빛이 있었습니다. 도깨비가 벌떡 일어났습니다. 한쪽 눈썹이 올라갔습니다. 진짜 하겠다고 나올 줄은 기대하지 않았다는 표정이었습니다.
"호오."
도깨비가 두 팔을 벌렸습니다. 서자 키가 도드라졌습니다. 덕수보다 한 뼘은 더 컸고, 어깨는 절구통만 했고, 팔뚝에는 밧줄 같은 힘줄이 달빛 아래 선명하게 드러났습니다. 정상적인 힘 대 힘으로는 이길 수 없다는 걸 덕수도 알았습니다. 이틀 전, 빈터에서 장정 하나를 허공에 들어 올려 세 바퀴를 돌린 뒤 내던지는 것을 두 눈으로 보았으니까요.
하지만 덕수에게는 한 가지가 있었습니다.
어릴 적, 아버지에게 들은 이야기.
도깨비는 오른쪽으로 밀면 바위가 되지만, 왼쪽으로 당기면 갈대가 된다. 도깨비의 힘은 전부 오른다리에 실려 있단다. 왼다리는 허깨비야. 바람만 불어도 흔들려.
아버지가 저녁에 막걸리 한 사발을 마시며 들려준 이야기였습니다. 아궁이 불빛이 아버지 얼굴 한쪽을 붉게 물들이고, 나머지 반쪽은 그림자에 가려져 있었습니다. 덕수는 그때 아홉 살이었고, 아버지 무릎에 앉아 있었고, 등이 따뜻했습니다. 아버지가 덧붙였습니다. "아비도 어릴 때 할아비한테 들은 거다. 쓸 일이 있을지 없을지 모르지만, 알아 두거라." 덕수는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속으로는 허풍이라 생각했습니다. 세상에 도깨비가 어디 있느냐고. 이틀 전까지는 그랬습니다. 하지만 도깨비가 진짜라면, 아버지의 이야기도 진짜일 수 있었습니다. 아니, 진짜여야 했습니다. 그것만이 유일한 길이었으니까요.
씨름이 시작되었습니다. 도깨비가 먼저 덤벼들었습니다. 몸을 낮추고 돌진하는 속도가 사람의 것이 아니었습니다. 오른손이 덕수의 샅바를 움켜쥐었고, 왼손이 허리춤을 감았습니다. 그 순간 덕수는 느꼈습니다. 도깨비의 힘이란 것을. 그것은 세다거나 강하다는 말로는 부족한 것이었습니다. 산이 밀려오는 느낌이었습니다. 저항이라는 개념 자체가 무의미하다고 몸 전체가 말하고 있었습니다.
들어 올려졌습니다. 발이 땅에서 떨어졌습니다. 하늘이 빙글 돌았습니다. 달이 왼쪽에 있다가 오른쪽으로, 오른쪽에 있다가 위로, 위에 있다가 아래로. 그리고 내던져졌습니다.
등이 마당 바닥에 부딪혔습니다. 온몸의 뼈가 울렸고, 눈앞에 하얀 별이 터졌습니다. 폐에서 공기가 한꺼번에 빠져나갔고, 숨을 들이쉬려 해도 갈비뼈가 말을 듣지 않았습니다. 입을 벌리고 물고기처럼 허우적거렸습니다. 한참 뒤에야 겨우 숨이 돌아왔습니다.
"하나."
도깨비가 손가락 하나를 세웠습니다. 웃고 있었습니다. 즐거운 웃음. 나쁜 뜻이 없는 웃음. 그것이 더 무서웠습니다.
"세 번 던지면 끝이다. 두 번 남았어."
덕수가 일어났습니다. 허리가 끊어지는 줄 알았습니다. 왼쪽 갈비뼈 아래가 칼로 찌르는 것처럼 아렸습니다. 하지만 일어났습니다. 일어나야만 했습니다. 이번에는 덕수가 먼저 움직였습니다. 도깨비의 오른쪽으로 가는 척하다가, 발을 꺾어 왼쪽으로 파고들었습니다. 왼쪽 샅바를 두 손으로 움켜잡았습니다. 그리고 왼쪽으로 당겼습니다. 온 힘을 다해.
도깨비의 눈이 커졌습니다.
균형이 무너졌습니다. 오른쪽에서 밀었을 때는 바위 같던 도깨비가, 왼쪽으로 당기니 갈대처럼 흔들렸습니다. 왼다리가 버티지 못하고 미끄러졌습니다.
'진짜였어. 아버지 말이 진짜였어!'
덕수가 왼다리를 걸었습니다. 무릎 뒤를 정확히 걸었습니다. 도깨비의 몸이 기울었습니다. 크고 단단한 몸이 중력을 이기지 못하고, 천천히, 그러나 확실하게 쓰러졌습니다. 쿵. 마당의 흙먼지가 구름처럼 피어올랐습니다. 덕수가 세 걸음 뒤로 물러서며 거칠게 숨을 몰아쉬었습니다.
"허."
도깨비가 하늘을 보며 누워 있었습니다. 눈을 껌뻑였습니다. 천천히 일어나 앉았습니다. 흙을 털지도 않았습니다. 덕수를 올려다보았습니다. 이번에는 웃지 않았습니다. 눈이 달라져 있었습니다. 이마의 뿔이 달빛에 시퍼렇게 빛났고, 콧구멍에서 거친 숨이 나왔습니다.
세 번째 판. 마지막 판이 시작되었습니다.
도깨비가 이번에는 거리를 두지 않았습니다. 곧바로 덕수의 몸을 양팔로 감았습니다. 곰이 나무를 껴안듯 허리를 조였습니다. 으스러지는 줄 알았습니다. 갈비뼈가 안쪽으로 휘어지는 느낌이었습니다. 숨을 쉴 수가 없었습니다. 눈앞이 까매졌습니다. 도깨비가 들어 올렸습니다. 이번에는 던지려는 것이 아니라, 짓눌러 꺾으려는 동작이었습니다. 덕수의 척추가 비명을 질렀습니다.
'여기서 지면, 전부 잃는다.'
어머니 얼굴이 떠올랐습니다. 마지막 겨울, 이불 속에서 뼈만 남은 손으로 덕수의 볼을 어루만지며 했던 말. "덕수야, 네가 태어난 날, 사흘 동안 내리던 비가 그치고 무지개가 떴단다. 쌍무지개였어. 그래서 이름을 덕수라 했단다. 복 덕에 목숨 수. 네가 살아있는 것이 네 아비와 내가 받은 가장 큰 복이다." 그 말을 잊는다고. 아버지가 등에 업고 논둑길을 걸으며 불러 주던 노래. 가사는 다 기억나지 않았지만, "우리 덕수야, 우리 덕수야"라는 후렴만큼은 서른여덟 해가 지난 지금도 귓속에 남아 있었습니다. 아버지 등의 넓고 단단한 체온. 어깨 너머로 보이던 석양. 그걸 잃을 수는 없었습니다.
덕수가 이를 악물었습니다. 도깨비의 팔에 끼인 채, 왼손을 비틀어 도깨비의 왼쪽 샅바를 움켜쥐었습니다. 손톱이 갈라졌습니다. 피가 감투도 아닌 삼베 위로 번졌습니다. 상관없었습니다. 오른손도 왼쪽 샅바로 가져갔습니다. 두 손으로. 목숨을 거는 두 손으로. 왼쪽으로 당겼습니다. 온 힘을 다해. 남은 힘이 아니라, 남아 있지 않은 힘까지 끌어모아서.
도깨비의 왼다리가 흔들렸습니다. 하지만 도깨비도 이번에는 대비하고 있었습니다. 오른다리로 버텼습니다. 쉽게 넘어가지 않았습니다. 덕수의 팔이 한계에 다다르고 있었습니다. 근육이 찢어지는 느낌이었습니다.
그 순간, 덕수가 머리를 도깨비의 가슴팍에 박았습니다. 이마가 깨질 것처럼 부딪혔습니다. 통증이 폭발했지만, 그 충격으로 도깨비의 상체가 뒤로 젖혀졌습니다. 덕수가 그 틈을 놓치지 않았습니다. 머리를 박은 채 밀었습니다. 밀면서 왼쪽으로 비틀었습니다. 도깨비의 오른다리가 축으로 돌아갔고, 왼다리는 이미 힘이 빠져 있었습니다. 중심이 무너졌습니다.
둘이 함께 넘어졌습니다.
하지만 덕수가 위였습니다.
쿵. 마당 전체가 흔들렸습니다. 오막살이 서까래에서 먼지가 비처럼 쏟아졌습니다. 산새들이 놀라 일제히 날아올랐습니다. 먼지가 가라앉았을 때, 덕수가 도깨비의 가슴 위에 올라타 있었습니다. 두 손으로 도깨비의 샅바를 쥔 채. 손가락에서 피가 흘러 도깨비의 옷 위로 떨어졌습니다.
두 존재 모두 거칠게 숨을 몰아쉬었습니다. 한참 동안 아무 말이 없었습니다. 달빛만이 두 사람 위에 조용히 내려앉아 있었습니다.
그리고 도깨비가 웃었습니다.
이번 웃음은 달랐습니다. 이틀 전 빈터에서 장정을 던지며 짓던 장난기 섞인 웃음이 아니었습니다. 방금 전 씨름을 시작할 때의 사나운 웃음도 아니었습니다. 어딘가 시원하고, 어딘가 후련한 웃음이었습니다. 오래 기다리던 무언가를 마침내 만난 사람의 웃음이었습니다.
"이겼구나."
도깨비가 덕수를 가볍게 들어 올리듯 밀어내며 일어섰습니다. 흙을 탈탈 털었습니다. 별일 아니라는 듯이.
"감투는 네 거다. 약속은 약속이니까."
덕수가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습니다. 온몸에 힘이라는 것이 하나도 남아 있지 않았습니다. 갈비뼈가 쑤시고, 허리가 끊어질 것 같았고, 이마에서는 피가 흘러 눈 위를 적셨습니다. 하지만 손이 쥐고 있던 것은 남아 있었습니다. 감투도. 기억도. 아버지의 등 위에서 본 석양도. 어머니의 마지막 말도. 전부.
"하지만 하나 물어보자."
떠나려던 도깨비가 멈췄습니다.
"네 아비한테 배웠지? 왼쪽으로 당기는 거."
"...네."
"역시. 그 사람, 나하고 씨름한 적 있거든. 스물세 해 전에. 그때도 졌어. 나한테는 없는 게 하나 있더라고, 너희 사람들한테는."
"그게 뭡니까?"
"지면 안 되는 이유."
도깨비가 등을 돌렸습니다. 두 걸음을 옮기다 한 번 더 고개를 돌렸습니다.
"근데 말이야, 그 감투. 한 가지 알아 둘 게 있어. 사람 마음이 욕심으로 가득 차면, 안 통해. 욕심이 감투보다 무거워지면, 감투가 견디질 못하거든. 딱 한 끼만 생각하면 투명해지지만, 열 끼를 탐하면 감투가 벗겨져. 스무 끼를 탐하면 아예 부서져. 기억해 둬."
도깨비가 어둠 속으로 걸어갔습니다. 소나무 사이로 파란 피부가 보였다가, 사라졌다가, 다시 보였다가, 완전히 사라졌습니다. 마지막으로 남은 것은 웃음소리였습니다. 킬킬킬. 산등성이를 넘어가는 그 웃음이, 이상하게 따뜻했습니다. 마치 오래된 친구를 만났다 가는 사람의 웃음 같았습니다.
하지만 이야기는 여기서 끝나지 않았습니다.
※ 6:
덕수는 감투를 다시 쓰지 않았습니다. 이틀 동안은.
온몸이 만신창이였습니다. 갈비뼈는 금이 간 것 같았고, 허리를 펴면 등줄기를 따라 불이 붙는 것 같았고, 이마의 상처는 딱지가 앉았다가 벗겨지기를 반복했습니다. 그 이틀 동안 덕수는 문턱에 앉아 하늘만 보았습니다. 감투는 방 구석 보자기에 싸인 채 가만히 놓여 있었고, 덕수는 그것을 쳐다보지 않으려 했습니다. 하지만 눈을 감으면 감투가 떠올랐고, 눈을 뜨면 방 구석이 먼저 보였습니다.
사흘째 되던 날 아침, 배가 고팠습니다. 사흘째 아무것도 먹지 못한 배였습니다. 산에 올라갔지만 도토리도 없었고, 냇가에 가 보았지만 가뭄에 물이 말라 물고기는커녕 미꾸라지 한 마리 보이지 않았습니다. 오막살이로 돌아왔을 때, 다리가 풀려 방바닥에 주저앉았습니다. 그리고 시선이 방 구석으로 갔습니다. 보자기에 싸인 감투.
'딱 한 끼만.'
도깨비가 말했습니다. 한 끼를 생각하면 투명해지지만, 욕심이 무거우면 감투가 벗겨진다고.
'한 끼만. 진짜로 딱 한 끼만.'
덕수는 감투를 꺼냈습니다. 이번에는 한양 장터까지 가지 않았습니다. 이웃 마을 조 영감네 집으로 갔습니다. 걸어서 반 시진이면 닿는 곳이었습니다. 감투를 쓰고 담장 너머로 들어섰습니다. 마당에서 조 영감네 식구들이 저녁상을 받고 있었습니다.
보리밥에 된장찌개. 시래기 한 접시. 대단한 반찬은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솥에서 갓 퍼낸 보리밥 위로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고 있었고, 된장찌개에서 구수한 냄새가 마당을 가득 채우고 있었습니다. 덕수에게 그것은 세상에서 가장 눈부신 풍경이었습니다. 궁궐의 수라상이 부럽지 않았습니다.
부엌으로 들어갔습니다. 솥뚜껑을 조심스럽게 들었습니다. 밥 한 주먹을 떠 입에 넣었습니다. 딱 한 주먹. 뜨거웠습니다. 입천장이 데었습니다. 하지만 삼키는 순간, 온몸이 살아나는 것을 느꼈습니다. 감투는 벗겨지지 않았습니다. 투명한 채로 솥뚜껑을 다시 덮고, 부엌을 나왔습니다.
마당을 가로질러 담장 쪽으로 가는데, 마루 끝에 작은 아이가 앉아 있는 것이 보였습니다. 조 영감의 손녀였습니다. 다섯 살쯤 되어 보이는 계집아이. 저녁상에 함께 앉지 않고 혼자 마루 끝에 쪼그려 앉아 있었습니다. 무릎이 까져 있었습니다. 피가 조금 배어 나와 마른 핏자국이 종아리까지 줄을 그었습니다. 아이는 소리도 내지 않고 입을 꾹 다문 채 울고 있었습니다. 어깨가 가늘게 떨리고 있었지만, 밥상에 앉은 어른들은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덕수가 멈춰 섰습니다.
'나는 투명하니까. 그냥 가면 된다. 안 보이니까. 상관없는 일이니까.'
그런데 발이 떨어지지 않았습니다. 아이의 까진 무릎과 소리 없는 울음에서, 덕수는 무언가를 보았습니다. 아홉 살 겨울. 아버지가 돌아가신 날. 마당에 혼자 앉아 있었습니다. 어머니는 방 안에서 아버지 옆에 엎드려 울고 계셨고, 동네 어른들은 방을 드나들며 바빴고, 아무도 마당의 아홉 살짜리를 보지 않았습니다. 덕수는 그날, 마당 구석 장독대 옆에 쪼그려 앉아 소리 없이 울었습니다. 그때도 무릎이 까져 있었습니다. 낮에 뒷산에서 넘어졌는데, 아버지한테 보여 드리려고 집에 왔을 때는 이미 아버지가 눈을 감으신 뒤였습니다.
덕수가 감투를 벗었습니다.
아이 앞에 갑자기 사람이 나타났습니다. 아이가 놀라 눈을 동그랗게 떴습니다. 입을 벌렸다가 다물었습니다. 울음이 멎었습니다. 놀라움이 두려움보다 먼저 왔고, 두려움이 오기 전에 덕수가 웃었습니다. 서른여덟 해 만에, 누군가에게 보여 주는 진심이 담긴 웃음이었습니다. 잘 웃어 보려는 의지가 아니라, 저절로 올라온 웃음이었습니다.
"어디 보자. 많이 아프지?"
아이가 멍하니 덕수를 올려다보다가,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덕수가 마루에서 내려와 마당 구석 풀밭에서 질경이 잎을 두어 장 뜯어 왔습니다. 잎을 손바닥으로 비벼 즙을 낸 뒤, 아이의 까진 무릎 위에 살짝 올려놓았습니다. 아이가 따끔해서 인상을 찡그렸지만, 이내 시원해졌는지 표정이 풀렸습니다. 울음이 완전히 멎었고, 코를 훌쩍이며 덕수를 올려다보았습니다.
"아저씨 누구야?"
대답하기 전에 조 영감이 나왔습니다. 낯선 사내가 손녀 앞에 쪼그려 앉아 있는 것을 보고 눈을 부릅떴습니다. 하지만 손녀의 무릎에 질경이 잎이 올려져 있고, 아이가 울음을 그치고 있는 것을 보고, 한 발짝 다가서며 물었습니다.
"어디서 온 사람이오?"
"광주 산 아래 사는 박덕수라고 합니다."
"이 밤에 무슨 일이오?"
"품팔이를 찾고 있습니다. 나무 패는 일이든, 밭 고르는 일이든, 뭐든 합니다."
조 영감이 덕수를 위아래로 훑어보았습니다. 헐벗고, 맨발이고, 여기저기 상처투성이인 사내. 하지만 눈이 맑았고, 손녀의 무릎을 치료해 준 손이 거칠지만 다정했습니다.
"내일 아침, 뒷산 나무 좀 패야 하는데. 하루 품삯 대신 밥 두 끼를 주겠소."
그날, 덕수는 조 영감네 마루 끝에서 잠을 잤습니다. 이불 대신 거적을 덮었지만, 오막살이의 맨바닥보다 따뜻했습니다. 다음 날, 해가 뜨기 전에 일어나 뒷산에서 나무를 팠습니다. 참나무와 소나무를 번갈아 도끼질했습니다. 서른여덟 해 동안 굶고 추위에 떤 몸이었지만, 도깨비와 씨름을 한 뒤의 몸은 이상하게 단단해져 있었습니다. 점심때 조 영감이 보리밥 한 그릇과 된장국 한 사발을 내왔습니다.
땀을 흘리고 번 밥이었습니다. 감투를 쓰고 몰래 떠 먹은 밥 한 주먹과, 도끼를 휘둘러 번 보리밥 한 그릇. 같은 보리밥인데 맛이 달랐습니다. 목구멍이 아니라 가슴으로 내려가는 느낌이었습니다. 배만 찬 것이 아니라, 서른여덟 해 동안 텅 비어 있던 마음 어딘가가 천천히 차오르고 있었습니다.
그 뒤로 덕수는 감투를 쓰지 않았느냐고요? 아닙니다. 솔직하게 말하면, 가끔 썼습니다. 배가 정말로 견딜 수 없이 고프고, 품을 사 줄 집이 없는 날이면, 딱 한 주먹만 먹으려고 감투를 꺼냈습니다. 그때마다 감투는 여전히 덕수를 투명하게 만들어 주었습니다. 한 주먹의 욕심은 감투가 견딜 수 있는 무게였으니까요.
하지만 이상한 일이 벌어지기 시작했습니다. 감투를 쓰지 않는 날이 하루, 이틀, 열흘로 늘어갈수록, 덕수를 보는 사람들의 눈이 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조 영감이 다른 집 일거리를 소개해 주었습니다. 옆 마을 김 서방이 자기 집 빈 방 한 칸을 내주며 "겨울에 거기서 지내시오" 했습니다. 장터에서 엿장수가 엿 한 조각을 아무 말 없이 건네주기도 했습니다. 조 영감의 손녀는 덕수를 보면 달려와 바짓가랑이를 붙잡으며 "아저씨 또 왔다!" 하고 웃었습니다.
투명해져서 얻은 것보다, 보여져서 얻은 것이 더 많았습니다. 감투를 쓰면 아무에게도 보이지 않았지만, 감투를 벗으면 사람들이 자기를 보았습니다. 보이는 것이 이토록 큰 것인 줄, 서른여덟 해를 살면서 한 번도 몰랐습니다.
세월이 흘렀습니다. 덕수는 감투를 방 깊숙이 보자기에 싸서 넣어두었습니다. 꺼낼 일이 줄었습니다. 한 달에 한 번이 석 달에 한 번이 되었고, 석 달에 한 번이 반년에 한 번이 되었고, 어느 순간부터는 감투가 어디 있는지 잊어버리는 날도 생겼습니다.
그리고 어느 가을날, 문득 생각이 나서 감투를 꺼내 머리에 써 보았습니다. 투명해지지 않았습니다. 손이 보이고, 발이 보이고, 마당 바닥에 그림자가 선명했습니다. 한 번 더 벗었다 써 보았습니다. 마찬가지였습니다. 도깨비가 말했던 것처럼 욕심이 무거워진 것일까요. 아니었습니다. 덕수의 마음에는 욕심이 없었습니다. 감투가 힘을 잃은 것일까요. 그것도 아니었을 겁니다.
덕수는 한참 동안 감투를 들여다보다가, 알았습니다.
자기가 더 이상 숨고 싶지 않은 것을. 투명해지고 싶지 않은 것을. 세상에 보이고 싶은 것을. 세상에 보여도 괜찮은 사람이 된 것을.
그 해 늦가을, 단풍이 산을 붉게 물들인 날이었습니다. 덕수는 감투를 보자기에 곱게 싸서 품에 안았습니다. 도깨비를 처음 만났던 산길을 올랐습니다. 빈터는 그대로였습니다. 나뭇가지도 그대로였습니다. 덕수는 감투를 나뭇가지에 걸었습니다. 이틀 전이 아니라, 이제는 몇 해 전의 일이 된 그 밤처럼.
나뭇가지에 걸린 감투를 한참 바라보았습니다. 그리고 돌아섰습니다.
등 뒤에서 바람이 불었습니다. 나뭇잎이 우수수 떨어졌습니다. 그리고 아주 멀리서, 아주 희미하게, 웃음소리가 들렸습니다. 킬킬킬. 산을 넘고 골짜기를 타고 흘러오는 그 웃음이, 이상하게도 따뜻했습니다. 마치 "잘했다"고, "그래, 그거면 된다"고 말하는 것 같았습니다.
덕수는 웃었습니다. 아무에게도 보이지 않던 사내가, 세상에서 가장 환한 얼굴로 산을 내려갔습니다.
엔딩
사람은 누구나 한 번쯤 투명해지고 싶은 날이 있습니다. 아무에게도 보이고 싶지 않고, 아무도 나를 찾지 않는 곳으로 사라지고 싶은 날이. 하지만 도깨비 감투를 주워 쓴 그 사내는 알았습니다. 진짜 무서운 것은 남에게 보이지 않는 것이 아니라, 보이고 싶은 이유를 잃어버리는 것이라는 걸. 누군가의 까진 무릎 앞에서 감투를 벗었을 때, 덕수는 처음으로 자기 얼굴을 되찾았습니다. 감투 없이도, 세상은 그를 보기 시작했습니다. 오늘 당신에게도 감투가 하나 있다면, 벗어도 괜찮습니다. 당신을 보고 싶은 사람이, 반드시 있으니까요. 이 이야기가 마음에 남으셨다면, 구독과 알림 설정 부탁드립니다. 다음 이야기에서 또 뵙겠습니다.
썸네일 프롬프트
A cinematic 16:9 photorealistic scene of a trembling Korean man in worn Joseon-era clothes kneeling alone in a moonlit traditional Korean marketplace at night, clutching an old mysterious dark horsehair hat close to his chest, his face half-illuminated by pale blue supernatural light, his body partially translucent and fading into transparency from the waist down, mist swirling around wooden merchant stalls, dramatic chiaroscuro lighting, no tex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