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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밤마다 독수공방 홀아비의 툇마루를 찾아와 막걸리를 마신 아름다운 여우도깨비 〈학산한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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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후킹멘트

    텅 빈 툇마루에서 홀로 막걸리로 외로움을 달래던 어진 홀아비 최 씨. 어느 날 밤, 눈부시게 아름다운 여인이 고소한 메밀묵을 들고 그를 찾아옵니다. 정체가 사람을 홀리는 여우도깨비임을 알면서도 따뜻한 곁을 내어준 최 씨와, 그의 착한 심성에 반해 천 년의 도술을 버린 여우! 요괴와 인간의 경계를 넘어 대박 주막까지 일궈낸, 막걸리보다 진하고 메밀묵보다 달콤한 기묘한 로맨스가 지금 펼쳐집니다!

    ※ 1: 적막한 산골 마을, 텅 빈 툇마루에서 외로움을 삼키는 홀아비

    어스름한 저녁놀이 마을 어귀를 든든하게 지키고 선 수백 년 된 당산나무 너머로 붉게 타들어 가다, 이내 서늘한 잿빛 어둠 속으로 자취를 감추었다. 사방이 첩첩산중으로 가로막힌 깊고 깊은 골짜기에 자리 잡은 이 작은 산골 마을에는, 해가 서산으로 꼴딱 넘어가기 무섭게 무거운 적막과 차가운 밤공기가 서둘러 찾아왔다. 마을의 가장 구석진 곳, 사람들의 발길마저 뜸한 야트막한 돌담으로 둥그렇게 둘러싸인 낡고 허름한 초가집 한 채가 밤의 어둠 속에 웅크리고 있었다. 그곳에는 마을에서 제일가는 심성 고운 사내, 최 씨가 홀로 살고 있었다. 최 씨는 불과 삼 년 전, 지독하게 온몸을 불태우던 몹쓸 열병으로 인해 평생을 약속했던 사랑하는 아내를 먼저 차가운 흙구덩이 속 저세상으로 떠나보내고, 홀로 독수공방의 처지가 되어버린 기구한 사내였다. 슬하에 대를 이을 피붙이 자식 하나 두지 못하고 살가웠던 아내마저 허망하게 잃은 그의 삶은, 마치 가을걷이가 모두 끝나 속이 텅 비어버린 마른 짚단처럼 바스락거리고 허무하기 짝이 없었다.

    하지만 최 씨는 자신의 그 지독한 불행을 결코 남의 탓으로 돌리거나 얄궂은 세상을 원망하며 허송세월하지 않았다. 그는 동이 트기도 전인 이른 새벽부터 누구보다 일찍 일어나 남의 집 밭일과 논일을 마치 자신의 일처럼 묵묵히 거들었고, 길을 가다 무거운 나뭇짐을 진 노인을 보면 아무 말 없이 다가와 그 짐을 자신의 넓은 어깨에 대신 짊어지는 참으로 어질고 선한 사내였다. 마을 사람들은 그런 최 씨의 굽은 등을 보며 쯧쯧 불쌍하다 혀를 차면서도, 험한 세상에 저리도 착한 심성을 가진 이는 드물다며 그의 됨됨이만큼은 늘 입이 마르도록 칭찬하곤 했다.

    오늘도 하루 종일 살을 에는 듯한 늦가을의 매서운 찬 바람을 온몸으로 맞으며, 허리가 활처럼 휘도록 남의 집 추수를 돕고 돌아온 최 씨. 그는 이마와 목덜미에 맺힌 굵은 땀방울을 목에 두른 낡은 무명 수건으로 거칠게 훔쳐내며, 온기 하나 없이 텅 빈 적막한 마당에 무거운 발걸음을 들여놓았다. 불씨가 꺼져 차갑게 식어버린 부뚜막, 주인의 손길을 잃고 구석에 덩그러니 놓여 먼지가 뽀얗게 내려앉은 아내의 반짇고리, 그리고 온몸을 오싹하게 만드는 싸늘한 냉기만이 가득 감도는 어두운 방안. 최 씨는 툇마루에 털썩 주저앉으며 가슴 깊은 곳에서부터 끓어오르는 길고 무거운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하아... 오늘도 이렇게 뼈가 부서져라 일하고 돌아와도, 나를 반겨주는 것은 이 지독한 적막뿐이구나. 여보... 당신이 살아있었더라면, 이 시린 몸을 덥혀줄 따뜻한 국밥 한 그릇과 함께 오순도순 정다운 웃음꽃을 피웠을 터인데. 어찌하여 나만 이 험한 세상에 홀로 남겨두고 그리도 매정하고 급하게 떠나버린 것이오. 산천의 초목은 겨울이 지나면 어김없이 다시 푸르게 피어나건만, 내 가슴속에 몰아치는 이 시린 겨울바람은 삼 년이 지나도 도무지 멎을 기미가 보이지 않는구려.'

    최 씨는 무거운 몸을 일으켜 마당 한편에 가지런히 놓인 장독대로 향했다. 그가 하루 중 유일하게 살아있음을 느끼고 메마른 위안을 얻는 시간, 바로 툇마루에 앉아 홀로 막걸리 한 잔을 들이켜는 밤의 쓸쓸한 의식이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최 씨는 군데군데 찌그러진 낡은 놋 주전자에 시큼하면서도 묘하게 달금한 냄새가 풍기는 뽀얀 막걸리를 가득 채워 담았다. 그리고는 이가 나간 투박한 사기그릇 하나를 챙겨 들고, 구름 사이로 달빛이 은은하게 흘러내리는 툇마루에 다시 외롭게 걸터앉았다. 술상에 올려진 안주라고는 해 질 녘 텃밭에서 갓 따온 푸릇하고 매운 고추 몇 개와 짭조름한 된장 종지가 전부였다. 남들이 보기엔 그지없이 초라하고 궁색한 주안상이었지만, 하루 벌어 하루 먹고사는 가난한 홀아비인 그에게는 임금님의 수라상이 부럽지 않은 유일한 만찬이었다.

    최 씨는 빈 허공을 향해 마치 아내가 그 자리에 곱게 앉아 미소 짓고 있기라도 한 듯 조용히, 그리고 정성스레 잔을 들어 올렸다. 꿀꺽꿀꺽. 시원하고 알싸한 막걸리가 메마른 목구멍을 타고 식도를 넘어 위장까지 뜨겁고 짜릿하게 적시며 내려갔다. 알코올 기운이 핏줄을 타고 온몸으로 서서히 퍼져나가자, 하루 종일 굳어있던 어깨의 근육과 마음의 고단함이 조금씩 사르르 녹아내리는 듯했다. 하지만 취기가 서서히 오를수록 가슴 한구석에 뻥 뚫린 거대한 구멍 사이로 스며드는 지독한 고독과 외로움은 막걸리 몇 잔 따위로 결코 채워지거나 지워질 성질의 것이 아니었다. 찌르르르, 찌르르르. 가을밤의 스산한 풀벌레 소리만이 쓸쓸한 초가집의 마당을 처량하게 가득 채우고 있었다. 둥글고 커다란 보름달이 짙은 구름 사이로 환하게 고개를 내밀어 툇마루에 웅크리고 앉은 최 씨의 굽은 등을 어루만지듯 비추었다. 달빛은 너무도 밝고 청명하여, 오히려 늙고 외로운 사내의 처지를 더욱 한없이 서글프고 초라하게 부각하는 듯했다. 최 씨는 두 번째 잔을 따르며 밤하늘의 둥근 달을 물끄러미, 아주 오래도록 올려다보았다.

    '이 깊고 적막한 밤, 지나가는 낯선 길손이라도 좋으니 누군가 내 곁에 찾아와 말벗이라도 되어 준다면... 내 기꺼이 이 귀하고 달콤한 막걸리를 바닥이 날 때까지 아낌없이 대접하련만. 내 신세에 지나가는 개 한 마리도 들르지 않을 텐데 참으로 실없는 생각을 하는구나.'

    그런 실없고 허망한 상상을 하며 최 씨는 쓰디쓴 미소와 함께 다시 한번 탁한 막걸리 잔을 단숨에 비워냈다. 찬 바람이 옷깃을 파고들었지만, 그는 자리에서 일어날 생각조차 하지 않은 채 깊어가는 밤의 고독 속으로 하염없이 침잠해 들어가고 있었다.

    ※ 2: 바람을 타고 온 기이한 향기, 달빛 아래 등장한 낯선 불청객

    탁한 막걸리가 담긴 낡은 주전자가 절반쯤 비워지고, 최 씨의 두 뺨에 기분 좋은 붉은 취기가 어스름하게 달아올랐을 무렵이었다. 쏴아아. 쏴아아. 인적 없는 뒷산의 깊은 숲속에서부터 불어온 서늘하고 매서운 밤바람이 마당 한가운데 선 늙은 대추나무의 마른 잎사귀들을 세차게 흔들고 지나갔다. 그와 동시에 차가운 바람을 타고 형언할 수 없는 묘하고도 짙은 향기가 최 씨의 둔감한 코끝을 스치고 지나갔다. 그것은 새벽이슬을 머금은 숲속의 젖은 흙내음 같기도 했고, 이맘때쯤 산기슭에서 흐드러지게 피어나는 산국화의 달콤하고 아찔한 향기 같기도 한, 인간 세상에서는 흔히 맡을 수 없는 참으로 기이하고 신비로운 냄새였다. 취기 탓에 헛것을 느끼는가 싶어 투박한 손으로 눈을 비비던 최 씨의 귓가에, 사각사각, 누군가 마당에 쌓인 바싹 마른 낙엽을 밟으며 조심스레 다가오는 가벼운 발소리가 뚜렷하게 들려왔다.

    '이 시간에 올 사람이 뉘 있단 말인가. 짐승인가, 아니면 도적인가.'

    이 깊고 캄캄한 밤, 마을에서도 한참 떨어진 이 외딴 초가집을 찾아올 사람이라곤 단 한 명도 있을 리 만무했다. 등골을 타고 오싹한 소름이 쫙 끼친 최 씨가 쥐고 있던 사기 잔을 툇마루에 황급히 내려놓고 소리가 나는 마당 입구 쪽으로 고개를 홱 돌린 순간, 그의 두 눈은 커다랗게 튀어나올 듯 팽창하고 말았다. 입은 떡 벌어진 채로 굳어버려 헛바람만 새어 나왔다.

    구름을 벗어난 환한 달빛이 쏟아져 내리는 마당 한가운데, 눈이 부실 정도로 새하얗고 고운 소복을 단정하게 차려입은 한 젊은 여인이 그림자처럼 서 있는 것이 아닌가. 길고 윤기가 흐르는 칠흑 같은 검은 머리카락은 어깨 아래로 부드럽게 흘러내려 밤바람에 기분 좋게 흩날리고 있었고, 달빛을 고스란히 머금은 듯 창백할 정도로 희고 고운 피부와 오밀조밀한 이목구비는 도무지 세상 사람의 것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비현실적으로 몹시도 아름다웠다. 그녀의 크고 맑은 눈동자는 밤하늘에 반짝이는 숱한 별빛을 그 안에 그대로 옮겨놓은 듯 신비롭고도 오묘한 빛을 뿜어내며 최 씨를 향해 안착해 있었다.

    최 씨는 숨을 헉 들이키며 굳어버렸다. 인간의 여인이라기엔 너무도 아름답고, 사람의 온기라곤 찾아볼 수 없는 기이한 등장에 머릿속이 하얗게 비워졌다. 산에서 억울하게 죽은 귀신인가, 아니면 깊은 산속에서 천 년을 묵어 사람을 홀린다는 전설 속의 여우 요괴인가. 겁에 완전히 질린 최 씨가 엉덩이를 뒤로 빼며 툇마루 안쪽으로 다급하게 뒷걸음질을 치려던 찰나, 마당에 서 있던 여인의 붉은 입가에 더없이 부드럽고 온화한 미소가 번졌다. 그 찰나의 미소에, 최 씨를 옭아매고 있던 끔찍한 공포심과 경계심이 마치 봄눈이 햇살에 녹아내리듯 마법처럼 사르르 녹아 없어지는 것을 느꼈다.

    "밤이 몹시도 맑고 고즈넉하여 달빛을 벗 삼아 산책을 나왔다가, 어디선가 무척이나 달큼하고 구수한 막걸리 냄새가 진하게 풍겨와 저도 모르게 이곳까지 발걸음을 멈추게 되었습니다. 담장 너머로 보니 홀로 술잔을 기울이시는 사내의 뒷모습이 하도 쓸쓸하고 외로워 보여, 지나가는 길손이 불쑥 찾아오는 커다란 결례를 범하고 말았습니다. 혹여 툇마루 한구석에 이 부족한 아낙이 잠시 쉬어갈 작은 자리라도 내어주실 수 있으신지요?"

    여인의 목소리는 깊은 산속 인적 없는 옹달샘에서 맑은 물방울이 바위 위로 굴러떨어지듯 맑고 청아하며 듣는 이의 마음을 편안하게 울렸다. 최 씨는 두려움에 덜덜 떨리던 손을 무릎 위로 부여잡고 간신히 마른침을 삼키며 쉰 목소리를 쥐어 짜냈다.

    "뉘... 뉘신데 이 깊은 산골짜기 짐승이나 쏘다니는 외딴집에... 아니, 저는 그저 하루 벌어 하루 먹고사는 아무것도 가진 것 없는 불쌍한 홀아비일 뿐이오. 남녀가 엄연히 유별하고 밤이 이리도 깊었거늘, 어찌 어여쁜 아낙께서 겁도 없이..."

    최 씨의 당황하여 횡설수설하는 순박한 모습에 여인은 고운 비단 소매로 입을 살짝 가리고 호호호 맑은 웃음을 터뜨렸다. 그녀의 웃음소리에 마당의 공기마저 따뜻해지는 듯했다. 그리고는 품속에서 정성스레 무언가를 조심스레 꺼내어 툇마루 위로 살포시 올려놓았다. 그것은 정갈하고 반듯하게 썰린, 먹음직스러운 갈색 빛깔의 메밀묵이 듬뿍 담긴 작은 둥근 목기 그릇이었다. 찰진 메밀묵 위에는 고소한 참기름 냄새가 코를 찌르고, 깨소금이 듬뿍 뿌려진 붉은 양념장이 참으로 먹음직스럽게 얹혀 있었다. 가난한 홀아비의 밥상에서는 구경조차 하기 힘든 귀하고 정갈한 음식이었다.

    "빈손으로 처음 보는 남의 술자리에 불쑥 끼어드는 것은 예의가 아니지요. 산에서 나는 좋은 메밀을 주워다 제가 오늘 낮에 정성껏 직접 쑨 메밀묵입니다. 시원한 막걸리 안주로는 천하에 이만한 것이 없지요. 저도 지나가는 길에 목을 축일 겸 술 한 잔을 얻어 마시고, 선비님께서는 제가 만든 이 묵을 한번 맛보심이 어떠하신지요? 결코 독을 타거나 해치려는 마음은 없으니 안심하시지요."

    최 씨는 여인의 티 없이 맑은 미소와 툇마루에 놓인 메밀묵을 번갈아 바라보며 혼란에 빠졌다. 깊고 어두운 산속에서 갑자기 나타난 정체 모를 절세미인, 그리고 마법처럼 내어놓은 따뜻한 메밀묵. 이 모든 비현실적인 상황이 전설 속에서나 듣던 요괴의 무서운 둔갑술이 아닐까 여전히 마음 한구석이 의심스러웠다. 하지만 여인의 빛나는 눈빛에는 어떠한 삿된 악의나 요사스러운 탁함도 전혀 묻어나지 않았다. 게다가 홀로 지독한 외로움에 사무쳐 쓴 막걸리를 목구멍으로 삼키던 그에게, 누군가 먼저 다가와 건네는 이 작은 온기와 대화의 제안은 뿌리치기 힘들 만큼 거대하고도 달콤한 유혹이었다. 귀신이면 어떠하고 천 년 묵은 요괴면 어떠하리. 내 남루한 목숨을 앗아간다 한들 매일 밤 뼛속까지 파고드는 이 지독한 고독과 외로움 속에서 미쳐가는 것보다는 낫지 않겠는가. 최 씨는 흔들리던 마음을 다잡고 허허로운 웃음을 지어 보이며 여인에게 곁을 내어주기로 결심했다.

    "허허, 산중에서 이리 귀하고 맛깔스러운 메밀묵을 정성스레 가져오셨으니, 주인이 되어 마땅히 묵을 내칠 수는 없고 시원한 술 한 잔을 듬뿍 내어드리는 것이 인지상정이지요. 보시다시피 몹시 누추하고 찬 기운이 도는 곳이지만, 괘념치 마시고 이리 마루로 올라와 편히 앉으시지요."

    최 씨가 입고 있던 낡은 저고리 소매로 툇마루의 먼지를 슥슥 훔쳐내어 자리를 정성껏 내어주자, 여인은 사뿐히 나비가 날아오르듯 가볍게 마루 위로 올라와 다소곳이 앉았다.

    ※ 3: 달콤한 메밀묵과 알싸한 막걸리, 요괴임을 알면서도 내어준 따뜻한 곁

    최 씨는 황급히 부엌으로 달려가 씻어둔 깨끗한 빈 사기그릇을 하나 더 꺼내왔다. 그리고는 낡은 주전자를 기울여 뽀얗고 시원한 막걸리를 찰랑거릴 정도로 가득 부어 여인에게 정중히 건넸다. 여인은 하얗고 가느다란 두 손으로 잔을 조심스레 받아 들고는 고개를 살짝 돌려 다소곳이 입술을 축였다. 최 씨 역시 여인이 내민 메밀묵을 나무젓가락으로 한 조각 집어 조심스레 입에 넣었다. 입안에 닿자마자 혀끝에서 부드럽게 부서지며 넘어가는 메밀묵은, 지금까지 최 씨가 평생 살아오며 그 어느 장터나 잔칫집에서 먹었던 것보다 백 배는 더 고소하고 달콤하여 씹을 새도 없이 스르르 녹아내렸다.

    "허허, 묵 맛이 참으로 기가 막힙니다. 솜씨가 어찌 이리 훌륭하신지요. 내 평생 이리 찰지고 맛난 묵은 처음 먹어봅니다."
    "입에 맞으신다니 다행입니다. 서방님께서 빚으신 이 막걸리 또한 맛이 아주 깊고 시원하여 산속의 옹달샘 물보다 더 달게 넘어가는군요."

    기묘하고도 신비로운 불청객과의 믿을 수 없는 술자리는 그렇게 밝은 달빛 아래서 조용하고도 화기애애하게 무르익어 가고 있었다.

    그날 밤의 기묘한 만남 이후, 믿을 수 없는 동화 같은 일상이 가난한 홀아비 최 씨의 팍팍한 삶에 서서히 스며들기 시작했다. 달이 밝게 뜨는 밤이면 어김없이 마당의 낙엽 밟는 사각거리는 소리와 함께 그 눈부시게 아름다운 여인이 산에서 내려와 나타났다. 여인은 매번 정성스레 쑤어 고소한 참기름을 듬뿍 바른 메밀묵 한 접시를 잊지 않고 들고 왔고, 최 씨는 낮 동안의 고단함을 잊은 채 정성스레 빚은 가장 맑은 막걸리를 항아리에서 퍼 담아 두고 설레는 마음으로 그녀를 기다렸다. 처음에는 기이하고 낯설어 경계심이 남아있던 두 사람의 툇마루 술자리는, 밤이 지나고 시간이 거듭될수록 서로의 텅 빈 가슴속 온기를 가득 채우고 나누는 가장 소중하고 따뜻한 위안의 시간으로 깊이 변해갔다.

    "이 막걸리는 며칠 전 아랫마을 황 부자네 추수를 이틀 꼬박 거들어주고 품삯 대신 얻어온 햅쌀로 정성껏 빚은 것인데, 오늘따라 유독 맛이 아주 기가 막히게 잘 익었습니다. 자, 사양 마시고 한 잔 더 받으시지요."
    "어머, 어쩐지 오늘따라 술맛이 예사롭지 않다 하였습니다. 최 서방님의 그 바지런하고 고운 심성이 쌀에 스며들어 이리 술이 달고 깊은 모양입니다. 묵도 한 점 더 드시지요."

    두 사람은 좁은 툇마루에 나란히 앉아 술잔을 부딪치며 밤이 이슥해지는 줄도 모르고 끝없는 이야기를 나누었다. 최 씨는 여인에게 자신이 살아온 팍팍하지만 정직하고 올곧았던 삶의 궤적, 몹쓸 병으로 먼저 흙으로 돌아간 아내에 대한 지독한 그리움과 슬픔, 그리고 매일 흙바닥을 뒹굴어야 하는 농사일의 고단함 등을 거짓이나 꾸밈없이 털어놓았다. 여인은 언제나 별빛 같은 맑은 눈망울을 반짝이며 최 씨의 투박하고 서글픈 이야기에 진심으로 귀 기울여 들어주었고, 때로는 가벼운 농담과 재치 있는 위로로 그의 굽은 어깨와 상처받은 마음을 다독여 주기도 했다. 냉기만이 감돌던 최 씨의 텅 비어있던 낡은 초가집은, 어느새 밤마다 여인의 청아한 웃음소리와 고소하고 달콤한 메밀묵 냄새로 따뜻하게 가득 채워져 생기를 되찾아가고 있었다.

    하지만 두 사람의 정이 날이 갈수록 깊어지면 깊어질수록, 최 씨는 자신의 마음 한구석에서 이 아름다운 여인이 결코 평범한 인간의 육신을 가진 이가 아니라는 사실을 어렴풋이, 그러나 점차 확고하게 짐작하고 있었다. 늦가을 밤의 살을 에는 듯한 서릿발 같은 매서운 추위에도 얇은 소복 치마 하나만 걸친 채 전혀 추위를 타지 않는 창백한 모습, 그녀가 새벽이슬을 맞으며 돌아간 다음 날 아침이면 마당 한구석 댓돌 밑에 미세하게 떨어져 남아있는 붉은 짐승의 털, 그리고 무엇보다 결정적으로 술에 취해 그녀가 무심코 자리에서 일어설 때 펄럭이는 치맛자락 사이로 언뜻언뜻 비쳤던 탐스럽고 붉은 여우의 꼬리. 마을 어르신들이 한겨울 화롯가에 모여 앉아 아이들에게 겁을 주며 들려주던 '사람의 혼을 빼놓고 간을 파먹는다는 백 년 묵은 무시무시한 여우도깨비'의 전설이 지금 최 씨의 눈앞 마당에, 그것도 툇마루 바로 옆에 실재하고 있었던 것이다. 보통의 사내였다면 꼬리를 본 그 즉시 기절초풍을 하며 무당을 부르거나 몽둥이를 들고 도망을 쳤을 터였다.

    '저 곱고 아름다운 여인이 첩첩산중에서 수백 년을 묵어 사람의 탈을 쓴 여우도깨비라 한들 이제 와서 그것이 대체 무슨 상관이란 말이냐. 비록 내 간과 혼을 노리고 달콤한 묵을 들고 다가온 무서운 요물일지라도, 지난 몇 달간 저 여인이 텅 빈 내 가슴에 베풀어준 말벗의 온기와 메밀묵 한 접시의 정은 인간 세상 그 어느 누구도 주지 못한 절대적인 따스함이자 구원이었다. 내 쓸쓸하고 비루한 홀아비 인생, 저 여인이 밤마다 나와 함께 이 마루에 앉아 탁한 막걸리를 마셔줄 수만 있다면 내 기꺼이 이깟 한 목숨 바쳐 간을 내어준다 해도 결코 원이 없겠구나.'

    최 씨는 여인의 정체가 요괴라는 것을 완벽히 알면서도 단 한 번도 두려운 내색을 하거나 짐짓 그녀를 경계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날이 갈수록 쌀쌀해지는 밤공기에 여인이 행여나 인간의 감기라도 걸릴까 노심초사하며, 자신이 입던 가장 낡고 두꺼운 무명 솜옷을 조용히 벗어 그녀의 어깨에 정성껏 덮어주었다. 또한 칠흑 같은 산속에서 홀로 내려오고 돌아가는 산길이 어두울까 걱정되어, 귀한 기름을 사다 마당 입구에 호롱불을 환하게 밤새도록 밝혀두는 애틋한 배려를 아끼지 않았다. 그는 여우도깨비를 무찌르고 쫓아내야 할 흉측한 요물이 아니라, 자신과 깊은 정을 나누고 외로움을 달래주는 고귀한 벗이자 마음을 다해 지키고 아끼고 싶은 여인으로 대하고 있었다.

    어떤 흑심이나 대가를 바라지 않는 최 씨의 그 지독하리만치 순박하고 따뜻한 심성은, 오랜 세월 겉모습만 번지르르하고 속은 이기적인 탐욕으로 꽉 찬 못난 인간들의 마음만을 숱하게 보아왔던 여우도깨비의 가슴속에 거대한 해일 같은 파문을 일으키고 있었다. 간을 빼앗으려던 짐승의 목적은 일찌감치 사라진 지 오래였다. 인간이 보여준 진정한 선의와 온기라는 것을 생전 처음으로 마주한 여우도깨비의 가슴속 가장 깊은 곳에서, 단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낯설고 뜨거운 감정, 즉 '사랑'이라는 감정이 인간의 피처럼 서서히 돌며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 4: 팍팍한 인간의 삶을 목격한 여우도깨비, 밥벌이를 향한 기막힌 결심

    산천의 다채로웠던 가을색이 하루가 다르게 짙고 어두운 무채색으로 변해가며, 뼛속까지 시린 매서운 초겨울의 북풍한설이 마을을 휘감고 불어오기 시작하던 어느 날이었다. 여우도깨비는 평소처럼 깊고 고요한 밤이 찾아오기를 얌전히 기다리지 못하고, 대낮부터 사람들의 눈을 요리조리 피해 마을 어귀에 굳건히 서 있는 늙은 당산나무 꼭대기 위로 날아올랐다. 그녀는 잎이 다 떨어져 앙상한 가지 사이로 몸을 완벽히 숨긴 채, 최 씨의 고단한 하루 일과를 그저 가만히 내려다보고 있었다. 나무 위에서 안타까운 시선으로 지켜본 최 씨의 하루는, 그가 밤마다 달빛 아래 툇마루에서 애써 허허롭게 지어 보이던 긍정적인 웃음과는 달리 몹시도 고단하고 처절하며 비참한 것이었다.

    찬 바람이 쌩쌩 불어 뺨을 때리는 황량한 들판에서, 최 씨는 남의 집 언 땅을 곡괭이로 일구느라 하루 종일 허리 한 번 제대로 펴지 못하고 짐승처럼 헐떡이고 있었다. 그의 거친 손등은 다 터져 피가 배어 나왔고, 얇은 무명옷 사이로 스며드는 추위에 굽은 등은 사시나무 떨리듯 떨리고 있었다. 점심참이 되자 밭고랑에서 일하던 다른 일꾼들은 삼삼오오 모닥불 주위에 모여, 자신들의 아낙들이 이고 내어온 김이 모락모락 나는 따뜻한 국밥과 숭늉을 정답게 나누어 먹었다. 하지만 돌봐줄 아내 하나 없이 늙고 병들어가는 홀아비 최 씨는, 찬바람을 온몸으로 맞으며 멀찍이 떨어진 논둑에 홀로 쪼그려 앉아 있었다. 그는 아침에 집에서 챙겨 온 꽁꽁 언 주먹만 한 보리개떡 하나를 굳은 이빨로 억지로 우물거리며 힘겹게 삼키고 있었다. 그마저도 퍽퍽하여 목이 메어 밭고랑에 고인 얼음장 같은 찬물을 손으로 떠서 간신히 넘기는 모습을 보며, 나무 위에 숨어 지켜보던 여우도깨비의 가슴 한구석이 칼에 찔린 듯 찌릿하고 먹먹하게 아려오기 시작했다.

    '어찌하여 저리도 착하고 심성이 어진 사내가 이토록 고단하고 험난한 밥벌이에 시달리며 비참하게 살아야 한단 말인가. 뼛골이 부서져라 남의 집 농사일을 거들어주어도, 저 불쌍한 사내에게 돌아오는 것은 꽁꽁 언 보리개떡 하나와 다 터진 손, 그리고 엽전 몇 푼이 전부라니. 내가 밤마다 찾아가 말벗이 되어주고 내 체온을 나누어준들, 저 사내의 팍팍한 삶과 주린 배를 당장 실질적으로 채워주지 못한다면 그것이 다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수백 년을 깊은 산속에서 비바람을 피하며 신묘한 도술을 부리며 살아온 여우도깨비에게 인간의 '밥벌이'라는 것은 참으로 낯설고도 한없이 무거운 생존의 굴레였다. 요괴인 자신이야 밤이슬을 마시고 달빛만 쬐어도 천 년을 거뜬히 늙지 않고 살 수 있지만, 필멸의 연약한 육신을 가진 저 인간 사내에게는 당장 내일 입에 풀칠할 한 줌의 곡식이 숨통과 직결되는 몹시도 절박한 문제였다. 최 씨가 자신의 정체가 사람을 홀리는 요괴라는 것을 명확히 알고 있음에도, 그토록 따뜻하게 자신의 낡은 무명옷을 벗어 덮어주던 그 밤. 여우도깨비는 이미 그 못나고 가난한 인간 사내에게 자신의 온 마음과 영혼을 빼앗겨 버리고 말았다. 껍데기뿐인 얄팍한 도술이나 신기루 같은 환상이 아니라, 진짜 피가 흐르는 인간 여인이 되어 저 고단한 사내의 곁에 평생 영원히 머물며 그의 차가운 손을 잡아주고 싶다는 강렬한 열망이 그녀의 영혼을 통째로 뒤흔들고 있었다. 하지만 짐승이나 인간이나, 사랑이라는 감정만 파먹고 밥을 굶으며 살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자신이 진짜 인간이 되어 도술을 완벽히 잃고 최 씨의 아내가 된다면, 늙고 가난한 두 사람은 이 지독한 가난의 수렁 속에서 평생 흙바닥을 기며 굶주림과 추위에 허덕여야 할 것이 불 보듯 뻔했다.

    '안 된다. 내 비록 영생을 포기하고 요괴의 몸을 버려 연약한 인간이 되기로 굳게 결심하였다 한들, 사랑하는 내 사내를 평생 저리 비참하게 남의 집 머슴살이나 하며 썩어가게 둘 수는 없다. 번듯하고 확실한 밥벌이 대책을 반드시 마련해야만 한다. 최 서방님도 나도 굶지 않고, 기와집에서 떵떵거리지는 못할망정 매서운 한겨울에 따뜻한 아랫목에 배를 깔고 누워 김이 나는 쌀밥을 원 없이 배불리 먹을 수 있는 기막힌 묘안이 필요하다.'

    깊고 어두운 산속 자신의 은밀한 동굴로 홀로 돌아온 여우도깨비는 수백 년 묵은 요괴의 지혜를 온통 짜내어 곰곰이 깊은 생각에 잠겼다. 이리저리 동굴을 서성이던 그녀의 날카로운 시선이 멈춰 머문 곳은, 다름 아닌 맷돌에 곱게 갈아둔 하얀 메밀가루와, 자신이 밤마다 사랑하는 최 씨를 위해 정성껏 불을 때며 쑤어내던 찰지고 고소한 메밀묵이었다. 수백 년간 산속의 맑은 정기를 머금은 좋은 재료만 깐깐하게 엄선하여 만들어낸 그녀의 메밀묵은, 인간 세상 그 어느 유명한 주막이나 한양의 권세가에서도 결코 맛볼 수 없는 기가 막힌 천상의 맛이었다. 게다가 최 씨가 매일 밤 직접 빚어 툇마루에서 자신에게 정성껏 내어주던 그 시큼하고도 묘하게 달큰한 막걸리 또한, 허름한 시골 사내의 솜씨라고는 도무지 믿기지 않을 만큼 깊고 청량한 풍미를 지니고 있었다. 순간, 생각에 잠겨있던 여우도깨비의 눈빛이 밤하늘의 보름달처럼 환하고 예리하게 반짝였다.

    '그래, 바로 이것이다! 뼈 빠지게 남의 밭을 매는 고된 농사일 대신, 내가 매일 쑤어내는 이 기막힌 천상의 메밀묵과 최 서방님의 그 시원하고 달큰한 막걸리를 합쳐 사람들이 많이 오가는 장터 길목에 작은 주막을 내는 것이다! 우리가 만든 묵과 술의 맛이라면 십 리, 아니 이십 리 밖에서도 사람들이 소문을 듣고 줄을 서서 돈을 바리바리 싸 들고 찾아올 것이 분명하다. 이것이야말로 우리 두 사람이 평생 배를 곯지 않고 오순도순 금슬 좋게 잘살 수 있는 가장 완벽하고 기막힌 밥벌이가 아니겠는가!'

    단순히 사내를 향한 사랑의 애틋한 감정을 넘어, 인간 세상에서 함께 부대끼며 살아갈 가장 현실적이고 명확한 밥벌이의 대책까지 완벽하게 세운 여우도깨비의 가슴이 벅찬 희망으로 부풀어 올랐다. 그녀는 인간이 되기 위해 수백 년간 자신의 뱃속에 품어왔던, 영력과 도술이 붉게 응집된 여우 구슬을 입 밖으로 조용히 꺼내어 애틋하게 쓰다듬었다. 이 구슬을 자신의 손으로 직접 깨뜨려 버린다면, 그녀는 두 번 다시 신묘한 요괴의 힘을 쓸 수 없는 평범하고 연약한, 늙고 병드는 인간 여인이 될 터였다. 하지만 찬바람 속에서 흙먼지를 뒤집어쓰고 언 개떡을 힘겹게 씹어 삼키던 최 씨의 그 선량하고도 애처로운 얼굴을 떠올리자, 천 년의 영생과 요력 따위는 티끌만큼의 미련도 남지 않았다. 여우도깨비는 결심을 굳히고 세상에서 가장 맛있고 찰진 메밀묵을 정성스럽게 쑤어 예쁜 목기에 담았다. 그리고는 결연하고도 설레는 가벼운 발걸음으로, 환한 달빛이 쏟아져 내리는 최 씨의 초가집을 향해 거침없이 산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오늘 밤 그녀의 발걸음은 그 어느 밤보다 묵직하고도, 단단한 인간의 사랑으로 꽉 차 있었다.

    ※ 5: 짐승의 굴레를 벗어던진 달빛 아래의 고백, 그리고 주막 창업 선언

    그날 밤도 최 씨는 어김없이 낡고 삐걱거리는 툇마루에 웅크리고 걸터앉아, 탁한 막걸리가 담긴 잔을 기울이며 밤의 적막을 달래고 있었다. 낮에 꽁꽁 얼어붙은 땅에서 남의 집 밭담을 쌓을 무거운 돌을 나르다 발목을 심하게 삐끗한 탓에, 그의 굳게 다문 입에서는 간간이 참기 힘든 낮은 신음이 새어 나왔다. 퉁퉁 부어오른 발목을 거친 손으로 주무르며 서글픈 한숨을 내쉬던 그의 귓가에, 익숙하고도 몹시 반가운 낙엽 밟는 발소리가 들려왔다. 달빛을 등지고 사립문을 가볍게 넘어선 여인은, 평소와 다름없이 이 세상 사람이 아닌 듯한 아름다운 자태로 고소한 참기름 냄새가 진동하는 메밀묵을 들고 나타났다. 하지만 오늘따라 여인의 표정은 어딘가 사뭇 비장하고도 몹시 긴장된 듯 굳어 보였다. 최 씨가 억지로 아픈 기색을 숨기며 반갑게 맞이하고자 자리를 내어주려 급히 일어서려다, 그만 삔 발목이 꺾이며 중심을 잃고 툇마루 위로 쿵 소리를 내며 쓰러지듯 주저앉고 말았다.

    "아쿠구... 이놈의 못난 몸뚱이가 늙어가는 티를 주책맞게 내는구려. 반가운 손님 앞에서 흉한 꼴을 보여 참으로 미안하오."

    놀란 여인이 황급히 묵이 담긴 그릇을 마루에 내려놓고 달려와, 최 씨의 부어오른 멍든 발목을 두 손으로 조심스레 어루만졌다. 흙투성이가 되고 곳곳이 다 터져 굳은살이 흉하게 박인 사내의 거친 발을 바라보던 여인의 맑은 눈망울에서, 결국 하루 종일 참았던 굵은 눈물방울이 뚝뚝 떨어져 내렸다. 그것은 요괴가 사람을 홀릴 때 흘리는 차가운 거짓 눈물이 아닌, 고단한 인간에 대한 지독한 연민과 사랑이 깊게 섞인 뜨겁고도 진실한 인간의 눈물이었다.

    "최 서방님... 어찌 이리 몸을 모질게 혹사하며 살아가시는 겁니까. 밤마다 이 마루에서 제게 이리도 따뜻하고 다정한 웃음을 보여주시면서, 낮에는 이리도 고달프게 짐승처럼 흙바닥을 기며 뼈저린 밥벌이의 고통을 홀로 쓸쓸히 감내하고 계셨단 말입니까."

    최 씨는 여인의 갑작스러운 눈물에 크게 당황하며, 자신의 거친 굳은살 박인 손으로 그녀의 고운 뺨에 흐르는 눈물을 다급히 닦아주었다.

    "울지 마시오. 사내로 태어나 내 입에 들어갈 풀칠을 하고 이 한 몸 건사하기 위해 땀 흘려 일하는 것은 인간 세상의 당연한 이치요. 내 비록 아무것도 가진 것 없는 가난하고 늙은 홀아비이나, 밤마다 당신이 산에서 가져다주는 이 맛난 메밀묵과 다정한 말벗 덕분에 내 비루한 인생이 얼마나 큰 위안을 얻고 삶의 희망을 품게 되었는지 당신은 모를 것이오. 그러니 제발 내 못난 발을 보고 그리 슬피 울지 마시오."

    여인은 최 씨의 거칠고 투박한 손을 자신의 두 뺨에 가져다 대며, 마침내 수개월 동안 가슴속에 꽁꽁 숨겨 품어왔던 묵직하고도 무서운 비밀을 조심스레 입 밖으로 꺼내놓았다.

    "서방님... 부디 놀라지 말고 제 기막힌 말을 끝까지 들어주셔요. 사실 저는 사람의 탈을 쓰고 있지만, 저 깊은 산속에서 수백 년을 도술을 부리며 살아온 짐승, 사람의 간을 파먹는 여우도깨비입니다. 처음엔 그저 사람이 빚은 술 냄새에 이끌려 서방님을 홀릴 장난삼아 다가왔으나, 어떠한 흑심이나 대가를 바라지 않는 서방님의 그 따뜻하고 선한 심성에 제 짐승의 굳은 마음이 봄눈 녹듯 완전히 녹아내려 버렸습니다. 정체를 알면서도 저를 위해 덮어주신 그 낡은 무명옷의 인간적인 온기를, 저는 죽어서도 잊을 수가 없사옵니다."

    사람을 잡아먹는 요물이라는 여인의 떨리는 충격적인 고백에도, 최 씨의 주름진 얼굴에는 어떠한 놀람이나 두려움의 기색도 전혀 떠오르지 않았다. 그는 오히려 모든 것을 감싸 안는 빙긋하고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여인의 하얀 손을 마주 꽉 잡았다.

    "내 진작부터 당신이 평범한 사람이 아니란 걸 알고 있었소. 술에 취해 일어설 때 치맛자락 사이로 언뜻언뜻 보이던 당신의 그 곱고 붉은 꼬리도, 한겨울 서릿발 같은 매서운 추위에도 차갑기만 하던 당신의 손길도 말이오. 허나 그게 대체 무슨 대수란 말이오. 사람의 멀쩡한 탈을 쓰고도 짐승만도 못한 악랄한 짓을 저지르는 자들이 널리고 널린 이 탁한 세상에서, 늙고 가난한 사내의 툇마루를 잊지 않고 찾아와 진심으로 마음을 나누어준 당신은 내게 하늘이 내린 천사요, 구원의 선녀와도 같은 고귀한 존재요. 당신이 백 년 묵은 여우든 천 년 묵은 요괴든, 내게는 그저 세상에서 가장 어여쁘고 고마운 내 사람일 뿐이오."

    자신의 끔찍한 정체를 정확히 알고도 변함없이 굳건한 사랑과 믿음을 확인한 여우도깨비는 왈칵 참았던 통곡을 쏟아내며 최 씨의 넓은 품에 와락 안겼다. 요괴와 인간이라는, 결코 좁혀질 수 없을 것 같았던 두 사람의 마음이 환한 달빛 아래서 마침내 완벽하게 하나가 된 벅찬 순간이었다. 한참을 최 씨의 품에서 어린아이처럼 흐느끼던 여인이 이내 눈물을 닦고 고개를 들어, 밤하늘의 별빛처럼 반짝이는 단호한 눈빛으로 최 씨를 바라보며 앙증맞고도 당찬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서방님! 저를 서방님의 아내로 당당히 맞아주셔요! 제가 오늘부로 수백 년간 지켜온 영력과 도술을 미련 없이 버리고, 완전한 인간이 되어 평생을 곁에서 지아비로 깍듯하게 모시겠사옵니다! 허나, 무작정 살림만 합치고 손가락만 빨고 살자는 철없는 소리가 아닙니다. 금강산도 식후경이라, 밥은 먹고 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서방님께서 이렇게 매일 뼈가 시리게 남의 집 밭일로 피를 깎아 먹으며 푼돈을 버는 비참한 꼴은 제가 눈뜨고 볼 수 없사옵니다."

    최 씨가 갑작스러운 아내 선언과 밥벌이 타령에 영문을 몰라 눈을 껌벅거리자, 여인이 자신이 들고 온 메밀묵 접시와 막걸리 주전자를 가리키며 머릿속에 세워둔 당차고도 기막힌 창업 묘안을 속사포처럼 쏟아내기 시작했다.

    "우리 두 사람이 힘을 꽉 합쳐 사람들이 가장 많이 오가는 장터 어귀에 번듯한 주막을 냅시다! 서방님께서 빚으시는 이 시원하고 기막히게 달큰한 막걸리에, 제가 도깨비 시절부터 산의 정기를 모아 연마해 온 이 천상의 메밀묵을 최고의 안주로 곁들여 파는 것입니다. 그 맛이라면 장안의 모든 돈 많은 양반들과 백성들이 줄을 서서 지갑을 열고 먹으러 올 것이니, 그깟 뼈 빠지는 농사일 따위는 당장 내일 때려치우고 저와 함께 돈을 박박 긁어모아 떵떵거리며 배불리 살아봅시다!"

    눈물겨운 애틋한 사랑 고백 뒤에 곧바로 이어진, 너무도 현실적이고 계산이 빠른 기가 막힌 밥벌이 대책에 최 씨는 잠시 어안이 벙벙해졌다. 하지만 이내 낡은 툇마루가 떠나가라 파안대소를 터뜨렸다. 사람의 마음과 간을 홀리는 흉악한 요물인 줄로만 알았더니, 어찌 이리도 생활력이 강하고 야무진 안주인이 제 발로 복덩이처럼 굴러들어 왔단 말인가. 밝은 달빛 아래 툇마루에서는 요괴와 인간이라는 무거운 껍데기를 훌렁 벗어 던진 두 남녀의 유쾌하고도 가슴 벅찬 희망의 웃음소리가 밤새도록 끊이지 않고 산골짜기를 울려 퍼졌다.

    ※ 6: 인간이 된 여우와 어진 사내, 막걸리 향기 가득한 화목한 부부의 탄생

    그날 밤, 여우도깨비는 자신을 믿어준 최 씨가 곁에서 지켜보는 가운데, 자신의 모든 영력이 응집되어 붉게 빛나는 여우 구슬을 주저 없이 입술 밖으로 꺼내어 바닥에 산산조각 내어 버렸다. 쨍그랑하는 소리와 함께 구슬이 깨어지는 순간, 눈이 멀 듯한 눈부신 빛이 낡은 초가집 전체를 성스럽게 감쌌다. 빛이 걷히고 짐승의 요사스러운 기운이 완전히 빠져나간 그녀는, 마침내 따뜻한 붉은 피가 흐르고 심장이 요동치며 고동치는 완벽하고도 아름다운 인간 여인으로 다시 태어났다. 며칠 뒤, 마을 사람들의 엄청난 놀라움과 진심 어린 축복 속에 두 사람은 소박하지만 정겨운 혼례를 올렸다. 마을 제일의 찢어지게 가난하고 늙은 홀아비 최 씨가 대체 산속 어디서 저리도 곱고 심성 야무진 처녀를 얻어 새 장가를 가는지, 마을 아낙네들과 총각들의 부러움 섞인 시선과 질투가 하루 종일 끊이지 않았다.

    혼례를 마친 두 사람은 여인의 야심 찬 계획대로 지체 없이 실행에 옮겼다. 그동안 최 씨가 안 먹고 안 입으며 항아리에 푼푼이 모아둔 엽전과, 여인이 산속에서 인간이 되기 전 캐온 수백 년 묵은 진귀한 산삼을 약재상에 비싸게 팔아 마련한 두둑한 밑천을 합쳐 읍내 장터 가장 목이 좋은 길목에 자그마한 주막을 차렸다. 이름하여 '여우네 메밀묵 주막'이었다. 처음에는 그저 허름한 촌구석 사내가 차린 주막이라며 거들떠보지도 않고 지나치던 장터 사람들이었지만, 솥단지에서 끓어오르는 묵의 고소한 메밀 향기와 커다란 항아리에서 풍겨 나오는 달달하고 알싸한 막걸리 냄새는 십 리 밖을 지나는 바쁜 길손들의 발걸음마저 홀린 듯 멈추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주모! 여기 고소한 묵 한 접시랑 막걸리 한 사발 그득하게 주시오!"
    "아이고, 이 묵 맛이 대체 어찌 이리 기가 막히단 말이오? 입에 넣자마자 솜사탕처럼 녹아내리는데, 고소한 참기름 냄새가 아주 콧속을 제대로 찌르는구려! 텁텁하지 않고 시원한 이 막걸리는 또 어찌 이리 청량하고 달콤한지, 하루 종일 밭일한 고단함이 단숨에 싹 가시는 기분이오! 내일도 꼭 다시 오리다!"

    손님들의 침이 마르는 극찬이 입소문을 타고 발 없이 천 리를 퍼지면서, 최 씨 부부의 주막은 날이 갈수록 문전성시를 이루며 돈을 갈퀴로 긁어모으기 시작했다. 이른 아침부터 밤늦게까지 맛난 묵을 찾고 술을 찾는 손님들로 주막의 문지방이 반년도 채 안 돼 닳아 없어질 지경이었다. 최 씨는 더 이상 매서운 겨울의 찬 바람을 온몸으로 맞으며 남의 집 언 땅을 파며 개떡을 씹지 않아도 되었다. 그는 따뜻하고 양지바른 주막 뒷마당에서 흥얼흥얼 콧노래를 부르며 정성껏 누룩을 디뎌 막걸리를 빚었고, 억척스럽고 야무진 안주인이 된 여인은 부뚜막에서 쉼 없이 맷돌로 메밀을 갈아 묵을 쑤어내며 돈통에 엽전을 긁어 담기에 하루가 짧을 지경이었다. 밤마다 가난한 툇마루에서 외롭게 나누던 두 사람만의 소박한 안주가, 이제는 부부의 삶을 더없이 풍요롭게 만들어주는 완벽하고 눈부신 밥벌이가 된 것이다.

    바쁘게 주막 마루를 오가며 손님을 치르던 아내가 땀이 송글송글 맺힌 이마를 훔치자, 막걸리통을 나르던 최 씨가 다가와 자신의 깨끗한 옷소매로 아내의 얼굴을 다정하게 닦아주었다.

    "여보, 내 뼈 빠지게 고생하는 일 안 시키겠다 철석같이 약속했거늘, 이리 장사가 미친 듯이 잘되어 밤낮으로 당신을 부뚜막에서 묵을 쑤게 만드니 내 참으로 미안하고 면목이 없구려. 당신 덕분에 내 평생 만져보지 못한 엄청난 돈을 쓸어 모으고는 있지만, 무리하다 그 고운 몸에 병이라도 날까 내 늘 걱정이오."

    아내는 허리춤에 찬 무거운 엽전 꾸러미를 찰랑거리며 땀방울이 맺힌 얼굴로 호탕하게 웃음을 터뜨렸다.

    "어허, 서방님도 참 주책이십니다! 돈이 이렇게 폭포수처럼 굴러들어 오는데 팔다리 힘든 줄을 어찌 알겠습니까! 게다가 남의 집 머슴살이하며 얼어붙은 개떡을 씹어 삼키던 서방님의 그 몹시도 불쌍한 몰골을 안 보게 된 것만으로도, 저는 하루 세끼 밥을 안 먹어도 배가 부르고 행복합니다. 이깟 묵 쑤는 일이야 산속에서 도깨비 시절부터 숨 쉬듯 해오던 제 전공이니 제발 걱정일랑 푹 붙들어 매셔요!"

    금슬 좋고 서로를 끔찍이 아끼며 생활력마저 강한 두 부부의 찰떡같은 호흡 덕분에, 작은 주막은 나날이 번창하여 이듬해에는 장터에서 제일 으리으리한 기와집 주막으로 크게 확장되었다. 텅 빈 짚단 같았던 최 씨의 쓸쓸했던 삶은, 솜씨 좋은 아내와 더불어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토끼 같은 자식들까지 쑥쑥 태어나며 세상 부러울 것 없는 행복과 웃음소리로 꽉 들어찼다. 요괴와 인간이라는 태생적 신분, 그리고 사람을 갉아먹는 지독한 가난마저 완벽하게 뛰어넘은 두 사람의 기적 같은 로맨스. 그것은 그저 산골짜기에 떠도는 허무맹랑한 전설이 아니라, 서로의 깊은 아픔을 보듬고 현실의 팍팍한 밥벌이마저 억척스럽게 함께 일구어낸 진정한 사랑과 신뢰의 힘이었다. 오늘도 읍내 장터 어귀 기와집 주막에는, 변함없이 달콤한 메밀묵 냄새와 구수하고 시원한 막걸리 향기가 정겹게 피어오르며 오가는 길손들의 발걸음을 유쾌하게 붙잡고 있다.

    유튜브 엔딩멘트

    가난한 홀아비와 여우도깨비의 툇마루 로맨스가 으리으리한 대박 주막의 탄생으로 이어지는 이야기, 어떻게 들으셨나요? 껍데기를 넘어선 진실한 사랑과 팍팍한 현실의 밥벌이까지 야무지게 챙긴 여우도깨비의 당찬 묘안에 저절로 미소가 지어지셨다면, 지금 바로 '구독'과 '좋아요' 꾹 눌러주세요! 다음 시간에도 전설의 고향에서만 만날 수 있는, 가슴 따뜻하고 흥미진진한 옛날이야기로 찾아오겠습니다. 편안한 밤 보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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