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목차
만나서 반갑습니다. 도깨비님
태그:
#도깨비전설 #조선시대야담 #도깨비방망이 #옛날이야기 #전설의고향 #한국민속문화 #시니어오디오북 #오디오드라마 #권선징악 #재치있는농부 #전래동화 #민담설화 #도깨비씨름 #수수께끼대결 #추억의이야기







인트로:
비 내리는 깊은 밤, 산모롱이나 오래된 폐가에서 푸른 도깨비불이 일렁이는 것을 본 적이 있으신가요? 서양의 괴물이나 귀신들이 사람의 목숨을 해치는 무서운 존재라면, 우리네 옛이야기 속 도깨비는 참으로 정겹고도 해학적인 존재입니다. 힘은 장사처럼 세고 신통방통한 방망이를 가졌지만, 어딘지 모르게 어수룩해서 사람의 재치에 깜빡 속아 넘어가기도 하고, 메밀묵과 막걸리 한 사발에 평생의 의리를 바치기도 하는 매력 넘치는 친구들이지요. 오늘 들려드릴 이야기는 강원도 깊은 산골, 가난하지만 마음씨 착하고 배짱 두둑한 농부 박 서방이 장난꾸러기 도깨비 우두머리 김 서방을 만나 펼치는 통쾌한 재치 대결과 신비한 도깨비방망이의 전설입니다. 듣기만 해도 입가에 미소가 번지는 유쾌한 도깨비와의 만남, 지금 바로 시작합니다.
씬표:
씬1: 비 내리는 고갯길, 푸른 불꽃과 함께 나타난 불청객: 장터에서 돌아오던 성실한 농부 박첨지가 가랑비가 내리는 도깨비 고개에서 거대한 체구의 도깨비 김 서방과 마주쳐 기상천외한 밤샘 씨름 대결을 벌이는 이야기입니다.
씬2: 메밀묵 한 접시에 맺은 의형제와 기묘한 수수께끼 대결: 씨름에서 진 도깨비가 다음 날 밤 메밀묵 냄새를 맡고 박첨지의 초가집으로 찾아와, 농부의 기지에 말려 수수께끼와 내기에서 연거푸 패배하며 의형제를 맺는 과정입니다.
씬3: 황무지를 옥토로 바꾼 심술과 농부의 절묘한 거짓말: 박첨지에게 도움을 주려다 오히려 자갈밭을 만들어버린 어수룩한 도깨비들의 실수를 박첨지가 역이용하여, 하룻밤 사이에 기름진 일등 논으로 탈바꿈시키는 유쾌한 소동입니다.
씬4: 도깨비 잔칫집의 비밀과 금 나와라 뚝딱 방망이의 기적: 보름달 뜨는 밤, 도깨비들의 비밀 산중 잔치에 초대받은 박첨지가 말피 묻은 옷가지로 도깨비들을 놀라게 한 뒤, 우연히 얻은 도깨비방망이로 큰 부자가 되는 사연입니다.
씬5: 욕심쟁이 최 부자의 헛된 탐욕과 도깨비들의 통쾌한 복수: 박첨지가 부자가 된 비결을 캐낸 마을의 구두쇠 최 부자가 가짜 메밀묵과 거만한 태도로 도깨비들을 속이려다, 혹독한 징벌을 받고 패가망신하는 통쾌한 인과응보입니다.
씬6: 세월이 흘러도 변치 않는 우정, 복을 나누는 도깨비 고개: 도깨비방망이로 얻은 재물을 마을 사람들과 아낌없이 나누며 살아가는 박첨지와, 그 마음에 감동하여 마을의 수호신처럼 남게 된 도깨비들의 따뜻한 후일담입니다.
※ 1: 비 내리는 고갯길, 푸른 불꽃과 함께 나타난 불청객
옛날 조선 시대 어느 시절, 강원도 깊은 산골 마을에 박첨지라 불리는 마흔 줄의 농부가 살고 있었습니다. 박첨지는 비록 가진 땅이라고는 산비탈의 손바닥만 한 화전 몇 마지기가 전부일 만큼 가난했지만, 성품이 대나무처럼 올곧고 남의 일이라면 발 벗고 나서는 정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게다가 얼마나 해학적이고 배짱이 두둑한지, 마을 사람들은 그를 가리켜 호랑이에게 물려가도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고 담뱃대를 빌려 달라고 할 사람이라며 웃곤 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해 늦여름이었습니다. 박첨지는 며칠 동안 산에서 캔 더덕과 도라지를 지게에 지고 삼십 리 밖 읍내 장터로 나갔습니다. 다행히 약재가 제값을 받아 닷 냥이라는 작지 않은 돈을 손에 쥔 박첨지는, 병든 노모에게 드릴 고등어 한 손과 아내가 좋아하는 메밀가루 한 포대, 그리고 자신의 목을 축일 탁주 한 되를 사 들고 가벼운 발걸음으로 귀갓길에 올랐습니다.
그런데 마을로 넘어가는 마지막 고개인 '여우고개' 어귀에 다다랐을 무렵, 갑자기 하늘에 먹구름이 몰려오더니 부슬부슬 가랑비가 내리기 시작했습니다. 여우고개는 낮에도 아름드리 소나무들이 우거져 어둑어둑한 데다, 옛날부터 비가 내리는 밤이면 도깨비들이 나와 사람을 홀린다는 소문이 파다한 곳이었습니다.
'허어, 이거 날씨가 고약하구먼. 호랑이 장가가는 날도 아니고 여우 시집가는 날인가, 비가 오락가락하니 원. 걸음을 좀 재촉해야겠네.'
박첨지가 패랭이를 고쳐 쓰고 고갯마루에 올라섰을 때였습니다. 어디선가 휙- 하는 기분 나쁜 바람 소리가 불어오더니, 고갯길 양옆의 수풀 속에서 파르스름한 불빛 수십 개가 반딧불이처럼 피어올랐습니다. 그 불빛들은 공중에서 빙글빙글 춤을 추듯 돌아가더니, 순식간에 하나로 합쳐져 사람 머리만 한 시퍼런 불덩이가 되어 박첨지의 앞길을 떡하니 가로막았습니다.
보통 사람 같았으면 그 자리에서 혼비백산하여 지게를 내던지고 도망쳤겠지만, 배짱 좋은 박첨지는 걸음을 멈추고 허리에 손을 얹은 채 껄껄 웃었습니다.
"허허, 어두운 밤길에 횃불도 없이 걸으려니 발밑이 어두워 걱정이었는데, 웬 고마운 불빛이 이리 마중을 나와 길을 밝혀주는고! 참으로 고맙구먼!"
박첨지가 두려워하기는커녕 태연하게 인사를 건네자, 시퍼런 불덩이가 펑 소리를 내며 연기를 뿜어냈습니다. 그리고 그 자욱한 연기 속에서 키가 구 척은 족히 되어 보이고, 어깨가 떡 벌어졌으며, 온몸에 수북한 털이 나고 머리에는 뭉툭한 뿔이 돋아난 거대한 사내가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바로 이 여우고개의 터줏대감인 도깨비 우두머리였습니다. 도깨비는 시뻘건 눈을 부라리며 천둥 같은 목소리로 외쳤습니다.
"이놈! 감히 밤중에 내 고개를 넘으면서 겁도 없이 웃음을 터뜨리다니, 네놈이 간이 배 밖으로 나왔구나! 내 이름은 이 산을 다스리는 도깨비 김 서방이다! 목숨이 아깝거든 가진 것을 다 내려놓고 썩 물러가거라!"
도깨비들이 흔히 사람 성씨 중에서도 가장 흔한 '김 서방'이라 자칭한다는 이야기를 익히 들어 알고 있던 박첨지는, 속으로 쾌재를 부르며 정중하게 허리를 굽혔습니다.
"아이고, 그러십니까요! 말씀으로만 듣던 도깨비 어르신 김 서방님을 이리 뵙게 되니 가문의 영광입니다요! 소인은 아랫마을에 사는 박 서방이라 합니다. 김 서방에 박 서방이니, 이것도 보통 인연이 아닌데 초면에 길 한복판에서 고함만 지를 것이 아니라 통성명이나 제대로 합시다그려. 만나서 참으로 반갑습니다, 도깨비님!"
박첨지가 너무나도 능청스럽게 손을 내밀며 반가워하자, 도깨비 김 서방은 당황하여 눈을 껌뻑거렸습니다. 지금까지 이 고개를 넘던 사람들은 자신의 모습만 봐도 거품을 물고 기절하거나 걸음아 나 살려라 도망치기 바빴는데, 이 조그만 농부는 오히려 오랜 친구를 만난 것처럼 반색을 하니 기가 막힐 노릇이었습니다.
"크흠! 이, 이놈이 보자 보자 하니 능구렁이가 따로 없구나! 좋다, 네놈이 나를 두려워하지 않으니 내기 시합을 하나 하자! 내가 이 산중에서 씨름으로는 당해낼 자가 없는 천하장사다. 네놈이 나와 씨름을 해서 이기면 곱게 보내줄 것이고, 만일 지면 네 지게에 든 물건을 다 빼앗고 밤새도록 이 산속을 헤매게 만들 것이다! 어떠냐!"
'옳지, 도깨비가 밤길에 씨름하자고 덤빈다는 옛 어른들 말씀이 딱 맞구나. 힘으로야 내가 저 덩치를 어찌 당하겠는가. 꾀를 써야지.'
박첨지는 일부러 팔뚝을 걷어붙이며 호기롭게 대답했습니다.
"좋습니다, 김 서방님! 사내대장부가 씨름 한 판 청하는데 마다할 수가 있겠습니까! 대신 정정당당하게 샅바를 잡고 시작합시다."
도깨비가 코웃음을 치며 박첨지의 허리춤을 잡으려 다가왔습니다. 박첨지는 재빨리 도깨비의 칡넝쿨 같은 허리띠를 잡는 척하면서, 은근슬쩍 도깨비의 가장 큰 약점이라는 '오른쪽 다리'에 자신의 발을 깊숙이 걸었습니다. 옛날부터 도깨비는 왼쪽 다리는 천근만근 바위처럼 무겁지만, 오른쪽 다리는 허깨비처럼 힘이 없어 오른쪽으로 넘기면 맥을 못 춘다는 전설을 박첨지가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자, 간다! 이얍!"
도깨비가 괴력을 발휘하여 박첨지를 번쩍 들어 올리려는 순간, 박첨지는 온몸의 체중을 실어 도깨비의 오른쪽 오금을 안쪽으로 힘껏 차 넣으며 몸을 비틀었습니다.
"어, 어라? 이, 이게 왜 이러지? 어어어-!"
산이라도 뽑아 올릴 것 같던 도깨비 김 서방이 오른쪽 다리가 풀리자마자 허우적거리더니, 우당탕탕 쿵 하는 소리와 함께 땅바닥에 큰 대자로 나자빠지고 말았습니다. 얼마나 세게 넘어졌는지 고갯길이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흔들렸고, 소나무 가지에 맺혀 있던 빗방울들이 우박처럼 쏟아져 내렸습니다.
"아이구, 내 허리야! 아니, 이 조그만 놈이 어디서 이런 괴력이 나온단 말이냐!"
도깨비는 엉덩이를 문지르며 억울하다는 듯 다시 덤벼들었습니다.
"방금은 땅이 미끄러워서 그랬다! 다시 한 판 붙자!"
"허허, 열 판이면 어떻고 백 판이면 어떻겠습니까. 덤비시지요!"
그날 밤, 여우고개 위에서는 기상천외한 씨름판이 벌어졌습니다. 도깨비는 씩씩거리며 덤벼들 때마다 박첨지의 노련한 오른쪽 안다리 걸기에 걸려 넘어지고 또 넘어졌습니다. 나중에는 도깨비가 기진맥진하여 혀를 길게 빼물고 거친 숨을 몰아쉬었습니다. 박첨지는 쓰러진 도깨비의 다리를 옆에 있던 칡넝쿨로 꽁꽁 묶어 소나무 기둥에 매어 놓은 뒤, 지게에서 사 온 탁주 병을 꺼내어 도깨비의 입에 한 모금 시원하게 부어주었습니다.
"크으, 술맛 좋다! 아니, 박 서방, 자네는 사람을 묶어놓고 술은 왜 주는가?"
"원래 씨름판이 끝나면 승자가 패자에게 막걸리 한 사발 대접하는 것이 우리네 풍습이라오. 날이 밝아오니 나는 이만 집으로 내려가 보겠소. 내일 밤에 내가 맛있는 메밀묵을 쑤어 놓을 터이니, 억울하거든 우리 집 마당으로 놀러 오시오!"
박첨지가 지게를 지고 휘파람을 불며 산 아래로 내려가는 동안, 소나무에 묶인 도깨비 김 서방은 어이가 없으면서도 입안에 감도는 구수한 탁주 맛에 홀려 멍하니 그의 뒷모습만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 2: 메밀묵 한 접시에 맺은 의형제와 기묘한 수수께끼 대결
아침 해가 뜨자마자 소나무에 묶여 있던 칡넝쿨을 간신히 끊고 산속 동굴로 돌아간 도깨비 김 서방은, 하루 종일 분통이 터져 잠을 이룰 수가 없었습니다.
"분하다, 분해! 수백 년을 살아오면서 사람한테 씨름을 져서 묶인 적은 처음이단 말이다! 게다가 그 박 서방인지 뭔지 하는 놈, 어찌나 배짱이 두둑하고 술은 또 그리 맛있는 것을 주던지... 오늘 밤에는 내 부하들까지 데리고 내려가서 기필코 코를 납작하게 해주고 말겠다!"
이윽고 밤이 찾아오자, 도깨비 김 서방은 덩치만 크고 어수룩한 졸개 도깨비 둘을 거느리고 산 아래 박첨지의 초가집으로 향했습니다. 당장이라도 초가집 지붕을掀(흔)들어 놓을 기세로 싸리문 앞에 도착한 도깨비들은, 마당 한가운데에서 피어오르는 기가 막히게 고소한 냄새에 그만 걸음을 우뚝 멈추었습니다.
침이 꼴깍 넘어가는 그 냄새는 바로 도깨비들이 세상에서 제일 좋아한다는 메밀묵과 들기름 냄새였습니다. 마당의 멍석 위에는 김이 모락모락 나는 메밀묵이 한 소쿠리 수북하게 썰려 있었고, 그 옆에는 간장 양념장과 뽀얀 막걸리 한 동이가 놓여 있었습니다. 방문을 활짝 열고 앉아 있던 박첨지가 어둠 속을 향해 반갑게 손을 흔들었습니다.
"아이고, 우리 김 서방님! 약속대로 찾아와 주셨군요! 거기 문밖에서 침만 삼키지 마시고 동생분들도 데리고 어서 이리로 올라오십시오!"
도깨비 김 서방은 체면을 차리려 헛기침을 두어 번 했으나, 코끝을 찌르는 메밀묵 냄새에 두 다리가 저절로 멍석 앞으로 걸어 나갔습니다.
"크흠! 내 오늘 박 서방 네놈의 버릇을 고쳐주려 왔건만, 이리 정성껏 상을 차려 놓았으니 성의를 봐서 한 입만 먹어주겠다! 얘들아, 먹어라!"
허락이 떨어지기 무섭게 도깨비 셋은 게 눈 감추듯 메밀묵을 입안에 쓸어 넣기 시작했습니다. 얼마나 맛있게 먹는지 한 소쿠리 가득하던 묵이 순식간에 바닥을 드러냈고, 막걸리 한 동이도 단숨에 비워졌습니다. 배를 두드리며 트림을 한 도깨비 김 서방이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말했습니다.
"꺼억! 참으로 꿀맛이로구나. 내 평생 이리 고소하고 찰진 메밀묵은 처음 먹어본다. 허나 얻어먹은 것은 얻어먹은 것이고, 어젯밤 씨름에서 진 설욕은 해야겠다! 오늘은 힘이 아니라 지혜로 승부를 겨루자!"
'하하, 도깨비가 사람한테 지혜 겨루기를 하자고? 갈수록 태산이로구나. 어디 장단이나 맞춰 볼까.'
박첨지는 깍듯하게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습니다.
"좋습니다, 김 서방님. 어떻게 겨루면 되겠습니까?"
"서로 수수께끼를 하나씩 내서 못 맞추는 쪽이 지는 것이다! 만일 내가 이기면 오늘 밤부터 네 집 마당에서 밤새도록 꽹과리를 치며 놀 것이고, 네가 이기면 내가 너를 형님으로 모시고 평생 네 소원을 들어주겠다! 먼저 내 문제를 들어보아라. 산에서 내려올 때는 네 발로 내려오다가, 물에 들어가면 두 발로 서고, 상 위에 올라가면 발이 하나도 없어지는 것이 무엇이냐?"
도깨비가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문제를 냈지만, 박첨지는 턱수염을 쓰다듬으며 일부러 미간을 찌푸리는 척하다가 무릎을 탁 쳤습니다.
"허허, 그거 참 어려운 문제입니다만, 혹시 우리가 방금 맛있게 먹은 저 '메밀'을 두고 하시는 말씀 아닙니까? 산밭에서 자랄 때는 줄기가 사방으로 뻗어 네 발 같고, 맷돌에 갈아 물에 풀 때는 두 손으로 저으니 두 발이요, 묵이 되어 상에 오르면 발이 없으니 말입니다!"
사실 도깨비 자신도 정답이 뭔지 모르고 그냥 아무 말이나 지어낸 문제였는데, 박첨지가 그럴듯하게 이치를 갖다 붙이며 메밀이라고 대답하자 도깨비들은 입을 떡 벌리며 감탄했습니다.
"허어! 정답을 나도 몰랐는데 어찌 그리 귀신같이 맞추느냐! 너 참으로 대단하구나! 자, 이제 네가 문제를 내보아라. 나는 천지만물의 이치를 다 꿰뚫고 있으니 무엇이든 다 맞출 수 있다!"
박첨지는 빙그레 웃으며 방 안에서 낡은 짚신 한 짝과 붉은 고추 하나를 들고나와 멍석 위에 내려놓았습니다.
"김 서방님, 내 문제는 아주 쉽습니다. 작고 붉은 몸뚱이에 푸른 갓을 쓰고, 그 속을 열어보면 황금 구슬이 수백 개 들어있는데, 한 입 깨물면 눈물 콧물이 쏙 빠지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리고 털도 없고 살도 없는데 사람의 발바닥 밑에 깔려 평생 천리 길을 달리는 것은 또 무엇입니까?"
눈앞에 정답을 그대로 놓아두고 내는 문제였건만, 어수룩한 도깨비들은 그 짚신과 고추는 쳐다보지도 않고 머리를 쥐어짜며 끙끙거렸습니다.
"붉은 몸뚱이에 푸른 갓을 쓰고 속에는 황금 구슬이 들었다고? 얘들아, 그게 뭐냐? 혹시 붉은 도포를 입은 사또의 뱃속에 든 금덩어리 아니냐?"
"아닙니다요, 형님! 깨물면 눈물이 난다 하니 필시 호랑이 불알일 것입니다요!"
도깨비들이 엉뚱한 대답만 늘어놓으며 밤새도록 머리를 싸매더니, 새벽녘이 되자 결국 두 손을 번쩍 들고 항복을 선언했습니다.
"아이고, 머리에서 연기 나겠다! 박 서방, 도저히 모르겠네! 정답이 뭔가?"
박첨지가 손가락으로 멍석 위의 고추와 짚신을 가리키자, 도깨비 김 서방은 이마를 탁 치며 그 자리에 넙죽 엎드려 큰절을 올렸습니다.
"눈앞에 두고도 못 맞추다니, 내가 완패했소이다! 힘으로도 이기고 지혜로도 이기셨으니, 오늘부터 박 서방을 내 친형님으로 모시겠나이다! 형님, 아우의 절을 받으시옵소서!"
"허허, 아우님들! 어서 일어나시게! 오늘부터 우리는 메밀묵으로 맺어진 의형제일세!"
그렇게 가난한 농부 박첨지는 여우고개의 도깨비들을 하루아침에 든든한 아우로 맞이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 3: 황무지를 옥토로 바꾼 심술과 농부의 절묘한 거짓말
의형제를 맺은 뒤로 도깨비 김 서방과 졸개들은 사흘이 멀다 하고 밤마다 박첨지의 집을 찾아왔습니다. 올 때마다 멧돼지 고기며 산삼 같은 귀한 산나물을 가져와 박첨지의 노모를 대접했고, 박첨지의 아내는 그 보답으로 늘 구수한 메밀묵과 수수부꾸미를 부쳐 도깨비들의 배를 채워주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밤, 메밀묵을 배불리 먹은 도깨비 김 서방이 마당 구석에 쌓여 있는 박첨지의 낡은 농기구들을 보며 안타까운 목소리로 말했습니다.
"형님, 아우가 가만히 보니 형님은 밤낮으로 뼈가 빠지게 일하시는데도 어찌 살림살이가 이리 팍팍하십니까? 아우가 도깨비 체면에 형님 고생하시는 꼴을 그냥 볼 수가 없으니, 형님네 논밭이 어디 있는지 알려만 주십시오. 오늘 밤에 저희가 가서 농사가 잘되도록 단단히 손을 봐드리겠습니다!"
박첨지는 도깨비의 마음씨는 고마웠으나, 문득 옛 어른들의 말씀이 떠올라 등골이 서늘해졌습니다. 도깨비란 놈들은 본래 청개구리 같은 심보가 있는 데다가 사람의 농사법을 전혀 몰라서, 도와준다고 한 짓이 오히려 밭을 망쳐놓기 일쑤라는 이야기였습니다. 실제로 마을 건너편에 있는 박첨지의 다랑논 세 마지기는 그나마 돌을 골라내고 겨우 벼를 심어놓은 소중한 땅이었습니다.
'허어, 저 어수룩한 아우님들이 도와준다고 내 논에 갔다가는 애써 가꾼 벼를 다 뽑아버리거나 엉뚱한 짓을 할 게 뻔하지. 허나 호의를 거절하면 도깨비 성미에 토라져서 심술을 부릴 테고... 그래, 아예 돌밭인 저 개울가 황무지를 내 논이라고 알려주어 어떻게 하나 지켜봐야겠다.'
박첨지는 짐짓 고마운 표정을 지으며 개울 건너편에 있는 버려진 자갈밭을 가리켰습니다.
"아우님들의 마음이 그리 깊으니 내 눈물이 다 날 지경일세. 사실 개울 건너 큰 소나무 아래에 있는 그 넓은 땅이 내 밭인데, 땅이 메마르고 거름기가 없어서 곡식이 자라지를 않는다네. 거기를 좀 기름지게 해줄 수 있겠는가?"
"형님, 걱정 붙들어 매십시오! 땅을 기름지게 하는 데는 산속의 둥글둥글한 돌멩이와 모래가 최고지요! 저희가 오늘 밤에 완벽하게 해놓겠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도깨비들은 곡식이 자라는 데 거름이 필요한 줄은 모르고, 반질반질하고 예쁜 강자갈을 깔아놓으면 땅이 좋아지는 줄로 착각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다음 날 아침, 박첨지가 개울가 황무지에 나가보니 기가 막힌 광경이 펼쳐져 있었습니다. 원래도 돌이 많던 땅 위에, 도깨비들이 밤새도록 강가에서 날라다 부어놓은 집채만 한 바위와 자갈들이 산더미처럼 쌓여 아예 돌산을 이루고 있었던 것입니다.
'하하하! 내 그럴 줄 알았지! 만약 진짜 내 논을 알려주었더라면 올해 농사는 완전히 망칠 뻔했구나! 좋다, 이 어수룩하고 심술궂은 도깨비들의 성미를 거꾸로 이용해 볼까?'
그날 밤, 도깨비들이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박첨지의 집을 찾아왔습니다.
"형님! 어젯밤에 저희가 해놓은 밭을 가보셨습니까? 반질반질한 돌멩이를 수만 개나 깔아놓았으니 이제 농사가 기가 막히게 잘될 것입니다!"
그런데 마루에 앉아 있던 박첨지는 도깨비들을 보자마자 대성통곡을 하며 가슴을 쳤습니다.
"아이고, 아우님들! 내가 큰일 날 짓을 했네! 사실 내가 어젯밤에 마음이 급해서 거짓말을 했단 말일세! 농사가 잘되려면 그 땅에 있던 돌과 자갈을 하나도 남김없이 다 파내어 저 강둑에 갖다 버리고, 산속의 시커멓고 냄새나는 부엽토와 거름을 갖다 부어야 내가 망하는 법인데, 아우님들이 거기다가 돌을 잔뜩 쌓아놓았으니 나는 이제 때부자가 되게 생겼단 말일세! 나는 돈 많은 부자가 되는 것이 세상에서 제일 싫고 두려운데, 아우님들이 나를 부자로 만들어버렸으니 이 일을 어찌하면 좋단 말인가! 아이고, 나는 부자가 되기 싫어! 제발 그 돌 좀 치우지 말아주게, 돌을 치우고 검은 흙을 채우면 나는 거지가 되어 행복해질 텐데, 아우님들이 절대 그렇게 안 해줄 것 아닌가!"
박첨지가 일부러 반대로 말하며 엉엉 우는 시늉을 하자, 도깨비 김 서방과 졸개들은 귀가 솔깃하여 서로 눈빛을 주고받았습니다.
'어라? 돌을 쌓아놓으면 형님이 싫어하는 부자가 되고, 돌을 다 치우고 시커먼 썩은 흙과 개똥 소똥 거름을 부어놓으면 형님이 좋아하는 가난뱅이가 된다고? 허허, 형님이 어젯밤에 우리한테 수수께끼로 망신을 준 것도 조금 얄미웠는데, 이번 기회에 형님 몰래 돌을 싹 치우고 거름을 잔뜩 부어서 골탕을 좀 먹여볼까?'
도깨비 특유의 청개구리 심술이 발동한 것이었습니다. 도깨비 김 서방은 시치미를 뚝 떼며 말했습니다.
"허허, 형님이 그리 부자가 되는 것을 싫어하시는 줄은 몰랐습니다그려. 오늘은 저희가 피곤하니 이만 가보겠습니다!"
도깨비들은 싸리문을 나서자마자 키득거리며 개울가 황무지로 달려갔습니다.
"얘들아! 오늘 밤에 저 돌멩이들을 하나도 남김없이 다 뽑아서 무너진 강둑에 갖다 쌓아라! 그리고 산속에서 제일 시커멓고 기름진 썩은 나뭇잎 흙이랑, 동네 마구간의 거름을 싹 다 긁어모아서 무릎 높이까지 두껍게 깔아놓아라! 아침에 형님이 보고 깜짝 놀라게 말이다!"
신통력을 가진 도깨비 수십 마리가 달라붙자, 사람이 몇 년을 파내도 못 치울 바위와 자갈들이 순식간에 뽑혀 나가 무너져가던 마을 강둑을 튼튼한 석축으로 만들어 놓았습니다. 그리고 그 파낸 자리에는 천 년 묵은 산속의 기름진 부엽토와 거름이 산더미처럼 채워졌고, 개울물까지 끌어와 완벽한 물길을 내어놓았습니다.
다음 날 아침, 안개가 걷히자 마을 사람들은 눈앞에 펼쳐진 기적 같은 광경에 입을 다물지 못했습니다. 쓸모없던 돌밭 황무지가 하룻밤 사이에 조선 팔도에서 가장 기름진 열 마지기짜리 일등 옥토로 변해 있었던 것입니다. 박첨지는 논두렁에 서서 밤새 땀을 흘리고 돌아갔을 어수룩한 도깨비 아우들을 생각하며 배를 잡고 유쾌한 웃음을 터뜨렸습니다.
※ 4: 도깨비 잔칫집의 비밀과 금 나와라 뚝딱 방망이의 기적
가을이 깊어져 박첨지의 새 논에 황금빛 벼가 고개를 숙일 무렵, 보름달이 유난히 밝게 뜬 어느 날 밤이었습니다. 도깨비 김 서방이 그 어느 때보다 화려한 비단 도포를 차려입고 박첨지를 찾아왔습니다.
"형님, 오늘 밤은 일 년에 한 번뿐인 도깨비들의 큰 잔치가 열리는 날입니다. 여우고개 너머 깊은 계곡에서 팔도의 도깨비들이 다 모여 술 마시고 춤을 추는데, 제 의형제이신 형님을 특별히 귀빈으로 모시고자 합니다. 저희와 함께 가시지요!"
"허허, 도깨비 잔치라니 그것 참 구경하기 힘든 진풍경이겠구먼! 내 기꺼이 따라가겠네. 헌데 아우님, 내가 잔치에 빈손으로 갈 수는 없으니 술안주 삼아 메밀묵 한 시루를 지고 가도 되겠는가?"
"아이고, 형님께서 만드신 메밀묵을 가져가시면 팔도 도깨비들이 다 형님 발밑에 엎드려 절을 할 것입니다!"
박첨지는 메밀묵 시루를 지게에 얹고, 떠나기 전에 아내가 쓰던 낡은 무명 수건에 얼마 전 장터 푸줏간에서 얻어온 붉은 말피를 조금 묻혀서 주머니 깊숙이 챙겨 넣었습니다. 아무리 의형제를 맺었다 해도 도깨비들이 수백 마리나 모이는 자리에서는 술에 취해 무슨 해코지를 할지 모르니, 도깨비들이 세상에서 제일 무서워한다는 말피를 호신용으로 준비한 것이었습니다.
김 서방의 안내를 받아 깊은 산속 바위틈을 지나자, 놀랍게도 그 안에는 대낮처럼 환한 기와집 대궐이 서 있었고, 마당에는 수백 마리의 도깨비들이 모여 장구를 치고 춤을 추며 흥겨운 잔치를 벌이고 있었습니다. 김 서방이 박첨지를 상석으로 안내하며 외쳤습니다.
"모두 주목하라! 이분은 나와 씨름과 지혜 겨루기에서 모두 이기신 내 인간 형님 박 서방님이시다! 게다가 세상에서 제일 맛있는 메밀묵까지 가져오셨다!"
수백 마리의 도깨비들이 환호성을 지르며 박첨지에게 술잔을 올렸습니다. 이어서 잔치의 백미인 '보물 자랑 대회'가 시작되었습니다. 각지에서 모인 우두머리 도깨비들이 저마다 가진 신기한 물건들을 하나씩 꺼내 보였습니다. 어떤 도깨비는 쓰기만 하면 모습이 감쪽같이 사라지는 '도깨비감투'를 보여주었고, 어떤 도깨비는 신기만 하면 하루에 천 리를 달리는 '무쇠 짚신'을 자랑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여우고개의 우두머리인 김 서방이 품속에서 울퉁불퉁한 개암나무 방망이 하나를 꺼내 들었습니다.
"내 보물은 바로 이 도깨비방망이다! 이 방망이를 들고 원하는 것을 외치면 세상에 못 만들어내는 것이 없다! 금 나와라, 뚝딱! 은 나와라, 뚝딱!"
김 서방이 방망이를 허공에 두 번 내리치자, 놀랍게도 쨍그랑 소리와 함께 눈부신 황금 덩어리와 은 덩어리가 비 오듯 쏟아져 내렸습니다. 잔치 분위기는 절정에 달했고, 술에 만취한 도깨비들의 눈이 점점 시뻘겋게 충혈되기 시작했습니다.
그때, 남쪽 산에서 왔다는 성질 사나운 외뿔 도깨비가 술병을 깨뜨리며 박첨지를 향해 시비를 걸어왔습니다.
"야, 김 서방! 도깨비 잔치에 웬 냄새나는 인간 놈을 데려와 상석에 앉혔느냐! 나는 인간 고기 냄새만 맡아도 구역질이 난다! 저 인간을 당장 잡아다가 산비탈에 거꾸로 매달아 놓자!"
술에 취해 이성을 잃은 다른 도깨비들도 덩달아 웅성거리며 박첨지 주변으로 몰려들었습니다. 김 서방이 당황하여 말리려 했으나, 수백 마리의 취한 도깨비들을 당해낼 재간이 없었습니다. 위기를 직감한 박첨지는 조금도 당황하지 않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주머니에서 말피가 묻은 붉은 수건을 꺼내어 허공에 휘두르며 벽력같이 소리쳤습니다.
"이놈들! 내 정체를 알고도 감히 덤비는 것이냐! 나는 하늘의 천신께서 도깨비들을 다스리라고 내려보낸 어사 박 서방이다! 내 손에 들린 이 붉은 천마(天馬)의 피가 보이지 않느냐! 내 말피 한 방울이면 너희들의 혼백이 그 자리에서 재가 되어 사라질 것이다!"
박첨지가 비릿한 말피 냄새가 진동하는 붉은 수건을 흔들자, 기세등등하던 도깨비들은 마치 불에 덴 것처럼 기겁을 하며 뒤로 나자빠졌습니다.
"으아아악! 말피다! 도깨비 잡는 말피다! 살려라, 도망쳐라!"
그 많던 도깨비들이 보물이고 술상이고 다 내팽개친 채, 뿔이 빠지도록 소리를 지르며 사방의 숲속으로 뿔뿔이 도망쳐 버렸습니다. 눈 깜짝할 사이에 화려하던 기와집 대궐은 사라지고, 박첨지 앞에는 달빛 비치는 너럭바위 위만 덩그러니 남았습니다.
그런데 도깨비들이 혼비백산하여 도망친 바위 위를 살펴보니, 아까 김 서방이 자랑하던 그 울퉁불퉁한 개암나무 도깨비방망이와 도깨비감투가 그대로 굴러다니고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허허, 김 서방 아우에게는 조금 미안하게 되었지만, 그 사나운 외뿔 도깨비 놈 때문에 목숨을 잃을 뻔했으니 이 정도는 내 목숨값으로 챙겨가도 괜찮겠지!'
집으로 돌아온 박첨지는 방문을 걸어 잠그고 아내와 노모 앞에서 떨리는 손으로 방망이를 들어 올렸습니다.
"어머니, 여보. 평생 가난한 내 뒷바라지하느라 고생 많았소. 자, 보시오! 우리 가족 배불리 먹을 흰쌀밥과 비단옷 나와라, 뚝딱!"
"뚝딱!" 소리가 떨어지기 무섭게, 방 한가운데에 김이 모락모락 나는 고봉 흰쌀밥과 고깃국, 그리고 고운 비단옷이 산더미처럼 나타났습니다.
"이번에는 우리 어머니 따뜻한 온돌방에서 주무시게 기와집과 황금 열 냥 나와라, 뚝딱!"
순식간에 쓰러져가던 초가집이 으리으리한 아홉 칸 기와집으로 변했고, 방바닥에는 누런 황금 덩어리가 굴러다녔습니다. 그러나 본성이 착하고 검소한 박첨지는 딱 가족들이 굶지 않고 마을의 가난한 이웃들을 도울 만큼만 금은보화를 만들어낸 뒤, 방망이와 감투를 장롱 깊숙한 곳에 고이 넣어 두고 자물쇠를 채웠습니다. 과한 욕심은 반드시 화를 부른다는 세상의 이치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 5: 욕심쟁이 최 부자의 헛된 탐욕과 도깨비들의 통쾌한 복수
찢어지게 가난하던 화전민 박첨지가 하루아침에 기름진 논 열 마지기를 가진 것도 모자라, 아홉 칸 기와집을 짓고 동네의 굶주리는 사람들에게 쌀을 나누어 주는 큰 부자가 되었다는 소문은 온 고을에 자자하게 퍼졌습니다.
그러자 이 소식을 듣고 밤잠을 설치며 배가 아파 견디지 못하는 사람이 한 명 있었으니, 바로 아랫마을의 최고 부자이자 지독한 구두쇠로 악명 높은 최 부자였습니다. 최 부자는 곳간에 쌀이 썩어나가도 거지에게 찬밥 한 술 주지 않고, 소작농들의 고혈을 짜내어 재산을 불린 파렴치한 자였습니다.
'아니, 내 밑에서 품팔이나 하던 거지 같은 박첨지 놈이 무슨 수로 나보다 더 좋은 기와집을 짓고 산단 말이냐! 필시 산속에서 금광을 발견했거나 도둑질을 한 것이 분명하다! 내가 직접 가서 그 비밀을 캐내고 말겠다!'
최 부자는 박첨지의 집으로 찾아가 온갖 아첨과 협박을 섞어가며 어떻게 부자가 되었는지 꼬치꼬치 캐물었습니다. 마음씨 착한 박첨지는 최 부자의 탐욕스러운 성미를 알기에 처음에는 열심히 일해서 벌었다고 둘러댔으나, 최 부자가 관아에 고발하여 도둑으로 몰겠다고 생떼를 쓰자 결국 여우고개의 도깨비들과 있었던 일을 사실대로 털어놓고 말았습니다. 다만 말피로 도깨비를 쫓아낸 이야기와 방망이가 자신의 집에 있다는 사실만은 쏙 빼놓고, 도깨비들에게 메밀묵을 대접하고 씨름과 수수께끼를 하여 방망이를 선물 받았다고만 말해주었습니다.
이야기를 들은 최 부자는 두 눈이 황금빛으로 번쩍이며 무릎을 쳤습니다.
'옳거니! 미련한 도깨비 놈들을 메밀묵으로 꾀어 방망이만 뺏어 오면, 나는 조선 팔도에서 제일가는 거부가 될 수 있겠구나! 박첨지 같은 무식한 놈도 한 일을 글 깨나 읽은 내가 못 할쏘냐!'
집으로 돌아간 최 부자는 당장 하인들을 시켜 메밀묵을 쑤게 했습니다. 그런데 이 지독한 구두쇠는 도깨비에게 줄 메밀가루조차 아까워서, 메밀은 겨우 한 줌만 넣고 나머지는 떫은 도토리 가루와 톱밥, 그리고 진흙을 섞어 모양만 그럴듯한 가짜 메밀묵을 만들게 했습니다. 게다가 술도 좋은 탁주가 아니라 물에 식초를 탄 시큼한 구정물을 술병에 담아 지게에 얹었습니다.
비가 부슬부슬 내리는 그날 밤, 최 부자는 비단 도포를 입고 지게를 진 채 여우고개 마루로 올라갔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푸른 도깨비불이 일렁이더니, 지난번 박첨지의 말피에 놀라 도망쳤던 도깨비 김 서방과 외뿔 도깨비 등 수십 마리가 나타났습니다. 사실 도깨비들은 그날 밤 박첨지에게 속아 보물을 잃어버린 뒤로 인간이라면 이를 갈고 있던 참이었습니다.
"웬 놈이냐! 밤중에 도깨비 고개에 감히 발을 들이다니!"
도깨비 김 서방이 험상궂은 얼굴로 소리치자, 최 부자는 무서움에 다리가 후들거렸지만 방망이를 얻을 욕심에 거만하게 배를 내밀며 외쳤습니다.
"에헴! 나는 이 고을의 양반 최 부자다! 너희가 메밀묵에 환장하는 미련한 도깨비들이라지? 내가 너희에게 이 귀한 메밀묵과 술을 줄 터이니, 당장 금 나와라 뚝딱 하는 도깨비방망이를 내놓아라!"
최 부자가 지게에서 가짜 메밀묵과 식초 물을 내려놓자, 도깨비들은 냄새를 맡아보고는 미간을 찌푸렸습니다. 김 서방이 묵 한 조각을 집어 입에 넣었다가, 그 자리에서 "퉤!" 하고 뱉어내며 노발대발 소리쳤습니다.
"이, 이 괘씸한 놈! 어디서 톱밥과 진흙을 섞은 가짜 묵과 썩은 구정물을 가져와서 도깨비를 능멸하느냐! 우리 박 서방 형님은 참기름이 좌르르 흐르는 진짜 메밀묵에 꿀맛 같은 막걸리를 대접하며 우리를 아우님이라 극진히 대접했거늘, 네놈은 보아하니 말피로 우리를 속이고 방망이를 훔쳐 간 그 도둑놈의 한패가 분명하구나!"
"아, 아니! 나는 박첨지랑 한패가 아니라 방망이를 받으러..."
"시끄럽다! 얘들아, 저 욕심 사납고 버릇없는 영감탱이를 잡아다가 밤새도록 씨름을 시키고 똥구덩이에 굴려라!"
화가 머리끝까지 난 도깨비 수십 마리가 우르르 달려들어 최 부자의 비단 도포를 갈기갈기 찢어버렸습니다. 그리고는 최 부자를 공처럼 이리 던지고 저리 던지며 밤새도록 산비탈 가시덤불 속을 굴렸습니다.
"아이고, 사람 살려! 내 허리 부러진다! 잘못했습니다, 도깨비 나리들!"
최 부자가 피투성이가 되어 살려달라고 빌자, 외뿔 도깨비가 낄낄거리며 말했습니다.
"그리 방망이가 갖고 싶으냐? 좋다, 우리 땅속에 있는 도깨비방망이 맛을 실컷 보여주마! 얘들아, 이놈의 집으로 가자!"
도깨비들은 기절 직전의 최 부자를 들쳐 업고 그의 기와집으로 날아갔습니다. 그리고는 각자 손에 든 몽둥이를 휘두르며 외쳤습니다.
"욕심쟁이 최 부자네 금은보화는 다 똥덩어리로 변해라, 뚝딱! 기와집은 허물어져 개집이 되어라, 뚝딱!"
우르르 쾅쾅! 도깨비들의 방망이질 한 번에 최 부자가 평생 남의 피눈물을 짜내어 모았던 곳간의 황금과 쌀가마니들이 전부 구더기가 들끓는 마구간 거름 더미로 변해버렸고, 으리으리하던 아홉 칸 기와집은 폭삭 주저앉아 폐허가 되고 말았습니다. 날이 밝았을 때, 최 부자는 거름 더미 위에 알몸으로 앉아 정신을 잃고 실성한 사람처럼 "금 나와라, 뚝딱..." 하고 중얼거릴 뿐이었습니다.
※ 6: 세월이 흘러도 변치 않는 우정, 복을 나누는 도깨비 고개
최 부자가 도깨비들에게 혼쭐이 나서 하루아침에 패가망신했다는 소식을 들은 박첨지는, 그날 밤 정성껏 참메밀을 갈아 고소한 메밀묵을 세 시루나 쑤고 가장 좋은 청주를 빚어 마당에 상을 차렸습니다. 그리고 장롱 깊숙이 넣어 두었던 도깨비방망이와 도깨비감투를 상 위에 정중하게 올려놓았습니다.
자정이 가까워지자, 싸리문 밖에서 도깨비 김 서방과 졸개들이 어슬렁거리며 나타났습니다. 사실 도깨비들은 그날 잔칫집에서 박첨지가 말피를 휘두른 것 때문에 단단히 삐쳐 있었으나, 어젯밤 최 부자의 형편없는 가짜 묵을 맛본 뒤로 박첨지가 만들어주던 진짜 메밀묵의 고소한 맛이 사무치게 그리워 발길을 끊지 못하고 찾아온 것이었습니다.
박첨지는 문밖에서 눈치를 보고 있는 도깨비들을 향해 버선발로 달려 나가 손을 잡았습니다.
"아우님들! 그동안 얼마나 섭섭했는가! 그날 밤 잔치에서는 남쪽에서 온 외뿔 도깨비가 워낙 험악하게 굴어 내 목숨을 구하려고 부득이하게 꾀를 냈던 것일세. 아우님들을 해치려던 것이 절대 아니니 부디 노여움을 푸시게나. 그리고 여기 아우님이 잃어버렸던 방망이와 감투도 내가 손끝 하나 대지 않고 잘 보관해 두었으니 어서 거두어 가시게!"
박첨지가 진심으로 사과하며 천하의 보물인 도깨비방망이를 아무런 미련 없이 돌려주자, 도깨비 김 서방은 감동하여 시뻘건 눈시울을 붉혔습니다.
"아이고, 형님! 저희는 형님이 그 방망이를 욕심내어 일부러 저희를 쫓아낸 줄로만 알았습니다! 세상에 어느 인간이 금은보화가 나오는 이 귀한 방망이를 스스로 돌려준단 말입니까! 어젯밤 그 탐욕스러운 최 부자 놈과는 하늘과 땅 차이입니다그려! 형님, 저희가 소갈머리가 좁아 형님의 깊은 뜻을 몰라뵈었습니다!"
김 서방과 도깨비들은 상 앞에 둘러앉아 눈물 콧물을 흘리며 박첨지가 차려준 메밀묵과 청주를 남김없이 비웠습니다. 배를 든든히 채운 김 서방은 상 위에 놓인 도깨비방망이를 집어 들더니, 다시 박첨지의 두 손에 꼭 쥐여 주었습니다.
"형님, 이 방망이는 저희 같은 도깨비가 가지고 있으면 술자리에서 자랑거리나 될 뿐이지만, 형님처럼 어질고 욕심 없는 분이 가지고 계시면 수많은 사람을 살리는 복방망이가 됩니다. 이것은 아우가 형님께 드리는 영원한 우정의 증표이니, 사양 말고 받아주십시오. 대신 보름날 밤마다 이 맛있는 메밀묵 한 접시만 잊지 않고 내어주시면 됩니다!"
"아우님, 그 뜻이 정 그러하다면 내 이 방망이를 사사로운 욕심을 채우는 데 쓰지 않고, 우리 마을과 고을의 가난한 백성들을 돌보는 데만 귀하게 쓰겠네. 고맙네, 내 든든한 도깨비 아우님!"
그날 이후로 박첨지와 여우고개 도깨비들의 우정은 세월이 흘러도 변치 않고 깊어만 갔습니다. 박첨지는 도깨비방망이를 함부로 쓰지 않고, 오직 마을에 큰 가뭄이나 홍수가 들어 백성들이 굶주릴 때만 몰래 꺼내어 쌀과 곡식을 만들어 나누어 주었습니다. 심지어 최 부자가 패가망신하여 거지가 되었을 때도, 박첨지는 그를 외면하지 않고 작은 초가집 한 채와 농사지을 밭을 내어주며 스스로 땀 흘려 일하는 정직한 삶을 살도록 이끌어 주었습니다.
도깨비들 또한 박첨지의 마을을 자신들의 고향처럼 아끼며 밤마다 마을 어귀를 지켰습니다. 산짐승이나 도둑떼가 마을로 내려오려 하면 푸른 도깨비불을 번쩍이며 혼쭐을 내어 쫓아버렸고, 마을 사람들의 농사일이 바쁠 때면 밤사이 몰래 내려와 김을 매주고 물길을 터주곤 했습니다. 물론 이제는 박첨지에게 제대로 농사법을 배워서 자갈을 부어놓는 실수는 절대 하지 않았지요.
훗날 박첨지가 백발이 성성한 노인이 되어 천수를 다하고 세상을 떠났을 때, 장례식이 치러지던 날 밤 여우고개 능선에는 수백 개의 푸른 도깨비불이 줄지어 나타나 밤새도록 구슬픈 가락으로 노래를 부르며 의형제의 마지막 길을 배웅했다고 전해집니다. 그리고 도깨비방망이는 박첨지가 눈을 감던 날 밤, 연기처럼 스르르 사라져 다시 도깨비들의 품으로 돌아갔다고 합니다. 무섭기만 한 줄 알았던 도깨비와 따뜻한 마음씨를 가진 농부가 나누었던 이 유쾌하고도 정겨운 전설은, 욕심을 버리고 신의를 지키는 삶이 얼마나 큰 복을 불러오는지 오늘날 우리에게도 잔잔한 미소와 함께 깊은 교훈을 전해주고 있습니다.
유튜브 엔딩멘트:
오늘 함께 들어본 '만나서 반갑습니다, 도깨비님' 이야기, 재미있게 들으셨나요? 재치 넘치는 농부 박첨지와 어수룩하지만 의리 있는 도깨비 김 서방의 우정이 참으로 정겹고 미소를 짓게 만듭니다. 욕심을 부리지 않고 베풀 줄 아는 마음이야말로 진짜 황금을 불러오는 마법의 방망이가 아닐까 싶습니다. 오늘 이야기가 즐거우셨다면 '구독'과 '좋아요'를 꾹 눌러주시고, 주변 친구분들에게도 널리 공유해 주세요. 알람 설정을 해두시면 매일 업데이트되는 재미있는 옛날이야기를 가장 먼저 만나보실 수 있습니다. 여러분의 소중한 댓글도 잊지 말고 남겨주세요. 환절기에 늘 건강 챙기시고, 저는 다음 시간에 더욱 흥미진진한 전설 이야기로 찾아오겠습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