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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밤 빚 갚는 도깨비의 장부 《기이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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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킹멘트
건망증이 아주 심한 도깨비에게 돈을 빌려주면 과연 어떤 일이 벌어질까요? 빚을 갚았다는 사실을 까맣게 잊고 매일 밤 돈을 주러 오는 엉뚱한 도깨비와, 그 돈을 정직하게 돌려주는 착한 주모의 가슴 따뜻한 이야기! 하늘도 감동한 주모의 올곧은 심지는 과연 어떤 놀라운 기적을 불러왔을까요? 웃음과 감동이 가득한 신비로운 도깨비 야담, 지금 바로 시작합니다.
※ 1: 주막을 찾아온 거구의 낯선 사내
인적조차 드문 깊은 산골짜기, 아흔아홉 굽이를 넘어야만 간신히 다다를 수 있다는 험준한 고갯마루에는 작고 허름한 삼거리 주막이 하나 자리 잡고 있었다. 주막의 주인은 남편을 일찍 여의고 홀로 억척스럽게 살아가는 중년의 여인, 막순이었다. 비록 낡은 초가집에 비가 새고 가마솥에는 서리태 몇 줌 끓이는 것이 전부인 가난한 살림살이였지만, 막순의 심지 하나만큼은 그 어떤 양반네보다 올곧고 정직했다. 행여 술 취한 길손이 셈을 잘못하여 돈을 더 내고 가면, 기어이 고갯길을 쫓아 올라가 그 돈을 돌려주어야만 직성이 풀리는 여인이었다. 주변 사람들은 그런 그녀를 보며 답답하다 혀를 찼지만, 막순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는 떳떳한 삶만이 자신을 지키는 유일한 기둥이라 굳게 믿고 있었다.
어느 늦은 가을밤이었다. 낮부터 추적추적 내리던 비는 밤이 깊어지자 세상을 모두 집어삼킬 듯한 매서운 폭우로 돌변했다. 하늘에서는 금방이라도 산을 쪼갤 듯한 벼락이 내리쳤고, 거센 바람이 불 때마다 주막의 낡은 문풍지가 금방이라도 찢어질 듯 요란하게 울어댔다. 이런 궂은 날씨에 험한 고갯길을 오를 길손이 있을 리 만무했다. 막순은 아궁이에 남아있던 잔불을 쑤적거리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오늘 번 돈이라고는 낮에 지나가던 봇짐장수에게 막걸리 한 사발을 팔고 받은 엽전 두 닢이 전부였다. 다가올 기나긴 겨울을 날 생각에 가슴이 답답해진 그녀가 이내 체념한 듯 무거운 몸을 이끌고 주막의 문을 닫아걸려던 바로 그 찰나였다.
"이보시오, 주모! 안에 사람 있소!"
천둥소리만큼이나 굵고 우렁찬 사내의 목소리가 빗소리를 뚫고 들려왔다. 화들짝 놀란 막순이 문을 열자,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산만 한 덩치를 가진 거구의 사내가 비를 흠뻑 맞은 채 서 있었다. 낡고 해진 삿갓을 푹 눌러써서 얼굴은 제대로 보이지 않았지만, 다 해진 무명옷 사이로 드러난 팔뚝은 마치 오랜 세월 비바람을 견뎌낸 고목나무의 옹이처럼 단단하고 두꺼워 보였다. 사내의 몸에서는 짙은 흙냄새와 함께 알 수 없는 비릿한 물안개 냄새가 훅 끼쳐왔다. 두려움이 앞서긴 했지만, 처마 밑에서 비를 피하며 오들오들 떠는 길손을 매몰차게 내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아이고, 이 험한 밤에 어찌 고개를 넘으신단 말이오. 어서 안으로 드시지요. 날이 차니 따뜻한 국밥이라도 한 그릇 말아 드리리다."
사내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더니 주막 안으로 성큼성큼 걸어 들어왔다. 방 안을 가득 채우는 엄청난 기골에 막순은 내심 놀랐지만, 서둘러 가마솥에 불을 지피고 뜨끈한 시래기 국밥에 막걸리 한 사발을 듬뿍 담아 내어갔다. 사내는 며칠을 굶주린 호랑이처럼 허겁지겁 국밥을 들이켰다. 뚝배기 바닥이 뚫어질 듯 박박 긁어먹고는 막걸리마저 단숨에 비워낸 사내는, 그제야 살 것 같다는 듯 배를 두드리며 만족스러운 숨을 길게 내쉬었다. 그 기이할 정도로 엄청난 식성에 막순은 속으로 혀를 내두르고 있었다.
"크하, 주모의 손맛이 아주 기가 막히오! 뼛속까지 얼어붙었던 몸이 단숨에 녹아내리는구려. 그런데 주모, 내 참으로 면목이 없소만…."
사내가 갑자기 커다란 손으로 자신의 품 여기저기를 뒤적거리기 시작했다. 주머니를 샅샅이 훑어내려가던 사내의 굵은 목소리가 조금씩 기어들어가더니, 이내 삿갓 아래에서 난처한 기색이 역력한 헛기침이 새어 나왔다.
"이런 낭패가 있나. 급하게 밤길을 나서느라 엽전 꾸러미를 집에 두고 온 모양이오. 밥값을 치러야 하건만 수중에 가진 돈이 한 푼도 없구려. 내일 밤에 이 고개를 다시 넘을 일이 있으니, 그때 밥값을 두 배로 쳐서 가져다주면 안 되겠소?"
막순은 잠시 말문이 막혔다. 오늘 하루 종일 판 것이라곤 고작 막걸리 한 사발뿐인데, 이 사내에게 먹인 국밥과 술이 하루 벌이의 전부나 다름없었다. 평범한 주모였다면 당장 관아에 고발하겠다며 멱살이라도 잡았을 일이다. 하지만 막순은 사내의 삿갓 아래로 힐끗 보이는 맑고 순박한 눈동자를 보았다. 거짓말을 할 위인으로는 보이지 않았다. 가난한 길손의 처지를 누구보다 잘 아는 그녀였기에, 막순은 너그러운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소. 이 험한 빗길에 배까지 고팠으면 큰일 날 뻔하지 않았소. 밥값은 내일 주셔도 좋고 모레 주셔도 좋으니, 너무 괘념치 마시오. 그나저나 이 빗속에 어찌 길을 떠나려 하오? 여기서 몸이라도 좀 녹이고 가시구려."
"아니오. 내 오늘 밤 안으로 반드시 강을 건너가서 처리해야 할 급한 일이 있소이다. 그런데 주모, 참으로 염치없는 부탁인 줄은 알지만… 혹시 돈 서 돈만 빌려줄 수 있겠소? 강을 건너려면 사공에게 나룻배 삯을 치러야 하는데, 돈이 없으니 강을 건널 도리가 없구려. 내일 밤 밥값을 치르러 올 때, 이 돈 서 돈도 한 치의 어김없이 반드시 갚겠소이다."
밥값도 내지 못한 사내가 뱃삯까지 빌려달라니, 참으로 기가 막힐 노릇이었다. 돈 서 돈이면 막순에게는 일주일을 먹고살 수 있는 큰돈이었다. 하지만 사내의 절박한 목소리에서 묘한 진심을 느낀 막순은, 깊은 한숨을 한 번 내쉬고는 찬장 깊숙한 곳에 숨겨두었던 낡은 헝겊 주머니를 꺼내왔다. 그녀는 떨리는 손으로 귀한 엽전 서 돈을 세어 사내의 커다란 손바닥 위에 조심스럽게 올려놓았다.
"여기 있소. 급한 일이라니 어서 가보시구려. 빗길이 미끄러우니 발밑 조심하시고."
사내는 엽전 서 돈을 소중하게 꽉 움켜쥐더니, 감격에 겨운 목소리로 거듭 허리를 굽혀 인사했다.
"주모의 이 크나큰 은혜는 결코 잊지 않겠소. 내일 밤, 내일 밤에 반드시 돈을 갚으러 다시 오리다!"
사내는 그 말을 남긴 채, 폭우가 쏟아지는 칠흑 같은 산길 속으로 순식간에 사라졌다. 막순은 텅 빈 주막에 홀로 남아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과연 내일 저 사내가 돌아와 돈을 갚을지 알 수 없는 노릇이었지만, 그녀는 어려운 사람을 도왔다는 사실 하나에 위안을 삼으며 화로 앞의 차가운 자리에 몸을 뉘었다.
※ 2: 매일 밤 반복되는 빚 갚기
다음 날 밤, 거짓말처럼 하늘이 맑게 개고 둥근 보름달이 고갯마루를 환하게 비추고 있었다. 막순은 어제 그 거구의 사내가 남기고 간 약속을 반신반니하며 주막을 정리하고 있었다. '그 빗속에 강은 잘 건넸을까. 돈 서 돈이야 떼여도 그만이지만, 험한 산길에 산짐승이라도 만나지 않았으면 좋으련만.' 그녀가 아궁이의 재를 긁어내며 상념에 잠겨 있을 때였다.
"이보시오, 주모! 안에 있소?"
익숙하고도 우렁찬 목소리에 막순이 고개를 번쩍 들었다. 서둘러 밖으로 나가보니, 어제 비를 흠뻑 맞고 나타났던 바로 그 거구의 사내가 이번에는 멀끔한 차림으로 툇마루 앞에 서 있었다. 사내는 막순을 보자마자 덥석 허리를 굽히며 반갑게 인사를 건넸다.
"주모! 어제는 참으로 고마웠소이다. 주모가 빌려준 그 돈 서 돈 덕분에 무사히 강을 건너 급한 일을 잘 처리할 수 있었소. 자, 여기 어제 밀린 국밥값과 빌려 간 돈 서 돈이오. 한 푼도 어김없이 가져왔으니 확인해 보시구려."
사내는 묵직한 엽전 꾸러미를 막순의 손에 쥐여주었다. 찰그랑거리는 엽전의 무게감에 막순의 얼굴에 환한 화색이 돌았다. 사실 속으로는 절반쯤 포기하고 있던 돈이었기에, 잊지 않고 찾아와 약속을 지켜준 사내의 정직함이 그저 고맙고 기쁠 따름이었다.
"아이고, 잊지 않고 찾아와 주시어 내가 다 고맙소이다. 들어와서 시원한 막걸리라도 한 잔 걸치고 가시구려."
"아니오. 내 오늘은 바쁜 일이 있어 이만 가봐야겠소. 어젯밤의 은혜는 참으로 깊이 새기고 가겠소이다."
사내는 껄껄 호탕한 웃음을 터뜨리더니,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달빛이 비치는 산길을 따라 성큼성큼 걸어 내려갔다. 막순은 돈을 정직하게 갚고 간 길손의 뒷모습을 보며, 아직 세상은 살만한 곳이라 여기고 기분 좋게 잠자리에 들 수 있었다.
그런데 참으로 기이한 일은 바로 그다음 날 밤부터 벌어지기 시작했다. 해가 지고 주막에 짙은 어둠이 깔릴 무렵, 막순이 평상에 앉아 짚신을 삼고 있을 때 다시 한번 익숙한 발소리가 들려왔다. 어제 돈을 갚고 떠났던 그 거구의 사내였다. 사내는 어제와 똑같은 옷차림, 똑같은 표정으로 다가오더니, 다짜고짜 막순의 손에 엽전을 쥐여주었다.
"주모! 엊그제는 참으로 고마웠소. 주모가 빌려준 돈 서 돈 덕분에 무사히 강을 건너 급한 일을 처리할 수 있었소. 자, 여기 엊그제 밀린 국밥값과 빌려 간 돈 서 돈이오. 한 푼도 어김없이 가져왔으니 어서 거두어 가시오."
막순은 자신의 손에 쥐어진 엽전을 번갈아 보며 두 눈을 크게 떴다.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어제와 똑같은 말이었다. 그녀는 당황스러운 표정으로 사내를 올려다보았다.
"이보시오 길손, 이게 무슨 장난이오? 국밥값과 빌려 간 돈 서 돈은 어젯밤에 오셔서 이미 전부 갚지 않으셨소. 어찌하여 오늘 똑같은 돈을 또 주신단 말이오?"
막순의 말에 사내는 오히려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어허, 주모가 밤이 늦어 잠이 덜 깬 모양이구려. 내가 언제 돈을 갚았단 말이오? 나는 어제 강 건너 마을에서 볼일을 보느라 이 고개 근처에는 얼씬도 하지 못했소. 돈은 지금 처음 갚는 것이니, 어서 받아두시오. 나는 바빠서 이만 가봐야겠소이다."
사내는 막순이 돈을 돌려주려 손을 뻗기도 전에, 마치 축지법이라도 쓰듯 순식간에 어둠 속으로 스르륵 사라져 버렸다. 막순은 손에 쥐어진 차가운 엽전들을 바라보며 귀신이라도 홀린 듯 멍하니 서 있을 수밖에 없었다. 잘못 본 것이라 생각하기엔 손에 느껴지는 엽전의 감촉이 너무나도 생생했다. 혹시 자신이 어젯밤 꿈을 꾼 것인가 싶어 방 안의 돈궤를 열어보았지만, 어제 사내가 주고 간 엽전들이 분명히 그 안에 고스란히 들어있었다.
'참으로 기이한 노릇이로다. 돈을 갚았다는 사실을 어찌 저리 새카맣게 잊어버릴 수가 있단 말인가? 혹시 머리를 크게 다쳐 정신이 온전치 못한 불쌍한 사내인 것은 아닐까?'
하지만 사내의 기이한 행동은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사흘째 되는 밤에도, 나흘째 되는 밤에도 사내는 꼬박꼬박 같은 시간에 주막을 찾아왔다. 그리고는 늘 처음 돈을 갚는 사람처럼 똑같은 인사를 건네며 막순의 손에 엽전 서 돈과 국밥값을 쥐여주고는 홀연히 사라져 버리는 것이었다. 막순이 아무리 쫓아가며 "이미 갚으셨소!"라고 소리쳐도, 사내는 그저 빙그레 웃으며 "주모가 날짜를 착각한 모양이오."라는 말만 남긴 채 바람처럼 고개를 넘어갔다.
매일 밤 반복되는 기이한 일상에 막순은 등골이 오싹해지는 것을 느꼈다. 그녀는 문득 어릴 적 할머니 무릎을 베고 누워 듣던 옛이야기 하나를 떠올렸다.
'가만, 덩치가 산만 하고 힘이 장사인데 건망증이 지독하게 심한 존재라면… 혹시 그 사내, 숲속에 산다는 도깨비가 아니란 말인가? 도깨비는 돈을 빌려 가면 갚았다는 사실을 잊어버리고 매일 밤 돈을 갚으러 온다 하였지.'
생각이 거기에 미치자 막순은 두려움과 함께 깊은 고민에 빠지게 되었다. 사내가 진짜 도깨비라면, 매일 밤 찾아와 주는 이 돈은 찢어지게 가난한 그녀의 살림을 활짝 펴게 해 줄 엄청난 노다지나 다름없었다. 가만히 입을 다물고 돈을 받기만 하면, 올겨울에는 비 새는 지붕도 고치고 따뜻한 솜옷도 지어 입을 수 있을 터였다. 가난에 찌든 인간의 당연한 욕심이 그녀의 마음 한구석에서 조용히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 3: 흔들리는 마음과 올곧은 양심
닷새째 되는 밤, 달은 구름에 가려 보이지 않고 산바람만이 을씨년스럽게 불어오고 있었다. 막순은 방 한가운데 앉아, 지난 나흘 동안 거구의 사내가 매일 밤 두고 간 엽전 꾸러미들을 물끄러미 내려다보고 있었다. 찰그랑거리는 엽전 소리는 가난에 찌든 그녀의 귓가에 참으로 달콤한 유혹의 노래처럼 들려왔다. 당장 내일 끼니를 걱정해야 하는 궁핍한 처지에서, 이 돈이면 광에 쌀을 가득 채우고 땔감도 산더미처럼 쌓아둘 수 있었다. 그저 상대의 끔찍한 건망증을 모른 척 눈감아주기만 하면, 늙어 죽을 때까지 돈 걱정 없이 호의호식하며 살 수 있는 마법 같은 기회가 눈앞에 굴러들어온 것이다.
'사내가 도깨비이든 정신이 나간 길손이든 무슨 상관이람. 자기가 스스로 주겠다고 찾아와 내미는 돈인데, 내가 강도질을 한 것도 아니지 않은가. 하늘이 평생 고생만 한 나를 불쌍히 여겨 내려주신 복일지도 몰라.'
막순은 떨리는 손으로 엽전 꾸러미를 쓰다듬었다. 차가운 쇠붙이의 촉감이 손끝을 타고 전해지는 순간, 그녀의 뇌리에 남편이 세상을 떠나기 전 마지막으로 남겼던 유언이 벼락처럼 스치고 지나갔다.
"여보, 비록 우리가 평생 가난하게 살았지만, 남의 것을 탐하거나 양심을 속이는 짓은 결단코 하지 마시오. 부정한 재물은 당장은 달콤해도 결국 날카로운 칼이 되어 남은 인생을 갈기갈기 찢어놓는 법이라오. 가난해도 당당하게,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이 살아가시오."
남편의 그 다정하고도 뼈 있는 목소리가 귓가를 맴돌자, 막순은 화들짝 놀라 엽전에서 손을 뗐다. 그녀의 가슴이 거세게 방망이질 쳤다.
'그래, 아무리 가난이 죄라지만 어찌 남의 어리석음을 이용하여 내 배를 불린단 말인가. 갚은 돈을 또 갚는다는 것을 번연히 알면서도 입을 닦는 것은, 밤도둑이 남의 집 담장을 넘는 짓과 다를 바가 무엇이랴. 설령 저 사내가 진짜 요술을 부리는 도깨비라 할지라도, 나의 곧은 양심을 팔아넘길 수는 없다.'
깊은 갈등 끝에 막순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마음을 다잡은 그녀는 사내가 지난 나흘 동안 두고 갔던 엽전 꾸러미를 하나도 빠짐없이 모아 커다란 보자기에 정성껏 싸서 단단히 묶었다. 그리고는 옷매무새를 단정히 하고 툇마루에 앉아, 굳은 표정으로 어둠이 짙게 깔린 산길을 응시하며 사내가 나타나기만을 끈기 있게 기다렸다.
이윽고 자정이 가까워질 무렵, 익숙한 무거운 발소리와 함께 거구의 사내가 어김없이 주막의 마당으로 성큼성큼 걸어 들어왔다. 사내는 여전히 삿갓을 푹 눌러쓴 채, 사람 좋은 호탕한 웃음을 지으며 품속에서 짤랑거리는 엽전 꾸러미를 꺼내 들었다.
"주모, 밤이 늦었는데 아직 안 자고 있었구려! 지난번 빗속에 주모가 빌려준 돈 서 돈 덕분에 무사히 강을 건너 급한 일을 처리할 수 있었소. 자, 여기 밀린 국밥값과 빌려 간 돈 서 돈이오. 한 푼도 어김없이 가져왔으니 어서 받아 두시구려."
사내가 익숙하게 막순의 손을 끌어당겨 엽전을 쥐여주려 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막순이 강하게 사내의 손을 뿌리쳤다. 사내가 당황하여 눈을 끔벅이는 사이, 막순은 방 안에서 미리 싸 두었던 커다란 돈보따리를 들고나와 사내의 발앞에 쿵 소리가 나게 내려놓았다.
"이보시오 길손, 아니 이보시오 사내 양반! 이 돈을 똑똑히 보시구려. 이것이 당신이 지난 나흘 동안 매일 밤 찾아와 국밥값과 돈 서 돈이라며 똑같이 내밀고 간 돈들이오. 나는 이미 당신에게 빌려준 돈을 확실하게 다 돌려받았소이다. 그러니 제발 이 미련한 짓을 당장 멈추시오!"
막순의 불호령 같은 호통에 사내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억울하다는 듯 항변했다.
"어허, 주모가 진정 노망이 난 것이오? 이 보따리에 든 돈이 뉘 돈인지는 몰라도, 나는 오늘이 돈을 갚으러 온 첫날이란 말이오! 내가 갚아야 할 빚이 남았는데 어찌 그냥 돌아갈 수 있겠소. 어서 이 돈을 받으시라니까 그러오!"
사내가 고집을 피우며 다시 돈을 내밀자, 막순은 한 치의 흔들림도 없는 매서운 눈빛으로 사내의 눈을 똑바로 노려보며 단호하게 소리쳤다.
"하늘이 두 쪽 나도 안 될 말씀이오! 당신이 아무리 건망증이 심하여 기억을 못 한다 한들, 돈을 받은 내 두 눈이 똑똑히 기억하고 하늘이 내려다보고 있소이다! 나는 내 몫이 아닌 부정한 돈은 단 한 푼도 받을 수 없소. 내가 비록 가난하여 끼니를 거르는 날이 많을지언정, 거짓으로 배를 불리고 내 영혼을 좀먹게 내버려 둘 수는 없단 말이오! 어서 당신이 둔 이 돈 보따리를 모조리 챙겨서 당장 이 주막을 떠나시오! 이 시간 이후로 두 번 다시 이 돈을 들고 주막에 얼씬도 하지 마시오!"
막순의 추상같은 호통과 올곧은 기백이 텅 빈 삼거리 고갯마루를 쩌렁쩌렁 울렸다. 가난 앞에서도 결코 무릎 꿇지 않는 그녀의 찬란하고도 정직한 양심이,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보름달보다 더 밝고 환하게 빛나고 있었다. 사내는 막순의 그 기세에 눌린 듯, 들고 있던 엽전 꾸러미를 든 채 말문이 막혀 그 자리에 우뚝 서 있었다.
※ 4: 인간의 탐욕을 시험해 온 도깨비의 감동
추상같이 맵고도 단호한 막순의 호통이 고갯마루의 차가운 밤공기를 쩌렁쩌렁 가르며 울려 퍼졌다. 그 올곧은 기백에 눌린 것인지, 사내는 들고 있던 묵직한 엽전 꾸러미를 바닥에 떨어뜨릴 뻔하며 뒤로 두어 발자국 주춤 물러섰다. 평소 매일 밤 찾아올 때마다 호탕하게 껄껄거리며 여유를 부리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사내의 투박한 얼굴에는 짙은 당혹감과 함께 묘한 경이로움이 교차하며 스쳐 지나가고 있었다. 팽팽한 긴장감과 적막이 흐르는 가운데, 막순은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이 꼿꼿하게 서서 낡은 치맛자락을 꽉 움켜쥔 채 사내를 매섭게 노려보고 있었다. 그녀의 맑고 단단한 눈빛 속에는 가난한 주모가 부자 길손에게 보일 법한 비굴함 따위는 추호도 찾아볼 수 없는,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는 당당한 기개가 푸른 서슬처럼 서려 있었다.
이윽고, 숨 막히는 침묵을 깨고 사내의 태산같이 커다란 어깨가 미세하게 들썩이며 떨리기 시작했다. 깊숙이 눌러쓴 낡은 삿갓 아래에서 "크흐흐" 하는 억눌린 웃음소리가 조금씩 새어 나오더니, 그 소리는 점차 걷잡을 수 없이 커져 이내 온 산천의 나무들을 뒤흔들고 밤하늘의 구름마저 흩어버릴 듯한 엄청나고도 우렁찬 폭소로 변모했다.
"하하하하! 껄껄껄! 참으로 기가 막히고 놀랍도다! 세상 천지에 이런 진귀한 인간이 아직 남아있었을 줄이야!"
사내가 거친 손길로 푹 눌러쓰고 있던 낡은 삿갓을 훌렁 벗어 허공으로 휙 던져버렸다. 먹구름 사이로 희미하게 비쳐 내려오는 은빛 달빛 아래, 드디어 고스란히 드러난 사내의 얼굴은 결코 평범한 인간의 것이 아니었다. 부리부리하게 위로 찢어진 무서운 눈매, 이마 양옆으로 기이하고도 뭉툭하게 솟아오른 두 개의 뿔, 거친 고목나무 껍질처럼 짙고 투박한 피부, 그리고 밤의 요기(妖氣)를 가득 머금은 채 이글거리는 푸르스름한 안광까지. 막순이 어렴풋이 짐작했던 그 두려운 예감이 정확히 들어맞는 순간이었다. 이 엉뚱하고도 거구인 사내의 진짜 정체는, 다름 아닌 이 깊고 험준한 산골짜기를 천 년이 넘는 세월 동안 홀로 지배해 온 영험한 늙은 도깨비였던 것이다.
눈앞에서 전설 속 도깨비의 기괴한 형상을 직접 마주한 막순은 순간 눈앞이 아득해지며 다리에 힘이 풀려 털썩 주저앉을 뻔했다. 온몸의 솜털이 곤두서고 심장이 입 밖으로 튀어나올 듯 쿵쾅거렸지만, 그녀는 안간힘을 다해 부들부들 떨리는 다리를 붙잡고 주막의 낡은 나무 기둥에 몸을 기댄 채 악착같이 버텼다. 도깨비가 본모습을 드러낸 이상 살아서 이 험한 산을 내려가기는 틀렸다는 지독한 공포가 파도처럼 엄습해왔지만, 그녀는 애써 떨리는 목소리를 꾹꾹 눌러 감추며 오히려 턱을 치켜들고 더욱 당당하게 소리쳤다.
"네, 네 이놈! 네놈의 꿍꿍이가 수상하여 정체가 도깨비인 줄은 내 진작부터 어렴풋이 눈치채고 있었다! 정녕 인간의 간을 빼먹는 요괴라면 나를 당장 잡아먹거라! 허나 내 입에 들어갈 쌀 한 톨이 없어 굶어 죽는 한이 있더라도, 네놈이 요술로 만들어 내미는 그 요망하고 부정한 돈으로 내 더러운 명줄을 비굴하게 늘리지는 않을 테다!"
도깨비는 죽음의 공포 앞에서도 끝내 양심을 꺾지 않는 막순의 당당하고 눈부신 태도에 오히려 깊게 감명받은 듯, 푸른 안광을 부드럽게 반짝이며 툇마루 쪽으로 천천히 다가왔다. 그리고는 바닥에 놓인 무거운 돈보따리를 발끝으로 툭 차며 사람 좋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허허, 사람을 잡아먹다니, 그건 참으로 천부당만부당한 억측이자 섭섭한 말씀이오! 나는 인간의 비린 피나 썩은 고기 따위는 아예 입에 대지도 않는 고상한 영물이오. 이보시오 주모, 내 당신의 그 결연한 용기에 탄복하여 솔직히 고백하건대, 나는 애초부터 빚을 잊어버린 척 연기를 하며 당신의 마음속 깊은 곳을 슬쩍 떠보고 시험해 본 것이라오."
도깨비는 마치 오랜 지기를 대하듯 편안하게 너털웃음을 지으며 낡은 툇마루 끝자락에 털썩 걸터앉았다.
"내 이 깊고 고요한 산천에서 천 년이라는 억겁의 세월을 살며, 고개를 넘어가는 수만 가지의 인간 군상들을 지켜보았소이다. 겉으로는 고결한 척 공자맹자를 읊어대는 양반이건, 낫 놓고 기역 자도 모르는 상놈이건 간에, 번쩍이는 황금빛 돈 앞에서는 하나같이 눈이 뒤집혀 자기 핏줄도 서슴없이 팔아넘기고, 알량한 양심 따위는 미련 없이 시궁창에 팽개치는 그 추악하고 역겨운 꼴을 내 수도 없이 지켜보았지. 그래서 내 당신의 그 선한 미소가 진짜인지 궁금하여 매일 밤 돈을 가져와 슬쩍 시험해 본 것이오. 처음 한두 번이야 남의 눈을 의식해 돌려준다 쳐도, 나흘 닷새 돈이 눈앞에 산더미처럼 쌓여가면 필시 그 얄팍한 욕심에 눈이 멀어 침을 질질 흘리며 덥석 받아먹을 줄 알았지. 헌데… 주모, 당신은 참으로 달랐소. 천 년 만에 처음 보는 진짜 사람이었소."
도깨비의 형형한 푸른 눈동자에는 막순을 향한 깊은 경외심과 존경심마저 다스하게 서려 있었다.
"가난에 깊게 찌들어 당장 내일 아침 아궁이에 끓일 쌀 한 톨, 시래기 한 줌 없는 비참한 처지이면서도, 부정한 재물 앞에서 그토록 호랑이처럼 당당하게 호통을 치다니. 천 년을 살아오며 온갖 세상의 이치를 깨우쳤다 자부하던 나조차도, 주모의 그 티 없이 맑고 곧은 양심 앞에서는 부끄러움에 고개가 절로 숙여질 따름이오."
"시, 시험이었다고? 사람의 피 말리는 절박한 처지를 두고 어찌 영물이라는 자가 그리도 몹쓸 장난을 친단 말이냐!"
"허허, 부디 그 깊은 노여움을 거두어 푸시오. 인간의 본성이 워낙 하도 흉악하고 간사하여 나도 모르게 불신이 싹터 그리해 본 것일 뿐, 내 오늘 주모의 그 바위 같은 정직함에 영혼이 떨릴 만큼 크게 감동하였소이다. 주모의 그 올곧은 심지와 빛나는 양심은 분명 하늘이 내리는 거대한 복을 받아 마땅한 훌륭한 그릇이오. 내 무례했던 시험에 대한 사죄와 그 빛나는 정직함에 대한 보답으로, 오늘 주모에게 세상 그 어떤 금은보화보다 귀하고 진귀한 선물을 하나 드리고 가겠소."
도깨비는 자신의 허리춤에 차고 있던 낡고 해진 전대 속을 한참 동안 쩍쩍 뒤지더니, 누렇게 바래고 겉면에 좀이 슬어 볼품없는 아주 낡은 서책 하나를 꺼내어 막순의 떨리는 손에 조심스럽게 쥐여주었다. 겉보기엔 그저 시골 주막이나 푸줏간에서 흔히 쓰는 때 묻은 외상 장부 같았지만, 신기하게도 그 낡은 책에서는 설명할 수 없는 묘하고도 따뜻한 기운이 은은하게 뿜어져 나와 막순의 얼어붙은 손끝을 부드럽게 데워주고 있었다.
"선물이라니? 도대체 이 낡아빠지고 먼지 나는 장부가 무슨 선물이란 말이오?"
"허허, 눈에 보이는 겉모습만 보고 섣불리 그 가치를 판단하지 마시오. 이 낡은 장부로 말할 것 같으면, 우리 도깨비들이 천 년 동안 맑은 산의 정기와 보은의 기운을 듬뿍 불어넣어 만든 아주 신묘하고도 위대한 물건이외다. 이 장부의 쓰임새를 내 똑똑히 일러줄 터이니 귀를 열고 잘 들으시오. 이 장부의 텅 빈 첫 장에, 주모가 평소 아는 이들 중에 누군가의 이름을 붓으로 정성껏 적어보시오. 그러면 그 사람이 천 리 밖에 있든 만 리 밖에 있든, 마치 보이지 않는 끈에 끌리듯 주모의 이 주막을 찾지 않고는 배기지 못하게 될 것이오. 그리고 이곳에 발을 들인 자는 필시 큰 행운을 얻게 되지요. 단, 명심해야 할 것이 하나 있소. 절대로 남을 해치는 악인이나, 자기 배만 불리려는 욕심 많은 탐관오리의 이름은 단 한 자도 적지 마시오. 오직 가난하지만 마음이 선하고 정직하게 살아가는 자들의 이름만 엄선하여 적어 내린다면, 이 낡은 주막은 평생토록 세상에 맑은 기운과 축복을 나누어주는 천하의 명소가 될 것이오. 자, 그럼 내 약속은 지켰으니 이만 물러가겠소!"
도깨비는 의미심장하고도 개구쟁이 같은 윙크를 한 번 찡긋 던지더니, 산이 떠나갈 듯 껄껄 웃으며 제자리에서 빙글빙글 돌기 시작했다. 이내 거대한 돌개바람이 흙먼지를 일으키며 몰아치더니, 사내의 거대한 형체는 한 줌의 안개처럼 순식간에 자취를 감추어버렸다. 어리둥절한 채 홀로 남겨진 막순의 손에는, 도깨비가 남기고 간 낡고 신비로운 장부 한 권만이 달빛을 받아 은은하게 빛나며 덩그러니 남겨져 있었다.
※ 5: 낡은 장부에 깃든 신비한 도술
다음 날 아침, 산새들이 지저귀는 맑은 소리에 눈을 뜬 막순은 자리에서 일어나자마자 자신의 머리맡에 조심스럽게 놓인 낡은 장부를 서둘러 집어 들었다. 어젯밤 거구의 도깨비와 마주하고 호통을 치며 선물을 받았던 그 모든 일련의 사건들이 마치 한여름 밤의 헛된 꿈처럼 비현실적으로 느껴졌지만, 손끝에 생생하게 닿는 누런 한지의 거친 감촉과 오래된 소나무의 향기, 그리고 묵은 먹물 냄새가 섞인 장부의 존재감은 그 모든 것이 명백한 현실이었음을 묵묵히 증명해주고 있었다. 막순은 침을 꼴깍 삼키며 낡은 장부의 두꺼운 표지를 조심스럽게 넘겨보았다. 누렇게 빛바랜 한지로 된 속지는 단 한 글자의 흔적도 없이 그저 하얗고 깨끗하게 텅 비어있었다.
'이곳에 그저 누군가의 이름 석 자를 붓으로 적어 넣기만 하면, 그 사람이 홀린 듯 이 험한 산길을 지나 내 주막을 찾아온다고? 그리고 행운을 얻게 된다고? 그런 말도 안 되는 요술 같은 일이 정말로 세상에 일어날 수 있단 말인가?'
막순은 여전히 반신반의하는 마음이었지만, 도깨비의 그 진지하고도 따뜻했던 눈빛을 떠올리며 호기심 반 의심 반으로 서랍장 구석에서 벼루를 꺼내 정성스레 먹을 갈고 낡은 붓을 집어 들었다. 그리고는 눈을 감고 잠시 깊은 고민에 빠졌다.
'누구의 이름을 먼저 적어볼까. 도깨비가 당부하기를 악인이나 탐욕스러운 자는 절대 안 된다 하였지. 그렇다면… 그래, 아랫마을 장 서방이 좋겠구나.'
장 서방은 막순의 주막에서 십 리나 떨어진 아랫마을에 사는 아주 평범하고 성실한 봇짐장수였다. 늙고 병든 홀어머니를 모시기 위해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이 마을 저 마을을 돌아다니며 등짐을 파는 사내로, 비록 가난하여 옷차림은 남루할지라도 성품이 비단결처럼 착하고 늘 실없이 사람 좋은 웃음을 짓고 다니는 이웃이었다. 요즈음 흉년이 들어 장사가 통 안되어 끼니조차 잇기 힘들다는 딱한 소문을 며칠 전에 건너들은 터였다. 막순은 부디 그 가엾은 장 서방에게 좋은 일이 생기기를 바라는 간절한 마음을 담아, 붓끝에 먹물을 듬뿍 묻혀 장부의 첫 장 한가운데에 '아랫마을 장 서방'이라고 정성껏 써 내려갔다. 이름을 다 적은 후, 그녀는 평소와 다름없이 아궁이에 마른장작을 넣고 불을 지피며 푹 삶은 시래기와 구수한 된장을 풀어 가마솥 가득 국밥을 끓일 준비를 했다. 산바람은 여전히 찼지만 솥에서 피어오르는 하얀 김이 주막을 따뜻하게 덥히고 있었다.
그런데 그날 해가 중천에 떠올라 정오를 지날 무렵, 참으로 기이하고도 놀라운 일이 막순의 눈앞에 벌어지기 시작했다. 저 멀리 아흔아홉 굽이 고갯길 아래에서, 누군가 거친 숨을 헐떡이며 주막을 향해 미친 듯이 뛰어 올라오고 있는 것이 아닌가. 땀범벅이 된 채 비틀거리며 툇마루에 털썩 주저앉은 사내는, 놀랍게도 막순이 아침나절 장부에 이름을 적어 넣었던 바로 그 아랫마을 장 서방이었다! 짚신은 다 해져 있었고, 등에 멘 봇짐은 금방이라도 흘러내릴 듯 위태로워 보였다.
"아이고 주모! 국밥, 뜨끈한 시래기 국밥 한 그릇 빨리 좀 내어주시오! 내가 지금 숨이 턱 끝까지 차올라 아주 죽을 지경이오!"
막순은 솥을 젓던 주걱을 떨어뜨릴 뻔하며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아니, 장 서방! 장 서방이 웬일로 이 대낮에 이 험한 고개까지 뛰어 올라오셨소? 이쪽으로는 장 보러 가는 길도 아닐 텐데, 무슨 큰일이라도 난 것이오?"
장 서방은 막순이 허둥지둥 내어준 시원한 우물물을 두 사발이나 연거푸 벌컥벌컥 들이켜고는, 거친 숨을 고르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하아… 내 참 귀신이 곡할 노릇이오! 오늘 아침 일찍 건갯마을 장터로 봇짐을 팔러 집을 나서려는데, 갑자기 머릿속에서 주모네 그 구수한 시래기 국밥 냄새가 진동을 하며 너무너무 먹고 싶지 뭡니까! 머릿속에 온통 국밥 생각만 꽉 들어차서 다른 일은 도무지 손에 잡히지도 않고, 침이 꼴깍꼴깍 넘어가 미치겠는 거요. 발길을 돌리려 해도 나도 모르게 내 두 다리가 저절로 이 고개 쪽을 향해 마구 뛰어오지 않겠소! 어서 밥이나 한술 고봉으로 퍼주시오, 배가 고파 환장하겠소이다!"
막순은 입을 떡 벌린 채 말문을 잃었다. 도깨비가 남긴 말은 단 한 글자도 틀린 것이 없었다. 낡은 장부에 이름을 적자마자 정말로 장 서방이 무엇인가에 홀린 듯 십 리 길을 단숨에 달려 주막을 찾아온 것이다. 막순은 콩닥거리는 가슴을 진정시키며 서둘러 가마솥에서 펄펄 끓는 뜨끈한 시래기 국밥을 뚝배기가 넘치도록 푸짐하게 말아 장 서방 앞에 내어갔다. 그런데 마법 장부의 진정한 기적은 고작 사람을 불러 모으는 것에서 끝이 아니었다.
장 서방이 김치를 얹어 국밥을 반쯤 게눈 감추듯 비워내고 있을 때, 주막 앞마당으로 또 다른 기이한 인연의 발소리가 들려왔다.
"이리 오너라! 안에 아무도 없느냐! 목이 타니 시원한 탁주 한 사발 내어오너라!"
화려한 비단옷을 차려입고 땀을 닦으며 들어선 중년의 사내는, 바로 장 서방의 봇짐 속에 든 질 좋은 삼베와 비단을 대량으로 구하러 멀리 온양에서부터 수소문하며 올라온 큰 상단의 돈 많은 대행수였다. 상인은 우연히 길을 잃고 헤매다 구수한 된장 냄새에 이끌려 이 외딴 주막까지 올라오게 되었노라 투덜거렸다. 하지만 툇마루에 앉아 땀을 식히던 상인은 옆에서 국밥을 먹던 장 서방의 봇짐 사이로 삐져나온 삼베의 곱고 촘촘한 결을 우연히 발견하고는 두 눈을 번쩍 빛냈다.
"아니, 이보시오 길손! 그 봇짐에 든 삼베, 어디서 난 것이오? 내 평생 이토록 올이 곱고 질긴 삼베는 처음 보오!"
"아, 이것 말씀이십니까? 제 병든 노모께서 밤낮으로 베틀을 돌려 직접 짜신 훌륭한 물건입지요."
상인은 장 서방이 가진 물건의 가치를 한눈에 알아보고는, 그 자리에서 자신이 가진 막대한 자금을 풀어 장 서방이 가진 모든 물건을 시세의 세 배나 쳐서 몽땅 사들이겠다고 제안했다. 뿐만 아니라 앞으로 홀어머니가 짜내는 모든 삼베를 자신의 상단에서 독점하여 사들이겠다는 파격적인 장기 계약까지 맺어버렸다.
순식간에 벼락부자가 된 장 서방은 펄쩍펄쩍 뛰며 덩실덩실 춤을 추었고, 너무 기쁜 나머지 막순에게 다가와 평소 국밥값의 열 배가 넘는 묵직한 은전 몇 닢을 손에 쥐여주었다.
"주모! 오늘 내가 주모네 주막에 오지 않았으면 내 평생 이 엄청난 귀인을 뵙지 못하고 땅을 치며 후회할 뻔했소! 이 낡은 주막이 참으로 기가 막힌 명당 중의 명당이구려! 어머니 약값을 벌었으니 내 평생 이 은혜는 잊지 않겠소!"
장 서방이 콧노래를 부르며 춤을 추듯 산을 내려간 후, 막순은 방으로 들어가 덜덜 떨리는 손으로 아침에 썼던 장부를 다시 조심스레 펼쳐보았다. 그런데 놀랍게도, 장 서방의 이름 바로 옆 여백에 붉은색 먹물로 그린 듯한 작고 예쁜 동그라미 표식이 마치 살아 숨 쉬는 꽃망울처럼 새겨져 영롱하게 빛나고 있었다. 선하고 부지런한 이에게 좋은 인연을 맺어주고 엄청난 기운을 나누어주는, 진정한 의미의 '마법의 장부'의 능력을 두 눈으로 직접 확인한 것이다.
막순은 그 신비로운 장부를 품에 꽉 끌어안으며, 자신이 손에 쥔 이 엄청난 물건의 무게와 책임을 가슴 깊이 깨달았다. 그녀는 하늘을 우러러 맹세했다. 결코 자신의 사리사욕을 채우기 위해 이 장부를 쓰지 않겠노라고. 땀 흘려 정직하게 일하지만 세상의 빛을 보지 못하는 가엾은 이웃들을 위해서만 이 기적을 베풀겠노라고 굳게 다짐했다.
그날부터 막순은 도깨비의 당부대로, 평소 알고 지내던 착하고 성실한 이웃들의 이름을 매일 아침 해가 뜰 때마다 장부에 하루 한 명씩 조심스레 적기 시작했다. 눈먼 홀어머니를 지극정성으로 모시지만 끼니를 거르는 아랫마을 김 과부, 가난하여 산을 타면서도 늘 다친 이웃에게 약초를 나누어주는 심마니 최 영감, 억울한 누명을 쓰고 쫓겨난 젊은 서생 등등. 그녀가 낡은 장부에 정성껏 이름을 적어 내릴 때마다 신기하게도 그들은 무엇에 홀린 듯 앞다투어 주막을 찾아왔고, 주막의 툇마루에서 밥을 먹으며 쉬어가는 동안 마치 하늘이 미리 짜놓은 각본처럼 귀인을 만나거나, 잃어버렸던 재물을 찾고 억울함을 푸는 등 기분 좋은 소식들을 연이어 얻게 되었다.
이 놀라운 기적들은 발 없는 말이 되어 삽시간에 고을 전체를 넘어 이웃 고을들까지 널리 퍼져나갔다.
"이보게, 자네 그 소문 들었는가? 저 험한 고갯마루 막순이네 주막에 가서 뜨끈한 시래기 국밥 한 그릇만 뚝딱 비워내면, 십 년 묵은 체증이 내려가듯 막혔던 운수가 대통하고 무조건 좋은 일이 생긴다더라!"
"암, 듣고말고! 그 주모가 평소에 가난해도 남의 것 탐하지 않고 어찌나 정직하고 바르게 살았던지, 하늘이 크게 감동하여 그 주막 터에 벼락같은 복을 내린 것이 틀림없어!"
※ 6: 복을 나누며 살아가는 주막집
기적 같은 소문이 팔도강산에 퍼져나가며 몇 달의 시간이 눈 깜짝할 사이에 흐르자, 인적조차 드물어 파리만 날리며 겨우 연명하던 낡은 고갯마루 주막은 이제 매일같이 발 디딜 틈조차 없이 문전성시를 이루는 천하의 명소가 되었다. 전국 각지에서 맑고 좋은 기운을 얻으려는 착하고 부지런한 길손들이 꿀벌처럼 구름 떼를 이루어 몰려들었고, 막순의 주막 앞마당은 늘 사람들의 활기찬 웃음소리와 정겨운 이야기꽃으로 가득 차서 밤이 깊도록 불이 꺼질 줄을 몰랐다.
주막이 문이 부서질 정도로 번창하자 막순의 살림살이도 몰라보게, 눈에 띄게 윤택해졌다. 비가 오면 양동이를 받쳐야 했던 낡은 초가지붕을 걷어내고 기와장들이 반듯한 번듯한 기와지붕을 넓게 올렸으며, 비좁고 질퍽거리던 마당도 널찍하게 확장하여 커다란 평상들을 수십 개나 놓아 험한 길을 걷는 더 많은 손님이 편히 누워 쉬어갈 수 있게 만들었다. 곳간에는 사시사철 쌀과 땔감이 산더미처럼 쌓여갔고, 장롱 속에는 엽전과 은전이 마를 날이 없었다.
하지만 재물이 산더미처럼 쌓이고 억만장자가 부럽지 않을 만큼 큰돈을 벌었음에도 불구하고, 막순의 곧은 마음가짐과 생활 태도는 예전 찢어지게 가난했던 시절과 비교하여 단 한 치도,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다. 그녀는 여전히 소박하고 낡은 무명치마를 두른 채 직접 가마솥 앞을 지키며 땀을 흘렸고, 돈을 버는 족족 고아들을 위한 구휼소를 짓거나 병든 노인들에게 귀한 약재를 사서 아낌없이 나누어 주었다. 한겨울 짚신도 없이 맨발로 고개를 넘는 가난한 길손들에게는 튼튼한 솜신을 내어주었고, 배가 고파 칭얼거리는 어린아이들에게는 국밥값을 한 푼도 받지 않고 고기반찬까지 듬뿍 얹어 배불리 먹여 보냈다. 돈에 눈이 멀어 마법의 장부를 악용하기는커녕, 막순은 그 장부가 불러온 재물을 세상 가장 어두운 곳을 밝히는 등불로 기꺼이 태우고 있었다.
어느덧 혹독한 추위가 몰아치는 한겨울, 온 세상이 하얗게 얼어붙은 섣달그믐 밤이 찾아왔다. 매서운 눈보라가 아흔아홉 굽이 고갯길을 온통 하얗게 뒤덮고, 칼바람이 문풍지를 날카롭게 때리고 있었다. 손님들을 모두 따뜻한 아랫목에 재운 뒤, 장사를 마친 막순이 홀로 안방에 앉아 화로의 따뜻한 불기운을 쬐며 도깨비가 주었던 낡은 장부를 부드러운 수건으로 정성껏 닦아내고 있을 때였다.
'툭, 투둑.'
바람 소리 사이로, 굳게 닫힌 창호지 문을 밖에서 가볍게 두드리는 둔탁한 소리가 났다. 막순이 화들짝 놀라 문을 열어보니, 차가운 달빛이 비치는 마당에는 하얀 눈길 위에 일반 사람의 것보다 세 배는 큼지막한 거대한 짚신 자국만이 깊게 푹 찍혀 있을 뿐, 주위에는 그 어떤 사람의 형체도 보이지 않았다. 대신 눈보라가 치는 툇마루 위에는, 붉은 최고급 비단 천으로 아주 곱고 정성스럽게 싸인 수레바퀴만 한 커다란 황금빛 호박 한 덩이가 얌전하고 탐스럽게 놓여 있었다.
호박의 겉면에서는 어젯밤 도깨비의 눈빛에서 보았던 그 맑고 푸르스름한 안광 같은 신비로운 빛이 은은하게 감돌고 있었다. 누가 보아도 천 년 묵은 늙은 도깨비가 다녀간 흔적이 분명했다. 막순은 툇마루로 나가 차가운 바람을 맞으면서도, 그 커다란 호박을 품에 소중히 꽉 끌어안으며 밤하늘을 향해 아주 깊고 따뜻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도깨비 양반이 이 추운 섣달그믐 밤에 잊지 않고 또 다녀가셨구려. 내게 주신 장부 하나만으로도 평생을 베풀며 살아도 넘칠 복을 받았거늘, 매번 이리 고마운 마음을 쏟아주시니 내 이 큰 은혜를 훗날 어찌 다 갚을꼬."
막순은 도깨비가 남기고 간 발자국을 향해 정중히 허리를 굽혀 깊은 감사의 인사를 올렸다. 겉보기엔 그저 커다란 호박이었지만, 막순은 알고 있었다. 그 호박 속에는 필시 다가올 매서운 겨울 동안 이 주막을 찾아오는 가난한 손님들의 허기진 배를 든든하게 채워주고도 남을, 마르지 않는 진귀하고 신비로운 곡식의 씨앗들이 가득 찬란하게 들어있을 터였다. 인간의 얄팍한 탐욕을 비웃던 천 년 묵은 도깨비마저 깊게 감동시키고 영원한 수호신으로 만들어버린 그녀의 굳건하고 곧은 양심은, 비 새고 허름했던 낡은 고갯마루 주막을 세상에서 가장 따뜻하고 행복이 넘치는 기적의 공간으로 완벽하게 탈바꿈시켜 낸 것이다.
가난의 지독한 유혹과 죽음의 공포 앞에서도 결코 무릎 꿇거나 흔들리지 않고 스스로의 맑은 영혼을 지켜낸 정직하고 용기 있는 주모, 막순. 그녀의 고결한 이야기는 그 후로도 오랫동안 사람들의 입에서 입으로 거듭 전해지며, 돈의 노예가 되어 팍팍하고 각박한 세상을 살아가는 수많은 이들의 메마른 가슴에 묵직한 깨달음과 따뜻한 위로를 전해주는 아름다운 전설로 남게 되었다. 혹독한 추위가 몰아치는 깊은 겨울밤, 고갯마루의 번듯한 기와지붕 주막에서는 오늘 밤에도 구수한 시래기 국밥 냄새와 함께, 험한 세상을 버텨내는 정겨운 사람들의 따뜻한 웃음소리가 눈보라를 녹이며 굴뚝 위로 모락모락 피어오르고 있었다.
유튜브 엔딩멘트
매일 밤 돈을 갚으러 오는 엉뚱한 도깨비, 그리고 그 유혹 앞에서도 한 치의 흔들림 없이 정직함을 지켜낸 주모의 이야기! 눈앞의 작은 이익을 쫓기보다 스스로에게 떳떳한 길을 선택한 주모의 곧은 심지가 결국 가장 큰 복으로 돌아왔네요. 여러분도 오늘 하루, 낡은 주막의 따뜻한 국밥 한 그릇처럼 정직하고 훈훈한 마음으로 주변을 채워보시는 건 어떨까요? 이야기가 즐거우셨다면 구독과 좋아요 꾹 눌러주시고, 다음에도 재미있는 「도깨비 야담」으로 찾아뵙겠습니다. 시청해 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