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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밀묵 한 그릇에 홀린 도깨비, 그 집 부엌에 밤새 나른 재물 [용재총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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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킹멘트:
깊고 깊은 산골 낡은 오두막, 매서운 겨울밤 추위를 달래려 부부가 쑨 뜨끈한 메밀묵 냄새를 맡고 불청객이 찾아옵니다. "어허, 그 묵 냄새 한번 기가 막히게 구수하구먼!" 덩치만 컸지 어딘가 친근한 도깨비에게 정성껏 묵 한 그릇을 내어준 부부. 다음 날 아침, 부엌 문을 열어본 부부는 그만 털썩 주저앉고 마는데… 과연 그날 밤 부엌엔 무슨 일이 일어난 걸까요? 메밀묵 한 그릇이 불러온 기상천외한 도깨비의 보은, 지금 시작합니다!
※ 1: 한겨울 밤의 불청객, 구수한 묵 냄새를 맡고 온 도깨비
세상을 온통 하얗게 뒤덮을 기세로 매서운 눈보라가 휘몰아치는 한겨울의 깊은 밤이었다. 첩첩산중 인적조차 드문 외딴 골짜기,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 낡고 허름한 오두막집 한 채가 거센 칼바람을 온몸으로 맞으며 위태롭게 서 있었다. 문풍지는 바람이 불 때마다 귀신이 우는 듯한 스산한 소리를 내며 사정없이 떨려댔고, 엉성하게 엮은 지붕 틈새로는 차가운 눈발이 끊임없이 스며들어 방 안의 공기를 얼어붙게 만들었다. 방 안에는 기름이 다 떨어져 가는 작은 호롱불 하나만이 가물가물 타오르며 아슬아슬하게 어둠을 밀어내고 있었지만, 그 작은 불빛조차 살을 에이는 듯한 추위를 막아주기에는 턱없이 부족했다. 부엌과 맞닿은 좁은 방구석에서 남편은 다 해진 이불을 무릎에 덮은 채, 꽁꽁 얼어붙어 붉게 튼 손을 호호 불어가며 낡은 짚신을 삼고 있었다. 그의 곁에서는 아내가 며칠 전 산 밑 장터에 나가 남의 집 허드렛일을 거들어주고 간신히 얻어온 귀한 메밀가루를 조심스레 물에 개고 있었다.
가난한 살림살이에 변변한 저녁거리조차 없어 벌써 며칠째 주린 배를 움켜쥐어야 했던 부부에게, 이 메밀가루 한 줌은 기나긴 겨울밤을 버티게 해 줄 생명줄과도 같은 귀한 식량이었다. 아내는 언 손끝이 갈라져 피가 배어 나오는 것도 모른 채, 나무 주걱을 들고 묵을 쑬 준비를 서둘렀다. 아궁이에 남은 마른 장작 몇 개를 조심스레 밀어 넣고 불을 지피자, 매캐한 연기와 함께 타닥타닥 나무 타는 소리가 나며 이내 가마솥이 따뜻하게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장작불의 온기가 비좁은 부엌과 방 안으로 서서히 퍼져나가자, 부부는 그제야 얼었던 몸을 조금이나마 녹이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가마솥 안의 물이 끓어오르기 시작하자 아내는 정성스레 개어둔 메밀물을 천천히 부어 넣으며, 바닥에 눌어붙지 않도록 일정한 속도로 주걱을 젓기 시작했다. 이윽고 보글보글 끓는 소리와 함께 구수하고 달큼한 메밀묵 냄새가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하얀 김을 타고 낡은 오두막 안을 가득 채우기 시작했다.
"여보, 냄새가 참으로 기가 막히게 구수하지요? 오늘따라 가루가 고와서 그런지 묵이 아주 찰지고 윤기 나게 잘 쑤어지고 있구려. 시장하실 텐데 조금만 참으시구려. 금방 한 그릇 듬뿍 퍼서 간장 양념을 곁들여 내어 드릴 테니, 우리 뜨끈할 때 배불리 먹어봅시다."
아내의 다정하고 따뜻한 말에 남편은 짚신을 엮던 손을 멈추고 주름진 얼굴에 환하고 부드러운 미소를 띠며 대답했다.
"허허, 당신이 그토록 정성으로 쑤어주는 묵인데 세상 그 어떤 음식이 이보다 맛있겠소. 밖은 저리도 눈보라가 무섭게 치고 매서운 칼바람이 부는데, 비록 비좁고 누추한 방구석일지라도 당신과 함께 마주 앉아 뜨끈한 메밀묵을 나누어 먹을 수 있으니, 나는 지금 이 세상 그 어떤 정승 판서의 화려한 잔칫상도 부럽지 않소이다. 당신이야말로 굶주리고 지친 내게는 하늘이 내려주신 가장 큰 복이요."
'이리도 착하고 고운 사람을 만나 평생 고생만 시키는 못난 사내로구나. 가여운 내 아내... 내년 봄이 오면 기필코 산 너머 마을까지 내려가 품삯을 넉넉히 받아, 당신의 언 몸을 녹여줄 따뜻하고 고운 솜옷이라도 한 벌 지어주어야 할 터인데. 미안하오, 참으로 미안하오.'
남편은 속으로 아내에 대한 깊은 미안함과 애틋한 고마움을 애써 삼키며, 눈물이 핑 도는 것을 감추려 고개를 숙인 채 아궁이 쪽으로 마른 삭정이 하나를 더 밀어 넣었다. 가마솥 안에서 투덕투덕 경쾌한 소리를 내며 끓어오르던 메밀묵이 알맞게 뜸이 들며 완벽한 자태를 뽐낼 무렵, 갑자기 문밖에서 평범하지 않은 기이하고 묵직한 소리가 들려왔다.
쿵! 쿵! 쿵!
마치 집채만 한 커다란 바위 덩어리가 벼랑에서 떨어져 땅을 쿵쿵 울리며 구르는 듯한, 소름 끼치도록 무거운 발걸음 소리였다. 발소리는 눈보라를 뚫고 오두막을 향해 일정한 간격으로 점점 가까워지더니, 이내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한 낡은 사립문 바로 앞에서 우뚝 멈춰 섰다. 방 안의 부부는 약속이나 한 듯 동시에 숨을 헉 들이마시고는 서로의 창백해진 얼굴을 쳐다보며 몸을 굳혔다. 이 깊고 험한 산중에, 그것도 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눈보라가 거세게 휘몰아치는 이 야심한 한밤중에 사람의 발길이 닿을 리 만무했다. 필시 굶주린 호랑이나 커다란 멧돼지 같은 산짐승이 먹이를 찾아 내려온 것이 틀림없다 여긴 부부의 등골로 서늘한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극도의 공포가 오두막 안을 짓누르는 바로 그 순간, 얇은 방문 밖에서 산천을 뒤흔들 듯 쩌렁쩌렁하고 거친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흐흠! 그놈의 묵 냄새 한번 참으로 기가 막히게 구수하구나! 내 이 산골짜기를 수백 년간 제집 드나들듯 다녔건만, 십 리 밖에서부터 이토록 진동하는 달큰한 냄새를 맡고는 도저히 고인 침이 꼴깍 넘어가 발걸음을 멈추지 않을 수가 없었네! 이보시오, 집 안에 주인장 계시오! 이 추운 겨울밤을 헤매며 지나가는 불쌍한 과객인데, 그 가마솥에서 끓고 있는 구수한 메밀묵 한 그릇만 적선해 줄 수 없겠소? 내 배가 고파 당장 쓰러질 지경이니 제발 부탁 좀 하겠소!"
사람의 목소리라기엔 너무나도 크고 거칠어 마치 천둥이 치는 듯했지만, 가만히 들어보면 어딘지 모르게 아이 같은 장난기와 간절함이 서려 있는 묘한 말투였다. 남편은 덜덜 떨리는 두 다리를 간신히 진정시키며 조심스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마른침을 꿀꺽 삼키고는 떨리는 손으로 문고리를 잡고 천천히, 아주 조금 방문을 열었다. 그리고 문틈 사이로 새어 나간 희미한 호롱불 빛에 비친 불청객의 거대한 실루엣을 마주한 순간, 남편은 그만 숨을 헉 들이켜며 주저앉을 뻔하고 말았다.
키는 처마 끝에 닿을 만큼 비정상적으로 우람하고 거대했으며, 헝클어진 머리 한가운데에는 날카롭고 뭉툭한 뿔이 하나 불쑥 솟아 있었다. 어둠 속에서도 부리부리하게 빛나는 커다란 두 눈방울은 마치 먹이를 노리는 호랑이의 눈처럼 누렇게 번뜩이고 있었다. 온몸에는 짐승처럼 털이 덥수룩하게 나 있었고, 허리에는 산군을 맨손으로 때려잡아 벗겨낸 듯한 커다란 호랑이 가죽을 두르고 있는 기괴하고 두려운 형상이었다. 그것은 전설 속에서나 듣던, 사람을 홀리고 잡아먹는다는 틀림없는 도깨비였다.
'아이고 맙소사, 하늘도 무심하시지! 산짐승도 아니고 요괴 도깨비라니! 우리 가여운 부부가 평생 배나 곯으며 살다가 오늘 밤 저 무시무시한 도깨비놈의 한입거리 식사가 되어 비참하게 생을 마감하고 마는 것인가!'
남편은 턱이 덜덜 떨려 도무지 입이 떨어지지 않았고, 방구석에 움츠러든 아내 역시 치마폭으로 입을 튼 채 소리 없는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하지만 남편의 공포 어린 시선과 마주친 도깨비는 무서운 겉모습과는 달리, 연신 뱃속에서 천둥 치는 꼬르륵 소리를 내며 입맛을 쩝쩝 다실뿐이었다. 험상궂은 얼굴로 코를 킁킁거리며 부엌 쪽을 바라보는 도깨비의 눈빛은 무섭다기보다는 차라리 동냥을 구하는 애처로운 어린아이의 그것과 같았다.
"어허, 어찌 그리 혼비백산한 표정을 짓는가. 내 생김새가 조금 험악하여 사람들을 놀래키곤 하지만, 나는 이유 없이 사람을 해치거나 괴롭히는 질 나쁜 악귀가 아니니 부디 안심하시게. 그저 이 춥고 깊은 산골을 정처 없이 떠돌다 보니 며칠을 굶어 배가 너무 고파서 그만... 그 가마솥에서 풍겨오는 구수한 묵 냄새가 내 코를 이리도 날카롭게 찌르지 뭔가. 저 달큰하고 따뜻한 묵 한 그릇만 내어주면 내 얌전히 바닥까지 핥아먹고 곧바로 길을 나설 터이니, 불쌍한 길손을 거두는 셈 치고 부디 한 그릇만 적선해 주시게나."
집채만 한 덩치에 전혀 어울리지 않게 배를 부여잡고 애원하는 도깨비의 모습, 그리고 그 커다란 뱃속에서 다시 한번 지진이 난 듯 꼬르륵 소리가 요란하게 울려 퍼지자, 남편의 뒤에서 숨을 죽이며 사시나무 떨듯 떨고 있던 아내가 조심스레 몸을 일으켜 앞으로 나섰다.
"여보, 겉모습은 비록 우리와 다르고 험상궂으나, 며칠을 굶주려 배가 고파 이 깊은 밤에 인가를 찾아온 가여운 길손이 아닙니까. 밖은 살을 에이는 칼바람이 불고 눈보라가 치는데, 저리 오들오들 떨며 묵 한 그릇을 애원하는 모습이 굶주림에 허덕이는 불쌍한 우리네 이웃의 모습과 다를 바가 무엇이겠습니까. 내치지 마시고 어서 방으로 모시지요. 어차피 넉넉하게 쑨 묵이니 함께 나누면 될 일입니다."
공포를 억누르고 가엾은 이를 먼저 생각하는 아내의 크고 따뜻한 마음에 깊은 부끄러움과 용기를 동시에 얻은 남편은, 크게 심호흡을 한 뒤 닫혀 있던 방문을 활짝 열어젖히고 도깨비를 향해 정중하게 고개를 숙이며 길을 내어주었다.
"이리 누추하고 좁은 곳이지만 바깥채보다야 나을 테니 언 몸을 녹이시게 어서 안으로 들어오시지요. 마침 저희 부부가 먹을 메밀묵이 알맞게 잘 쑤어졌으니, 따뜻할 때 한 그릇 가득 담아 정성껏 대접해 올리겠습니다. 어서 들어오시지요, 도깨비님."
※ 2: 뜨끈한 메밀묵 한 그릇과 별미에 반한 도깨비의 약속
오두막의 좁은 방문이 열리자 도깨비는 기다렸다는 듯 덩실덩실 춤이라도 출 기세로 발걸음을 옮겼다. 하지만 이내 낡고 허름한 집이 자신의 무거운 발걸음에 무너질까 염려되었는지, 커다란 덩치를 잔뜩 웅크리고 마치 살얼음판을 걷듯 까치발을 든 채 조심조심 방 안으로 들어왔다. 도깨비 하나가 들어섰을 뿐인데 좁은 방 안은 이미 발 디딜 틈 없이 꽉 차 숨이 막힐 지경이었지만, 도깨비는 행여나 부부의 초라한 살림살이를 건드려 망가뜨릴까 봐 구석에 몸을 동그랗게 말고 얌전히 자리를 잡고 앉았다. 그의 짐승 같은 거친 숨소리가 방 안을 가득 채웠지만, 험악한 겉모습과 달리 그의 두 눈동자만은 가마솥이 있는 부엌 쪽을 향해 기대감으로 반짝이고 있었다.
아내는 서둘러 부엌으로 나가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뜨거운 메밀묵을 집안에서 가장 큼지막하고 이가 빠지지 않은 온전한 사발에 넘칠 듯이 듬뿍 담아왔다. 묵만 내어가기엔 너무 초라해, 아내는 오래도록 아껴두었던 간장 단지에서 진간장을 조금 덜어내고 그 위에 귀한 참기름을 한 방울 톡 떨어뜨려 고소한 향을 더한 양념장까지 정성스레 만들어 도깨비 앞에 공손히 내려놓았다.
"산중이라 찬도 없고 변변찮은 메밀묵 한 그릇일 뿐이지만, 추위와 시장기를 면하시기에는 부족함이 없을 것입니다. 입천장이 데일 수 있으니 호호 불어가며 식기 전에 어서 드시지요. 양념장을 곁들여 드시면 한결 맛이 나으실 겁니다."
아내의 다정한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굶주림에 이성을 잃을 뻔한 도깨비는 숟가락이나 젓가락을 쓸 생각도 하지 않고 털북숭이 커다란 두 손으로 뜨거운 묵사발을 번쩍 집어 들었다. 후루룩, 쩝쩝, 꿀꺽! 입안이 델 법도 한 펄펄 끓는 뜨거운 묵이었지만, 도깨비는 씹지도 않고 그대로 식도로 넘기는 듯했다. 비좁은 방 안에는 도깨비가 요란한 소리를 내며 묵을 삼키는 소리만이 천둥처럼 크게 울려 퍼졌다. 순식간에 커다란 사발을 바닥까지 박박 긁어 비워낸 도깨비는, 입가와 수염에 덕지덕지 묻은 메밀묵 찌꺼기를 길다란 혀로 싹싹 핥아먹으며 연신 감탄사를 쏟아냈다.
"크아아! 맛있다! 참으로 기가 막힌 맛이로다! 내 수백 년이라는 긴 세월을 살아오면서 조선 팔도의 내로라하는 양반집 잔칫상과 임금님의 수라상에 오르는 온갖 산해진미를 몰래 다 훔쳐 맛보았지만, 맹세코 내 평생 이리도 찰지고 구수하며 혀끝에 닿자마자 사르르 녹아내리는 완벽한 메밀묵은 처음 맛보네! 씹을수록 달큰한 맛이 우러나고 참기름의 고소함이 코를 찌르니, 어찌 이 보잘것없는 가루가 이리도 꿀맛으로 변한단 말인가! 염치없는 줄 알지만... 혹시 가마솥에 남은 묵이 있다면 한 그릇 더 청해도 되겠는가? 내 아직 뱃속의 거지가 절반도 차지 않았네 그려!"
'어지간히도 굶주렸나 보구나. 겉모습은 호랑이를 맨손으로 찢어 죽일 듯 무시무시하지만, 허기 앞에서는 어린아이처럼 순박하기 그지없고 묵 한 그릇에 이토록 감동하는 맑은 영혼을 가진 도깨비로다. 두려워할 필요가 전혀 없었어.'
남편은 도깨비의 게걸스러운 먹성에 빙그레 웃음을 지으며, 아내를 향해 고개를 끄덕여 따뜻한 눈짓을 보냈다. 아내 역시 남편의 마음을 읽고 환한 미소를 지으며, 즉시 부엌으로 나가 가마솥 바닥에 남아 있던 묵을 싹싹 긁어모아 두 번째 사발을 산더미처럼 쌓아 도깨비에게 가져다주었다. 두 번째 사발마저 게 눈 감추듯 단숨에 비워내고, 바닥에 남은 간장 국물 한 방울까지 깔끔하게 핥아먹은 도깨비는 그제야 불룩해진 배를 퉁퉁 두드리며 세상에서 가장 행복하고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아이고, 잘 먹었다! 이제야 살 것 같구먼! 오늘 밤은 자네 부부가 내어준 이 따뜻한 메밀묵 한 그릇 덕분에, 뼛속까지 시리게 스며들던 기나긴 겨울의 추위가 봄눈 녹듯 싹 가시는 기분일세. 인간 세상에 내려올 때마다 탐욕스럽고 이기적인 인간들의 모습에 매번 실망하곤 했는데, 이 깊은 산골에 이토록 가난하면서도 정이 넘치고 따뜻한 마음씨를 가진 이들이 살고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네. 내 텅 빈 배를 든든하게 채워주고 얼어붙은 몸을 녹여주었으니, 이 크나큰 은혜를 내 어찌 갚아야 할지 모르겠네 그려."
도깨비는 쑥스럽고 미안한 듯 뭉툭한 뿔이 난 뒷머리를 북북 긁적이며 남편과 아내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남편은 펄쩍 뛰며 손사래를 치고는 한없이 온화하고 겸손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아이고, 은혜라니요. 그런 당치도 않은 말씀 거두어 주십시오. 저희 부부 역시 찢어지게 가난하여 매일 끼니를 걱정하는 처지이오나, 그저 오늘 운 좋게 쑨 메밀묵이 조금 남아 길 가시던 과객과 나누어 먹었을 뿐인데, 어찌 그런 과하고 황송한 말씀을 하십니까. 저희 부부는 도깨비님께서 이리 맛있게 드셔주신 것만으로도 배가 부르고 마음이 따뜻해집니다. 앞으로도 밤길을 가시다 허기가 지고 추우시면 언제든 이 누추한 오두막을 두드려 주시지요. 비록 기름진 고기반찬은 내어드릴 수 없으나, 도깨비님께서 이토록 좋아하시는 뜨끈하고 구수한 메밀묵 한 그릇이야 언제든 기쁜 마음으로 대접해 드릴 수 있으니까요."
남편의 대가 없는 순수하고 따뜻한 배려에, 수백 년을 살아오며 인간들의 추악한 이면만을 보아왔던 도깨비는 깊은 감동을 받은 듯 번뜩이는 커다란 눈망울을 붉히며 끔벅거렸다. 그는 웅크리고 있던 거대한 몸을 천천히 일으켜 세우더니, 부부를 향해 허리를 깊숙이 굽혀 진심을 담아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이보시오들, 내 비록 인간이 아닌 요괴 도깨비의 몸이나, 도깨비의 세계에서도 남에게 입은 은혜는 천 배 만 배로 반드시 갚아야 하는 것이 철칙이라오. 오늘 당신들 부부가 베풀어준 대가 없는 그 따뜻한 마음씨와 배려에 내가 진심으로 크게 감복하였소. 오늘 밤 내 혀끝과 가슴에 맴돈 이 찰진 메밀묵의 맛과 온기는 내 수백 년 평생, 아니 도깨비의 명운이 다하는 날까지 결코 잊지 못할 것이오. 내일 아침, 날이 밝고 동이 트거든 당장 부엌 문을 활짝 열어보시라. 내 결코 빈말로 여러분을 희롱하는 것이 아니니, 기대해도 좋을 것이오."
의미심장한 약속의 말을 남긴 도깨비는 입가에 호쾌하고 시원한 웃음을 띠더니, 들어올 때처럼 조심하던 기색을 거두고 쿵쿵 땅을 울리는 무거운 발걸음 소리를 내며 사립문을 나섰다. 눈보라가 미친 듯이 휘몰아치는 칠흑 같은 어둠 속으로 도깨비가 순식간에 몸을 감추자, 거세게 불던 바람도 언제 그랬냐는 듯 잦아들고 오두막 안에는 도깨비가 남기고 간 신비롭고 훈훈한 온기만이 감돌고 있었다. 부부는 도깨비가 남기고 간 알쏭달쏭한 '부엌 문을 열어보라'는 말을 속으로 되새기며, 그저 긴 겨울밤에 일어난 기이하고도 따뜻한 꿈같은 일이었다고 여기며 서로의 손을 꼭 맞잡은 채 이내 평안한 잠자리에 들었다.
※ 3: 밤새 부엌에 쌓인 금은보화와 마을에 퍼진 기이한 소문
다음 날 아침, 창호지 틈으로 스며드는 차가운 새벽 공기에 잠에서 깬 아내는 언제나처럼 아침밥을 지을 채비를 하려 일찍 자리에서 일어났다. 바깥은 아직 동이 트기 전이라 어스름한 푸른빛만이 감돌았고, 간밤에 내린 폭설로 인해 온 세상이 하얗게 덮여 고요하기 그지없었다. 낡은 치마끈을 고쳐 맨 아내는 삐걱거리는 마루를 지나 부엌으로 향했다. 어젯밤 도깨비가 남기고 간 신신당부의 말이 자꾸만 마음에 걸렸지만, 그녀는 설마 그 험상궂은 요괴가 자신들 같은 가난뱅이들에게 진짜로 무언가 대단한 것을 두고 갔을까 하는 의구심과 불신이 훨씬 더 컸다. 그저 산짐승을 잡아다 던져놓아 부엌이 피비린내로 진동을 하지나 않을까 내심 걱정하며, 조심스럽게 부엌 문고리를 잡고 천천히 문을 열어젖혔다. 그리고 부엌 안의 풍경이 눈에 들어온 순간, 아내는 제 눈을 의심하며 너무나 큰 충격에 그 자리에 다리가 풀려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여, 여보! 여보!! 제발, 제발 어서 일어나 밖으로 나와보시구려! 빨리 어서요!"
아내의 목소리는 평소의 차분함은 온데간데없고, 마치 귀신이라도 본 사람처럼 다급하고 심하게 떨리고 있었다. 그 비명 섞인 부름에 화들짝 놀라 잠에서 깬 남편은 아내에게 무슨 큰 변고라도 생긴 줄 알고 겉옷도 걸치지 못한 채 맨발로 허겁지겁 부엌 쪽으로 뛰쳐나왔다. 하지만 남편 역시 넋이 나간 채 주저앉아 있는 아내의 어깨너머로 부엌 안을 들여다보고는, 입을 떡 벌린 채 그 어떤 말도 내뱉지 못하고 돌하르방처럼 굳어버렸다.
어젯밤 가마솥 바닥을 박박 긁어 텅 비어 있어야 할 부엌의 모습은 간데없고, 눈앞에는 믿을 수 없는 광경이 펼쳐져 있었다. 검게 그을린 가마솥 위에는 윤기가 자르르 흐르는 하얀 쌀과 노란 콩이 가득 담긴 가마니가 천장까지 닿을 듯 산더미처럼 층층이 쌓여 있었다. 그것만이 아니었다. 낡아서 쥐가 파먹은 찬장과 재가 날리던 아궁이 주변에는, 달빛을 받아 반짝반짝 영롱한 빛을 발하는 은전과 엽전 꾸러미들이 마치 길바닥의 조약돌처럼 어지럽게 널려 있었다. 또한, 평생 구경조차 해본 적 없는 최고급 명주실로 짠 오색찬란한 비단들이 부엌 기둥과 벽면을 가득 채우며 화려한 빛을 내뿜고 있었다.
'이, 이게 다 무엇이란 말인가? 내가 아직 잠에서 깨지 못한 것인가? 아니면 굶주림에 지쳐 마침내 헛것이 보이는 미치광이가 되어버린 것인가?'
남편은 떨리는 손을 뻗어 바닥에 굴러다니는 은전 꾸러미 하나를 집어 들었다. 차갑고도 묵직한 진짜 금속의 감촉이 손끝을 통해 생생하게 전해졌다. 환상도, 꿈도 아니었다. 도깨비가 입은 은혜는 반드시 갚겠다고 호언장담하던 그 약속이, 한 치의 거짓도 없는 현실이었던 것이다.
"세상에... 부처님 맙소사. 그 험악하고 무섭게 생긴 도깨비가 이 엄청난 재물을, 일평생을 일해도 만져보지 못할 이 많은 금은보화를 정말로 우리에게 주고 갔단 말입니까? 우리는 그저 먹다 남은 보잘것없는 메밀묵 한 그릇을 대접했을 뿐인데, 어찌 하늘도 놀랄 이리 큰 복을 우리에게 내린단 말입니까."
아내는 벅차오르는 감격과 지난 세월의 서러움이 교차하는 듯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 쥐고 하염없이 뜨거운 눈물을 쏟아냈다. 남편은 말없이 곁으로 다가가 아내의 거칠어진 손을 두 손으로 꽉 잡아주며, 떨리는 목소리로 하늘을 향해 깊은 감사의 기도를 올렸다.
"여보, 울지 마오. 우리 부부가 그동안 남을 시기하거나 해코지하지 않고, 아무리 배가 고파도 바르고 착하게 살아온 그 인고의 세월을 하늘이 어여삐 여기시고 도깨비를 통해 이토록 큰 복을 내려주신 게 틀림없소. 이 재물은 우리 욕심을 채우라는 것이 아니라, 이 돈으로 언 땅을 녹여 부지런히 농사를 짓고, 우리처럼 가난하고 배고픈 이웃들을 돌보며 베풀고 살라는 깊은 뜻일 것이오. 우리 결코 교만해지지 말고 평생 감사하며 살아갑시다."
부부는 도깨비가 두고 간 막대한 재물로 가장 먼저 메마른 논밭을 넉넉히 사고, 금방이라도 무너져가던 위험한 오두막을 헐어낸 뒤 그 자리에 튼튼하고 비바람을 거뜬히 막아줄 번듯한 기와집을 지었다. 그러나 그들은 갑작스러운 벼락부자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결코 비단옷을 휘감고 사치를 부리거나 가난한 옛 이웃들을 무시하지 않았다. 오히려 흉년이 들어 굶주리는 마을 사람들에게 곳간을 열어 쌀을 아낌없이 나누어 주고, 길을 지나는 가난한 과객들에게는 기꺼이 마루를 내어주고 따뜻한 밥을 대접하며 끝없이 선행을 베풀었다.
그러자 마을 사람들 사이에서는 곧 이들의 놀라운 사연이 기이한 소문이 되어 걷잡을 수 없이 퍼지기 시작했다. 끼니조차 잇지 못해 금방이라도 굶어 죽을 것 같았던 그 찢어지게 가난했던 부부가 하룻밤 새에 기와집을 짓는 만석꾼 벼락부자가 되었다는 소문, 그리고 그 비결이 한밤중에 찾아온 무시무시한 도깨비에게 정성껏 메밀묵을 대접했기 때문이라는 믿기 힘든 전설 같은 이야기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웃 마을을 넘어 고개 너머 장터까지 파다하게 퍼져나갔다.
동네 아낙네들은 아침저녁으로 우물가에 모여앉아 빨래 방망이를 두드리면서도 저마다 한마디씩 거들며 부부의 이야기를 입에 올리느라 여념이 없었다.
"아이고 형님, 그 산 밑에 살던 김 서방네 부부 사연 똑똑히 들었수? 글쎄 눈보라 치던 한밤중에 집채만 한 도깨비가 쳐들어와서는 묵을 내놓으라고 생떼를 쓰며 집을 다 부수려 했다지 무어유!"
"어머나, 생떼라니요! 내가 듣기로는 그 도깨비가 배가 고파서 마당에 무릎을 꿇고 구걸을 했다던데? 그래서 그 심성 고운 부부가 먹을 것을 다 내어주며 융숭하게 묵을 대접했더니, 다음 날 아침에 그 보답으로 부엌에 황금 두꺼비와 금괴를 천장 끝까지 산더미처럼 쌓아두고 사라졌다는구먼! 어휴, 부러워 죽겠네 정말!"
"아유, 말도 마. 나도 그래서 오늘 밤부터는 잠도 안 자고 밤새도록 가마솥에 불을 때며 메밀묵만 쑬 작정이야. 혹시 알아? 우리 집 묵 냄새를 맡고 그 맘씨 좋은 도깨비가 우리 집 대문을 두드려서 나한테도 돈다발을 꽉꽉 안겨주고 갈지! 내 기필코 오늘부터 매일 밤 묵을 쑤고 말 테야!"
우물가를 맴돌던 부러움과 질투, 그리고 맹목적인 기대감이 뒤섞인 이 소문은 거센 바람을 타고 온 동네를 휩쓸고 다녔고, 이윽고 이 마을에서 가장 재산이 많으면서도 동시에 가장 잔혹하고 인색하기로 소문난 사내, 욕심쟁이 최부자의 귓가에까지 고스란히 들어가고야 말았다.
※ 4: 소문을 듣고 달려온 욕심쟁이 최부자의 얄팍한 흉계
마을 한가운데 으리으리하게 자리 잡은 고래등 같은 기와집에 사는 최부자는, 수십 칸이 넘는 곳간에 최고급 쌀과 온갖 금은보화가 썩어나갈 정도로 가득 차 있는 엄청난 부자였다. 하지만 그는 평생 단 한 번도 가난한 이웃에게 밥 한 술, 동전 한 닢을 베푸는 법이 없는 구두쇠 중의 악질 구두쇠였다. 소작농들이 피땀 흘려 지은 농사 수확물의 9할을 빼앗고, 고리대금으로 가난한 자들의 피눈물을 쥐어짜며 교활하게 자신의 재산을 불려 온 그는, 인간으로서의 연민 따위는 진작에 갖다 버린 피도 눈물도 없는 사내였다. 그런 그가 어느 날, 산 밑에 살던 가장 비천하고 가난했던 오두막집 부부가 하룻밤 새에 기와집을 짓고 엄청난 벼락부자가 되었다는 소문을 듣게 되자, 배가 뒤틀리고 열화가 치밀어 올라 도저히 견딜 수가 없었다.
'감히 쥐뿔도 없고 글 한 자 읽을 줄 모르는 천박한 것들이 도깨비 홀리는 요망한 재주를 부려 내 앞에서 부자 행세를 해? 이 마을에서 나보다 더 재물이 많은 자가 생기는 꼴은 내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에는 절대 볼 수 없다! 안 되겠다. 당장 그 건방진 놈들의 집에 쳐들어가서 도깨비를 부르는 그 비법을 모조리 알아내어, 내 곳간을 열 배 스무 배로 불려야겠다.'
최부자는 속으로 끓어오르는 질투심과 탐욕을 숨기지 못하고 씩씩거리며, 당장 몽둥이를 든 험악한 하인들을 대동하고 벼락부자가 된 부부의 집으로 득달같이 향했다. 마을 어귀를 돌아 부부의 집에 도착한 순간, 최부자는 제 눈앞에 우뚝 선 번듯하고 튼튼한 새 기와집과 넓은 마당 곳곳에 산처럼 쌓여 있는 곡식 가마니들을 보자 화병이 나 눈이 홱 뒤집힐 지경이었다. 저 재물들이 원래 자신의 것이어야만 했다는 억지스러운 억울함이 밀려왔다. 하지만 그는 원하는 것을 얻어내기 위해 애써 끓어오르는 화를 억누르고 태연한 척, 능구렁이 같은 가식적인 웃음을 입가에 잔뜩 머금고 부부를 향해 큰 소리로 불렀다.
"어허이! 이보게, 김 서방! 그동안 별고 없이 잘 지냈는가? 내 지나가는 길에, 자네 부부가 최근에 큰 집을 지었다는 소식을 듣고 이웃지간의 도리로 잘살고 있는지 안부가 하도 궁금하여 잠시 들렀네 그려! 허허허!"
마당에서 이웃들에게 나누어줄 곡식을 정리하던 남편은, 평소 길에서 마주치면 자신들을 벌레 보듯 무시하고 침을 뱉고 지나가던 최부자가 하인들까지 거느리고 와서 친한 척하며 찾아오자 내심 크게 놀라고 당황했다. 하지만 본래 심성이 착하고 손님을 홀대하지 못하는 남편은, 껄끄러운 마음을 뒤로한 채 선뜻 그를 새로 지은 사랑채의 상석으로 모시고 따뜻하고 귀한 잣 띄운 차를 내어주었다. 최부자는 내어준 찻잔을 입에 대는 둥 마는 둥 허공만 응시하며 안절부절못하더니, 이내 참지 못하고 번들거리는 눈빛으로 곧바로 탐욕스러운 본색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자자, 차는 나중에 마시기로 하고. 그래, 요새 동네방네 떠들썩한 그 소문들이 전부 사실인가? 한밤중에 나타난 도깨비 놈한테 메밀묵 한 그릇을 먹이고는 이 엄청난 횡재를 했다는 그 말도 안 되는 소문 말일세! 대체 자네같이 둔한 숙맥이 그 무서운 도깨비를 어찌 불러낸 겐가? 부적을 써서 마당에 묻었는가, 아니면 점쟁이에게 비싼 돈을 주고 특별한 귀신 부르는 주문이라도 외웠는가? 이웃 간의 정을 보아 내게만 몰래 속 시원히 털어놓아 보시게나!"
최부자의 탐욕에 찌들어 핏발이 선 두 눈빛과 다그치는 듯한 목소리를 본 남편은, 속으로 씁쓸한 미소를 지으면서도 차분하고 진실된 목소리로 묻는 말에 온전히 대답했다.
"부적도 주문도 없습니다, 어르신. 요행을 바라며 귀신을 부를 줄 아는 재주가 저희 부부에게 어디 있겠습니까. 그저 며칠 전 눈보라가 치던 유난히도 추운 겨울밤에 아내가 굶주린 배를 달래려 남은 가루로 묵을 쑤고 있었는데, 우연히 그곳을 지나가던 도깨비님께서 묵 냄새를 맡으시고는 배가 고파 참을 수 없다며 찾아오셨을 뿐입니다. 저희는 그저 그 모습이 춥고 배고파 안쓰러워, 저희가 먹을 남은 묵 한 그릇을 양념장에 곁들여 대접했을 따름이지요. 하늘에 맹세코 다른 비법이나 술수는 전혀 없었습니다."
"허어, 참으로 그것이 다란 말인가? 거짓을 말하면 천벌을 받을 것이야! 고작 그 싸구려 메밀묵 한 사발로 이 엄청난 금은보화와 비단을 얻어냈단 말이지? 그렇다면 묻겠네! 그 도깨비가 대체 어떤 묵을 좋아하며 먹어 치우던가? 물을 많이 부어 묽게 쑨 묵이냐, 아니면 가루를 듬뿍 넣어 찰지고 된 묵이냐? 간장은 짠 조선간장을 주었느냐, 아니면 달착지근하게 타서 주었느냐? 아주 상세히, 하나도 빠짐없이 말해 보아라!"
최부자는 당장이라도 남편의 멱살을 잡을 듯 코앞까지 다가가 꼬치꼬치 캐물었고, 남편은 굳이 숨길 것도 없고 비밀도 아니라는 듯 평소 아내가 메밀묵을 쑬 때 물을 잡는 비율과 가마솥의 불 조절, 그리고 참기름을 떨어뜨리는 양념장 비법까지 순순히 모두 알려주었다. 남편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과정을 머릿속에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욱여넣은 최부자는, 이제 자신이 세계 제일의 거부가 될 수 있다는 망상에 빠져 속으로 쾌재를 부르며 엉덩이를 털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옳거니, 요깟놈들! 비법을 모두 알아냈으니 이제 끝이다! 그깟 흔해 빠진 메밀묵 하나면 멍청한 도깨비를 단숨에 홀려서 금은보화를 갈퀴로 싹싹 긁어모을 수 있단 말이지? 내 오늘 밤 당장 내 곳간에 있는 최고급 메밀을 모조리 갈아 마당 한가득 산더미처럼 묵을 쑤어 놓고 그 멍청한 도깨비 놈을 기다리리라. 고작 묵 한 그릇 얻어먹고 재물을 저리 쏟아붓다니, 참으로 계산할 줄 모르는 미련한 요괴 놈 같으니라고! 이제 이 마을의 금은보화는 모조리 이 최부자의 차지가 될 것이다!'
음흉한 미소를 지으며 자신의 집으로 헐레벌떡 돌아온 최부자는, 대문을 박차고 들어서자마자 마당에 휴식을 취하고 있던 수십 명의 하인들을 향해 당장 지옥문이 열린 듯 미친 듯이 호통을 치며 다그치기 시작했다.
"여봐라! 이 게으른 놈들, 당장 엎어지지 못할까! 어서 내 큰 곳간의 자물쇠를 모두 부수고 열어라! 그리고 곳간 안에 쌓여 있는 제일 굵고 좋은 메밀을 남김없이 모조리 앞마당으로 쏟아부어라! 오늘 밤 안으로 수십 개의 맷돌을 모두 돌려 그것들을 미세한 가루로 갈아내고, 우리 집에 있는 가마솥이란 가마솥은 전부 불을 지펴 세상에서 가장 찰지고 맛있는 묵을 산더미처럼 쑤어내야 할 것이다! 묵 냄새가 온 동네는 물론이고, 저 십 리 밖 깊고 깊은 산속 짐승들의 소굴과 도깨비 소굴 한가운데까지 진동을 하여 퍼지도록 아궁이에 불을 쉼 없이 때란 말이다! 만약 오늘 밤 안으로 이 모든 것을 해내지 못하는 놈이 있다면, 내 그놈의 다리몽둥이를 부러뜨려 산짐승의 먹이로 던져줄 터이니 죽을 각오로 불을 지펴라!"
하인들은 난데없는 최부자의 미친듯한 불호령에 영문도 모른 채 사색이 되어 이리저리 뛰어다녔다. 그들은 매서운 추위 속에서도 겉옷을 벗어 던진 채 밤새도록 무거운 맷돌을 돌려 메밀을 갈고, 눈을 뜰 수 없을 정도로 매캐한 연기를 마셔가며 수십 개의 아궁이에 장작을 집어넣어 불을 피워댔다. 최부자의 거대한 저택 위로는 흡사 산불이라도 난 듯 시커먼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올랐고, 그와 함께 진하고 독한 메밀묵 냄새가 밤공기를 타고 온 사방으로 짙게 깔리기 시작했다. 최부자는 이 모든 소동을 대청마루에 팔짱을 끼고 앉아 지켜보며, 내일 아침이면 기와집 열 채를 가득 채우고도 남을 만큼 산더미처럼 쌓일 황금덩어리와 은전 꾸러미들을 머릿속으로 상상하고 있었다. 그는 도깨비가 당장이라도 금괴를 짊어지고 하늘에서 뚝 떨어지기만을 기다리며, 끊임없이 입맛을 다셔대고 마른침을 꿀꺽꿀꺽 삼키며 광기 어린 눈으로 어두운 밤하늘을 노려보고 있었다. 최부자의 그 끝없는 탐욕으로 인해, 그날 밤 그의 저택은 마치 아비규환의 생지옥처럼 끓어오르고 있었다.
※ 5: 억지로 쑨 메밀묵과 도깨비를 애타게 기다리는 최부자
칠흑 같은 어둠이 무겁게 내려앉은 최부자의 으리으리한 기와집은 밤이 깊어갈수록 한낮의 장터보다 훨씬 더 소란스럽고 혼란스러운 아수라장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안채와 사랑채를 가로지르는 어마어마하게 넓은 마당 곳곳에는 수십 개의 커다란 횃불이 대낮같이 환하게 밝혀져 있었고, 마치 거대한 잔치라도 벌이듯 수많은 화로와 아궁이가 급조되어 시뻘건 불길을 허공으로 토해내고 있었다. 평소 같으면 따뜻한 아랫목에 누워 비단 이불을 덮고 깊은 잠에 빠져 코를 골고 있을 최부자였지만, 오늘 밤만큼은 두 눈에 시뻘건 핏발을 세운 채 마당과 부엌 문지방을 쉴 새 없이 넘나들며 가엾은 하인들을 쥐 잡듯이 달달 볶아대고 있었다. 그의 머릿속은 오로지 그 미련한 도깨비가 자신에게 가져다줄 집채만 한 황금덩어리와 영롱하게 빛나는 금은보화에 대한 끝없는 탐욕으로 가득 차 있어, 살을 에이는 듯한 한겨울의 매서운 칼바람 추위조차 전혀 느끼지 못하는 듯 광기에 휩싸여 있었다.
"이 미련하고 게으른 놈들! 불길이 너무 약하지 않으냐! 아궁이에 마른장작을 더 팍팍 쑤셔 넣으란 말이다! 메밀묵은 가마솥 전체를 감싸는 뜨거운 불 조절이 생명이라 하였거늘, 고작 이따위 미적지근한 불로 어느 세월에 저 수십 개의 큰 가마솥을 다 끓여낸단 말이냐! 어서 맷돌을 더 빨리빨리 돌려라! 굵은 알갱이가 하나라도 씹히면 그놈의 목을 칠 것이니, 아주 고운 가루가 물처럼 흘러나오도록 뼈가 부서지라 쉼 없이 맷돌을 갈아대야 할 것이야! 동작 그만두지 못해? 당장 뛰어다니란 말이다!"
최부자의 악에 받친 불호령이 채찍처럼 떨어질 때마다, 얇은 무명옷 하나에 의지한 하인들은 언 손을 입김으로 호호 불어가며 억지로 무거운 맷돌 손잡이를 돌려댔다. 제대로 먹지도, 쉬지도 못한 가엾은 하인들의 창백한 이마에서는 한겨울임에도 불구하고 비 오듯 구슬땀이 뚝뚝 떨어져 내렸고, 여기저기서 신음이 터져 나왔지만 최부자는 그들의 처절한 고달픔 따위는 안중에도 없었다. 그저 눈앞에 도열한 수십 개의 커다란 가마솥 안에서 시커멓게 끓고 있는 엄청난 양의 메밀묵이 내일 아침이면 전부 번쩍이는 금덩어리로 변할 것만 같은 달콤한 환상에 사로잡혀, 연신 입맛을 쩝쩝 다실 뿐이었다. 곳간에 쌓여 있던 최고급 메밀을 아낌없이 모조리 쏟아부은 탓에 마당 안은 물론이고 커다란 저택의 높다란 담장 너머 십 리 밖까지 진하고 탁한 묵 냄새가 진동을 했다. 하지만 추위에 떠는 길손을 위해 헌신적인 정성과 따뜻한 사랑으로 쑤어내던 가난한 부부의 구수하고 맑은 냄새와는 달리, 오직 재물을 향한 맹목적인 탐욕과 하인들의 피눈물을 짜내어 억지로 끓여낸 최부자의 메밀묵에서는 어딘가 모르게 텁텁하고 숨이 막힐 듯 매캐한 냄새가 탁하게 섞여 역겨움을 자아내고 있었다.
'흐흐흐, 암, 그렇고말고. 이 정도로 요란하게 냄새를 풍겨대면 저 깊고 험한 산속 동굴에 처박혀 자빠져 자고 있는 귀머거리 도깨비라도 당장 침을 질질 흘리며 내 집 문 앞으로 달려오고야 말겠지. 그 가난뱅이 무식한 김 서방 놈이 고작 그 알량한 사발 하나를 적선하고 대궐 같은 기와집을 짓는 벼락부자가 되었으니, 나는 이 어마어마한 가마솥 수십 개를 통째로 대접하면 필시 창고 백 개를 꽉 채우고도 남아 마당에 굴러다닐 만큼 어마어마한 황금덩어리를 한가득 안겨줄 것이야. 옳지, 천 냥 아니 만 냥, 십만 냥의 금괴가 굴러들어올 위대한 밤이로구나! 내일부터는 한양의 정승 판서들도 내 발밑에 엎드려 돈을 빌려달라 애원하게 만들 테다!'
어느덧 야속한 시간이 쏜살같이 흐르고 자정을 훌쩍 넘어 새벽으로 접어들자, 혹사당하던 하인들은 마침내 하나둘씩 바닥에 쓰러져 꾸벅꾸벅 졸거나 기절하기 시작했고, 마을을 지키던 개 짖는 소리조차 완전히 끊어진 으스스하고 적막한 한밤중이 되었다. 하지만 최부자는 겹겹이 솜을 두껍게 넣은 값비싼 비단옷을 껴입은 채 넓은 대청마루 한가운데 꼿꼿이 의자를 놓고 앉아, 당장이라도 금붙이가 쏟아져 들어올 굳게 닫힌 솟을대문 쪽만 뚫어지게 응시하고 있었다. 그의 두 손에는 미리 정성껏 닦아 준비해 둔 커다란 은주걱과 사람 머리통만 한 거대한 빈 사발이 들려 있었다. 살을 찢는 듯한 찬 바람이 쌩쌩 불어와 볼을 사정없이 때려도 그는 춥다는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오히려 그 스산한 바람을 타고 도깨비가 은화 꾸러미를 잔뜩 짊어진 채 날아오지 않을까 애타게 기대하며, 행여나 도깨비의 발소리를 단 하나라도 놓칠세라 목을 길게 빼고 귀를 쫑긋 세운 채 헐떡이고 있었다.
"위대하신 도깨비님, 어서 오시옵소서. 이 마을에서 가장 훌륭하고 잘난 이 최부자가 도깨비님을 위해 아주 기가 막힌 명품 메밀묵을 마당 가득 수십 솥이나 쑤어놓고 애가 타게 기다리고 있사옵니다. 어서 와서 이 달콤하고 귀한 묵을 배가 터지도록 마음껏 드시고, 내 비어있는 저 큰 곳간 십여 채에 번쩍번쩍 빛나는 금은보화를 천장까지 산더미처럼 꽉꽉 채워주고 가시옵소서. 어서 오시옵소서!"
기다림이 점점 길어지자 덜컥 조바심과 불안감이 솟구친 최부자는 미친 사람처럼 혼잣말을 쉴 새 없이 중얼거리며 마당을 이리저리 서성거렸다. 혹시 하인들이 묵을 잘못 쑤어 냄새가 덜 퍼진 것은 아닌지, 아니면 그 가난뱅이 부부가 거짓말을 한 것은 아닌지 온갖 의심이 피어오르던 바로 그때였다. 솨아아아- 하는 거대한 폭풍우 같은 거센 바람 소리가 저 멀리 산등성이에서부터 몰아치더니, 이윽고 굳게 닫힌 웅장한 대문 밖에서 묵직하고도 섬뜩한 발걸음 소리가 천천히 들려오기 시작했다. 쿵! 쿵! 쿵! 흡사 거대한 산이 통째로 움직이며 땅을 내려찍는 듯한 소리는 분명 인간이 낼 수 있는 소리가 아니었다. 최부자의 심장이 미친 듯이 쿵쾅쿵쾅 요동치며 가슴 밖으로 튀어나올 듯이 뛰기 시작했다. 마침내 육중한 나무 대문이 찢어질 듯 끔찍한 소리를 내며 삐걱거리며 열리더니,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집채만 한 거대한 그림자가 짐승의 숨소리를 내뿜으며 그 무시무시한 모습을 온전히 드러냈다. 머리 한가운데에는 뾰족하고 거대한 뿔이 솟아 있고, 어깨에는 집채만 한 호랑이 가죽을 무심하게 둘러맨, 헛소문이 아닌 진짜배기 요괴 도깨비가 최부자의 눈앞에 우뚝 선 것이다.
"어흐흠! 냄새 한번 지독하게 요란하구나. 온 산천 십 리 밖까지 답답한 메밀 냄새가 진동을 하여 깊은 잠을 자다가 벌떡 일어나 참지 못하고 예까지 찾아왔건만, 집터가 이리 넓고 담장이 높으니 대체 어느 구석에서 묵을 쑤는지 찾기가 영 까다롭고 번거롭구먼. 이 집의 주인이 뉘더냐!"
도깨비의 분노 섞인 거칠고 탁한 목소리가 온 마당을 뒤흔들며 쩌렁쩌렁하게 울려 퍼지자, 겁을 먹고 도망쳐도 시원찮을 최부자는 오히려 환희에 찬 기괴한 비명을 속으로 삼키며 버선발로 마당 흙바닥을 가로질러 미친 듯이 뛰어나갔다. 황금을 향한 맹목적인 갈망에 사로잡힌 그의 쭈글쭈글한 입가에는 도저히 숨길 수 없는 비열하고 탐욕스러운 미소가 귀밑까지 기괴하게 번져 출렁이고 있었다.
"아이고, 도깨비님! 도깨비 대감님! 이 누추한 곳까지 어서 오시지요! 이 비천한 최부자가 도깨비님을 위해 수십 명의 하인들을 동원하여 온종일 맷돌을 돌려 이 세상에서 가장 찰지고 맛있는 최고급 메밀묵을 쑤어 놓고 목을 빼며 기다리고 있었습니다요! 자자, 바깥바람이 차가워 옥체가 상하실까 염려되니 어서 가장 따뜻하게 불을 때어놓은 제 사랑방으로 드시지요! 오늘 밤 이 집의 모든 묵은 도깨비님의 것입니다요!"
최부자는 허리를 폴더처럼 굽신거리며 마치 임금님을 모시듯 아양을 떨며 도깨비의 커다란 털북숭이 팔을 이끌려 했다. 도깨비는 어둠 속에서도 누렇게 번뜩이는 거대한 눈을 내리깔고, 제 발밑에서 벌레처럼 굽실거리는 최부자의 가식적인 얼굴을 무표정하게 빤히 내려다보았다. 겉으로는 과하게 친절을 베풀며 간과 쓸개라도 내어줄 듯 굴고 있었지만, 천 년을 넘게 살아온 도깨비의 영험한 눈에 비친 최부자의 두 눈동자에는 상대를 향한 진심 어린 예의나 배려는 단 한 줌도 섞여 있지 않았다. 오직 자신이 베푼 묵의 대가로 쏟아질 번쩍이는 황금만을 향한 시커멓고 추악한 속내만이 역겹게 번들거리고 있을 뿐이었다. 도깨비는 당장이라도 그 가식적인 머리통을 걷어차 버리고 싶었으나, 속으로 비웃음 섞인 콧방귀를 크게 한 번 뀌고는 짐짓 그의 속셈을 전혀 모르는 척 능청을 떨며 최부자의 호들갑스러운 안내를 받아 사랑방을 향해 쿵쿵 무거운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 6: 도깨비의 분노, 금은보화 대신 남겨진 기막힌 징벌
최부자의 집에서 가장 크고 화려한 사랑방 한가운데, 집채만 한 도깨비가 떡하니 거만한 자세로 자리 잡고 앉았다. 최부자는 도깨비가 자리에 앉기가 무섭게 집안에서 가장 비싸고 화려한 나전칠기 큰상을 내어놓고, 마당의 수십 개 가마솥에서 방금 갓 퍼 올린 뜨거운 메밀묵을 흡사 거대한 산봉우리처럼 아슬아슬하게 쌓아 올려 도깨비의 눈앞에 바쳤다. 상다리가 부러질 듯한 무게에 상이 삐걱거렸지만, 최부자는 아랑곳하지 않고 연신 허리를 조아렸다.
"자, 어서 드시지요! 귀하신 도깨비님께서 메밀묵을 그리도 각별히 좋아하신다는 소문을 전해 듣고, 이 최부자가 특별히 심혈을 기울여 최상품의 가루만 골라 정성껏 만들었습니다요. 상 위에 올려진 것만으로 혹여 양이 부족하시거든 밖의 솥마다 아직 백 명은 거뜬히 먹을 양이 펄펄 끓으며 남아 있으니, 체면 차리지 마시고 얼마든지 말씀만 하명하십시오! 이 집의 모든 것이 다 도깨비님의 것입니다요!"
최부자는 당장이라도 도깨비의 소맷자락에서 번쩍이는 금괴와 은전 꾸러미가 쏟아져 내릴 것만 같은 엄청난 기대감에 한껏 부풀어 올라, 입가에 허연 침을 튀겨가며 세상에서 가장 비굴하고 징그러운 아첨을 떨어댔다. 도깨비는 말없이 커다란 콧구멍을 벌렁거리며 킁킁 소리를 내어 상 위에 수북이 쌓인 엄청난 양의 메밀묵 냄새를 맡아보았다. 겉으로 풍기는 기름진 냄새와 번지르르한 윤기는 제법 그럴듯해 보였지만, 어딘지 모르게 지난번 찢어지게 가난한 오두막 부부의 집에서 허겁지겁 얻어먹었던 그 맑고 구수한 묵과는 차원이 달랐다. 도깨비는 말없이 커다란 손을 뻗어 진득한 묵 한 덩어리를 푹 떠서 자신의 커다란 입안으로 우겨넣었다.
우적우적, 쩝쩝. 방 안에는 도깨비가 메밀묵을 거칠게 씹는 소리만이 기괴하게 울려 퍼졌고, 그 기나긴 찰나의 시간 동안 최부자는 심장이 멎을 듯한 긴장감 속에 두 손을 간절히 모아 쥐고 숨소리조차 내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데 엄청난 속도로 묵을 씹어 삼킬 것이란 최부자의 기대와는 달리, 묵을 단 두세 번 씹어 넘기던 도깨비의 굵은 미간이 무섭게 찌푸려지더니 이내 흉측한 얼굴 전체가 분노로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쯧쯧쯧, 역시나 내 예상이 단 한 치도 빗나가지 않고 그러하구나. 겉모습만 기름칠을 하여 번지르르하게 꾸며놓았을 뿐, 이 음식을 만든 자의 가슴에서 우러나오는 따뜻한 정성이나 헐벗은 이를 향한 온기라고는 쥐 눈곱만큼도 들어있지 않은 역겨운 껍데기 묵이로다. 타인의 고통은 안중에도 없이 오로지 내 주머니에서 떨어질 알량한 재물만을 탐내는 시커멓고 추악한 욕심으로 치덕치덕 버무려낸 묵이니, 그 맛이 시궁창의 구정물보다 쓰디쓸 수밖에 없지 않더냐. 이놈의 간악함을 내 오늘 뼈저리게 다스려야겠다.'
도깨비는 입안에 남아있던 묵 찌꺼기를 도저히 삼킬 수 없다는 듯 바닥에 퉤 하고 거칠게 뱉어내더니, 들고 있던 커다란 사발을 산산조각이 나도록 쾅 소리가 나게 커다란 상 위에 후려쳤다. 벼락이 치는 듯한 서슬 퍼런 파찰음에 혼비백산 놀란 최부자가 짐승처럼 비명을 지르며 엉덩방아를 찧고 뒤로 기겁하며 물러섰다.
"아, 아, 아니… 도, 도깨비 대감님! 갑자기 어찌 이러십니까요! 제, 제가 올린 묵이 입맛에 맞지 않으십니까요? 조선 팔도에서 가장 비싸고 귀한 최고급 메밀만 엄선하여 골라 쓴 것인데 혹여 간이 싱거우신 겝니까? 간장을 한 항아리 통째로 들이부어 드릴까요?"
도깨비는 당장이라도 최부자를 찢어 죽일 듯 무섭고 부리부리한 눈을 번뜩이며 바들바들 떠는 최부자를 매섭게 쏘아보았다. 방 안의 공기가 얼음장처럼 차갑게 식어 내렸고, 보이지 않는 거대한 압박감이 최부자의 숨통을 조여왔다.
"네 이노오오옴! 감히 누구를 속이려 드느냐! 네놈 머릿속에 가득 찬 그 얄팍하고 시커먼 속셈을 이 영험한 내가 모를 줄 알았더냐? 지난번 산 밑의 그 가난한 부부는 자신들이 굶어 죽어가는 끔찍한 와중에도 추위에 떠는 낯선 길손을 가엾게 여겨, 자신들의 피 같은 마지막 식량을 기꺼이 털어 정성껏 쑤어낸 귀한 온기를 대접하였다! 허나 네놈은 대체 어떠한 짐승만도 못한 놈이냐! 수십 개의 커다란 곳간에 최고급 쌀과 곡식이 썩어 문드러져 냄새가 진동을 하는데도, 얼어 죽고 굶어 죽어가는 가난한 이웃들에게는 쌀 한 톨, 물 한 모금 베풀지 않던 악독한 놈이! 이제는 오로지 나의 신성한 재물을 탐내어 억지로 하인들의 피를 쥐어짜 쑤어낸 이 역겹고 구역질 나는 묵을 감히 내게 먹이려 들어? 네놈의 탐욕이 이 묵을 똥보다 더 독하게 만들었다는 것을 정녕 모른단 말이냐!"
도깨비의 어마어마한 불호령이 하늘을 가르고 천둥처럼 방 안을 내리치자, 방 안을 밝히던 커다란 호롱불들이 일제히 파르르 떨리며 꺼질 듯 요동쳤고, 기와집 전체가 지진이라도 난 듯 미친 듯이 덜덜 흔들리기 시작했다. 최부자는 사색이 되어 눈물 콧물을 흘리며 차가운 방바닥에 납작 엎드려 싹싹 빌기 시작했다.
"아, 아이고! 도깨비님! 제발 목숨만은 살려주십시오! 모두 크나큰 오해이십니다요! 쇤네는 그저 고귀하신 도깨비님을 극진히 대접하고픈 순수하고 티 없는 마음에 무리하여 음식을 준비한 것뿐인데…"
"시끄럽다! 그 주둥이를 당장 닥치지 못할까! 끝까지 요망한 세치혀로 거짓을 고하며 탐욕에 눈이 멀어 헛된 꾀를 부린 대가를 오늘 아주 똑똑히, 그리고 참혹하게 치르게 될 것이다. 네놈이 그토록 다른 이들의 피눈물을 짜내어 채우고 싶은 재물을 간절히 원한다니, 내 오늘 밤 특별히 네놈의 그 거대한 부엌과 앞마당이 꽉 차고 넘치도록 세상에 둘도 없는 아주 '특별하고 귀한 보물'을 가득 남겨두고 가마. 내일 아침 해가 뜨거든 반드시 네놈 손으로 직접 부엌 문을 활짝 열어 내 선물을 똑똑히 확인해 보거라!"
말을 마친 도깨비는 거대한 몸을 일으켜 방을 휙 빠져나갔다. 방 안을 박살 낼 듯한 거센 돌풍이 밖에서부터 불어 닥치며 방문이 찢어질 듯 쾅 닫혔고, 한바탕 회오리가 휘몰아친 뒤 도깨비의 끔찍한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최부자는 공포에 질려 바지에 오줌을 지린 채 덜덜 떨면서도, '특별하고 귀한 보물'을 부엌에 남겨주겠다는 도깨비의 마지막 한마디에 또다시 그 미련하고 멍청한 욕심이 마음 한구석에서 스멀스멀 고개를 쳐들기 시작했다.
'휴우, 하마터면 도깨비 방망이에 맞아 죽을 뻔하여 십년감수했네. 그래도 내 정성을 완전히 외면하진 않았는지 보물을 꽉 차게 남겨준다 분명히 약속하지 않았는가! 묵맛이 맘에 안 들어 화를 내긴 했어도 부자 양반의 체면을 보아 결국 내 부엌에 커다란 금덩어리와 산호초를 가득 던져주려는 게 틀림없어! 암, 그렇고말고!'
다음 날 아침, 여명이 밝아오고 동이 트기가 무섭게 최부자는 밤새 뜬눈으로 밤을 새우다 미친 사람처럼 산발을 한 채 부엌으로 미친 듯이 달려갔다. 영문도 모르고 뒤따라온 수십 명의 하인들이 숨을 죽이고 지켜보는 가운데, 그는 심장이 터질 것 같은 환희를 느끼며 떨리는 두 손으로 커다란 부엌 문을 단숨에 활짝 열어젖혔다. 그리고 그 순간, 기대했던 황금의 광채 대신 부엌 안을 가득 채운 끔찍한 광경을 마주한 최부자의 입에서 찢어지는 듯한 처절한 단말마의 비명이 터져 나왔다.
"아아아아아악! 내 눈! 이게, 이게 대체 무슨 변고란 말이냐! 내 기와집이! 내 부엌이!"
널찍한 부엌 안에는 최부자가 밤새도록 상상하며 기대했던 번쩍이는 금은보화나 비단은 단 한 조각도 없었다. 대신 동네의 모든 시궁창과 측간에서 퍼온 듯한 악취가 진동하는 썩은 진흙과 인분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고, 그 오물 구덩이 속에서는 사람 팔뚝만 한 흉측한 맹독성 두꺼비 떼와 뱀들이 우글거리며 엉켜있었다. 또한 산꼭대기에서 굴러온 집채만 한 시커먼 돌멩이들이 부엌 지붕을 뚫고 들어와 진흙과 함께 쏟아져 내려 있었다. 밤새도록 하인들을 닦달해 묵을 쑤어대던 수십 개의 값비싼 가마솥에는 오물과 구더기가 가득 차 코를 찌르는 썩은 악취를 풍겼고, 최부자가 평소 애지중지 자랑하던 수백 냥짜리 귀한 도자기와 식기들은 모조리 거대한 돌무더기에 처참하게 깔려 가루가 되도록 박살이 나 있었다. 남을 짓밟고 재물만을 탐하던 탐욕스러운 최부자에게 도깨비가 내린 너무나도 완벽하고 기막힌 징벌이었다. 최부자는 자신이 자초한 썩은 진흙더미 속에 털썩 주저앉아 가슴을 쥐어뜯고 땅을 치며 피눈물을 흘리며 통곡했지만, 이미 엎질러진 썩은 물이었고 그의 헛되고 추악한 욕심이 스스로 불러온 참담하고도 돌이킬 수 없는 결과일 뿐이었다.
※ 7: 진정한 복의 의미, 묵을 쑤며 평범한 행복을 누리는 부부
최부자네 으리으리한 대궐 같은 기와집이 하룻밤 새에 썩은 시궁창 오물통으로 변해버렸다는 흉흉하고도 기막힌 소문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금세 마을 전체는 물론이고 산 너머 이웃 마을들까지 바람처럼 빠르게 퍼져나갔다. 밤새 도깨비에게 단단히 혼쭐이 나서 넋이 나가버리고, 아끼던 부엌과 값비싼 집기들이 모조리 똥통에 빠져 박살이 나버렸다는 통쾌한 이야기에 마을 사람들은 길을 걷다가도 저마다 배를 부여잡고 눈물이 나도록 웃으며 즐거워했다. 평소 가난한 소작농들의 고혈을 짜내며 악독하고 잔인하게 굴던 최부자가 드디어 도깨비의 심판을 받아 마땅한 죗값을 치렀다며, 십 년 묵은 체증이 싹 내려가듯 속 시원해하는 이웃들의 왁자지껄한 웃음소리가 마을 어귀와 주막마다 끊이지 않고 메아리쳤다. 아무도 그의 몰락을 동정하지 않았고, 오히려 탐욕의 끝이 어떤 비참함을 맞이하는지 보여주는 살아있는 본보기가 되었다며 입을 모아 조롱했다.
한편, 아무런 조건 없이 베푼 선의 덕분에 도깨비의 크나큰 은혜를 입어 벼락부자가 된 착한 부부의 기와집은 탐욕으로 무너진 최부자의 집과는 정반대로 여전히 따뜻하고 평화로운 일상을 이어가고 있었다. 길고 매서웠던 겨울이 지나고 얼었던 땅이 녹으며 따뜻하고 생명력 넘치는 봄바람이 살랑살랑 불어오기 시작한 어느 맑은 날, 부부의 널찍하고 깨끗한 기와집 마당에서는 지난겨울 도깨비를 홀렸던 바로 그 고소하고 구수한 메밀묵 냄새가 또다시 진동하고 있었다. 엄청난 재물을 얻어 이 마을 최고의 큰 부자가 되었으니 수십 명의 하인들을 부리며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고 비단옷을 입은 채 편히 살 수도 있었지만, 부부는 예전 가난했던 시절과 다름없이 소박한 무명옷을 입고 직접 소매를 걷어붙인 채 마당에 큰 가마솥을 걸어놓고 땀을 흘리며 정성껏 메밀묵을 쑤고 있었다.
"여보, 아궁이 불길이 너무 셉니다. 조심하시구려. 불이 너무 세면 묵이 바닥에 시커멓게 눌어붙어 쓴맛이 나니 내가 젖은 장작을 섞어 불을 좀 줄이리다. 당신은 그저 묵이 뭉치지 않게 주걱만 살살 잘 저어주시오."
"호호, 제 솜씨를 아직도 못 믿으시고 그리 걱정 마셔요. 제가 이래 봬도 이 동네에서 메밀묵 쑤는 데는 아주 도가 트지 않았습니까. 천 년을 산 영험한 도깨비님도 한입에 홀딱 반하게 만들어 눈물을 쏙 빼게 만든 최고의 솜씨인걸요. 오늘 묵도 아주 기가 막히게 찰지게 나올 테니 기대하셔도 좋습니다."
아내는 무거운 나무 주걱으로 커다란 솥 안의 묵을 천천히, 그리고 애정을 가득 담아 저으며 남편을 향해 환하고 구김살 없는 웃음을 지어 보였다. 남편은 곁에서 소매로 이마의 땀을 훔쳐내고 묵직한 장작을 패면서도, 콧노래를 흥얼거리는 아내의 사랑스러운 모습을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보물을 보듯 흐뭇하고 따뜻한 눈길로 바라보았다. 그들의 곁, 넓은 평상과 마당 한편에는 마을의 헐벗고 가난한 이웃 노인들과 아이들이 옹기종기 모여앉아, 맘씨 좋은 부부가 곧 듬뿍 퍼서 나누어 줄 따끈하고 달콤한 메밀묵을 기다리며 정겨운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부부는 도깨비가 주고 간 막대한 재물을 결코 자신들의 호위호식과 허영만을 위해 쓰지 않았다. 배고픈 자가 있으면 언제든 가마솥에 불을 지펴 묵을 쑤어 배불리 나누어 먹였고, 농사지을 땅이 없어 굶어 죽어가는 이에게는 아무런 대가 없이 비옥한 땅을 빌려주며 진정한 의미의 나눔과 사랑을 묵묵히 실천하고 있었다.
"그나저나 최부자 어른은 아직도 화병이 나서 그 냄새나는 집구석 자리에 몸져누워 계신다지요? 밤마다 똥물에 빠지는 악몽을 꾸며 헛소리를 하신다던데... 참으로 안타깝고도 무서운 일입니다. 그 많은 재산을 쥐고서도 남을 돕는 데는 인색하고 그저 더 가지려는 끝없는 욕심을 조금만 버리셨더라도, 그런 끔찍한 봉변은 당하지 않으셨을 터인데…. 재물이 사람을 잡아먹은 격이 아닙니까."
묵을 기다리던 이웃 아낙 한 명이 쯧쯧 혀를 차며 말을 꺼내자, 주걱을 젓던 아내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며 차분하고 깊이 있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러게 말입니다. 재물이라는 것이 참으로 요긴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마음을 좀먹는 무서운 요물이지요. 내 땀과 진실한 정성이 들어가지 않은 남의 것을, 그것도 헛된 과욕으로 탐하게 되면 결국 그 욕심이 날카로운 칼과 썩은 물이 되어 자신에게로 돌아온다는 것을, 도깨비님께서 아주 매섭고도 분명하게 꾸짖어 가르쳐 주신 것이라 생각합니다. 저희 부부는 그저 그 유난히도 춥고 끔찍했던 밤, 문을 두드린 굶주린 손님에게 저희가 가진 작은 온기를 잠시 나누었을 뿐인데, 하늘이 이리 갚을 수 없을 만큼 큰 상을 주셨으니… 이 어찌 저희만의 것이라 할 수 있겠습니까. 저희는 이 과분한 복을 혼자 쥐고 있지 않고, 여기 계신 마을 분들과 매일매일 나누며 평생토록 뽐내지 않고 겸손하게 살 것입니다. 그것이 도깨비님의 은혜에 진정으로 보답하는 길이라 믿습니다."
묵묵히 불을 조절하던 남편 역시 아내의 깊은 속내에 크게 동감하며 환하게 웃었고, 이윽고 알맞게 잘 익은 묵이 완성되자 김이 모락모락 나는 부드러운 묵이 가득 담긴 사발을 이웃들에게 직접 하나씩 정성껏 건네주기 시작했다.
"자자, 기다리시느라 시장하셨지요! 어서들 드십시오! 아내의 말마따나 오늘따라 유독 묵이 아주 찰지고 윤기 나게 잘 쑤어졌습니다. 겉치레로 번쩍이는 금은보화 백 상자가 있다 한들 무슨 소용이겠습니까. 이렇게 옹기종기 모여앉아 나누어 먹는, 정성과 사랑이 듬뿍 담긴 이 따뜻한 메밀묵 한 그릇에 담긴 마음만 한 보물이 세상천지에 또 어디 있겠습니까. 자, 이 묵 든든히 드시고 여기 모인 분들 모두 아프지 마시고 올 한 해도 건강하고 다복하시길 진심으로 바랍니다!"
마당 한가득 울려 퍼지는 사람들의 행복하고 소박한 웃음소리와 따뜻하고 구수한 묵 냄새가 포근한 봄기운과 함께 온 마을 구석구석으로 잔잔하게 퍼져나갔다. 그저 흔하디흔한 메밀묵 한 그릇으로 시작된 기상천외하고도 신비로운 도깨비 소동은, 시커먼 탐욕과 이기심으로 가득 찼던 교만한 자에게는 평생 씻을 수 없는 쓰디쓴 징벌과 교훈을 남겼고, 자신의 작은 것을 기꺼이 내어주며 베풀 줄 아는 선하고 겸손한 이들에게는 더 큰 나눔의 행복과 평안을 듬뿍 남긴 채, 오랫동안 사람들의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는 아름다운 전설로 깊이 남게 되었다. 검게 그을린 가마솥에서 뭉게뭉게 피어오르는 새하얀 김 사이로, 이웃들과 묵을 나누는 착한 부부의 환하고 맑은 미소가 눈 부신 봄 햇살을 받아 그 어떤 황금보다도 찬란하게 반짝이고 있었다.
유튜브 엔딩멘트:
여러분, 도깨비마저 감동시켜 춤추게 만든 구수한 메밀묵 한 그릇의 이야기, 재미있게 들으셨나요? 탐욕에 눈이 멀어 헛된 꾀를 부린 최부자의 씁쓸하고도 통쾌한 결말과, 대가 없이 정성을 다해 묵을 내어주던 부부의 따뜻한 마음이 우리에게 긴 여운을 남겨줍니다. 세상을 살아가는 데 있어 진짜 보물은 번쩍이는 금덩이나 남을 짓밟고 얻은 재물이 아니라, 누군가를 위해 내어주는 밥 한 그릇의 다정하고 순수한 정성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오늘 밤엔 여러분도 사랑하는 분들과 마주 앉아 따뜻한 음식 정겹게 나누시길 바라며, 저희는 다음에도 마음이 훈훈해지는 재미있는 옛날이야기로 다시 찾아오겠습니다! 구독과 좋아요, 알림 설정 잊지 마시고 꾹 눌러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