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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밀묵 한 사발에 곳간이 가득찬 집 [청구야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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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트로:
옛날 어느 산골 마을에 찢어지게 가난하지만 마음씨 곱고 지혜로운 며느리가 살았습니다. 어느 날부터인가 밤마다 부엌에 덩치 큰 도깨비가 나타나 기웃거리자, 며느리는 무서워하기는커녕 아까운 기색 없이 구수한 메밀묵을 쑤어 대접했지요. 그 정성에 감동한 도깨비가 은혜를 갚겠다며 밤새도록 온 동네 부잣집 곳간의 나락을 훔쳐다 마당에 산더미처럼 쌓아놓는 바람에, 자칫하면 온 가족이 도둑으로 몰릴 큰 낭패를 보게 됩니다! 과연 지혜로운 며느리는 이 엉뚱한 도깨비를 어떻게 타일러 위기를 넘겼을까요? 또 도깨비의 복을 가로채려던 옆집 욕심쟁이 영감의 방해를 어떻게 통쾌하게 물리쳤을까요? 『청구야담』에 전해 내려오는 구수하고 배꼽 잡는 이야기, 지금 시작합니다.
※ 1: 부엌 창문을 기웃거리는 털보 손님
옛날 조선 땅 강원도 어느 깊은 산골에, 구름도 쉬어 간다는 다래골이라는 작은 마을이 있었습니다. 이 마을 한구석에는 비록 가진 논밭 한 뙈기 없이 화전을 일구며 가난하게 살아가지만, 동네에서 효성스럽고 화목하기로 소문난 김 서방네 네 식구가 오순도순 살고 있었습니다.
연로하신 시아버지와 시어머니, 그리고 나무꾼인 남편 김 서방까지 모두 법 없이도 살 만큼 착한 사람들이었지만, 그중에서도 이 집안의 진짜 보물은 작년에 시집온 스무 살 새댁, 며느리 순덕이었습니다. 순덕은 얼굴도 보름달처럼 복스럽고 환했지만, 무엇보다 배포가 크고 마음씨가 넓어 아무리 살림이 궁색해도 늘 웃음을 잃지 않는 지혜로운 여인이었습니다.
찬 바람이 옷깃을 파고들던 어느 늦가을 밤이었습니다. 내일이 바로 시어머니의 환갑날이었건만, 가난한 살림에 고깃국 한 사발 올릴 형편이 못 되자 순덕은 가을 내내 산비탈에서 조금씩 거두어 아껴두었던 메밀을 꺼내어 맷돌에 곱게 갈았습니다. 시어머니가 평소 가장 좋아하시는 구수하고 탱글탱글한 메밀묵이라도 배불리 잡숫게 해 드리고 싶었던 것이지요.
어두운 부엌 아궁이에 솔가지를 지피자, 가마솥에서 메밀 풀 쑤는 구수하고도 고소한 냄새가 하얀 김과 함께 모락모락 피어올라 밤하늘로 퍼져 나갔습니다. 순덕이 이마에 맺힌 땀방울을 소매로 닦으며 나무 주걱으로 솥단지를 천천히 젓고 있을 때였습니다.
갑자기 부엌 바깥쪽 봉창문 너머에서 누군가 코를 킁킁거리며 침을 꼴깍 삼키는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킁킁... 아따, 그 냄새 한번 기가 막히게 구수하구먼. 꼴깍..."
순덕이 깜짝 놀라 호롱불을 들고 부엌 봉창문 쪽을 돌아보았습니다. 창호지가 찢어진 구멍 사이로, 웬 시커멓고 덥수룩한 털이 잔뜩 난 솥뚜껑만 한 얼굴 하나가 대롱대롱 매달려 가마솥 안을 뚫어져라 들여다보고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머리 위에는 뭉툭한 혹 같은 뿔이 하나 솟아 있었고, 눈알은 호박만 한데 입가에는 군침이 줄줄 흐르고 있었습니다.
보통 아낙네 같았으면 그 괴상망측한 몰골을 보자마자 "도깨비야!" 하고 비명을 지르며 그 자리에서 기절초풍을 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담력이 보통이 아닌 며느리 순덕은 놀라서 뒷걸음질 치기는커녕, 그 험상궂은 얼굴에서 꼬르륵거리는 배고픈 소리가 나는 것을 듣고는 이내 빙그레 미소를 지었습니다.
'호오라, 뒷산 고목나무에 산다는 도깨비 양반이 우리 집 메밀묵 쑤는 구수한 냄새에 홀려서 마실을 내려온 모양이로구나. 덩치는 산만 한 양반이 얼마나 배가 고팠으면 남의 집 부엌 창문에 코를 박고 침을 흘리고 있을까.'
순덕은 조금도 무서워하는 기색 없이, 부엌에서 제일 큰 놋대접을 꺼내어 갓 쑤어낸 따끈따끈하고 말랑말랑한 메밀묵을 대접이 넘치도록 수북하게 퍼 담았습니다. 거기다가 달래를 송송 썰어 넣은 간장 양념장과 들기름까지 한 숟가락 듬뿍 둘러서, 부엌 뒷문을 활짝 열고 댓돌 위에 정성스럽게 내려놓았습니다.
"여보시오, 밤길 지나가시는 손님! 남의 집 부엌 창문 밖에서 찬 바람 맞으며 냄새만 맡지 마시고, 이리 와서 따끈한 메밀묵 한 사발 들고 가시지요. 비록 가난한 살림이라 차린 것은 없으나, 시어머님 생신상에 올리려고 정성껏 쑨 묵이니 맛은 기가 막힐 것이옵니다."
부엌문 뒤에 숨어 있던 덩치 큰 도깨비는, 새댁이 자기를 보고도 비명 한 번 안 지르고 오히려 김이 모락모락 나는 메밀묵 대접을 내놓자 눈이 휘둥그레졌습니다. 도깨비가 머리를 긁적이며 어기적어기적 걸어 나오는데, 키가 장대만 하고 어깨가 문짝만 한 털보 도깨비였습니다.
"허어, 이거 참 민망하구먼. 내가 사실은 뒷산에 사는 도깨비 김가라 하오. 다른 집 아낙네들은 내 그림자만 봐도 빗자루를 던지고 소금을 뿌려대는데, 새댁은 어째 나를 보고도 눈 하나 깜짝 안 하고 이 귀한 메밀묵을 내어주는 것이오?"
"손님이 배가 고파 찾아오셨는데 도깨비면 어떻고 사람이면 어떻겠습니까. 굶주린 배를 채우는 데는 귀천이 없는 법이지요. 식기 전에 어서 많이 잡수세요."
순덕의 따뜻하고 상냥한 말에 털보 도깨비는 코끝이 찡해졌습니다. 평생 도깨비로 태어나 메밀묵을 제일 좋아했건만, 이렇게 대접이 넘치도록 따뜻한 메밀묵을 양념장까지 얹어 대접받아 보기는 오백 년 만에 처음 있는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아이고, 고맙소, 새댁! 내가 이 은혜는 죽어도 못 잊겠구먼! 잘 먹겠소이다!"
도깨비는 놋대접을 두 손으로 들고는, 숟가락도 쓰지 않고 입을 쩍 벌려 그 큰 사발의 메밀묵을 후루룩 짭짭 단숨에 들이켰습니다. 얼마나 맛있게 먹는지 양 볼이 터져라 오물거리며 그릇 바닥까지 혀로 싹싹 핥아먹고는, 배를 통통 두드리며 만족스러운 트림을 꺼억, 하고 내뱉었습니다.
"크하하! 오백 년 묵은 체증이 다 내려가는 맛이로구나! 여보시오, 착한 새댁! 오늘 밤부터 내가 밤마다 조금씩 찾아올 터이니, 그때마다 이 구수한 메밀묵 한 사발씩만 내어줄 수 있겠소? 내 공짜로 얻어먹지는 않고, 조만간 새댁네가 평생 먹고살 큰 보답을 꼭 해드리리다!"
"아이구, 메밀가루 떨어질 때까지는 얼마든지 쑤어 드릴 수 있으니 언제든 배고프시거든 들르시지요."
그날 밤 이후로 털보 도깨비는 밤마다 부엌 뒷문으로 찾아왔고, 순덕은 귀한 메밀이 줄어드는 것도 아까워하지 않고 늘 첫 솥에서 뜬 가장 맛있는 메밀묵 한 사발을 도깨비에게 대접했습니다. 그렇게 열흘이 지나가던 어느 날 밤, 메밀묵을 실컷 얻어먹은 도깨비는 오늘 밤에야말로 이 착한 새댁의 은혜를 단단히 갚아주겠다며 주먹을 불끈 쥐고 어둠 속으로 사라졌습니다.
※ 2: 도깨비의 엉뚱한 보은과 날벼락
도깨비가 큰소리를 치고 돌아간 다음 날 이른 새벽이었습니다. 아침밥을 지으려고 일찍 눈을 뜬 며느리 순덕은, 방문을 열고 마당으로 나섰다가 눈앞에 펼쳐진 광경을 보고는 그만 숨이 턱 막혀 들고 있던 세숫대야를 바닥에 떨어뜨리고 말았습니다.
쨍그랑, 하는 요란한 소리에 놀라 시아버지와 시어머니, 그리고 남편 김 서방까지 헐레벌떡 방문을 열고 뛰어나왔습니다. 그리고 마당을 가득 메운 기괴한 물건들을 본 식구들은 모두 입을 떡 벌린 채 그 자리에 얼어붙고 말았습니다.
세상에나, 어제저녁까지만 해도 휑하던 초가집 좁은 마당과 헛간, 심지어 초가지붕 위까지 누런 볏가마니와 나락 멍석들이 산더미처럼 수북하게 쌓여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마당이 얼마나 꽉 찼는지 발 디딜 틈조차 없었고, 가마니 수가 어림잡아도 수백 석은 넘어 보였습니다.
"아, 아니 이게 대체 무슨 일이냐! 아가, 자고 일어났더니 왜 우리 집 마당에 웬 나락 가마니들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는 것이냐!"
시아버지가 눈이 휘둥그레져서 떨리는 손으로 가마니 하나를 만져보는데, 남편 김 서방이 가마니 겉면에 붓으로 적힌 글씨를 보고는 얼굴이 백지장처럼 하얗게 질려 소리를 질렀습니다.
"아, 아버님! 임자! 큰일 났소, 큰일 났어! 이 가마니에 적힌 이름을 보시오! 이건 아랫말 최 부잣집 곳간에 있던 나락 가마니요! 그리고 저 옆에 있는 건 바로 우리 옆집 욕심쟁이 황 영감네 타작마당에 쌓아두었던 나락이 아니오!"
"뭐, 뭐라고? 동네 부잣집들 나락이 왜 다 우리 집 마당에 와 있단 말이냐! 아이고, 날 밝아서 동네 사람들이 이 꼴을 보면 우리가 밤새 도둑질을 해 온 줄 알고 관아로 끌고 가 멍석말이를 할 것 아니냐! 아이고, 우리 집안 이제 다 죽었구나!"
시아버지와 시어머니, 남편이 발을 동동 구르며 사시나무 떨듯 떨기 시작했습니다. 사실 도깨비라는 놈들이 원래 재주는 신통방통하지만 머리는 맹꽁이처럼 단순해서, 어디서 새 재물을 만들어 올 줄은 모르고 은혜를 갚는답시고 밤새도록 온 동네 부잣집 곳간 문을 따고 들어가 나락 가마니를 통째로 짊어져다 순덕네 마당에 쌓아놓았던 것입니다.
식구들은 다 죽게 생겼다고 울상이 되었지만, 지혜로운 며느리 순덕은 당황하지 않고 침착하게 손가락을 입에 대며 식구들을 진정시켰습니다.
"아버님, 어머님, 서방님! 너무 놀라지 마시고 어서 방 안으로 들어가 계시옵소서. 이 일은 제가 밤마다 메밀묵을 쑤어 주던 뒷산 도깨비 양반이 우리에게 은혜를 갚는답시고 철없이 저지른 일이옵니다. 아직 동이 트려면 한 식경은 더 남았으니, 제가 지금 당장 도깨비 양반을 불러서 날이 밝기 전에 원래 자리로 다 돌려놓게 하겠사옵니다!"
순덕은 식구들을 방으로 들여보낸 뒤, 부엌 뒷문으로 달려가 숟가락으로 빈 놋대접을 땅땅 두드리며 나직하지만 엄한 목소리로 불렀습니다.
"뒷산 도깨비 김 서방님! 아직 안 가고 저기 담장 너머에 숨어 계신 거 다 아니까 어서 이리 나와 보시지요!"
순덕의 부름에, 아니나 다를까 담장 뒤 감나무 위에서 새댁이 기뻐하는 모습을 구경하려고 숨어 있던 털보 도깨비가 헤벌쭉 웃으며 쿵, 하고 마당으로 뛰어내렸습니다.
"헤헤헤, 새댁! 마당에 쌓인 나락 산더미 보고 깜짝 놀랐지요? 내가 새댁한테 얻어먹은 메밀묵 값을 하려고, 밤새도록 도깨비 방망이 들고 뛰어다니며 동네에서 제일 알곡이 꽉 찬 나락 가마니만 골라 온 것이라오! 자, 이제 새댁네도 부자 됐으니 나 칭찬 좀 해 주시오!"
도깨비가 우쭐대며 가슴을 펴자, 순덕은 웃기는커녕 두 팔짱을 딱 끼고 눈썹을 곤두세우며 도깨비를 매섭게 쏘아보았습니다.
"칭찬이오? 여보시오, 도깨비 김 서방님! 내가 김 서방님을 의리 있고 점잖은 양반인 줄 알고 귀한 메밀묵을 대접했더니만, 세상에, 보답을 한답시고 우리 온 식구를 도둑놈으로 만들어 감옥에 보내고 곤장을 맞아 죽게 만들 작정이었소?"
순덕의 서슬 퍼런 호통에 도깨비는 칭찬을 들을 줄 알았다가 날벼락을 맞은 듯 두 눈을 껌뻑거리며 당황했습니다.
"어, 어라? 새댁, 그게 무슨 섭섭한 말씀이오? 내가 왜 새댁네 식구들을 감옥에 보낸단 말이오?"
"생각을 좀 해 보시오! 이 나락 가마니마다 최 부잣집이니 황 영감네니 주인 이름이 시퍼렇게 적혀 있거늘, 날이 밝아 주인들이 자기네 곳간이 털린 것을 알고 찾아오면 누가 훔쳐 갔다고 생각하겠소? 도깨비가 가져다 놓았다고 하면 사또 나리가 그 말을 믿어주겠소, 아니면 우리 식구들을 도둑으로 몰아 몽둥이찜질을 하겠소? 남의 눈물 나게 훔쳐 온 재물로 부자가 되느니, 차라리 평생 시래기 죽을 먹고 사는 게 백번 낫소! 나는 이런 도둑질한 나락은 한 톨도 필요 없으니, 지금 당장 닭이 울기 전에 원래 있던 집 곳간마다 톨 하나 빠뜨리지 말고 그대로 돌려놓으시오! 만일 날 밝을 때까지 안 치우면, 다시는 메밀묵이고 뭐고 구경도 못 할 줄 아시오!"
순덕의 구구절절 옳고도 추상같은 꾸지람에, 덩치 큰 털보 도깨비는 얼굴이 홍당무처럼 붉어져서 머리에 난 뿔을 벅벅 긁었습니다.
"아, 아이고... 내 짧은 소견으로 그 생각까지는 미처 못 했구먼유! 새댁 말이 백번 옳소! 내가 은혜를 갚으려다 되레 큰일 낼 뻔했소이다! 새댁, 화내지 마시오! 내 당장 눈 깜짝할 사이에 원래 있던 자리로 감쪽같이 돌려놓을 테니 걱정 마시오!"
혼쭐이 난 도깨비는 도깨비불을 번쩍 일으키며 회오리바람처럼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신통력을 부려 가마니를 한 번에 수십 개씩 어깨에 들쳐 메고 날아다니더니, 새벽닭이 꼬끼오 하고 울기 직전에 마당에 쌓여 있던 수백 석의 나락을 짚푸라기 하나 남기지 않고 원래 주인네 곳간으로 감쪽같이 다 돌려놓았습니다.
※ 3: 머리를 싸맨 도깨비의 진짜 선물
나락 소동이 있은 뒤로 사흘 동안, 털보 도깨비는 부끄러웠는지 밤이 되어도 순덕네 부엌에 코빼기도 비치지 않았습니다. 순덕은 도깨비가 시무룩해 있을 것을 알고, 사흘째 되던 날 밤에도 변함없이 구수한 메밀묵을 듬뿍 쑤어 댓돌 위에 올려놓았습니다.
자정이 넘어가자, 담장 너머에서 풀이 죽은 털보 도깨비가 머리를 싸매고 끙끙 앓는 소리를 내며 어슬렁어슬렁 걸어 들어왔습니다.
"에구구, 머리야... 평생 안 쓰던 대가리를 사흘 밤낮으로 굴렸더니 머리에 쥐가 나고 뿔이 다 흔들리는구먼..."
순덕이 웃음을 참으며 부엌문을 열고 반갑게 맞이했습니다.
"아이구, 김 서방님 오셨습니까. 내가 너무 심하게 나무라서 삐치신 줄 알았지 뭡니까. 자, 어서 식기 전에 메밀묵부터 잡수세요."
"아이고, 새댁! 내가 삐치기는요! 남의 물건 훔쳐 오지 말고 정당하게 부자 만들어 줄 묘책을 짜내느라, 뒷산 바위 위에 앉아 사흘 밤낮으로 머리를 쥐어뜯었지 뭐요! 자, 메밀묵 먹기 전에 내 말부터 들어보시오!"
도깨비는 눈을 반짝이며 순덕 앞으로 바짝 다가앉아 목소리를 낮추었습니다. 그런데 이때, 순덕도 도깨비도 미처 몰랐던 사실이 하나 있었습니다. 바로 담장 너머에서 이 집을 몰래 훔쳐보고 있는 시커먼 눈초리가 있었다는 점입니다.
그는 바로 옆집에 사는 동네 최고의 구두쇠이자 욕심쟁이인 황 영감이었습니다. 며칠 전 새벽, 자기네 타작마당 나락이 밤새 어디론가 사라졌다가 새벽녘에 다시 제자리에 돌아온 해괴한 일을 겪은 황 영감은, 분명 옆집 가난뱅이 김 서방네가 무슨 수상한 짓을 꾸미는 것 같아 오늘 밤 담장 구멍에 귀를 바짝 대고 엿듣고 있었던 것입니다.
담장 밖에 황 영감이 숨어 있는 줄도 모르고, 털보 도깨비는 신이 나서 순덕에게 자신이 생각해 낸 비책을 털어놓았습니다.
"새댁, 저기 마을 앞 개울 건너에 가면, 옛날에 큰 홍수가 나서 자갈밭이 되어버린 바람에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는 버려진 황무지 땅 백 마지기가 있지 않소?"
"예, 있지요. 돌멩이만 가득하고 물도 안 통하는 쓸모없는 땅이라, 관아에서도 세금도 안 받고 헐값에 내놓았지만 아무도 안 사는 버려진 땅이지요."
"바로 그 땅이오! 내일 아침 날이 밝거든, 새댁 남편을 시켜 관아에 가서 엽전 몇 푼만 주고 그 버려진 돌밭 백 마지기를 사서 땅문서를 정식으로 받아 오게 하시오! 주인 없는 땅을 정식으로 돈 주고 사는 것이니 이건 도둑질이 아니지 않소!"
"하오나 김 서방님, 그 돌밭을 사서 무엇에 쓰겠습니까? 호미 날만 부러지고 풀 한 포기 안 자라는 땅인데요."
"허허, 거기서부터가 바로 이 도깨비 김 서방의 몫이지요! 새댁네가 땅문서만 받아 오면, 내일 밤부터 내가 도깨비 친구들 백 명을 불러 모아서 밤마다 그 땅의 돌멩이를 다 골라내고, 깊은 산속의 썩은 낙엽 흙과 거름을 날라다 부어서, 내년 봄에는 씨앗만 뿌려도 나락이 남의 집 세 배는 열리는 천하제일의 기름진 옥토로 만들어 놓겠단 말이오! 어떻소, 이만하면 도둑질도 아니고 새댁네가 당당하게 만석꾼이 될 묘책이 아니겠소?"
도깨비의 말에 순덕은 무릎을 탁 치며 탄복했습니다.
"세상에나! 김 서방님, 어쩌면 그렇게 기막히고도 훌륭한 생각을 해내셨습니까! 주인 없는 황무지를 일구어 옥토로 만드는 것이니 하늘에 부끄러울 것도 없고 관아에서 트집 잡을 일도 없겠습니다! 정말 고맙습니다, 김 서방님!"
"크하하! 이제야 새댁한테 칭찬을 듣는구먼! 자, 그럼 나는 이제 마음 편히 메밀묵이나 먹어 볼까!"
도깨비가 신이 나서 메밀묵을 먹는 동안, 담장 밖에서 이 이야기를 처음부터 끝까지 다 엿들은 욕심쟁이 황 영감은 너무나 놀라 눈알이 튀어나올 지경이었습니다.
'아니, 저 가난뱅이 집구석에 밤마다 복 도깨비가 드나들고 있었단 말인가! 메밀묵 몇 사발 쑤어 주고 백 마지기 땅을 기름진 옥토로 바꾼다고? 에잉, 배 아파라! 남이 잘되는 꼴은 내가 죽어도 못 보지!'
황 영감은 당장 내일 아침에 자기가 먼저 관아로 달려가 그 돌밭을 사버릴까 생각했지만, 가만히 생각해 보니 도깨비는 순덕네를 도와주려고 땅을 일구는 것이지 자기가 그 땅을 사면 도깨비가 거름을 부어줄 리가 만무했습니다.
그리하여 그다음 날 아침, 김 서방이 관아에 가서 엽전 몇 닢을 내고 그 버려진 돌밭 백 마지기를 사 오자마자, 도깨비들은 약속대로 밤마다 무리를 지어 나타나 돌을 치우고 산속의 기름진 부엽토를 날라다 붓기 시작했습니다. 불과 보름 만에 허옇던 자갈밭은 시커멓고 기름기가 좌르르 흐르는 천하의 명당 논밭으로 변해갔고, 이듬해 가을이 되자 순덕네 논에서는 이삭이 주렁주렁 열린 황금빛 나락이 수천 석이나 쏟아져 나왔습니다.
하루아침에 다래골 제일가는 부자가 된 김 서방네를 바라보며, 옆집 황 영감은 밤마다 배가 아파 데구루루 구르며 도깨비를 자기 집으로 빼앗아 올 검은 계략을 꾸미기 시작했습니다.
※ 4: 황 영감의 얄팍한 꼼수
순덕네 집안이 도깨비가 일구어 준 백 마지기 옥토에서 쏟아져 나온 수천 석의 나락으로 하루아침에 큰 부자가 되자, 담장 너머 욕심쟁이 황 영감은 배가 아파서 밥도 못 먹고 밤잠도 이루지 못했습니다. 어제까지만 해도 자기네 집에 와서 쌀 한 되만 꾸어 달라고 고개를 조아리던 가난뱅이들이, 이제는 번듯한 기와집을 새로 짓고 곳간마다 곡식이 넘쳐나 동네 사람들에게 인심을 팍팍 쓰고 있었으니, 심술보가 덕지덕지 붙은 황 영감으로서는 복장이 터질 노릇이었지요.
"에잉, 배 아파라! 아이고, 내 창자가 꼬여서 죽겠네! 저 김 서방네 집구석에 굴러들어 온 복 도깨비 놈을 어떻게든 우리 집으로 빼앗아 와야 내가 발을 뻗고 자지, 이대로는 억울해서 못 살겠다!"
황 영감은 머리를 싸매고 사흘 밤낮으로 잔꾀를 굴린 끝에, 도깨비와 순덕네 사이를 갈라놓고 도깨비를 자기 집으로 유인할 아주 고약하고도 치사한 꼼수를 하나 생각해 냈습니다.
"옳지! 도깨비라는 놈들이 원래 성미가 불같아서, 자기를 대접해 주던 사람이 한 번만 박대를 하거나 못 먹을 것을 내놓으면 그 길로 정이 뚝 떨어져서 원수로 돌변한다고 했지! 내가 오늘 밤 순덕네 부엌에 몰래 숨어들어가 도깨비가 먹을 메밀묵에다 흉측한 장난을 쳐놓으면, 화가 머리끝까지 난 도깨비 놈이 바로 옆집인 우리 집 부엌으로 넘어올 것이 아니냐!"
그날 밤, 황 영감은 며느리를 시켜 자기 집 부엌에는 아주 맛있고 고소한 메밀묵 한 상을 차려 댓돌 위에 내놓게 했습니다. 그리고 자기는 주머니 속에 독한 소금 한 봉지와 고춧가루를 가득 챙겨 넣고는, 밤이 깊어지기를 기다려 고양이처럼 살금살금 순덕네 집 뒷담장을 넘어갔습니다.
마침 순덕은 오늘 밤에도 도깨비 김 서방이 찾아올 것을 알고, 부엌 댓돌 위에 따끈한 메밀묵 한 사발을 정성껏 차려놓고는 시부모님 이부자리를 봐드리러 안방으로 들어간 참이었습니다.
어둠 속에서 부엌 댓돌로 다가간 황 영감은, 김이 모락모락 나는 메밀묵 사발을 보자 음흉한 웃음을 흘리며 주머니에서 소금 봉지와 고춧가루를 꺼내어 사발 속에다 듬뿍 들이부었습니다. 그리고는 숟가락으로 휘휘 저어 감쪽같이 섞어 놓은 뒤, 얼른 자기 집 담장 너머로 숨어들었습니다.
잠시 후, 자정이 되자 뒷산에서 휘파람을 불며 내려온 털보 도깨비 김 서방이 오늘도 구수한 메밀묵 먹을 생각에 입이 귀에 걸려 순덕네 부엌 뒷문으로 들어섰습니다.
"헤헤헤, 우리 마음씨 고운 새댁이 오늘도 잊지 않고 내 몫으로 메밀묵을 수북하게 떠 놓았구먼! 어디, 오늘 밤에도 맛나게 한번 먹어 볼까!"
털보 도깨비는 아무런 의심도 없이 놋대접을 두 손으로 번쩍 들어 올려, 입을 쩍 벌리고 메밀묵을 한 입 가득 후루룩 들이켰습니다.
그런데 그 순간, 도깨비의 두 눈이 호박만 하게 튀어나오더니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습니다! 입안 가득 씹히는 것은 구수하고 부드러운 메밀묵이 아니라, 혀가 오그라들 정도로 짜디짠 소금 덩어리와 입천장이 불타는 듯한 매운 고춧가루 범벅이었던 것입니다!
"푸하학! 퉤, 퉤퉤! 아, 아이고 짜라! 아이고 매워라! 내 혀! 내 혀가 다 타들어 가네! 쿨럭, 쿨럭!"
털보 도깨비는 들고 있던 메밀묵 사발을 바닥에 떨어뜨리고는, 목을 부여잡고 마당을 데구루루 구르며 기침을 해댔습니다.
그때, 담장 너머에서 이 광경을 훔쳐보고 있던 황 영감이 때를 놓치지 않고 자기 집 부엌문을 활짝 열며 들기름 냄새가 진동하는 고소한 메밀묵 상을 들고 나와 큰소리로 외쳤습니다.
"아이고, 도깨비 나리! 그 옆집 김 서방네 년놈들이 이제 부자가 됐다고 도깨비 나리를 귀찮게 여겨서, 다시는 오지 말라고 메밀묵에다 소금하고 고춧가루를 타 놓는 것을 내가 아까 다 보았소이다! 은혜도 모르는 배은망덕한 것들 같으니라고! 도깨비 나리, 그깟 인정머리 없는 집구석은 쳐다보지도 마시고, 이리 건너오셔서 내가 정성껏 쑤어 놓은 이 맛있는 메밀묵이나 잡수시지요!"
황 영감의 간사한 외침을 들은 털보 도깨비는 매운 입을 손등으로 닦으며 벌떡 일어났습니다. 머리통이 단순한 도깨비였으니, 당장 눈이 뒤집혀 순덕네 집을 부숴버리고 황 영감네 집으로 건너갈 법도 했습니다.
바로 그때, 밖에서 나는 소란스러운 소리를 듣고 안방에서 지혜로운 며느리 순덕이 버선발로 뛰어나왔습니다. 바닥에 쏟아진 메밀묵과 괴로워하는 도깨비, 그리고 담장 너머에서 메밀묵 상을 들고 서 있는 황 영감을 본 순덕은 단번에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눈치를 챘습니다.
순덕은 당황하지 않고 부엌에서 시원한 동치미 국물 한 사발을 급히 떠 와서 도깨비에게 내밀며 또렷한 목소리로 말했습니다.
"김 서방님! 우선 이 시원한 물로 입안부터 헹구시지요! 그리고 담장 너머에 계신 황 영감님 말씀을 곰곰이 한번 생각해 보시옵소서! 만일 제가 정말로 김 서방님이 귀찮아서 소금을 넣었다면, 어찌 아까운 메밀묵을 새로 쑤어서 거기에 비싼 소금과 고춧가루를 버려가며 넣었겠습니까? 차라리 처음부터 묵을 안 쑤고 부엌문을 걸어 잠갔겠지요! 게다가 제가 소금을 넣는 것을 밤중에 남의 집 담장 밖에서 황 영감님이 어찌 보셨단 말입니까? 보나 마나 우리 집에 오시는 김 서방님을 자기네 집으로 빼앗아 가려고, 황 영감님이 몰래 담을 넘어와 소금을 뿌려놓고 미리 메밀묵 상까지 차려 대기하고 있었던 것이 틀림없사옵니다!"
순덕의 조리 있고 명쾌한 설명에, 동치미 국물로 입을 헹구던 털보 도깨비의 머릿속이 번개처럼 환해졌습니다.
"어라? 듣고 보니 새댁 말이 백번 맞구먼! 아, 내가 아까 뒷산에서 내려올 때 보니까 저 황 영감 놈이 우리 새댁네 부엌에서 도둑고양이처럼 빠져나가는 궁둥이를 언뜻 본 것 같더니만, 그 손에 묻은 하얀 가루가 바로 소금이었구나!"
도깨비가 황 영감의 손가락 끝에 아직도 하얗게 묻어 있는 소금기와 고춧가루를 발견하고는, 머리 위의 뿔이 시뻘겋게 달아오르며 노발대발 소리를 질렀습니다.
"야, 이 천하에 간사하고 욕심 많은 황 영감 놈아! 네놈이 감히 나를 바보 천치로 알고, 내 은인인 착한 새댁과 내 사이를 이간질하려고 내 귀한 메밀묵에 소금을 쳐?! 내 오늘 밤 네놈의 그 고약한 심보를 단단히 고쳐놓을 줄 알아라!"
계략이 탄로 난 황 영감은 기겁을 하여 메밀묵 상을 내던지고 안방으로 도망쳐 들어가 문을 걸어 잠갔습니다.
※ 5: 똥거름 폭탄을 맞은 황 영감
안방 이불 속에 머리까지 폭 파묻고 숨어 있던 황 영감은, 설마 도깨비가 문 잠근 안방까지 들어오랴 싶어 가슴을 쓸어내렸습니다.
하지만 단단히 화가 난 털보 도깨비 김 서방이 그냥 물러설 리가 없었습니다. 도깨비는 순덕이 새로 떠다 준 진짜 구수한 메밀묵 한 사발을 맛있게 비운 뒤, 팔을 걷어붙이고 뒷산을 향해 휘파람을 길게 불었습니다.
"어이, 뒷산 도깨비 형제들아! 오늘 밤 나하고 재미난 구경거리 하나 만들러 가자!"
휘파람 소리가 끝나기가 무섭게, 산속에서 수십 마리의 도깨비들이 우르르 몰려 내려왔습니다. 털보 도깨비의 지휘 아래 도깨비들은 밤새도록 온 동네 집집마다 돌아다니며 뒷간에 가득 차 있는 구린내 나는 똥거름과 오물을 지게와 양동이로 퍼 나르기 시작했습니다.
"영차, 영차! 욕심쟁이 황 영감네 집에 거름 복을 듬뿍 내려주자! 지붕 위에도 붓고, 마당에도 붓고, 대청마루에도 아낌없이 쏟아부어라!"
도깨비들이 밤새도록 퍼 나른 오물들이 황 영감네 기와집 마당과 지붕 위로 폭포수처럼 쏟아져 내렸습니다.
다음 날 아침, 날이 밝아 방문을 열고 나온 황 영감네 식구들은 눈앞에 펼쳐진 대참사에 그만 까무러치고 말았습니다. 아흔아홉 칸 기와집 마당이 발목까지 푹푹 빠지는 누런 똥바다로 변해 있었고, 지붕 처마 끝에서는 구린내 나는 오물이 주르륵주르륵 비 오듯 떨어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온 동네 개들이 코를 막고 도망갈 지경이니, 황 영감은 한 달 내내 하인들과 함께 코를 싸매고 마당의 똥을 치우느라 허리가 다 휘어질 지경이었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호된 벌을 받고도, 욕심에 눈이 먼 황 영감은 반성하기는커녕 순덕네를 향한 앙심과 복수심만 더욱 불타올랐습니다.
"이놈의 도깨비와 김 서방네 년놈들! 나를 이토록 망신을 주고 똥바다에 빠뜨려? 좋다, 도깨비 놈이 밤에는 힘을 쓰겠지만 대낮에 관아의 사또 앞에서는 힘을 못 쓸 것 아니냐! 내가 그 도깨비가 일구어 놓은 개울 건너 백 마지기 황금 들판을 법의 힘으로 통째로 빼앗아 버리고 말겠다!"
황 영감은 고을 관아의 아전 가운데 평소 뇌물을 주고받으며 친하게 지내던 악질 이방을 몰래 찾아갔습니다. 그리고는 황금 한 덩어리를 뒷돈으로 찔러 주며, 기막힌 사기극을 꾸몄습니다.
바로 순덕네가 작년에 관아에서 사들인 그 개울 건너 백 마지기 땅이, 사실은 황 영감네 할아버지가 오십 년 전에 먼저 사두었던 땅이라는 '가짜 옛날 땅문서'를 감쪽같이 위조해 낸 것이었습니다! 종이를 일부러 연기에 그을리고 흙물을 들여 마치 오십 년 묵은 문서처럼 꾸민 뒤, 관아의 가짜 도장까지 찍었으니 누가 봐도 진짜 옛 문서처럼 보였습니다.
가을 추수가 한창이던 어느 날 대낮, 황 영감은 관아의 포졸들을 앞세우고 순덕네 집으로 쳐들어와 가짜 땅문서를 흔들며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습니다.
"여봐라, 김 서방네 식구들은 모두 나오너라! 개울 건너 그 백 마지기 옥토는 원래 우리 할아버지가 오십 년 전에 사두었던 우리 가문의 땅이거늘, 네놈들이 주인 없는 땅인 줄 알고 관아를 속여 헐값에 가로챈 것이다! 내가 어제 다락방을 뒤지다가 이 오십 년 된 진짜 땅문서를 찾았으니, 그 땅과 올해 거둔 나락 수천 석은 전부 내 것이다! 지금 당장 사또 나리 앞으로 가서 재판을 받자!"
날벼락 같은 소리에 시아버지와 남편 김 서방은 사색이 되어 벌벌 떨었습니다. 문서를 보니 오십 년 전 날짜와 관아의 붉은 관인이 선명하게 찍혀 있어, 순박한 김 서방네로서는 도무지 꼼짝없이 땅을 다 빼앗기고 감옥에 끌려갈 판이었습니다.
식구들이 통곡하며 주저앉으려 할 때, 며느리 순덕이 침착하게 앞으로 나서며 시부모님과 남편을 안심시켰습니다.
"아버님, 서방님, 걱정하지 마시옵소서. 아무리 가짜 문서를 그럴싸하게 꾸몄다 한들 하늘과 귀신은 다 알고 계시옵니다. 황 영감님 말씀대로 지금 당장 관아의 사또 나리 앞으로 가시지요. 제가 그 문서가 가짜라는 것을 만천하에 밝혀내겠사옵니다!"
순덕은 조금도 기죽지 않고 치마폭에 무엇인가를 조심스럽게 싸서 품에 안은 뒤, 식구들을 이끌고 당당하게 관아로 향했습니다. 그리고 낮이라 나뭇가지 위에서 투명한 몸으로 낮잠을 자고 있던 털보 도깨비 김 서방도, 이 괘씸한 소식을 듣고는 눈에 불을 켜고 투명 망토를 쓴 채 순덕의 뒤를 졸졸 따라나섰습니다.
※ 6: 도깨비의 신통력과 지혜로운 며느리
고을 관아의 동헌 마당에는, 하루아침에 황금 들판으로 변한 백 마지기 땅의 주인이 누구인지 가리는 재판을 구경하기 위해 온 고을 백성들이 구름떼처럼 몰려들었습니다.
대청 위에 앉은 사또는 황 영감이 바친 오십 년 전 땅문서와, 김 서방이 작년에 관아에서 발급받은 새 땅문서를 번갈아 살펴보며 고개를 갸우뚱거렸습니다. 이미 황 영감에게 뇌물을 받아먹은 이방이 옆에서 사또의 귀에 대고 간사하게 속삭였습니다.
"사또 나리, 법도에 따르면 같은 땅에 문서가 두 개일 때는 먼저 주인이었던 옛 문서가 우선이옵니다. 황 영감의 문서는 종이 색깔도 누렇고 오십 년 전 관인이 찍혀 있으니, 저 땅은 황 영감에게 돌려주심이 마땅한 줄 아옵니다."
사또가 이방의 말을 듣고 고개를 끄덕이며 막 판결봉을 내려치려던 순간이었습니다. 대청 아래에 무릎을 꿇고 있던 며느리 순덕이 조용히 손을 들며 또렷한 목소리로 아뢰었습니다.
"사또 나리! 판결을 내리시기 전에 소인의 말을 한 번만 들어주시옵소서! 저 황 영감이 가져온 오십 년 전 땅문서는 어젯밤에 급하게 만들어 낸 새빨간 가짜 문서이옵니다!"
황 영감이 펄쩍 뛰며 소리를 질렀습니다.
"어허! 저 요망한 여편네가 감히 관아 앞에서 무슨 거짓말을 하느냐! 이 문서는 우리 집 다락방 궤짝 속에서 오십 년 동안 보관해 온 진짜 문서란 말이다!"
순덕은 차분하게 미소를 지으며 황 영감을 돌아보았습니다.
"황 영감님, 그 문서가 정말로 오십 년 전에 쓰인 문서가 맞다면, 그 땅이 원래 어떤 땅이었는지 누구보다 잘 아시겠군요? 사또 나리, 저 개울 건너 땅은 지금으로부터 꼭 삼십 년 전 큰 홍수가 났을 때 물길이 바뀌면서 생겨난 땅이옵니다! 오십 년 전에는 땅이 아니라 시퍼런 강물이 흐르던 깊은 강바닥이었는데, 황 영감님네 할아버지께서는 어찌 물속에 잠긴 강바닥을 농사짓겠다고 돈을 주고 사셨단 말씀이옵니까? 물고기 농사라도 지으시려고 사셨나이까?"
순덕의 송곳처럼 날카로운 지적에, 동헌 마당에 모인 구경꾼들 사이에서 와아, 하는 탄성과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습니다. 마을의 나이 많은 노인들도 모두 고개를 끄덕이며 "맞아, 맞아! 오십 년 전에는 거기가 깊은 강물이어서 나룻배가 다니던 곳이었지!" 하고 증언을 했습니다.
얼굴이 시뻘게진 황 영감이 말을 더듬거리며 우기려 하자, 순덕은 결정적인 두 번째 증거를 꺼내 들었습니다.
"그뿐만이 아니옵니다, 사또 나리! 옛날에 정말로 오십 년 동안 다락방에 보관된 종이라면 마른 곰팡이 냄새가 나야 마땅하거늘, 저 황 영감의 문서에서는 왜 어젯밤에 아궁이 연기에 그을린 매캐한 솔가지 냄새와, 글씨 번지지 말라고 바른 들기름 냄새가 진동을 하는지 한번 맡아보시옵소서! 제가 오늘 아침에 쑤어 온 이 메밀묵에 바른 들기름 냄새와 똑같은 냄새가 날 것이옵니다!"
순덕이 품에서 메밀묵이 담긴 보자기를 꺼내어 열자, 바로 그때 사또의 책상 옆에 투명한 모습으로 서 있던 털보 도깨비 김 서방이 나섰습니다. 도깨비는 순덕이 내놓은 메밀묵을 보자 군침을 흘리며 신통력을 부려, 사또의 책상 위에 놓인 황 영감의 가짜 문서 위로 바람을 후, 하고 불었습니다.
그러자 놀라운 일이 벌어졌습니다! 도깨비의 바람이 닿자마자, 가짜 문서에 발라놓았던 누런 흙물과 그을음이 연기처럼 싹 날아가 버리더니, 어젯밤에 새로 만든 새하얀 한지와 아직 채 마르지도 않은 붉은 인주 자국이 사또의 눈앞에 적나라하게 드러난 것이 아니겠습니까!
거기서 끝이 아니었습니다. 투명 도깨비는 옆에서 벌벌 떨고 있는 악질 이방의 옷고름을 툭 잡아당겨 풀어버렸습니다. 그러자 이방의 품속에서 황 영감에게 뇌물로 받았던 누런 황금 덩어리가 동헌 마당 한가운데로 데구루루 굴러떨어졌습니다!
"어라? 내 황금이 왜..."
이방이 화들짝 놀라 황금을 주우려 하자, 투명 도깨비가 이방의 뒤통수와 황 영감의 뒤통수를 잡고 두 사람의 이마를 쾅, 하고 부딪치게 만들었습니다.
"아야야! 내 이마야!"
눈앞에서 문서의 위조가 드러나고 뇌물까지 굴러떨어진 것을 본 사또는, 노발대발하여 책상을 내리치며 불호령을 내렸습니다.
"이 천하에 고약한 사기꾼 놈들 같으니라고! 감히 가짜 문서를 만들어 선량한 백성의 땅을 빼앗으려 하고, 아전 놈과 결탁하여 관아를 능멸하렷다! 여봐라! 저 황 영감 놈과 이방 놈을 당장 끌어내어 볼기가 터지도록 곤장 백 대씩을 치고, 황 영감의 재산 절반을 몰수하여 억울한 누명을 쓸 뻔한 김 서방네에게 위로금으로 내어주어라!"
"아이고, 사또 나리! 살려주십시오! 아야야, 내 엉덩이야!"
동헌 마당에 묶인 황 영감과 이방의 볼기짝 위로 곤장이 비 오듯 쏟아졌고, 투명 도깨비가 옆에서 곤장 끝에 힘을 실어주는 바람에 황 영감은 엉덩이가 박살이 나서 석 달 열흘을 엎드려 누워 지내야만 했습니다.
지혜로운 며느리 순덕의 슬기와 털보 도깨비 김 서방의 도움으로 땅도 지키고 큰 상금까지 받게 된 김 서방네 식구들은, 고을 사람들의 우레와 같은 박수를 받으며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날 밤, 순덕네 마당에서는 가마솥 세 개에 구수한 메밀묵을 가득 쑤어 온 동네 사람들과 보이지 않는 도깨비 친구들까지 배불리 나누어 먹는 큰 잔치가 벌어졌습니다. 그 후로도 순덕은 한결같은 마음으로 시부모님을 봉양하고 밤마다 도깨비 김 서방에게 따뜻한 메밀묵을 대접하며, 자손 대대로 만석꾼의 부귀영화를 누리고 행복하게 잘 살았다고 전해집니다.
유튜브 엔딩멘트:
오늘 들려드린 『청구야담』 속 메밀묵 한 사발로 만석꾼이 된 지혜로운 며느리와 털보 도깨비 이야기, 재미있게 들으셨나요? 도깨비가 훔쳐 온 부정한 재물을 단호히 물리친 며느리의 바른 마음씨와, 욕심쟁이 영감의 사기극을 통쾌하게 깨부순 지혜가 듣는 내내 가슴을 후련하게 해 줍니다. 작은 메밀묵 한 사발이라도 아낌없이 나누는 따뜻한 인심이 결국 가장 큰 복을 불러오는 법이지요. 오늘 이야기가 즐거우셨다면 구독과 좋아요, 그리고 따뜻한 댓글 부탁드립니다. 저는 다음 시간에도 더욱 구수하고 흥미진진한 옛날이야기로 찾아오겠습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