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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 도포의 노인: 조선의 마을을 지키던 도깨비 수장의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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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스크립션
영조 시대, 강원도 깊은 산골 마을에 닥친 역병과 흉년. 절망에 빠진 마을에 붉은 도포를 입은 노인이 나타났다. 그는 마을을 구했지만, 정체는 도깨비 수장이었다. 인간과 도깨비의 경계에서 마을을 지키던 그가 왜 인간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을까? 400년 전 조선 산골마을에서 전해 내려오는 기묘한 이야기, 인간의 욕심과 도깨비의 의리가 얽힌 전설을 들려드립니다.
후킹멘트
붉은 도포의 노인이 사라진 후, 마을 사람들은 매년 추석날 산 정상에 제물을 올렸다고 합니다. 그런데 어느 해, 그 의식을 잊은 후 마을에 또다시 재앙이 찾아옵니다. 다음 편에서는 도깨비 수장의 분노와 마을 사람들의 마지막 선택, 그리고 도깨비 방망이의 진정한 힘이 밝혀집니다. 도깨비와 인간의 100년 약속, 그 마지막 이야기를 기대해주세요.
★ 영조 시대 강원도 산골 마을, 역병과 흉년으로 고통받는 마을 모습
하늘은 푸르고 깊었지만, 산골 마을 사람들의 마음은 구름보다 어두웠다. 강원도 깊은 산속, 태백산맥이 품은 작은 마을 청송리에 닥친 재앙은 시작된 지 벌써 석 달째였다. 처음에는 갑작스러운 가뭄이었다. 논과 밭이 말라붙었고, 마을을 감싸 도는 맑은 개울도 바닥을 드러냈다. 그리고 가뭄이 한창일 때, 원인 모를 역병이 마을을 덮쳤다.
"또 한 집에서 상여가 나가는구먼..."
마을 입구에 서 있던 노인 김 서방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의 주름진 얼굴에는 깊은 슬픔이 어려 있었다. 삼십 가구 남짓 되는 작은 마을에서 이미 여섯 집에서 초상이 났다. 대부분 어린아이들과 노인들이었다.
"하늘이 우리를 저주하신 게지. 뭔 죄가 그리 커서..."
김 서방의 옆에 선 박 씨 할머니가 중얼거렸다. 그녀는 지난주에 손자를 잃었다. 열병으로 사흘을 앓다가 눈을 감은 것이다.
마을 한가운데 우물가에는 부녀자들이 모여 있었다. 바닥이 보일 정도로 얕아진 우물물을 긷기 위해 순서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의 얼굴은 하나같이 지쳐 있었고, 두려움으로 가득했다.
"곡식도 말라죽고, 사람도 죽고... 우리가 무슨 큰 죄를 지었길래 하늘이 이리 노하시나요?"
젊은 아낙 하나가 울먹이며 말했다. 그녀의 배는 불러 있었고, 얼굴은 핏기 없이 창백했다. 다른 여인들이 그녀를 위로했지만, 그들의 목소리에도 희망은 보이지 않았다.
마을 끝자락, 작은 초가에서는 훈장 이 선생이 제자들에게 글을 가르치고 있었다. 평소에는 열 명이 넘던 학동들이 이제는 다섯 명만 남아 있었다. 나머지는 병으로 눕거나, 부모를 따라 마을을 떠났다.
"오늘은 여기까지 하자. 내일 아침에 다시 만나기로 하자."
훈장은 일찍 수업을 마쳤다. 그는 창밖을 바라보며 깊은 생각에 잠겼다. 마을이 이렇게 계속 쇠락해간다면 곧 학당도 문을 닫아야 할 터였다. 학생들이 하나둘 인사를 하고 나가는 소리가 훈장의 귀에 들렸지만, 그의 마음은 이미 다른 곳에 가 있었다.
해가 서산으로 기울고, 마을에 긴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사람들은 하나둘 집으로 돌아갔다. 저녁이 되면 마을은 더욱 적막해졌다. 병을 두려워한 탓에 이웃 간에 왕래도 줄었고, 저녁에 모여 이야기꽃을 피우던 풍경도 옛날이야기가 되어버렸다.
마을 뒤편 작은 산에서는 젊은 포수 강 철이 사냥을 마치고 내려오고 있었다. 그의 어깨에는 작은 산토끼 한 마리가 매달려 있었다. 예전 같았으면 멧돼지나 노루를 잡아왔을 텐데, 이제는 산에서도 짐승을 찾아보기 힘들었다.
"이러다 우리 마을이 통째로 사라지는 건 아닐까..."
강 철은 마을을 내려다보며 중얼거렸다. 어둠이 내리는 마을은 예전의 활기찬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워진 것 같았다. 그때, 강 철의 눈에 이상한 것이 보였다. 마을에서 조금 떨어진 깊은 숲속에서 붉은 빛이 어른거리는 것이었다. 처음에는 해질녘 햇살이 만든 환영인 줄 알았지만, 자세히 보니 그것은 분명 사람의 형체였다. 붉은 도포를 입은 누군가가 마을을 응시하고 있었다.
강 철이 그 모습을 확인하기 위해 눈을 비비는 순간, 붉은 형체는 숲속으로 사라져버렸다. 그는 이상한 느낌을 안고 마을로 내려왔다. 그가 알지 못했던 것은, 그날 밤 청송리의 운명이 바뀌기 시작했다는 사실이었다.
★ 산속의 동굴, 도깨비 수장(붉은 도포의 노인)과 도깨비들의 회의
태백산 깊은 골짜기, 인간의 발길이 닿지 않는 비밀의 동굴 안. 붉은 빛이 동굴 내부를 밝히고 있었다. 그 빛의 원천은 동굴 중앙에 피워놓은 거대한 모닥불이었다. 불꽃은 일반적인 모닥불과는 다르게 붉은색과 푸른색이 교차하며 타오르고 있었다.
모닥불 주변으로 기이한 형체들이 둘러앉아 있었다. 도깨비들이었다. 크고 작은 뿔을 가진 이들, 이상하게 생긴 방망이를 든 이들, 얼굴이 새빨갛거나 푸른 이들... 그들의 모습은 제각각이었지만, 모두 한 곳을 주시하고 있었다. 동굴의 가장 안쪽, 바위로 만들어진 높은 의자에 앉아 있는 존재를.
"청송리의 상황이 심각해졌다. 이대로 가다간 마을 전체가 사라질 것이다."
의자에 앉은 노인의 목소리가 동굴 안에 울려 퍼졌다. 그는 다른 도깨비들과는 달리 완전한 인간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흰 수염이 가슴까지 내려오는 노인의 모습이었고, 붉은 도포를 입고 있었다. 그의 눈동자만이 때때로 푸른빛을 발하며 그가 인간이 아님을 알려주고 있었다.
"수장님, 인간들의 일에 왜 우리가 관여해야 하죠? 그냥 내버려두면 될 것을..."
뾰족한 뿔을 가진 젊은 도깨비가 불만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자 붉은 도포의 노인, 도깨비 수장의 눈에서 섬뜩한 푸른 불꽃이 타올랐다.
"네가 이곳에 온 지 몇 년이 되었느냐?"
"백... 백 년 정도 됐습니다, 수장님."
"그렇다면 너는 모르겠구나. 청송리와 우리의 관계를. 300년 전, 그 마을이 처음 세워졌을 때부터 우리는 그들을 지켜왔다."
도깨비 수장의 목소리가 무거워졌다. 그의 눈에는 오랜 세월의 무게가 담겨 있었다.
"인간들은 모르지만, 이 산은 원래 우리의 영역이었다. 그들이 마을을 세우려 할 때, 우리는 그들을 쫓아낼 수 있었다. 하지만 당시 마을의 창건자가 우리에게 제안을 했지. 매년 추석에 산 정상에 제물을 바치는 대신, 마을을 허락해달라고."
수장의 이야기에 도깨비들이 귀를 기울였다. 대부분의 젊은 도깨비들은 이 이야기를 처음 듣는 듯했다.
"우리는 그 제안을 받아들였고, 이후 300년 동안 그 약속은 지켜졌다. 하지만 5년 전부터 마을 사람들이 제사를 지내지 않기 시작했다. 옛 약속을 잊은 것이지."
"그래서 저주를 내리신 건가요?"
작은 도깨비 하나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아니다." 수장이 단호하게 대답했다. "이번 재앙은 우리의 소행이 아니다. 오히려 이건 더 강력한 존재의 분노다. 마을 사람들이 약속을 저버렸기에 우리의 보호도 사라진 것뿐이지."
동굴 안이 조용해졌다. 모닥불의 불꽃만이 타오르는 소리가 들릴 뿐이었다.
"그럼 어쩌시려고요, 수장님?"
오래된 도깨비 하나가 물었다. 그는 다른 이들보다 수장과 가까워 보였다.
"내가 직접 마을에 가보려 한다."
수장의 말에 모든 도깨비들이 놀란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수장님! 인간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는 것은 우리의 오랜 금기입니다. 게다가 수장님께서 가시면 누가 이 산을 지키고..."
"내가 없는 동안 네가 이곳을 맡아라."
수장이 오래된 도깨비를 가리키며 말했다. 그리고 그는 의자에서 일어나 모닥불 쪽으로 걸어갔다. 불꽃이 그의 주변에서 더욱 강렬하게 타올랐다.
"나의 결정은 바뀌지 않을 것이다. 인간들이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 해도, 우린 그들을 외면할 수 없다. 그것이 이 산의 수호자로서 우리의 의무다."
그의 목소리에는 결연함이 담겨 있었다. 도깨비들은 더 이상 반대하지 않았다. 그들은 수장의 결정을 따르기로 했다.
"내가 돌아올 때까지 산의 경계를 단단히 지켜라. 그리고... 만약 내가 돌아오지 못한다면, 새로운 수장을 뽑도록 해라."
붉은 도포의 노인은 마지막 말을 남기고 동굴을 나섰다. 그의 뒤로 도깨비들의 걱정 어린 시선이 따랐다. 노인의 모습이 동굴 입구에서 사라지자, 밖에서는 갑자기 바람이 거세게 불기 시작했다. 그것은 마치 오랜 시간 동안 잠들어 있던 무언가가 깨어난 것 같은 느낌이었다.
붉은 도포를 입은 노인은 산길을 따라 천천히 청송리를 향해 걸어갔다. 그의 걸음은 느렸지만 확고했다. 400년 만에 처음으로, 도깨비 수장은 자신의 진정한 모습을 감추고 인간 세상으로 향하고 있었다.
★ 마을 입구, 붉은 도포의 노인이 마을에 처음 나타나는 장면
새벽녘, 아직 어둠이 채 가시지 않은 시간. 청송리 마을의 동쪽 입구에 한 노인의 모습이 나타났다. 그는 붉은 도포를 입고 있었고, 한 손에는 단단해 보이는 지팡이를 짚고 있었다. 길고 하얀 수염이 바람에 나부꼈다. 노인은 잠시 발걸음을 멈추고 마을을 바라보았다. 그의 눈에 슬픔과 결의가 어렸다.
"300년 만이구나... 이 모습으로 너희들 사이에 서는 것은."
노인의 중얼거림이 새벽 공기 속에 스며들었다. 그는 깊은 숨을 들이쉰 후, 다시 걸음을 옮겼다. 마을로 들어서자, 첫 번째로 마주친 것은 초라한 모습의 서낭당이었다. 한때는 깨끗하게 관리되던 서낭당이 이제는 먼지와 거미줄로 뒤덮여 있었다.
노인은 서낭당 앞에 멈춰 서서 고개를 숙였다. 그의 입에서 이상한 주문이 흘러나왔다. 알아들을 수 없는 언어였지만, 그 소리가 퍼지자 서낭당 주변의 공기가 미세하게 떨리는 듯했다. 노인이 지팡이로 서낭당을 가리키자, 서낭당의 낡은 줄이 스스로 움직여 정돈되었다.
"적어도 이곳만큼은 본래의 모습을 되찾아야지."
노인은 다시 걸음을 옮겨 마을 안쪽으로 들어갔다. 이른 아침이었지만, 몇몇 주민들이 이미 일어나 물을 긷거나 아침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들은 낯선 노인을 보고 호기심 어린 눈으로 바라보았다.
"웬 노인네가 저렇게 좋은 도포를 입고 다니시나? 행상은 아닌 것 같은데..."
물동이를 든 아낙이 옆 사람에게 속삭였다. 이 마을에 낯선 사람이 오는 일은 드물었다. 특히 요즘처럼 역병이 도는 시기에는 더욱 그랬다.
노인은 마을 우물가로 향했다. 우물가에는 이미 몇몇 주민들이 모여 있었다. 그들은 바닥을 드러낸 우물을 걱정스럽게 들여다보고 있었다.
"아마도 이번 주까지밖에 못 쓸 것 같소. 다음 주부터는 개울물을 길어와야 할 텐데..."
한 남자가 한숨을 쉬며 말했다. 그때, 붉은 도포의 노인이 그들 앞에 나타났다. 주민들은 놀란 듯 노인을 바라보았다.
"이 마을에 묵을 곳을 찾고 있소. 하룻밤만이라도 좋으니, 이 늙은이를 재워줄 집이 있을까요?"
노인의 목소리는 깊고 위엄이 있었다. 그 목소리에 주민들은 잠시 말을 잃었다.
"저... 저희 마을에 역병이 돌고 있습니다. 손님을 맞이하기엔 상황이 좋지 않아요."
한 여인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역병은 알고 있소. 그리고 그것이 바로 내가 이곳에 온 이유요."
노인의 말에 주민들의 호기심이 커졌다.
"혹시 의원이십니까?"
젊은 남자가 희망에 찬 목소리로 물었다.
"의원은 아니오. 하지만 이 마을을 도울 수 있을 것이오. 나를 객사에 묵게 해주시오. 그리고 해질녘에 마을 어른들을 객사로 불러주시오. 내가 할 말이 있소."
노인의 말은 명령처럼 들렸지만, 그 안에는 온화함도 담겨 있었다. 주민들은 서로 눈빛을 교환했다. 그들에게는 이미 잃을 것이 없었다. 역병과 가뭄으로 죽어가는 마을에, 어쩌면 이 노인이 구원의 손길이 될지도 모른다는 희망이 피어났다.
"제 집은 작지만, 손님을 모실 수 있습니다. 저를 따라오시죠."
훈장 이 선생이 앞으로 나섰다. 그는 마을에서 가장 학식이 높은 사람이었고, 주민들의 신뢰를 받고 있었다.
"감사하오."
노인은 그를 따라갔다. 그들이 떠나자, 우물가에 모여 있던 사람들 사이에서 수군거림이 시작되었다.
"저분이 누구실까?"
"아니, 이런 때에 왜 우리 마을에 오셨을까?"
"도움이 된다면 뭐라도 해볼 수 있지 않을까?"
희망과 의심이 뒤섞인 목소리들이 아침 공기 속에 퍼졌다. 그들은 알지 못했지만, 붉은 도포의 노인이 그들의 운명을 완전히 바꿔놓을 것이라는 사실을.
멀리서 포수 강 철이 이 모든 광경을 지켜보고 있었다. 어제 산에서 본 붉은 형체가 바로 이 노인임을 알아차렸다. 그의 눈에는 의심이 어렸다. 그는 노인과 훈장이 사라진 방향을 오래도록 바라보았다. 무언가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직감이 그를 사로잡았다.
★ 마을 한가운데, 도깨비 수장이 기우제를 지내고 비를 내리는 장면
해질녘, 마을 한가운데 넓은 마당에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소문은 빠르게 퍼졌고, 거의 모든 마을 사람들이 이곳에 모였다. 병든 이들까지도 가족들의 부축을 받으며 나와 있었다. 그들의 눈빛에는 절망 속에서 피어난 작은 희망이 어려 있었다.
훈장의 집에서 붉은 도포를 입은 노인이 천천히 걸어 나왔다. 그의 뒤로 마을의 유지들이 따라 나왔다. 노인의 얼굴은 엄숙했고, 한 손에는 이상한 무늬가 새겨진 지팡이를 들고 있었다.
"여러분, 이분이 우리 마을을 도와주신다고 합니다. 모두 정중히 대해주시기 바랍니다."
마을 이장이 노인을 소개했다. 사람들 사이에서 수군거림이 일었다. 그들은 반신반의하는 눈빛이었지만, 노인을 향한 기대감도 있었다.
"나는 멀리서 온 나그네요. 이 마을의 고통을 듣고 찾아왔소."
노인의 목소리가 마당에 울려 퍼졌다. 그 목소리에는 이상한 울림이 있었고, 그것은 듣는 이들의 마음을 진정시키는 듯했다.
"이 마을에 내린 재앙은 하늘의 노여움 때문이 아니오. 땅의 기운이 막혀 생긴 일이오. 오늘 밤, 내가 그 기운을 풀어줄 것이니, 모두 희망을 잃지 마시오."
노인의 말에 사람들의 눈빛이 밝아졌다. 그는 마당 중앙으로 걸어가 지팡이로 땅을 세 번 두드렸다. 그러자 이상하게도 땅에서 미약한 진동이 느껴졌다.
"물을 가져오시오. 마을에 남은 마지막 물이라도 좋소."
노인의 요청에 몇몇 사람들이 물동이를 가져왔다. 그것은 우물에 남아있던 마지막 물이었다. 노인은 그 물을 받아 허공에 뿌렸다. 물방울이 공중에서 이상하게 멈춘 듯 보였다가, 갑자기 빛나기 시작했다.
"오래전 이 땅을 지키던 영혼들이여, 내 목소리를 들어라. 이 땅의 진정한 주인들이여, 이 마을에 자비를 베풀어라."
노인이 알 수 없는 언어로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그의 주변에 이상한 바람이 일었고, 지팡이 끝에서 푸른빛이 새어 나왔다. 사람들은 두려움과 경이로움이 뒤섞인 표정으로 이 광경을 지켜보았다.
갑자기 노인의 눈이 푸르게 빛났다. 그것은 순간이었지만, 가까이에 있던 몇몇은 그 이상한 광경을 목격했다. 노인은 지팡이를 하늘로 향해 들었다.
"비여, 내려라!"
그의 외침과 함께, 맑던 하늘에 갑자기 구름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하늘은 검은 구름으로 뒤덮였고, 멀리서 천둥소리가 들려왔다. 사람들은 놀라움에 입을 다물지 못했다.
첫 빗방울이 떨어졌다. 그리고 또 한 방울, 또 한 방울... 이내 굵은 빗줄기가 마을 전체를 적시기 시작했다. 가뭄에 타들어가던 대지가 단비를 받아 마셨다. 사람들은 환호성을 지르며 비를 맞았다. 아이들은 기쁨에 뛰어놀았고, 어른들은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
"기적이다! 기적이야!"
"하늘이 우리를 버리지 않으셨어!"
기쁨의 함성이 비 소리에 섞여 울려 퍼졌다. 그러나 노인의 얼굴은 여전히 엄숙했다. 그는 알고 있었다. 이것은 시작에 불과하다는 것을. 그는 조용히 빗속을 걸어 훈장의 집으로 돌아갔다. 그의 뒤로 포수 강 철이 의심스러운 눈빛으로 그를 지켜보고 있었다.
그날 밤, 비는 계속해서 내렸다. 오랜 가뭄 끝에 내린 단비는 메마른 땅을 적시고, 말라붙었던 개울에 다시 물을 채웠다. 그리고 이상하게도, 비가 내리기 시작한 후부터 마을을 괴롭히던 역병의 기세가 조금씩 약해지는 듯했다.
★ 마을 주막, 노인의 정체에 의심을 품는 훈장과 젊은 포수의 대화
비가 내린 지 사흘째, 마을의 작은 주막은 오랜만에 활기를 되찾았다. 사람들은 술잔을 기울이며 기쁨을 나누었다. 역병도 기세가 한풀 꺾인 듯, 새로운 환자가 더 이상 발생하지 않았다.
주막 구석에는 훈장 이 선생과 포수 강 철이 마주 앉아 있었다. 그들의 표정은 다른 사람들과 달리 무거웠다.
"선생님, 그 노인이 정말 누구라고 생각하십니까?"
강 철이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훈장은 술잔을 돌리며 깊은 생각에 잠겼다.
"나도 확실히 모르겠네. 하지만 그분은 보통 사람이 아닌 것 같아. 내가 글을 많이 읽었다고는 하지만, 그분의 지식은 나를 훨씬 뛰어넘어. 밤에 들리는 그분의 중얼거림은 내가 들어본 적 없는 언어야."
훈장의 말에 강 철은 더욱 표정이 어두워졌다.
"저는 그분이 처음 마을에 오기 전날, 산에서 이상한 모습을 보았습니다. 붉은 형체가 마을을 내려다보고 있었어요. 그리고 다음 날, 그 붉은 도포를 입은 노인이 나타났죠."
강 철의 말에 훈장은 눈을 크게 떴다.
"그렇다면... 네 말은 그분이..."
"네, 저는 그분이 인간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어쩌면 도깨비나 산신령 같은..."
강 철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훈장이 그의 입을 손으로 막았다.
"조심해! 그런 말을 함부로 해서는 안 돼. 그분이 누구든, 지금 우리 마을을 구하고 계셔. 그게 중요한 거야."
훈장의 눈빛은 진지했다. 그는 주변을 살핀 후, 다시 목소리를 낮추었다.
"사실... 나도 이상한 점을 발견했어. 어젯밤, 그분이 마당에 나가 있길래 창문으로 살펴봤는데, 그분의 그림자가... 보통 사람의 그림자가 아니었어. 뿔이 있는 것 같기도 하고..."
훈장의 말에 강 철은 흠칫 놀랐다. 그의 의심이 맞았던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할까요? 마을 사람들에게 알려야 하나요?"
강 철이 걱정스럽게 물었다. 훈장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 지금은 아냐. 그분이 우리에게 해를 끼치려 했다면, 이미 그렇게 했을 거야. 오히려 우리를 돕고 계셔. 하지만... 왜 그러시는지 이유가 궁금하네."
훈장이 말을 마치자, 주막 문이 열리고 다른 마을 사람들이 들어왔다. 그들의 얼굴은 밝았다.
"이 선생, 강 포수! 들었소? 병으로 죽어가던 김씨네 아들이 깨어났다오! 이틀 동안 의식 없이 누워있던 아이가 정신을 차렸다오!"
그 소식에 주막 안의 사람들이 환호했다. 훈장과 강 철 역시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그 노인분이 약을 달여주셨다는군. 그 약을 먹고 아이가 깨어났다네."
또 다른 사람이 덧붙였다. 주막은 더욱 시끌벅적해졌다.
훈장은 강 철을 바라보았다. 그들의 눈빛에는 복잡한 감정이 어려 있었다. 의심과 경이로움, 그리고 감사함이 뒤섞인 감정.
"어쨌든, 지금은 그분을 지켜봐야 할 것 같네. 그리고... 무슨 일이 있어도 그분을 위험에 빠뜨리면 안 돼. 알겠지?"
훈장의 말에 강 철은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그의 마음속에는 여전히 의문이 남아있었다. 인간이 아닌 존재가 왜 이토록 인간들을 돕고 있는 것인지.
주막 밖, 어두운 밤하늘에는 별이 총총 빛나고 있었다. 그리고 마을 어딘가에서는 붉은 도포의 노인이 조용히 밤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 산 정상, 도깨비 수장과 포수의 대면, 진실이 밝혀지는 장면
보름달이 떠오른 밤, 마을 뒤편 작은 산의 정상. 붉은 도포의 노인은 홀로 서서 달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지팡이는 땅에 꽂혀 있었고, 그 주변으로 이상한 푸른빛이 감돌고 있었다.
노인은 깊은 생각에 잠겨 있었다. 마을에 온 지 일주일, 그의 힘으로 비를 내리고 강 주변의 막힌 기운을 풀어주었다. 역병도 조금씩 물러가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알고 있었다. 이것은 임시방편일 뿐, 진정한 해결책이 되지 못한다는 것을.
"누구시죠?"
갑작스러운 목소리에 노인은 돌아봤다. 포수 강 철이 활을 든 채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얼굴에는 결연한 의지가 보였다.
"젊은이, 이 늙은이를 찾아 여기까지 올라왔구나."
노인의 목소리는 평온했다. 그는 조금도 놀라지 않은 듯했다.
"당신이 인간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습니다. 우리 마을에 무슨 의도를 가지고 오신 겁니까?"
강 철의 질문에 노인은 잠시 침묵했다. 그리고 천천히 고개를 들어 달을 바라보았다.
"네 말이 맞다. 나는 인간이 아니다. 이 산의 도깨비 수장이지."
노인의 말에 강 철은 활시위를 당겼다. 하지만 노인은 미소를 지으며 계속 말했다.
"하지만 두려워할 필요는 없다. 내가 이 마을에 온 것은 해치려는 것이 아니라 돕기 위해서다."
노인은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기 시작했다. 300년 전 마을이 세워질 때 맺은 약속, 매년 추석에 바치던 제물, 5년 전부터 끊어진 의식에 대한 이야기를.
"그렇다면... 지금의 재앙은 그 약속을 지키지 않아서 온 것입니까?"
강 철이 물었다. 활시위를 당기던 손에 힘이 빠졌다.
"직접적으로는 아니다. 하지만 간접적으로는 그렇다. 우리 도깨비들이 이 산을 지키고 있는 동안은 다른 어둠의 기운들이 이 마을에 접근하지 못했다. 하지만 의식이 끊어지자 우리의 보호막도 약해졌고, 그 틈을 타 어둠의 기운이 스며든 것이지."
노인의 설명에 강 철은 활을 내렸다. 그의 눈에 이해의 빛이 어렸다.
"그래서 마을을 구하러 오신 겁니까?"
"그렇다. 이 산과 마을은 300년 동안 함께해왔다. 비록 인간들이 약속을 잊었다 해도, 나는 이 산의 수호자로서 책임을 다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노인의 목소리에는 깊은 슬픔이 묻어있었다. 그때, 갑자기 그의 몸이 흔들렸다. 강 철이 놀라 다가가자, 노인의 얼굴이 창백해져 있었다.
"괜찮으십니까?"
"인간 세상에 오래 머물면 우리의 힘이 약해진다. 나는 곧 산으로 돌아가야 한다."
노인의 말에 강 철은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마을은 아직 완전히 회복되지 않았습니다. 당신이 떠나면..."
"걱정 마라. 내가 떠나기 전에 할 일이 하나 남아있다."
노인은 지팡이를 뽑아 강 철에게 건넸다. 그것은 가까이서 보니 보통 지팡이가 아니라 도깨비 방망이였다.
"이것을 가지고 마을로 돌아가거라. 내일 아침, 이것을 마을 한가운데 있는 오래된 느티나무 아래에 묻어라. 그러면 이 땅의 기운이 다시 살아날 것이고, 마을은 재앙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 있을 것이다."
강 철은 조심스럽게 방망이를 받아들었다. 그것은 생각보다 무거웠고, 손에 쥐는 순간 이상한 따뜻함이 전해졌다.
"그리고 한 가지 더. 앞으로 매년 추석에 산 정상에 제물을 바쳐라. 약속을 지킨다면, 우리 도깨비들이 계속해서 이 마을을 지켜줄 것이다."
노인의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그리고 그의 몸이 서서히 투명해지기 시작했다.
"잠깐만요! 당신의 이름은...?"
강 철이 급하게 물었다.
"나의 이름은 중요하지 않다. 다만, 300년 전 이 마을을 처음 세운 사람... 그는 내 오랜 친구였다. 그의 자손들이 여전히 이 마을에서 평화롭게 사는 모습을 보니 기쁘구나."
노인의 모습이 점점 사라져갔다. 마지막 순간, 그의 진짜 모습이 잠시 드러났다. 크고 위엄 있는 도깨비의 모습, 머리에는 뿔이 솟아있고 눈에서는 푸른 불꽃이 타오르는 모습이었다.
"약속을 잊지 말거라, 젊은이."
그 말을 남기고, 붉은 도포의 노인은 완전히 사라졌다. 강 철은 한동안 그 자리에 서서 손에 든 도깨비 방망이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결심한 듯 고개를 끄덕이고 마을로 향했다.
그날 밤 이후, 청송리 마을은 기적적으로 회복되기 시작했다. 역병은 사라졌고, 농작물은 다시 자라났다. 사람들은 이것이 모두 붉은 도포의 노인 덕분이라고 믿었지만, 그가 정확히 누구였는지 아는 사람은 강 철과 훈장 단 두 사람뿐이었다. 그리고 그들은 그 비밀을 지켰다.
매년 추석마다, 마을 사람들은 산 정상에 제물을 바치는 의식을 다시 시작했다. 그리고 그 후로 청송리는 어떤 재앙도 겪지 않고 평화롭게 지낼 수 있었다고 한다.
유튜브 엔딩멘트
여러분은 지금 "붉은 도포의 노인: 조선의 마을을 지키던 도깨비 수장의 이야기"를 들으셨습니다. 조선시대 강원도 깊은 산골 마을에 내려오는 이 전설은 인간과 도깨비 사이의 오래된 약속, 그리고 그 약속이 가진 힘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우리 조상들은 자연과 함께 살아가며, 눈에 보이지 않는 존재들과의 공존을 중요시했습니다. 산신령, 도깨비, 여우 등 다양한 존재들과의 관계를 통해 자연의 섭리를 이해하고 존중했지요. 이런 전통은 오늘날의 마을 굿이나 제사 문화에도 남아있습니다.
다음 이야기에서는 밤마다 나타난다는 도깨비 장터의 비밀, 그리고 그곳에서 거래되는 인간의 욕망과 운명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드리겠습니다. 구독과 좋아요를 통해 다음 이야기도 놓치지 마세요. 또한 여러분이 알고 있는 지역의 도깨비 전설이 있다면, 댓글로 알려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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