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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큰 복을 부른 도깨비와의 약속 , 돈 갚으러 갔더니 금덩이가 되어
부제
가난한 등짐장수가 비 오는 밤 서낭당에서 도깨비를 만나 돈을 빌리고, 욕심내지 않고 약속을 지킨 덕분에 큰 복을 얻어 노모와 처자식과 편안히 살게 된 따뜻한 해피엔딩 괴이담
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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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킹멘트
굶주린 가족을 두고 길을 나선 등짐장수는 비 오는 밤, 버려진 서낭당에서 도깨비에게 돈을 빌렸습니다. 단 하나의 조건은 보름 뒤 한 푼도 빠짐없이 갚는 것. 그런데 약속을 지키러 간 사내의 돈이 하룻밤 사이 금덩이로 변해 돌아왔습니다.
※ 1: 비 오는 밤의 서낭당
강원도 깊은 산자락 아래, 장터라고 해도 초가 몇 채와 주막 하나가 전부인 작은 고을이 있었다. 그곳에는 박덕수라는 등짐장수가 살았다. 덕수는 키가 크지도 힘이 장사도 아니었으나, 남보다 부지런한 두 다리와 거짓말을 못 하는 곧은 성품을 지니고 있었다.
그는 새벽닭이 울기 전에 집을 나서 산 너머 장터에서 소금과 무명, 바늘과 실을 받아 등에 졌다. 그러고는 골짜기마다 흩어진 마을을 걸어 다니며 물건을 팔았다. 한 뼘이라도 천을 속여 자르는 일이 없었고, 글을 모르는 노인이 돈을 더 내놓으면 반드시 남은 엽전을 돌려주었다.
“덕수 총각은 가난해서 그렇지, 속에는 부잣집 곳간보다 넉넉한 것이 들었어.”
사람들은 그렇게 말했지만, 좋은 마음만으로 굶주린 배를 채울 수는 없었다. 늙은 어머니는 해묵은 기침으로 밤마다 잠을 이루지 못했고, 아내 연화는 어린 남매에게 먹일 것이 없어 멀건 죽에 물을 더 부었다.
그날 아침에도 덕수는 식구들이 깨기 전에 빈 쌀독을 열어 보았다. 바닥에는 손가락 두 마디만 한 보리쌀이 흩어져 있었다. 그것마저 긁어 아침밥을 지으면 저녁에는 솥을 걸 이유조차 없었다.
'오늘 물건을 다 팔지 못하면 아이들을 또 굶기겠구나.'
덕수는 한숨을 삼키고 쌀독 뚜껑을 닫았다. 뒤에서 가벼운 기침 소리가 들렸다. 돌아보니 어머니가 문설주를 붙잡고 서 있었다. 야윈 얼굴에는 아들을 걱정하는 빛이 가득했다.
“내 약은 사 오지 말아라. 늙으면 누구나 기침도 하고 허리도 아픈 법이다. 그 돈으로 아이들에게 조 한 되라도 먹이렴.”
“그런 말씀 마십시오. 오늘은 물건을 남김없이 팔아 약도 사고 쌀도 사 오겠습니다.”
“빈 등짐으로 돌아와도 괜찮다. 그러니 어두워지기 전에 꼭 돌아오너라.”
덕수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지만, 그의 등에는 팔 물건이 거의 없었다. 지난 장에서 외상으로 받아 온 짚신 열 켤레와 무명 두 필이 전부였다. 이것을 모조리 팔아도 밀린 외상값을 치르고 나면 손에 남을 것이 몇 푼 되지 않았다.
그는 장터로 향하는 내내 만나는 사람마다 허리를 숙여 인사했다. 하지만 그날따라 장은 유난히 한산했다. 아침부터 먹구름이 산허리를 감쌌고, 정오가 지나자 빗방울까지 떨어지기 시작했다. 장사꾼들은 서둘러 좌판을 접었다. 덕수는 해가 기울 때까지 자리를 지켰으나 팔린 것은 짚신 두 켤레뿐이었다.
외상값을 재촉하던 포목점 주인은 그의 사정을 듣고도 냉정하게 고개를 저었다.
“나도 장사하는 사람일세. 지난달 물건값도 아직인데 또 외상을 달라니, 자네 말을 믿어도 내 곳간이 비면 무슨 소용인가?”
“보름만 기다려 주십시오. 반드시 갚겠습니다.”
“보름 뒤에도 못 갚으면 자네 집에 있는 베틀이라도 가져가겠네.”
덕수는 대답하지 못했다. 그 베틀은 연화가 겨우내 품을 팔 때 쓰는 것이었다. 그것마저 빼앗기면 가족에게는 정말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장터를 나섰을 때 빗줄기는 손가락 굵기로 쏟아졌다. 덕수는 빈 배를 움켜쥐고 산길을 재촉했다. 진흙이 된 비탈길에서 몇 번이나 미끄러졌고, 장옷도 없이 나선 탓에 옷은 속까지 흠뻑 젖었다.
집으로 가려면 고개를 하나 더 넘어야 했다. 그러나 산 중턱에 이르자 천둥이 울리고 눈앞이 새하얗게 번쩍였다. 큰 소나무 하나가 벼락을 맞고 갈라지는 것을 본 덕수는 더는 걸음을 옮길 수 없었다.
마침 길 위쪽에 허물어진 서낭당 하나가 보였다. 오래전 돌림병이 돌고 난 뒤부터는 마을 사람들조차 찾지 않는 곳이었다. 지붕은 한쪽이 내려앉았고, 금줄에는 빛바랜 헝겊 조각만 나부꼈다.
덕수는 처마 밑으로 몸을 피했다. 젖은 짚신을 벗어 물을 털고 있는데, 굳게 닫혀 있던 서낭당 문 안에서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누가 먼저 와 있는 것인가?'
그가 조심스럽게 문을 밀자 향 냄새도 곰팡내도 아닌, 갓 구운 떡처럼 달큰한 냄새가 흘러나왔다. 어두운 당집 가운데에는 붉은 도포를 입은 사내가 등을 돌리고 앉아 있었다. 사내 앞에는 술병 하나와 큼직한 놋그릇이 놓여 있었다.
“비를 피하러 왔느냐?”
얼굴도 보이지 않는데 사내가 먼저 물었다. 낮고 굵은 목소리가 좁은 당집 안에서 두 겹, 세 겹으로 울렸다.
“실례가 되었다면 곧 나가겠습니다.”
“밖에는 벼락이 치는데 어디로 나간단 말이냐. 들어와 앉아라.”
덕수는 문 가까이에 엉거주춤 앉았다. 사내는 돌아보지 않은 채 놋그릇을 앞으로 밀었다. 그 안에는 따끈한 수수팥떡이 수북했다.
“먹어라.”
“고맙습니다만, 처음 뵙는 분의 음식을 어찌 함부로 먹겠습니까?”
“배에서는 천둥보다 큰 소리가 나는데 입은 점잖은 체하는구나.”
사내가 껄껄 웃자 서까래에 쌓인 먼지가 후두두 떨어졌다. 덕수는 얼굴을 붉혔지만 떡에는 손을 대지 않았다. 집에서 굶고 있을 아이들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먹지 않을 것이면 품에 넣어 가도 좋다.”
“정말 그래도 되겠습니까?”
덕수는 그제야 떡 두 개를 보자기에 쌌다. 하나는 어머니께, 다른 하나는 아이들에게 나누어 줄 생각이었다. 사내는 그런 덕수를 흘끗 바라보았다. 번개가 치는 순간 드러난 얼굴은 기이했다. 눈썹은 불꽃처럼 치솟았고, 입가에는 웃음인지 화인지 모를 빛이 떠올라 있었다.
“너는 배가 고픈데도 식구부터 생각하는구나. 무슨 걱정이 있어 그리 어깨가 무거우냐?”
덕수는 처음 보는 이에게 집안 사정을 늘어놓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사내가 다시 술잔을 기울이며 말했다.
“내게 감추려 해도 소용없다. 빈 쌀독과 늙은 어미의 기침, 울음을 참으며 물로 배를 채운 아이들까지 훤히 보이니.”
덕수는 놀라 몸을 뒤로 물렸다. 그 순간 사내의 붉은 도포 아래로 사람의 발이 아니라 털이 숭숭 난 큼직한 발이 보였다. 젖은 땅에도 남지 않던 소름이 등줄기를 타고 올랐다.
사내는 품에서 묵직한 전대를 꺼내 덕수 앞에 내려놓았다. 전대 안에서 엽전 부딪치는 소리가 났다.
“스무 냥이다. 이것을 빌려줄 테니 장사 밑천으로 써라.”
“제가 무엇을 믿고 돈을 빌려주시는 것입니까?”
“보름 뒤 오늘과 같은 시각에 이곳으로 가져오면 된다. 이자는 필요 없다. 다만 한 푼도 모자라서는 안 된다.”
“제가 그때까지 마련하지 못하면 어찌 됩니까?”
사내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번개가 당집을 환히 밝힌 순간, 그의 이마 위로 검푸른 뿔 같은 그림자가 돋아났다.
“돈을 잃은 자보다 약속을 잃은 자가 더 큰 것을 빼앗기는 법이지.”
천둥이 산을 뒤흔들었다. 놀란 덕수가 눈을 감았다가 다시 떴을 때, 사내도 놋그릇도 술병도 온데간데없었다. 당집 안에는 그가 품에 넣은 떡 두 개와 스무 냥이 든 전대만 덩그러니 남아 있었다.
덕수는 차가운 전대를 두 손으로 움켜쥐었다. 사람의 돈이 아니라는 것을 알면서도, 병든 어머니와 굶주린 아이들의 얼굴이 눈앞을 떠나지 않았다.
'이 돈을 가져가야 하는가, 아니면 이 자리에 두고 가야 하는가.'
그때 전대 속 엽전들이 아무도 건드리지 않았는데 저희끼리 달그락거렸다. 마치 보름 뒤의 약속을 벌써부터 헤아리고 있는 것처럼.
※ 2: 스무 냥이 불러온 변화
덕수는 전대를 품에 넣은 채 서낭당을 나섰다. 거짓말처럼 비가 멎어 있었고, 구름 사이로 반달이 드러났다. 조금 전까지 천둥이 산을 흔들었는데 숲은 벌레 소리 하나 들리지 않을 만큼 고요했다.
그는 몇 번이나 뒤를 돌아보았다. 낡은 서낭당 처마 끝에는 푸른 불빛 두 개가 매달려 있었다. 등불이라기에는 바람도 없이 흔들렸고, 사람의 눈이라기에는 너무 높은 곳에서 그를 내려다보았다.
덕수는 걸음을 재촉했다. 품속의 전대가 움직일 때마다 엽전이 부딪쳤다. 그 소리가 꼭 누군가 뒤따라오며 발목에 방울을 울리는 것처럼 들렸다.
집에 도착했을 때는 자정이 가까웠다. 문을 열자 연화와 아이들이 화롯불도 피우지 못한 채 서로를 끌어안고 있었다. 노모는 이불 속에서 심한 기침을 하고 있었다.
“아버지!”
아이들이 달려들었다. 덕수는 두 아이를 안아 주고 품속의 떡을 꺼냈다. 수수팥떡 두 개는 서낭당에서 보았을 때보다 커져 있었다. 어른 손바닥만 했던 떡이 작은 쟁반만큼 부풀어 있었고, 아직도 김이 모락모락 났다.
“이 귀한 떡을 어디서 얻으셨어요?”
“산길에서 비를 피하다 마음씨 좋은 분을 만났단다.”
덕수는 떡을 잘라 어머니와 연화, 두 아이에게 나누어 주었다. 자신은 가장자리에 붙은 팥고물만 조금 떼어 입에 넣었다. 그런데 떡을 먹은 어머니의 기침이 잠잠해졌다. 종일 굶었던 아이들의 창백한 뺨에도 금세 붉은 기운이 돌았다.
연화는 남은 떡을 보자기에 싸면서 남편의 젖은 옷을 살폈다. 그러다 그의 품에서 묵직한 전대가 떨어졌다. 매듭이 풀리며 엽전이 방바닥에 쏟아졌다.
“이 많은 돈이 어디서 났습니까?”
덕수는 차마 둘러댈 수 없어 서낭당에서 겪은 일을 털어놓았다. 붉은 도포를 입은 사내의 발이 사람의 발이 아니었다는 말까지 들은 연화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그것은 사람이 아닙니다. 도깨비 돈을 빌려 와서 어찌하려고 그러셨어요?”
“나도 두려웠소. 하지만 어머니께 약을 지어 드리고, 아이들에게 밥을 먹이려면 다른 방도가 없었소.”
“당장 갖다 놓으세요. 굶어 죽는 한이 있어도 도깨비와 거래해서는 안 됩니다.”
아내의 말이 옳았다. 덕수도 전대를 다시 서낭당에 놓고 올 생각이었다. 그러나 그때 어머니가 심한 기침을 하며 피 묻은 가래를 손수건에 뱉었다. 연화는 놀라 손수건을 감추었지만 덕수는 이미 보았다.
덕수는 오래 고민한 끝에 엽전들을 하나씩 세었다. 정확히 스무 냥이었다. 그는 열 냥만 장사 밑천으로 쓰고, 다섯 냥으로 어머니의 약을 지으며, 나머지 다섯 냥은 손대지 않고 보관하기로 했다.
“보름 동안 죽을힘을 다해 일하겠소. 돈을 불려 약속한 날 반드시 스무 냥을 갚겠소.”
“만일 한 푼이라도 모자라면요?”
“내가 한 약속이니 벌을 받아도 내가 받겠소. 당신과 아이들에게는 손끝 하나 대지 못하게 할 것이오.”
연화는 눈물을 훔치며 고개를 숙였다. 덕수는 날이 밝자마자 의원을 찾아가 노모의 약을 지었다. 그리고 남은 돈으로 소금과 생강, 무명과 등잔기름을 샀다. 모두 산골 마을에서 꼭 필요하지만 구하기 어려운 물건이었다.
그는 이전보다 더 먼 마을까지 걸었다. 새벽부터 밤까지 등짐을 지고 다니며 물건을 팔았지만 값을 터무니없이 올리지 않았다. 비가 내려 길이 험하면 남의 짐까지 대신 들어 주었고, 형편이 어려운 집에는 외상으로 물건을 내주었다.
도깨비에게 빌린 돈인데도 그 돈으로 욕심을 부리기는커녕 전보다 인심을 넉넉히 썼다. 그러자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덕수가 가져간 소금은 눅눅해지지 않았고, 무명은 아무리 잘라도 모자라지 않는 듯했다. 장터에서 한 냥어치를 팔면 저녁에는 두 냥이 되어 돌아왔다.
사흘 만에 그는 포목점의 밀린 외상값을 갚았다. 닷새째에는 노모의 기침이 눈에 띄게 줄었다. 이레째 되는 날에는 장사로 번 돈이 열다섯 냥을 넘었다.
“당신, 이러다 보름 전에 스무 냥을 모두 마련하겠어요.”
“내 돈이 아니니 하루라도 빨리 채워 두어야 마음이 놓일 것 같소.”
덕수는 번 돈 가운데 꼭 필요한 식량값만 남기고 전대에 채웠다. 열흘째 되는 밤, 마침내 스무 냥이 완성되었다. 그는 엽전을 다섯 번이나 세어 본 뒤 장롱 깊숙한 곳에 넣었다.
그날부터는 손에 들어오는 돈이 온전히 가족의 것이 될 수 있었다. 연화는 오래간만에 쌀밥을 지었고, 아이들은 뜨거운 밥 위에 간장 한 숟갈을 얹어 맛있게 먹었다. 노모는 밥을 뜨다 말고 눈물을 글썽였다.
“이제야 우리 집에도 볕이 드는구나.”
그러나 덕수는 기뻐하면서도 마음 한편이 무거웠다. 밤이 되면 장롱 속 전대에서 엽전 세는 소리가 들렸기 때문이다.
하나, 둘, 셋.
분명 손대는 사람이 없는데도 엽전은 새벽까지 달그락거렸다. 어떤 날은 마당에서 무거운 발자국 소리가 들렸고, 문풍지 너머로 뿔 달린 그림자가 지나갔다. 문을 열어 보면 아무도 없었지만 축축한 흙 위에는 사람 발보다 두 배는 큰 발자국이 남아 있었다.
보름을 하루 앞둔 날, 덕수는 이웃 고을의 늙은 옹기장수를 만났다. 노인은 덕수가 서낭당 이야기를 꺼내자 술잔을 떨어뜨렸다.
“그 당집에서 붉은 도포를 입은 사내를 보았다고?”
“혹시 아시는 분입니까?”
“사람이 아니야. 백 년 전부터 그 고개에 산다는 외뿔도깨비일세. 돈을 빌려주고 약속한 날 다시 불러들인다지.”
“돈을 갚으면 되는 것 아닙니까?”
노인은 주위를 살핀 뒤 목소리를 낮췄다.
“도깨비가 사람에게 순순히 돈을 내줄 것 같은가? 예전에도 한 나무꾼이 그 돈을 빌렸어. 약속한 날 겁이 나서 달아났다가 이튿날 감쪽같이 사라졌지. 몇 해 뒤 산에서 발견된 것은 그자의 짚신 한 짝뿐이었다네.”
덕수의 등골이 서늘해졌다.
“그 나무꾼은 돈을 갚으러 가지 않았으니 벌을 받은 것 아닙니까?”
“갚으러 간 이가 없으니, 갚은 뒤에 무슨 일이 생기는지는 아무도 모르지. 도깨비는 씨름을 걸어 사람의 혼을 빼앗기도 하고, 금은보화를 보여 주며 욕심을 시험하기도 한다네. 절대로 그 산에 다시 올라가지 말게.”
노인의 말은 그날 저녁 덕수보다 먼저 집에 도착했다. 연화 역시 장터 사람에게 소문을 듣고 남편의 소매를 붙잡았다.
“가지 마세요. 돈은 서낭당 아래에 놓고 오든지, 차라리 멀리 달아나요.”
“약속은 그 당집에서 직접 돌려주겠다는 것이었소.”
“도깨비와 한 약속이 사람 목숨보다 중요합니까?”
“사람이 보지 않는다고 약속이 가벼워지는 것은 아니오. 더구나 이 돈이 아니었다면 어머니의 병도 고치지 못했을 것이오. 은혜를 입고도 두려워 달아난다면 내가 아이들에게 무슨 낯으로 바르게 살라고 가르치겠소.”
덕수는 아이들이 잠든 뒤 전대를 꺼냈다. 그런데 스무 냥이어야 할 엽전 가운데 한 닢이 보이지 않았다. 장롱 안과 방바닥을 아무리 찾아도 찾을 수 없었다.
온 가족이 등잔을 들고 집 안을 뒤졌다. 마침내 어린 아들이 울먹이며 다가와 손바닥을 내밀었다.
“아버지, 낮에 엽전 하나가 장롱 밑으로 굴러 나왔어요. 엿을 사 먹으려고 가져갔는데, 무서워서 쓰지는 않았어요.”
아이의 손에는 검게 빛나는 엽전 한 닢이 놓여 있었다. 덕수는 아이를 꾸짖지 않고 꼭 안아 주었다.
“쓰지 않고 돌려주었으니 되었다. 남의 것은 비록 작은 것이라도 함부로 가져서는 안 된단다.”
엽전을 전대에 넣는 순간, 집 밖에서 우렁찬 웃음소리가 들렸다.
“좋다. 한 푼도 모자라지 않는구나.”
덕수가 문을 열었지만 마당에는 푸른 불덩이 하나만 둥실 떠 있었다. 불덩이는 산 쪽으로 천천히 날아가다가 사라졌다. 하늘에는 어느새 둥근 보름달이 떠올라 있었다.
약속한 날이 시작된 것이었다.
※ 3: 보름달 아래의 도깨비 잔치
보름날 아침, 덕수는 평소와 다름없이 일어났다. 마당을 쓸고 노모의 약을 달였으며, 아이들이 먹을 죽에 잘게 썬 나물을 넣었다. 하지만 가족들은 누구도 말하지 않았다. 그가 오늘 밤 도깨비가 기다리는 서낭당으로 가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연화는 남편의 짚신을 손질하다 바늘에 손가락을 찔렸다. 붉은 핏방울이 맺히자 그녀는 참았던 눈물을 터뜨렸다.
“꼭 가야 합니까?”
“돈을 빌릴 때는 살 것 같아 기뻐하고, 갚을 때가 되니 무서워 달아난다면 사람이 짐승보다 나을 것이 무엇이겠소.”
“당신이 돌아오지 못하면 어머니와 아이들은 어찌합니까?”
덕수는 쉽게 대답하지 못했다. 그가 없는 집에서 연화가 감당해야 할 고생이 눈앞에 선했다. 하지만 도깨비와의 약속을 어기고 달아난다 해도 가족이 평안하리라는 보장은 없었다.
“내가 돌아오지 못하더라도 포목점 외상은 다 갚아 두었소. 쌀독 밑에는 다섯 냥을 넣어 두었으니 당분간은 버틸 수 있을 것이오.”
“그런 말 하지 마세요.”
“반드시 돌아오겠소. 나는 돈을 훔친 것도, 약속을 어긴 것도 아니오. 빌린 것을 돌려주러 갈 뿐인데 하늘도 무심히 보지만은 않을 것이오.”
노모가 지팡이를 짚고 다가왔다. 그녀는 떨리는 손으로 아들의 옷고름을 고쳐 매었다.
“어릴 때부터 너는 남의 것을 탐내지 않았다. 오늘도 네 마음만 잃지 않는다면 반드시 집으로 돌아올 게다.”
노모는 작은 주머니 하나를 그의 허리춤에 달아 주었다. 안에는 팥 한 줌과 굵은 소금이 들어 있었다. 귀물을 쫓는 데 쓰라는 것이었지만, 덕수는 그것보다 어머니의 손때 묻은 주머니라는 사실에 더 큰 힘을 얻었다.
해가 서산에 걸리자 덕수는 전대를 등에 넣고 집을 나섰다. 연화와 아이들은 마을 어귀까지 따라왔다. 그는 몇 번이나 뒤돌아 손을 흔들었고, 가족의 모습이 보이지 않게 된 뒤에야 굳은 얼굴로 산길에 올랐다.
보름달은 대낮처럼 환했다. 그런데 산에 들어서자 기이하게도 덕수의 그림자가 나타나지 않았다. 나무에도 바위에도 그림자가 있었지만, 오직 그의 발밑만 텅 비어 있었다.
얼마쯤 걸었을 때 길가에 하얀 쌀밥과 고깃국이 차려진 상이 보였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밥 냄새에 하루 종일 제대로 먹지 못한 배가 요동쳤다.
“먼 길을 가는데 한술 뜨고 가시오.”
어디선가 노파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러나 주위를 둘러봐도 사람은 없었다. 덕수는 밥상 앞에 잠시 멈췄다가 고개를 저었다.
“주인 없는 음식에는 손대지 않겠습니다.”
그가 지나치자 고깃국에서 기다란 검은 머리카락이 솟아올랐다. 밥상은 순식간에 썩은 낙엽과 흙무더기로 변해 버렸다.
조금 더 올라가자 이번에는 길 한가운데 금빛 비단 주머니가 떨어져 있었다. 주머니 입구로 황금빛 엽전이 비쳤다. 전대 속 돈보다 몇 곱절은 많아 보였다.
“그것만 주우면 빌린 돈을 갚고도 평생 놀고먹을 텐데.”
이번에는 어린아이 같은 목소리가 나뭇가지 사이에서 들렸다. 덕수는 비단 주머니를 밟지 않도록 멀찍이 돌아갔다.
“내 것이 아닌 재물은 돌멩이보다도 무겁다. 등에 질 생각이 없다.”
그 순간 주머니에서 수십 마리의 지네가 기어 나왔다. 지네들은 서로 뒤엉켜 꿈틀거리다가 달빛 아래에서 연기처럼 사라졌다.
고갯마루에 가까워질수록 이상한 것들이 나타났다. 죽은 줄 알았던 아버지가 나무 뒤에서 나와 집으로 돌아가라며 손짓했고, 어린 딸의 울음소리가 깊은 골짜기 아래에서 들렸다. 연화가 비명을 지르며 살려 달라고 외치기도 했다.
덕수는 몇 번이나 걸음을 멈췄다. 당장이라도 소리가 나는 곳으로 달려가고 싶었다. 그러나 자세히 들으면 목소리 끝마다 쇠붙이를 긁는 듯한 소리가 섞여 있었다.
'내 마음이 흔들리는 곳을 귀신들이 들여다보고 있구나.'
덕수는 허리춤의 팥 주머니를 움켜쥐고 앞만 보았다.
“내 가족이라면 나를 약속을 어기는 사람으로 만들지 않을 것이다. 썩 물러가라.”
그의 외침이 산속에 울려 퍼지자 웃음과 울음이 한꺼번에 끊겼다. 대신 멀리서 장구와 꽹과리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마침내 서낭당 앞에 도착했을 때 덕수는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보름 전에는 지붕이 내려앉고 잡초만 무성하던 곳이 커다란 기와집으로 변해 있었다. 수백 개의 등이 처마 아래 매달려 푸른빛과 붉은빛을 뿜었다.
마당에는 도깨비들이 잔치를 벌이고 있었다. 어떤 것은 키가 장승만 했고, 어떤 것은 어린아이만큼 작았다. 외뿔이 달린 도깨비도 있었고, 얼굴 한가운데 눈이 하나뿐인 것도 있었다. 이들은 조선 선비의 갓과 장사꾼의 패랭이, 무관의 전립을 제멋대로 눌러쓰고 술을 마시며 춤을 추었다.
덕수가 마당에 들어서자 음악이 뚝 멎었다. 수십 쌍의 눈이 동시에 그를 향했다.
“사람 냄새가 난다.”
“겁도 없이 제 발로 찾아왔구나.”
“살점은 적어도 간은 제법 크겠어.”
도깨비들이 킁킁거리며 그를 둘러쌌다. 덕수는 다리가 떨렸지만 전대를 꼭 쥐었다.
잔치상 가장 높은 자리에는 붉은 도포의 사내가 앉아 있었다. 보름 전과 같은 얼굴이었지만 이번에는 머리에 검푸른 외뿔이 선명히 솟아 있었다. 그의 옆에는 사람 키만 한 쇠방망이가 놓여 있었다.
“정말 돌아왔구나.”
“약속한 스무 냥을 가져왔습니다.”
“오는 길에 먹음직스러운 밥상도 있고, 금전이 든 주머니도 있었을 텐데?”
“주인 없는 음식과 재물이라 손대지 않았습니다.”
붉은 도포의 도깨비가 웃자 다른 도깨비들이 손뼉을 치며 떠들었다.
“아직 시험이 끝난 것이 아니다.”
“돈만 받으면 재미가 없지.”
“씨름을 시켜라. 지면 저자의 간을 안주로 먹자.”
도깨비들은 덕수를 마당 한가운데로 밀었다. 곧 장승만 한 도깨비 하나가 허리에 샅바를 두르고 나타났다. 콧김을 뿜을 때마다 땅의 먼지가 회오리쳤다.
“내게 이기면 돈을 갚게 해 주마. 지면 네 등에 진 것은 물론이고, 네 목숨까지 우리가 갖겠다.”
덕수는 붉은 도포의 도깨비를 바라보았다.
“제게 약속하신 것은 보름 뒤 이곳에 와서 스무 냥을 갚으라는 것뿐이었습니다. 씨름을 해야 한다는 말씀은 없으셨습니다.”
마당이 조용해졌다. 몇몇 도깨비가 낄낄거리며 붉은 도포의 도깨비를 바라보았다. 그는 한동안 말없이 덕수를 내려다보다가 쇠방망이로 바닥을 한 번 두드렸다.
“옳은 말이다. 하지 않은 약속을 뒤에 붙이는 것은 도깨비에게도 부끄러운 일이지.”
장승 도깨비가 아쉬운 듯 물러났다. 그러나 이번에는 눈이 하나뿐인 도깨비가 커다란 궤짝 세 개를 끌고 나왔다. 첫 번째 궤짝에는 은전이 가득했고, 두 번째에는 황금이 산처럼 쌓여 있었다. 세 번째 궤짝에서는 어린아이들의 웃음소리가 들렸다.
“스무 냥을 갚기 전에 하나를 골라라. 은을 고르면 고을 제일가는 상인이 되고, 금을 고르면 대대손손 부자로 산다. 마지막 궤짝을 고르면 네 가족에게 평생 병과 근심이 없을 것이다.”
덕수는 세 번째 궤짝 앞에서 숨을 멈췄다. 금은보화는 마다할 수 있어도 가족의 평안을 어찌 외면할 수 있겠는가. 궤짝 안에서는 딸과 아들의 웃음소리가 생생하게 들렸다.
'이것을 고르면 어머니도 오래 사시고, 아이들도 굶지 않을 텐데.'
그가 무심코 손을 뻗자 품속의 전대가 크게 흔들렸다. 엽전들이 서로 부딪치며 날카로운 소리를 냈다. 덕수는 문득 자신이 이곳에 온 까닭을 되새겼다.
“어느 것도 고르지 않겠습니다.”
“가족의 평안도 싫다는 말이냐?”
“평안을 바라는 마음으로 욕심을 꾸민다 해도 욕심은 욕심입니다. 저는 받을 것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빌린 것을 갚으러 왔습니다.”
덕수는 전대를 꺼내 붉은 도포의 도깨비 앞에 놓았다.
“여기 스무 냥이 있습니다. 한 푼도 빠짐없이 세어 보십시오.”
도깨비들의 웃음소리가 멎었다. 붉은 도포의 도깨비가 전대를 집어 들자 갑자기 하늘의 보름달이 핏빛으로 변했다. 당집 문이 저절로 닫히고, 마당의 등불이 모두 꺼졌다.
어둠 속에서 엽전 세는 소리가 들렸다.
하나, 둘, 셋.
소리는 점점 빨라지더니 스무 번째에서 멈추지 않았다.
스물하나, 스물둘, 스물셋.
덕수의 얼굴이 굳었다. 자신은 분명 스무 냥만 넣었다. 그런데 전대 속에서는 계속해서 엽전이 쏟아지는 소리가 났다. 도깨비들은 숨을 죽였고, 붉은 도포의 사내는 처음으로 웃음기를 거둔 채 전대 안을 들여다보았다.
이윽고 그가 낮고 무거운 목소리로 물었다.
“박덕수야. 네가 가져온 것이 정말 엽전 스무 냥뿐이라고 생각하느냐?”
전대 안에서 눈부신 황금빛이 터져 나왔다. 덕수는 너무 밝은 빛에 눈을 가렸고, 발밑의 땅이 거대한 짐승의 등처럼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어둠 저편에서는 무언가 쇠사슬을 끌며 천천히 다가오고 있었다.
“이제 네가 갚아야 할 진짜 빚을 보여 주마.”
※ 4: 한 푼도 모자라지 않은 약속
쇠사슬 끄는 소리가 어둠 속에서 점점 가까워졌다. 덕수는 눈부신 빛 사이로 거대한 그림자 하나가 기어 나오는 것을 보았다. 몸은 사람과 비슷했으나 등에 낡은 궤짝을 지고 있었고, 두 손목과 발목에는 검은 쇠사슬이 감겨 있었다. 놈이 움직일 때마다 궤짝 안에서 수많은 엽전이 부딪쳤다.
“저자가 네 빚을 헤아릴 것이다.”
붉은 도포의 도깨비가 쇠방망이로 땅을 두드리자 꺼졌던 등불들이 하나씩 되살아났다. 쇠사슬에 묶인 괴물은 전대 앞에 엎드려 긴 손톱으로 엽전을 꺼냈다.
덕수는 숨을 죽이고 지켜보았다. 엽전은 분명 스무 냥뿐이었다. 그런데 괴물이 한 닢을 집어 들 때마다 그 위로 희미한 장면들이 아른거렸다.
노모가 약을 마시며 기침을 멈추던 모습, 아이들이 따뜻한 쌀밥을 먹던 모습, 산골 노인이 외상으로 받은 소금을 두 손으로 품던 모습이 차례로 나타났다. 포목점 주인이 밀린 값을 받고 안도의 숨을 내쉬는 광경과 비탈길에서 덕수의 도움을 받은 장사꾼의 미소까지 엽전 위에 어려 있었다.
“스무 냥이 맞는데 어째서 소리는 그보다 많았습니까?”
“돈에는 손을 거쳐 간 사람의 마음이 묻는다. 탐욕으로 쓴 돈은 아무리 많아도 속이 비어 있고, 선하게 쓴 돈은 한 닢 안에서도 여러 번 울리지.”
붉은 도포의 도깨비가 대답하자 쇠사슬에 묶인 괴물이 탐욕스러운 눈으로 엽전을 핥았다.
“좋은 마음이 많이 붙었구나. 이런 돈은 맛도 좋지. 빌린 스무 냥은 갚았지만, 그 돈으로 얻은 복까지 갚으려면 서른 냥은 더 내놓아야 한다.”
덕수는 당황하여 붉은 도포의 도깨비를 바라보았다.
“처음 약속에는 이자가 없다고 하셨습니다.”
“저자는 산속의 재물을 관리하는 욕심도깨비다. 사람에게 빌려준 돈은 반드시 몇 곱절로 받아야 한다고 여기지.”
“그렇다면 처음부터 저를 속이신 것입니까?”
덕수의 목소리는 떨렸지만 그는 물러나지 않았다. 주위의 도깨비들이 눈을 번뜩이며 그를 쳐다보았다. 평범한 사람이라면 살려 달라 빌거나 달아났을 터였다. 그러나 덕수는 빈 전대를 털어 보이며 말을 이었다.
“저는 약속대로 스무 냥을 마련했습니다. 그 돈으로 장사를 하여 얻은 것은 제 두 다리로 산을 넘고, 제 땀을 흘려 번 것입니다. 은혜를 모른 체하지는 않겠으나, 하지 않은 약속까지 빚이라 하시면 따를 수 없습니다.”
욕심도깨비가 궤짝을 열어젖혔다. 그 안에는 금과 은, 옥구슬이 가득했다. 그러나 보물 사이사이에는 하얀 뼈와 썩은 짚신도 섞여 있었다.
“감히 도깨비의 셈을 따지느냐? 돈이 없다면 네 수명을 내놓아라. 서른 해만 떼어 주면 빚이 맞을 것이다.”
“그럴 수 없습니다.”
“열 해라면 어떠냐?”
“한 해도 드릴 수 없습니다.”
“네 목숨이 그리 아까우냐?”
“저 혼자만의 목숨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저를 기다리는 노모와 아내와 어린것들이 있습니다. 제가 함부로 내어 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욕심도깨비는 누런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그렇다면 가족 가운데 한 사람의 복을 가져오너라. 늙은 어미의 남은 수명, 아내의 젊음, 아이들 중 하나의 재주라도 좋다.”
덕수는 대답 대신 전대의 입구를 꼭 묶었다. 그리고 그것을 붉은 도포의 도깨비 앞에 다시 내려놓았다.
“제가 빌린 돈은 여기 있습니다. 받지 않으시겠다면 이 자리에 두고 가겠습니다. 하지만 제 가족의 것은 티끌 하나도 드릴 수 없습니다.”
욕심도깨비가 포효하며 달려들었다. 검은 쇠사슬이 뱀처럼 날아와 덕수의 목을 휘감으려 했다. 그 순간 붉은 도포의 도깨비가 쇠방망이를 들어 쇠사슬을 내리쳤다.
쾅 하는 소리와 함께 산 전체가 흔들렸다. 쇠사슬은 산산이 부서졌고, 욕심도깨비의 등에 매달린 궤짝도 바닥에 떨어졌다. 궤짝에서 쏟아진 금은보화는 땅에 닿자마자 깨진 기왓장과 짐승의 이빨, 말라붙은 진흙으로 변했다.
“그만하면 되었다.”
붉은 도포의 도깨비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주위에 있던 도깨비들도 장난스러운 표정을 지우고 조용히 길을 열었다. 욕심도깨비는 몸을 움츠린 채 연기처럼 사라졌다.
덕수는 그제야 자신이 마지막 시험을 받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제가 가져온 돈을 받아 주시는 것입니까?”
“스무 냥을 틀림없이 받았다. 너와 나 사이의 돈 계산은 이것으로 끝이다.”
“그렇다면 조금 전 말씀하신 진짜 빚은 무엇입니까?”
붉은 도포의 도깨비는 대답하지 않고 덕수의 엽전들을 잔치상 위에 펼쳤다. 도깨비 하나가 커다란 놋대야에 맑은 물을 떠 왔다. 엽전이 물속에 들어가자 검은 때가 벗겨지고 붉은빛이 돌았다.
“사람은 돈을 빌리면 돈만 갚으면 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어려울 때 받은 도움으로 다시 일어섰다면, 그 도움을 기억할 빚이 남는다.”
“저더러 도깨비를 위해 무엇을 하라는 말씀입니까?”
“나를 위해서가 아니다. 너처럼 비에 젖고 굶주린 이를 만났을 때 오늘 밤을 기억하라는 뜻이다. 도움을 받은 자가 훗날 다른 이를 돕는다면 은혜는 한 사람에게 갇히지 않고 세상을 한 바퀴 돌게 되지.”
덕수는 가슴 앞에 두 손을 모았다.
“제 형편이 넉넉해진다면 굶주린 사람에게 밥 한술이라도 나누겠습니다. 그러나 지키지 못할 큰말은 하지 않겠습니다.”
“큰말보다 작은 실천이 귀한 법이다. 그것이면 족하다.”
붉은 도포의 도깨비가 손을 펴자 놋대야 속 엽전들이 공중으로 떠올랐다. 스무 냥의 엽전은 붉은 불꽃에 휩싸이더니 작고 둥근 구슬처럼 변했다. 도깨비들은 그것을 술잔에 하나씩 넣고 술을 부었다.
“이 돈은 이미 갚은 것 아닙니까?”
“갚았으니 이제 우리 마음대로 쓰는 것이다. 사람의 선한 마음이 밴 돈으로 담근 술은 백 년 묵은 술보다 달지.”
도깨비들은 술잔을 높이 들었다. 누군가 장구를 치자 잔치가 다시 시작되었다. 덕수에게도 큼직한 술잔 하나가 건너왔다. 하지만 그는 고개를 저었다.
“마음은 감사하나 집에서 가족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날이 밝기 전에 돌아가야 합니다.”
“도깨비 잔칫상을 마다하면 후회할 텐데?”
“배불리 먹는 것보다 무사히 돌아가는 것이 가족에게는 더 큰 선물입니다.”
붉은 도포의 도깨비는 흡족한 듯 웃었다. 그는 덕수에게 빈 전대를 돌려주고 길고 붉은 끈 하나를 매어 주었다.
“이 끈이 풀리기 전까지는 절대로 전대를 열어 보지 마라. 그리고 산을 다 내려갈 때까지 뒤를 돌아보지 마라.”
“전대는 비어 있지 않습니까?”
“비었는지 찼는지는 집에 가서 확인하면 될 일이다.”
덕수가 전대를 받아 드는 순간, 등 뒤에서 어머니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렸다.
“덕수야, 나 좀 살려 다오!”
너무나 생생한 목소리에 그가 반사적으로 몸을 돌리려 하자 붉은 도포의 도깨비가 쇠방망이로 땅을 두드렸다.
“집으로 돌아가고 싶다면 네 귀보다 네 마음을 믿어라.”
덕수는 이를 악물고 당집을 나섰다. 그가 산길에 들어서자 뒤에서 연화와 아이들의 울음소리가 들렸다. 도깨비들이 붙잡으러 달려오는 듯 땅도 요동쳤다.
“아버지, 두고 가지 마세요!”
덕수의 발걸음이 흔들렸다. 그러나 그는 빈 전대를 가슴에 품고 오직 앞만 보았다.
동쪽 하늘이 밝아질 무렵 산 아래 냇물이 나타났다. 이제 다 내려왔다고 생각한 순간, 등 뒤에서 무시무시한 굉음이 터졌다. 서낭당이 무너지는 듯했고 뜨거운 바람이 덕수의 등을 밀쳤다.
그는 끝내 돌아보지 않고 냇물을 건넜다. 마지막 발이 맞은편 땅에 닿자 전대에 묶인 붉은 끈이 저절로 툭 풀렸다.
동시에 뒤를 가득 채우던 울음과 웃음, 장구 소리가 모두 사라졌다. 덕수가 조심스럽게 돌아보니 산에는 낡고 허물어진 서낭당만 희미하게 보였다.
그런데 분명 비어 있어야 할 전대가 어느새 바윗덩이처럼 무거워져 있었다.
※ 5: 엽전이 금덩이가 되어 돌아오다
덕수는 무거워진 전대를 내려다보았다. 산을 오를 때보다 몇 배나 묵직했다. 붉은 끈도 풀렸으니 지금 열어 보아도 될 것 같았지만, 붉은 도포의 도깨비는 집에 가서 확인하라고 했다.
그는 호기심을 참고 전대를 등에 단단히 묶었다. 한 걸음 옮길 때마다 안에서 둔탁한 것이 부딪쳤다. 엽전 소리와는 달랐다. 돌멩이나 쇠붙이 같은 것이 들어 있는 듯했다.
'도깨비들이 장난으로 돌을 넣어 준 모양이구나.'
덕수는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전대를 버리지 않았다. 돈을 빌려준 은혜가 있었으니 돌을 지고 가는 수고쯤은 잔칫값이라 여길 만했다.
마을 어귀에 도착하자 밤새 기다리던 연화가 맨발로 달려 나왔다. 아이들과 노모도 그 뒤를 따랐다. 덕수의 모습을 발견한 연화는 다리에 힘이 풀린 듯 길바닥에 주저앉았다.
“돌아오셨군요. 정말 돌아오셨어요.”
“약속대로 돌아왔소.”
덕수는 아내의 손을 잡아 일으켰다. 아이들이 양쪽 다리를 끌어안았고 노모는 말없이 아들의 등을 쓸어내렸다. 가족의 체온을 느끼자 덕수는 도깨비 무리 속에서도 참았던 눈물을 흘렸다.
집으로 들어간 그는 밤새 있었던 일을 하나씩 들려주었다. 음식과 금전의 유혹, 욕심도깨비가 수명과 가족의 복을 요구한 일, 그리고 붉은 도포의 도깨비가 마지막 길을 열어 준 일까지 숨김없이 말했다.
“그래서 스무 냥은 모두 갚으신 거예요?”
“한 푼도 빠짐없이 갚았소. 이제 우리에게 남은 빚은 없소.”
연화는 가슴을 쓸어내렸다. 그러다 남편의 등에 매달린 전대를 가리켰다.
“그런데 저 전대는 왜 저리 불룩합니까?”
“나도 모르겠소. 당집을 나설 때는 분명 비어 있었는데 산을 내려오니 무거워졌소.”
덕수는 전대를 방 한가운데 내려놓았다. 쿵 하는 소리에 온 가족이 놀랐다. 매듭을 풀고 입구를 벌리자 누런 빛이 새어 나왔다.
처음에는 아침 햇살이 전대 안으로 비친 줄 알았다. 그러나 덕수가 내용물을 하나 꺼내자 방 안이 금빛으로 환해졌다. 그것은 어린아이 주먹만 한 금덩이였다.
모양은 둥글고 투박했지만 표면에는 엽전과 똑같은 네모난 구멍 무늬가 새겨져 있었다. 덕수가 놀라 전대를 뒤집자 금덩이들이 방바닥으로 우르르 쏟아졌다.
하나, 둘, 셋.
노모와 연화가 떨리는 목소리로 함께 수를 세었다. 금덩이는 정확히 스무 개였다. 덕수가 갚은 스무 냥이 하나도 빠짐없이 금덩이가 되어 돌아온 것이었다.
“세상에 이런 셈이 또 어디 있단 말이냐. 엽전을 갚았는데 금덩이가 되어 돌아오다니.”
노모가 탄성을 내뱉었다. 아이들은 반짝이는 금덩이에 손을 뻗으려 했지만 덕수는 서둘러 전대에 다시 담았다.
“아직 기뻐하기는 이릅니다. 혹시 사람의 눈에만 금으로 보이는 도깨비 장난일지도 모릅니다.”
덕수는 금덩이 하나를 가지고 장터의 금은방을 찾아갔다. 탐욕스러운 이에게 보이면 화를 부를까 염려하여 전체가 아닌 귀퉁이만 조금 떼어 냈다.
늙은 금은방 주인은 조각을 숫돌에 문지르고 불에 달구어 보더니 눈을 크게 떴다.
“이렇게 순도 높은 금은 내 평생 처음 보네. 어디서 난 것인가?”
“산길에서 우연히 주운 작은 돌을 깨 보았더니 이런 것이 나왔습니다.”
덕수는 거짓말을 즐기지 않았지만 도깨비와의 약속을 떠벌려 욕심 많은 사람들을 산으로 불러들일 수는 없었다. 그는 금 조각의 일부만 팔아 쌀과 약재, 새 옷감과 장사 밑천을 마련했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는 포목점 주인이 덕수를 불러 세웠다. 그는 덕수가 큰돈을 벌었다는 소문을 듣고 다시 외상으로 물건을 내주겠다며 아첨했다. 다른 장사꾼들도 좋은 투자처가 있다며 앞다투어 다가왔다.
“돈이 돈을 낳는 법이네. 금이 있다면 땅을 사고 창고를 지어야지.”
“우리와 함께 장사를 하면 한 해 안에 몇 배로 불릴 수 있네.”
덕수는 정중히 거절했다.
“식구들이 굶지 않고 비바람을 피할 집만 있으면 충분합니다. 갑자기 생긴 재물로 더 큰 재물을 탐했다가는 제 마음부터 잃을 것 같습니다.”
덕수는 금덩이 하나를 팔아 무너지기 직전이던 초가를 고쳤다. 그러나 기와를 화려하게 얹거나 넓은 사랑채를 짓지는 않았다. 노모가 겨울에도 따뜻하게 지낼 온돌방 하나와 아이들이 편히 잘 방을 더했을 뿐이었다.
또 다른 금덩이로는 작은 밭과 논을 샀다. 직접 농사짓기 어려운 땅은 소작을 맡기되 흉년에는 소작료를 받지 않겠다는 조건을 걸었다. 나머지 금덩이는 항아리에 담아 마당 깊숙이 묻었다.
그날 밤, 덕수는 이상한 꿈을 꾸었다. 붉은 도포의 도깨비가 새로 고친 부엌 아궁이 앞에 앉아 수수팥떡을 먹고 있었다.
“금덩이가 마음에 드느냐?”
“과분한 복입니다. 저는 빌린 돈을 갚았을 뿐인데 어째서 이런 재물을 주셨습니까?”
“돈을 빌려주고 약속을 지키는지 본 것은 내 오랜 내기였다. 사람들은 궁할 때는 무릎을 꿇지만 살 만해지면 은혜를 잊곤 하지. 어떤 이는 돈을 숨겼고, 어떤 이는 가족을 버리고 달아났으며, 어떤 이는 더 많은 재물을 달라고 칼을 들고 찾아왔다.”
도깨비의 웃음에는 오래된 쓸쓸함이 묻어 있었다.
“그 나무꾼도 약속을 어겨 사라진 것입니까?”
“그자는 빌린 돈으로 노름을 하고 달아났다. 내가 데려간 것이 아니라 탐욕에 눈이 멀어 절벽 아래로 떨어진 것이다. 사람들은 제 잘못보다 도깨비 탓을 하기를 좋아하지.”
덕수는 고개를 숙였다.
“제가 금을 받을 자격이 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금은 좋은 사람만 찾아가지 않는다. 그러니 금을 가진 뒤에도 좋은 사람으로 남는 것이 더 어려운 법이지. 내가 준 복이 네 집 담장 안에서 썩을지, 담장 밖으로 흘러갈지는 이제 네게 달렸다.”
“다른 사람에게 이 일을 알려도 됩니까?”
“도깨비를 만나면 금을 얻는다는 소문이 나면 산이 욕심쟁이들로 가득 찰 것이다. 내 이야기는 때가 올 때까지 가슴에 묻어 두어라.”
도깨비는 마지막 떡을 입에 넣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문밖으로 나가기 전, 그는 등을 돌린 채 말했다.
“그리고 전대를 다시 살펴보아라. 금덩이 사이에 네 것이 아닌 물건이 하나 섞였을 것이다.”
덕수가 꿈에서 깨어났을 때 아궁이에는 불을 지피지 않았는데도 따뜻한 온기가 남아 있었다. 그는 서둘러 마당에 묻은 항아리를 꺼냈다.
금덩이를 하나씩 밖으로 옮기자 바닥에서 낡은 엽전 한 닢이 나왔다. 네모난 구멍에는 붉은 실이 묶여 있었고, 앞면에는 처음 보는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엽전을 손바닥에 올리는 순간, 멀리서 다급한 종소리가 들렸다. 마을 입구의 종이었다. 불이 나거나 큰 재난이 생겼을 때만 울리는 종이 쉬지 않고 울리고 있었다.
덕수가 밖으로 뛰어나가자 이웃들이 창백한 얼굴로 산 아래를 가리켰다. 며칠 동안 내린 비로 골짜기의 둑이 터져 흙탕물이 마을 쪽으로 밀려오고 있었다.
그 순간 붉은 실이 묶인 엽전이 덕수의 손안에서 뜨겁게 달아올랐다.
※ 6: 복이 머무는 집
산에서 내려온 흙탕물은 논밭을 집어삼키며 마을로 다가왔다. 사람들은 울부짖으며 가재도구를 챙겼고, 아이를 업은 이들은 높은 언덕으로 달아났다.
덕수는 가족에게 몸을 피하라고 한 뒤 마을 종을 힘껏 울렸다.
“짐부터 챙기지 말고 노인과 아이들을 먼저 옮기십시오! 물길이 닿지 않는 서쪽 언덕으로 가야 합니다!”
그는 금덩이를 팔아 장만해 두었던 새 수레를 끌어냈다. 거동이 불편한 노인들과 어린아이들을 태워 언덕으로 옮겼다. 연화도 치맛자락을 걷어 올리고 이웃집 아이들을 업었다. 노모는 먼저 올라간 사람들과 함께 젖은 옷을 말릴 불을 피웠다.
덕수는 몇 번이나 마을과 언덕을 오갔다. 마지막 집에 혼자 사는 옹기장이 노인을 구하러 갔을 때는 이미 물이 허리까지 차올랐다. 그는 노인을 등에 업고 거센 물살을 거슬렀다.
그때 떠내려온 통나무가 덕수를 향해 돌진했다. 피할 곳은 없었다. 덕수가 노인을 감싸며 눈을 감은 순간, 손에 쥔 붉은 실의 엽전이 번쩍 빛났다.
쿵 하는 소리와 함께 통나무가 눈앞에서 옆으로 튕겨 나갔다. 흙탕물 위에 사람보다 커다란 발자국 하나가 찍혔다가 사라졌다.
“도깨비님이 도우신 것인가.”
덕수는 작게 중얼거렸지만 확인할 겨를이 없었다. 그는 옹기장이 노인을 무사히 언덕으로 옮겼다.
마을 사람 모두가 몸을 피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물이 초가들을 덮쳤다. 몇 채는 벽이 무너지고 살림살이가 떠내려갔다. 다행히 목숨을 잃은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비가 그치자 사람들은 망가진 마을 앞에서 망연자실했다. 당장 먹을 곡식도, 지붕을 다시 올릴 재목도 없었다. 자신의 집을 먼저 고치려는 이도 있었지만 덕수는 항아리에 묻어 둔 금덩이 하나를 꺼냈다.
그는 금을 팔아 곡식과 목재, 기와와 약재를 사 왔다. 집을 잃은 사람들에게는 자신의 창고를 비워 잠자리를 내주었다.
“그 귀한 재물을 이렇게 다 써도 되겠나? 자네도 어렵게 마련했을 텐데.”
“저 역시 어려울 때 누군가의 도움을 받았습니다. 그때 받은 것을 이제 돌려드리는 것뿐입니다.”
“나중에 형편이 나아지면 반드시 갚겠네.”
“돈으로 갚지 않으셔도 됩니다. 훗날 어려운 사람을 만나면 오늘 받은 도움을 그 사람에게 나누어 주십시오.”
사람들은 덕수의 말을 오래도록 기억했다. 목수는 품삯의 절반만 받고 집을 지었으며, 농부들은 남은 곡식을 모아 굶주린 집에 나누었다. 옹기장이 노인은 새 솥과 그릇을 구워 필요한 사람들에게 주었다.
혼자였다면 여러 해가 걸렸을 마을 복구는 겨울이 오기 전에 끝났다. 사람들은 덕수의 집부터 크고 화려하게 고쳐 주려 했지만, 그는 가장 늦게 지어도 된다며 사양했다.
새집들이 줄지어 들어선 뒤에도 덕수의 집은 소박했다. 다만 대문 옆에 작은 부엌을 하나 더 만들었다. 길을 가다 굶주린 이가 찾아오면 누구든 따뜻한 죽 한 그릇을 먹을 수 있는 곳이었다.
처음에는 하루에 한두 사람이 다녀갔지만, 소문이 퍼지자 등짐장수와 나무꾼, 과거를 보러 가는 선비들이 찾아왔다. 덕수는 그들에게 밥을 내주고 비가 오면 잠자리도 마련해 주었다.
어느 겨울밤에는 남루한 붉은 도포를 입은 사내가 찾아왔다. 눈썹이 치솟고 발이 유난히 컸지만 덕수는 모른 체하며 아랫목을 내주었다.
“이 집에서는 처음 보는 사람에게도 밥을 주느냐?”
“저도 처음 보는 분에게 떡과 장사 밑천을 얻은 적이 있습니다.”
“그 돈을 갚았더니 금덩이가 되어 돌아왔다던데, 후회하지 않느냐? 금을 감추어 두었다면 대대로 큰 부자로 살았을 것이다.”
“아직도 가족이 먹고살 만큼은 남아 있습니다. 재물을 묻어 두었다면 항아리만 배불렀겠지만, 사람에게 썼으니 여러 집이 따뜻해졌습니다. 그러니 아깝지 않습니다.”
사내가 크게 웃자 문밖에 쌓인 눈이 지붕 아래로 후두두 떨어졌다. 연화와 아이들이 놀라 돌아보았을 때 붉은 도포의 사내는 사라지고 없었다. 그가 앉았던 자리에는 따뜻한 수수팥떡 한 접시만 남아 있었다.
그 뒤로 덕수의 집에는 기이하게도 먹을 것이 마르지 않았다. 쌀독의 쌀은 퍼내도 바닥을 늦게 드러냈고, 밭은 큰 가뭄에도 곡식을 넉넉히 맺었다. 그러나 덕수는 이를 자랑하지 않았다. 수확이 많으면 이웃과 나누고, 적으면 함께 아껴 먹었다.
노모는 좋은 약과 따뜻한 방 덕분에 기침을 완전히 떨쳐 냈다. 손주들이 자라는 모습을 오래 지켜보다가 머리가 백발이 된 뒤 편안히 눈을 감았다.
덕수의 아들은 글공부를 하여 고을의 아전이 되었고, 딸은 어머니에게 베 짜는 솜씨를 배워 어려운 집 아이들에게 옷을 지어 주었다. 두 사람 모두 아버지의 말을 가슴에 새겼다.
“빌린 돈은 반드시 갚아야 하지만, 받은 마음은 돈으로만 갚는 것이 아니다. 그 마음을 필요한 사람에게 다시 건네야 세상의 셈이 비로소 맞는단다.”
세월이 흘러 덕수의 머리에도 흰빛이 내려앉았다. 어느 보름밤, 그는 붉은 실이 묶인 엽전을 들고 홀로 서낭당을 찾았다. 낡은 당집 앞에는 잡초가 무성했고 도깨비 잔치의 흔적은 어디에도 없었다.
덕수는 수수팥떡과 막걸리 한 병을 돌무더기 앞에 놓았다.
“빌린 돈은 오래전에 갚았으나 받은 은혜는 아직 다 갚지 못했습니다. 덕분에 어머니를 모시고 처자식과 평안히 살았습니다.”
바람이 불어 금줄의 헝겊 조각을 흔들었다. 숲속 어디선가 익숙한 웃음소리가 들렸다.
“은혜를 다 갚으려 애쓰지 마라. 네게서 받은 사람이 또 다른 이에게 건넬 터이니, 그 셈은 세상이 대신 이어 갈 것이다.”
덕수가 돌아보았지만 아무도 없었다. 다만 돌무더기 위에 올려 둔 술잔이 저절로 비워져 있었다.
그날 이후 덕수는 다시 도깨비를 만나지 못했다. 하지만 비 오는 밤 서낭당 근처를 지나는 가난한 장사꾼들은 가끔 처마 밑에서 따뜻한 떡과 엽전이 든 전대를 발견했다.
전대에는 언제나 붉은 끈이 묶여 있었고, 그 곁에는 이런 글이 적힌 나뭇조각이 놓여 있었다.
어려울 때 가져다 쓰되, 약속한 날 반드시 돌아올 것.
사람들은 그것을 붉은 도포 도깨비의 선물이라 여겼다. 그러나 어떤 이들은 늙은 덕수가 남몰래 가져다 둔 것이라고도 했다.
무엇이 진실인지는 아무도 알 수 없었다. 다만 덕수의 집안은 대대로 남의 곤궁함을 외면하지 않았고, 그 후손들은 큰 흉년에도 끼니가 끊기지 않았다.
엽전 스무 냥을 갚으러 갔다가 금덩이 스무 개를 얻은 등짐장수의 이야기는 그렇게 오래도록 전해졌다. 사람들은 이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돈을 불리는 셈보다 마음을 나누는 셈이 더 큰 복을 남긴다는 것을 떠올렸다.
세상에는 손에 쥐면 줄어드는 재물이 있고, 남에게 건넬수록 커지는 재물이 있다. 덕수가 도깨비에게서 받은 진짜 금덩이는 어쩌면 항아리 속 황금이 아니라, 끝없이 다른 사람에게 이어진 따뜻한 마음이었는지도 모른다.
유튜브 엔딩멘트
빌린 엽전 스무 냥을 한 푼도 빠짐없이 갚은 덕수는 금덩이보다 귀한 신뢰와 나눔의 복을 얻었습니다. 어려울 때 받은 도움을 기억하고 다시 누군가에게 건네는 마음, 그것이 세상에서 가장 따뜻한 셈이 아닐까요? 오늘 이야기가 마음에 드셨다면 구독과 좋아요로 함께해 주세요. 다음 야담에서 다시 뵙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