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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모에게 쫓겨난 과부와 도깨비 『청구야담』
절망 끝에 만난 기적, 도깨비와 함께 일군 과부의 찬란한 인생 역전기
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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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킹멘트:
남편이 남긴 재산에 눈이 먼 시어머니에게 한겨울 쫓겨난 가엾은 청상과부. 인적 끊긴 깊은 산속 폐가에서 홀로 죽음만 기다리던 그녀 앞에 기상천외한 도깨비가 나타납니다! 도깨비가 건넨 경이로운 위로와 찬란한 인생 역전, 그리고 탐욕스러운 시댁 식구들을 향한 통쾌한 복수극! 눈물 쏙 빼는 감동과 속 시원한 사이다가 함께하는 도깨비의 은밀한 보살핌 속으로 지금 안내합니다.
※ 1: 남편의 죽음과 탐욕스러운 시어머니의 패악
살을 에는 듯한 삭풍이 문풍지를 매섭게 때리던 한겨울의 어느 날이었다. 마을에서 제법 번듯한 기와집을 짓고 살던 최 부잣집 안채에서는 끊임없는 곡소리가 새어 나오고 있었다. 젊고 성실하여 마을 사람들의 칭송이 자자했던 이 집의 장남이, 장사에 나섰다가 몹쓸 전염병에 걸려 허망하게 세상을 떠난 지 갓 사흘째 되는 날이었다. 하얀 소복을 입은 젊은 며느리 연씨는 남편의 차가운 관 앞에서 식음을 전폐한 채 엎드려 피눈물을 쏟고 있었다. 연씨는 본디 가난한 선비의 딸로 태어나 가진 것 없이 시집왔으나, 심성이 비단결처럼 곱고 길쌈 솜씨가 뛰어나 시댁의 재산을 불리는 데 큰 공을 세웠다. 남편 역시 그런 아내를 극진히 아꼈으나, 하늘은 무심하게도 두 사람의 인연을 너무도 일찍 갈라놓고 말았다.
"아이고, 서방님... 어찌 이리 황망하게 가신단 말입니까. 첩첩산중 같은 이 세상에 저 홀로 남겨두고 어찌 눈을 감으셨습니까... 차라리 저를 데려가시지, 어찌 이리 무심하십니까!"
연씨의 서글픈 곡소리가 방 안을 가득 채우고 있었지만, 정작 남편을 잃은 슬픔을 함께 나누어야 할 시어머니의 얼굴에는 슬픔 대신 기묘하고도 탐욕스러운 빛이 서려 있었다. 시어머니는 본래 돈이라면 사족을 못 쓰는 지독한 수전노였다. 아들이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겉으로는 대성통곡을 하였으나, 마음속으로는 아들이 평생을 바쳐 모아둔 수천 냥의 재산과 번듯한 전답들이 오롯이 자신의 차지가 되었다는 생각에 속으로 쾌재를 부르고 있었다.
문제는 단 하나, 법도상 남편의 재산에 대한 권리를 주장할 수 있는 며느리 연씨의 존재였다. 슬하에 자식조차 없이 과부가 된 며느리에게 아들의 피 같은 재산을 단 한 푼도 떼어주기 싫었던 시어머니는, 곁눈질로 곡을 하는 연씨를 흘겨보며 독기 서린 눈을 번뜩였다. 장례를 치르는 내내 곡소리보다 주판알 튕기는 소리를 더 크게 내던 시어머니는, 아들의 시신이 산에 묻히고 집안이 정리되기가 무섭게 본색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그날 저녁, 시어머니는 안방 아랫목에 번듯하게 자리를 틀고 앉아 눈물 자국이 마를 새 없는 며느리 연씨를 차갑게 불러들였다. 방 안에는 시어머니와 성정이 똑 닮아 매일 노름판을 전전하며 가산을 탕진하던 시동생이 팔짱을 낀 채 비열한 웃음을 흘리며 앉아 있었다. 연씨가 파리한 얼굴로 방에 들어서자마자, 시어머니는 느닷없이 담뱃대를 집어 던지며 표독스럽게 소리쳤다.
"이 몹쓸 년! 네년이 우리 집안에 들어올 때부터 재수가 옴 붙었다 했거늘, 기어이 내 귀한 아들을 잡아먹고도 낯짝을 들고 여길 기어들어 와? 서방을 잡아먹은 독거미 같은 년이 어딜 감히 대청마루에 발을 들여!"
"어머님,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제가 어찌 감히 서방님을... 저 역시 하늘이 무너지는 듯 슬프고 원통한데 어찌 그리 모진 말씀을 하십니까."
"듣기 싫다! 네년의 그 여우 같은 눈물 연기에 내가 속아 넘어갈 줄 아느냐? 자식 새끼 하나 못 낳는 돌밭 같은 년을 거두어 주었더니, 은혜를 원수로 갚아? 네년이 밤낮으로 서방의 기를 빨아먹으니 내 아들 놈이 그 지경이 된 것이 아니냐! 당장 이 집에서 나가거라! 꼴도 보기 싫으니 지금 당장 네 발로 걸어 나가!"
시어머니의 청천벽력 같은 호통에 연씨는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남편을 여읜 슬픔이 채 가시기도 전에 길거리로 내쫓기게 된 것이다. 연씨가 덜덜 떨리는 손으로 시어머니의 치맛자락을 부여잡으며 애원했다.
"어머님, 제발 통촉해 주십시오. 밖에는 짐승도 얼어 죽을 만큼 매서운 눈보라가 치고 있습니다. 갈 곳 없는 제가 당장 쫓겨나면 굶어 죽고 얼어 죽을 것이 뻔한데, 날이라도 풀리면 떠나게 해주십시오. 그동안 제가 밤낮으로 베틀을 돌려 모은 재산은 다 어머님과 도련님께 드릴 테니, 제발 몸 뉠 작은 헛간이라도 허락해 주십시오."
하지만 시어머니는 얼음장처럼 차가운 얼굴로 연씨의 손을 매몰차게 뿌리쳤다. 옆에 있던 시동생이 낄낄거리며 끼어들었다.
"형수님, 어머님 말씀이 틀린 게 뭐가 있습니까? 형수님이 베를 짜서 모은 돈이라뇨? 다 우리 형님이 밖에서 뼈 빠지게 벌어온 돈으로 지은 집이고 산 밭인데, 뻔뻔하게 자기 지분을 주장하려는 겁니까? 서방도 죽고 자식도 없는 과부가 무슨 염치로 이 따뜻한 아랫목을 탐낸단 말입니까. 당장 짐 싸서 나가지 않으면 제가 직접 머리채를 잡아끌어 낼 테니 그리 아십시오!"
시어머니와 시동생의 악랄한 협공에 연씨는 더 이상 할 말을 잃었다. 남편이 살아생전 그토록 아꼈던 가족들의 참담한 민낯을 마주한 연씨는 가슴이 갈기갈기 찢어지는 듯했다. 돈 앞에서는 며느리의 목숨 따위는 한낱 파리 목숨보다 못하게 여기는 인간의 추악한 본성에 치를 떨며, 연씨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래, 짐승만도 못한 자들의 곁에 남아 모멸감을 받느니, 차라리 깨끗하게 얼어 죽는 것이 서방님을 향한 도리일 것이다. 돈에 눈이 멀어 혈육의 정마저 버린 이 끔찍한 기와집에 미련은 없다.'
연씨는 두툼한 솜옷 하나 챙겨 입지 못하고, 얇은 소복 차림에 작은 봇짐 하나만을 안은 채 매서운 겨울바람이 휘몰아치는 대문 밖으로 쫓겨나고 말았다. 쾅 하고 매정하게 닫혀버린 대문을 등진 연씨의 뒤로, 시어머니와 시동생이 금고의 열쇠를 차지하고 기뻐하는 간악한 웃음소리가 눈보라를 타고 희미하게 들려왔다.
※ 2: 눈보라 치는 산속, 버려진 폐가에서의 절망
매서운 칼바람이 불어오는 한겨울의 거리는 잔인하리만치 고요하고 차가웠다. 하얀 소복을 입은 연씨의 가녀린 몸뚱이는 쉴 새 없이 몰아치는 눈보라 속에서 금방이라도 부서질 듯 위태롭게 흔들렸다. 발을 내디딜 때마다 차가운 눈이 짚신 사이로 스며들어 발가락이 끊어질 듯한 고통을 안겨주었지만, 연씨는 감각을 잃어버린 사람처럼 허깨비 걷듯 산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마을 사람들의 집 문을 두드려 도움을 청할 수도 있었지만, 남편을 잡아먹은 과부라는 시어머니의 악독한 소문이 이미 마을에 파다하게 퍼진 상태였다. 누구도 그녀를 선뜻 거두어 주지 않을 것을 알기에, 연씨는 인적이 드문 험한 산속으로 향할 수밖에 없었다.
'서방님... 제가 가고 있습니다. 이 모진 세상에 미련 없이 서방님 곁으로 가겠습니다. 저승 가는 길이 멀고 험하다 하였으나, 차가운 눈밭에서 얼어붙는 이 고통이 어찌 당신을 잃은 슬픔보다 크겠습니까.'
눈물조차 뺨에 닿기 전에 얼어붙어 버리는 지독한 추위 속에서, 연씨는 몇 번이나 눈밭에 고꾸라지고 넘어지기를 반복했다. 치맛자락은 날카로운 나뭇가지에 찢겨 너덜너덜해졌고, 맨살이 드러난 손등과 뺨은 동상에 걸려 시퍼렇게 부어올랐다. 배고픔과 추위, 그리고 뼈저린 고독감이 그녀의 목을 서서히 조여오고 있었다. 해가 뉘엿뉘엿 지며 산속에 짙은 어둠이 깔리기 시작하자, 산짐승들의 기괴한 울음소리가 귓가를 맴돌았다. 평소 같았다면 공포에 질려 벌벌 떨었겠지만, 삶에 대한 의지를 완전히 잃어버린 연씨에게는 그 울음소리조차 차라리 어서 와서 자신의 숨통을 끊어달라는 구원의 소리처럼 들렸다.
얼마나 산을 헤맸을까. 정신이 아득해지고 눈앞이 점차 흐려지며 쓰러지기 직전, 연씨의 시야 끝에 기이하게 솟아오른 낡은 처마 하나가 들어왔다. 오랜 세월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아 지붕은 반쯤 무너져 내리고, 벽의 흙은 허물어져 뼈대만 앙상하게 남은 버려진 폐가였다. 마당에는 무성하게 자란 잡초들이 눈에 덮여 기괴한 형상을 하고 있었고, 뚫린 창호지 문 사이로 음산한 바람 소리가 귀곡성처럼 새어 나오고 있었다. 귀신이라도 당장 튀어나올 것 같은 흉흉한 몰골의 폐가였지만, 당장 쓰러져 죽어가던 연씨에게는 바람을 피할 수 있는 유일한 은신처였다.
연씨는 남은 힘을 다해 비틀거리며 폐가의 방 안으로 기어 들어갔다. 방바닥은 얼음장처럼 차가웠고 퀴퀴한 곰팡내와 먼지가 진동했다. 방 한구석, 외풍이 가장 덜 들어오는 곳에 웅크리고 앉은 연씨는 무릎을 끌어안고 자신의 체온으로 겨우 얼어붙은 몸을 녹이려 애썼다. 칠흑 같은 어둠 속, 창틈으로 들어오는 희미한 달빛에 의지해 덜덜 떨고 있자니 그동안 억눌러왔던 서러움과 원통함이 폭포수처럼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흑... 으흑... 내가 전생에 무슨 큰 죄를 지었기에 이리도 가혹한 형벌을 받는단 말인가. 열여섯 꽃다운 나이에 시집와서 손발이 부르트도록 일하며 시어머니를 봉양하고 시동생을 거두었건만, 돌아온 것은 남편의 죽음과 짐승만도 못한 핍박뿐이라니. 어찌 하늘은 저 악독한 자들은 따뜻한 방 안에서 배를 두드리게 두고, 죄 없는 나는 이 차가운 산속에서 고독하게 죽어가게 내버려 두신단 말인가!"
연씨의 피 맺힌 절규가 폐가의 낡은 벽을 때리고 차가운 산공기 속으로 흩어졌다. 아무도 들어주지 않는 슬픔의 메아리가 밤새도록 이어졌다. 온몸의 뼈마디가 얼어붙고 의식이 가물가물해지는 것을 느끼며, 연씨는 눈을 지그시 감았다. 죽음의 그림자가 서서히 그녀의 발끝에서부터 심장을 향해 기어 올라오고 있었다. 이대로 잠이 들면 영영 깨어나지 못할 것을 알았지만, 연씨는 기꺼이 그 달콤한 영면에 몸을 맡기려 했다. 슬픔도, 추위도, 배고픔도 없는 남편의 곁으로 갈 수만 있다면 그것으로 족했다.
하지만 운명의 수레바퀴는 연씨가 그 차가운 방바닥에서 허무하게 죽어가도록 내버려 두지 않았다. 그녀의 숨결이 잦아들고 심장 박동이 희미해져 갈 무렵, 기괴하게 울어대던 산짐승들의 소리가 일순간 뚝 멎었다. 매섭게 몰아치던 눈보라도 거짓말처럼 잠잠해지며, 묘한 정적이 산 전체를 무겁게 짓눌렀다.
그리고 어두컴컴한 폐가의 마당 한가운데, 허공에서 파르스름한 불꽃 하나가 툭 하고 피어올랐다. 그 불꽃은 이내 두 개, 세 개로 늘어나며 폐가의 주변을 둥둥 떠다니기 시작했다. 마치 죽어가는 연씨의 영혼을 인도하러 온 저승사자의 등불처럼 서늘하고 기이한 빛이었다.
※ 3: 도깨비의 등장과 품에 안겨진 작은 기적
"이보시오, 새댁. 이 차가운 방구석에서 궁상맞게 뭘 하고 있는 게요? 젊은 사람이 벌써부터 명줄을 놓으려 하다니, 쯧쯧. 죽기에는 아직 억울하지도 않소?"
얼어붙어 가던 연씨의 귓가에 우레와 같이 웅장하면서도 묘하게 익살스러운 사내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화들짝 놀라 감고 있던 눈을 번쩍 뜬 연씨는, 방바닥에서 몸을 일으키려다 눈앞에 펼쳐진 광경에 헉 하고 숨을 들이켰다. 뚫린 방문 너머, 푸른 불꽃들이 빙글빙글 춤을 추는 마당 한가운데에 사람의 형상을 하고 있으나 덩치가 황소만큼 크고, 이마에는 뭉툭한 뿔이 솟아오른 거대한 사내가 서 있었다. 부리부리한 눈동자에서는 호랑이처럼 매서운 빛이 뿜어져 나왔고, 손에는 어둠 속에서도 기분 나쁘게 번쩍거리는 커다란 가시방망이를 쥐고 있었다. 전설로만 전해 듣던, 깊은 산속의 주인이자 밤의 지배자인 도깨비가 생생하게 살아서 눈앞에 나타난 것이다.
연씨는 온몸에 소름이 돋으며 극심한 공포에 휩싸였다.
'아아, 호랑이에게 물려 죽거나 얼어 죽을 줄 알았더니, 산도깨비의 노리개가 되어 끔찍하게 잡아먹힐 운명이었구나.'
두려움에 사시나무 떨듯 떨며 방구석으로 몸을 한껏 움츠린 연씨를 보며, 도깨비는 방망이를 어깨에 척 걸치더니 호탕하게 껄껄 웃음을 터뜨렸다. 그 웃음소리에 폐가의 기둥에서 먼지가 후두둑 떨어져 내렸다.
"허허, 겁먹을 것 없소. 나는 사람을 해치는 짐승이 아니요. 수백 년 동안 이 산자락을 지키며 인간 세상의 구린내 나는 소문들을 구경하는 재미로 사는 도깨비일 뿐이지. 내 가만히 들어보니, 산 아래 기와집에서 살던 욕심 많은 늙은이와 노름꾼 시동생 놈이 며느리를 엄동설한에 맨몸으로 쫓아냈다지 않소? 서방 잃은 청상과부의 피눈물을 짜내고 제 배를 불린 그 간악한 것들의 행태가 내 심기를 몹시 불편하게 하던 차였지."
도깨비는 성큼성큼 폐가의 토방으로 다가오더니, 커다란 덩치에 어울리지 않게 방바닥에 풀썩 주저앉았다. 도깨비의 거대한 몸집에서 뿜어져 나오는 묘하게 따뜻한 열기가 방 안의 냉기를 서서히 밀어내고 있었다.
"죽는 것은 세상에서 제일 쉬운 일이지. 하지만 새댁, 가만히 생각해 보오. 당신이 여기서 이리 허무하게 얼어 죽어버리면, 산 아래 그 탐욕스러운 시어미와 시동생 놈은 당신의 몫까지 다 차지하고 평생을 떵떵거리며 배불리 살지 않겠소? 그 꼴을 저승에서 지켜보며 피눈물을 흘리려오? 그들의 죄를 벌하고 당신의 떳떳한 삶을 되찾는 것이 먼저가 아니겠소이까!"
도깨비의 거침없는 질책에 연씨의 두 눈이 흔들렸다. 두려움에 마비되었던 정신이 번쩍 드는 것 같았다.
'그래... 내가 왜 그들의 악행을 묻어두고 홀로 억울하게 죽어야 한단 말인가. 서방님이 땀 흘려 일군 재산을 그들이 독차지하여 탕진하게 놔두는 것은 서방님을 두 번 죽이는 일이다!'
연씨의 눈빛에 점차 생기가 도는 것을 확인한 도깨비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그는 자리에서 훌쩍 일어나더니, 허리춤에 차고 있던 거대한 가죽 주머니 속을 조심스럽게 뒤적이기 시작했다.
"살고자 하는 눈빛으로 돌아오니 보기 좋구려. 하지만 혼자서는 이 산속에서 버티기 외롭고 힘든 법이지. 내가 당신이 살아야 할 이유 하나를 던져주리다."
도깨비의 억센 두 손이 가죽 주머니에서 꺼내어 연씨의 품으로 건넨 것은 놀랍게도 살아 숨 쉬는 '어린아이'였다. 이제 겨우 걸음마를 시작했을 법한 작은 아이는, 이 추운 산속에서 어떻게 살아있었는지 모를 정도로 포동포동하고 혈색이 좋았다. 달빛에 비친 아이의 얼굴은 천사처럼 곱고 사랑스러웠다. 아이는 낯선 연씨의 품에 안겨서도 울지 않고, 방긋방긋 웃으며 조그만 손을 뻗어 연씨의 차갑고 얼어붙은 뺨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그 작은 손바닥에서 전해져오는 경이로운 온기에, 연씨의 심장이 미친 듯이 뛰기 시작했다. 슬하에 자식이 없어 늘 헛헛했던 과부의 가슴 한구석에, 기적처럼 따뜻한 불꽃이 피어오르는 순간이었다.
"이, 이 아이는 뉘 집 자식이란 말입니까? 어찌 산도깨비님께서..."
"사연이 많은 아이요. 몹쓸 역병에 부모를 모두 잃고 산짐승에게 물려갈 뻔한 것을 내가 거두었지. 나 같은 우락부락한 도깨비가 키우는 것보다, 사랑을 퍼부을 곳이 없어 죽어가는 당신이 거두어 키우는 것이 천 번, 만 번 낫지 않겠소? 이 아이를 당신의 핏줄이라 여기고 정성껏 키워보시오. 그리하면 당신의 텅 빈 가슴도 사랑으로 벅차오를 것이고, 살아가야 할 가장 강력한 이유가 될 터이니."
연씨는 품에 안긴 작은 생명체를 본능적으로 꼭 끌어안았다. 아이의 부드러운 살결과 따스한 숨결이 닿자, 그동안 억눌러왔던 뜨거운 눈물이 다시금 차고 넘쳐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그것은 절망의 눈물이 아니라, 삶에 대한 강렬한 갈망과 작은 생명을 지켜내겠다는 굳건한 결의의 눈물이었다.
"키우겠습니다... 이 아이가 굶주리지 않게, 이 아이가 추위에 떨지 않게 제 목숨을 바쳐 거두겠습니다. 도깨비님, 살려주셔서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연씨의 다짐에 도깨비는 허공에 금방망이를 둥둥 휘두르며 기분 좋게 웃었다. 방망이가 허공을 가를 때마다 신기하게도 폐가의 뚫린 지붕이 메워지고, 썩은 문풍지가 새것으로 갈렸으며, 차가운 아랫목이 절절 끓을 만큼 따뜻하게 데워지기 시작했다.
"하하하! 좋소! 마음 단단히 먹었으니, 이제부터 당신이 이 산속에서 어떻게 살아남아 그 뻔뻔한 시댁 식구들에게 통쾌한 본때를 보여주는지 내가 뒤에서 똑똑히 지켜보리다! 내일 날이 밝거든 마당 한구석을 파보시오. 당신의 삶을 새롭게 엮어낼 기적이 묻혀있을 터이니!"
말을 마친 도깨비는 거대한 연기와 함께 순식간에 밤공기 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따뜻해진 방 안에서 새근새근 잠든 아이를 품에 안은 연씨의 얼굴에는, 어제까지만 해도 상상할 수 없었던 평온하고도 강인한 어미의 미소가 번져있었다. 절망의 끝에서 도깨비가 건넨 기적, 그것은 과부 연씨의 찬란한 인생 역전의 서막을 알리는 아름다운 서곡이었다.
※ 4: 숨겨진 재능의 발견, 비단실로 엮어낸 새로운 삶
다음 날 아침, 창호지 문틈으로 스며든 눈부신 아침 햇살이 연씨의 파리했던 얼굴을 따스하게 간지럽혔다. 간밤에 폐가를 집어삼킬 듯 맹렬하게 휘몰아치던 삭풍과 눈보라는 거짓말처럼 자취를 감추었고, 온 세상이 고요하고 평화로운 하얀 눈에 포근하게 덮여 있었다. 연씨는 조심스럽게 눈을 떴다. 얼어 죽을 줄만 알았던 밤이 지나고 맞이한 아침의 공기는 맑고 상쾌했다. 무엇보다 놀라운 것은, 땔감 하나 없는 낡은 폐가의 방바닥이 마치 절절 끓는 온돌방처럼 훈훈한 열기를 뿜어내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연씨의 품 안에서는 도깨비가 안겨주고 간 작은 아이가 새근새근 평온한 숨소리를 내며 곤히 잠들어 있었다. 아이의 보드라운 뺨에 조심스레 입을 맞춘 연씨는 어젯밤 자신을 찾아왔던 거대한 산도깨비의 모습이 결코 헛된 환상이나 꿈이 아니었음을 온몸으로 깨달았다.
'그래, 도깨비님께서 마당 한구석을 파보라 하셨지. 나의 삶을 새롭게 엮어낼 기적이 묻혀있을 것이라 하셨어.'
연씨는 자고 있는 아이가 깰세라 조심스럽게 낡은 이불을 덮어주고는, 토방 문을 열고 마당으로 나섰다. 무릎까지 푹푹 빠지는 하얀 눈을 헤치고 마당 한구석으로 다가간 그녀는, 맨손으로 꽁꽁 얼어붙은 흙바닥을 파내기 시작했다. 손끝이 아려왔지만 멈출 수 없었다. 이윽고 부드러워진 흙을 걷어내자, 그 속에서 성인 사내 두 명이 들어도 무거울 법한 커다랗고 낡은 오동나무 궤짝 하나가 웅장한 모습을 드러냈다. 연씨는 떨리는 두 손으로 궤짝의 무거운 쇠고리를 풀고 뚜껑을 열어젖혔다. 그 순간, 연씨의 두 눈이 경악과 환희로 커다랗게 뜨여졌다.
궤짝 안에는 세상의 어떤 보석보다도 찬란하게 빛나는 최고급 비단실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아침 햇살을 받은 비단실은 은은한 진주 빛깔부터 깊고 푸른 바다의 색, 그리고 아침 노을을 닮은 붉은빛까지 오색찬란한 빛을 뿜어내고 있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비단실 아래에는 당장 추운 겨울을 배불리 날 수 있는 하얀 쌀과 질 좋은 고기, 그리고 따뜻한 솜옷들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고, 궤짝의 가장 깊은 곳에는 윤기가 흐르는 단단한 참나무로 정교하게 만들어진 베틀 한 대가 완벽한 자태를 뽐내며 자리 잡고 있었다.
연씨는 궤짝 앞에 털썩 주저앉아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시집오기 전, 가난한 친정에서 그녀가 유일하게 배운 기술이자 가장 자신 있었던 것이 바로 길쌈이었다. 그녀의 고운 손끝에서 짜여 나온 무명과 모시는 늘 저잣거리에서 가장 비싼 값에 팔려나갔고, 그 뛰어난 솜씨 덕분에 시어머니의 모진 시집살이 속에서도 시댁의 곳간을 넘치게 채울 수 있었다. 산도깨비는 연씨의 그 타고난 재능과 숨겨진 소질을 정확히 꿰뚫어 보고, 그녀가 스스로의 힘으로 떳떳하게 독립하여 살아갈 수 있는 완벽한 터전을 마련해준 것이다.
"아아, 도깨비님... 제게 목숨을 이어갈 양식뿐만 아니라, 다시 일어설 수 있는 희망의 끈을 이리도 든든하게 내려주셨군요. 이 은혜, 뼈가 부서져도 잊지 않고 치열하게 살아가겠습니다."
그날부터 적막하기만 하던 산속 폐가에서는 끊임없고 경쾌한 베틀 소리가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찰칵, 찰칵, 스윽-. 도깨비가 준 오색찬란한 비단실은 연씨의 마법 같은 손끝을 거치며 세상에 둘도 없는 아름답고 기품 있는 비단으로 환골탈태했다. 연씨는 밤낮을 가리지 않고 베틀 앞에 앉아 실을 엮었다. 베를 짜는 시간은 그녀에게 과거의 상처를 치유하고 새로운 미래를 그리는 성스러운 의식과도 같았다. 곁에서 방긋방긋 웃으며 장난을 치는 아이의 맑은 웃음소리는 연씨의 피로를 말끔히 씻어주는 최고의 자양분이었다.
"아가, 우리 예쁜 아가. 어미가 이 비단을 짜서 팔아 너에게 세상에서 제일 따뜻하고 고운 꼬까옷을 지어 입힐 테니, 조금만 기다려다오. 널 위해 어미가 조선에서 제일가는 길쌈 명인이 될 것이다."
어느덧 산속에 휘몰아치던 매서운 눈보라가 멎고, 메마른 나뭇가지에 연둣빛 새싹이 돋아나며 진달래가 흐드러지게 피어나는 따뜻한 봄이 찾아왔다. 연씨는 겨우내 정성을 다해 짠 비단 수십 필을 봇짐에 단단히 싸서 등에 메고, 훌쩍 자라 걸음마를 떼기 시작한 아이의 손을 꼭 잡은 채 산 아래 마을 장터로 향했다. 한겨울에 소복 차림으로 쫓겨났던 과부가 넉 달 만에 산에서 내려오자 마을 사람들은 수군거리며 그녀를 곁눈질했다. 하지만 연씨가 장터 한복판에 자리를 잡고 봇짐을 풀어 자신이 짠 비단을 펄럭이며 펼치는 순간, 왁자지껄하던 장터 전체가 기이할 정도로 쥐죽은 듯한 정적에 휩싸였다.
그것은 도무지 인간의 솜씨라고는 믿기지 않는 압도적인 아름다움이었다. 빛의 각도에 따라 색깔이 오묘하게 변하고, 구름을 만지듯 부드러운 촉감을 가진 기적의 비단이었다. 마침 한양에서 진귀한 물건을 구하러 내려왔던 거상들마저 그 비단의 고운 자태에 넋을 잃고 침을 흘렸다. 상인들은 서로 앞다투어 달려들어 금괴와 은화를 내밀며 엄청난 웃돈을 부르기 시작했고, 비단은 그야말로 부르는 게 값이 되어 순식간에 날개 돋친 듯 팔려나갔다.
단 한 번의 장사로 연씨는 시댁에서 쫓겨날 때 빼앗겼던 재산을 훌쩍 뛰어넘는 막대한 거금을 손에 쥐게 되었다. 그녀는 그 돈으로 가장 먼저 산속의 낡은 폐가를 허물고, 그 자리에 비바람에도 끄떡없는 번듯하고 웅장한 기와집을 새로 지었다. 쌀독에는 햅쌀이 마를 날이 없었고, 도깨비가 안겨준 아이는 새하얀 명주옷을 입고 넓은 마당을 마음껏 뛰어다니며 구김살 없이 자라났다. 연씨의 기와집에는 그녀의 비단을 사려는 상인들의 발길이 전국 방방곡곡에서 끊임없이 이어졌고, 한겨울 눈밭에 버려졌던 가엾은 과부는 어느새 마을 사람들의 존경과 부러움을 한 몸에 받는 조선 최고의 부유한 길쌈 명인으로 우뚝 서게 되었다. 그녀의 땀방울이 엮어낸 찬란한 인생 2막의 시작이었다.
※ 5: 뻔뻔한 시댁 식구들의 등장과 끝없는 핍박
하지만 세상의 소문이란 깃털보다 가볍고 바람보다 빨라서, 아무리 깊은 산속의 일이라도 결국 사람들의 입을 타고 온 동네로 퍼져나가는 법이었다. 얼어 죽은 줄로만 알았던 며느리 연씨가 산속에서 기가 막힌 비단을 짜내어 한양 거상들의 돈을 쓸어 담고 만석꾼 부자가 되었다는 경이로운 소문은, 며칠 지나지 않아 산 아래 마을 구석구석을 돌고 돌아 결국 시어머니와 시동생의 귀에까지 들어가고 말았다.
며느리를 사지로 내몰고 남편의 재산을 독차지했던 시어머니와 시동생의 현재 꼴은 그야말로 비참하기 짝이 없었다. 연씨를 쫓아낸 직후, 노름에 미쳐있던 시동생은 집안의 기둥뿌리부터 문전옥답까지 모조리 팔아치워 투전판에 쏟아부었고, 단 몇 달 만에 수천 냥의 가산을 흔적도 없이 탕진해버렸다. 시어머니는 며느리를 쫓아내고 얻은 부귀영화가 한순간에 신기루처럼 사라지자 억장이 무너져 심한 홧병에 걸려 몸져누웠고, 남은 가재도구마저 약값으로 다 까먹은 상태였다. 번듯했던 기와집은 남의 손에 넘어가고, 이제는 비가 새는 초가집 단칸방에서 끼니조차 때우기 힘들어 맹물로 배를 채우며 쩔쩔매고 있었다.
그러던 차에 들려온 연씨의 벼락부자 소식은, 굶주림에 허덕이던 두 사람에게 가뭄에 단비 같은 소식이자 그들의 마음속 깊은 곳에 잠들어있던 추악한 탐욕을 다시금 맹렬하게 불태우는 치명적인 미끼였다.
"어머니! 방금 장터에서 끔찍하게 놀라운 소문을 들었습니다! 그 서방 잡아먹은 형수년이 산속에서 기막힌 비단을 팔아 금은보화를 창고에 산더미처럼 쌓아두고 대궐 같은 기와집에서 떵떵거리며 산답니다! 아니, 애초에 형수님은 우리 집안의 귀신이 되어야 할 사람이 아닙니까? 쫓겨났든 제 발로 나갔든 우리 가문의 며느리이니, 그년이 번 재산도 당연히 우리 시댁의 몫이 아니겠습니까? 당장 산으로 올라가서 그 재물을 모조리 우리 앞으로 빼앗아 옵시다!"
빚쟁이들에게 흠씬 두들겨 맞아 눈탱이가 밤탱이가 된 노름꾼 시동생의 비열하고도 뻔뻔한 꼬드김에, 시어머니 역시 죽어가던 흐리멍덩한 눈을 번뜩이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돈 앞에서는 체면도, 혈육의 도리도, 일말의 양심도 찾아볼 수 없는 구제 불능의 인간들이었다.
"오냐! 네 말이 백번 지당하다! 그년이 우리 집안에 들어와서 내 아들 기를 빨아먹고 배운 길쌈 기술로 돈을 벌었으니, 그 돈의 원천은 당연히 이 시어미의 것이다! 감히 늙은 시어미가 풀죽을 쑤어 먹고 있는데, 과부년이 혼자 고깃국을 처먹어? 당장 동네 왈패들을 돈으로 구워삶아 데리고 올라가자! 싹 다 뒤집어엎고 재물 창고 열쇠를 내 손에 쥐여야 내 속이 풀리겠다!"
다음 날 아침, 세상에서 가장 뻔뻔한 철면피로 무장한 시어머니와 시동생은 마지막 남은 돈을 털어 몽둥이를 든 험악한 왈패 무리를 대동하고 산을 올랐다. 연씨가 지어 올린 웅장하고 번듯한 기와집 앞에 도착한 그들은, 그 으리으리한 규모에 잠시 압도되었으나 이내 시기심과 탐욕에 눈이 뒤집혀 대문을 거칠게 발로 걷어차며 마당으로 들이닥쳤다.
"이 요망한 년! 어디 숨어있느냐! 시어미가 눈이 시퍼렇게 살아서 굶어 죽어가고 있는데, 과부년이 감히 혼자서 산속에 숨어 대궐을 짓고 호의호식해? 서방 잡아먹은 년이 어디서 더러운 몸을 굴려 재물을 긁어모았는지 몰라도, 네년의 몸뚱이도, 이 번듯한 집도, 창고에 쌓인 저 재물도 다 내 죽은 아들의 것이고 이 시어미의 것이다! 당장 마루로 기어 나와 머리를 조아리고 창고 열쇠를 내놓지 못할까!"
마당에서 흙장난을 하며 평화롭게 놀고 있던 아이가 험악한 고함에 기겁하여 울음을 터뜨렸고, 길쌈을 하던 연씨가 사색이 되어 뛰쳐나와 아이를 자신의 치맛자락 뒤로 숨겼다. 눈앞에 나타난 자들의 면면을 확인한 연씨는 공포가 아닌 극심한 분노로 온몸을 부들부들 떨며 두 사람 앞을 가로막았다.
"어머님! 도련님! 도대체 무슨 낯짝과 염치로 여길 찾아오셨습니까! 한겨울 짐승도 얼어 죽을 눈보라 속에 옷 한 벌 주지 않고 저를 사지로 내몰 때는 언제고, 이제 와서 제 피와 땀으로 밤낮없이 엮어 일군 재산을 탐내시다니요! 이 재물은 십 원짜리 한 장 시댁의 도움 없이 제 손으로 짠 비단으로 벌어들인 것이니 단 한 푼도, 아니 쌀 한 톨도 내어드릴 수 없습니다. 당장 제 집에서 나가십시오!"
연씨의 단호하고도 차가운 거절에 시어머니는 게거품을 물었고, 시동생은 눈을 부라리며 뒤에 선 왈패들에게 턱짓을 했다.
"어허, 형수님이 아주 돈맛을 보더니 눈에 뵈는 게 없구먼? 아버지가 누군지도 모르는 남의 핏덩이를 뻔뻔하게 주워다 키우며 수절도 지키지 않은 더러운 과부년이 어디서 감히 시어미 앞에서 눈을 똑바로 뜨고 대드느냐! 얘들아, 싹 다 때려 부수고 당장 창고 문을 도끼로 찍어 열어라! 저 계집년이 반항하면 머리채를 잡아서라도 바닥에 내동댕이치고 묶어버려!"
시동생의 악랄한 명령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험악한 왈패들이 무자비하게 몽둥이를 휘두르며 마당에 놓인 귀한 장독대들을 박살 내기 시작했다. 쨍그랑! 퍽! 하는 파열음과 함께 마당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었고, 왈패 두 명이 흉흉한 웃음을 흘리며 연씨와 아이를 향해 거친 손을 뻗어오는 일촉즉발의 절체절명 위기 상황이었다. 연씨가 찢어지는 비명을 지르며 아이의 몸을 자신의 몸으로 덮어 꼭 껴안고 눈을 질끈 감은 그 순간!
※ 6: 도깨비의 통쾌한 징벌, 찬란하게 빛나는 새 출발
"이런 하늘이 무섭지도 않은 짐승만도 못한 버러지 같은 놈들을 보았나!"
하늘과 땅을 동시에 찢어발기는 듯한 엄청난 굉음이 산속을 뒤흔들었다. 화창하고 맑았던 하늘이 순식간에 칠흑같이 시커먼 먹구름으로 무섭게 뒤덮였고, 대낮인데도 캄캄한 어둠이 기와집을 집어삼켰다. 우르릉 쾅쾅! 귀청이 떨어질 듯한 천둥 번개가 마당 한가운데로 벼락처럼 내리치고, 살을 에는 듯한 거센 돌풍이 불어닥치며 마당의 모래바람이 거대한 회오리를 만들어냈다.
모두가 혼비백산하여 비명을 지르며 땅바닥에 나뒹군 가운데, 흙먼지가 소용돌이치는 한가운데서 거대한 그림자가 쿵! 하는 지진과 함께 모습을 드러냈다. 사람의 두 배가 넘는 거대한 덩치에 머리에는 뿔이 솟아있고, 시뻘건 두 눈에서 시퍼런 안광을 형형하게 뿜어내는 산자락의 지배자, 도깨비였다. 그의 한 손에는 어둠 속에서도 번쩍거리는 무시무시한 가시방망이가 들려 있었다.
갑작스러운 도깨비의 끔찍한 등장과 숨이 막히는 압도적인 공포에 시어머니와 시동생, 그리고 돈을 받고 패악질을 부리던 왈패들은 얼굴이 하얗게 질려 다리에 힘이 풀려버렸다.
"히익! 도, 도... 도깨비다! 사, 사람 살려! 도깨비가 나타났다!"
왈패들은 자신들이 쥐고 있던 몽둥이를 마당에 내팽개치고는, 바지에 오줌을 지리며 뒤도 돌아보지 않고 비명을 지르며 산 아래로 줄행랑을 쳐버렸다. 홀로 남겨진 시어머니와 시동생은 달아날 힘조차 잃고 바닥에 납작 엎드려 사시나무 떨듯 바들바들 떨고 있었다. 평생 남의 피눈물을 짜내고 약한 자들을 짓밟으며 떵떵거려온 뻔뻔한 시어머니조차 공포에 질려 입을 다물지 못했다.
도깨비는 가시가 돋친 거대한 금방망이를 바들바들 떠는 두 인간말종의 코앞에 위협적으로 휘두르며, 산이 떠나갈 듯한 천둥 같은 목소리로 분노의 호통을 쳤다.
"네 이놈들! 피도 눈물도, 최소한의 인간의 도리마저 저버린 간악한 족속들아! 불쌍한 며느리를 엄동설한에 맨몸으로 사지에 짐승 먹이로 내몬 것도 모자라, 그 가엾은 이가 뼈를 깎는 피땀을 흘려 겨우 일구어낸 작은 행복마저 짓밟고 재물을 강탈하려 들다니! 네놈들은 정녕 하늘의 분노가 두렵지 않더냐! 내 오늘 이 도깨비 방망이로 너희들의 그 추악하고 썩어빠진 탐욕의 대갈통을 모조리 박살을 내어 산짐승들의 먹이로 던져주고야 말겠다!"
도깨비가 치켜든 방망이를 땅에 쾅 내리치자, 마당의 굳건했던 땅이 쩍쩍 갈라지며 무시무시한 진동이 일어났다. 시어머니와 시동생은 머리를 땅에 박고 양손을 미친 듯이 비비며 목숨을 구걸하기 시작했다.
"아이고, 산신령님! 아니 도깨비님! 살려주십시오! 저희가 돈에 눈이 멀어 잠시 미쳐서 몹쓸 짓을 저질렀습니다! 제발 목숨만은, 목숨만은 거두지 말아 주십시오! 다시는, 다시는 형수님 곁에 얼씬도 하지 않고 평생 죄를 뉘우치며 살겠습니다요!"
"입 닥쳐라! 말로 지은 죄는 입으로 갚고, 행동으로 지은 죄는 평생 몸뚱이로 갚아야 하는 것이 하늘의 이치이자 이 도깨비의 심판이다! 형수의 재산을 탐하고 가족의 고혈을 빨아 노름판에서 탕진한 시동생 놈아, 넌 평생을 추악한 몰골로 남의 집 머슴살이를 하며 소똥이나 치우고 매를 맞으며 비참하게 죗값을 치러라! 그리고 죄 없는 며느리에게 독설을 퍼붓고 사지로 쫓아낸 독사 같은 시어미 놈아! 네년은 그 더러운 혀를 함부로 놀린 죗값으로 평생토록 말을 하지 못하는 벙어리가 될 것이다. 남은 평생 네년이 지은 죄악의 무게를 침묵 속에서 곱씹으며 길바닥에서 썩은 밥을 구걸하며 연명하게 될 것이다!"
도깨비의 무시무시하고도 자비 없는 선고가 떨어짐과 동시에, 그가 치켜든 금방망이에서 눈이 멀 것 같은 푸른 번개가 뿜어져 나와 땅에 엎드린 두 사람의 정수리를 벼락같이 내리쳤다.
"끄아아아악!"
단말마의 비명을 지르며 뒤로 나자빠진 시동생의 얼굴은 순식간에 일그러지며 흉측하고 검게 변했고, 사지가 뒤틀려 마치 짐승 같은 추레한 몰골의 머슴으로 변해버렸다. 시어머니는 목을 부여잡고 입을 뻐끔거렸으나, 단 한 마디의 신음조차 내뱉지 못하는 완전한 벙어리가 되어버렸다. 두 사람은 자신들에게 내려진 돌이킬 수 없는 끔찍한 신체적 저주와 절망적인 운명에 몸부림치며, 눈물과 콧물을 범벅한 채 기와집 마당을 빠져나가 산 아래로 비참하게 기어 내려갔다. 그들의 등 뒤로 다시는 부귀영화를 누릴 수 없는 지옥의 문이 굳게 닫히는 순간이었다.
악당들이 모두 쫓겨나고 상황이 정리되자, 칠흑 같던 먹구름이 서서히 물러가고 다시 따스하고 찬란한 봄 햇살이 연씨의 기와집 마당을 환하게 비추기 시작했다. 도깨비는 무섭고 분노했던 얼굴을 싹 거두고, 겁에 질려 연씨의 품에 안겨 있는 작은 아이를 향해 몸을 굽혀 부드럽게 윙크를 해 보였다. 그 익살스러운 표정에 아이가 언제 무서웠냐는 듯 방긋 웃으며 도깨비의 커다란 손가락을 향해 작은 손을 뻗자, 도깨비는 껄껄 웃으며 연씨를 자애롭게 바라보았다.
"어찌, 이 늙은 도깨비의 솜씨가 마음에 드시오? 이제 저 구린내 나는 인간말종들이 당신과 아이의 눈부신 앞길을 가로막을 일은 영영 없을 것이오. 내 약속하리다."
연씨는 아이를 품에 안은 채 도깨비의 커다란 발앞에 엎드려 바닥에 이마를 대고 큰 절을 올렸다. 흐르는 눈물은 감격과 깊은 환희의 눈물이었다.
"도깨비님의 저 산보다 높고 바다보다 넓은 하해와 같은 은혜를 이 미천한 목숨이 어찌 다 갚으오리까. 한겨울 죽어가던 제 목숨을 살려주신 것도 모자라, 이리 예쁜 아이를 주시어 삶의 기쁨과 어미의 도리를 알게 하시고, 오늘 저의 억울한 원한까지 이리 속 시원히 갚아주셨습니다. 도깨비님은 저희 모자에게 하늘이 내려주신 기적이자 진짜 부처님이십니다."
"허허허, 부처라니 당치도 않소. 나는 그저 인간 세상의 선과 악을 구경하며 참견하기 좋아하는 산자락의 늙은 도깨비일 뿐이오. 당신의 그 착하고 고운 심성과, 절망 속에서도 포기하지 않고 땀 흘려 짜낸 그 비단의 고결한 가치가 하늘을 감동시켜 스스로 이 놀라운 기적을 만들어낸 것이지. 자, 이제 이 아름다운 산속 기와집의 진짜 떳떳한 주인은 바로 당신이오. 사랑하는 아이와 함께 오래오래 행복하게, 당신이 짠 비단보다 훨씬 더 찬란하게 빛나는 삶을 살아가시오."
말을 마친 도깨비는 기분 좋은 따뜻한 봄바람을 크게 일으키며, 푸르고 맑은 하늘 저편으로 연기처럼 스르르 사라졌다.
연씨는 도깨비가 사라진 텅 빈, 그러나 눈부시게 푸른 하늘을 오래도록 올려다보았다. 가슴속 깊은 곳에 단단하게 응어리졌던 모진 시집살이의 슬픔과 지독한 원망이 봄눈 녹듯 씻은 듯이 사라지고, 그 자리에 내일을 향한 희망과 벅찬 감동만이 가득 차올랐다. 품에 안긴 아이가 "어머니!" 하고 맑은 목소리로 부르며 까르르 웃음을 터뜨렸다. 연씨는 아이의 따뜻한 이마에 깊이 입을 맞추며,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평온한 미소를 지었다.
어느 추운 겨울날, 차가운 눈밭에 버려져 절망의 늪에서 허무하게 죽어가던 가엾은 청상과부 연씨. 그녀는 도깨비가 건넨 작은 기적의 씨앗과 자신만의 억척스럽고도 정직한 의지로 끔찍했던 운명의 수레바퀴를 완전히 뒤집어버렸다. 한 올 한 올 정성스레 엮어낸 오색찬란한 비단실처럼 아름답고 굳건하게 펼쳐질 연씨와 아이의 눈부신 새 출발은, 산자락에 흐드러지게 피어난 붉은 봄꽃들보다 훨씬 더 찬란하고 눈부시게 반짝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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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준비한 『청구야담』 기묘하고도 통쾌한 과부 연씨의 이야기, 즐겁게 들으셨나요? 탐욕은 결국 스스로를 파멸로 이끌지만, 따뜻한 마음과 정직한 땀방울은 기적을 만들어낸다는 훈훈한 교훈이 남는 이야기였습니다. 절망 끝에서 다시 피어난 연씨의 비단처럼, 여러분의 일상에도 찬란한 희망의 실타래가 이어지길 바랍니다. 이야기가 흥미로우셨다면 구독과 좋아요, 알림 설정 부탁드리며, 저는 다음번에 더 재미있고 속 시원한 옛날이야기로 찾아오겠습니다. 편안한 밤 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