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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받이 처녀의 첫날밤, 남편 대신 산도적을 밀어 넣은 본처의 최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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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트로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깊어가는 밤, 옛 사람들의 삶과 지혜가 담긴 보따리를 풀어보는 야담 시간입니다. 예로부터 남의 눈에 피눈물을 흘리게 하면 제 눈에는 고름이 흐른다는 옛말이 있지요. 오늘 들려드릴 이야기는 평안도 지방에서 전해 내려오는 기묘하고도 통쾌한 도깨비 야담입니다. 대를 잇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집안에 들인 어여쁜 처녀를 시기한 나머지, 첫날밤 신방에 남편 대신 흉악한 산도적을 밀어 넣은 천인공노할 본처가 있었습니다. 과연 그 캄캄한 어둠 속에서 처녀의 운명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또 억울한 약자의 편에 서서 기상천외한 장난으로 악인을 혼쭐낸 존재의 정체는 무엇이었을까요? 듣는 내내 가슴이 뻥 뚫리는 유쾌하고도 따뜻한 이야기 속으로 지금 바로 떠나보시겠습니다.
씬표
씬1: 빚에 팔려 온 꽃다운 처녀 연화와 독사 같은 본처 장 씨의 위선 (병든 아버지를 위해 최 참봉 댁 씨받이로 들어온 연화. 겉으로는 인자한 척하며 뒤로는 연화를 없앨 흉계를 꾸미는 본처 장 씨의 섬뜩한 두 얼굴과 후원 고목나무 도깨비의 등장)
씬2: 첫날밤의 흉계, 신방에 스며든 흉악한 그림자와 도깨비의 환술 (합궁일 밤, 남편에게 수면제를 먹이고 흉악한 산도적 애꾸눈 독고칠을 신방에 들여보낸 장 씨. 그러나 도깨비 김 서방의 기막힌 환술에 걸려 호랑이와 뱀을 보고 혼비백산하여 도망치는 산도적)
씬3: 잠에서 깨어난 남편 최 참봉, 그리고 어둠 속에서 피어난 진심 (도깨비의 도움으로 잠에서 깨어나 신방으로 향한 최 참봉. 두려움에 떨던 연화를 따뜻하게 감싸 안으며 비로소 진정한 부부의 연을 맺고, 이튿날 이를 확인한 장 씨가 분통을 터뜨리는 과정)
씬4: 옥동자의 탄생과 사악한 미역국, 독약이 꿀물로 변한 기적 (열 달 후 건강한 아들을 낳은 연화. 아기만 빼앗고 연화를 죽이기 위해 비상 섞인 미역국을 먹이는 장 씨와, 도깨비의 조화로 산삼 꿀물을 마시고 오히려 기운을 차리는 연화)
씬5: 만천하에 드러난 악행, 도깨비의 벼락같은 단죄와 본처의 몰락 (죽지 않은 연화를 보고 기겁한 장 씨가 산도적을 다시 불러들이지만, 도깨비의 신통력으로 최 참봉과 하인들 앞에서 모든 자백을 하게 되어 집안에서 쫓겨나는 통쾌한 인과응보)
씬6: 안방마님이 된 연화, 도깨비의 축복 속에 대대손손 이어진 만복 (정실부인이 되어 아들과 함께 자애롭게 집안을 다스리는 연화. 보이지 않는 곳에서 복을 빌어주며 메밀묵을 얻어먹는 도깨비와 함께 백년해로하는 행복한 결말)
※ 1: 빚에 팔려 온 꽃다운 처녀 연화와 독사 같은 본처 장 씨의 위선
평안도 정주 땅, 구름도 쉬어 간다는 높고 험한 산자락 아래에 기와지붕이 고래 등처럼 솟은 최 참봉 댁 대저택이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만석꾼으로 소문난 최 참봉은 성품이 온화하고 어질기로 유명했으나, 마흔이 넘도록 슬하에 자식 하나 두지 못한 것이 평생의 한이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정실부인인 장 씨가 시집온 지 이십 년이 다 되도록 태기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장 씨 부인의 성정이 마치 시퍼런 서릿발 같고 질투심이 하늘을 찌를 듯하여, 최 참봉이 감히 첩을 들일 엄두조차 내지 못했다는 점이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늦가을 날, 최 참봉 댁 대문 앞에 나뭇잎처럼 파르르 떨고 있는 열아홉 살 처녀 하나가 서 있었습니다. 이름은 연화라고 했습니다. 찢어지게 가난한 살림에 노모는 일찍 세상을 떠나고, 유일한 피붙이인 아버지마저 폐병으로 피를 토하며 쓰러지자, 약값으로 진 빚 백 냥을 갚기 위해 스스로 씨받이로 팔려 온 참이었습니다.
"이보게, 거기 문간에 섰는 처녀가 아랫마을 김 첨지의 딸 연화가 맞는가?"
안채에서 비단 치맛자락을 사락거리며 걸어 나온 이는 바로 안방마님 장 씨였습니다. 마흔 줄에 접어들었지만 기름진 음식과 비단옷으로 치장한 장 씨는 눈꼬리가 날카롭게 올라가 있었고, 입술은 얇아 한눈에 보아도 여간내기가 아님을 알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대문간에 모여든 동네 사람들과 하인들의 시선을 의식한 장 씨는, 세상에서 가장 자애로운 보살 같은 미소를 지으며 연화의 거친 손을 덥석 잡았습니다.
"소녀, 연화라고 하옵니다. 마님… 부디 못난 소녀를 거두어 주시옵소서."
"어이구, 이 찬 바람에 손이 다 얼었구나. 그래, 네 효심이 지극하여 병든 아비를 살리려고 우리 집안에 들어왔다는 이야기를 듣고 내가 얼마나 눈물을 흘렸는지 모른다. 내 비록 몸이 허약하여 가문의 대를 잇지 못하는 죄인이 되었으나, 너처럼 곱고 착한 아이가 우리 가문에 귀한 씨앗을 안겨준다면 내 너를 친동생처럼, 아니 친딸처럼 아끼고 보살펴 줄 것이니 아무 걱정하지 말거라."
장 씨가 손수건으로 눈물까지 찍어내는 시늉을 하자, 주변에 서 있던 하인들과 동네 아낙들은 입을 모아 장 씨의 넓은 배포를 칭송하기 바빴습니다.
"세상에, 안방마님께서 저리도 속이 깊으실 줄이야. 시어머니도 안 계신 집안에서 마님 스스로 씨받이를 들이시고 저토록 따뜻하게 맞아주시니, 최 참봉 어르신 댁에 곧 큰 복이 들어오겠구먼."
연화 역시 장 씨의 따뜻한 말 한마디에 얼어붙었던 가슴이 조금이나마 녹아내리는 듯했습니다.
'하늘이시여, 감사합니다. 비록 몸을 팔아 종처럼 들어온 신세이나, 마님께서 저리도 너그러우시니 정성을 다해 모시고 아기씨를 낳아드려야지. 그리하면 아버님도 약을 제때 드시고 쾌차하실 수 있을 거야.'
하지만 그 시각, 연화의 손을 잡고 안채 구석진 별당으로 걸어가는 장 씨의 속마음은 시꺼먼 독기가 부글부글 끓어오르고 있었습니다. 하인들의 시선이 닿지 않는 후미진 담장 모퉁이를 돌자마자, 장 씨는 연화의 손을 매섭게 뿌리치며 차가운 본색을 드러냈습니다.
"아얏!"
연화가 갑작스러운 힘에 밀려 차가운 흙바닥에 주저앉자, 장 씨는 방금 전까지의 인자한 표정을 싹 지우고 독사 같은 눈초리로 연화를 내려다보았습니다.
"네 이년, 똑똑히 들어라. 내가 좋아서 너 같은 천한 거지 계집을 집안에 들인 줄 아느냐? 영감님이 가문의 대가 끊긴다고 밤마다 한숨을 쉬며 문중 어른들께 고개를 못 드시니, 내가 체면치레로 어쩔 수 없이 네년을 들인 것이다! 행여나 영감님의 총애를 입어 안방 자리라도 넘볼 생각이라면 지금 당장 혀를 깨물고 죽는 게 나을 줄 알아라!"
"마, 마님… 소녀는 결코 그런 헛된 마음을 품지 않았사옵니다. 그저 시키시는 대로 조용히 지내다가 아기씨만 낳아드리고 물러갈 것이옵니다."
"흥! 말은 잘하는구나. 네 아비 약값으로 건넨 백 냥은 네년의 목숨값이다. 이 별당 밖으로는 내 허락 없이 반 발짝도 나가지 못할 것이며, 영감님 앞에서는 벙어리처럼 입을 다물고 있어야 한다. 만약 내 눈에 거슬리는 짓을 조금이라도 했다가는, 네 아비에게 보낸 약재를 당장 끊어버리고 거적때기에 말아 뒷산 개밥으로 던져버릴 것이니 명심하거라!"
장 씨의 서슬 퍼런 협박에 연화는 사시나무 떨듯 몸을 떨며 바닥에 이마를 찧었습니다. 장 씨가 매정하게 치맛자락을 휘날리며 사라지자, 홀로 남겨진 연화는 차가운 별당 마루를 붙잡고 소리 죽여 흐느꼈습니다.
'아버지… 연화는 어찌 되든 상관없으니 부디 그 약을 드시고 오래오래 사셔야 해요. 제가 이 지옥 같은 곳에서도 어떻게든 버텨내겠습니다.'
그런데 그때였습니다. 별당 뒤편, 수백 년은 족히 되어 보이는 거대한 느티나무 꼭대기에서 누군가 연화의 울음소리를 가만히 내려다보고 있었습니다. 붉은 주석 빛깔의 얼굴에 덥수룩한 수염, 머리에는 자그마한 뿔이 돋아나고 해진 패랭이를 쓴 존재, 바로 이 집터가 생기기 전부터 느티나무에 깃들어 살던 고목나무 도깨비 '김 서방'이었습니다. 도깨비 김 서방은 나뭇가지에 걸터앉아 다리를 흔들며 혀를 끌끌 찼습니다.
'허어, 저 고약한 장 씨 할망구 하는 짓거리 좀 보게나. 겉으로는 부처님 가운데 토막인 척하더니만, 속에는 구렁이가 열두 마리는 들어앉았구먼! 저 불쌍하고 착한 처녀가 아비 살리겠다고 제 발로 호랑이 굴에 들어왔는데, 가만히 두었다간 저 독사 같은 마누라 손에 뼈도 못 추리겠네그려. 에잉, 내 평생 남의 집 부부 싸움에는 안 끼어들려고 했건만, 우리 어진 최 참봉 영감 체면을 봐서라도 이 김 서방이 두 팔을 걷어붙여야겠구먼!'
도깨비 김 서방이 손가락을 딱 튕기자, 차갑게 불던 늦가을 바람이 별안간 따뜻한 봄바람처럼 변하여 연화의 젖은 뺨을 부드럽게 어루만졌습니다. 어디선가 구수한 메밀묵 냄새와 함께 은은한 꽃향기가 코끝을 스치자, 연화는 눈물을 멈추고 신기한 듯 고개를 들어 느티나무를 바라보았습니다. 비록 도깨비의 모습이 눈에 보이지는 않았으나, 마치 보이지 않는 커다란 손이 자신의 등을 토닥여주는 듯한 묘한 위안에 연화는 조금씩 두려움을 가라앉힐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저 앞 안채에서는 장 씨 부인이 몸종 춘섬이를 불러들이며 입가에 소름 끼치는 미소를 짓고 있었습니다.
"춘섬아, 내일모레가 길일이라 영감님이 저 별당으로 드신다고 하더구나. 허나 내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에는 영감님이 저 천한 계집의 몸에 손끝 하나 대는 꼴을 못 본다. 너, 오늘 밤 당장 뒷산 폐가에 숨어 사는 애꾸눈 독고칠을 은밀히 찾아가거라."
"마님! 독고칠이라면 관아에서도 현상금을 걸고 찾는 그 흉악무도한 산도적 놈 말씀이시옵니까? 그런 자를 어찌…"
"쉿! 목소리 낮추지 못할까! 내 그놈에게 은자 오십 냥을 줄 터이니, 내일모레 밤 영감님 대신 저 별당에 들어가 연화 저년을 마음껏 욕보이고 겁을 주어 스스로 목을 매달게 만들라고 일러라. 혹여 아이가 들어서더라도 그 도적놈의 더러운 씨앗일 터이니, 나중에 부정한 계집으로 몰아 내쫓으면 그만 아니더냐! 흐흐흐, 일석이조란 바로 이를 두고 하는 말이지!"
질투와 탐욕에 눈이 먼 장 씨의 간교한 웃음소리가 고요한 밤공기를 가르고 퍼져 나갔습니다.
※ 2: 첫날밤의 흉계, 신방에 스며든 흉악한 그림자와 도깨비의 환술
이틀 뒤, 마침내 합궁일로 정해진 보름날 밤이 찾아왔습니다. 하늘에는 쟁반 같은 보름달이 휘영청 떠올랐으나, 장 씨 부인의 흉계가 도사리고 있는 최 참봉 댁 안채에는 음산한 기운이 감돌았습니다. 장 씨는 저녁 수라상에 오른 최 참봉의 반주 술병에 미리 구해둔 강력한 수면제인 몽한약을 몰래 타 두었습니다. 평소에는 어질고 점잖은 최 참봉이었으나, 가문의 대를 이어야 한다는 중압감에 술을 연거푸 서너 잔 들이켜더니 이내 눈꺼풀이 천근만근 무거워지며 안방 보료 위에 그대로 쓰러져 깊은 잠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영감님? 영감님, 주무시옵니까? 호호호, 코 골며 주무시는 걸 보니 내일 아침 해가 중천에 뜰 때까지는 누가 업어가도 모르시겠구먼."
장 씨는 쓰러진 남편의 모습을 확인하고는 회심의 미소를 지었습니다. 그리고는 안방 문을 밖에서 자물쇠로 굳게 걸어 잠근 뒤, 후원 쪽문에서 신호를 기다리고 있던 몸종 춘섬이에게 손짓을 보냈습니다. 잠시 후, 후원의 어두운 대나무 숲 그림자 속에서 곰처럼 비대한 체구에 험상궂은 흉터가 얼굴을 가로지른 사내 하나가 어슬렁거리며 걸어 나왔습니다. 한쪽 눈을 검은 안대로 가린 흉악한 산도적, 애꾸눈 독고칠이었습니다. 사흘을 굶은 승냥이 같은 눈빛을 번뜩이는 독고칠의 앞을 장 씨가 가로막으며 은자 오십 냥이 든 묵직한 주머니를 던져주었습니다.
"약속한 은자 오십 냥이다. 저기 불 켜진 별당 안에 오늘 새로 들인 열아홉 살짜리 처녀가 혼자 떨고 있을 것이다. 등불을 끄고 들어가 네놈 마음대로 욕을 보인 뒤, 누구에게라도 오늘 밤 일을 발설하면 아비의 목을 따버리겠다고 단단히 겁을 주어라. 단, 목숨까지 끊어놓아 집안에 피를 묻히지는 말고, 새벽닭이 울기 전에 흔적도 없이 사라져야 한다. 알겠느냐?"
"크흐흐, 마님 말씀 한번 화끈하시구먼유. 돈도 받고 꽃 같은 처녀도 품고, 이 독고칠이 평생에 이런 호사를 다 누려봅니다그려. 염려 마시구려, 내 저 처녀가 부끄러워서 영감님 얼굴은커녕 마님 그림자도 못 밟게 반죽음을 만들어 놓을 테니까유!"
독고칠은 누런 이빨을 드러내며 더러운 침을 질질 흘렸습니다. 장 씨와 춘섬이가 서둘러 안채로 몸을 숨기자, 독고칠은 은자 주머니를 허리춤에 차고 입맛을 다시며 별당을 향해 살금살금 걸어갔습니다. 별당 방안에서는 연화가 곱게 단장한 채 촛불 아래에 다소곳이 앉아 있었으나, 두 손은 치마폭을 쥐어뜯을 듯이 꽉 쥐고 있었습니다.
'어르신은 어떤 분이실까… 부디 모질지 않은 분이셔야 할 텐데. 아버지, 연화에게 힘을 주세요.'
바로 그때, 별당 툇마루가 삐거덕 소리를 내며 무거운 발소리가 문 앞에 멈춰 섰습니다. 독고칠이 문풍지 침을 발라 구멍을 뚫고 안을 들여다보니, 달빛보다 더 희고 고운 자태를 지닌 연화가 앉아 있는 것이 보였습니다. 순간 눈이 뒤집힌 독고칠이 거칠게 방문을 확 열어젖히려는 찰나였습니다.
별당 뒤편 느티나무 위에서 이 모든 광경을 지켜보고 있던 도깨비 김 서방이 불같이 화를 내며 도깨비방망이를 허공에 휘둘렀습니다.
'이 천하에 벼락을 맞을 악독한 여편네와 산도적 놈을 보았나! 감히 이 김 서방이 지키는 집터에서 저토록 추잡하고 끔찍한 짓을 벌이려 해? 어림도 없다! 이 애꾸눈 도적놈아, 오늘 밤 네놈 평생 잊지 못할 지옥 구경을 시켜주마! 수리수리 마하수리, 눈깔은 뒤집히고 귀청은 찢어져라, 얍!'
도깨비 김 서방이 푸른 도깨비불을 휙 던지자, 그 불꽃이 독고칠의 뒤통수로 감쪽같이 스며들었습니다. 독고칠이 음흉한 웃음을 흘리며 방문을 벌컥 열고 안으로 발을 들이밀며 외쳤습니다.
"이리 온, 이 예쁜 각시야! 오늘 밤 이 오라버니가 아주 극락을… 어, 어라? 으아아악!"
방 안으로 들어선 독고칠의 외눈박이 눈알이 튀어나올 듯이 커졌습니다. 분명 문밖에서 엿보았을 때는 가냘픈 처녀가 앉아 있었건만, 막상 문을 열고 들어오니 촛불은 온데간데없고 방 안이 시꺼먼 동굴로 변해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게다가 보료 위에는 어여쁜 처녀 대신, 집채만 한 크기의 백두산 호랑이 한 마리가 시뻘건 아가리를 쩍 벌리고 앉아 침을 뚝뚝 흘리고 있었습니다.
"크르르르릉! 웬 놈이냐! 마침 배가 출출하던 참에 애꾸눈 산도적 고기가 제 발로 걸어 들어왔구나!"
호랑이가 천지가 진동할 듯한 소리로 포효하자, 독고칠은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으며 오줌을 지리고 말았습니다. 사실 실제 방 안에 있는 연화는 갑자기 거센 바람이 불며 방문이 열리더니, 웬 험상궂은 사내가 들어오자마자 혼자 허공을 보고 비명을 지르며 바지를 적시는 광경에 어안이 벙벙할 뿐이었습니다. 도깨비 김 서방이 연화의 눈에는 독고칠이 보이지 않게 구름 장막을 쳐두고, 오직 독고칠의 눈에만 끔찍한 환영이 보이도록 환술을 걸어둔 덕분이었습니다.
"사, 살려주십쇼 산군님! 제가 눈이 멀어 호랑이 굴인 줄 모르고 들어왔습네다! 아악! 저, 저건 또 뭐야!"
독고칠이 뒤로 기어가며 방구석을 짚었는데, 이번에는 방바닥에 깔린 돗자리가 순식간에 수백 마리의 시퍼런 독사 떼로 변하여 독고칠의 발목과 허벅지를 칭칭 감아 올라오는 것이었습니다. 쉭쉭거리는 뱀들의 혓바닥이 뺨을 스치고, 앞에서는 거대한 호랑이가 앞발을 치켜들고 덮칠 듯이 달려들자 독고칠은 완전히 정신줄을 놓아버렸습니다.
"으아아악! 귀신이다! 이 집구석 별당은 식인 호랑이랑 구렁이가 득실거리는 귀신 소굴이다! 마님이고 은자고 나발이고 내 목숨부터 살려라!"
독고칠은 허리춤에 찼던 은자 주머니가 마당에 떨어지는 줄도 모르고, 방문 짝을 머리로 들이받아 부수며 댓돌 아래로 데굴데굴 굴러떨어졌습니다. 그러고도 도깨비가 등 뒤에 매달아 놓은 헛깨비 불꽃 때문에 호랑이가 끝까지 쫓아오는 줄 알고는, 바지가 반쯤 벗겨진 채로 담장을 넘어 뒷산으로 죽어라 줄행랑을 쳤습니다.
방 안에 있던 연화는 갑자기 바람이 휙 불어 촛불이 꺼지더니, 문밖에서 웬 멧돼지 멱따는 듯한 괴성과 함께 우당탕탕 담장 넘어가는 소리가 들리자 가슴을 쓸어내렸습니다.
"어머나, 세상에… 방금 그게 무슨 소리였을까? 산짐승이라도 내려왔던 것인가?"
나무 위에서 배를 잡고 떼구루루 구르며 웃던 도깨비 김 서방은 마당에 떨어진 은자 오십 냥 주머니를 훌쩍 주워 들었습니다.
'껄껄껄! 아이구, 배꼽이야! 산도적 놈이 바지에 오줌을 싸고 도망가는 꼬락서니라니, 십 년 묵은 체증이 다 내려가는구나! 자, 이 돈 주머니는 불쌍한 우리 연화 처녀 아비 약값에 보태라고 툇마루 밑에 잘 숨겨두고… 이제 진짜 신랑감을 데려와야지!'
※ 3: 잠에서 깨어난 남편 최 참봉, 그리고 어둠 속에서 피어난 진심
도깨비 김 서방은 구름을 타듯 훌쩍 날아올라 안채 안방 앞으로 향했습니다. 장 씨 부인은 안방 건너편 작은방에서 이불을 뒤집어쓰고 귀를 쫑긋 세우고 있었는데, 별당 쪽에서 우당탕탕하는 소리가 들리자 독고칠이 연화를 거칠게 다루는 소리인 줄 알고 속으로 쾌재를 부르고 있었습니다.
'흐흐흐, 그래, 아주 갈기갈기 찢어놓거라. 내일 아침이면 저 계집이 수치를 이기지 못하고 뒷산 소나무에 목을 매달겠지!'
바로 그때, 도깨비 김 서방이 장 씨가 머무는 작은방 문고리에 도깨비 풀을 발라 문이 절대 열리지 않게 붙여버리고는, 장 씨의 귓가에 나른한 잠의 입김을 후 불어넣었습니다. 그러자 장 씨는 눈꺼풀이 스르르 감기며 곯아떨어졌고, 김 서방은 곧장 최 참봉이 잠든 안방의 무쇠 자물쇠를 손가락 하나로 툭 건드려 열었습니다.
'영감님, 이 답답한 양반아! 마누라가 술에 몽한약을 타서 먹인 줄도 모르고 이리 세상모르게 자고 있으면 어쩌누! 어서 일어나서 저 어여쁜 색시를 안아주어야 가문의 대도 잇고 복도 들어올 것 아니오! 일어나시오, 어서!'
김 서방이 최 참봉의 코끝에 상쾌한 솔잎 향기를 훅 불어넣으며 이마를 찰싹 때리자, 깊은 수면제 기운에 취해 있던 최 참봉이 컥 소리를 내며 눈을 번쩍 떴습니다.
"허억! 어, 어라? 내가 어찌하여 의관도 벗지 않은 채로 이리 잠이 들었단 말인가? 정신이 어찌 이리 맑고 개운하지?"
최 참봉이 자리에서 일어나 앉자, 이상하게도 방문이 저절로 스르르 열리며 은은한 달빛이 마당을 비추고 있었습니다. 게다가 어디선가 매혹적이고도 따뜻한 난초 향기가 바람을 타고 날아와 최 참봉의 코끝을 간지럽히며 별당 쪽으로 걸음을 이끄는 것이었습니다.
'기이한 일이로다. 분명 저녁에 안사람이 주는 술을 마시고 머리가 어지러웠는데, 마치 누군가 내 등 뒤에서 어서 별당으로 가라고 등을 떠미는 것만 같구나. 그래, 오늘 밤은 가문을 위해 큰마음을 먹고 들인 처녀와 첫날밤을 치르기로 한 날이지. 어린 처녀가 낯선 집에서 얼마나 두려워하며 기다리고 있겠는가.'
최 참봉은 옷매무새를 단정히 가다듬고 마당을 가로질러 별당으로 향했습니다. 별당 앞에 도착해 보니 웬일로 방문 한쪽이 부서져 있었는데, 도깨비 김 서방이 미리 손짓 한 번으로 부서진 문짝을 감쪽같이 원래대로 고쳐놓은 뒤였습니다. 최 참봉이 조심스럽게 헛기침을 하며 문을 두드렸습니다.
"연화라고 하였느냐. 나다, 들어가도 되겠느냐?"
방 안에서 두려움에 떨고 있던 연화가 조심스럽게 문을 열었습니다. 다시 켜진 촛불 아래로 드러난 최 참봉의 모습은, 연화가 상상했던 탐욕스럽고 무서운 늙은이의 모습이 아니었습니다. 비록 마흔이 넘은 중년의 나이였으나, 훤칠한 이목구비에 눈빛은 호수처럼 깊고 온화했으며, 몸가짐에서 기품과 자애로움이 묻어나는 훌륭한 선비의 모습이었습니다. 최 참봉 역시 촛불 아래 수줍게 고개를 숙인 연화의 청초하고 맑은 자태를 보고는 한눈에 마음이 끌렸습니다.
"어르신… 누추한 소녀가 어르신을 뵙습니다."
연화가 큰절을 올리려 하자, 최 참봉이 급히 다가가 연화의 가냘픈 어깨를 부드럽게 붙잡아 일으켰습니다. 거칠게 갈라진 연화의 손등을 내려다본 최 참봉의 눈에 깊은 연민이 어렸습니다.
"아니다, 이리 떨고 있는 것을 보니 내가 너무 늦게 와서 너를 놀라게 한 모양이구나. 네 아버님이 병환이 깊으시다는 이야기는 들었다. 꽃다운 나이에 아비를 살리겠다고 이 늙은이에게 시집을 오게 했으니, 내가 네게 큰 죄를 짓는구나."
"아, 아니옵니다 어르신! 어르신께서 내어주신 약값 덕분에 제 아버님이 목숨을 부지하셨사옵니다. 소녀는 평생 어르신과 이 댁의 은혜를 갚으며 종처럼 살 것이옵니다."
"종이라니, 당치도 않은 소리 마라. 아무리 가문의 대를 잇기 위해 들였다고 하나, 오늘 밤 나와 백년가약의 술잔을 나누면 너도 엄연한 나의 아내요, 이 집안의 사람이다. 내 비록 본처의 성정이 매서워 너를 정실로 앉히지는 못하더라도, 내 살아있는 동안 너와 네가 낳을 아이를 결코 천대받게 두지 않을 것이니 내 말을 믿고 마음을 놓아라."
최 참봉의 진심 어린 따뜻한 위로에, 연화는 그동안 참아왔던 설움과 안도감이 북받쳐 올라 눈물을 뚝뚝 흘렸습니다. 본처 장 씨의 모진 구박에 얼어붙었던 가슴이 최 참봉의 다정한 품 안에서 봄눈 녹듯 사라지는 순간이었습니다. 최 참봉은 고운 비단 손수건으로 연화의 눈물을 닦아주고는, 조심스럽게 촛불을 껐습니다. 그날 밤, 별당에는 도깨비 김 서방이 나뭇가지 위에서 솔솔 뿌려주는 축복의 꽃가루 속에, 두 남녀의 애틋하고도 깊은 사랑이 밤새도록 이어졌습니다.
이튿날 아침, 늦잠에서 깨어난 장 씨 부인은 간밤에 독고칠이 일을 잘 치렀는지 확인하기 위해 서둘러 별당 쪽으로 향했습니다.
'흥, 지금쯤이면 그 천한 계집년이 옷매무새가 다 찢어진 채로 방구석에서 피눈물을 흘리고 있겠지? 내가 들어가서 부정한 년이라고 호통을 치며 멍석말이를 시켜 내쫓아야겠다!'
그러나 별당 마당에 들어선 장 씨는 눈앞에 펼쳐진 광경에 그만 우뚝 멈춰 서서 입을 떡 벌리고 말았습니다. 분명 안방에 갇혀 자고 있어야 할 남편 최 참봉이, 별당 방문을 활짝 열고 나오며 연화의 손을 다정하게 잡고 환하게 웃고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연화야, 간밤에 잠자리가 불편하지는 않았느냐? 내 오늘 아침 당장 아랫마을 의원에게 사람을 보내 네 아버님께 산삼과 녹용을 달여 보내도록 하마."
"어르신, 이토록 크나큰 은혜를 베풀어 주시니 몸 둘 바를 모르겠사옵니다."
그 다정한 모습을 본 장 씨는 머릿속에 벼락이 치는 듯했습니다.
'이, 이게 대체 어떻게 된 노릇이야! 내가 분명 안방 문을 밖에서 잠그고 몽한약까지 먹였는데 영감님이 어찌 저 방에서 나온단 말인가! 그리고 그 애꾸눈 독고칠 놈은 대체 어디로 꺼진 거야!'
장 씨가 분통이 터져 치맛자락을 부들부들 떨고 있을 때, 나무 위에서 하품을 하던 도깨비 김 서방이 솔방울 하나를 똑 따서 장 씨의 이마빡에 정통으로 던져 맞추었습니다.
"아야! 웬 솔방울이 이리 아파!"
장 씨가 이마를 부여잡고 길길이 날뛰는 모습을 보며, 김 서방은 엉덩이를 실룩거리며 통쾌하게 웃었습니다.
※ 4: 옥동자의 탄생과 사악한 미역국, 독약이 꿀물로 변한 기적
세월은 유수처럼 흘러 어느덧 열 달이라는 시간이 지났습니다. 그사이 연화는 도깨비 김 서방이 밤마다 몰래 가져다 놓은 좋은 산나물과 과일, 그리고 최 참봉의 지극한 보살핌 덕분에 달덩이처럼 얼굴이 피어올랐습니다. 물론 장 씨 부인의 시기와 질투는 날이 갈수록 극에 달해, 최 참봉이 출타하고 없을 때마다 연화에게 찬물을 길어 오게 하거나 무거운 빨래를 시키는 등 온갖 구박을 일삼았습니다. 하지만 그때마다 신기한 일이 벌어지곤 했습니다. 연화가 무거운 물동이를 이고 일어서면 보이지 않는 도깨비 김 서방이 밑에서 물동이를 번쩍 들어주어 깃털처럼 가벼워졌고, 장 씨가 연화를 골탕 먹이려고 마당에 쏟아부은 구정물은 갑자기 불어닥친 회오리바람을 타고 장 씨의 비단옷에 고스란히 뒤집어씌워지기 일쑤였습니다.
그러던 어느 화창한 봄날, 마침내 별당에서 우렁찬 아기 울음소리가 터져 나왔습니다.
"응애! 응애!"
산파가 환한 얼굴로 문을 열고 나와 마당에서 초조하게 서성이던 최 참봉에게 고했습니다.
"축하드리옵니다, 참봉 어르신! 이목구비가 어르신을 쏙 빼닮은 튼실하고 귀한 아드님이시옵니다! 산모님도 아기씨도 모두 건강하시옵니다!"
"오오! 하늘이시여, 조상님이시여, 고맙습니다! 내 나이가 마흔이 넘어 마침내 아들을 보았구나! 여봐라, 오늘 우리 집 곡간을 활짝 열어 동네 사람들에게 쌀과 고기를 아낌없이 나누어 주어라!"
최 참봉은 덩실덩실 춤을 추며 기뻐했고, 온 동네가 잔칫집처럼 들썩였습니다. 그러나 이 경사스러운 날, 안방에서 이불을 물어뜯으며 피눈물을 흘리는 이가 있었으니 바로 본처 장 씨였습니다.
'아들을 낳았다고? 천한 거지 계집년이 감히 우리 가문의 장손을 낳았단 말이야? 이대로 두었다가는 영감님이 저 계집에게 안방 자리까지 내어주고 나를 뒷방 늙은이로 내몰 것이 분명해! 안 된다, 아기는 내가 뺏어 내 아들로 키우고, 저 어미 년은 산후풍으로 죽은 것처럼 꾸며서 오늘 밤 당장 저승으로 보내버려야겠다!'
살기가 등등해진 장 씨는 그날 밤, 부엌 찬모들을 모두 물리고 직접 산모에게 줄 첫 미역국을 끓였습니다. 보글보글 끓어오르는 진한 소고기 미역국을 그릇에 담은 장 씨는, 품속에서 쥐약보다 열 배는 독하다는 비상 가루가 든 종이봉지를 꺼내 국그릇에 하얗게 털어 넣었습니다. 수저로 휘휘 젓자 독약은 감쪽같이 국물에 녹아들었습니다.
"춘섬아, 지금 영감님은 사랑채에서 문중 어른들과 술상을 받고 계시지? 내가 직접 가서 저 계집에게 이 미역국을 먹이고 아기를 안아 올 테니, 너는 망을 보고 있거라."
장 씨는 다시 인자한 부처님 미소를 얼굴에 뒤집어쓰고 소반을 든 채 별당으로 들어갔습니다. 출산하느라 기력이 다 빠진 연화가 아기를 품에 안고 누워 있다가, 장 씨가 들어오자 힘겹게 몸을 일으키려 했습니다.
"마님… 귀한 걸음을 하셨사옵니다."
"어이구, 그냥 누워 있거라. 우리 가문에 이리도 복스러운 대장부를 낳아주었는데 내가 어찌 가만히 있겠느냐. 자, 내가 너를 위해 손수 끓인 진국 미역국이다. 아기는 내가 잠시 안고 있을 터이니, 국물이 식기 전에 남김없이 싹 비우거라. 어서!"
장 씨는 반강제로 연화의 품에서 갓난아기를 뺏어 안더니, 턱짓으로 미역국 그릇을 가리켰습니다. 아기를 빼앗긴 연화는 불안한 마음이 들었으나, 장 씨의 서슬 퍼런 눈빛에 눌려 어쩔 수 없이 국그릇을 두 손으로 받아 들었습니다.
'아기를 낳자마자 죽이려 드실 줄은 알았으나, 설마 이 국에… 아니야, 만약 내가 안 먹겠다고 버티면 당장 아기씨에게 해코지를 하실지도 몰라. 차라리 내가 먹고 죽는 한이 있더라도 우리 아기만은 무사해야 해.'
연화가 눈을 질끈 감고 국그릇을 입가에 가져가는 바로 그 찰나였습니다. 천장 서까래 위에 매달려 있던 도깨비 김 서방이 코를 킁킁거리더니 인상을 팍 구겼습니다.
'이런 천인공노할 년을 보았나! 갓 아기를 낳아 피덩이 같은 산모에게 비상을 탄 미역국을 먹여? 네 이년, 하늘이 무섭지도 않더냐! 좋아, 네년이 독약을 탔으니 나는 천년 묵은 산삼 달인 꿀물로 바꾸어 주마! 변해라, 얍!'
도깨비 김 서방이 도깨비방망이를 국그릇을 향해 톡 두드리자, 눈 깜짝할 사이에 국물 속에 들어 있던 치명적인 비상 독기가 눈부신 금빛 가루로 변하더니 사르르 녹아 사라졌습니다. 물론 장 씨와 연화의 눈에는 그저 평범한 미역국으로 보일 뿐이었습니다. 연화는 비장한 각오로 미역국을 한 모금 꿀꺽 삼켰습니다.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입안 가득 퍼지는 맛이 비릿한 미역국이 아니라, 평생 맛본 적 없는 달콤하고도 향긋한 산삼 꿀물 맛인 데다가, 목구멍을 넘어가자마자 뱃속이 후끈 달아오르며 출산으로 빠져나갔던 기력이 샘솟듯 솟아오르는 것이었습니다!
'어머나? 이게 무슨 맛이지? 어찌하여 미역국에서 이토록 달콤한 향기가 나고, 아팠던 뼈마디가 순식간에 다 나은 것처럼 몸이 가벼워지는 것일까?'
연화가 신기해하며 국그릇을 단숨에 끝까지 들이켜 싹 비우자, 옆에서 지켜보던 장 씨는 속으로 회심의 미소를 지었습니다.
'흐흐흐, 미련한 년. 목이 말라 사약인 줄도 모르고 밑바닥까지 싹싹 긁어 마셨구나! 이제 반 식경도 지나지 않아 창자가 끊어지는 고통 속에 피를 토하고 죽을 것이다! 아기는 오늘부터 내 소생이다!'
장 씨는 아기를 안은 채 도망치듯 별당을 빠져나가 안방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러나 비상을 마셨다던 연화는 피를 토하기는커녕, 뺨에 발그레한 복숭앗빛 화색이 돌며 젖이 풍족하게 돌아 그 어느 때보다 건강하고 아름다운 모습으로 자리를 털고 일어났습니다. 나무 위에서 이를 지켜보던 도깨비 김 서방은 흐뭇하게 수염을 쓰다듬으며 중얼거렸습니다.
'암, 산모가 기운이 나야 아기 젖을 물리지! 이제 저 악독한 장 씨 할망구의 죄상을 만천하에 까발릴 마지막 판을 벌여볼까나!'
※ 5: 만천하에 드러난 악행, 도깨비의 벼락같은 단죄와 본처의 몰락
다음 날 아침, 장 씨 부인은 별당에서 연화가 죽었다는 곡소리가 들려오기만을 목이 빠져라 기다렸습니다. 한데 해가 중천에 뜨도록 별당 쪽이 조용할 뿐만 아니라, 오히려 사랑채에서 주무신 최 참봉이 아침 일찍 별당에 들렀다가 함박웃음을 지으며 안방으로 걸어오는 것이었습니다.
"부인! 부인, 참으로 경사가 났소! 산모가 어젯밤 부인이 끓여준 미역국을 먹고 나더니, 오늘 아침에 벌써 자리를 털고 일어나 앉을 만큼 기력이 회복되었지 뭐요! 게다가 얼굴빛이 어찌나 고와졌는지, 마치 선녀가 따로 없더구먼! 어서 아기를 데리고 별당으로 가서 어미 젖을 물립시다!"
최 참봉의 말에 장 씨는 마른하늘에 날벼락을 맞은 듯 그 자리에 얼어붙었습니다.
"예? 자,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고요? 피를 토하고 죽은 것이 아니라… 아, 아니, 몸이 성하단 말씀이시옵니까?"
"피를 토하고 죽다니, 그게 무슨 흉측한 소리요! 부인이 정성껏 끓여준 미역국 덕분인데! 자, 이리 아기를 주시오. 내가 데려가겠소."
최 참봉이 아기를 안고 별당으로 가버리자, 장 씨는 사색이 되어 방바닥을 주먹으로 치며 덜덜 떨었습니다.
'말도 안 돼! 쥐도 한 방울이면 즉사하는 비상을 한 봉지나 다 털어 넣었는데 어찌 안 죽고 살아났단 말이냐! 저 계집이 사람이 아니라 여우 요괴인가? 안 되겠다, 약으로도 안 죽는다면 직접 목을 졸라 죽여 우물에 던져 넣는 수밖에 없다!'
이성을 완전히 잃은 장 씨는 그 길로 다시 몸종 춘섬이를 시켜, 지난번에 도망갔던 산도적 독고칠에게 은자 백 냥을 줄 테니 오늘 밤 당장 와서 연화를 죽여 우물에 빠뜨리라고 전갈을 보냈습니다. 도박 빚에 쪼들리던 독고칠은 지난번 별당의 호랑이가 술에 취해 본 헛것이라 여기고, 은자 백 냥이라는 거금에 눈이 멀어 그날 밤 자정이 되자 다시 복면을 쓰고 최 참봉 댁 담장을 넘었습니다.
후원 우물가에서 독고칠을 만난 장 씨는 독기 어린 목소리로 속삭였습니다.
"네 이놈, 지난번에는 은자 오십 냥만 챙기고 어찌 그냥 도망을 갔느냐! 이번에도 실패하면 관아에 네놈 은신처를 밀고할 줄 알아라. 지금 영감님은 사랑채에 계시니, 당장 별당에 들어가 잠든 연화 년의 숨통을 끊어 이 우물 속에 처넣어라!"
"헤헤, 마님. 지난번엔 그 방에 진짜로 백두산 호랑이가 있었다니까유. 허나 오늘은 제가 날 선 식칼까지 챙겨 왔으니 걱정 마십쇼. 단칼에 해치우고 오겠습네다!"
독고칠이 시퍼런 칼을 빼 들고 별당으로 향하려는 바로 그 순간이었습니다. 느티나무 위에서 기다리고 있던 도깨비 김 서방이 양손에 커다란 도깨비방망이를 하나씩 들고 벼락같은 소리를 지르며 뛰어내렸습니다.
'이 천인공노할 것들아! 오늘 밤이 바로 네놈들의 제삿날이다! 동네방네 사람들아, 최 참봉 영감님아, 어서 나와서 이 악귀 같은 년놈들의 짓거리를 보시오!'
도깨비 김 서방이 방망이를 땅바닥에 쾅 내려치자, 갑자기 맑던 밤하늘에서 우르르 쾅쾅 마른번개가 치더니, 최 참봉 댁 대문과 사랑채, 행랑채의 모든 문이 일제히 덜컥덜컥 열렸습니다. 그 소리에 놀란 최 참봉과 문중 어른들, 그리고 스무 명이 넘는 하인들이 횃불을 들고 우르르 후원 우물가로 몰려나왔습니다.
"웬 소란이냐! 밤중에 무슨… 헉! 부인, 거기서 그 복면 쓴 괴한과 무엇을 하고 있는 것이오!"
최 참봉의 호통에 장 씨와 독고칠은 기겁하여 도망치려 했으나, 도깨비 김 서방이 두 사람의 발바닥에 끈끈이 풀을 붙여놓아 한 발짝도 뗄 수가 없었습니다. 게다가 김 서방이 독고칠과 장 씨의 입에 '참말 풀이' 주문을 걸어버리자, 두 사람은 자기 의지와 상관없이 입이 저절로 나불거리며 그동안의 모든 죄상을 술술 불기 시작했습니다!
"아, 아니! 내 입이 왜 이래! 영감님, 제가 말하려는 게 아니라… 그래요! 제가 저 천한 연화 년이 아들을 낳자 배가 아파서 어젯밤 미역국에 비상을 타서 먹였습니다요! 그런데도 저년이 안 죽기에, 오늘 밤에는 이 산도적 독고칠에게 은자 백 냥을 주고 저년을 찔러 죽여 우물에 넣으라고 시켰습네다! 아이구, 내 입아 다물어져라, 읍읍!"
장 씨가 자기 입을 두 손으로 틀어막으려 해도 손이 말을 듣지 않았고, 옆에 서 있던 독고칠 역시 칼을 떨어뜨리고 무릎을 꿇은 채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습니다.
"나으리! 살려주십쇼! 이 마님이 열 달 전 첫날밤에도 영감님 술에 몽한약을 타서 재워놓고, 저한테 은자 오십 냥을 주며 별당에 들어가 연화 아씨를 욕보이고 죽게 만들라고 시켰습네다! 그때 방 안에 호랑이가 나와서 못 건드렸는데, 오늘 또 돈 백 냥을 주며 살인을 사주했습네다요!"
옆에 있던 몸종 춘섬이까지 바닥에 납작 엎드려 사실이라고 통곡을 하자, 횃불을 들고 서 있던 최 참봉과 문중 어른들의 얼굴이 시퍼렇게 질렸습니다. 평생 어질기만 하던 최 참봉이 분노로 온몸을 부들부들 떨며 호통을 쳤습니다.
"이, 이 천하에 몹쓸 독부 같으니라고! 네가 투기가 심한 줄은 알았으나, 가문의 은인인 연화를 욕보이려 산도적을 신방에 들이고, 그것도 모자라 비상을 먹이고 칼로 찔러 죽이려 해? 너 같은 악귀와는 단 한시도 같은 하늘 아래 살 수 없다! 여봐라! 저 산도적 놈과 춘섬이를 당장 포박하여 관아로 넘기고, 장 씨 저 여편네는 패물과 비단옷을 전부 벗겨 칠거지악의 죄를 물어 지금 당장 대문 밖으로 내쫓아라! 다시는 이 고을 땅에 발도 붙이지 못하게 하라!"
"영감님! 잘못했습니다요, 한 번만 살려주십쇼! 으아아앙!"
장 씨가 땅바닥을 기며 빌었으나, 분노한 하인들은 장 씨를 가차 없이 대문 밖 진흙탕 길로 내동댕이치고 대문을 굳게 걸어 잠갔습니다. 남을 해치려 파놓은 함정에 제 발로 빠져 알거지가 되어 쫓겨난 장 씨의 몰락에, 밤하늘의 도깨비 김 서방은 속이 다 시원하다는 듯 껄껄 웃음을 터뜨렸습니다.
※ 6: 안방마님이 된 연화, 도깨비의 축복 속에 대대손손 이어진 만복
모진 폭풍우가 지나간 최 참봉 댁에는 비로소 따뜻하고 평화로운 봄날이 찾아왔습니다. 악독한 본처 장 씨가 쫓겨난 뒤, 최 참봉은 문중 어른들의 만장일치 찬성 아래 어질고 착한 연화를 정식 안방마님, 즉 정실부인으로 맞이하는 성대한 혼례식을 올렸습니다. 빚에 팔려 와 눈물로 첫날밤을 지새우던 가난한 처녀 연화가, 이제는 만석꾼 대저택의 당당한 안주인이 된 것입니다.
더욱이 첫날밤 마당에서 주웠던 정체불명의 은자 오십 냥과 최 참봉이 아낌없이 보내준 산삼, 녹용 덕분에, 피를 토하며 죽어가던 연화의 친정아버지 김 첨지도 병이 씻은 듯이 나아 정정한 모습으로 사위의 집에서 호강하며 지내게 되었습니다.
정실부인이 된 연화는 자신이 겪었던 설움과 가난을 잊지 않고, 집안의 하인들을 친가족처럼 따뜻하게 보살폈습니다. 배고픈 과객이나 걸인이 대문을 두드리면 언제나 따뜻한 밥상을 차려 내어주었고, 흉년이 들면 곡간을 열어 고을의 가난한 백성들에게 곡식을 나누어 주었습니다. 그러자 평안도 정주 땅 사람들은 입을 모아 최 참봉 댁 새 안방마님이야말로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있는 관세음보살이라며 칭송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한편, 연화에게는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는 작은 습관이 하나 생겼습니다. 그것은 바로 매달 보름날 밤만 되면, 별당 뒤편의 그 오래된 느티나무 아래에 들기름을 듬뿍 바른 고소한 메밀묵 한 접시와 달콤한 막걸리 한 사발을 정성껏 차려두는 것이었습니다. 비록 눈으로 본 적은 없으나, 첫날밤 문밖에서 들렸던 괴성과 미역국이 꿀물로 변했던 기적, 그리고 장 씨가 스스로 죄를 자백하던 그 신비로운 밤의 일들이 모두 이 고목나무에 깃든 신령한 존재의 도움이라는 것을 마음으로 느끼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어느 달 밝은 보름날 밤이었습니다. 이제는 돌이 지나 아장아장 걷는 아들을 재워두고, 연화가 남편 최 참봉과 함께 느티나무 아래에 메밀묵 상을 차려놓고 두 손을 모아 절을 올렸습니다.
"이름 모를 고목나무의 은인이시여, 당신께서 베풀어 주신 은혜 덕분에 소녀가 목숨을 건지고 이리도 과분한 행복을 누리고 있사옵니다. 약소하지만 제가 손수 쑨 메밀묵이오니 부디 맛있게 드시고, 우리 가족과 이 고을 사람들을 평안하게 지켜주시옵소서."
"허허허, 부인. 부인의 그 고운 마음씨에 나무에 깃든 신령님도 분명 기뻐하실 것이오."
최 참봉과 연화가 다정하게 손을 잡고 안채로 돌아가자, 고요하던 느티나무 위에서 푸른 도깨비불이 반짝이더니 도깨비 김 서방이 스르르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김 서방은 소반 위에 놓인 메밀묵을 한 입 가득 베어 물고 막걸리를 벌컥벌컥 들이켜며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표정을 지었습니다.
'크으! 역시 우리 연화 마님이 쒀준 메밀묵 맛이 천하일미란 말씀이야! 마음씨가 저리도 고우니 내가 어찌 복을 안 가져다줄 수가 있겠는가! 에라 모르겠다, 뒷산 바위 밑에 숨겨둔 고려 시대 금덩어리 몇 개도 내일 밤 마당 장독대 밑에 슬쩍 묻어주어야겠구먼! 아들딸 줄줄이 낳고 백 살까지 만수무강하시오, 껄껄껄!'
도깨비 김 서방의 든든한 수호와 축복 속에서, 연화는 첫째 아들에 이어 총명한 두 아들과 어여쁜 딸 둘을 더 낳아 다섯 남매의 어머니가 되었습니다. 그녀가 낳은 첫째 아들은 훗날 장원급제하여 나라의 어진 재상이 되었고, 최 참봉과 연화 부부는 머리가 파뿌리가 되도록 금슬 좋게 해로하며 평안도 땅에서 가장 큰 복을 누렸다고 전해집니다. 악한 마음은 결국 제 몸을 망치고, 선하고 어진 마음은 하늘과 도깨비마저 감동시켜 천복을 부른다는 옛이야기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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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 오늘 들려드린 평안도 야담 '도깨비 장난' 이야기, 재미있게 들으셨나요? 질투에 눈이 멀어 남을 해치려던 본처는 결국 자신이 판 함정에 빠져 쫓겨나고, 효심 깊고 착한 연화는 도깨비 김 서방의 도움으로 어진 남편과 함께 큰 복을 누리게 되었으니 참으로 속이 시원해지는 사이다 결말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 삶에서도 누군가를 시기하기보다는 따뜻한 마음 한 조각을 나누어 줄 때,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도깨비 같은 행운이 찾아오지 않을까요? 오늘 이야기가 즐거우셨다면 구독과 좋아요, 알림 설정까지 꼭 부탁드립니다. 오늘도 평안하고 행복한 밤 되시기를 바라며, 저는 다음 시간에 더 재미난 옛이야기로 찾아뵙겠습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