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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수를 은인으로 만든 방망이 『어우야담』

    부제

    오랫동안 땅 문제로 깊은 갈등을 겪으며 서로 앙숙으로 지내던 두 집안이 있었습니다. 어느 날 한 선비가 산속 도깨비 잔치에 우연히 끼어 흥을 돋워주고, 사람의 숨겨진 진심과 억눌린 상처를 들려주는 작은 나무 방망이를 선물 받으면서 두 집안의 오래된 원한 속에 감춰진 진실이 드러나기 시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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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후킹 멘트

    원수의 집 마당에서 도깨비 방망이를 두드리자, 죽은 줄로만 알았던 아버지의 목소리가 들려왔습니다. 그런데 그가 남긴 마지막 말은 뜻밖에도 평생 원망한 원수를 은인이라 부르고 있었습니다. 두 집안을 갈라놓은 땅 한 마지기에는 과연 어떤 비밀이 묻혀 있었을까요?

    ※ 1: 피로 물든 논두렁

    충청도 어느 고을에 기름진 논이 넓게 펼쳐진 버들개라는 마을이 있었다. 산에서 흘러내린 물이 사철 마르지 않았고, 땅이 비옥해 가을이면 벼가 사람 키만큼 자랐다. 그러나 마을 사람들은 해마다 수확철이 다가오면 풍년보다 먼저 싸움을 걱정했다.

    마을 한가운데에는 반달처럼 휘어진 논두렁 하나가 있었다. 고작 스무 걸음 남짓한 그 논두렁을 사이에 두고 서진목의 집안과 강필두의 집안이 삼십 년 넘게 원수로 지냈기 때문이다.

    서씨 집안에서는 그 땅이 본래 선대로부터 물려받은 것이라 주장했고, 강씨 집안에서는 흉년이 들었을 때 정당한 값을 치르고 산 땅이라고 맞섰다. 양쪽 모두 붉은 도장이 찍힌 문서를 가지고 있었지만, 문서에 적힌 경계가 서로 달랐다.

    관아에서도 여러 번 판결하려 했으나 결론을 내지 못했다. 문제의 땅을 측량하려 하면 경계를 표시한 돌이 밤사이 사라졌고, 증인을 부르면 어제까지 멀쩡하던 사람이 갑자기 입을 닫았다.

    그날도 새벽부터 논두렁에서 고함이 터졌다.

    “한 치만 더 넘어오면 그 낫으로 네놈 손목부터 자르게 될 것이다!”

    서진목이 낫을 움켜쥔 채 강필두를 노려보았다. 쉰이 넘은 나이였으나 어깨가 떡 벌어졌고, 성미가 불같아 마을 장정들도 함부로 앞을 막지 못했다.

    강필두도 지게를 내던지고 맞섰다.

    “도둑이 오히려 주인에게 큰소리를 치는구나. 이 물길은 우리 강씨 집안에서 판 것이다. 네놈들 논에는 물 한 방울도 흘려보내지 않겠다!”

    “네 아비가 우리 집 문서를 훔쳐 갔으니 그런 거짓말을 할 수 있는 게지!”

    “죽은 아버지를 모욕하지 마라!”

    강필두가 달려들자 서진목도 낫을 치켜들었다. 두 사람의 아들들과 머슴들이 한꺼번에 엉켜 붙었다. 여자들은 비명을 질렀고, 구경하던 아이들은 볏단 뒤로 숨었다.

    그때 낡은 갓을 쓴 선비 하나가 논두렁으로 뛰어들었다.

    “사람 목숨보다 귀한 땅이 세상 어디에 있습니까!”

    선비는 서진목의 팔을 붙잡고 강필두의 앞을 막아섰다. 그는 이 마을 서당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는 한겸이었다. 과거에 두 번 낙방한 뒤 병든 어머니를 모시고 고향으로 돌아온 가난한 선비였지만, 성품이 반듯해 마을 사람들의 신망이 두터웠다.

    서진목이 거칠게 팔을 뿌리쳤다.

    “한 선생은 비켜서시오. 오늘 저놈과 끝을 봐야겠소.”

    “끝을 본다 하셨습니까? 두 분 중 하나가 죽으면 남은 집안에서 복수를 할 것이고, 그 복수가 또 다른 죽음을 부를 것입니다. 그것이 정말 두 분이 원하는 끝입니까?”

    강필두가 피가 흐르는 입술을 닦으며 비웃었다.

    “선비의 혀로 땅을 되찾을 수 있다면 진작 해결됐겠지. 이 일에는 끼어들지 마시오.”

    “땅을 되찾고 싶은 것입니까, 아니면 상대가 망하는 것을 보고 싶은 것입니까?”

    그 말에 두 사람의 눈빛이 동시에 흔들렸다. 그러나 서진목은 이내 낫을 땅에 내리꽂았다.

    “저 집안이 망한다면 내 논 절반을 내놓아도 아깝지 않소.”

    강필두 역시 차갑게 내뱉었다.

    “그 말, 그대로 돌려주지.”

    두 사람은 서로에게 침을 뱉고 돌아섰다. 싸움은 멈췄지만 논두렁에는 핏방울이 선명하게 남았다.

    한겸은 흙 속에 박힌 낫을 뽑다가 이상한 것을 발견했다. 낫 끝에 누렇게 바랜 비단 조각이 걸려 있었다. 흙을 조금 파헤치자 썩은 나무판이 모습을 드러냈고, 그 표면에는 희미하게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구할 구, 목숨 명.

    救命.

    목숨을 구한다는 뜻이었다.

    한겸은 나무판을 소매에 넣었다. 평범한 경계목이라기에는 글자의 모양이 기이했다. 게다가 그 글자를 보는 순간, 오래전 물에 젖은 종이 냄새와 타는 기름 냄새가 코끝을 스치는 듯했다.

    그날 저녁, 한겸은 서당 훈장을 오래 지낸 최 노인을 찾아갔다. 최 노인은 나무판을 보자마자 손을 떨었다.

    “이것을 어디서 찾았는가?”

    “두 집안이 다투던 논두렁에서 찾았습니다. 혹시 이 물건을 아십니까?”

    최 노인은 대답하지 않고 방문을 닫았다. 그러고는 창호지 너머로 인기척이 없는지 몇 번이나 확인했다.

    “지금부터 내가 하는 말은 절대로 밖에 내서는 안 되네. 삼십 년 전, 큰 홍수가 난 뒤 저 논에서 사람 하나가 죽었어.”

    “누가 죽었습니까?”

    “시신은 발견되지 않았네. 그래서 누구도 죽었다고 말할 수 없었지. 다만 그날 이후 땅문서 한 장이 사라졌고, 서씨와 강씨 두 집안은 원수가 되었어.”

    “두 집안의 어른들은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고 있습니까?”

    최 노인은 입을 열려다 갑자기 얼굴을 굳혔다. 마당 밖에서 마른 가지가 부러지는 소리가 들렸기 때문이다.

    한겸이 문을 열고 뛰어나갔지만, 어둠 속에는 흔들리는 대나무 그림자뿐이었다. 담장 밑에는 진흙 묻은 짚신 자국이 찍혀 있었다. 발자국은 최 노인의 집에서 시작되어 마을 뒤편 산길로 이어졌다.

    최 노인은 겁에 질린 채 한겸의 소매를 붙들었다.

    “더 알려고 하지 말게. 그 땅은 곡식을 키운 땅이 아니야. 사람들의 원한을 먹고 자란 땅일세.”

    “하지만 진실을 모른 채 두 집안이 계속 싸운다면 또 사람이 죽을 겁니다.”

    “진실을 밝혔다가 자네가 먼저 죽을 수도 있어.”

    집으로 돌아온 한겸은 등잔불 아래에서 나무판을 살폈다. 한쪽 모서리에는 불에 그을린 자국이 있었고, 뒤쪽에는 알아보기 힘든 작은 글씨가 새겨져 있었다.

    물은 죄를 씻지 못하고, 불은 진심을 태우지 못한다.

    한겸은 몇 번이나 그 문장을 읽었다.

    '대체 삼십 년 전, 저 논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그 순간 방문 밖에서 누군가 낮게 속삭였다.

    “한 선생, 나무판을 돌려놓으시오.”

    한겸이 벌떡 일어나 문을 열었으나 마당에는 아무도 없었다. 대신 기둥에 검은 화살 하나가 박혀 있었다. 화살 끝에는 핏빛 천이 매달려 있었다.

    그 천에는 단 한 줄이 적혀 있었다.

    두 집안을 화해시키려는 자는 두 집안 모두의 원수가 될 것이다.

    ※ 2: 달 없는 밤의 도깨비 잔치

    다음 날 아침, 한겸은 협박을 받고도 물러서지 않았다. 오히려 누군가 두 집안의 화해를 두려워한다는 사실에 주목했다. 두 집안이 계속 싸워야 이익을 보는 사람이 분명히 있을 터였다.

    하지만 나무판 하나만으로는 아무것도 밝힐 수 없었다. 한겸은 삼십 년 전 홍수에 관한 기록을 찾기 위해 고을 관아로 향했다. 오래된 호적과 토지대장을 살펴보면 당시 땅의 주인이 누구였는지 알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관아의 아전 오치수는 한겸의 말을 듣자 눈썹을 치켜올렸다. 그는 버들개 마을의 토지 문서를 관리해 온 자로, 겉으로는 늘 공손했지만 웃을 때마다 눈동자에 차가운 빛이 돌았다.

    “삼십 년 전 장부라니, 그런 낡은 기록을 무엇에 쓰시려는 겁니까?”

    “서씨와 강씨 두 집안의 분쟁을 끝내고 싶습니다.”

    “끝낼 수 없는 싸움이기에 오래 이어진 것입니다. 선비님께서 괜히 끼어들었다가 양쪽 모두에게 미움을 받으실까 염려되는군요.”

    오치수는 창고를 뒤지는 시늉만 하더니 장부가 남아 있지 않다고 말했다. 큰 홍수가 난 이듬해 관아 창고에 불이 나 대부분 타 버렸다는 것이었다.

    한겸은 빈손으로 관아를 나왔지만, 수상한 점을 하나 발견했다. 오치수의 책상 위에 찍힌 붉은 도장이 서씨와 강씨 집안의 땅문서에 찍힌 도장과 매우 닮아 있었다.

    해가 질 무렵, 한겸은 산 너머 절에 사는 늙은 스님을 찾아갔다. 홍수 당시 마을 사람들을 구조했던 이가 그 스님이라는 말을 들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산 중턱에 이르렀을 때 갑자기 소나기가 쏟아졌다.

    한겸은 갓을 눌러쓰고 걸음을 재촉했지만, 빗물이 산길을 순식간에 지워버렸다. 어느 방향으로 가도 똑같은 소나무와 바위만 나타났다.

    “분명 이 길이었는데…….”

    안개까지 짙어지자 한겸은 완전히 길을 잃었다. 날은 어두워졌고, 멀리서 짐승 울음소리까지 들렸다. 그는 커다란 고목 아래에서 비를 피하려 했으나 어디선가 장구와 꽹과리 소리가 희미하게 울려왔다.

    한겸은 사람을 만날 수 있으리라는 생각에 소리를 따라갔다. 산봉우리 사이를 한참 헤매자 널찍한 공터가 나타났다. 공터에는 붉고 푸른 등불 수십 개가 허공에 떠 있었고, 상 위에는 산처럼 높은 떡과 고기가 차려져 있었다.

    그런데 잔치를 벌이는 이들의 모습이 심상치 않았다. 어떤 이는 머리에 뿔이 났고, 어떤 이는 얼굴보다 큰 코를 가졌으며, 또 어떤 이는 한쪽 다리가 나무토막처럼 굵었다.

    도깨비들의 잔치였다.

    한겸은 숨을 삼키며 바위 뒤에 몸을 숨겼다. 그때 덩치 큰 도깨비가 코를 벌름거렸다.

    “어디서 사람 냄새가 나는구나.”

    “겁에 질린 선비 냄새다!”

    도깨비들이 한꺼번에 바위 쪽을 바라보았다. 달아나 봐야 붙잡힐 것이 뻔했던 한겸은 옷자락을 털고 당당히 걸어 나갔다.

    “산에서 길을 잃고 헤매다가 풍악 소리를 들었습니다. 허락도 없이 잔치를 엿본 죄는 달게 받겠습니다.”

    붉은 수염이 가슴까지 내려온 도깨비가 물었다.

    “우리가 두렵지 않으냐?”

    “두렵습니다.”

    “그런데 어찌 다리를 떨지 않느냐?”

    “다리를 떨면 두려움이 사라집니까? 사라지지 않는다면 공연히 힘을 뺄 필요가 없지요.”

    도깨비들이 서로 얼굴을 바라보다가 웃음을 터뜨렸다. 붉은 수염 도깨비는 한겸에게 술잔을 내밀었다.

    “말이 제법 재미있구나. 오늘은 우리 막내가 백 살이 된 날인데, 잔치에 흥이 없다. 네가 우리를 즐겁게 하면 살려 보내 주마.”

    한겸은 춤에도 노래에도 재주가 없었다. 하지만 서당에서 아이들을 웃기기 위해 익힌 재담은 많았다. 그는 갓을 비뚤게 쓰고 욕심 많은 원님과 꾀 많은 농부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원님이 농부에게 닭 울음소리까지 세금으로 내라 하니, 농부가 빈 자루를 바쳤습니다. 원님이 화를 내며 빈 자루를 어찌 쓰느냐고 묻자 농부가 말했지요. 닭 울음소리를 담아 왔는데 오는 길에 모두 날아간 모양입니다.”

    도깨비들이 배를 잡고 뒹굴었다. 한 도깨비는 웃다가 입에서 불덩이를 토했고, 다른 도깨비는 무릎을 치다 바위를 반으로 갈랐다.

    그러나 잔치 구석에는 어린 도깨비 하나가 혼자 앉아 울고 있었다. 머리에는 작은 뿔 하나만 돋아 있었고, 아무도 그 아이의 울음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한겸이 다가가 물었다.

    “좋은 날인데 어찌 울고 있느냐?”

    “모두 내 생일을 축하하지만 아무도 내가 무엇 때문에 슬픈지 묻지 않아.”

    “무엇이 슬프냐?”

    “어머니가 보고 싶어. 어머니는 백 년 전에 인간에게 속아 방망이를 빼앗기고 먼 산으로 떠났어.”

    한겸은 아이 옆에 앉아 자신의 어머니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병든 어머니에게 약 한 첩 제대로 지어드리지 못하는 죄스러운 마음과, 과거에 급제해 기쁘게 해드리고 싶었던 마음도 털어놓았다.

    어린 도깨비는 울음을 그치고 한겸의 손을 잡았다.

    “선비는 남이 숨긴 슬픔을 들으려 하는구나.”

    잔치가 끝나자 붉은 수염 도깨비가 금은보화를 가득 쌓아 놓았다.

    “원하는 만큼 가져가거라.”

    한겸은 고개를 저었다.

    “제 것이 아닌 재물을 가져가면 마음이 무거울 것입니다. 산을 내려갈 길만 알려주십시오.”

    그때 어린 도깨비가 품에서 손바닥만 한 나무 방망이를 꺼냈다. 오래된 대추나무로 만든 듯 붉은빛이 돌았고, 손잡이에는 눈물 모양의 무늬가 새겨져 있었다.

    “이것을 가져가.”

    “귀한 물건처럼 보이는데 내가 받아도 되겠느냐?”

    “이 방망이는 금도 은도 만들지 못해. 대신 바닥을 세 번 두드리면 그곳에 남은 진심을 들려줘. 입으로 삼킨 말, 가슴에 묻은 상처, 죽어서도 전하지 못한 마음까지.”

    붉은 수염 도깨비가 엄한 목소리로 경고했다.

    “하지만 명심해라. 진심은 칼보다 날카롭다. 들을 준비가 되지 않은 자에게 억지로 들려주면 화해가 아니라 더 큰 원한을 부를 것이다.”

    “그 힘을 사사로이 쓰지 않겠습니다.”

    “또한 방망이가 세 번 갈라지면 그 힘은 사라진다. 거짓을 벌하려 하지 말고, 상처를 이해하는 데 쓰거라.”

    한겸이 방망이를 받는 순간 허공의 등불이 일제히 꺼졌다. 천둥이 산을 뒤흔들었고, 눈앞이 새하얗게 번쩍였다.

    정신을 차려 보니 한겸은 산 아래 서낭당 앞에 누워 있었다. 비는 그쳤고 동쪽 하늘이 밝아오고 있었다. 꿈을 꾼 것 같았지만 그의 손에는 작은 방망이가 분명히 들려 있었다.

    한겸은 시험 삼아 서낭당 앞의 땅을 세 번 두드렸다.

    툭. 툭. 툭.

    잠시 뒤, 어디선가 늙은 여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들아, 나는 네가 과거에 급제하지 못해도 괜찮다. 네가 무사히 돌아오는 것이 내게는 장원급제보다 귀하단다.”

    한겸은 숨을 멈췄다. 그것은 분명 집에 계신 어머니의 목소리였다. 어머니가 한 번도 입 밖으로 내지 않았던 마음이었다.

    방망이에는 정말 사람의 숨겨진 진심을 들려주는 힘이 있었다.

    그때 방망이 손잡이의 눈물 무늬 하나가 희미하게 빛났다. 그리고 바람에 섞여 낯선 목소리가 들려왔다.

    “논두렁 아래 묻힌 것은 땅문서가 아니다.”

    한겸은 놀라 고개를 들었다.

    “그럼 무엇이 묻혀 있습니까?”

    잠시 침묵이 흐른 뒤, 죽은 자의 한숨처럼 낮은 대답이 돌아왔다.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을 살리고도 원수가 된 증거다.”

    ※ 3: 마당 밑에서 들린 목소리

    산에서 돌아온 한겸은 곧장 문제의 논두렁으로 향했다. 그곳에서 방망이를 두드리면 삼십 년 전의 진심을 들을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그러나 논에 도착하자 서씨와 강씨 집안사람들이 다시 대치하고 있었다. 이번에는 싸움의 분위기가 전날보다 험악했다. 밤사이 강씨 집안의 물꼬가 무너져 논의 물이 모두 빠졌고, 강필두는 서진목이 일부러 벌인 짓이라 주장했다.

    “네놈이 아니면 누가 한밤중에 물꼬를 무너뜨렸겠느냐!”

    “증거도 없이 사람을 도둑으로 몰지 마라!”

    “네 아들이 어젯밤 논으로 가는 것을 본 사람이 있다!”

    강필두의 말에 서진목이 아들 서도윤을 돌아보았다. 스무 살을 갓 넘긴 도윤은 당황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저는 물꼬를 건드리지 않았습니다.”

    “그럼 어젯밤 논에는 왜 갔느냐?”

    도윤은 대답하지 못했다. 그때 강필두의 딸 강연화가 사람들 뒤에서 고개를 숙였다. 한겸은 두 젊은이의 얼굴을 번갈아 보고는 사정을 짐작했다.

    '원수 집안의 자식들이 남몰래 만나고 있었던 모양이구나.'

    강필두가 도윤의 멱살을 잡으려 하자 한겸이 사이를 막았다.

    “도윤은 물꼬를 무너뜨리지 않았습니다.”

    “한 선생이 어떻게 아시오?”

    “무너진 흙을 보십시오. 위에서 삽으로 찍어 무너뜨린 것이 아니라 아래쪽에서 물이 솟아 무너졌습니다. 오래된 쥐구멍으로 물이 스며든 것입니다.”

    한겸이 진흙을 걷어내자 물꼬 아래에서 여러 개의 구멍이 나타났다. 강필두는 멋쩍은 얼굴로 손을 거두었지만 사과하지 않았다. 서진목도 아들이 밤중에 논에 나온 까닭을 캐묻지 않았다.

    사람들이 흩어진 뒤 한겸은 논두렁에 혼자 남았다. 그는 소매에서 방망이를 꺼내 땅을 세 번 두드렸다.

    툭. 툭. 툭.

    처음에는 개구리 울음과 바람 소리만 들렸다. 잠시 후 물속에서 누군가 헐떡이는 소리가 들려왔다.

    “손을 놓아! 이러다 자네까지 죽네!”

    “입 다물고 내 등에 올라타게!”

    “땅문서는 포기해! 목숨부터 건져야 하네!”

    두 남자의 목소리였다. 이어 거센 물소리와 나무가 부러지는 소리가 들렸다.

    “내가 자네를 살렸다는 말은 하지 말게.”

    “왜 그런 말을 하는가?”

    “우리 집안이 이 사실을 알면 땅을 빼앗으려 할 것이네. 자네가 빚을 졌다며 평생 고개 숙이게 만들 것이야.”

    “목숨을 구해 놓고 원수가 되겠다는 말인가?”

    “원수로 사는 편이 노예로 사는 것보다 나을 수도 있네.”

    목소리는 거기서 끊겼다. 방망이 손잡이에 가느다란 금이 하나 생겼다. 한겸은 도깨비의 경고를 떠올렸다. 세 번 갈라지면 힘을 잃는다는 말이었다.

    하지만 방금 들은 내용만으로도 분명한 사실이 있었다. 홍수가 났던 날, 두 집안의 선대 중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의 목숨을 구했다. 그런데 그 일을 숨기면서 두 집안은 오히려 원수가 되었다.

    누가 누구를 살렸는지는 알 수 없었다. 목소리만으로는 두 남자의 신원을 구분하기 어려웠다.

    그날 밤, 한겸은 먼저 서진목을 찾아갔다. 서진목은 사랑채에 앉아 낫을 갈고 있었다. 사각사각 쇠가 갈리는 소리가 섬뜩하게 울렸다.

    “화해를 권하러 왔다면 돌아가시오.”

    “삼십 년 전 홍수가 났던 날, 선친께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낫을 갈던 서진목의 손이 멈췄다.

    “그 이야기를 누구에게 들었소?”

    “아무에게도 듣지 않았습니다. 다만 선친께서 강씨 집안 누군가의 목숨을 구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서진목은 벌떡 일어나 한겸의 멱살을 잡았다.

    “그 반대겠지! 강필두의 아비는 우리 아버지를 죽게 한 자다!”

    “시신을 발견하지 못했다 하지 않았습니까?”

    “홍수가 난 뒤 아버지는 돌아오지 않았소. 마지막으로 함께 있던 사람이 강필두의 아비였고, 사라진 땅문서는 강씨 집안에서 발견됐지. 이것보다 확실한 증거가 어디 있단 말이오!”

    “그 문서가 진짜라는 보장은 있습니까?”

    서진목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는 한겸을 밀쳐 내고 등을 돌렸다.

    “그만 돌아가시오.”

    그때 안채 쪽에서 그릇이 깨지는 소리가 났다. 서진목의 아내 윤씨가 문기둥을 붙든 채 서 있었다. 얼굴은 창백했고 입술은 떨리고 있었다.

    “당신, 아직도 그 말을 믿고 계셨습니까?”

    서진목이 날카롭게 돌아보았다.

    “무슨 뜻이오?”

    윤씨는 무언가 말하려 했지만 끝내 입을 닫았다. 서진목이 다가가자 그녀는 뒷걸음질을 쳤다.

    “아무것도 아닙니다. 제가 잘못 들었습니다.”

    한겸은 윤씨가 중요한 사실을 알고 있다고 확신했다. 그러나 억지로 물으면 더 깊이 숨길 것 같았다. 그는 말없이 방망이를 꺼내 마루 아래에 내려놓았다.

    “이 물건은 사람이 입으로 말하지 못한 진심을 들려줍니다. 원하지 않으시면 사용하지 않겠습니다.”

    서진목은 코웃음을 쳤다.

    “도깨비 놀음으로 나를 속이려는 것이오?”

    그러나 윤씨는 방망이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한참 뒤 그녀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두드려 주세요.”

    “여보!”

    “삼십 년을 숨겼습니다. 이제는 저도 견딜 수 없습니다.”

    한겸은 마루 바닥을 세 번 두드렸다.

    툭. 툭. 툭.

    바람 한 점 없는데 처마 밑 풍경이 울렸다. 등잔불이 길게 흔들리더니 마당 한가운데에 물결 같은 그림자가 번졌다. 그리고 젊은 여인의 울먹이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것은 삼십 년 전 윤씨의 목소리였다.

    “아버님, 제발 사실대로 말씀하십시오. 강씨 어른이 정말 아버님을 해친 것입니까?”

    이어 숨이 끊어질 듯 쇠약한 노인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아니다. 그 사람이 나를 죽인 것이 아니다.”

    서진목의 얼굴에서 핏기가 사라졌다.

    “아버지…….”

    목소리는 서진목의 부친이 실종되기 전날 밤 남긴 말이었다.

    “내가 물에 빠진 그 사람을 구했다. 하지만 물살에 휩쓸린 뒤 땅문서를 잃어버렸고, 누군가 그것을 바꿔치기했다.”

    윤씨의 흐느낌이 뒤따랐다.

    “그렇다면 왜 마을 사람들에게 밝히지 않으십니까?”

    “말할 수 없다. 그자가 도윤이의 목숨을 담보로 입을 막았다.”

    서도윤의 이름이 나오자 서진목은 비틀거리며 기둥을 붙잡았다. 당시 도윤은 갓난아기였다.

    “누가 도윤을 해치겠다고 했습니까?”

    젊은 윤씨의 물음 뒤로 긴 침묵이 흘렀다. 이윽고 노인은 힘겹게 이름 하나를 말하려 했다.

    “그자는 관아에서 문서를 다루는…….”

    갑자기 마당 밖에서 화살이 날아왔다. 화살은 방망이 옆에 꽂혔고, 화살촉에 묻은 기름이 번지며 불길이 치솟았다.

    한겸은 몸을 던져 방망이를 집어 들었다. 서진목이 대문을 박차고 밖으로 뛰어나갔지만 검은 옷을 입은 사내는 이미 담을 넘어 달아나고 있었다.

    불을 끈 뒤 방망이를 살펴보니 손잡이의 금이 조금 더 깊어져 있었다. 그러나 누구도 그것을 걱정할 겨를이 없었다.

    서진목은 윤씨를 향해 천천히 돌아섰다. 그의 눈에는 분노보다 더 짙은 배신감이 차올라 있었다.

    “당신은 알고 있었소?”

    윤씨가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도윤이를 살리려면 침묵하라고 했습니다.”

    “누가 그랬소?”

    윤씨는 입술을 깨물었다. 삼십 년 동안 눌러 담았던 두려움이 온몸을 떨게 했다.

    “관아의 아전이었던 오치수의 아버지가 그랬습니다. 그리고 지금의 오치수도 모든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 순간 대문 밖에서 다급한 발소리가 들렸다. 서씨 집안의 머슴이 피투성이가 된 채 마당으로 쓰러졌다.

    “나리, 큰일 났습니다. 강필두 어른이 관아로 끌려갔습니다.”

    “무슨 죄로 말이냐?”

    “삼십 년 전 서씨 어른을 죽이고 땅문서를 훔친 죄랍니다. 강씨 댁 창고에서 피 묻은 옷과 불탄 문서가 나왔습니다.”

    한겸과 서진목은 동시에 서로를 바라보았다. 강필두의 창고에서 하필 지금 증거가 발견될 리 없었다. 누군가 진실이 드러나기 전에 강필두를 살인자로 만들려는 것이 분명했다.

    머슴이 숨을 헐떡이며 말을 이었다.

    “그리고 강필두 어른은 끌려가면서 계속 이상한 말을 했습니다.”

    “무슨 말이었느냐?”

    “서진목에게 전하라고 했습니다. 삼십 년 전 홍수 날, 자기가 서씨 어른의 등에 업혀 살아났다고…….”

    서진목의 손에서 낫이 떨어졌다.

    평생 아버지를 죽인 원수라고 믿었던 강씨 집안의 사람은 사실 아버지가 목숨을 걸고 구해 낸 사람이었다. 그리고 강필두는 그 사실을 알고도 삼십 년 동안 침묵해 왔다.

    한겸은 금이 간 도깨비 방망이를 굳게 움켜쥐었다.

    '이제 남은 것은 강씨 집안이 감춰 온 진심이다.'

    그러나 방망이가 버틸 수 있는 기회는 많지 않았다. 진실을 전부 듣기 전에 방망이가 갈라진다면, 강필두는 살인자라는 누명을 쓰고 목숨을 잃을 것이었다.

    그때 멀리 관아 쪽에서 사형수의 압송을 알리는 북소리가 울려 퍼졌다.

    둥. 둥. 둥.

    동이 트기 전까지 남은 시간은 고작 두 시진이었다.

    ※ 4: 불탄 문서와 사라진 증인

    한겸과 서진목은 곧장 강필두가 끌려간 관아로 향했다. 새벽안개가 골목마다 짙게 깔려 있었고 관아 담장 위에는 횃불이 줄지어 타올랐다. 아직 날도 밝지 않았는데 죄인을 심문하는 고함과 곤장 치는 소리가 바깥까지 들려왔다.

    대문을 지키던 군졸들이 두 사람을 막아섰다.

    “살인죄를 지은 중죄인을 심문 중이다. 물러가라.”

    “삼십 년 전 사건을 이제 와서 심문하면서 어찌 가족에게 알릴 겨를조차 주지 않는단 말이오?”

    한겸이 따졌지만 군졸들은 꿈쩍하지 않았다. 그때 안에서 오치수가 걸어 나왔다. 그의 옷자락에는 검붉은 피가 묻어 있었고, 손에는 불에 그을린 땅문서가 들려 있었다.

    “이른 새벽부터 무슨 소란입니까?”

    서진목이 오치수에게 달려들었다.

    “강필두를 당장 풀어 주어라! 그 사람은 우리 아버지를 죽이지 않았다.”

    오치수의 눈썹이 미세하게 움직였다.

    “평생 원수로 지냈다더니 갑자기 살인자의 편을 드시는군요.”

    “삼십 년 전 홍수 날 우리 아버지는 강씨 어른의 목숨을 구했다. 두 집안을 이간질한 자가 따로 있다.”

    “그 말을 증명할 증인이 있습니까?”

    서진목은 입을 다물었다. 윤씨가 들은 이야기는 있었지만, 그것만으로 강필두의 무죄와 오치수의 죄를 입증할 수는 없었다.

    오치수가 불탄 문서를 펼쳐 보였다.

    “이것이 강씨 집안 창고에서 나왔습니다. 서씨 집안의 옛 땅문서와 서 어른의 피 묻은 옷까지 함께 발견됐지요. 더구나 강필두는 심문 중 범행을 자백했습니다.”

    “고문을 견디지 못해 한 거짓 자백일 것입니다.”

    “그것을 어찌 아십니까?”

    한겸은 오치수의 손을 바라보았다. 그의 오른손 엄지에는 붉은 인주가 묻어 있었고, 손톱 밑에는 아직 마르지 않은 먹물이 끼어 있었다. 삼십 년 된 문서가 발견됐다면서 방금 도장을 찍은 흔적이 남아 있는 것은 이상했다.

    “그 문서를 가까이서 살펴봐도 되겠습니까?”

    오치수는 얼른 문서를 접었다.

    “관아의 증거물을 함부로 만질 수는 없습니다.”

    “그렇다면 한 가지만 묻겠습니다. 삼십 년 전 불탄 장부에는 없던 ‘연화천’이라는 이름이 어찌 그 문서에 쓰여 있습니까?”

    오치수의 표정이 굳었다. 연화천은 십 년 전 새로 놓인 다리의 이름이었다. 삼십 년 전 작성된 문서라면 절대로 들어갈 수 없는 지명이었다.

    구경하던 백성들 사이에서 웅성거림이 번졌다. 오치수는 문서를 품속에 감추며 군졸들에게 소리쳤다.

    “저 선비가 관아를 모욕하고 증거를 훼손하려 한다. 두 사람을 모두 붙잡아라!”

    한겸과 서진목은 군졸들을 밀치고 달아났다. 관아 뒤편 담을 넘어 좁은 골목으로 들어서자 화살이 머리 위를 스치고 지나갔다. 두 사람은 장터의 짐수레 밑을 기어 반대편 길로 빠져나온 뒤 산으로 향했다.

    “어디로 가는 것이오?”

    “홍수 때 사람들을 구했다는 늙은 스님을 만나야 합니다. 그분이 살아 있는 마지막 증인일지 모릅니다.”

    두 사람은 숨 돌릴 틈도 없이 산을 올랐다. 그러나 절에 도착했을 때 법당 문은 활짝 열려 있었고 마당에는 깨진 그릇과 핏자국이 흩어져 있었다. 늙은 스님은 뒷마당 우물가에 쓰러져 있었다.

    한겸이 스님을 부축하자 그가 힘겹게 눈을 떴다.

    “너무 늦었구나. 그들이 장부를 가져갔다.”

    “어떤 장부입니까?”

    “홍수로 다친 사람들의 이름과 상처를 적어 둔 구호 장부다. 거기에는 서덕만과 강광수의 이름도 적혀 있었다.”

    서덕만은 서진목의 아버지였고, 강광수는 강필두의 아버지였다. 서진목이 스님의 손을 붙잡았다.

    “제 아버지를 아십니까? 홍수 뒤 대체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늙은 스님은 서진목의 얼굴을 한참 바라보다 눈물을 흘렸다.

    “덕만이를 빼닮았구나.”

    스님은 자신이 강물에서 두 사람을 발견했다고 말했다. 처음 물에 빠진 사람은 강광수였고, 서덕만이 그를 등에 업고 물살을 헤쳤다. 그러나 무너진 나무다리가 서덕만의 어깨를 덮쳤다. 이번에는 강광수가 정신을 잃은 서덕만을 업고 절까지 올라왔다.

    두 사람은 서로의 목숨을 한 번씩 구한 은인이었다.

    “그런데 왜 원수가 된 것입니까?”

    “관아의 아전 오만석 때문이었다. 지금 오치수의 아비였지. 그는 홍수로 경계석이 사라진 틈을 타 땅문서를 위조했다. 두 집안이 싸워 재산을 탕진하면 문제의 논을 헐값에 사들일 생각이었어.”

    스님은 오만석이 서덕만의 갓난 손자를 죽이겠다고 협박해 입을 막았다고 했다. 강광수에게는 어린 필두를 산적의 소행으로 꾸며 해치겠다고 위협했다. 두 아버지는 자식들을 지키기 위해 서로를 원수처럼 대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면 제 아버지는 어디서 돌아가셨습니까?”

    서진목의 질문에 스님은 고개를 저었다.

    “덕만이는 죽지 않았다.”

    서진목은 숨조차 쉬지 못했다.

    스님이 떨리는 손으로 자신의 승복 깃을 풀었다. 쇄골 아래에는 오래전에 새긴 글자 두 개가 남아 있었다.

    救命.

    논두렁에서 발견한 나무판과 같은 글자였다.

    “내가 서덕만이다.”

    서진목의 무릎이 힘없이 꺾였다.

    “아버지…….”

    “오만석은 나를 없애려고 절벽에서 밀었다. 목숨은 건졌지만 오랫동안 기억을 잃고 떠돌았지. 기억을 되찾았을 때는 그자가 이미 죽은 뒤였고, 치수가 아비의 자리를 이어받아 너희를 감시하고 있었다. 내가 나타나면 네 자식들이 위험해질까 두려워 숨어 살았다.”

    서진목은 스님의 손을 얼굴에 대고 울음을 터뜨렸다. 원망과 그리움으로 보낸 삼십 년이 한순간에 무너져 내렸다.

    그때 산 아래에서 연기가 피어올랐다. 관아 쪽이 아니라 버들개 마을 방향이었다.

    절 마당으로 뛰어든 도윤이 숨을 몰아쉬며 외쳤다.

    “아버지, 오치수가 사람들을 풀어 강씨 집안에 불을 질렀습니다! 연화가 불길 속에 갇혔습니다!”

    서진목이 벌떡 일어났다. 강씨 집안은 평생 이를 갈아 온 원수였다. 하지만 그 집에는 자신의 아들이 목숨보다 사랑하는 여인이 갇혀 있었다.

    서덕만이 아들의 손목을 붙잡았다.

    “삼십 년 전 나는 원수라 불리던 사람을 구했다. 그 선택을 단 한 번도 후회하지 않았다.”

    서진목은 아버지의 눈을 바라보다 몸을 돌렸다.

    “도윤아, 앞장서라. 오늘부터 우리 집안에는 불구경하는 자가 한 명도 없어야 한다.”

    한겸도 뒤따라 산을 내려갔다. 그의 품속에서 도깨비 방망이가 뜨겁게 떨렸다. 방망이에 생긴 금은 어느새 손잡이의 절반을 가르고 있었다.

    ※ 5: 원수의 등에 남은 흉터

    강씨 집안은 거대한 불덩이로 변해 있었다. 사랑채의 기둥이 무너져 내렸고, 지붕 위로 솟은 불길이 밤하늘을 붉게 물들였다. 마을 사람들은 두 집안의 싸움에 휘말릴까 두려워 멀찍이 서 있을 뿐 누구도 나서지 못했다.

    서진목이 물지게를 빼앗아 어깨에 메었다.

    “무엇들 하는가! 저 불이 옆집으로 옮겨붙으면 온 마을이 잿더미가 된다!”

    그가 앞장서자 서씨 집안의 머슴들과 장정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구경하던 백성들도 하나둘 물동이를 들었다. 긴 행렬이 우물과 강씨 집안 사이를 오갔다.

    도윤은 젖은 이불을 뒤집어쓰고 불길 속으로 뛰어들었다.

    “연화야! 어디 있느냐!”

    안채 깊숙한 곳에서 희미한 기침 소리가 들렸다.

    “도윤 도련님…….”

    연화는 무너진 들보 아래에 발이 끼어 있었다. 도윤이 들보를 들어 올리려 했지만 혼자 힘으로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때 서진목이 불길을 헤치고 들어왔다.

    “비켜서라. 함께 든다.”

    “아버지, 여기는 위험합니다.”

    “네가 저 아이를 두고 나오지 않을 것을 아는데, 내가 어찌 밖에서 기다리겠느냐?”

    두 사람이 힘을 합쳐 들보를 밀어냈다. 도윤이 연화를 업자마자 천장에서 불붙은 서까래가 떨어졌다. 서진목은 두 사람을 감싸며 몸을 던졌다. 불씨가 그의 등을 덮쳤지만 그는 신음조차 참으며 밖으로 기어 나왔다.

    마당으로 나온 연화는 서진목 앞에 무릎을 꿇었다.

    “어르신께서 저를 구해 주셨습니다.”

    서진목은 그 말을 듣고 한동안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삼십 년 전 자신의 아버지가 강광수를 구했을 때도 이런 모습이었을 것이다.

    “은혜라 생각하지 마라. 사람이라면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이다.”

    관아에서 풀려난 강필두가 포승줄에 묶인 채 군졸들과 나타난 것은 바로 그때였다. 오치수는 불길 앞에 선 서진목을 가리키며 외쳤다.

    “저자를 보아라! 강씨 집안에 원한을 품고 불을 지른 뒤 증거를 없애려 한 것이다!”

    강필두는 연화와 도윤을 보고 눈을 부릅떴다.

    “내 딸에게서 떨어져라!”

    “아버지, 도윤 도련님과 서 어른이 저를 살려 주셨습니다.”

    “저놈들의 속임수다!”

    강필두는 믿으려 하지 않았다. 평생 쌓인 원한이 눈앞의 진실마저 가리고 있었다.

    한겸은 방망이를 꺼냈다.

    “강 어른, 삼십 년 동안 숨겨 온 말을 이제는 꺼내셔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자식들에게도 같은 원한을 물려주게 됩니다.”

    “내게 숨긴 말 따위는 없다.”

    “그렇다면 왜 끌려가면서 서덕만 어른이 부친을 구했다고 말씀하셨습니까?”

    강필두는 입을 굳게 다물었다. 그 순간 절에서 내려온 서덕만이 사람들 사이를 헤치고 앞으로 나왔다. 강필두는 늙은 스님의 얼굴을 보자 비틀거리며 뒷걸음질을 쳤다.

    “당신은…… 죽었다고 들었는데…….”

    “광수의 아들이로구나.”

    서덕만이 강필두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네 아버지는 내게 목숨을 빚진 사람이 아니다. 그날 나도 네 아버지 등에 업혀 살았다.”

    강필두의 눈에 눈물이 맺혔지만 그는 이를 악물었다.

    “거짓말입니다. 아버지는 죽기 전까지 서씨 집안 때문에 모든 것을 빼앗겼다고 했습니다.”

    “그것은 너를 지키려고 한 거짓말이었다.”

    한겸은 방망이를 불탄 마당에 내려놓았다.

    “강 어른께서 허락하신다면, 이 땅에 묻힌 부친의 진심을 듣겠습니다.”

    강필두가 오래 망설이다 고개를 끄덕였다.

    툭. 툭. 툭.

    마지막 두드림과 함께 방망이에 두 번째 금이 깊게 벌어졌다. 불길이 거짓말처럼 낮아졌고, 물기 어린 음성이 마당을 채웠다.

    “필두야, 서씨를 미워하거라.”

    어린 강필두의 울음소리가 들렸다.

    “서 아저씨가 아버지를 죽이려 했습니까?”

    “아니다. 그 사람은 나를 살린 은인이다.”

    “그런데 왜 미워하라고 하십니까?”

    “네가 그들을 가까이하면 오만석이 너를 죽일 것이다. 나를 비겁한 아비라 욕하더라도 살아남아라.”

    이어 강광수가 흐느끼는 소리가 들렸다.

    “덕만아, 미안하네. 자네를 원수라 부를 때마다 내 심장이 썩어 들어갔네. 그날 자네가 나를 업었고, 쓰러진 자네를 내가 업었지. 내 등에 남은 상처는 원한이 아니라 우리가 서로를 살렸다는 증거였네.”

    강필두가 자신의 저고리를 뜯듯 벗었다. 그의 등에도 아버지와 같은 위치에 길고 비뚤어진 흉터가 있었다. 어린 시절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뒤, 강필두는 그 흉터의 유래를 숨기고 살았다.

    “아버지는 마지막에 제게 등을 보여 주셨습니다. 언젠가 진실을 말할 날이 오면 이 흉터를 기억하라고 했습니다. 하지만 저는 두려웠습니다. 서씨 집안이 아니라 오씨 부자를 두려워하면서도, 그 두려움을 원한이라 믿고 살았습니다.”

    서진목도 고개를 숙였다.

    “나 역시 진실보다 미움이 편했소. 원수가 존재하면 내 불행을 모두 그 탓으로 돌릴 수 있었으니까.”

    두 사람의 눈이 처음으로 분노 없이 마주쳤다.

    바로 그때 오치수가 군졸의 칼을 빼앗아 한겸에게 달려들었다. 방망이를 없애려는 것이었다. 서진목과 강필두가 동시에 몸을 던져 한겸을 밀쳐 냈다. 칼날이 두 사람의 팔을 스치고 지나갔다.

    오치수는 불탄 문서를 불길 속에 던졌다.

    “증거가 모두 타면 귀신의 말 따위로 나를 벌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불길에 닿은 문서에서 검은 그을음이 벗겨지며 아래에 겹쳐 붙인 종이가 드러났다. 오치수가 급히 위조한 문서 밑에는 관아 창고에서 훔친 원본 장부 한 장이 붙어 있었다.

    한겸이 그것을 낚아채 펼쳤다. 거기에는 오만석이 서씨와 강씨의 땅을 몰래 담보로 잡고 고리의 빚을 만든 기록과, 어린 자식들을 해치겠다고 위협한 자필 각서가 남아 있었다.

    오치수가 다시 칼을 들려 하자 강필두가 그의 손목을 잡았고, 서진목이 어깨를 눌렀다. 평생 서로에게 휘두르려 했던 두 사람의 힘이 처음으로 같은 적을 향했다.

    마을 사람들은 더 이상 구경만 하지 않았다. 오치수가 매수한 군졸들의 무기를 빼앗고 그의 앞을 에워쌌다.

    늙은 현감도 뒤늦게 마당에 도착했다. 원본 장부와 수많은 백성의 증언을 확인한 그는 오치수를 결박하라고 명했다.

    오치수가 끌려가면서 악을 썼다.

    “너희는 다시 싸우게 될 것이다! 땅이 있는 한 욕심도 사라지지 않는다!”

    강필두가 불타 버린 논문서를 바라보다 서진목에게 말했다.

    “그자의 말이 틀렸음을 보여 줍시다. 하지만 그 전에 내가 당신에게 갚아야 할 빚이 있소.”

    “빚이라니?”

    강필두는 피가 흐르는 서진목의 팔을 자신의 옷자락으로 묶어 주었다.

    “당신은 오늘 내 딸을 구했소.”

    서진목은 잠시 침묵하다 강필두의 상처도 같은 천으로 감쌌다.

    “당신도 오늘 나와 내 아들을 구했소. 그러니 이제 서로에게 빚은 없는 것으로 합시다.”

    두 사람 사이에 놓여 있던 삼십 년의 원한이 불탄 담장처럼 힘없이 무너져 내렸다.

    ※ 6: 원수를 은인으로 만든 방망이

    오치수의 죄는 곧 낱낱이 밝혀졌다. 그는 아버지가 남긴 위조 장부와 협박문을 이용해 두 집안의 땅을 조금씩 빼앗아 왔다. 분쟁이 끝날 기미가 보일 때마다 경계석을 옮기고, 거짓 증인을 세우고, 양쪽 창고에 훔친 물건을 숨겨 싸움을 부추겼다.

    강필두를 살인범으로 몰아 급히 처형하려 했던 것도 서덕만이 살아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강씨 집안에 불을 지른 뒤 서씨 집안의 방화로 꾸미면 두 집안이 돌이킬 수 없는 피의 복수를 시작하리라 믿었다.

    현감은 오치수의 재산을 몰수해 피해를 본 백성들에게 돌려주고, 그를 먼 섬의 관노로 보냈다. 오치수에게 뇌물을 받은 군졸과 거짓 증인들도 죗값을 치렀다.

    그러나 가장 어려운 일은 여전히 남아 있었다. 문제의 논을 누구의 소유로 정할 것인가 하는 일이었다.

    며칠 뒤 서씨와 강씨 집안사람들이 논두렁에 모였다. 현감이 새로 측량한 결과, 양쪽이 주장하던 경계는 모두 틀려 있었다. 홍수 전의 원래 경계대로라면 논의 삼분의 이는 서씨 집안, 나머지는 강씨 집안의 땅이었다.

    서진목이 먼저 입을 열었다.

    “법대로 나누면 다시 경계가 생길 것이고, 경계가 생기면 언젠가 또 욕심이 자랄 것이오. 나는 이 논을 혼자 갖지 않겠소.”

    강필두도 고개를 끄덕였다.

    “두 집안이 함께 농사짓고 수확을 똑같이 나눕시다. 가뭄에는 함께 물길을 파고, 홍수에는 함께 둑을 막읍시다.”

    서진목은 논두렁을 없애자고 제안했다. 두 집안을 가르던 흙을 걷어 내 넓은 물길로 만들자는 것이었다.

    두 집안의 장정들이 삽과 괭이를 들었다. 처음에는 서로 눈치를 보았지만 서진목과 강필두가 나란히 삽을 꽂자 모두 힘을 합쳤다. 삼십 년 동안 피가 떨어졌던 논두렁이 반나절 만에 사라졌다.

    마지막 흙덩이를 걷어 내던 도윤의 삽 끝에 작은 돌상자가 걸렸다. 상자 안에는 기름종이로 감싼 진짜 땅문서와 나무패 하나가 들어 있었다.

    나무패 앞면에는 구명이라는 두 글자가, 뒷면에는 서덕만과 강광수의 이름이 나란히 새겨져 있었다. 두 사람이 홍수 뒤 진실을 남기기 위해 묻어 둔 것이었다.

    땅문서의 마지막에는 두 사람의 서약이 적혀 있었다.

    이 땅은 목숨을 나눈 두 집안이 함께 경작한다. 어느 한쪽이 욕심으로 경계를 세우면 후손들이 그 경계를 허물어 서로를 구할지어다.

    강필두가 문서를 읽다가 눈물을 훔쳤다.

    “아버지들은 이미 화해하셨는데, 우리만 삼십 년이나 늦었군요.”

    서진목이 그의 손을 잡았다.

    “늦었어도 살아 있는 동안 깨달았으니 다행이오.”

    그해 가을, 두 집안이 함께 경작한 논에는 전에 없던 풍년이 들었다. 볏단을 쌓을 자리가 부족할 정도였다. 서씨 집안은 강씨 집안의 불탄 집을 다시 지어 주었고, 강씨 집안은 서덕만이 머물 작은 암자를 마련했다.

    도윤과 연화는 마침내 양가의 허락을 받아 혼례를 올리게 되었다. 혼례 날, 한겸은 두 사람 앞에 금이 간 도깨비 방망이를 내려놓았다.

    “이 방망이가 아니었다면 우리는 진실을 듣지 못했을 것입니다.”

    서덕만은 고개를 저었다.

    “방망이가 들려준 것은 이미 사람들 마음속에 있던 말이었네. 진실을 듣고도 외면했다면 아무 일도 달라지지 않았을 것이야. 기적을 만든 것은 방망이가 아니라 끝내 서로의 상처를 바라본 사람들의 용기였네.”

    그날 밤 마을에는 큰 잔치가 열렸다. 서진목과 강필두는 한 상에 앉아 술잔을 나누었다. 처음에는 어색했지만 술이 몇 순배 돌자 서로 젊은 시절의 허풍을 놀리며 웃었다.

    강필두가 술잔을 들었다.

    “나는 자네가 세상에서 가장 고약한 사람인 줄 알았소.”

    “나도 그랬소. 그런데 막상 한편이 되어 보니 꽤 든든하더군.”

    “그렇다고 내일부터 형님 행세를 할 생각은 마시오. 내가 생일이 석 달 빠르니까.”

    “족보를 가져오시오. 그것부터 따져 봅시다.”

    사람들의 웃음소리가 마당을 가득 채웠다. 두 사람이 다투는 시늉을 하자 도윤과 연화도 안심한 듯 서로를 바라보며 미소 지었다. 예전의 싸움이 상대를 쓰러뜨리려는 칼이었다면, 지금의 말다툼은 서로를 가까이 끌어당기는 끈과 같았다.

    한겸은 조용히 잔치에서 빠져나와 산길을 올랐다. 방망이를 돌려주기 위해 도깨비들을 만났던 공터를 찾아간 것이다.

    구름 사이로 둥근달이 떠오르자 붉고 푸른 등불이 하나둘 나타났다. 어린 도깨비가 고목 뒤에서 얼굴을 내밀었다.

    “두 집안의 진심을 모두 들었어?”

    “모두 듣지는 못했지만, 서로에게 가장 필요했던 말은 들었습니다.”

    “방망이는 왜 돌려주려는 거야?”

    “사람의 마음을 함부로 들여다보는 힘은 제게 너무 큽니다. 이제는 방망이 없이도 남의 말을 들으려 노력하겠습니다.”

    어린 도깨비는 금이 간 방망이를 살펴보다 한겸에게 다시 내밀었다.

    “마지막으로 한 번만 두드려 봐.”

    “한 번 더 사용하면 완전히 갈라질 것입니다.”

    “그래서 두드리는 거야. 방망이도 해야 할 일을 끝내야 하니까.”

    한겸은 방망이로 산바닥을 세 번 두드렸다.

    툭. 툭. 툭.

    세 번째 소리가 울리자 방망이가 둘로 갈라졌다. 산과 들, 마을과 논에서 수많은 목소리가 바람처럼 일어났다.

    “미안하다.”

    “고마웠다.”

    “두려웠다.”

    “사랑한다.”

    사람들이 차마 입 밖으로 내지 못했던 말들이 달빛 아래를 떠돌았다. 그러나 이번에는 특정한 사람의 마음을 몰래 들려주는 소리가 아니었다. 누구나 가슴속에서 한 번쯤 꺼내야 할 말들이었다.

    갈라진 방망이는 수십 마리 반딧불로 변해 마을 쪽으로 날아갔다. 반딧불 하나가 한겸의 손등에 내려앉았고, 병든 어머니의 목소리가 들렸다.

    “아들아, 오늘도 무사히 돌아와 주어 고맙구나.”

    한겸은 눈물을 닦으며 산을 내려갔다.

    이듬해 봄, 논두렁이 있던 자리에는 작은 다리가 놓였다. 사람들은 그 다리를 구명교라 불렀다. 두 집안을 갈라놓던 경계가 서로의 논을 오가는 길이 된 것이다.

    세월이 흘러 서진목과 강필두가 백발이 된 뒤에도 두 집안은 함께 농사를 지었다. 가끔 의견이 달라 목소리가 높아지면 연화가 웃으며 마당 바닥을 세 번 두드렸다.

    그러면 두 노인은 잠시 입을 다물었다가 먼저 사과했다.

    도깨비 방망이는 사라졌지만, 그 소리는 사람들의 마음속에 남아 있었다. 원수라고 믿었던 이의 상처를 들여다보는 순간 원망은 이해가 되었고, 빚이라 여겼던 은혜는 서로를 살린 인연이 되었다.

    그리하여 버들개 마을 사람들은 오래도록 이렇게 말했다.

    세상에서 가장 신비한 도깨비 방망이는 금은보화를 만드는 물건이 아니라, 닫힌 마음을 두드려 진심이 나올 길을 열어 주는 물건이라고.

    유튜브 엔딩 멘트

    평생 원수라 믿었던 사람이 사실은 서로의 목숨을 구한 은인이었습니다. 마음속 상처를 말하지 않으면 오해가 되고, 오해를 오래 품으면 원한이 되기도 합니다. 오늘 이야기가 재미있으셨다면 구독과 좋아요 부탁드립니다. 여러분의 마음속에도 아직 전하지 못한 미안함이나 고마움이 있다면, 너무 늦기 전에 먼저 마음의 문을 두드려 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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