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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이 되기 위한 마지막 시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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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시험을 준비하던 선비 앞에 아름다운 여인이 나타납니다. 그녀의 정체는 마지막 시험을 앞둔 구미호. 인간이 되기 위해 마지막 시험에 도전하는 구미호와, 그녀의 유혹 앞에 선 선비의 운명은 어떻게 될까요? 조선시대를 배경으로 펼쳐지는 구미호와 선비의 이야기를 들려드립니다.
01. 달빛 아래 귀가하는 선비
한양 도성의 하늘에 달이 떴습니다. 늦가을의 차가운 바람이 거리를 쓸고 지나가는 밤, 종로 거리는 이미 인적이 드물었습니다. 멀리서 들려오는 통행금지를 알리는 종소리가 밤의 적막을 깨뜨렸지요. 이제 막 과거 준비를 마치고 돌아가는 한 선비의 발걸음만이 고요한 거리에 메아리치고 있었습니다.
스물다섯 살의 젊은 선비 이수린. 그는 다가오는 과거시험을 준비하느라 늦은 시각까지 서당에서 책을 읽고 있었습니다. 달빛은 그의 청수한 얼굴과 단정한 도포 자락을 비추었고, 발걸음 소리와 함께 그림자가 길게 늘어졌다 줄어들기를 반복했지요.
이수린은 잠시 걸음을 멈추고 하늘을 올려다보았습니다. 유난히 붉은빛을 띠는 달이 눈에 들어왔지요. 마치 여우의 눈동자처럼 붉게 빛나는 달을 보며, 그는 며칠 전 기방에서 들은 소문이 떠올랐습니다. 달이 붉게 물들 때면 구미호가 나타난다는 이야기였지요.
"허면, 오늘 밤엔 구미호가 나타날 것인가..."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다시 걸음을 옮기는 순간이었습니다. 갑자기 불어온 센 바람에 그의 도포 자락이 펄럭였고, 길가의 초롱불이 일제히 흔들렸습니다. 그리고 어디선가 은은한 향내가 코끝을 스쳤지요. 백리향일까요, 아니면 난초 향일까요. 이수린은 그 향기의 정체를 알 수 없었습니다.
"이상하도다. 이런 밤에 어찌 꽃향기가..."
선비의 의문은 채 끝나기도 전에, 저 멀리 골목 어귀에서 하얀 무명치마가 스치는 것이 보였습니다. 달빛에 비친 여인의 뒷모습은 마치 한 폭의 그림과도 같았지요. 이수린은 그 자리에 멈춰 서서 홀린 듯 그 모습을 바라보았습니다.
여인은 걸음을 멈추더니 살포시 고개를 돌렸습니다. 달빛 아래 드러난 그녀의 얼굴은 꽃잎처럼 하얗고 고왔으며, 눈동자는 마치 밤하늘의 별처럼 반짝였지요. 순간 이수린의 가슴 한켠이 설레었습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여인은 다시 몸을 돌려 골목 저편으로 사라졌습니다.
이수린은 한동안 그 자리에 서서 여인이 사라진 방향을 바라보았습니다. 목이 마른 듯 침을 삼키며 그는 중얼거렸지요.
"가을밤의 허상이려나... 아니면..."
멀리서 다시 한 번 종소리가 울렸습니다. 이수린은 정신을 차리고 발걸음을 재촉했습니다. 하지만 그의 마음속에는 이미 그 신비로운 여인의 모습이 깊이 새겨져 있었지요. 달빛은 여전히 붉게 물들어 있었고, 이수린의 발걸음 소리만이 고요한 밤거리를 울리며 이어졌습니다.
02. 기방에서 듣게 된 구미호 소문
이틀 뒤, 해질 무렵의 장춘방 기방이었습니다. 이수린은 친구 김진사의 강권에 못 이겨 이곳에 발을 들였지요. 붉은 등롱이 드리워진 방 안에는 이미 술기운이 가득했고, 기생들의 웃음소리가 은은하게 들려왔습니다.
"자네 요즘 들었는가? 서강 근처에서 일어난 괴이한 일을..."
김진사가 목소리를 낮추어 말을 꺼냈습니다. 그의 눈빛이 심상치 않았지요. 이수린은 무심코 귀를 기울였습니다.
"며칠 전, 서강에 사는 박 진사의 막내아들이 실종되었다지. 그것도 과거시험을 며칠 앞두고 말일세."
김진사의 이야기는 계속 이어졌습니다. 실종된 젊은이는 과거시험을 준비하던 선비였고, 실종 전날 밤 기이하게 아름다운 여인을 만났다는 소문이 돌고 있다는 것이었지요.
"그래서 어찌 되었다던가?"
이수린이 불안한 마음으로 물었습니다. 김진사는 잔에 술을 따르며 한숨을 내쉬었지요.
"사흘 뒤에 시신으로 발견되었다네. 그런데 이상한 것은... 그의 몸에서 피 한 방울 찾을 수 없었다는 거야."
순간 이수린의 등줄기로 한기가 흘렀습니다. 며칠 전 밤에 본 그 신비로운 여인의 모습이 떠올랐기 때문이지요.
"그것만이 아니라네." 김진사가 말을 이었습니다. "십 년 전에도 비슷한 일이 있었다지. 과거를 준비하던 선비들이 하나둘 실종되었다가 피 한 방울 없는 시신으로 발견된 것일세. 그때마다 달빛이 붉게 물들었다고 하더군."
방 안의 공기가 차갑게 식어갔습니다. 옆에서 시중들던 기생 홍매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지요.
"나리, 그게 다가 아니옵니다. 저희 언니가 그날 밤, 서강 나루터 근처에서 이상한 것을 보았다고 하더군요. 달빛 아래 서 있던 여인의 그림자가... 마치 여우의 꼬리처럼 길게 늘어졌다가 순식간에 사라졌다고 합니다."
이수린은 잔을 들던 손을 멈추었습니다. 홍매의 이야기는 계속되었지요.
"그 여인이 바로 구미호라고들 하지요. 천 년을 수련해 사람의 모습을 하고, 마지막 시험을 통과하기 위해 선비들의 정기를 노린다는..."
그때였습니다. 갑자기 바람이 불어 방문이 거세게 흔들렸고, 붉은 등롱이 일제히 꺼졌다 다시 켜졌습니다. 놀란 기생들이 작은 비명을 지르는 사이, 어디선가 그날 밤의 그 향기가 다시 퍼져왔지요.
이수린의 얼굴이 창백하게 변했습니다. 방 밖을 내다보니 달이 또다시 붉게 물들어 있었고, 멀리서 은은한 피리 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았습니다. 그의 가슴 한켠에서 불안과 호기심이 교차했지요.
"이보게, 자네 안색이 좋지 않구려. 무슨 일이라도..."
김진사가 걱정스레 묻는 소리가 희미하게 들렸습니다. 이수린의 머릿속에는 이미 그날 밤 본 여인의 모습이 가득했으니까요. 과연 그녀는 구미호였을까요? 그리고 자신도 그녀의 다음 시험대상이 된 것일까요?
03. 밤마다 찾아오는 아름다운 여인
그날 밤, 이수린은 잠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기방에서 들은 이야기가 자꾸만 머릿속을 맴돌았지요. 창 밖으로 달빛이 스며들었고, 서책 위로 그의 그림자가 길게 드리워졌습니다.
"공부에 전념해야 할 터인데..."
한숨을 내쉬며 책을 덮으려는 순간이었습니다. 창 밖에서 들려오는 발자국 소리에 이수린은 몸을 굳혔습니다. 까치가 울던 낮부터 불길한 예감이 들더니, 드디어 그 순간이 온 것일까요.
"나리, 계시나이까?"
바람결 같은 여인의 목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이수린은 숨을 고르며 천천히 문을 열었습니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얼어붙고 말았지요. 달빛 아래 서 있는 여인은, 며칠 전 밤에 스쳐간 바로 그 여인이었으니까요.
"이렇게 늦은 시각에 찾아와 죄송하나이다. 하지만 나리의 등불이 꺼지지 않은 것을 보고..."
여인의 목소리는 꿀처럼 달콤했습니다. 하얀 무명치마는 달빛에 은은히 빛났고, 그녀의 긴 머리카락은 밤바람에 하늘거렸지요. 이수린은 무언가 말을 해야 할 것 같았지만, 입술이 떨어지지 않았습니다.
"제가 잠시 쉬어갈 수 있을까요? 먼 길을 걸어왔더니, 다리가 몹시 아프네요."
이수린은 잠시 망설였습니다. 하지만 그녀의 눈동자에 비친 자신의 모습이 마치 옥에 갇힌 듯 움직일 수 없었지요. 그렇게 여인은 방 안으로 들어왔고, 은은한 향기가 공간을 가득 채웠습니다.
"나리께서는 매일 밤 글공부를 하시나 봅니다. 참으로 부지런하시네요."
여인은 미소를 지으며 이수린의 서책을 바라보았습니다. 그녀의 눈동자가 순간 붉게 빛나는 것 같았지만, 이수린은 그저 자신의 착각이라 여겼지요.
"과거를 앞두고 있어 그렇습니다만... 아가씨는 어찌 이 밤중에 홀로 걸음을 하시는 것입니까?"
이수린이 조심스레 물었습니다. 여인은 고개를 살짝 숙이며 쓸쓸한 미소를 지었지요.
"저는 이곳을 떠돌며 정처 없이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오늘 밤만 이곳에서 쉬어가고 싶을 뿐이에요."
그 말을 하는 여인의 눈가에 슬픔이 어렸습니다. 이수린은 마음이 흔들렸지요. 기방에서 들은 무서운 이야기는 잠시 잊혀진 것 같았습니다.
"그러면... 오늘 하룻밤만..."
이수린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멀리서 짐승의 울음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여인의 눈동자가 순간 흔들렸고, 이수린은 등골이 서늘해지는 것을 느꼈지요. 하지만 이미 그의 운명은 정해진 것인지도 모릅니다.
04. 선비의 마음이 흔들리는 장면
그날 이후로 여인은 매일 밤 이수린을 찾아왔습니다. 처음에는 잠시 쉬어간다던 그녀가, 이제는 밤이면 어김없이 그의 방문을 두드렸지요. 달빛이 스미는 방 안에서 그들은 밤새도록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나리, 오늘은 어떤 책을 읽고 계신가요?"
여인은 이수린의 곁에 앉아 책장을 넘기며 물었습니다. 그녀가 가까이 다가올 때마다 머리가 어지러웠지요. 향기에 취한 듯, 술에 취한 듯, 이수린의 마음은 점점 흐려져갔습니다.
"사서삼경의 구절을 읽고 있었소만... 아가씨가 오니 글자가 눈에 들어오질 않는구려."
이수린은 책을 덮으며 한숨을 내쉬었습니다. 과거시험이 며칠 앞으로 다가왔지만, 그의 마음은 이미 여인에게 빼앗긴 지 오래였지요. 여인은 그런 이수린을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습니다.
"나리께서는 과거에 급제하시면 어떤 일을 하고 싶으신가요?"
"그건... 그대와 함께..."
이수린은 말을 멈추었습니다. 문득 정신이 들었지요. 그는 자신이 지금 무슨 말을 하려 했던 것인지 깨달았습니다. 여인의 눈동자가 순간 붉게 빛났다가 사라졌고, 밤바람이 차갑게 불어왔습니다.
"나리... 저를 두려워하시나요?"
여인의 목소리가 떨렸습니다. 이수린은 대답하지 못했습니다. 그저 자신의 심장이 빠르게 뛰는 소리만이 들렸지요. 사랑일까요, 아니면 두려움일까요. 그는 자신의 감정을 알 수 없었습니다.
창밖으로 달빛이 붉게 물들었고, 어디선가 다시 짐승의 울음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이수린의 운명은 점점 그녀에게로 기울어지고 있었지요.
05. 여인의 진실을 알게 되는 순간
과거시험을 하루 앞둔 밤이었습니다. 이수린은 마지막으로 책을 읽고 있었지만, 그의 마음은 이미 어둠 속에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지요. 하지만 이날따라 여인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이상하도다. 매일 오던 그녀가..."
한밤중이 되어서야 희미한 발자국 소리가 들렸습니다. 하지만 평소와는 달랐지요. 비틀거리는 발걸음 소리, 그리고 숨죽인 신음 소리가 섞여 있었습니다.
"나, 나리... 도와주세요..."
문이 열리고 여인이 쓰러지듯 들어왔습니다. 그녀의 하얀 무명치마는 피로 물들어 있었고, 창백한 얼굴은 달빛보다도 하얬습니다. 이수린은 놀라 그녀를 부축했지요.
"이게 어찌 된 일이오? 누가..."
바로 그때였습니다. 여인의 손이 이수린의 가슴을 향해 뻗어졌고, 그녀의 눈동자가 붉게 타올랐습니다. 순간 이수린의 몸이 굳어버렸지요. 여인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걸렸습니다.
"미안해요, 나리. 하지만 저는... 반드시 사람이 되어야만 해요."
여인의 모습이 일그러지기 시작했습니다. 하얀 피부가 갈라지며 그 아래로 하얀 여우의 털이 드러났고, 그녀의 뒤로 아홉 개의 꼬리가 펼쳐졌지요. 이수린은 공포에 질린 채 뒷걸음질 쳤습니다.
"그대가... 정말 구미호였던가..."
이수린의 떨리는 목소리에 구미호는 슬픈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습니다. 그녀의 눈가에 맺힌 눈물이 붉게 빛났지요.
"천 년을 기다렸어요. 마지막 시험만 통과하면... 진정한 사람이 될 수 있다고 했는데..."
06. 구미호의 본모습 드러남
방 안의 공기가 얼어붙었습니다. 창문으로 스며드는 달빛이 구미호의 하얀 털을 비추자, 온 방 안이 붉은빛으로 물들었지요. 이수린은 벽에 등을 기댄 채 그 광경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습니다.
"나리... 도망가지 마세요. 당신의 정기만 있다면, 제가 마침내 사람이 될 수 있어요."
구미호가 한 걸음 다가올 때마다 방 안의 초와 등불이 하나씩 꺼져갔습니다. 이제 붉은 달빛만이 그들을 비추고 있었지요. 아홉 개의 꼬리가 부채꼴로 펼쳐지며 방 안을 가득 채웠습니다.
"지난 백 년 동안, 아홉 명의 선비가 저를 위해 목숨을 바쳤어요. 당신이 마지막... 열 번째 시험이에요."
구미호의 목소리는 여전히 달콤했지만, 이제는 섬뜩한 한기가 느껴졌습니다. 그녀의 발톱이 달빛에 번뜩였고, 이수린은 자신의 심장이 터질 듯이 뛰는 것을 느꼈지요.
"매일 밤... 그대가 들려주던 이야기들은... 모두 거짓이었소?"
이수린의 떨리는 목소리에 구미호가 잠시 멈추었습니다. 그녀의 눈동자에 슬픔이 어렸지요.
"거짓이 아니에요... 당신을 향한 제 마음만은... 하지만 이제 더 이상 물러설 수 없어요."
구미호의 붉은 눈동자가 타오르기 시작했습니다. 방 안에 가득했던 그 달콤한 향기가 이제는 독처럼 느껴졌지요. 이수린은 자신의 의식이 점점 흐려지는 것을 느꼈습니다.
"이제... 편히 잠드세요, 나의 마지막 사랑..."
07. 선비를 시험하는 구미호
의식이 흐려지는 순간, 이수린의 손이 무언가를 스쳤습니다. 그의 책상 위에 놓여있던 과거시험용 벼루였지요. 차가운 벼루의 감촉이 그의 정신을 일깨웠습니다.
"과거시험... 그래, 내일은 과거시험이었지..."
이수린은 마지막 힘을 모아 벼루를 움켜쥐었습니다. 구미호가 그에게 다가오는 순간, 이수린은 벼루를 던졌지요. 하지만 구미호는 쉽게 피했습니다.
"아직도 저항하시려나요? 이제는 받아들이세요..."
그때였습니다. 벼루가 벽에 부딪히며 깨졌고, 그 안에 숨겨져 있던 것이 쏟아져 나왔습니다. 달빛에 반짝이는 작은 거울 조각들이었지요.
"응, 이것은...!"
구미호가 놀라 뒷걸음질 쳤습니다. 거울 조각에 비친 달빛이 방 안을 가득 채웠고, 그 빛에 구미호의 모습이 드러났지요. 아홉 개의 꼬리가 달빛에 비춰 그림자를 만들었습니다.
"과거를 준비하며... 늘 곁에 두었던 물건이오. 그대의 정체를 의심하며..."
이수린의 목소리는 떨렸지만 단호했습니다. 구미호는 달빛을 피하려 했지만, 거울 조각들이 만드는 빛의 감옥에 갇히고 말았지요.
"역시... 당신은 달랐군요. 의심하면서도 저를 대했던 그 따스함이..."
구미호의 눈에서 붉은 눈물이 흘러내렸습니다. 그녀의 모습이 달빛 속에서 점점 흐려져갔지요.
"이것이 진정한 시험이었나 봅니다. 사랑하는 이의 목숨을 앗아갈 수 있는지..."
08. 선비의 결단
거울 조각들이 만드는 빛 속에서 구미호의 모습이 점점 흐려져 갔습니다. 그녀의 아홉 개의 꼬리가 달빛에 비춰 투명해져 가는 것을 보며, 이수린의 마음속에서 무언가가 울렸습니다.
"잠시... 기다려 주시오."
이수린은 천천히 거울 조각 하나를 집어 들었습니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그것을 자신의 손바닥으로 가렸지요. 구미호는 놀란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습니다.
"나리... 지금 무얼..."
"그대가 말했소. 이것이 진정한 시험이라고... 그렇다면 나 역시 시험을 받고 있는 것이오."
이수린의 목소리는 흔들림이 없었습니다. 그는 하나둘 거울 조각들을 거두어들였고, 달빛의 감옥은 조금씩 허물어져 갔지요.
"하지만 위험해요... 제가 당신을..."
"그대는 나를 해치지 않을 것이오. 내 그대를 믿소."
구미호의 눈에서 다시 붉은 눈물이 흘러내렸습니다. 하지만 이번에는 달랐지요. 그 눈물이 바닥에 떨어지자, 붉은 꽃으로 피어났습니다.
"천 년을 살며... 처음으로 진정한 사람의 마음을 보았어요..."
구미호의 몸이 달빛처럼 환해지기 시작했습니다. 아홉 개의 꼬리가 하나둘 사라지며, 그녀의 모습이 점점 인간의 모습으로 변해갔지요.
"이제 알겠어요. 진정한 인간이 된다는 것은... 목숨을 앗는 것이 아닌, 서로를 믿는 것이었네요..."
09. 구미호의 마지막 선택
동이 트기 직전, 방 안은 이상한 빛으로 가득 찼습니다. 구미호의 몸에서 퍼져 나오는 환한 빛이었지요. 그녀의 마지막 꼬리가 사라지며, 온전한 인간의 모습이 드러났습니다.
"이제 진정 사람이 된 것인가요..."
구미호... 아니, 이제는 한 여인이 된 그녀가 떨리는 손을 들어올려 자신의 얼굴을 매만졌습니다. 더 이상 붉은 눈동자도, 하얀 여우 털도 없었지요. 그저 한 아름다운 여인이 그곳에 서 있을 뿐이었습니다.
"나리... 당신이 제게 준 이 선물을..."
그때였습니다. 멀리서 닭이 울었고, 여인의 얼굴에 고통스러운 기색이 스쳤습니다. 그녀의 몸이 다시 빛나기 시작했지요.
"안 돼요... 이제 막 사람이 되었는데..."
"무슨 일이오? 그대에게 무슨..."
"저는... 선택을 해야 할 것 같아요. 사람이 되는 것과... 당신의 목숨 중에서..."
여인의 모습이 점점 흐려져갔습니다. 마치 아침 안개처럼 희미해져 가는 그녀를 바라보며, 이수린은 그제야 모든 것을 이해했습니다.
"그대가 선택하는 것이 아니오. 이미 선택은 끝났소."
"네?"
"그대는 이미 진정한 사람이 되었소. 나의 목숨을 살려준 그 순간... 그대의 마음은 이미 인간의 마음이었으니까."
여인의 눈에서 맑은 눈물이 흘러내렸습니다. 더 이상 붉은 빛이 없는, 인간의 눈물이었지요. 그녀의 몸은 여명의 빛과 함께 점점 사라져갔습니다.
"고마워요... 나의 마지막이자 진정한 사랑..."
10. 새벽 여명과 함께 사라지는 구미호
여명이 밝아오는 창 밖으로 꽃잎이 흩날렸습니다. 아침 바람을 타고 날아오는 벚꽃 잎이었지요. 이수린은 자신의 앞에서 서서히 사라져가는 여인을 바라보았습니다.
"봄이... 왔나 봐요."
여인의 목소리가 바람처럼 가볍게 떠돌았습니다. 그녀의 모습은 이제 아침 햇살에 비친 안개처럼 희미했지요. 하지만 그녀의 미소만은 그 어느 때보다 선명했습니다.
"그대와 함께 봄을 보고 싶었소..."
이수린의 말에 여인이 고개를 저었습니다. 그녀의 손이 이수린의 뺨을 스치려 했지만, 이미 닿을 수 없는 거리였지요.
"이제 나리께서는 과거에 급제하실 거예요. 그리고 훌륭한 관리가 되셔서... 백성들을 위해 살아가실 거고요."
"그대는 어디로 가는 것이오?"
"저는... 이제 진정한 제 자리로 돌아가요. 천 년을 헤매다 찾은 제 자리로..."
여인의 모습이 점점 투명해져 갔습니다. 그녀의 발치에서부터 봄바람에 꽃잎이 흩날리듯 사라져갔지요. 창문으로 비치는 첫 햇살이 그녀를 통과해 방 안을 비추었습니다.
"나리... 마지막으로 한 가지 부탁을 드려도 될까요?"
"무엇이든 말씀하시오."
"저를... 기억해 주세요. 구미호가 아닌, 당신을 진심으로 사랑했던 한 여인으로..."
여인의 마지막 말이 끝나기도 전에, 그녀의 모습은 완전히 사라졌습니다. 다만 한 송이 붉은 꽃만이 그 자리에 남아 있었지요. 아침 햇살에 빛나는 그 꽃은, 마치 그녀의 마지막 눈물방울 같았습니다.
11. 깨달음을 얻은 선비
아침 햇살이 방 안을 가득 채웠습니다. 이수린은 자리에서 일어나 창가로 걸어갔습니다. 창문 너머로 보이는 한양 거리는 평소와 다름없이 아침을 맞이하고 있었지요.
"마치 꿈만 같구나..."
하지만 방바닥에 놓인 붉은 꽃과 깨어진 거울 조각들이 모든 것이 현실이었음을 말해주고 있었습니다. 이수린은 조심스레 그 꽃을 집어 들었지요.
"글공부에만 매진하여 깨닫지 못했소. 세상에는 책으로는 배울 수 없는 진리가 있다는 것을..."
책상 위에는 밤새 펼쳐져 있던 사서삼경이 놓여있었습니다. 이수린은 책장을 넘기다가 문득 멈추었지요. 그동안 수없이 읽었던 구절들이 이제는 다르게 보였습니다.
"인(仁)이란...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라 했거늘, 그 참뜻을 이제야 알겠소. 사람다움이란 무엇인지, 그대가 가르쳐 주었구려."
이수린은 붉은 꽃을 자신의 책 사이에 조심스레 끼워넣었습니다. 창밖에서 과거시험을 알리는 종소리가 울렸지요.
"이제 가봐야겠소. 그대의 마지막 선물을 헛되이 하지 않도록..."
방을 나서기 전, 이수린은 마지막으로 한 번 뒤를 돌아보았습니다. 아침 햇살 속에서 붉은 꽃잎이 반짝였고, 그 모습이 마치 그녀의 미소처럼 보였지요.
"약속하겠소. 그대를 영원히 기억하리다. 사랑하는 이로, 나의 스승으로..."
12. 후일담과 교훈
세월이 흘러 이수린은 과거에 급제하여 조정의 높은 벼슬에 올랐습니다. 그는 언제나 백성들의 고통에 귀 기울이는 관리였고, 특히 힘없는 이들의 편에 서서 그들을 보살폈지요.
"대감께서는 늘 그렇게 하시지요. 마치 그들의 아픔을 직접 겪어본 것처럼..."
신하들이 그의 선정을 칭찬할 때면, 이수린은 조용히 미소 지을 뿐이었습니다. 그의 서안 위에는 낡은 책 한 권이 놓여 있었고, 그 속에는 오랜 세월이 지났지만 여전히 선명한 붉은 빛을 간직한 꽃 한 송이가 있었지요.
달빛이 유난히 붉게 물드는 밤이면, 이수린은 창가에 앉아 그 책을 펼쳐보곤 했습니다. 꽃잎 사이로 그날의 기억이 흘러나왔지요. 사랑하는 이의 목숨까지 앗아가려 했던 자신의 욕망을 버리고, 진정한 인간의 길을 선택했던 한 구미호의 이야기.
"세상 사람들은 구미호를 두려워하며 피하지요. 하지만 누구나 자신만의 시험을 겪고 있는 것이 아닐까요?"
후일, 이수린은 젊은 관리들을 가르칠 때면 이런 말을 하곤 했습니다. 진정한 인간다움이란 무엇인지, 참된 사랑이란 무엇인지를 이야기하며 그들을 일깨워주었지요.
"오늘도 어디선가 누군가가 자신만의 시험을 치르고 있을 것입니다.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우리의 두려움이 아닌, 이해와 사랑이지요."
이수린이 세상을 떠난 뒤에도, 그의 이야기는 오랫동안 전해져 내려왔습니다. 그리고 붉은 달이 뜨는 밤이면, 사람들은 진정한 사랑을 위해 자신을 바꾸어간 한 구미호의 이야기를 떠올리며 깊은 생각에 잠기곤 했다고 합니다.
엔딩멘트:
"오늘 들려드린 이야기는 욕망과 시험, 그리고 깨달음을 담은 구미호 전설이었습니다.
여러분도 살다보면 구미호의 유혹처럼 달콤한 유혹들을 만나게 될 텐데요.
그때마다 이 이야기를 떠올려보시면 어떨까요? 좋아요와 구독, 알림설정도 잊지 마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