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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피리 소리로 숲속 동물들을 잠재운 소년
강원도 깊은 산골, 부모 잃은 어린 목동 동수가 손수 깎은 대나무 피리를 산속 푸른 바위 위에서 구슬프게 불자, 굶주려 서로 다투던 호랑이며 곰이며 늑대까지 한자리에 엎드려 잠을 청한 신묘한 그날의 이야기 — 천예록(天倪錄)에 잠들어 있던 한 토막 옛 사연을 펼쳐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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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킹멘트
여러분, 제가 한 삼십여 년 전이었지요, 강원도 정선 어느 산골에 들렀다가 백발이 성성하신 노인 한 분을 뵌 적이 있었답니다. 화롯불을 가운데 두고 마주 앉으셨는데, 그분이 어릴 적 외조부께 들었다며 한 가지 옛이야기를 풀어주시더군요. 어찌나 신묘한 사연이었던지, 제가 그날 밤 잠이 안 와 새벽까지 뒤척였답니다. 어린 목동 하나가 피리를 부니, 다투던 산짐승들이 모두 싸움을 멈추고 그 발치에 엎드려 잠이 들었다는 이야기 말이지요. 천예록 갈피 깊숙이 잠들어 있던 그 신비로운 사연, 오늘 여러분 앞에 펼쳐놓아 보겠습니다. 자, 사랑방에 둘러앉으셨다 생각하시고 함께 그 옛 산골로 가보시지요.
※ 1. 산골 마을의 어린 목동
자, 이제 본 이야기로 들어가 봅시다. 때는 숙종 임금 말년이었답니다. 강원도 깊은 산골, 첩첩산중에 둘러싸인 작은 마을 하나가 있었지요. 마을 이름은 굳이 밝히지 않겠습니다. 옛 어른들이 "그 동네는 사람이 한번 들어가면 일주일은 길을 헤매야 다시 나온다" 하셨던, 그런 외진 골짜기였답니다.
이 마을에 한 어린아이가 살고 있었으니, 이름은 동수라 했습니다. 나이는 열한 살. 키는 또래보다 한 뼘쯤 작았고, 얼굴은 햇볕에 까맣게 그을렸는데, 눈만은 어찌나 맑았던지 마치 산골짜기 옹달샘 같았답니다. 사람들이 그 눈을 한 번 들여다본 이는 다들 한마디씩 하셨지요.
"허, 저 어린것의 눈이 어찌 저리 깊은고."
여러분, 이 아이의 사연이 참으로 기구했답니다. 동수가 다섯 살 되던 해, 어머니께서 산고로 동생을 낳다가 그만 돌아가셨답니다. 동생도 함께 가셨지요. 그러고 나서 아버지가 어린 아들 하나 두고 한참을 헤매셨답니다. 약초 캐서 장에 내다 팔며 근근이 살림을 꾸려가셨는데, 동수가 일곱 살 되던 그해 봄날, 산속 깊이 들어가셨다가 그만 호환을 당하시고 말았지요.
그 시절엔 산이 깊은 고을마다 호환이 흔했답니다. 호랑이가 사람 잡아가는 일이 한 해에도 몇 건씩 있었으니까요. 동수 아버지의 시신은 끝내 찾지 못하고, 다 해진 짚신 한 짝과 약초 망태기만 골짜기에서 거두어 왔다 하지요. 그 광경을 지켜본 마을 사람들이 다들 가슴을 쳤답니다.
이렇게 졸지에 천애고아가 된 어린 동수를, 외할머니가 거두셨답니다. 외할머니라고 해야 그때 이미 예순여섯이셨으니, 이 노인네가 손주 하나 키우느라 얼마나 고생을 하셨겠습니까. 호미 들고 밭에 나가시고, 베틀에 앉아 길쌈도 하시고, 봄이면 산나물 캐서 장에 내다 팔며, 그 어린 외손주 하나를 위해 평생 안 쉬어보신 분이지요.
그런데 동수가 또 어찌나 효성이 지극했던지요. 새벽이면 제일 먼저 일어나 우물에 가서 물을 두 동이씩 길어다 놓고, 마당을 쓸고, 부엌에 불을 지폈답니다. 그러고 나서야 외할머니 부르는 소리에 아침상 앞에 앉았지요.
"동수야, 너 또 새벽같이 일어났구나. 할미는 잠이 짧으니 내가 하면 될 것을."
"할머니, 어찌 그러시겠습니까. 할머니 아니면 저는 진작에 객지에서 굶어 죽었을 텐데요."
이런 소리를 어린것이 했답니다. 외할머니는 그저 눈물만 글썽이시다가, 부엌으로 돌아서서 행주치마로 눈가를 훔치곤 하셨지요.
동수가 매일 하는 일이 무어냐 하면, 마을 소들을 모아 산기슭으로 풀을 먹이러 다니는 것이었답니다. 워낙 가난한 동네라 소를 가진 집이 다섯 집뿐이었는데, 그 다섯 집 소를 동수 하나가 다 맡아 끌고 다녔지요. 그 대가로 한 집에서 좁쌀 한 됫박씩, 콩 한 줌씩을 받아오는 것이 외할머니와 동수의 식량 대부분이었답니다. 어린것이 그렇게 다섯 식구의 밥줄을 어깨에 메고 있었던 거지요.
※ 2. 대나무 피리가 태어나다
이제 동수의 피리 이야기를 좀 풀어드려야겠지요. 이 이야기에서 가장 중요한 물건이 바로 그 대나무 피리 한 자루였으니까요.
동수가 여덟 살 되던 어느 가을이었답니다. 외할머니가 산에 죽순 뜯으러 가셨다가, 마침 잘 마른 대나무 한 토막을 베어 오셨답니다.
"동수야, 이걸로 무얼 만들어볼까."
"할머니, 제가 한번 만져봐도 됩니까?"
"그래, 너 손재주가 좋으니 한번 깎아보아라."
이 어린것이 어디서 보고 들었는지, 그날부터 며칠 밤낮을 머리맡에 두고 깎고 다듬더랍니다. 처음엔 거칠게, 다음엔 부드럽게. 작은 칼로 한참 깎고, 사포 대신 거친 돌 조각으로 다듬고. 한밤중에 호롱불 앞에 앉아 졸린 눈을 비벼가며 그것만 붙들고 있더랍니다. 외할머니가 보다 못해 한 말씀 하셨지요.
"동수야, 그만 자거라. 그러다 눈 버린다."
"네, 할머니. 조금만 더 하고 자겠습니다."
이러면서 새벽까지 깎고 또 깎고. 그러다 마침내 손가락 구멍을 일곱 개 뚫은, 한 자 길이 단소 비슷한 피리 한 자루가 완성되었답니다.
처음 그 피리를 입에 댔을 땐 동수도 소리가 잘 안 났답니다. "삐익" 하고 바람 새는 소리만 났지요. 그런데 이 아이가 소 먹이러 들판에 나가서, 종일 소가 풀 뜯는 동안 그 피리만 붙들고 연습을 했답니다. 한 달이 지나니 음이 잡히고, 두 달이 지나니 가락이 흐르고, 반년이 지나니… 아이고, 어찌나 그 소리가 구슬프던지요.
여러분, 제가 여기서 한 가지 짚고 넘어갈 것이 있습니다. 우리나라 옛이야기에 음악으로 사람과 짐승을 다스린 이야기가 더러 있지요. 신라 적 백결 선생이 가난한 살림 위로하려 거문고로 방아소리를 내 부인을 웃기셨고, 만파식적이라 하여 동해 용이 보낸 신비한 피리가 적군을 물리치고 가뭄에 비를 내렸다는 이야기도 삼국유사에 전해 옵니다. 이번 이야기도 그런 우리 옛 음악신앙의 한 자락이라 하겠지요.
각설하고 — 마을 어른들이 산기슭으로 나무하러 갔다가 동수의 피리 소리를 듣고, 다들 발걸음을 멈추셨답니다.
"허허, 저 동수 녀석이 또 부는구나."
"저 소리가 어찌 어린것의 소리인고. 무슨 한이 저리 깊을꼬."
마을 이장 어른이 한번은 동수를 일부러 불러놓고 물으셨답니다.
"동수야, 너 어찌 그리 슬픈 가락만 부는고? 좀 흥겨운 소리도 있지 않으냐."
동수는 한참을 고개 숙이고 있다가 이렇게 대답했답니다.
"이장 어른, 제가 흥겨운 가락을 어디서 들어보았어야 부르지 않겠습니까. 제 마음에 있는 소리를 그대로 내는 것뿐입니다."
이 대답에 이장 어른이 한참을 말씀이 없으셨다 합니다. 저는 이 대목을 옮길 때마다 늘 가슴이 먹먹해집니다. 부모 여의고 외할머니 한 분 의지해 사는 그 어린것의 가슴속에, 무엇이 그토록 깊이 응어리져 있었겠습니까. 그런데 동수의 신묘함은, 그 슬픔을 원망으로 흘려보내지 않고 피리 한 자루에 고이 담아냈다는 것이지요. 그 응어리가 가락이 되어 산을 넘어가니, 사람의 마음을 어루만지고, 마침내는 짐승의 마음까지 어루만지게 됩니다. 자, 그 일이 어찌 일어났는지 들어보시지요.
※ 3. 가뭄과 흉흉한 산속
여러분, 그해는 좀 별난 해였답니다. 가뭄이 어찌나 심했던지 봄부터 비가 한 방울도 내리지 않았다지요. 산골짜기 시냇물도 바닥을 드러내고, 들판 풀숲도 누렇게 시들어갔답니다. 농사 잘못된 것은 두말하면 잔소리. 마을 어른들이 매일 저녁 정자나무 아래 모여 한숨만 푹푹 쉬셨지요.
"하늘이 노하셨는가, 사람이 노하셨는가."
"조상님 묏자리를 잘못 썼나, 어디 굿이라도 한판 해야 하는 거 아닌가."
이렇게 가뭄이 들면 누가 제일 굶주리겠습니까. 사람도 굶지만, 산짐승들이 더 굶주린답니다. 토끼가 풀이 없어 굶고, 사슴도 마른 잎사귀만 갉아 먹고, 그러니 그것들을 잡아먹어야 사는 호랑이며 곰이며 늑대도 굶주리지요. 굶주린 짐승만큼 무서운 게 또 어디 있겠습니까.
그해 여름 들어 마을엔 흉흉한 소문이 돌기 시작했답니다.
"엊그제 김 좌수네 송아지가 호랑이한테 물려갔다더라."
"산 너머 박 진사 댁에선 송아지뿐 아니라 머슴 다리까지 다쳤다지."
"산속에서 곰이며 늑대며 호랑이가 서로 먹이 다툼하는 소리가 밤마다 들린다 안 그러더냐."
여러분, 산속에서 짐승들이 서로 다툰다는 게 흔한 일은 아니랍니다. 보통은 한 골짜기에 큰 짐승이 자리를 잡으면 다른 짐승은 멀찌감치 피해 가는 법이지요. 그런데 그해는 먹이가 워낙 없으니, 짐승들이 자기 영역을 지킬 여유도 없이 한곳에 몰려 죽고살자 싸움을 벌이게 된 거지요.
소를 끌고 들로 다니는 동수는 어찌해야 하겠습니까. 마을 어른들이 다 모여 회의를 하셨답니다.
"이렇게 흉흉한 마당에 그 어린것을 산기슭에 보낼 순 없네."
"하지만 소들이 풀을 못 먹으면 다 굶어 죽지 않겠는가. 우리 식구도 같이 굶지."
"그렇다고 어른이 가자니 농사일도 산같이 쌓였고, 게다가 호환이 더 무섭지 않은가."
한참을 의논하시더니, 결국엔 동수에게 부탁을 하시더랍니다.
"동수야, 너 산기슭 너무 깊이는 들어가지 말고, 평소 가던 곳보다 좀 더 마을 가까운 들에서 풀을 먹여라. 알겠지?"
"네, 어른들. 분부대로 하겠습니다."
그날부터 동수는 마을 어귀 가까운 들판에서 소들을 먹였답니다. 그런데 풀이 가물어 시들었으니 소들이 배가 부르질 않아요. 사흘쯤 그렇게 했더니 소들이 자꾸 산 쪽으로 가려고 발버둥을 치는 겁니다. 동수가 회초리로 아무리 두드려도 말을 안 듣고, 어떤 놈은 외양간으로 돌아와서도 죽 쑤어준 사료를 거들떠도 안 보더랍니다.
동수는 한참 고민을 하더니, 어느 날 새벽 외할머니께 조심스레 말씀을 드렸답니다.
"할머니, 제가 오늘은 좀 멀리 가야겠습니다. 산 너머 그늘진 골짜기에 푸른 풀밭이 하나 있는데, 거기는 그늘져서 지금도 풀이 살아 있을 듯합니다."
외할머니는 깜짝 놀라 며느리 아니, 손주 손목을 덥석 잡으셨지요.
"동수야, 그런 데를 어찌 가려느냐. 산짐승이 들끓는다 안 그러느냐. 안 된다, 못 가."
"할머니, 제가 피리를 가지고 가겠습니다. 이 피리만 있으면 무엇이 두렵겠습니까. 그리고 해 떨어지기 전엔 꼭 돌아오겠습니다."
여러분이라면 그 자리에서 어찌하셨겠습니까. 외할머니는 차마 보내고 싶지 않으셨지만, 외양간 소들이 곧 굶어 죽을 판이고, 그 소들이 죽으면 마을 다섯 집이 다 굶을 판이지요. 결국 떨리는 손으로 주먹밥 두 덩이를 싸서 아이 허리에 매주셨답니다.
"동수야, 해 지기 전에 꼭 돌아오너라. 약속해라."
"네, 할머니. 걱정 마세요."
이렇게 하여 동수는 그 운명의 길을 떠나게 되었답니다. 어찌 보면 그날 골짜기로 떠난 게 다 우연 같지요. 그러나 옛 어른들 말씀에, 천지간에 우연이란 없는 법이라 하지 않으셨습니까.
※ 4. 푸른 골짜기로 떠나다
자, 동수가 소 다섯 마리를 끌고 산으로 들어가는 모습을 한번 그려보세요.
해가 갓 떠올라 산봉우리가 발그스름하게 물든 새벽이었답니다. 동수는 외할머니가 싸주신 주먹밥 두 덩이를 보자기에 싸 허리에 차고, 대나무 피리는 옷섶 속에 단단히 품고, 손에는 길쭉한 회초리를 들고 길을 나섰지요. 누런 황소 다섯 마리가 어슬렁어슬렁 그 뒤를 따랐답니다. 외할머니는 사립문 앞에 서서, 어린 손주 등이 산모퉁이로 사라질 때까지 한참을 바라보고 계셨다 하지요.
산길을 한 시진가량 걸었을까요. 동수가 평소에도 가본 적 있는 큰 바위 두 개가 마주 보고 선 곳을 지나, 거기서 또 한참을 더 들어갔답니다. 산 깊은 쪽으로 들어갈수록 길이 좁아지고, 나무가 우거지고, 그러더니 새소리도 점점 줄어들더랍니다.
여러분, 산속에서 새소리가 줄어든다는 게 무슨 신호이겠습니까? 그게 바로 산속 깊은 데 무언가 큰 짐승이 자리 잡고 있다는 신호랍니다. 새들이 그 기운을 먼저 알고 멀리 피하는 거지요. 동수도 그걸 어렴풋이 알았던지, 발걸음이 점점 조심스러워졌답니다.
마침내 도착한 그 푸른 골짜기. 과연 외할머니께 말씀드린 대로, 그늘이 깊어 풀이 아직 푸르렀답니다. 시냇물도 한 줄기 졸졸 흘렀고요. 동수의 얼굴이 환하게 펴졌지요.
"옳거니, 너희들 여기서 실컷 먹어라."
소들을 풀어놓으니 이놈들이 신이 나서 머리를 박고 풀을 뜯기 시작했지요. 황소들이 풀 뜯는 소리가 사르륵 사르륵, 마치 비단치마 끄는 소리처럼 퍼졌답니다. 동수는 그 옆 큰 바위 위에 올라앉아, 이제 한숨 돌리는 거지요.
그런데 말이지요. 동수가 막 주먹밥을 꺼내 한 입 베어 물려는 그때, 산 너머 깊은 곳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하더랍니다.
"크헝!"
"우우우우우!"
"꺼억꺽! 꺼억꺽!"
가만히 들어보니, 호랑이 우는 소리, 늑대 우짖는 소리, 곰 으르렁대는 소리, 그리고 어디선가 노루며 사슴이 비명을 지르는 소리까지... 그 모든 소리가 한꺼번에 뒤섞여 들려오는 겁니다. 동수가 입에 물었던 주먹밥이 목구멍에 턱 막혔답니다.
여러분, 산속에서 짐승들이 한꺼번에 우는 일이 있겠습니까? 보통은 한 짐승이 한 자리를 차지하면 다른 짐승은 멀찌감치 피해 가는 법이라 하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그날은 어찌 된 일인지 짐승들이 한곳에 다 모여 있었답니다. 가뭄으로 먹이가 없으니 마지막 남은 풀밭과 시냇물 자리를 두고 서로 죽고살자 다투고 있었던 거지요.
소들이 먼저 그 소리를 알아챘답니다. 풀을 뜯다 말고 귀를 쫑긋 세우더니, 우우 하며 동수 곁으로 모여드는 겁니다. 한 놈은 엉덩이를 동수 등 뒤에 바짝 갖다 댔고, 한 놈은 머리를 동수 무릎에 묻으려 했답니다. 무서워서 어린 주인을 의지하려 한 거지요.
"이놈들아, 무서우냐? 무엇이 그리 무서워."
동수가 소들의 등을 쓰다듬어 주는데, 그 짐승 우는 소리가 점점 더 가까워지더랍니다. 짐승들 다투는 소리가 산을 타고 이쪽으로 굴러내려 오고 있었던 게지요.
가만히 보니 멀지 않은 산등성이 너머에서, 풀숲이 와락와락 흔들리고 있었답니다. 무언가 큰 짐승들이 서로 밀치고 부딪히며 이쪽으로 오고 있는 거지요.
동수의 가슴이 쿵쾅쿵쾅 뛰었답니다. 어른도 아니고, 사냥꾼도 아니고, 겨우 열한 살짜리 어린 목동이 그 소리를 듣고 무엇이 두렵지 않았겠습니까. 다리가 후들후들 떨려 바위에서 내려오지도 못했답니다.
그런데 이 어린것이, 한참을 떨다가 어찌 된 일인지 자세를 슬그머니 가다듬더랍니다. 그러더니 옷섶에서 그 대나무 피리를 꺼내 들었답니다.
'할머니, 저 좀 봐주세요. 무서워도 한번 불어보겠습니다. 이 피리가 저를 살려줄 거라고… 제 마음이 그리 말하네요.'
이렇게 마음속으로 외할머니를 한번 부르고는, 떨리는 두 손으로 피리를 입에 댔지요.
자, 그다음에 일어난 일이 바로 이 이야기의 핵심 대목입니다. 천예록을 펴신 임방 어른께서도 이 대목을 옮기시며 "참으로 기이하여 함부로 말할 수 없다" 하셨다지요.
※ 5. 바위 위의 첫 가락
자, 이제 그 한 곡조가 어찌 흘러 나갔는지 들려드려야겠지요.
동수가 떨리는 손으로 피리를 입에 대고, 가만히 한 번 숨을 깊이 들이마셨답니다. 그리고는 입술을 살짝 적신 후, 조심스레 첫 음을 불어보았지요.
"휘이~"
처음엔 가는 소리가 났답니다. 너무 떨려서 음이 갈라졌지요. 그러나 동수가 한 번 두 번 깊은 숨을 몰아쉬더니, 점점 음이 안정되더랍니다. 여러분, 어린것이 그 자리에서 무슨 곡조를 불었겠습니까? 어디서 배운 가락도 아니고, 그저 평생 가슴에 쌓인 그 응어리, 그 한, 그 쓸쓸함을 그대로 피리 끝으로 흘려보냈을 따름이지요.
다섯 살 그날, 어머니 산소 앞에서 외할머니 치맛자락에 매달려 울던 그 마음. 일곱 살 그해 봄, 골짜기에서 거두어 온 아버지의 해진 짚신 한 짝 앞에서 무너진 그 마음. 그리고 새벽이면 일어나 외할머니 머리맡에 물그릇 갖다 놓고, 또 들로 산으로 소 끌고 다니던 그 외로운 어린 가슴. 그 모든 것이 한 줄기 피리 소리에 실려 산속을 떠내려가기 시작했답니다.
"피이~ 피르릉~ 피리리~"
가락이 어찌나 슬프던지요. 하늘에 흘러가던 흰 구름이 가다 멈췄다는 건 좀 과장이고, 적어도 시냇물이 그 소리를 따라 한 번 굽이쳤다고는 할 만했지요. 산 위 솔잎들이 그 소리에 한 번 부르르 떨었다 합니다.
소들이 먼저 변했답니다. 무서워서 동수 발치에 엉기던 다섯 마리 황소가, 가락이 흐르기 시작하니 어쩐 일인지 마음이 가라앉더랍니다. 머리를 풀숲에 천천히 드리우더니, 순한 눈을 슬며시 내리감는 거지요. 한 마리, 두 마리… 어느새 다섯 마리 모두 풀밭에 다리를 접고 엎드렸답니다. 마치 어미 품에 안긴 송아지처럼 말이지요.
그런데 더 놀라운 일은 그다음에 일어났답니다. 산등성이 너머에서 우당탕탕 들려오던 그 짐승들 다투는 소리가, 어찌 된 영문인지 점점 잦아드는 겁니다.
"크헝!" 하던 호랑이 소리가 "...크엉..." 하더니 차츰 멎고,
"우우우~" 하던 늑대 소리가 "...우우..." 하더니 뚝 끊기고,
"꺼억꺼억" 하던 곰의 으르렁댐도 "...꺼윽..." 하더니 사라지더랍니다.
산 전체가 그 피리 소리 한 줄기에 귀를 기울이기 시작한 거지요.
여러분, 그때 동수는 무엇을 보고 있었을까요? 동수는 두 눈을 꼭 감고 있었답니다. 무서운 마음을 잊으려 그저 피리에만 정신을 모으고 있었지요. 그러니 산속이 어찌 변하고 있는지, 자기가 무슨 신묘한 일을 일으키고 있는지, 도무지 모르고 있었던 겁니다.
가락은 점점 깊어졌답니다. 처음엔 슬픔이었고, 다음엔 그리움이었고, 그다음엔 어찌 된 일인지 평화 같은 것이 그 가락 끝에 묻어 나오기 시작하더랍니다. 부모를 여읜 어린것의 한이, 외할머니의 노쇠함을 마음 졸이며 지켜보던 그 효심이, 그리고 어둠 속에서도 새벽을 기다리던 그 어린 가슴의 고요함이… 모두 한 줄기 피리 소리가 되어 산을 적셨지요.
자, 이제부터가 진짜 기막힌 대목입니다. 그 산짐승들이 어떤 모습으로 동수 앞에 나타났는지, 들어보시지요.
※ 6. 짐승들이 발치에 엎드리다
여러분, 이 대목은 제가 천예록을 처음 펼쳤을 때 손이 부르르 떨리던 부분입니다. 임방 어른께서 글로 옮기시며 "차마 믿기 어려우나 듣고 또 들어 거짓이 아니더라" 하신 그 장면이지요.
피리 소리가 한참 흐른 뒤, 산등성이 풀숲이 와삭 하고 흔들리더랍니다. 동수는 눈을 감고 있었으니 그 광경을 보지 못했지요. 그런데 그 풀숲을 헤치고 무엇이 나타났느냐 하면… 큰 호랑이 한 마리였답니다.
이마에 흰 점이 박힌 늙은 호랑이. 이놈이 그 골짜기의 우두머리였던 모양입니다. 평소 같으면 두 눈을 부릅뜨고 어흥 하며 달려들었을 그 짐승이, 어쩐 일인지 발걸음이 사뿐사뿐하더랍니다. 마치 잠든 새끼를 깨우지 않으려 조심하는 어미처럼 말이지요.
호랑이는 동수가 앉아 있는 바위 앞으로 한 발짝, 두 발짝 다가오더니, 슬며시 앞다리를 굽혀 풀밭에 털썩 엎드렸답니다. 그러고는 두 눈을 스르륵 감는 겁니다.
여러분, 호랑이가 어린아이 발치에 엎드려 잠을 청하다니. 이게 도대체 어디서 들어본 광경입니까. 그런데 일이 거기서 끝난 게 아니지요.
호랑이 뒤로 또 풀숲이 흔들리더랍니다. 이번엔 큰 흑곰 한 마리. 검은 털이 윤기 흐르는 큰 곰이 앞발을 늘어뜨리며 어슬렁어슬렁 다가오더니, 호랑이 옆으로 가서 털썩 주저앉는 겁니다. 그러더니 두 눈을 스르륵 감지요.
다음엔 회색 늑대 다섯 마리. 평소 무리 지어 다니며 송아지를 노리던 그 사나운 짐승들이, 한 마리씩 한 마리씩 줄지어 들어오더니, 호랑이와 곰 사이 빈자리에 차곡차곡 엎드리더랍니다.
'이놈들아, 너희가 어찌 같이 누워 있느냐.'
동수가 그 광경을 봤더라면 마음속으로 이렇게 외쳤을 텐데, 동수는 여전히 두 눈을 감고 피리만 불고 있었지요.
다음엔 노루며 사슴이며 산토끼들. 평소엔 호랑이 그림자만 봐도 줄행랑을 치던 그 가녀린 짐승들이, 어쩐 일인지 호랑이 곁으로 사뿐사뿐 다가가서 자기 자리를 잡는 겁니다. 사슴 한 마리는 호랑이 옆구리에 살짝 몸을 기댔고, 어린 산토끼는 늑대 발끝에 동그랗게 몸을 말아 잠을 청하더랍니다.
여러분, 이 광경 한번 머리에 그려보세요. 호랑이, 곰, 늑대, 사슴, 노루, 산토끼… 평소 같으면 천 년이 지나도 한자리에 모일 수 없는 짐승들이 한 풀밭에 동그랗게 누워 있는 거지요. 그것도 어린 목동 하나의 피리 소리 한 줄기에 끌려와서 말입니다.
소 다섯 마리는 그 한가운데, 동수 발치 가장 가까이 누워 있었답니다. 마치 어린 주인을 지키는 호위 무사처럼 말이지요. 그리고 그 둘레로 산짐승들이 둥글게 둘러앉아, 모두가 두 눈을 감고 평화로이 숨을 고르고 있었답니다.
피리 소리는 멈추지 않았답니다. 동수는 자신의 가슴속 응어리가 한 토막 한 토막 풀려 나가는 것을 느끼며, 그저 마음 가는 대로 가락을 이어갔지요. 슬픔에서 그리움으로, 그리움에서 평화로, 평화에서 마침내… 잠으로.
산짐승들의 숨소리가 점점 고요해지더랍니다. 호랑이의 으르렁거림은 작은 콧소리로 변했고, 늑대의 사나움은 강아지의 잠꼬대처럼 부드러워졌고, 곰의 무거운 호흡은 어린아이의 숨결처럼 잔잔해졌답니다.
천예록 이 대목에 임방 어른께서 한 줄을 더 적어두셨지요. "그 짐승들의 다툼이 사라진 것은 한 시진이 넘었으되, 누구 하나 깨어나는 자가 없었더라." 한 시진이라 함은 두 시간이지요. 그 두 시간 동안, 강원도 깊은 산속 푸른 골짜기는 천지창조 이래 처음으로 다툼 없는 자리가 되었던 거랍니다.
자, 그러는 동안 어린 동수의 가슴엔 무엇이 흘렀을까요. 그리고 마을에서는 누가 그 광경을 보러 왔을까요. 그것이 이 이야기의 마지막 자락입니다.
※ 7. 달이 뜨고, 전설이 되다
여러분, 어린 동수가 그렇게 한참을 피리를 불었답니다. 얼마나 오래 불었는지는 동수 자신도 몰랐지요. 다만 어느 순간, 입술이 마르고 손가락에 힘이 빠지면서 가락이 자연스레 잦아들었답니다. 동수가 천천히 피리에서 입을 떼고 두 눈을 슬며시 떴을 때…
여러분, 그 광경에 어린것이 무엇을 느꼈겠습니까. 사방에 산짐승들이 동그랗게 둘러앉아 잠들어 있는 그 광경. 호랑이의 흰 이마, 곰의 까만 등, 늑대의 회색 목덜미, 사슴의 갈색 옆구리가 다 한자리에 잠들어 있고, 산봉우리 위로는 어느새 둥근 보름달이 동실 떠올라 있더랍니다. 달빛이 그 잠든 짐승들 위로 비단처럼 깔려 있었지요.
동수는 깜짝 놀랐지만, 어쩐 일인지 무서운 마음은 들지 않더랍니다. 짐승들의 숨소리가 마치 어머니 품에서 자는 어린아이의 숨결 같았고, 달빛이 그 모두를 따스하게 덮어주고 있었으니까요.
'어머니… 아버지… 저를 보고 계시지요?'
동수의 두 눈에서 눈물이 한 방울 또르르 흘러내렸답니다. 평생 외할머니 앞에선 한 번도 운 적 없던 어린것이, 그 달빛 아래서 비로소 마음껏 울 수 있었던 게지요. 어쩌면 동수의 그 피리 소리가 산짐승들만 잠재운 게 아니라, 어린것 자신의 가슴속 그 깊은 한까지 함께 잠재워준 게 아닐까 — 저는 늘 그렇게 생각합니다.
자, 한편 마을에서는 어찌 되었겠습니까. 해가 떨어지도록 손주가 안 돌아오자 외할머니가 마을 어른들에게 달려가 도움을 청하셨답니다.
"어른들, 우리 동수가 안 옵니다. 산속 깊이 들어갔는데, 짐승 우는 소리가 그리 흉흉했답디다…"
마을 장정 너덧 분이 횃불을 들고 산을 오르셨지요. 그분들이 한참을 헤매다 그 푸른 골짜기에 다다랐을 때, 무엇을 보셨겠습니까.
달빛 아래, 어린 동수가 바위 위에 단정히 앉아 있고, 그 발치에 호랑이며 곰이며 늑대며 사슴이며 산짐승들이 다 같이 잠들어 있는 그 광경. 어른들이 그 자리에 얼어붙어 한참을 움직이지 못하셨답니다. 횃불 든 손이 부들부들 떨려 불빛이 흔들렸다 하지요.
이장 어른이 떨리는 목소리로 동수를 부르셨답니다.
"동수야… 동수야…"
동수가 천천히 일어나, 잠든 짐승들을 깨우지 않으려 사뿐사뿐 바위에서 내려왔답니다. 그러고는 소 다섯 마리만 조용히 끌고 그 골짜기를 빠져나왔지요. 신기한 것은, 그 짐승들 누구 하나 깨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마치 천 년의 잠에 든 듯, 모두가 깊이 잠들어 있었답니다.
마을로 돌아오는 길, 어른들이 어린 동수에게 물으셨지요.
"동수야, 너 어찌 그리 했느냐. 어떻게 한 게냐."
동수는 그저 고개를 갸웃거리며 이렇게 답했답니다.
"저는 그저 마음을 풀어 피리를 불었을 뿐입니다. 다른 건 모릅니다."
이 한마디에 마을 어른들이 모두 말을 잃으셨다 합니다.
여러분, 이 이야기가 그 마을 노인들 입에서 입으로 전해 내려와, 마침내 천예록 임방 어른의 붓끝에까지 닿게 된 거지요. 동수가 그 후에 어찌 살았는지, 정사에는 적혀 있지 않습니다. 다만 그 마을 사람들이 두고두고 말씀하시기를, "동수의 피리 소리가 들리는 골짜기엔 한 해 동안 호환이 없었다" 하셨다지요. 그리고 더 신기한 것은 그해 가뭄이 얼마 안 가 풀렸다는 것입니다. 단비가 사흘 밤낮 내려 시냇물을 다시 채웠다 하지요.
저는 이 이야기를 마칠 때마다 늘 한 자락 가락이 귓전에 맴도는 듯합니다. 어딘가 깊은 산속에서 어린 목동 하나가 지금도 피리를 불고 있는 듯한, 그런 가락 말이지요.
유튜브 엔딩멘트
여러분, 오늘 동수의 피리 이야기 어떠셨는지요. 저는 이 이야기를 옮길 때마다 늘 한 가지 생각이 듭니다. 사람의 마음이 깊은 데까지 가라앉으면, 짐승의 마음도 자연도 그 가락 한 줄기에 흔들린다는 것 — 이것이 우리 옛 어른들이 두고두고 일러주신 말씀이 아니겠습니까. 자, 다음 시간에 천사야담에서 들려드릴 이야기는 또 한 자락 신묘한 사연입니다. 한 가난한 효녀가 병든 어머니의 약을 구하러 가는 길, 호랑이 등에 업혀 시오리 산길을 단숨에 다녀온 그 달밤의 이야기 — 다음 시간에 사랑방에서 또 뵙겠습니다. 오늘 이 늙은이의 이야기 좋게 들으셨다면, 구독과 좋아요로 응원해 주십시오. 그럼 또 뵙지요.
썸네일 프롬프트 (영어, 16:9, 실사, no text)
Cinematic 16:9 photorealistic atmospheric scene set in a moonlit deep mountain valley in Joseon-era Korea. A young Korean boy around 11 years old in traditional rough hemp peasant clothing sits cross-legged on a large mossy granite boulder, holding a slender bamboo flute to his lips with both hands, his eyes gently closed in deep concentration, his small face peaceful and serene. Around the base of the rock and across a small grass clearing, wild forest animals lie curled and sleeping in extraordinary harmony — a large old tiger with a distinctive white forehead mark, a black Asiatic bear, several grey wolves, gentle deer with antlers, a doe, and small wild rabbits, all peacefully asleep with visible gentle breathing. Five quiet brown oxen lie nearest to the boy as if guarding him. A full bright moon hangs over the misty mountain ridges in the background, casting silver moonlight across the entire scene. Korean traditional pine trees frame the edges, soft mountain mist drifts through the valley, ethereal atmosphere of mystical peace and ancient folklore. Warm golden flute glow contrasting with cool blue moonlight. Ultra-detailed, photorealistic, cinematic depth of field, no text, no logos, no identifiable real peopl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