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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한숨소리 듣고 찾아온 도깨비
부제
복을 부르는 한숨과 마음을 훔치는 검은 항아리
태그 15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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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킹멘트
깊은 밤, 가난한 과부가 내쉰 한숨을 듣고 도깨비가 찾아왔다. 그런데 도깨비는 금은보화 대신 그녀의 한숨을 사겠다고 했다. 한숨 한 번에 엽전 한 냥. 거래가 시작되자 마을 사람들은 웃음을 되찾았지만, 산속에서는 사람들의 마음을 삼키는 검은 항아리가 깨어나고 있었다.
※ 1: 빚에 시달리던 윤서의 한숨을 듣고
달빛조차 얼어붙은 듯 희미한 겨울밤이었다. 산자락 아래 작은 마을에는 눈이 소복이 쌓여 있었고, 사람들은 일찌감치 문을 걸어 잠근 채 아궁이 앞에 몸을 웅크리고 있었다.
마을 끝자락의 허름한 초가에서는 아직도 희미한 등잔불이 흔들렸다. 방 안에 앉은 윤서는 낡은 저고리를 기우다 말고 바늘을 내려놓았다. 방 한쪽에서는 어린 아들 동이가 얇은 이불을 덮은 채 잠들어 있었다.
윤서는 쌀독 뚜껑을 열었다. 바닥에는 쌀알 세 톨이 마치 서로 의지하듯 붙어 있었다. 뒤주를 살펴보고 찬장까지 뒤졌지만 먹을 만한 것이라곤 꽁꽁 언 무 조각 하나뿐이었다.
내일 아침이면 장돌뱅이 마칠수가 빚을 받으러 올 터였다. 갚지 못하면 집을 가져가겠다는 말도 이미 들은 뒤였다.
'이 집까지 빼앗기면 동이와 어디로 가야 하나.'
윤서는 문풍지 너머로 스며드는 바람을 막아 보려 손바닥을 가져다 댔다. 그러나 찬 기운은 손가락 사이로 파고들었다. 잠든 동이가 가볍게 기침하자 윤서는 서둘러 자신의 겉옷을 벗어 아이 위에 덮어 주었다.
“조금만 견디자. 어미가 어떻게든 해 볼 테니.”
대답할 리 없는 아이를 바라보던 윤서의 입에서 길고 깊은 한숨이 흘러나왔다.
후우우.
그 한숨은 방 안을 한 바퀴 돈 뒤 문풍지의 작은 구멍을 빠져나갔다. 마당을 건너고 돌담을 넘어 눈 덮인 산길을 타고 올라가더니, 오래된 느티나무의 빈 구멍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잠시 뒤 느티나무가 부르르 떨렸다.
쿵.
나무 뒤편에서 커다란 그림자가 떨어졌다. 그림자의 주인은 덥수룩한 머리에 누더기 도포를 걸치고 있었다. 머리 위에는 손가락만 한 뿔이 두 개 솟아 있었고, 허리에는 작은 표주박들이 주렁주렁 매달려 있었다.
그는 코를 벌름거리며 공기 중에 남은 한숨 냄새를 맡았다.
“이건 굶주린 한숨인데. 빚 걱정도 섞였고, 자식 걱정은 두 숟갈이나 들었군.”
도깨비 복만은 혀끝을 날름거리더니 눈을 반짝였다.
“게다가 남을 원망하는 맛이 하나도 없어. 아주 귀한 한숨이야.”
복만은 윤서의 초가를 향해 성큼성큼 내려갔다. 그의 발이 닿을 때마다 눈밭에는 사람 발자국 대신 둥근 불꽃 자국이 찍혔다가 금세 사라졌다.
윤서가 다시 바느질을 시작하려던 순간, 대문이 세 번 울렸다.
쿵. 쿵. 쿵.
“이 밤중에 누구십니까?”
“지나가던 장사꾼이오.”
“무슨 장사꾼이 대문을 주먹으로 부숩니까?”
“손가락으로 두드린 건데?”
윤서는 섬뜩한 기분에 부지깽이를 집어 들었다. 대문을 열지 않은 채 틈으로 밖을 내다보자, 웬 거구의 사내가 눈을 맞으며 서 있었다. 더 수상한 것은 사내의 머리 위였다. 눈 속에서도 작은 뿔 두 개가 또렷하게 보였다.
“도, 도깨비!”
윤서가 뒷걸음질 치자 복만은 다급히 손을 저었다.
“잡아먹으러 온 것 아니니 소리부터 지르지 마시오. 난 입이 짧아서 사람은 안 먹소.”
“그럼 왜 찾아왔습니까?”
“방금 그 한숨, 내게 파시오.”
윤서는 부지깽이를 치켜든 채 눈을 깜빡였다.
“무엇을 팔라고요?”
“후우 하고 내쉰 그것 말이오. 아주 잘 익었던데.”
“한숨을 어떻게 팝니까?”
“내쉬면 내가 담고, 담은 만큼 값을 치르면 되지.”
복만은 허리춤에서 손바닥만 한 푸른 표주박을 꺼냈다. 표주박 마개에는 한숨 수집용이라는 삐뚤빼뚤한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한 번에 엽전 한 냥. 어떻소?”
엽전 한 냥이면 쌀 한 말을 사고도 돈이 남았다. 그러나 세상에 공짜가 없다는 것을 윤서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한숨을 가져가면 제게 무슨 일이 생깁니까?”
“마음이 조금 가벼워질 거요.”
“수명이 줄거나 머리카락이 빠지지는 않고요?”
“그건 나도 사절이오. 수명은 무거워서 들고 다닐 수도 없고, 머리카락은 방에 너무 많이 떨어져 있소.”
윤서는 무심코 복만의 덥수룩한 머리를 바라보았다. 그 순간 머리카락 사이에서 말린 나뭇잎 한 장이 떨어졌다. 복만은 태연히 그것을 주워 다시 머리에 꽂았다.
“그래도 도깨비와 거래하는 건 두렵습니다.”
“사람에게 빚지는 것보다는 안전할 텐데.”
정곡을 찔린 윤서의 표정이 굳었다. 복만은 초가를 둘러본 뒤 목소리를 낮췄다.
“내일 빚쟁이가 온다지? 그자가 집을 빼앗으면 아이와 눈밭에 나앉을 테고.”
“그걸 어떻게 알았습니까?”
“한숨에는 사연이 담기니까. 귀만 좋으면 다 들리오.”
윤서는 방 안에서 자는 동이를 돌아보았다. 잠든 아이의 볼은 추위로 발갛게 얼어 있었다. 잠시 망설이던 윤서는 부지깽이를 내려놓았다.
“정말 한 번에 한 냥입니까?”
복만의 입꼬리가 귀 가까이 올라갔다.
“거래하겠소?”
윤서가 조심스럽게 고개를 끄덕이자 복만은 표주박의 마개를 열었다. 안쪽에서 푸른빛이 새어 나와 두 사람의 얼굴을 비추었다.
“그럼 근심을 떠올리고 길게 내쉬시오.”
윤서는 빚 문서와 빈 쌀독, 기침하는 동이를 차례로 생각했다. 가슴 깊은 곳에서 무거운 기운이 올라왔다.
후우우.
푸른 연기처럼 변한 한숨이 표주박 안으로 빨려 들어갔다. 표주박이 꿀꺽 소리를 내더니 배가 통통하게 부풀었다.
복만은 만족스럽게 마개를 닫고 엽전 꾸러미를 건넸다.
“정확히 한 냥이오.”
윤서는 떨리는 손으로 엽전을 세었다. 가짜도 아니었고 도깨비불로 변하지도 않았다. 그런데 돈을 모두 세고 나자, 이상하게도 가슴을 짓누르던 걱정이 조금 흐릿해졌다.
'어째서 빚이 별것 아닌 것처럼 느껴지지?'
바로 그때 복만이 표주박을 들고 빙글 돌았다. 안에 갇힌 한숨이 출렁일 때마다 희미한 울음소리가 새어 나왔다.
“아주 좋아. 이만큼 진한 한숨이면 열 해는 거뜬하겠어.”
윤서가 그의 소매를 붙잡았다.
“무엇이 열 해나 거뜬하다는 겁니까?”
복만은 아차 싶은 표정을 지었다. 그는 표주박을 등 뒤로 감추며 어색하게 웃었다.
“아무것도 아니오. 그럼 다음 한숨이 생기면 부르시오.”
“어떻게 부릅니까?”
“한숨을 세 번 연달아 쉬면 되오.”
“그렇게 쉬다가 제가 먼저 쓰러지겠습니다.”
“그럼 두 번 반만 쉬시오.”
복만은 마당을 가로질러 대문으로 향했다. 윤서는 손에 든 엽전을 내려다보다가 문득 이상한 생각이 들어 그를 불러 세웠다.
“잠깐만요. 제 한숨을 어디에 쓰려고 사 가는 겁니까?”
복만의 걸음이 멈췄다. 웃고 있던 그의 얼굴에서 장난기가 사라졌다.
“그건 모르는 편이 좋소.”
“제게서 가져간 것이니 알아야겠습니다.”
“오늘 밤은 문을 단단히 잠그시오. 무슨 소리가 들려도 밖을 내다보지 말고.”
“무슨 소리라니요?”
복만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어두운 산 쪽을 바라보았다. 그 순간 산속 깊은 곳에서 둔탁한 북소리 같은 것이 울렸다.
둥.
복만의 허리춤에 매달린 표주박들이 한꺼번에 흔들렸다. 그는 두려운 눈으로 산을 바라보다가 윤서에게 돌아섰다.
“특히 누군가 당신 목소리로 문을 열어 달라고 해도 절대 열지 마시오.”
그 말을 끝으로 복만은 파란 불꽃이 되어 사라졌다.
윤서는 황급히 대문을 걸어 잠갔다. 방으로 들어가려던 찰나, 담장 너머에서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눈을 밟는 발소리가 마당 주위를 천천히 돌기 시작했다.
사박. 사박. 사박.
잠시 후 대문 밖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문 좀 열어 주시오.”
방금 전까지 복만이 서 있던 자리였다. 그러나 들려오는 목소리는 복만의 것이 아니었다.
틀림없는 윤서 자신의 목소리였다.
“내 한숨을 돌려주시오.”
※ 2: 한숨을 엽전으로 바꾸는 거래가 시작되고
윤서는 입을 틀어막고 대문을 바라보았다. 문밖에서는 자신의 목소리가 끈질기게 문을 열어 달라고 속삭였다.
“추워서 견딜 수가 없소.”
사박사박하던 발소리가 대문 앞에서 멎었다.
“나는 당신이 버린 마음이오. 어서 들여보내 주시오.”
문고리가 천천히 위아래로 움직였다. 윤서는 부지깽이를 움켜쥐고 방으로 물러났다. 등잔불이 바람도 없는데 가늘게 흔들렸다.
잠에서 깬 동이가 눈을 비비며 몸을 일으켰다.
“어머니, 밖에 누가 왔어요?”
“아무도 아니다. 바람이 장난을 치는 게야.”
“그런데 어머니 목소리였는데요?”
윤서가 대답하지 못하자 문밖의 목소리가 갑자기 킥킥 웃었다. 웃음은 담장을 한 바퀴 돌더니 지붕 위로 올라갔다. 기왓장 대신 얹어 둔 짚단이 무언가의 무게에 눌려 우지끈거렸다.
윤서는 동이를 끌어안고 밤을 꼬박 새웠다.
새벽닭이 울자 지붕 위의 기척은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마당에는 아무런 발자국도 남아 있지 않았다. 다만 대문 한가운데 검은 손자국이 찍혀 있었다.
날이 밝자 빚쟁이 마칠수가 장정 둘을 거느리고 찾아왔다. 족제비 털을 두른 그는 집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빚 문서를 흔들었다.
“약속한 날이 되었소. 돈이 없으면 이 집의 기둥이라도 뽑아 가야겠는데.”
윤서는 전날 받은 엽전을 상 위에 올려놓았다.
“여기 원금과 이자입니다.”
마칠수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는 엽전을 하나하나 깨물어 보고 바닥에 튕겨 보았다. 진짜 돈이라는 사실을 확인한 뒤에는 오히려 얼굴을 찌푸렸다.
“어디서 이런 돈이 생겼소?”
“제가 갚아야 할 돈만 받으시면 되지, 그것까지 말씀드릴 필요는 없을 듯합니다.”
“혹시 훔친 돈이라면 나까지 곤란해지오.”
“도깨비에게 한숨을 팔았습니다.”
윤서는 밤새 겪은 일 때문에 정신이 흐릿한 나머지 사실대로 말해 버렸다. 그러자 마칠수와 장정들이 배를 잡고 웃었다.
“한숨을 팔아? 내가 살다 살다 별 핑계를 다 듣는군.”
그들은 빚 문서를 던져 주고 돌아갔다. 윤서는 문서가 완전히 타서 재가 될 때까지 아궁이 앞을 지켰다.
그날 오후, 윤서는 남은 돈으로 쌀과 약재를 샀다. 따뜻한 밥을 먹고 약까지 마신 동이의 얼굴에는 금세 생기가 돌았다.
“어머니, 오늘은 좋은 날이지요?”
“그래. 아주 좋은 날이다.”
그러나 윤서는 이상했다. 빚을 모두 갚았으니 기뻐야 하는데 마음이 텅 빈 것 같았다. 지난밤의 두려움을 떠올려도 무섭지 않았고, 어려운 고비를 넘겼다고 생각해도 기쁘지 않았다.
감정이 담겨야 할 자리에 마른 솜이 들어찬 느낌이었다.
그날 밤, 지붕이 무너질 만큼 눈이 쏟아졌다. 윤서는 장작이 떨어진 것을 확인하고 걱정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가슴속에서는 아무런 한숨도 올라오지 않았다.
'한숨을 가져간 게 아니라 걱정하는 마음까지 떼어 간 건가?'
동이가 기침할 때도 윤서는 불안해지지 않았다. 머리로는 아이를 돌봐야 한다는 걸 알았으나 가슴이 따라오지 않았다. 그 사실이 두려워야 했지만 두려움조차 생기지 않았다.
윤서는 마당으로 나가 산을 향해 일부러 한숨을 쉬었다.
후우. 후우. 후.
마지막 반쪽 한숨이 끝나기도 전에 장독대 뒤에서 복만이 솟아올랐다. 이번에는 머리에 닭 둥지를 뒤집어쓰고 있었다. 그 안에서 놀란 암탉 한 마리가 튀어나와 마당을 달렸다.
“누가 도깨비를 부를 때는 낮에 부르는 법도 좀 배우시오.”
“제 한숨을 돌려주세요.”
복만의 얼굴에서 웃음이 사라졌다.
“무슨 일이 있었소?”
“어젯밤 제 목소리를 흉내 내는 것이 찾아왔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아무리 걱정스러운 일이 생겨도 걱정이 되지 않습니다.”
복만은 윤서의 눈꺼풀을 들춰 보고 귀 뒤의 냄새를 맡더니 혀를 찼다.
“한숨 한 번으로 이럴 리가 없는데.”
“분명히 당신이 가져간 뒤부터 이랬습니다.”
“내가 가져간 건 밖으로 나온 한숨뿐이오. 마음의 뿌리는 건드리지 않았소.”
“그럼 제게 왜 이런 일이 생겼습니까?”
복만은 대답 대신 푸른 표주박을 꺼냈다. 그런데 전날 통통하게 부풀었던 표주박은 쭈그러져 있었다. 복만이 마개를 열어 뒤집었지만 안에서는 잿빛 먼지만 흘러나왔다.
“없어졌어.”
“무엇이요?”
“당신의 한숨이 도둑맞았소.”
윤서는 어이가 없어 헛웃음을 흘렸다.
“도깨비도 도둑을 맞습니까?”
“도깨비니까 더 자주 맞소. 남의 물건을 잘 훔치는 놈들은 자기 물건도 잘 잃어버리는 법이지.”
복만은 마당을 돌아다니며 코를 킁킁거렸다. 검은 손자국이 남은 대문 앞에 멈춘 그는 손가락으로 자국을 문질렀다. 손끝에 검은 재가 묻어났다.
“검은 항아리의 재로군.”
그 이름을 말하는 순간, 대문 바깥에서 무언가가 황급히 달아났다. 복만이 문을 열어젖혔지만 골목에는 검은 개 한 마리만 서 있었다.
개는 입에 무언가를 물고 있었다. 마칠수의 붉은 돈주머니였다.
“저 도둑개가!”
복만이 달려들자 검은 개는 몸을 길게 늘이며 담장을 뛰어넘었다. 순간 달빛 아래 드러난 꼬리는 하나가 아니라 세 개였다. 복만은 도깨비불을 던졌지만 불꽃은 개의 몸을 그대로 통과했다.
검은 개가 사라진 자리에는 마칠수의 돈주머니와 새까만 콩알 하나가 떨어져 있었다.
복만은 콩알을 주워 코앞에 가져갔다. 콩알 안쪽에서 누군가 흐느끼는 소리가 들렸다.
“내 논을 빼앗겼어. 억울해. 분해 죽겠어.”
그것은 마을에서 논을 잃은 김 서방의 목소리였다.
윤서는 자신도 모르게 한 걸음 물러섰다.
“사람 목소리가 콩 안에서 나옵니다.”
“목소리가 아니라 한숨이오. 누군가 이 마을의 한숨을 거둬들이고 있어.”
“당신처럼요?”
“나는 값을 치렀소. 놈은 몰래 훔쳐 간다는 게 다르지.”
복만은 검은 콩을 손바닥으로 으깼다. 그러자 잿빛 연기가 피어올라 김 서방의 집 쪽으로 날아갔다. 멀리서 누군가 크게 한숨을 내쉬는 소리가 들렸다.
바로 그때 골목 끝에서 마칠수가 비틀거리며 나타났다. 돈주머니를 발견한 그는 달려와 품에 끌어안았다.
“내 돈! 이 귀한 내 돈!”
그는 복만의 뿔을 보고도 놀라지 않았다. 오히려 돈주머니를 열어 엽전을 확인하며 싱글벙글 웃었다.
윤서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지난밤에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내 집 창고가 몽땅 털렸소. 열 해 동안 모은 돈이 사라졌지.”
마칠수는 재산을 잃었다면서도 계속 웃었다. 그의 웃음은 너무 크고 밝아 오히려 섬뜩했다.
“그런데 웃음이 나옵니까?”
“웃지 않으면 무엇을 하겠소? 하하하! 집문서도 없어지고 논문서도 없어졌지만, 하하하!”
그는 배를 움켜쥔 채 눈물을 흘렸다. 입에서는 웃음이 터져 나오는데 눈빛은 살려 달라고 애원하고 있었다.
복만은 마칠수의 가슴에 귀를 댔다. 잠시 심장 소리를 듣던 그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이자는 한숨을 전부 빼앗겼소.”
“그게 무슨 뜻입니까?”
“슬픔도 걱정도 분노도 밖으로 내보내지 못한다는 뜻이오. 이대로 두면 웃다가 속이 터져 죽을 거요.”
복만의 말이 끝나자 마칠수는 목을 젖히고 더 크게 웃었다.
“하하하하! 내가 망했소! 아주 깨끗하게 망했어! 하하하하!”
윤서는 그 모습을 보며 가슴이 서늘해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여전히 아무것도 느낄 수 없었다.
그때 마을 곳곳에서 웃음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곡식 창고가 무너진 최 영감도 웃었다. 소가 병든 박 서방도 웃었다. 혼인을 앞둔 딸이 사라진 주모도 길바닥에 주저앉아 웃고 있었다.
모두 울어야 할 얼굴로 미친 듯이 웃고 있었다.
복만은 산 위를 바라보았다. 나무 사이로 검고 둥근 그림자가 떠오르고 있었다. 거대한 항아리의 형상이었다.
“늦었어. 놈이 벌써 배를 채우기 시작했군.”
※ 3: 사라진 한숨들이 검은 항아리에 갇혔다는 사실이 밝혀지고
마을 사람들의 웃음은 밤이 깊어져도 그치지 않았다. 기쁜 일이라도 생긴 것처럼 들렸지만 골목마다 쓰러진 사람들의 얼굴은 창백했다. 누구는 웃다가 숨이 넘어갔고, 누구는 웃는 입을 억지로 막다가 손가락을 깨물었다.
윤서와 복만은 마을 중앙의 우물가로 사람들을 모았다. 복만은 우물 주위에 붉은 팥을 뿌리고 새끼줄을 둘렀다. 그러자 사람들의 웃음이 조금 잦아들었다.
“팥이 도깨비를 쫓는 것 아니었습니까?”
“맞소. 그래서 나도 지금 다리가 후들거리오.”
복만은 새끼줄 밖에 선 채 긴 막대기로 팥을 뿌렸다. 팥알 하나가 발등에 닿자 그는 펄쩍 뛰며 연기를 뿜었다.
“이렇게 약한데 무슨 수로 검은 항아리와 싸웁니까?”
“몸집과 용기는 꼭 비례하지 않소.”
“그 말은 용기가 작다는 뜻입니까?”
“몸집이 크다는 뜻이오.”
윤서는 한숨을 쉬려다 멈췄다. 아무리 숨을 길게 내쉬어도 마음에서 우러나는 기운이 없었다. 복만이 그 모습을 보고 표주박 하나를 내밀었다.
“이걸 귀에 대 보시오.”
표주박 안에서는 바람 소리와 함께 수많은 사람의 목소리가 들렸다. 장사를 망친 걱정, 자식을 잃은 슬픔, 이루지 못한 사랑, 늙어 가는 서러움이 뒤섞여 있었다.
“이걸 전부 당신이 모은 겁니까?”
“지난 백 년 동안 정당한 값을 주고 산 한숨들이오.”
“한숨이 왜 필요합니까?”
복만은 대답을 피하듯 허리춤의 표주박들을 정리했다. 그러나 윤서는 그의 앞을 막아섰다.
“제 한숨을 찾으려면 진실부터 알아야겠습니다.”
“알게 되면 나를 믿지 못할 거요.”
“지금도 믿지는 않습니다.”
복만은 씁쓸하게 웃었다.
“그건 다행이군. 도깨비를 너무 쉽게 믿는 인간은 오래 못 사니까.”
그는 우물가에 걸터앉았다. 멀리서 들려오는 기괴한 웃음소리가 잠시 잦아들자 낮고 무거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도깨비는 사람들의 오래된 물건에서 태어나오. 피 묻은 몽둥이, 백 년 묵은 빗자루, 수많은 손을 거친 놋그릇 같은 것들 말이오. 나도 본래 물건이었소.”
“무슨 물건이었습니까?”
“항아리 뚜껑.”
윤서는 잠시 할 말을 잃었다. 복만은 자존심이 상한 듯 가슴을 폈다.
“평범한 뚜껑은 아니었소. 아주 크고 단단하고 잘생긴 뚜껑이었지.”
“뚜껑이 어떻게 잘생깁니까?”
“당시 항아리들 사이에서 인기가 대단했소.”
복만은 기침으로 목을 가다듬고 이야기를 이어 갔다.
백여 년 전, 산속 폐사당에는 무당 월향이 살고 있었다. 월향은 전쟁으로 가족을 잃은 백성과 굶주림에 지친 이들의 이야기를 들어 주었다. 사람들은 그녀 앞에서 실컷 울고 한숨을 내쉰 뒤 다시 살아갈 힘을 얻었다.
하지만 어느 날부터 월향은 사람들의 한숨을 커다란 검은 항아리에 담기 시작했다. 한숨을 마시면 늙지 않는다는 산신의 말을 믿었기 때문이다.
항아리가 가득 찰수록 사람들은 슬픔을 느끼지 못했고, 걱정을 잃은 이들은 위험을 피하지 않았다. 자식이 아파도 약을 구하지 않았고, 홍수가 나도 제방을 막지 않았다. 결국 마을 하나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뒤늦게 잘못을 깨달은 월향은 항아리를 봉인했다. 그리고 한숨을 조금씩 사람들에게 돌려보내기 위해 뚜껑에 도깨비의 혼을 불어넣었다. 그렇게 태어난 것이 복만이었다.
“그럼 검은 항아리는 당신의 몸과 한 짝이었군요.”
“정확히는 내 엉덩이와 한 짝이었소.”
“굳이 그렇게 표현해야 합니까?”
“뚜껑은 늘 항아리 위에 앉아 있는 물건이니까.”
복만은 민망한 듯 엉덩이에 묻은 눈을 털었다.
“월향이 죽은 뒤에도 나는 한숨을 모았소. 한숨이 너무 무거워 마음이 부서질 것 같은 사람에게서 조금씩 사들였지. 항아리가 깨어나지 않도록 한숨의 기운을 흩어 놓는 것도 내 일이었소.”
“그런데 왜 지금 항아리가 깨어난 겁니까?”
“누군가 봉인을 풀었으니까.”
복만은 마칠수의 돈주머니에서 발견한 검은 실 한 가닥을 꺼냈다. 실에서는 생선 썩은 냄새 같은 악취가 풍겼다.
“이건 원혼의 머리카락이오. 죽은 월향의 것이 분명해.”
“월향은 잘못을 뉘우쳤다면서요?”
“살아 있을 때는 그랬지. 하지만 원혼은 살아 있을 때의 마지막 마음만 기억하오. 월향의 마지막 마음이 무엇이었는지는 나도 모르오.”
윤서는 산 위에 떠오른 검은 항아리의 그림자를 바라보았다. 항아리는 밤안개를 빨아들이며 조금씩 커지고 있었다.
그때 동이가 사람들 틈을 빠져나와 윤서에게 달려왔다.
“어머니, 이상한 누이가 저를 자꾸 불러요.”
“어떤 누이 말이냐?”
“하얀 한복을 입은 누이요. 어머니의 한숨이 어디 있는지 안대요.”
복만이 다급히 동이의 어깨를 붙잡았다.
“그 여자가 어디 있느냐?”
동이는 산 쪽을 가리켰다.
“저기요.”
검은 소나무 아래에 하얀 한복을 입은 여인이 서 있었다. 긴 머리가 얼굴을 덮고 있었고, 손에는 깨진 항아리 조각이 들려 있었다.
여인은 손가락으로 윤서를 가리킨 뒤 산 위로 올라오라는 듯 천천히 손짓했다.
“월향이다.”
복만이 이를 악물었다.
여인은 몸을 돌려 숲속으로 사라졌다. 그 순간 동이의 품에서 검은 콩알들이 우수수 떨어졌다. 콩알마다 윤서의 목소리가 담겨 있었다.
“동이가 아프면 어떻게 하지.”
“내일 먹을 쌀이 없구나.”
“이 집마저 빼앗길까 두렵다.”
윤서가 살아오며 내쉬었던 한숨들이었다.
윤서는 놀라 동이의 소매와 옷깃을 뒤졌다. 검은 콩알은 계속해서 쏟아졌다. 동이도 영문을 모른 채 겁에 질렸다.
“제가 훔친 게 아니에요. 그 누이가 어머니에게 가져다주라고 했어요.”
마지막으로 떨어진 콩알은 다른 것보다 훨씬 컸다. 복만이 그것을 집어 드는 순간, 콩알 표면이 갈라지며 월향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자정까지 뚜껑을 데려오너라. 그러면 이 여자의 한숨을 돌려주겠다.”
메시지가 끝나자 콩알이 터졌다. 검은 연기가 복만의 손목을 휘감더니 뱀처럼 살갗 속으로 파고들었다.
복만은 비명을 참으며 무릎을 꿇었다. 그의 손목에는 항아리 모양의 검은 낙인이 생겨났다.
“이건 봉인 부름이오. 자정이 되면 내 몸은 강제로 항아리 위에 씌워질 거요.”
“그렇게 되면 어떻게 됩니까?”
“검은 항아리가 완전히 깨어나오. 이 마을뿐 아니라 사방 백 리에 사는 사람들의 한숨을 모조리 삼키겠지.”
“한숨이 사라지면 모두 웃으며 살 수 있는 것 아닙니까?”
복만은 웃다가 쓰러진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한숨은 마음에 난 구멍으로 뜨거운 슬픔을 빼내는 숨구멍이오. 그것이 사라지면 슬픔은 없어지는 게 아니라 안에서 썩어 버리지.”
그때 우물가에 쓰러져 있던 마칠수가 벌떡 일어났다. 그는 여전히 웃고 있었지만 손에는 날카로운 낫을 들고 있었다.
“다 없어졌으니 이제 아무것도 두렵지 않아. 하하하!”
마칠수는 낫을 휘두르며 자신의 돈주머니를 찢었다. 엽전들이 바닥에 쏟아졌지만 그는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두렵지 않으니 불을 질러도 되겠지? 전부 태워 버리면 얼마나 재미있을까!”
그는 횃불을 집어 들고 가장 가까운 초가를 향해 달려갔다. 마을 사람들도 하나둘 일어나 위험한 물건을 손에 쥐었다. 두려움도 걱정도 잃은 눈빛이었다.
복만은 손목의 낙인을 누르며 윤서에게 푸른 표주박을 건넸다.
“사람들을 막으시오. 나는 산으로 가겠소.”
“혼자 가면 항아리에게 잡히잖아요.”
“내가 가지 않으면 월향이 아이를 데려갈 거요.”
윤서가 동이를 돌아보자 아이의 발목에 검은 손자국이 선명하게 나타나 있었다. 손자국은 마치 산 쪽에서 아이를 끌어당기듯 조금씩 위로 번지고 있었다.
윤서는 동이를 힘껏 끌어안았다.
“함께 갑시다.”
“당신은 한숨을 잃었소. 두려움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은 용감한 게 아니라 위험한 거요.”
“그래서 함께 가야 합니다. 당신은 겁이 너무 많고, 저는 겁이 없으니 둘을 합치면 적당하지 않겠습니까?”
복만은 황당한 표정으로 윤서를 바라보다가 피식 웃었다.
“목숨을 건 셈법치고는 엉망이군.”
“항아리 뚜껑에게 셈법을 평가받고 싶지는 않습니다.”
두 사람은 동이를 데리고 산길로 향했다. 그들이 숲에 들어서자 나무마다 사람 얼굴 같은 옹이가 나타났다. 옹이들은 입을 벌리고 빼앗긴 한숨을 내쉬었다.
산 정상의 폐사당 앞에는 사람 키의 세 배가 넘는 검은 항아리가 놓여 있었다. 항아리 주변에는 마을에서 사라진 문서와 돈, 패물들이 산처럼 쌓여 있었다.
하얀 한복을 입은 월향이 그 위에 앉아 있었다.
“드디어 내 뚜껑이 돌아왔구나.”
복만이 윤서와 동이 앞을 막아섰다.
“사람들의 한숨부터 돌려줘.”
월향은 검은 머리카락을 걷어 얼굴을 드러냈다. 그런데 그 얼굴은 백 년 전 무당의 것이 아니었다.
낮에 마을을 떠났던 빚쟁이 마칠수의 얼굴이었다.
월향이 그의 얼굴로 환하게 웃었다.
“누가 내가 월향이라고 했지?”
복만의 표정이 굳었다. 항아리 안에서 수백 개의 손이 솟아올라 세 사람을 향해 뻗어 왔다.
“월향은 이 항아리를 봉인한 사람이야.”
검은 손들이 복만의 팔다리를 붙잡았다. 그가 도깨비불을 일으켰지만 손들은 불꽃까지 움켜쥐어 삼켰다.
가짜 월향은 마칠수의 얼굴을 벗어 항아리 속에 던졌다. 그 아래에는 눈도 코도 없는 새까만 얼굴이 숨어 있었다.
“나는 백 년 동안 이 안에 갇혀 있던 한숨 그 자체다.”
항아리 깊은 곳에서 천둥 같은 울음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리고 오늘 밤, 너희 모두의 마음을 비워 주마.”
※ 4: 윤서와 복만은 한숨을 되찾기 위해 폐사당으로 향하고
검은 항아리에서 뻗어 나온 손들이 복만을 허공으로 끌어올렸다. 손목의 낙인이 붉게 달아오르자 그의 몸이 납작하고 둥근 항아리 뚜껑의 형상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복만은 이를 악물며 몸을 비틀었다.
“윤서, 항아리 아래를 보시오! 월향이 남긴 봉인문이 있을 거요!”
윤서는 동이를 뒤로 물리고 항아리 밑으로 몸을 숙였다. 수백 개의 검은 손이 머리카락을 낚아채려 달려들었다. 두려움을 잃은 윤서는 고개조차 움츠리지 않고 항아리 바로 아래로 파고들었다.
“어머니!”
“동이야, 움직이지 말고 눈을 감아라!”
항아리의 바닥에는 붉은 글씨가 둥글게 새겨져 있었다. 오랜 세월이 지나 대부분 지워졌지만 가운데 문장만은 희미하게 남아 있었다.
한숨은 막는 것이 아니라 들어 주는 것이다.
윤서가 그 문장을 읽는 순간 검은 존재가 비명을 질렀다. 항아리 표면에 수많은 사람의 얼굴이 솟아올랐다가 사라졌다.
“읽지 마라!”
검은 손 하나가 윤서의 목을 휘감았다. 숨이 막혔지만 윤서는 봉인문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글자 아래에는 귀 모양의 작은 홈이 파여 있었다.
'한숨을 들어 주어야 봉인이 작동하는 건가?'
윤서는 푸른 표주박을 꺼내 귀 모양의 홈에 끼웠다. 표주박 안에 남아 있던 한숨들이 한꺼번에 쏟아져 나왔다.
자식을 잃은 어머니의 울음과 고향을 그리워하는 노인의 탄식, 배고픈 아이의 흐느낌이 폐사당을 가득 채웠다. 그 소리를 들은 검은 손들이 잠시 힘을 잃었다.
복만은 틈을 놓치지 않고 몸을 회전시켰다. 푸른 도깨비불이 소용돌이치며 손들을 태웠다. 바닥에 떨어진 그는 윤서와 동이를 끌어안고 항아리 뒤편으로 몸을 피했다.
“봉인문이 반응했소. 한숨의 주인들이 자기 소리를 다시 들으면 항아리의 힘이 약해지는 모양이오.”
“그럼 모든 한숨을 꺼내면 되겠군요.”
“항아리 안에는 백 년 동안 쌓인 한숨이 있소. 한꺼번에 열면 사람들의 마음이 견디지 못할 거요.”
검은 존재는 항아리 위에 서서 길게 팔을 뻗었다. 손끝마다 검은 실이 매달려 있었고, 실의 반대편은 산 아래 마을 사람들의 가슴으로 이어져 있었다.
“어째서 돌려주려 하느냐? 걱정도 슬픔도 없는 세상이 무엇이 나쁘지?”
윤서가 목에 감긴 자국을 문지르며 일어났다.
“슬프지 않으면 행복할 수 있을 것 같으냐?”
“적어도 고통스럽지는 않겠지.”
“고통을 모르면 남이 아픈 것도 모르게 된다. 지금 마을 사람들이 서로를 해치려는 것처럼.”
검은 존재의 얼굴에 길고 가느다란 입이 생겨났다.
“너도 한숨을 잃고 편해졌을 텐데.”
“편해진 것이 아니라 동이를 사랑하는 마음까지 흐릿해졌다.”
동이는 윤서의 치맛자락을 꼭 붙들었다. 윤서는 아이의 머리에 손을 얹었다. 가슴에서 애틋함이 느껴지지 않는다는 사실이 무엇보다 서러웠지만, 그 서러움조차 마음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그때 산길 아래에서 횃불 수십 개가 나타났다. 관군을 거느린 현감 조태관이 폐사당으로 올라오고 있었다. 그 뒤에는 웃음을 멈추지 못하는 마칠수가 포승줄에 묶여 따라왔다.
“바로 저것입니다! 제 재산을 훔쳐 간 요물이 저 산에 있습니다! 하하하!”
조태관은 항아리 주변에 쌓인 돈과 문서, 패물을 발견하자 눈빛이 달라졌다.
“과연 요괴가 백성의 재물을 훔쳐 모아 두었구나. 모두 관아에서 보관할 것이니 손대지 마라.”
관군들이 서로 눈치를 보았다. 조태관이 말하는 관아란 곧 그의 개인 창고라는 사실을 모르는 자가 없었다.
복만이 그들 앞을 막아섰다.
“지금은 재물을 탐낼 때가 아니오. 당장 산에서 내려가시오.”
“뿔 달린 요물이 감히 현감에게 명령하느냐!”
조태관은 부적이 붙은 칼을 뽑았다. 복만이 움찔하며 윤서 뒤로 반걸음 물러섰다.
“저 칼은 싫어하오. 쇠 냄새도 나고 글씨도 못생겼소.”
조태관은 항아리를 올려다보았다. 검은 존재는 모습을 감추고 달콤한 목소리만 흘려보냈다.
“원하는 것을 말하라.”
“누구냐?”
“한숨을 가져가는 자다. 근심도 두려움도 없애 주지.”
조태관의 눈에 욕망이 번졌다. 그는 백성 앞에서는 호통을 쳤지만 밤마다 자신의 죄가 드러날까 잠을 이루지 못했다. 창고에 감춘 구휼미와 억울하게 빼앗은 논문서가 꿈속에서도 그를 따라다녔다.
“내 두려움도 가져갈 수 있느냐?”
“물론이다. 대신 항아리 아래의 붉은 글씨를 지워라.”
윤서가 다급히 그의 팔을 붙잡았다.
“안 됩니다. 저것은 한숨을 먹고 사는 괴물입니다.”
조태관은 윤서를 거칠게 밀쳐 냈다.
“천한 아낙이 감히 관의 일을 막느냐!”
그는 칼끝으로 봉인문을 긁기 시작했다. 붉은 글씨 하나가 지워질 때마다 산이 흔들리고 항아리 안에서 웃음과 울음이 동시에 터져 나왔다.
복만이 도깨비불을 던졌지만 부적이 붙은 칼에서 금빛이 솟아 불꽃을 튕겨 냈다. 관군들이 복만을 창으로 에워쌌다.
“한 글자만 더 지워지면 봉인이 풀리오!”
그러나 조태관은 오히려 힘을 주어 마지막 글자를 긁어냈다.
검은 존재가 길게 웃었다.
“거래가 이루어졌다.”
항아리에서 검은 연기가 뿜어져 나와 조태관의 입과 코로 들어갔다. 잠시 몸을 떨던 그는 칼을 떨어뜨리고 환하게 웃었다.
“아무것도 두렵지 않다. 이제 임금도 두렵지 않아!”
조태관은 항아리 주변의 패물을 품에 쓸어 담았다. 부하들이 말리자 그는 망설임 없이 칼을 휘둘렀다.
“모두 내 것이다. 빼앗으려는 자는 죽이겠다!”
봉인문이 사라진 항아리에 거대한 금이 생겼다. 복만의 손목에 찍힌 낙인이 그를 강제로 끌어당겼다.
“안 돼!”
윤서가 복만의 팔을 붙잡았지만 두 사람은 함께 항아리 쪽으로 끌려갔다. 복만의 다리가 다시 푸른 도자기처럼 변했다.
동이는 바닥에 떨어진 부적 칼을 집어 들었다. 작은 손으로 칼을 끌고 온 아이는 복만의 손목에 새겨진 낙인을 향해 칼끝을 내리쳤다.
금빛 불꽃이 튀며 검은 낙인이 반으로 갈라졌다. 복만은 본래 모습으로 돌아왔지만, 칼의 기운에 튕겨 나간 동이가 항아리 바로 앞에 쓰러졌다.
검은 존재가 아이를 내려다보았다.
“두려움이 없는 어미에게 이 아이가 필요할까?”
항아리에서 나온 손이 동이를 붙잡아 안으로 끌어당겼다.
“어머니!”
윤서가 달려들어 동이의 손목을 잡았다. 항아리 속에서는 수많은 목소리가 윤서를 유혹했다.
아이를 놓아라. 그러면 가난도 걱정도 끝난다.
동이를 붙잡은 윤서의 손가락이 하나씩 미끄러졌다. 사랑도 두려움도 잃은 가슴은 아이를 구해야 할 이유를 자꾸 잊으려 했다.
그때 동이가 울먹이며 외쳤다.
“어머니, 무서워요!”
그 한마디가 윤서의 텅 빈 마음을 세게 두드렸다. 아주 깊은 곳에서 작고 뜨거운 통증이 피어났다.
'그래. 나는 이 아이가 우는 것이 싫다.'
윤서는 이를 악물고 동이의 손을 다시 움켜쥐었다.
“어미가 여기 있다. 절대 놓지 않는다!”
복만이 윤서의 허리를 붙잡고 뒤로 당겼다. 세 사람이 가까스로 항아리에서 떨어지는 순간, 조태관이 패물 상자를 들어 올리다 비틀거렸다.
상자의 모서리가 항아리의 금이 간 부분을 세게 내리쳤다.
쩌적.
밤하늘을 찢는 소리와 함께 검은 항아리가 두 동강 났다.
그 안에 갇혀 있던 백 년의 한숨이 거대한 폭풍이 되어 세상 밖으로 터져 나왔다.
※ 5: 검은 항아리가 깨지며 마을 사람들의 슬픔이 폭주하고
검은 폭풍이 폐사당을 집어삼켰다. 수백만 번의 한숨이 눈보라처럼 소용돌이치며 산 아래로 쏟아졌다. 한숨은 주인을 찾아가는 대신 가까이에 있는 사람들의 몸속으로 닥치는 대로 파고들었다.
관군 하나가 죽은 아들을 그리워하는 노인의 한숨을 삼켰다. 그는 창을 내려놓고 보이지도 않는 아이의 이름을 부르며 울었다. 다른 관군은 평생 굶주린 이의 한숨을 들이마시고 흙바닥의 눈을 밥처럼 퍼먹었다.
마칠수는 자신에게 빚진 사람들의 한숨을 한꺼번에 삼켰다. 그의 웃음이 뚝 멎었다.
논을 빼앗긴 농부의 절망과 병든 어머니의 약값을 빼앗긴 딸의 원망, 집을 잃은 아이의 공포가 그의 가슴으로 밀려들었다.
“내가 이런 짓을 했단 말인가?”
마칠수는 가슴을 움켜쥐었다. 눈물과 콧물을 흘리던 그는 빚 문서 더미를 끌어안고 바닥을 굴렀다.
“꺼내 줘! 너무 무거워! 내가 잘못했어!”
조태관에게는 굶주린 백성 수백 명의 한숨이 달라붙었다. 구휼미 한 줌을 받지 못해 죽어 간 사람들의 목소리가 그의 머릿속에서 울렸다.
“현감 나리, 제 아이에게 죽이라도 한 숟갈 주십시오.”
“우리의 곡식을 어디에 감추셨습니까?”
“굶어 죽은 뒤에도 원망할 것입니다.”
조태관은 귀를 막고 사방으로 칼을 휘둘렀다.
“닥쳐라! 내 잘못이 아니다! 흉년 탓이다!”
그러나 한숨은 귀가 아니라 마음에서 들려왔다. 그는 패물과 문서를 내던진 뒤 산 아래로 도망쳤다.
깨진 항아리 위에서는 검은 존재가 몸을 부풀리고 있었다. 한숨이 흩어질수록 그것의 형체도 여러 갈래로 찢어졌다. 얼굴 없는 머리들이 목처럼 길게 늘어나 사람들의 입을 찾아 헤맸다.
복만은 도깨비방망이를 꺼내 바닥을 내리쳤다. 푸른 불꽃으로 된 둥근 울타리가 윤서와 동이를 감쌌다.
“내 불이 오래 버티지 못하오. 한숨을 각자의 주인에게 돌려보내야 하오!”
“어떻게 주인을 찾습니까?”
“한숨마다 사연은 남아 있지만 이름은 없소. 하나씩 들어 보고 찾아 주기에는 백 년이 걸릴 거요.”
윤서는 깨진 항아리 바닥에서 빛나는 귀 모양의 홈을 발견했다. 폭풍 속에서도 월향의 봉인문 일부가 남아 있었다.
한숨은 막는 것이 아니라 들어 주는 것이다.
윤서는 푸른 표주박을 홈에 다시 끼웠다. 그러나 표주박은 이미 가득 차 금방이라도 터질 듯 부풀었다.
“이 안에 한숨을 모두 담을 수는 없습니까?”
“표주박이 먼저 깨질 거요. 담는다고 해도 검은 존재가 다시 빼앗을 테고.”
검은 존재가 울타리 바깥에서 얼굴을 들이밀었다.
“인간은 누구도 남의 슬픔을 끝까지 듣지 못한다. 잠시 고개를 끄덕이다가 결국 지겨워하지. 그래서 내가 대신 삼켜 준 것이다.”
윤서는 그것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삼킨 것이 아니라 가둔 것이겠지.”
“무엇이 다르지?”
“들어 준다는 것은 그 사람이 다시 말할 수 있게 기다리는 것이다. 너는 입을 막고 마음을 비웠다.”
검은 존재는 수십 개의 입을 벌렸다. 그 안에서는 한숨을 빼앗긴 이들의 웃음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렇다면 네가 모두 들어 보아라.”
한숨 폭풍이 방향을 바꾸어 윤서에게 쇄도했다. 복만이 앞을 가로막았지만 윤서는 그의 어깨를 붙잡아 옆으로 밀었다.
“피하시오! 저걸 전부 받으면 마음이 갈기갈기 찢어질 거요!”
“제 한숨이 없으니 빈자리가 많습니다.”
“그런 농담을 할 때가 아니오!”
“누군가는 들어야 한다면서요.”
윤서는 동이 앞에 무릎을 꿇고 아이의 두 손을 감싸 쥐었다.
“동이야, 어미가 무슨 말을 하더라도 놀라지 말아라. 다른 사람들의 슬픔이 잠시 어미의 입을 빌리는 것뿐이다.”
“싫어요. 어머니까지 잃을까 봐 무서워요.”
윤서의 가슴 한쪽이 다시 따끔거렸다. 아이의 두려움을 듣자 잃어버렸던 마음이 아주 조금 돌아오는 듯했다.
“무서우면 울어도 된다. 한숨을 쉬어도 되고, 도망가고 싶다고 말해도 된다.”
“그러면 어머니가 저를 싫어하지 않아요?”
“마음을 말한다고 미워하는 사람이라면 곁에 둘 필요도 없다.”
복만이 두 사람을 보다가 자신의 허리춤에 매달린 표주박을 전부 풀었다. 그는 표주박들을 윤서 주위에 둥글게 놓고 도깨비방망이로 하나씩 두드렸다.
맑은 종소리가 울리며 표주박들이 푸른빛을 냈다.
“당신 혼자 듣게 하지는 않겠소. 내가 절반을 맡지.”
“도깨비도 마음이 찢어집니까?”
“원래 항아리 뚜껑이니 깨지는 쪽에 더 가깝소.”
복만은 억지로 웃었지만 손이 떨리고 있었다.
윤서는 푸른 울타리 밖으로 나갔다. 검은 존재가 기뻐하며 그녀를 감쌌다. 차가운 한숨들이 눈과 귀와 입을 통해 밀려들었다.
순간 윤서는 수백 명의 삶을 동시에 살았다.
전쟁터에서 돌아오지 않는 남편을 기다렸고, 굶는 자식에게 자신의 밥을 내주었다. 억울한 누명을 쓰고 곤장을 맞았으며, 사랑하는 이를 묻고 홀로 집으로 돌아왔다. 이름조차 남기지 못한 이들의 슬픔이 가슴을 가득 채웠다.
윤서는 비명을 지르는 대신 그들의 말을 입 밖으로 꺼냈다.
“많이 기다렸구나.”
다른 목소리가 이어졌다.
“억울했구나.”
또 다른 한숨이 들어왔다.
“혼자 견디느라 무서웠겠구나.”
윤서가 한마디씩 대답할 때마다 검은 폭풍에서 작은 빛이 떨어져 나왔다. 빛은 산 아래로 날아가 각자의 주인에게 스며들었다.
검은 존재가 당황해 윤서의 입을 막으려 했다. 복만이 방망이를 휘둘러 그것의 팔을 부러뜨렸다.
“한숨은 혼자일 때만 괴물이 되는 법이다!”
표주박들도 사람들의 목소리를 받아 울렸다. 복만의 몸에는 슬픔이 밀려들 때마다 금이 생겼다. 뿔 하나가 부러지고 도포가 갈기갈기 찢어졌지만 그는 방망이를 놓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거대한 한숨 하나가 윤서 앞에 나타났다. 다른 한숨과 달리 그것은 붉고 뜨거웠다. 그 안에서는 월향의 목소리가 들렸다.
“내가 사람들을 살리겠다며 그들의 마음을 빼앗았다. 잘못을 깨달았지만 이미 너무 늦었다.”
월향은 죽기 직전 자신의 죄책감과 후회를 항아리 속에 가두었다. 그 후회가 백 년 동안 다른 한숨을 먹으며 검은 존재로 자라난 것이었다.
윤서는 붉은 한숨을 품에 안았다.
“늦었어도 잘못을 돌이키려 했구나. 네가 남긴 봉인문이 우리를 여기까지 이끌었다.”
검은 존재가 날카롭게 비명을 질렀다.
“용서하지 마라! 미워해라! 그래야 내가 살아남는다!”
윤서는 고개를 저었다.
“용서가 잘못을 없애 주는 것은 아니다. 다만 잘못을 바로잡을 기회를 주는 것이다.”
붉은 한숨이 따뜻한 빛으로 변해 검은 존재의 가슴을 꿰뚫었다. 거대한 몸이 무너지며 수많은 작은 한숨으로 흩어졌다.
하지만 윤서의 몸도 한계에 다다랐다. 남의 슬픔으로 가득 찬 가슴은 숨을 들이마시는 것조차 허락하지 않았다.
윤서는 무릎을 꿇었다. 입술이 파랗게 변했다.
“어머니!”
동이가 윤서를 붙잡았지만 그녀는 대답하지 못했다. 이제 마지막 한숨 하나만 남아 있었다.
복만이 도깨비불로 그것을 비추었다. 작고 푸른 한숨 속에서 윤서 자신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나도 누군가에게 기대고 싶다.”
윤서가 평생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한 가장 깊은 마음이었다.
그러나 그 한숨을 받아들일 자리는 이미 남아 있지 않았다. 복만이 손을 뻗자 푸른 한숨은 그를 피해 윤서의 머리 위를 맴돌았다.
“본인의 한숨은 본인이 받아들여야 하오.”
“어머니, 어서 가져가세요!”
윤서는 힘겹게 고개를 저었다.
'저것까지 받아들이면 내 마음이 완전히 부서질 것이다.'
그때 동이가 윤서의 등을 작은 손으로 토닥였다.
“제가 들을게요. 어머니가 힘들었다고 말해 주세요.”
윤서의 눈에서 처음으로 눈물 한 방울이 흘러내렸다.
※ 6: 한숨의 진짜 의미가 밝혀지고
동이는 윤서의 등을 쉬지 않고 토닥였다. 서툴고 작은 손길이었지만 윤서에게는 그 어떤 약보다 따뜻했다.
“어머니도 힘들면 저에게 기대세요. 제가 아직 작아서 조금밖에 못 들어도, 매일 조금씩 들을게요.”
윤서는 아이를 바라보았다. 빚쟁이가 찾아왔을 때도, 먹일 쌀이 떨어졌을 때도, 아이가 아파 밤새 열이 올랐을 때도 윤서는 괜찮다는 말만 되풀이했다.
어머니이니 약한 모습을 보여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자신이 무너지면 아이까지 무너질 것 같아 울음도 한숨도 몰래 삼켰다.
하지만 동이는 윤서가 감춘 슬픔까지 이미 알고 있었다.
“사실은 많이 무서웠다.”
윤서의 입에서 떨리는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네가 아플 때마다 지켜 주지 못할까 무서웠고, 이 집을 빼앗길까 두려웠다. 혼자 모든 것을 견디는 것도 지쳤다.”
동이의 눈에도 눈물이 맺혔다.
“그런데 왜 아무 말도 안 했어요?”
“어미는 늘 강해야 하는 줄 알았단다.”
“저는 강한 어머니보다 오래오래 곁에 있는 어머니가 좋아요.”
마지막 푸른 한숨이 천천히 윤서의 가슴으로 스며들었다. 가득 차 있던 남들의 슬픔이 눈물과 함께 밖으로 흘러나왔다.
윤서는 동이를 끌어안고 오래 울었다. 울음 사이로 깊은 한숨이 터져 나왔다.
후우우.
그 한숨은 차갑지도 무겁지도 않았다. 겨울이 끝난 뒤 처마에서 떨어지는 첫 물방울처럼 맑았다.
윤서에게 들어왔던 수많은 한숨이 작은 빛으로 변해 사방으로 날아갔다. 빛은 마을 사람들의 가슴으로 돌아가 잃었던 감정을 되살렸다.
마칠수는 자신이 빼앗은 빚 문서 앞에 주저앉았다. 그는 문서를 한 장씩 찢으며 흐느꼈다.
“돈을 잃는 것이 두려워 사람을 잃었구나.”
조태관은 산길을 내려가다가 자신이 감춰 둔 구휼미 창고 앞에서 멈췄다. 굶주린 백성들의 한숨이 돌아오자 두려움과 죄책감이 한꺼번에 밀려왔다.
그는 도망치려 했지만 뒤따라온 관군들이 앞을 막았다. 한숨을 되찾은 관군들의 눈에도 분노와 부끄러움이 돌아와 있었다.
“나리께서 감춘 곡식을 모두 보았습니다.”
“관찰사께 사실대로 아뢰겠습니다.”
조태관은 무릎을 꿇고 살려 달라고 빌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그의 명령을 따르는 사람이 없었다.
산 정상에서는 검은 항아리의 조각들이 재처럼 부서졌다. 재 사이에서 희미한 여인의 형상이 나타났다. 진짜 월향의 혼이었다.
월향은 윤서에게 깊이 고개를 숙였다.
“나는 사람들의 고통을 없애 주는 것이 구원이라 믿었습니다.”
“고통을 없애는 것과 사람의 마음을 빼앗는 것은 다릅니다.”
“이제야 그 차이를 알겠습니다.”
월향은 복만을 바라보았다. 온몸에 금이 간 복만은 부러진 뿔을 주워 머리에 얹어 보려 애쓰고 있었다. 뿔은 자꾸만 옆으로 굴러떨어졌다.
“백 년 동안 내 잘못을 막아 주었구나.”
“알았으면 품삯이나 주시오. 밀린 것까지 백 년 치요.”
월향이 손을 들어 복만의 머리에 닿자 따뜻한 빛이 퍼졌다. 몸의 금이 메워지고 부러진 뿔이 제자리로 돌아왔다. 누더기 도포도 푸른 비단옷으로 바뀌었다.
복만은 반짝이는 소매를 펼쳐 보며 흡족하게 웃었다.
“품삯치고는 나쁘지 않군.”
하지만 그의 발끝부터 서서히 투명해지고 있었다. 검은 항아리가 사라지면서 뚜껑에서 태어난 복만도 함께 소멸하는 것이었다.
동이가 복만의 옷자락을 붙잡았다.
“아저씨도 사라져요?”
“아저씨라니. 아직 백스물세 살밖에 안 됐소.”
“그러니까 사라지는 거예요?”
복만은 대답하지 못했다. 윤서가 그의 투명해진 손을 잡았다.
“당신은 더 이상 항아리 뚜껑이 아닙니다.”
“태어난 물건이 사라졌으니 나도 갈 때가 된 모양이오.”
“당신에게는 아직 받을 한숨이 남았습니다.”
윤서는 복만이 건넸던 엽전 한 닢을 꺼내 그의 손바닥에 올려놓았다.
“제 한숨을 샀으면서 끝까지 듣지 않고 가면 거래를 어긴 것이지요.”
복만의 눈이 커졌다.
윤서는 동이와 함께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 한숨에는 가난했던 날의 서러움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서로를 지키겠다는 약속과 복만이 사라지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도 담겨 있었다.
따뜻한 한숨이 복만을 감싸자 투명해지던 몸이 다시 선명해졌다. 푸른 도포는 사라졌지만 익숙한 누더기 옷과 작은 표주박들이 돌아왔다.
월향이 미소를 지었다.
“물건의 기억으로 태어난 도깨비가 사람의 기억으로 다시 태어났군요.”
달빛 속에서 월향의 혼은 작은 빛으로 흩어졌다. 빛은 산에 쌓인 눈 위로 내려앉아 하얀 매화로 피어났다.
겨울이 지나자 마을은 크게 달라졌다.
조태관은 구휼미를 빼돌린 죄와 백성의 재산을 빼앗은 죄로 파직되었다. 창고에서 나온 곡식은 굶주린 집마다 공평하게 나누어졌다.
마칠수는 빚 문서를 모두 불태우지는 못했다. 복만이 남의 빚을 전부 없애면 장사꾼도 굶는다고 말렸기 때문이다. 대신 터무니없는 이자를 지우고 빼앗은 논과 집을 돌려주었다.
“내가 언제 다시 욕심을 부릴지 모르니 잘 지켜보시오.”
마칠수가 말하자 복만은 그의 어깨에 표주박 하나를 매달아 주었다.
“욕심이 생길 때마다 여기에 대고 한숨을 쉬시오. 가득 차면 내가 와서 머리를 한 대 때려 주겠소.”
마칠수는 표주박을 소중히 안고 다니다가도 복만과 눈이 마주치면 머리를 감쌌다.
윤서는 마을 어귀에 작은 주막을 열었다. 주막의 이름은 한숨 쉬어 가는 집이었다. 돈이 없는 사람도 따뜻한 숭늉 한 사발을 마실 수 있었고,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는 사람은 누구든 아궁이 앞에 앉을 수 있었다.
누군가 이야기를 시작하면 윤서는 일을 멈추고 끝까지 들어 주었다.
“그랬군요. 많이 힘드셨겠습니다.”
그 한마디를 들은 사람들은 눈물을 닦거나 긴 한숨을 내쉰 뒤 조금 가벼워진 얼굴로 돌아갔다.
복만은 주막 뒤편 느티나무에 자리를 잡았다. 그는 한숨을 돈 주고 사는 일을 그만두었다고 주장했지만, 맛 좋은 한숨이 들리면 지붕 위에서 몰래 코를 벌름거렸다.
어느 봄밤, 윤서가 장사를 마치고 마당에 앉아 쉬고 있었다. 동이는 배불리 저녁을 먹은 뒤 방 안에서 잠들어 있었다.
복만이 지붕 위에서 거꾸로 얼굴을 내밀었다.
“오늘 한숨은 무슨 맛이오?”
윤서는 별이 가득한 하늘을 바라보며 길게 숨을 내쉬었다.
“일을 많이 해서 고단한 맛입니다. 그래도 동이가 건강하게 자랐고 빚 걱정도 없으니 끝맛은 달겠군요.”
“그럼 반 냥에 삽시다.”
“이제 한숨을 사지 않는다면서요?”
“장사가 아니라 맛만 보는 거요.”
“맛을 보았으면 값을 치러야지요.”
복만은 투덜거리며 엽전 한 닢을 던졌다. 윤서는 그것을 가볍게 받아 다시 복만에게 던져 주었다.
“오늘은 돈 대신 당신 한숨을 들려주세요.”
복만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도깨비에게 무슨 한숨이 있겠소?”
윤서가 말없이 바라보자 복만은 지붕 위에 바로 앉았다. 한동안 발끝만 흔들던 그는 아주 작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사실은 항아리가 깨졌을 때 무서웠소. 사라지고 싶지 않았거든.”
“그랬군요.”
“그리고 가끔은 또 혼자가 될까 봐 걱정되오.”
“그렇군요. 많이 외로웠겠습니다.”
복만은 코를 훌쩍이더니 일부러 큰 소리로 한숨을 내쉬었다.
후우우.
그의 한숨에서 파란 도깨비불 하나가 태어났다. 불빛은 마당을 둥글게 돌다가 느티나무 가지에 내려앉았다.
윤서의 한숨에서도 작은 불빛이 피어났다. 두 불빛은 나란히 밤하늘로 올라가 별들 사이에 섞였다.
그날부터 마을에서는 이런 말이 전해졌다.
깊은 밤, 가슴이 너무 무거워 견딜 수 없을 때는 한숨을 참지 말고 길게 내쉬라고. 운이 좋으면 한숨소리를 듣고 찾아온 도깨비가 지붕 위에 앉아 끝까지 이야기를 들어 줄 것이라고.
다만 한숨값을 너무 많이 요구하면 조심해야 했다.
그 도깨비는 셈법에는 약했지만 흥정만큼은 누구보다 끈질겼으니까.
유튜브 엔딩멘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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